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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에서] 묵은 책을 열어 보며 - 문효치

문효치(시인·계간 미네르바 발행인)

 

직장을 일찌감치 명퇴하고 내 나름의 하고 싶은 일을 해 보고자 계획을 세워 실천하고 있는데 그 일이 또한 만만치않게 나를 바쁘게 하고 있다. 어쩌다 약속이 취소되는 일이라도 있으면 그것이 그렇게 생광스럽고 반갑다. 이 빈 시간을 어떻게 쓸까 생각하며 작은 기쁨을 누린다.

 

오월은 특히 행사가 많아 다른 계절보다 바쁜 때인데 오늘은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을 얻게 되었다. 이 비어있는 시간, 하얗게 해가 떠 있고 따스한 바람도 살갗을 스치고 있음을 느껴 볼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막상 이런 시간이 주어지면 이것을 어떻게 사용할지 당황스러워진다.

 

작은 서재가 있는 진접으로 갔다.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빼꼭히 꽂혀있는 책들 앞에 섰다.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책들, 그 이름을 하나하나 훑어 내려가다가『고가연구』에 눈이 멈췄다. 대학시절의 은사 양주동 선생님의 저서다. 단기 4276년 출판된 것을 4287년에 재판으로 찍은 책이다. 재판연도를 서기로 하면 1944년, 그러니까 66년 전 내가 태어난 1년 후에 만든 책이다. 천으로 싼 표지엔 얼룩이 있고 책종이도 누렇게 바랬다.

 

내용을 읽었다. 신라 향가를 해석한 국문학의 보고다. 깊은 전문성, 활달한 문체, 해박한 지식 등 읽는 이를 감격케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렇게 많은 지식과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 나는 이 책에서 또 다른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그것은 '추억'이다. 나는 이 책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40여 년 전 대학시절의 추억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이 책은 그때 우리의 교과서였었다. 당시 양주동 교수는 천재요 인간국보로 통했다. 강의는 대개 웃음바다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분은 유머가 풍부했다. 칠판에 올망졸망한 산봉우리 서너개와 맨 끝에 높은 봉우리를 그리고는 '이건 이희승봉우리, 이건 이숭녕봉우리, 이건 정인승봉우리'이렇게 작은 봉우리를 짚다가는 가장 큰 봉우리에 분필을 갖다 대면서 '이건 양주동봉우리이' 라며 눈을 크게 뜨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우리는 깔깔대며 웃으면서도 학문에 대한 그분의 자신감과 높은 긍지를 느낄 수 있었으며 이 어른의 제자 됨을 무척 행복하게 생각했었다.

 

그 강의실 풍경 속에는 소중한 친구들이 들어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조정래는 그때도 소설을 쓴다고 카드에 메모를 하면서 습작을 했고 강희근, 홍신선 등 친구들은 시공부 한다면서 큰 시인들을 찾아가 지도를 받기도 했다.

 

그때는 매우 가난하게 살던 시대였다. 웬만해선 대학에 진학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서로의 정이나 따뜻한 인간미는 오히려 그때가 더 훈훈했었다. 내 책 『고가연구』는 사실 내가 산 것은 아니다. 내 일년 선배가 쓰던 것을 물려받은 것이다. 이 선배도 새 책을 산 것이 아니다. 이 책의 맨 뒷장 여백에 보면 지방의 'C대학 국문과 국아무개用' 이라는 서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필시 물려받은 책이었을 것이다. '감격된 4288.6.6'이라는 문구가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정해문'이라는 친구의 이름이 써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와의 대화가 이 책을 사이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펼치고 오랜 세월을 거슬러올라가 내 청년 시절을 만날 수 있었다. 기억의 밑창에 가라앉아 있어서 잊고 살던 소중한 것들을 다시 끄집어내어 내 삶의 향기와 따스함을 맛보고, 부드럽고 온기가 감도는 가슴으로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책들은 나름대로 여러 가지 사연이 서려있다. 책은 그 속에 있는 지식이나 지혜는 물론이지만 그 내용외적인 추억까지도 잘 간직하고 있다. 책을 가지게 될 때의 기쁨, 독서과정의 감동, 책과 내가 함께 산 세월동안의 내력 등은 매우 소중한 경험들이며 책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선물일 것이다.

 

/문효치(시인·계간 미네르바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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