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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주보기] 막연한 기다림 - 김유석

김유석(시인)

햇쑥 냄새 같은 게 난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그냥 흙내라고 해야겠다. 누렇게 말린 애보리 눈빛에 찔끔거리던 빗물을 매몰차게 닦아내는 바람 속을 걷는 나절가웃, 어디선가 쏘여 오는 새물내가 연신 가슴을 훔치고 있었다. 얼핏 송사리 떼 같으나 도랑 물 웅덩엔 알록거리는 햇살뿐이고 눈이 밝은 실버들도 아직은 기별을 좀 더 미뤄야 될 성 싶은데, 한참을 따라서 제법 슬거운 기운이 끼는 들길이고 보면 그래, 봄이라 하자.

 

봄이 상징하는 수많은 수식어들, 이를테면 희망, 소생, 시작 등등의 어휘들에 <기다림> 이란 낱말을 잇대어보며 들판을 나선다. 흔히 쓰고 듣는 <봄을 기다린다> 라는 말 속의 <기다림> 이 무엇을 가름하는 것인지 곰곰 끌어가는 걸음이 자꾸 비끗거린다. 여태껏 <기다림> 의 어감을 상황의 지속보다는 종료에 이름으로 풀었거나 어떤 보람이나 성취감 같은 것을 미루어 짐작할 때 빗대어 쓰곤 하던 이 말을 새삼 중얼중얼 되새김질 하게 된 것은, 그러니까 지난겨울부터의 일이었다.

 

들판의 한해살이는 얼추 3월에 시작하여 10월이면 마무리 된다. 축산을 한다든지 시설원예를 하는 농가의 경우는 사철 일손을 당겨 써야 하지만 벼농사를 일반으로 하는 농투성이들은 보리갈이를 끝낸 후부터 긴 휴식에 들어간다. 정확이 말하자면 휴식이라기보다 그냥 <논다> 라고 얘기해야 할 시간들이 너댓 달 가량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무위도식을 하는 것만은 아니다. 생산한 벼를 시장에 내다팔아야 하고 틈틈이 영농교육에도 발품을 팔아야 한다. 갈수록 수상해지는 세월도 걱정이지만 당장은 가격하락으로 눈에 띄게 줄어든 소득을 보태기 위해 먼 공사판 까지 날품을 팔러 다니는 몇몇 바지런한 이들도 있다. 그러나 나머지는 겨울 내내 지루한 시간과의 몸싸움에 시달려야 한다.

 

어귀에 참새처럼 웅크린 채 한숨을 내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하고 많은 날 주유소나 마을 점방 후미진 방구석에 몰려 화투장을 두드리며 죽이는 시간들이 여전한 겨울나기의 모습인 것이다.

 

아낙네들의 겨우살이도 크게 다르진 않다. 아직 <누구네 엄마> 라 불리는 비교적 젊은 소수의 부녀자들은 아이들 치닥거리에 그나마 무료함을 덜 타지만 <댁네> 호칭이 붙는 연배의 아줌마에 이르면 남정네들과 별 다름이 없어진다. 그리하여 자치단체에서는 풍물, 수영, 노래, 스포츠댄스 등의 프로그램을 짜서 농촌의 삶들도 나름의 취미를 붙일 수 있 도록 점차 관심을 기울려 나가는 듯싶기는 하다. 그러나 <노래방계> 가 새로 생겨날 정도로 가요프로그램만이 호응을 보일 뿐 여타의 과목은 영 별무신통인 실정이다.

 

<어서 봄이나 왔으면 쓰것다> . 누차에 푸념처럼 걸쳐 들은 말이었다. 담배값이나 잃고서 자리를 털던 누군가의 겉말 같은 거였는데 한구석에 뒹구는 소주병만큼이나 뒤끝이 씁쓸했다. 어떤 바람이 느껴지기는커녕 그저 공허하고 지루하게만 들렸다. 며칠 동안의 노 동 후에 주어지는 하루 이틀의 휴식이 아니라 나날이 빈둥거리며 기약 없는 세월을 기다 리는 것, 노는 것도 일인데 삼동을 소주와 담배연기에 찌들며 품삯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초입의 들판에서 풍기는 이 거름내 같은 건 일철을 맞아 가분한 사람의 냄새인 것이다.

 

/김유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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