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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성공기업인] ⑨장순덕 베이비스튜디오 대표

80년대부터 사진관 브랜드화 앞장…스튜디오 개념 도입 과감한 투자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장순덕 베이비스튜디오 대표. (desk@jjan.kr)

"사진업계의 흐름을 읽고 재빨리 적응한 점이 가장 주효했습니다. 저는 사진 찍기를 취미로 삼았고, 적성에 맞아 식지 않는 열정으로 업계에서 앞서 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관 운영을 사업이라고 하기보다는 천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사진관의 브랜드화·명품화에 성공한 베이비스튜디오 장순덕 대표(51·전주시 경원동)는 사진관에 스튜디오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과감한 투자와 고급 인력 확보를 통해 '고품질 사진' 붐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전주·익산·군산·대전에 위치한 베이비스튜디오는 직접 경영에 참여했고, 전국에 유사상표를 포함해 기술 이전과 노하우 전수를 받은 사진관이 무려 30여곳에 달한다. 정 대표는 "동종업계이고 상권이 겹치지 않는 만큼 민사소송이나 로열티는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도내 각지에서 단골 찾아와

 

그는 주로 아기·가족·인물 사진을 촬영한다. 인물사진은 보통 여권 70%, 이력서 20% 정도다. 최근 선거철에 접어들면서 입·후보자들의 프로필 사진으로 분주하다. 정 대표는 "딱히 밝힐 수는 없지만 웬만한 도내 정치인은 우리 사진관을 거쳐갔다"고 귀띔했다.

 

27년 동안 사진을 찍다보니 시대의 변화도 몸소 체험하고 있다.

 

"저출산·난임 등의 영향으로 아이 사진은 적어지고 있습니다. 핵가족화, 한부모 가정이 늘어나면서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유대가 약해진 듯 가족 사진도 덜한 편이지요. 게다가 디지털 카메라가 보편화되면서 사진에 대한 추억이나 가치가 약해졌습니다. 현재 사진관은 50% 이상이 문을 닫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고창·무주·진안·장수 등에서 경원동 스튜디오까지 찾아오는 단골이 있을 정도로 베이비스튜디오는 대표적인 사진관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지난 2008년부터는 인물 사진 중 20대의 이력서 사진이 아닌 해외여행·조기유학을 위한 여권 사진이 부쩍 많아져 부의 양극화도 느낀다"면서 "가족사진을 찍을 때는 가족 간 역학 관계나 화목(和睦)의 정도 등이 엿보인다"고 설명했다.

 

▲'19분 완성' 도입 소비자 호응 얻어

 

정 대표는 지난 1983년 익산에서 사진관을 시작했다. 당시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단계였다.

 

"중학교 때부터 사진 찍히는 걸 좋아했어요. 대학 때는 아마추어 모델로도 활동했죠. 그러다 인화 작업이 궁금해졌습니다. 당시 컴퓨터가 도입되기 시작했죠. 사진 찍는 법을 배우고 싶어서 언니가 하던 사진관을 오가며 기술을 공부했습니다. 졸업 뒤 교직 발령을 앞두고 있었는데, '하고 싶은 일을 해야 겠다'는 신념으로 사진관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당시 최신 기계 설비와 기술진을 확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20대 젊은 감각으로 시장의 흐름을 파악하고 적응해 과감한 시설 투자와 고급 인력 확보 등으로 품질을 차별화했다. '45분 완성'을 내걸며 언니가 운영하던 사진관과 선의의 경쟁을 하기도 했다. 이후 장비를 교체, '19분 완성'을 도입해 시장을 선점하고 30명의 직원과 함께 가족 전문 사진관, 인화 도매 사진관 등을 운영하며, 소비자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저는 명품화를 선언하고 상위 3%의 시장을 잡겠다는 전략으로 다른 사진관과 가격 경쟁은 피했어요.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가족 계획 표어가 유행했는데 소득 수준이 오르는 만큼 자녀에 대한 투자가 증가하잖아요. 아기에게 여러 의상을 차려 입히고 앨범을 제작하는 등 세트화를 도입해 그야말로 대유행을 끌었죠."

 

그는 당시 결혼 사진에서도 차별화 전략을 도입, 노출을 많이 줘 명암을 살림으로써 인물을 좀더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기법을 사용했고, 종이가 아닌 캔버스(천) 사진을 판매하기도 했다.

 

"사진은 빛의 예술인 만큼 조명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희가 쓰는 조명시설은 1억이 넘습니다."

 

80년대 중반부터 그의 사진관은 수도권 등 전국에 유명세를 탔다. 전국에서 벤처마킹을 했고 노하우를 전수받기 위해 찾아왔다. 혹자는 고가의 장비를 구경하러 오기도 했다.

 

"아이디어는 시대와 맞아 떨어져야 합니다. 소비 패턴이 갈수록 브랜드를 선호하는 만큼 지난 1990년대에는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신문·TV·버스·택시 등에 엄청난 광고비를 쏟아 부었죠. 개점 뒤 15년 동안은 하루도 사진관 문을 닫지 않았어요. 주위에서 미쳤다고 할 정도였죠."

 

▲장애인 목욕 등 봉사활동도 활발

 

성장가도를 달리던 그에게 지난 1995년 갑작스러운 불행이 찾아왔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대전까지 사업을 확장한 당시 부부는 베이비스튜디오 브랜드를 앞세워 서울, 더 나아가서 중국까지 진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후 장 대표는 사업 확장 계획을 접었다. 남편의 부재 속에도 사업은 계속 호황세를 이어갔고 장애인 목욕봉사, 소년소녀가장 후원, 결식학생 급식 제공, 홀로노인 돌보기 등 활발한 봉사활동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료했다.

 

"개인의 기록인 사진은 인물의 가장 예쁘고 돋보이는 모습을 찍어야 하는 만큼 상대방의 미소를 끌어 내기 위해 제가 먼저 웃어야 합니다. 아기를 찍을 때는 아기와 같이 구르며 동화하고 행복한 가족이 들어오면 그들의 가족 사랑을 담아주고 싶습니다. 제 마음이 먼저 애정으로 가득차야 하는 만큼 행복한 사진사가 목표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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