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차고 고운 목소리 '홍방울' 별명…전북도 문화재로 지정…명고수로도 '명성'
홍정택은 1921년 전북 부안읍 신흥리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웅표이다. 14세 때 부안에 들른 협률사를 따라나선 것이 판소리 수업의 발단이 되었다고 한다.
5년여의 협률사 생활 끝에 변성기가 닥쳐 소리를 못 하게 되었으나, 곧 이기권을 찾아가 부안 월명사에서 이운학 강종철 홍용호 등과 5개월여의 공부 끝에 성대를 회복했고, 그 후 이기권을 수종하면서 소리를 익혔다. 이기권이 죽자 김연수의 우리국악단에 들어가 한동안 창극을 하면서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목이 우렁찬 데다가 고와서 '홍방울'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목이 상하여 1950년대 후반부터는 군산국악원을 비롯하여 정읍·대전·대구·논산 국악원 창악 강사를 거쳐 전주에 정착한 후 줄곧 전주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해 왔다. 홍정택은 판소리가 절멸의 위기에 처했던 1970년대 전주의 판소리를 혼자 붙들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최승희 조소녀 전정민 조영자 윤소인 김소영 등이 처음 소리를 시작할 때 홍정택에게 배웠다. 1980년 전라북도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수궁가> 로 전라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수궁가>
1986년부터는 신설 개원한 전라북도 도립국악원 판소리부 교수로 있었으며, 1991년 정년 퇴임한 뒤에는 전주 시내에 판소리 연구소를 내고 후진을 양성하다가, 이제는 연로하여 바깥출입을 거의 못하고 지낸다. 홍정택은 정정렬의 제자인 이기권(1905~1951)의 수제자로 알려져 있는데, 홍정택의 판소리는 대체로 김연수의 사설을 차용하면서 이기권제로 부르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홍정택의 선대가 동학혁명 때 대장을 지냈던 사실이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있는 손태도에 의해서 밝혀졌다. 홍정택의 선대는 고창에서 살았는데, 증조부가 흥필현, 큰할아버지가 홍낙관, 할아버지가 홍계관이다. 홍정택의 큰할아버지인 홍낙관이 바로 고창현을 대표하는 손화중 포(동학의 집회소)의 휘하로, 집안 동생들인 홍계관 홍동관 등과 함께 장수가 되어, 농민군의 조직의 하나인 재인패와 당골패 등 천민 부대를 이끌었다고 한다.
홍정택에 의하면, 증조부 홍필현은 동학혁명 당시에 대장이 되어 흰 덩(큰 가마)을 타고 다녔는데, 전주 완산칠봉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다른 동학혁명 관련 기록에는 홍낙관이 장수를 했다고 했는데, 홍정택은 홍낙관의 아버지인 홍필현이 장수를 했다고 하니, 서로 차이가 있다. 공식적으로는 홍낙관이 장수였는데, 홍낙관이 자신의 아버지인 홍필현을 큰 가마에 모시고 다니면서 받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홍낙관의 증조부 홍필현은 완산칠봉에서 전투 중에 총을 맞아 홍정택의 조부인 홍계관이 업고 내려오던 중, 증조부가 "나를 구하려다 너까지 죽는다."고 하면서 발로 걷어차 조부 혼자 살아왔다고 한다. 홍정택의 부친 홍순열은 고창에서 살면서 외가의 성을 따 김씨로 성을 바꾸어 살았다고 한다.
홍정택의 형제는 7형제로 9남매였는데, 제일 장형이 홍두환이다. 홍두환의 딸이 지금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소리꾼 홍성덕이다. 홍두환은 순천 사람 이영민이 찍은 사진에 나오는데, 판소리사에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아서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홍성덕 씨를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홍두환이 홍성덕의 아버지인 것을 알게 되었다. 홍두환은 고수였다고 한다. 이영민은 여러 명창들을 초청해다가 소리를 듣고 그 느낌을 한시로 적어 옆에 걸어놓고 소리꾼과 사진을 찍어 두었다. 여기에 나온다면 홍두환 또한 대단한 명고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홍정택은 명창이었을 뿐만 아니라 명고수였다. 그의 사촌형 홍용호도 명고수였다. 그러고 보면 홍정택과 홍용호가 북을 잘 친 것도 다 집안 내력인 것 같다.
/ 최동현(군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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