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가루를 사려고 마트에 갔다. 국산 밀가루를 사려고 둘러보다가 하나 남은 우리 밀가루에 시선이 멈추었다. 가격이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바구니에 담았다. 1960년대, 우리는 밀 농사를 지었고, 그 밀을 방앗간에 가지고 가서 가루로 빻아다 수제비나 부침개를 만들어 허기를 달랬었다.
그 당시 우리 부모님께서는 날만 새면 들녘으로 나가 일에 매달리셨다. 하지만 논농사 수입은 농가 빚이나 세금 등을 내기 위해 쌀값이 가장 싼 추수 직후에 거의 다 내다 팔았기에 쌀은 늘 귀했다. 그러니 밀이나 보리농사를 지어 주식으로 대용했었다. 또 겨울 양식인 고구마는 캐다가 방 윗목에 밑동가리를 만들어 수북이 쌓아놓았고, 수확한 콩은 처마 밑에 차곡차곡 보관해 두었다.
들깨는 키가 커서 밭에서 타작하여 알갱이만 들여왔지만, 집에 들어온 콩을 갈무리하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다. 처음엔 부모님의 일손을 도와드리려고 했던 게 잘했다는 칭찬을 들으니까 신이 나서 하다 보니 내 일이 된 것이다.
볕 좋은 날, 나는 마당에 포장을 깔고 거둬들인 콩을 펼쳐놓았다. 어느 정도 마른 성싶으면 처음엔 튀어날까 봐 발로 자근자근 밟다가 나중에는 긴 막대기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여기서 툭, 저기서 툭, 입을 쩍쩍 벌리며 노란 콩을 뱉어내면서도 저항하지 않고 잘 참았다. 콩은 깨지고 부서져서 메주가 되고, 간장, 된장, 고추장이 되었다.
들깨 또한 깻잎이 부스러기가 되도록 부서져야 고소한 알갱이를 뱉어내고, 이 알갱이가 부서지고 으깨져서 기름이 되고 가루가 되어 맛, 영양, 건강까지 챙겨주는 ‘회춘 식품’이 된다.
얼마 전 친구들과 어느 식당에서 시래깃국을 맛있게 먹은 일이 있다. 요즘 날씨가 쌀랑하니까 따뜻한 국물 생각이 나서 냉동실에 있는 시래기를 꺼내 나름대로 국을 끓였지만, 맛이 별로였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알아봤더니, 그 식당에서는 들깨가루를 넣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들깨가루가 없어서 생 들깨를 조금 갈아 넣고 중불에 푹 끓였더니 아니나 다를까 어릴 때 먹었던 시래깃국, 바로 그 맛이었다.
예로부터 ‘음식 맛은 장맛’이라고 했다. 나는 오늘 장 가르기를 했다. 지난 2월 초순 소금물에 담가놓았던 메주를 으스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꺼냈다. 간장과 분리한 메주는 다른 항아리에 옮기고 잘게 부수어서 으깬 다음 소금을 뿌리고 꾹꾹 눌러놓았다. 항아리 속에서 얼마간의 숙성기간을 거쳐 맛있게 익으면 담근 장류로 조물조물 무치고 보글보글 끓여서 가족들과 함께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 마음이 훈훈해진다.
이렇듯 밀이나 콩, 깨 등이 부서져 발효와 숙성을 거치면서 원 재료에 없는 유익한 성분이 생성되어 건강식품으로 재탄생하듯, 사람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서로 엉켜 비비고 문지르며 수없이 부서지는 과정을 밟아야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이웃과 함께할 수 있으며, 우리가 꿈꾸는 조화로운 세상이 되는 게 아닐까?
흙덩어리도 부서져야 그 속에 씨가 뿌려지고 싹이 나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부서져야 한다. ‘굳어진 땅’이 아닌 상대를 위해 자신을 부스러뜨리는 겸손한 ‘부드러운 땅’이 되어야 한다.
△한일신 수필가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전북문인협회 회원, 영호남수필문학회 회원이다. 수필집 〈내 삶의 여정에서〉가 있다.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