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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소통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서로의 권리 존중하는 학교문화 조성 필요

5월은 법정기념일인 스승의 날을 비롯해 어버이날, 어린이날 등 기념할 날들이 유난히 많은 달이다. 특히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스승의 날에는 교실 아침 조회가 시작되기 전에 반 학생 전체가 스승의 날 노래를 부르며 담임 선생님의 왼쪽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곤 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네~라는 노래 가사처럼의 무한한 존경심은 아니어도 학생으로서 스승의 날을 기념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학교에서의 교사의 지위와 대우는 지금에 비하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교사를 대하는 사회적인 시선이 예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학생이나 학부모에 의한 교권 피해사례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으로부터 욕설을 듣고 학부모의 민원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한 교사가 있는가 하면, 지난해 11월에는 전북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 학부모가 난입해 수업 중이던 교사 머리 등을 손바닥으로 수차례 때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에 맞물려 교원 침해 피해 특별계약 상품이 지난해 출시되면서 가입 교사들이 늘어나고 있고, 실제 교권 침해를 인정받아 보험료를 지급받은 사례도 있다고 한다. 과거에는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요즘 학교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교사의 수업권과 학생의 학습권 보호돼야 스승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 14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간사를 맡고 있는 김도읍 국회의원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아 보도한 자료에 의하면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총 1만 5105건의 교권침해가 신고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거나 성희롱 및 성폭행하는 사건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초등학생들에 의한 교권침해의 경우 2014년 25건에서 2018년 122건으로 눈에 띄게 증가했다. 또한 이 기간 동안 학부모에 의한 교권침해도 597건에 달했다. 학생의 폭언과 욕설을 넘어 수업방해, 교사 성희롱, 폭행, 학부모의 교권침해 건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실제 2015년 한국교원 총연합회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명퇴 신청 교원이 증가하게 된 이유로 교사들의 절반 이상(55.8%)이 교권 하락 및 생활지도의 어려움에 대한 대응 미흡을 꼽았다. 학생인권만 강조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교권이 약화되고 문제행동 학생에 대한 지도권이 부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학생은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고 학생과 교사의 관계에 있어서 교사의 권위가 높은 반면, 학생의 인권에 대한 인식이 미비했던 건 사실이다. 학생을 훈육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하나의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로서 대하는 것에 소홀했던 것이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학생인권이 학교교육과정과 학교생활에서 구현될 수 있도록 학생의 기본적 인권보장에 필요한 사항을 조례로 제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2011년에는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전라북도 또한 2013년에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다. 이후 학생인권조례 제정으로 인해 학생들의 생활지도에 대한 교사들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민원들이 제기되고, 조례에서 보장하고 있는 학생들의 권리들과 교사의 수업권 충돌이 문제가 됨으로써 급기야 학생인권조례를 폐기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공공연하게 나오게 되었다. 그동안 학생인권이 소홀히 여겨진 우리나라 교육 현실을 감안했을 때, 비록 교사에 의한 인권침해에 초점이 맞춰지는 상황이 발생하긴 했지만 학생인권조례 제정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조례에 타인의 인권을 침해한 경우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고 조례에 담긴 내용에 대한 교육주체들의 이해 부족과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학생인권과 학생을 훈육하는 교사 사이에 갈등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동안의 억압을 풀어내는 방식의 대응이 아닌 교사의 수업권과 학생의 학습권이 보호되는 것이야말로 교육주체 자신들의 권리가 보호될 수 있다는 인식개선을 통해 타인의 인권과 권리가 존중되는 학교문화 정착의 필요성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실제 요즘 학교현장에서는 학생, 교사, 학부모를 대상으로 인권감수성 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주체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개선 교육과 더불어 학생교사학부모의 인권, 교권, 위탁권에 대한 조화로운 관계 정립을 위한 교육청의 역할 또한 요구된다. △인권권리를 존중하는 학교문화 정착돼야 지난 2017년 부안의 상서 중학교 故 송경진 교사의 사례만 보더라도 교사를 잠재적인 범죄자로 바라보고 먼지 털이식 조사를 진행함으로써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교육행정을 책임지는 기관이 어느 한쪽에 편향적일 경우 교육 주체들 간의 갈등은 심화될 수 있고, 각각의 권리에 대한 존중과 이해 대신 상대방에 대한 거부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청의 현명한 역할이 요구되며, 그동안 상급기관의 교권침해 사례는 과소평가되고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만큼 그에 따른 해결책 제시 또한 필요하다. 