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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리비 합창소리

▲ 정석곤

휴대전화의 알람 노랫소리에 잠을 깼다. 밤새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큰 눈발이 계속 흩날리고 있었다. 눈길에서 거북이걸음으로 차를 몰고 새벽기도회에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환상적이었다. 온 시가지가 하얀 옷으로 갈아입었다. 나무들도 새하얀 눈꽃을 피우고, 날더러 자기 세상 사람이 되라고 유혹했다.

 

집에 오자마자 눈을 쓸었다. 집안 계단은 아내가 부삽으로 치웠다. 대문 밖은 내 몫이었다. 앞집 H 선생님은 우리 대문 앞 골목길로 다닌다. 눈이 오면 아무리 추워도 H 선생님과 경쟁이라도 하듯 골목을 쓴다. 음식물쓰레기 전용 수거용기를 내놓을 때도 그렇다. 다음날은 비운 용기를 몰래 대문 앞에 가져다 놓는 경기가 벌어진다. 오늘도 경쟁심의 발동으로 골목길을 쓸고 나서 우리 집 골목을 쓸었다. 조그만 빗자루로 쓸다 싸리비로 쓸었다. 눈이 올겨울 들어 가장 많이 내렸다. 제설도구인 눈삽이나 넉가래 사는 걸 미룬 게 후회스러웠다.

 

다음은 집 앞 인도를 쓸었다. 옆집 대문 앞도 쓸었다. 6시가 넘어도 고샅은 고요했다. 오른쪽 건물인 S 아파트 나동의 뒷담 너머 50m쯤 되는 인도로 눈길이 자꾸 갔다. 내 마음도 눈을 쓸라고 재촉했다. 지금까지 눈을 쓸 때면 그쪽은 관심 밖이었다. 오늘은 인도로 다니는 얼굴들을 그려보며 두세 걸음만 쓸었다. 그런데 ‘끝까지!’라는 강한 울림이 들렸다. 눈 위에 고양이 발자국만 군데군데 있었다. 몇 번 허리를 굽히다 펴다 하면서 쓸고 나니, 큰 공을 세운 것 같았다.

 

어릴 적 눈 내리는 고향 집 생각이 났다. 해마다 가을에 짚으로 이은 노란 지붕에 눈이 쌓였다. 마당과 텃밭, 골목길에도…. 그때는 눈이 왜 그리 자주 왔는지. 자고나면 오고 또 오곤 했다. 많이 쌓인 곳은 내 키를 훨씬 넘었다. 아마 지리산 끝자락인 남원시 운봉읍 덕산마을이라 그랬을 성싶다. 내가 고등학교 입학고사를 치룰 때 폭설로 날짜가 연기되기도 했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이듬해에 대풍년이 들 징조라며 어른들이 좋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눈 오는 날 고향에서의 아침은 바빴다. 먼저 마당을 쓸고 사립문 밖으로 나가 고샅을 쓸기 시작했다. 예서제서 일찌감치 눈을 쓰는 싸리비 소리가 합창을 했다. 남자들의 기침 소리도 이따금 들렸다. 개들도 좋아서 뛰어다녔다. 누구네 집 앞을 가리지 않고 눈을 쓸다 만나면, “밤새 안녕히 주무셨느냐?” 인사를 나누었다. 어느새 마을길은 모두 뚫렸다. 그제야 자기 집 안 구석구석 눈을 쓸었다. 아낙들은 물동이를 이고 마을 한가운데 있는 샘으로 나갔다.

 

지금 시골은 초 고령사회다. 그렇지만 눈 오는 날 아침이면 눈 쓸기의 미풍양속은 이어 오고 있을 것이다. 도시의 눈 오는 날 아침은 어떠한가? 안타깝다. 집 앞 골목은커녕 대문 앞 눈도 쓸지 않고 다니는 게 도시문화라고 여긴 것 같다. 그 탓으로 쌓인 눈과 빙판에서 끔찍한 사고가 일어난다.

 

2006년부터 전국 지방자치단체별로 ‘내 집 앞 눈 치우기 조례’를 제정했다. 자기 집 앞 눈 치우기의 시민문화를 만들고, 안전한 겨울나기를 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그 조례는, 누가, 언제, 어디를, 어떻게 눈을 치워야 하는지를 규정해 놓았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부끄러운 일이다. 시청과 언론매체가 홍보했지만 시민들은 아직도 시큰둥한 것 같다.

 

나는 우리 집에 잇닿아 있는 집 앞 인도만 쓸고 있다. 조례에는 보행자 전용도로와 이면도로도 쓸어야 한다는 걸 인터넷 검색으로 알았다. 소방도로인 마을길도 눈과 얼음을 치워야 하니까 눈 쓸 면적이 넓어졌다. 앞으로 눈 오는 날은 눈 동요를 부르며 눈을 쓸고 싶다. 아마 어린 시절로 돌아가 신바람이 나지 않겠는가. 동화 나라 같은 꿈을 꾸어 본다. 눈 오는 날 아침이면 우리 마을에도 내 집 앞과 마을길의 눈을 쓰는 싸리비의 합창소리를 듣는 날이 오면 좋겠다.

 

△수필가 정석곤 씨는 2009년 〈대한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풋밤송이의 기지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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