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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동 희필 - 물에 들다

▲ 선산곡

냇물에 갈 때 마다 돌을 던진다. 기껏해야 종아리도 못 미치는 깊이지만 돌이 쌓이면 물의 흐름은 조금씩 느려진다. 얼기설기 쌓인 틈으로 새어나가면서도 그 안 물은 금방 풍성해진다. 자리 잡힌 돌 부피 하나에 흘러가는 방향을 바꾸고 더디어졌다가 소리를 내기도 하는 게 개울에 흐르는 물이다.

 

수년전 산 맞은 편 냇가를 석축으로 쌓는 대대적인 제방공사가 있었다. 냇물 위로 축축 늘어진 산 쪽의 나뭇가지들이 무자비한 중장비로 꺾이고 베어져 한마디로 휑한 풍경이 돼버렸다. 내 바닥을 긁어내고 물길을 직선으로 만드는 것이 수해방지 때문이라니 할 말도 없었지만 그때 사라진 자연미가 아쉽기 그지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해가 거듭되자 사람의 손으로 뒤적거려놓은 그 자리가 다시 새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잠시 직선으로 흐르던 물길이 방향을 돌리고 반대편에 자갈을 채우며 새로운 곡선을 만들어 냈다. 나무들도 다시 물 쪽으로 가지를 뻗어 내는가 싶더니 꺾이고 베인 상처가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머루, 때죽나무, 단풍나무, 노각나무, 돌배나무 등, 나무의 푸른빛들이 다시 당당해진 것이다.

 

덕분에 해가 뜨는 아침부터 정오까지는 나무그림자가 냇물에 가득하다. 폭이라고 해봤자 징검다리 예닐곱 개 건너는 정도지만 한낮 가득한 햇볕은 오후가 되면 서쪽 그림자에게 자리를 내주기 시작한다. 울타리삼아 집 가장자리에 사다 심은 작은 나무들이 어느새 커 생긴 그늘이다. 시간의 흐름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준 것이다.

 

성벽처럼 비탈이 진 산에 촘촘히 선 나무들은 저마다 해바라기를 하느라 키들이 크다. 그 큰 나무들 틈에 하얀 꽃을 피우는 노각나무도 섰지만 가까이 갈 수 없이 칙칙한 숲이기 때문이다. 노각나무 하얀 꽃들은 여름이 짙어지기 전 주변 숲속으로 대부분 져 내리지만 몇 꽃송이들은 물 위로도 떨어진다.

 

잎이 하얗고 꽃술이 노란 노각꽃 낙화유영은 차라리 귀족적이다. 마지막이라는 자태의 비장미가 없다. 봄에 호르르 지거나 가을에 쓸쓸히 지는 이미지가 아니다. 떨어진 꽃송이지만 나무와 인연을 끝내기 전 그대로다. 그냥 떠 있거나 맴을 돌거나 물살에 넘쳐 흘러가거나, 그 어떤 것 중의 하나라도 경박하지 않고 도도하다. 작년부터 냇물에 돌을 던지기 시작한 이유도 실은 물 위에 그 꽃송이들을 가둬두기 위함이었다.

 

몇 십 년 만에 처음이라는 무더위였다. 남한유일의 고원지대라 시원함을 자랑했던 산동네, 수수동에 찾아온 염장군의 기세가 여느 해와는 전혀 달랐다. 한여름에도 냉방기가 필요 없었던 집이었지만 그 서기를 피해 집 아래 냇가를 찾는 것이 이젠 일과가 돼버렸다.

 

명색이 전원주택이라 일하다 버려진 흙 묻은 면장갑이나 걸레들은 모아 빨래를 하기도 한다. 둑 공사 때 꺾였던 때죽나무를 다듬어 만든 방망이로 빨래를 두들기면 소리의 청량함이 계곡에 가득해진다. 내가 만들어내어 내가 즐겨듣는 소리다. 그렇게 방망이질 빨래를 하고 있는 동안 아내는 돌에 앉아 탁족을 하고 있지만 결코 어긋난 연출은 아니다. 맑게 흐르는 물이 아까워 물에 드는, ‘물놀이’의 풍요를 내가 즐기는 것뿐이다.

 

오늘도 물가를 찾았다. 조금 더 더워지는 시각이 되면 아예 몸을 물에 담그고 대사리를 잡기로 작정을 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놓여있지 않다.

 

“산딸기가 드디어 익었네.”

 

아내가 물 가장자리 숲 쪽을 손으로 가리킨다. 전에 영 볼품없이 물 쪽으로 늘어져 있던 산딸기 가지에 어느새 까맣게 열매가 익었다. 질 새라 나도 이리 뻗었다는 듯 싸리나무가지도 물 위로 늘어졌다. 얼굴에 검은 점 가득한 주황색 산나리도 그 틈에서 몸을 흔들고 있다. 분명한 야생종인데 어느 화원에서 키운 것보다 더 훌륭한 자태다. 산딸기가 손안에 모아지는 동안 팔뚝에 스친 싸리나무 꽃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잘디 잔 보랏빛 꽃들이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물 위에서 맴을 돈다. 맴을 돌다 천천히 흘러간다.

 

△수필가 선산곡 씨는 1994년 '문예연구'로 등단. 수필집 'LA쑥대머리' '끽주만필' '속아도 꿈 속여도 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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