올해 10월 학부모 등의 교권침해에 대해 교육감의 고발조치 의무화, 교권침해 학생 징계에 전학학급교체 추가, 교권침해 학부모 특별교육 미 이수시 300만원까지 과태료 부과 등의 내용을 담은 교원지위법 개정안이 또다시 시행될 예정이다. 그리고 지난 14일 국회 교육위원회 박찬대 의원이 교원의 업무시간 이후 휴식보장을 위한 내용이 담긴 교원지위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 한 상황이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들이 어느 정도의 효과성으로 나타날지는 의문이지만 사안이 발생하고, 그 심각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될 때 그에 맞는 법의 제개정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교육현장에서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무한한 경우의 상황에 대한 대응책과 함께 그에 맞는 구체적인 시행 규칙 등이 존재하지 않는 한 결국 법은 선언적인 의미만을 지닐 수 밖에 없다. 거기에 앞서 타인의 인권과 권리를 존중하는 학교문화가 정착하지 못한다면 계속적인 대책마련과 법령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교권 침해 사례는 지속적일 수 밖에 없다. 편향적이지 않은 교육행정의 바탕위에서 교육주체들의 관계가 갑을 관계가 아닌 서로가 가진 권리가 결국 한 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서로의 인권과 교권, 학생권, 부모의 위탁권이 존중 될 때 결국 교육활동이 활발해지고 제대로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권친화적인 학교문화조성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이유며, 교권이 바로설 수 있는 기본적인 방안이다. / 박연수 전북교육자치시민연대 사무국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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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27 15:51

취임 5개월 앞둔 조지훈 전북경제통상진흥원장 “도민 안전하게 모시는 정책터미널 역할 할 것”

전북경제통상진흥원 조지훈 원장이 지난해 12월 31일 11대 원장으로 취임 한지 5개월을 맞는다. 취임이후 조 원장은 지역 중소기업과 창업인들, 소상공인, 사회적 경제기업들을 지원하는데 매진했다. 조 원장을 만나 그 동안의 성과와 앞으로의 경진원 업무추진계획 등에 대해 들어봤다. -반갑습니다. 먼저 전북경제통상진흥원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희 경진원은 급변하는 경영환경 속에서 자체생존능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이 시장환경에 탄력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경영마케팅기술인력자금 등의 애로사항을 한 곳에서 해결할 수 있는 종합지원시스템(One Roof - One Stop Service)을 구축해 중소기업의 경쟁력 향상과 지역경제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비영리 공공기관입니다. 전라북도의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사회적경제 기업을 지원하고, 창업 프로그램 운영과 일자리의 미스매칭 해소를 위해 노력하는 진흥원은 전북형 수출바우처 지원사업 등의 해외시장개척 지원, 전북상품 온라인 토탈마케팅 등의 판로 지원, 전북일자리종합센터 운영, 중소기업육성기금 운용, 소기업 기술역량 강화사업, 소상공인통합지원사업, 재도전 성공패키지, 마을기업 육성지원, 사회적기업가 육성 사업 등 약 60여 개의 단위 사업들을 집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라북도의 경제정책을 현장에서 직접 수행하는 정책집행 전문기관으로 전북의 정책터미널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정책터미널이라는 말이 생소합니다. 어떤 의미를 담고 있습니까? 터미널은 본인이 가고자 하는 버스표를 사고 목적지행 버스에 올라탈 수 있도록 하는 플랫폼 역할을 담당합니다. 우리 경진원은 방문한 민원인이 가야할 방향을 설정하면 표를 구매하고 버스에 타서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도록 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취임 후 역점적으로 추진하시는 사업은 무엇입니까? 사회적경제 활성화와 사회적경제 네트워크를 단단히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회적기업지원센터가 제대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4년 정도가 됐습니다. 전라북도 사회적 경제의 중심과 근본이 되는 역할을 센터가 진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요. 올해 안에 베트남 하노이에 전북경제통상진흥원 베트남 통상거점센터를 개소해, 전북의 정책결정과 예산지원으로 현지 바이어를 발굴하고 바이어에게 과제를 부여해 전북지역 중소기업의 상품이 현지에서 판매가 잘 되도록 역할을 수행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베트남을 시작으로 거점센터를 확대해 나아갈 예정으로 해외정착사업을 중심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 조직에 인센티브를 부여해 인재를 양성하는 방안 자발성 유도 동기부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자발성 유도 동기부여는 어떤 것을 의미 하시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내부 직원에게 성과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BSC균형성과평과와 같은 맥락입니다. 