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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땅과 만나다

들녘이 질박한 황금빛이다. 또 몇몇은 이미 산물을 내주고 겸손하게 비어있다. '땅'을 기억하자면 어릴 적 집 마당이나 골목길에서 흙버무리가 되어 해가는 줄 모르고 놀던 것, 대학에서 농촌활동하며 처음 맞닥뜨린 논, 모자란 일꾼인 채 노동의 강도에 쩔쩔맸던 기억 정도다. 그러나 김제 및 박물관과 인연이 시작되면서 '땅과 땅을 부치고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궁극의 과제가 되어 내 행보를 전방위적으로 둘러싸고 있다.

 

박물관의 주제인 사적 제111호 벽골제와 농경문화는 워낙이 이 땅 '징게맹갱(김제만경)'과 한통속이다. 또한 우리 박물관 기획전시실에 진행 중인 특별전 '만들어 온 땅과 삶'(국립민속박물관·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전라북도예술인연합회 공동주관)의 주제 또한 간척지 이야기로 호남평야의 연장선상에서 김제시 광활면을 다루고 있다.

 

1920년부터 7년간 일본 동진농업주식회사가 벌인 간척사업으로 총길이 약10km의 방조제가 조성돼 간척면적 총 1,800정보에 달하는 땅이 만들어졌다. 동원된 사람들은 맨손과 지게로 흙과 돌을 날라 방조제를 쌓았고, 수년에 거쳐 갯벌에 물을 넣었다 빼는 것을 반복하여 염기를 없애고 생산 가능한 땅으로 만들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이 거대한 역사만큼 땅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

 

도대체 땅이 무엇이관대 천형과 같은 노동을 견디었을까. 이 질문엔 단답이 가능하다. 생존을 위한 생산처. 그러나 땅에는 그에 더해 많은 복잡한 이야기들이 보장되어 있다. 사적 벽골제단지 내 아리랑문학관의 주제인 소설 「아리랑」 5권에서 땅에 대한 축적된 관념의 일단을 찾아보자.

 

"10년이 가고 20년이 가도 땅언 끝꺼정 찾어야 써. 그 땅언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것이고 자손 대대로 물려줘야 할 것잉게."(p62)

 

역둔토조사로 땅을 뺏기고 되찾기 위해 싸우다 죽어가면서 주인공 박병진이 자식과 동료들에게 남기는 유언이다. 이 대목에서 땅은 재산적 가치나 생존처를 뛰어넘는 묵은 가치를 드러낸다.

 

여기서 땅은 조상이 태를 묻고 내 태가 묻히고 자손들의 태가 자자손손 묻힐 거목의 뿌리이자, 생존과 삶의 온갖 유의미가 엉클어져 그 땅의 주인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화 된 땅이다. 땅은 조상, 태, 본향, 뿌리, 고향, 근본적인 무엇, 쉬이 자본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가치의 집합체로 삶과 생산이 영겁을 두고 순환하는 무대이다.

 

이런 전통적 관념의 땅의 의미는 땅에 대한 작금의 세태와 동떨어져 보인다. 한 평에 얼마, 서류와 날인 속에 자본으로 환원되는 물건으로서의 땅, 어디에서도 저 풍요로운 땅의 가치를 만날 수 없다. 그러나 그냥 잊어버리고 살아도 되는 것일까. 수천년 대다수 농자의 아들 딸, 묵은 조상의 관념은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이기도 하다.

 

이 글로벌 배금주의의 시대에 역행하는 발언이지만 삶의 어느 날 이 땅의 의미와 가치를 꼭 만나보시길 바란다. 그 땅을 만나러 지금 박물관에 오시면 더더욱 좋다. 많은 사람들과 이 가치를 공유할 그날까지 박물관에서는 허구헌 날 장타령을 불러댈 터이다.

 

/정윤숙(김제시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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