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천 송수남 선생을 보내며
선생은 평생을 한국화의 현대화에 매진하였다. 고루한 전통에 젖어있던 수묵을 일깨워 현대라는 시공에 거듭나게 하였으며,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하기 위하여 부단한 실험을 거침없이 진행하였다. 그것은 권위적인 전통의 질곡에서 벗어나 예술 본연의 생명을 회복하는 것이었으며, 전통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력을 획득하여 현대를 호흡하고자 하는 치열한 몸짓이었다. 또 서구 일변도의 세태에 맞서 우리 것의 중요성과 가치를 강력하게 제시한 투쟁이기도 하였다. 역사는 이를 '수묵화 운동'이라 정의하며 현대 한국화 운동의 중요한 맥락으로 평가하고 있다. 선생을 '현대 한국화의 대가' 혹은 '이 시대의 수묵인'이라 부른 넋은 바로 이러한 노력과 성과에 대한 확인이라 할 것이다.
선생은 서울 홍익대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부터 교수로 재직하다 2004년 정년을 맞았다. 박물관장, 교육원장 등을 역임하며 후학을 양성함과 동시에 스웨덴 국립 동양박물관 초대 개인전을 비롯해 30여 회에 걸친 개인전과 수많은 단체전, 동경국제비엔날레, 상파울로 비엔날레, 타이베이 국제현대수묵화전 등 국제전에 우리나라를 대표하여 참여한 바 있다. 유명 대학의 교수와 성공한 작가로서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성정은 야인적 기질로 충만한 것이었다. 세속적 가치를 초월하여 분방한 예술가적 기질을 유감없이 드러냈을 뿐 이날, 무리를 지어 세력을 도모하지도 않았다. 국가에서 관장하는 국전에는 참여치 않고 민간의 중앙미술대전, 동아미술제 등의 운영위원,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화가로서는 흔치 않게 '한국화의 길' 등 10여 권에 달하는 저술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신념, 그리고 삶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말년에 선생의 예술세계는 화사한 꽃의 향연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는 평소 꽃이나 동물 등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각별하였던 선생의 삶이 반영된 일기와도 같은 것이다. 선생은 꽃을 통해 어린 시절의 기억을 회상하고, 또 어길 수 없는 자연의 순리를 되뇌며 당신의 마지막 삶을 채색해 나간 것이다. 마치 꽃으로 세상의 어둡고 우울한 것들을 뒤덮어 버리듯 한없이 화려한 선생의 꽃들은 수묵이 그저 검은 색이 아니 듯 수묵을 그렇게 화사한 또다른 색으로 피어나게 한 것이다.
남쪽에서 날아 온 새는 남쪽 가지를 찾아 앉고, 북쪽에서 끌려 온 말은 북풍에 고개를 북쪽으로 돌린다고 하였다. 이는 근본과 태생에 대한 확인이다. 선생은 서울에서의 유명 대학의 교수와 성공한 작가로서의 삶을 뒤로 하고 소향인 전주에 정착하였다. 작업실을 짓고 지역 작가들과 어울리며 자신이 평생을 일관하였던 우리 것에 대한 애정과 그 가치의 전하고자 하였다. 소담한 한옥을 지어 어린이 도서관을 열고자 하였으며, 지역 문화 발전에 보탬이 되고자 집필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자신을 있게 해준 고향 전주에 대한 노화가의 마지막 봉사이자 고마움에 대한 진솔한 표현이었다. 이제 주인을 잃은 삼천동의 작업실에는 마치 선생의 꿈처럼 많은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 선생이 귀향한 진정한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주인을 잃은 꽃들이 처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꿈들이 미처 이루어지기 전에 맞게 된 황망한 소식 때문일 것이다. 삼가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김상철 동덕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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