성과 혹은 실적을 올린 직원에게 가점을 부여해 성과급을 지급하는 방식을 도입했습니다. 핵심목표는 직원의 역량강화에 있습니다. 대학원을 진학해 학위를 취득했을 경우, 국가 인증자격증 취득, 국가 인증 시험을 통과했을 경우 가점을 부여합니다. 업무프로세스를 단순화 하거나 고객의 입장에서 우리가 지원하는 정책을 쉽고 간편하게 혁신하는 팀에게도 가점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의 역량강화는 민원인을 돕는 역량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역량강화는 곧 민원인에게 쉽게 설명하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능력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4선 시의원을 역임하고 전주시의회 의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정치인에서 경제통상진흥원장에 도전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시의원을 지냈을 당시 전국최초로 시행된 대형마트 의무휴업을 조례를 만들어 이를 전국으로 확산시킨 경험이 있습니다. 늘 지역경제 상생방안 모델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중, 지난 2015년 여름에 경제통상진흥원 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으로 처음 경진원과 연을 맺었습니다. 단순한 수요와 공급 그리고 약육강식의 시장논리가 아니라 사회적인 관계 또 그 안의 사람들의 신뢰가 기반이 되는 경제를 육성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제 임무였습니다. 사회적경제 조직 확대, 협동조합과 마을기업 육성 등 사회적경제가 전라북도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지난해 전라북도 사회적경제 기본조례가 제정됐습니다. 이제 사회적경제를 확산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이었고, 해내야 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어 도전했습니다. 사회적경제 뿐만 아니라 도내 다양한 경제주체를 위한 비전도 준비했습니다. 전북경제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앞으로의 업무추진계획과 도민, 독자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경진원을 전북도민의 삶터를 일구는 혁신기관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큰 도전이자 과제입니다. 이를 위해서 4가지 방향을 정했습니다. 모든 구성원들이 전문컨설턴트로 거듭나는 기관, 하나의 문으로 들어와서 필요한 길로 나아가도록 돕는 터미널 기관, 완성도 높은 피드백으로 정책효과를 높이는 린치핀(핵심, 동반자) 기관, 사회적경제 연대활동의 앵커 조직입니다. 이를 위해 직원들에게 공부하는 기관으로 거듭나자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 직원이 6~7명씩 소모임 학습조직을 만들어 각각의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세트메뉴처럼 고정화된 지원정책이 아니라, 모든 정책을 고객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필요한 내용을 함께 디자인하는, 수요자 중심의 옵션메뉴 형 지원 설계를 준비하겠습니다. 저희는 여러분의 노둣돌이 되겠습니다. 도민과 함께 신명나는 전북경제를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조지훈 원장은】 전주시의회 의장 지낸 4선 의원 출신정책 수행 전문가 1968년생인 조 원장은 전주 출신으로 동암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북대학교에서 무역학 학사, 동 대학 행정학과 석사를 취득했으며 현재 행정학 박사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조 원장은 지난 1998년 만 29세의 나이로 당시 최연소 전주시의원에 당선됐다. 제6대 전주시의원을 시작으로 7,8,9대 시의원을 내리 역임하고 제9대 전주시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시의원 시절 4개월간 천막농성을 하며 이끌어낸 대형마트 의무휴업 조례안은 모범사례로 전국에서 밴치마킹돼 전국곳곳에서 시행중이다. 실제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에 따르면 대형마트 의무휴업으로 소상공인매출이 14.8%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16년 간 시의원을 지낸 뒤 전북경제통상진흥원 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으로 2년 6개월 재임했으며, 전북노동복지센터 비상임이사를 1998년부터 현재까지 참여해 경제와 노동의 전문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난해 말 원장에 취임하며 원장실을 없애고 회의실 겸 휴식공간으로 전환한 뒤 다른 작은 휴게실을 원장실로 사용하고 있을만큼 탈권위주의와 소탈함이 그의 장점이다. 조 원장이 입버릇처럼 민원이이 왔다면 반드시 무엇인가를 얻어가야 한다는 말을 자주 사용해 도민이 우선이 되는 업무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사무실 내부에서는 솔선수범하는 리더십을 보이면서 경진원 내부에서 신망이 높다. 정치인 출신의 원장의 탈권위적인 모습으로 경진원 내 분위기가 한 층 밝아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조 원장은 역사는 한 사람의 천재가 아니라 뜻을 함께하는 여럿이 함께 이루는 것이다며 때로는 영웅을 기다리는 사회가 있지만, 뜻을 함께 한 여럿이 의기투합하고 행동에 옮겼을 때 큰 시너지를 발위해 역사가 된다고 말했다. 이어 정책이라는 것은 옮고 그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필요로 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며 경진원도 모두가 하나되는 정책 수행으로 필요로 하는 민원인, 나아가 도민의 삶이 나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기획
  • 박태랑
  • 2019.05.26 17:32

[전북의 재발견] 전주 어진박물관 초상화 특별전 ‘이렇게 뵙습니다.’

국내 유일의 왕 초상화 전문 박물관 어진박물관에서 이렇게 뵙습니다.라는 주제로 초상화 특별전이 4월 18일부터 6월 16일까지 열리고 있는데요. 이번 전시회에서는 보물 3점, 도문화재 6점 등 오랜 세월 후손들이 목숨처럼 받들어온 영정 20여 점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 전북에서 활동한 어진화사 채용신의 작품이 눈길을 끕니다. 시대별 초상화를 관람하면서 옛 선현들의 삶도 느껴볼 수 있을 듯합니다. 어진박물관은 어진실, 가마실, 역사실, 기획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기획전시실에서는 해마다 초상화, 조선왕실 등을 주제로 차별화된 전시가 열립니다. 이번에는 초상화 특별전 이렇게 뵙습니다.라는 주제로 인물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내면의 정신세계까지 담아낸 초상화 작품을 관람할 수 있습니다. 천연두 자국이라도 지우지 않고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에서 사실적인 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시대별 대표작품 위주로 관람해보겠습니다. 정읍 태산 현령으로 부임하여 선비문화를 뿌리내리고 선정을 베푼 최치원을 정읍 무성서원에 모시고 그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초상화 복식(服飾)은 당나라 형식을 하고 있으며, 손에 불자(拂子)을 들고 있는 모습과 의자 아래 신발이 놓여 있는 모습을 통해 불교 승려 초상화 형식을 따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초상화는 털끝 하나라도 실제 얼굴과 다르면 안 된다고 하여, 태조 어진의 경우에도 오른쪽 눈썹 위의 사마귀까지 표현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는데요. 선조를 업고 임진강을 건넜다는 일화가 있는 고희 초상화의 경우 얼굴의 천연두 자국까지 그대로 그렸답니다. 채용신 선생님이 그린 이덕응의 조복본(각종 의식에 착용하였던 대례복)과 유복본(조선시대때 유생들이 착용하던 평상시 의복) 초상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데요. 조선시대 전통과 생활상을 알 수 있습니다. 조복본의 뒷배경에 원경의 소나무와 화사한 봄꽃이 핀 야외의 풍경을 장식하여 운치를 더합니다. 최덕지 초상은 밑그림인 유지초본과 완성된 초상화를 비교해 볼 수 있는 영정인데요. 최덕지는 전주 한벽당을 건립한 월당 최담의 아들로, 그가 살았던 여말선초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몽고식 모자인 발립을 쓰고, 일색복을 입고 있어 그 당시의 생활상과 고려시대 초상화의 형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김근배 선생은 익산 출신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국권이 상실되자 성균관 박사를 사임하고 낙향하여 청년들에게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했으며, 조선이 망한 후 죽음으로써 충절을 지키겠다는 유서를 남긴 후 순절하였습니다. 옷 주름에 음영을 넣고, 눈 주변과 코, 광대 부분에 하이라이트를 표현하는 등 얼굴의 입체감을 사실적으로 살려 올곧은 선비의 모습을 더욱 부각했습니다. 문효공 하연과 정경부인 영정은 보기 드문 부부상으로 조선전기에 유행한 부부초상화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하연은 세종대 영의정을 지낸 인물로 새머리가 조각된 조두장(鳥頭杖) 지팡이를 세우고 있는데, 이를 미루어 70세 이후 말년의 모습으로 추정되며, 정경부인의 영정은 조선전기 복식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쓰입니다. 송정십현도는 1910년 채용신이 태인 향약의 중심 인물을 주제로 그린 작품으로 송정(松亭)은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하려는 사건에 항의하여 세운 정자로 지금도 현존하고 있습니다. 계회도임에도 십현(十賢) 인물의 표정이나 자세, 자연스러운 옷 주름 묘사는 채용신의 인물화 표현법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초상화 특별전 이렇게 뵙습니다 관람을 통해 시대별 초상화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으며, 우리 지역에서 활동한 어진화사 석지 채용신 선생의 화법의 특징인 육리문(肉理文 ,살결문양)과 근대 사진술을 수용한 하이라이트 기법으로 매우 사실적이고 입체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왕의 초상화를 모신 어진실에는 태조, 영조, 철종, 고종, 순종, 세종, 정조의 어진이 모셔져 있는데요. 세종과 정조의 어진은 실제 모습이 아니라 추정하여 그린 것으로, 국가에서 공인한 표준영정입니다. 가마실에는 태조어진 봉안 시 쓰였던 신연, 향정자, 가교, 채여 등 가마가 전시되어 있으며, 닥종이로 만든 태조어진 봉안 행렬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가마를 직접 타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가마 포토존에서 추억도 남겨보세요.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경기전 역사를 비롯하여 조경묘와 조경단, 오목대와 이목대 등 많은 왕실 유적들을 간접적으로 만나볼 수 있는 곳입니다. 여름 기운이 완연한 요즘 초상화를 통해 선조들을 만나보고, 어진(왕의 초상화)에서 전주의 역사까지 아우르는 경기전 어진박물관에서 유익한 시간 즐기시면 좋을 듯합니다. ■관람시간: 09:00 ~ 19:00, 하절기(6월~8월) 20:00까지, 동절기(11월~2월) 18:00까지 ■휴관일: 1월 1일 ■전화: 063-231-0090 ■주소: 전북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 /글사진=이병호(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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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24 16:10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낯선 가족 앨범에서 나를 만나다

여기가 어딘지 아세요? 사진 앨범 기증자인 김옹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눈을 크게 떴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하면서 궁금증이 더해졌다. 한벽당이에요. 한벽당. 지금과는 많이 다르지요? 옛날 모습을 보여주는 사 진 이구만요, 이 사진이... 몇 달 전 전주시 정신의 숲에서 수집한 기록물 전시를 둘러보던 나는 오래된 사진 앨범 앞에 발을 멈췄다. 한 가족의 소중한 기억이 담긴 앨범을 민간기록물로 내어놓은 분의 뜻이 가상해서 한 장 한 장을 들추며 유심히 보게 되었다. 그리고 사진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졌다. 그래서 어느 날 기증하신 분의 집으로 불쑥 찾아갔다. 찻상 위에 펼쳐진 복사판 앨범-원본은 정신의 숲에 기증했기에 복사본을 앞에 두고 노부부와 나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벽당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서 가족과 친구들 이야기에 앞서 사라진 옛 경관을 아쉬워하는 두 분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가족사진이 곧 도시사의 자료가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노부부는 조부의 독사진을 보면서 한말(韓末)에 태어나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선대(先代)의 이야기를 하나둘씩 들춰냈다. 이제까지 장롱이나 문갑 그리고 상자 속에 고이고이 간직해 온 사진들처럼 가족 이야기도 개인의 기억과 마음에 가만히 묻어 둔 것들이다. 모서리가 찢겨 나간 사진처럼 노부부의 기억도 한 부분이 잘라져 나갔다. 구겨지거나 빛이 바랜 사진처럼 그분들의 기억도 어슴푸레해졌다. 그래도 한 장 한 장이 모두 소중한 사진처럼 아련하게 회상되는 그분들의 기억은 귀하기만 하다. 사진은 개인이 소장한 앨범이나 상자 속에서 나온 순간 역사적인 물증이 된다. 노부부의 가족 이야기이지만, 실은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삶의 희로애락을 다 접어두고 이 세상을 떠나버린 다정해 보이던 가족 그리고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 코끝도 시큰해졌다. 그래서 낯선 가족사를 통해 나를 만나게 되는가 보다. 노부부가 보여준 한 장 한 장의 사진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다. 가족사진 속에서는 부모님과 형제, 사촌의 이야기가 들어 있고, 혼례사진 속에서는 신랑 신부가 처음 만나서 식을 올리기까지의 사연들도 숨어 있다. 또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들로 둘러싸여서 찍은 부모님들의 회갑잔치 사진은 참 다복해 보인다. 한 장의 사진에서 우리는 가슴 절절한 가족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사진 속 배경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지금은 없어졌거나 흔히 보기 힘든 경관이 사진 속에 나타나면 그처럼 반가울 수가 없다. 사라진 풍광 속과 관련된 우리의 기억이 되살아나서이다. 그래서 옛날 사진을 보는 재미가 더해진다. 때로는 사진 속에 얼핏 보이는 풍경과 물건들이 단순한 흥밋거리를 넘어서 역사적인 물증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그러나 막상 가족사진 속에서는 일상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사진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사진은 특별한 때에만 찍거나 아니면 사진관이나 야외에 놀러 가서 기념으로 찍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이어서 그랬다. 집안에서 사진을 찍는 일이 드물어서 집안 내부의 모습을 사진을 통해서 보기는 쉽지 않다. 집안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사진사를 집으로 부르거나 사진기를 가진 친지나 친구를 데려 와야만 했다. 이 모든 것들이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애틋한 추억거리고, 경험이 없는 신세대들에게는 역사공부가 된다. 특히 혼례나 회갑연 사진들은 역사적 물증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복장, 음식 그리고 혼례에 사용된 용품들이 과거의 의례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노부부의 부모님은 집 마당에서 혼인식을 치렀다.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짓고 선 신랑 곁에 활옷에 원삼 족두리를 쓴 신부의 다소곳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신랑 신부를 에워싼 하객들이 던지는 덕담과 농담이 가까이에서 들리는 듯했다. 그 당시에는 혼례 못지않게 회갑연도 중요한 통과의례였다. 사진 찍기 힘든 시절이었는데도 사진사를 불러다 기념사진을 촬영할 만큼 회갑의 의미가 컸다. 우리 할머니 때만 해도 60세를 넘기는 것이 장수(長壽)하는 것이라고 해서 잔치를 크게 했다. 회갑을 축하하기 위해서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여서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회갑연에서는 부모님께 떡, 과일, 사탕을 높게 괸 상을 올리고 그 앞에서 자손들이 절을 하며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드리면서 부모님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아버지가 받으신 회갑 상 위뿐만 아니라 양쪽에 떡을 잔뜩 괴어 올려놓은 시루도 등장했다. 시루에다 떡을 찌던 시절 떡 맛은 생각만 해도 입안에 군침이 돈다.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명절이나 잔치 때가 되면 떡쌀을 담그고, 다음 날에는 쌀을 씻어서 빻고 그 빤 가루를 시루에 안쳐서 김을 푹 올려서 떡을 찌셨다. 아이들이 기웃거릴라치면 할머니께서는 떡이 설익는다고 걱정을 하셨다. 아마도 맛있는 떡을 빨리 먹이고 싶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마음이 김이 덜 오른 시루를 미리 내릴 것 같아서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김이 오르는 시루 속에는 떡을 쩌 주는 귀신이 들어 있는가 보다 라고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다. 잔치에서는 시루에 찐 떡을 마음껏 먹어보기도 하고, 또 잔치 끝나면 어김없이 작은 떡 보따리가 대청마루에 한 가득 펼쳐진다. 시루 채 들어다가 마루에 올려놓고, 손님들에게 떡 보따리를 싸시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길이 바빠진다. 잔치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손님들이 빈손으로 가지 않도록 애를 쓰는 모습이 떠오른다. 드디어 큰 시루 속에 들어있던 그 많은 떡을 다 나누고 나면 어느덧 잔치도 막을 내린다.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서 찾아낸 노부부의 기억과 나의 애틋한 추억까지 더해져서 찻상 위에 마시다가 만 오미자차의 발그스레한 색깔이 노부부와 내 마음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함한희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전북대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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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23 17:01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20세기의 농악, 21세기의 농악

지난 5월 8일에서 10일까지 남원 광한루 앞마당에서 농악 잔치가 열렸다. 올해 춘향제 기념으로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농악이 삼도농악한마당을 펼친 것이다. 8일에는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8호 김천금릉빗내농악이 선보였다. 경상도 농악답게 북 중심의 힘차고 남성적인 가락과 전투적인 진풀이를 볼 수 있었다. 9일에는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5-2호 원주매지농악이 공연했다. 태평소 소리에서 강원도 특유의 메나리조 느낌을 깊게 느낄 수 있었고 칠채가락이 경기 지역 농악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달라서 흥미로웠다. 삼도농악 공연 마지막 날인 10일에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4호 남원농악이 공연했다. 전라도 특유의 멋스러움과 좌도농악 고유의 상모놀음을 선보였다. 농악이 2014년 11월에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선정된 지 5년이 흘렀다. 당시 많은 관심이 언론, 학계, 지자체 등으로부터 경쟁적으로 쏟아졌다. 화려한 축제가 지나가면 여전한 일상이 찾아오듯, 등재 후 몇 년이 지난 지금 농악인들의 삶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농악의 오랜 역사 속에서 농악인들은 묵묵히 살아왔고 또 그렇게 묵묵하게 살아갈 것이다. 지난 세월 동안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현실이 녹록치는 않았다. 그들이 살아온 20세기, 살아갈 21세기를 김정헌 박사와 살펴보았다. 김정헌 박사는 현재 남원시립 국악연수원 농악반 강사로 재직 중이고,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7-4호 남원농악 전수교육조교다. 농악 실기인 중에서 최초로 농악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 삼도농악 한마당 남원농악 공연 때 상쇠이기도 했다. - 농악이 가진 총체적 성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십니까. 총체성에 대해 오히려 비판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아직 분화되지 않은 미분화된 형태로 볼 수도 있어요. 원시종합예술적 성격일 수 있다는 것이죠. 총체성과 세분화, 전문화에 대해서 좀 더 냉정하게 바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농악은 물론 음악, 노래, 춤이 어우러진 민속악이고 종합예술입니다. 하지만 그 중심은 음악이죠. 음악이 80% 정도, 진법이나 연희, 노래 등은 20% 정도인 것이 사실이죠. 음악, 노래, 춤의 종합성은 맞되 음악의 중심성은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 총체성이 원시적 성격일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여러 구성 요소 간의 관계와 역할을 살펴야한다는 지적에는 공감이 갑니다. 농악이 가진 음악성, 주된 요소로서의 음악적 요소에 대해 고민한 산물이 사물놀이입니다. 사물놀이는 농악의 대중화, 국악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죠. 사물놀이가 탄생할 당시가 20세기였는데, 사물놀이는 그렇게 그 전과 달라진 20세기 예술환경에 적응했습니다. 판소리는 창극이라는 돌파구를 통해서 20세기에 적응했죠. 20세기에 대한 적응은 전문화가 화두였고, 이는 곧 상품화될 수 있는가 였습니다. 그 이전의 왕정시기에서 자본주의 시장으로 예술환경은 바뀌었고 모든 예술은 경쟁에 직면하게 되었죠. 흥망성쇠의 국면들을 맞이한 것이죠. 신파극이 그렇게 많은 인기를 누렸지만 영화의 등장으로 쇠락하였습니다. 194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전국을 누볐던 포장걸립, 특히 여성농악단의 시대는 결국 TV의 보급으로 막을 내렸다고 볼 수 있죠. - 농악이 거쳐 온 20세기에 대한 적응기에 대해 좀 더 묻고 싶습니다. 크게 두 가지 흐름을 말할 수 있습니다. 농악은 여성농악단의 시대가 1970년대에 TV의 보급으로 막을 내리면서 한 고비를 맞이했었죠. 그러다가 1980년대 두 축의 국면을 맞이합니다. 한 축은 사물놀이의 등장이고 또 한 축은 대학생을 주축으로 대거 각 지역 농악전수관을 찾아 농악을 배우는전수관 농악시대의 시작이었죠. 전수관농악은 알다시피 민중문화운동과 연관 됩니다. 두 축을 중심으로 농악은 20세기를 지나 왔습니다. - 그렇다면 21세기의 농악은 어떨까요. 휴대폰, SNS 등 또 다른 환경에 적응하는 정제과정에 직면할 것입니다. 남원농악에는 판굿에서 뒤굿 또는 후굿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노래, 춤, 놀이, 연극 등 다양한 연희적 요소가 주를 이루는 대목이죠. 명칭은 다르지만 여러 농악에 이런 형태의 굿절차가 있습니다. 이 농악들에서 문화재로서 뒤굿은 존재할 것입니다. 하지만 공연물로서 뒤굿은 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지신밟기도 사라질지 모릅니다. 지신밟기에 꼭 필요한 고사소리가 있습니다. 오늘날 고사소리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21세기 예술환경에서 고사소리에 대한 수요가 없는 것이죠. 결국 음악이 더욱 세련되고 정제화된 형태로 농악은 변모할 것입니다. 음악과 연관된 발 디딤이나 진법, 웃놀음도 더불어 정제화될 것이고요. 냉정하게 바라 본 21세기 농악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장밋빛은 아니지만 염세적이지도 않죠. 그 냉정한 전망 속에서 김 박사 자신은 어디에 위치하는 지 물었다. 농악이 맞이할 녹록치 않은 21세기에서 한 발 물러나려 하지는 않는지 궁금했다. 그는 간결하게 말했다. 뒤굿까지 지키는 마지막 사람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조세훈 문화인류학 연구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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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21 17:13

[카드뉴스] 학교 성교육 형식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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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21 11:28

[전북의 재발견] 전북대학교 자연사박물관 - 위기에 빠진 야생동물 이야기

최근 전북대학교 자연사박물관에 특별한 기획 전시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바로 야생동물과 관련한 전시인데요. 오늘은 자연사박물관 방문 후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야생동물들. 지금부터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들여다볼까요? 전북대학교 자연사 박물관은 전북대 박물관 맞은편에 있어요. 외관엔 코끼리 모형을 띈 조형물이 보입니다. 벌써 자연 친화적인 분위기가 물씬 들지 않나요? 비록 크기는 아담하지만, 전시 콘텐츠만큼은 풍부한 곳이랍니다. 총 소장품만 하더라도 2만 549점가량 된다고 해요. 원래는 현재 사범대학 미술관 내에 문을 열었다가 소장 유물이 늘어나면서 1979년 1월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고 합니다. 본격적으로 입구에 들어서면 족제비, 파랑새, 노루 등 다양한 야생동물이 한눈에 펼쳐집니다. 마치 동물원을 품은 대학교란 느낌이 들어요. 이번 전시는 야생동물에게 가해지는 위협요인과 야생동물 멸종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해당 전시 테마는 먹이, 서식지 등을 통해 야생동물의 특징을 알아볼 수 있답니다. 아울러 발자국을 보고 누구의 발자국일지 추리해보는 공간이 있습니다. 관람객들에게 일방적인 정보만 주입하는 식의 전시공간이 아니란 점에서 독특했어요. 또, 전시콘텐츠와 관련하여 간단한 퀴즈를 풀 수도 있는데요, 여러 방면에서 획기적인 전시 콘텐츠입니다. 이곳에선 야생동물과 인간의 삶이 충돌하면서 발발하는 현상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사는 곳이 겹침으로써 충돌이 일어나고 이로 인한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특히 야생동물이 처한 위험천만한 상황에 마음 아프기도 했답니다. 야생동물은 로드킬, 밀렵, 유리창 충돌 등으로 사망한다고 해요. 노력하다를 주제에선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동물이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되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이대로라면 가까운 미래엔 야생동물을 책에서만 만나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를 막기 위해 야생동물을 구출하고 보호해주는 제도 또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의 메시지는 공존이란 단어를 설명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당 주제인 공존이 전시의 목적을 말해줍니다. 전시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해결책도 마련하여 제시했단 점이에요. 단순히 야생동물 보호하자는 것이 아니라서 좋았어요. 사라져가는 야생동물에 대한 생각을 높여보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번 기획전시뿐만 아니라 상설전시관도 두루 볼거리가 많습니다. 호남권 최초 대학 자연사박물관이란 수식어답게 다양한 표본과 전시콘텐츠가 많았던 전시였습니다. 전북대에 들르신다면 꼭 들러보세요. 자연에 대한 소중함을 알리고 지식을 알아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위치 : 전북 전주시 덕진구 백제대로 567 운영 : 09:30~17:30(휴무 개교기념일(10월15일) 및 기타 일요일 및 공휴일 휴관) 기획전시 : 8월 30일까지 /글사진 = 김선화(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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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20 18:03

[참여&소통 2019 시민기자가 뛴다] 해외입양과 미혼모

지난 5월 11일 제14회 입양의 날 행사가 있었다. 입양을 홍보하고 입양의 의미를 되새기고, 입양에 대한 인식개선의 장으로 마련되었다. 입양의 날을 맞이하면서 필자는 한 입양인의 죽음을 살펴보면서 한국의 해외입양의 문제점과 미혼모 지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한다. 미국에서 추방돼 2012년 한국에서 생활하던 입양인 필립 클레이(한국명 김상필)가 2017년 5월 21일 홀로 자살했던 사건이 있었다. 미국으로 입양됐지만 시민권이 없어 한국으로 추방됐던 외로운 입양인 필립은 1984년 입양 당시 부모가 미국 관공서에서 시민권 취득 절차를 밟지 않아 무국적자 신분으로 성장했다. 이후 범법행위로 경찰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무국적자로 2012년 한국으로 강제 추방됐다. 이후 5년간 자신에 관한 기록과 부모를 찾으려 애를 썼으나 실패했고 외롭고 힘든 생활을 하다가 결국 투신해 목숨을 끊었다. 이것은 사회적 죽음이고 타살인 셈이다. △미국으로 보내진 한국인 입양인 상당수가 무국적자 1989년 이전에 미국에 보내진 한국의 입양인 상당수가 무국적자라고 한다. 필립처럼 상당수의 미국 입양인들은 무국적 상태를 모른 채 성인이 돼 대학에 진학하거나 운전면허 취득 과정에서 무국적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입양한 부모가 자녀를 위해 시민권을 따로 신청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또 입양을 보낸 한국의 기관들은 미국에 도착한 아이들이 시민권을 취득했는지 확인해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도 많다. 따라서 미국 내 한국 입양인 무국적자는 약 1만8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가 지나 성인이 된 이후에는 시민권을 취득하기가 어려워 불법 체류 신분이 되고, 이후 크고 작은 범법 행위로 경찰에 적발되면 한국으로 추방된다. 심지어 미국 시민권 없이 미국 여권을 신청하는 행위 자체도 추방 대상이 된다. 시민권이 있다고 생각해 선거에서 투표하는 것도 추방을 위한 하나의 빌미로 작용할 수 있다. 이렇게 돌아온 해외 입양인들은 언어 장벽은 물론, 문화적 차이, 금전적 어려움, 사회적인 낙인 등이 맞물려 취업이 어렵고 정신 건강에도 어려움을 겪으며 고립된다. 입양아가 비입양아보다 자살을 시도할 가능성이 4배나 높다는 미국 소아과학회의 연구 결과도 있다. △입양아동의 대부분은 미혼부모의 자녀 한국은 입양 수출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해외 입양 아동 숫자가 엄청나게 많았다. 그러나 전쟁고아가 많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60년대 70년대보다 80년대가 가장 해외입양이 많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70년대까지는 하루 한 끼 먹기도 어려워 입양을 보냈다고 하지만 이제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우리 아이들을 우리가 기르지 못하고 외국 가정에 입양 보낸다는 것 어떤 말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1980년 이후 입양이 더 증가했다. 부모가 없는 고아가 아니라 대부분 미혼모의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되고 있다. 해외입양아동이 줄기는 했지만 아직도 입양아동의 44.5% 아동이 해외로 입양되고 대부분이 미혼부모의 아이들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입양기관이 받는 수수료이다. 미국에서 양부모가 한국 아이들을 입양하려면 최대 6400만원 정도를 지불해야 입양할 수 있다. 이 중 2000만원이 넘는 금액이 한국의 입양기관 몫이다. 중국, 홍콩, 타이완, 베트남, 태국, 필리핀, 콜롬비아, 아이티 등 다른 국가 출신의 입양수수료와 비교해 아이티 출신 다음으로 입양수수료가 비싸게 책정되어있다(홀트 인터내셔널 홈페이지). 최근 5년간 입양기관이 해외입양으로 벌어들인 수익은 500억원이었다. 최근 해외입양아동 숫자가 400명이 안 되는 데도 수익이 500억인데, 1980년대는 매년 5000~8000명 이상의 아이들이 해외로 입양되었다면 우리 아이들을 해외로 보내면서 수수료로 받은 액수가 얼마나 엄청났을지 상상만 해도 놀랄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다. △미혼부모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돼야 해외 입양이 돈벌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하려면 정부가 책임지고 국내 입양을 지원하고 미혼부모가 직접 자신의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정책적 지원과 사회적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 정부가 출산율 높이려고 별별 정책 다 마련해도 효과가 전혀 없는데 이미 나은 애들이라도 잘 키울 수 있게 미혼모 지원, 한부모 지원, 친가정 지원사업, 국내 입양지원사업에 정부 보조금을 제대로 써야 한다. 더 이상 입양기관의 배 불리는 해외입양사업과 정부 보조금 사업은 없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미혼부모가 아이를 입양 보내지 않고 잘 키울 수 있도록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우리 사회의 미혼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개선되어야 한다. 한국 미혼모가족협회에 따르면 한국 미혼모들의 대부분이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은 미혼모들이 실제 겪은 사례들이다. 문제가 있는 여자라든지 아니면 정숙하지 않은 여자라든지 그런 생각들이 바뀌었으면 하죠. 남자들이 예의를 지켰던 사람들이 (미혼모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갑자기 저녁 늦게 전화를 해서 술 한잔 하러 나오라고 한다든지 미혼모라는 제 지금 상태를 보고 저를 대하는 태도가 저는 가장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김도경, 이하 가명) 임신 중에는 아르바이트도 잘렸어요. 결혼도 안 했는데 어떻게 임신했냐고요. 그러더니 신뢰할 수 없다, 너 같은 사람이랑 일할 수 없다고 손가락질하더라고요.(정수진) (출생 신고하러 갔더니 주민센터 직원이) 어떻게 아기를 혼자 낳아? 여기가 무슨 조선시대예요? 아기를 혼자 낳았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라고 묻더라고요. 애기가 신생아 때, 태어난 지 일주일밖에 안된 애를 그 추운 날에 데리고 갔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 말이. 혼자 낳은 게 죄는 아니잖아요. (이수연) △핀란드에서는 미혼모라는 말이 없어 핀란드에서는 미혼모라는 말 자체가 없다. 엄마라고 생각하고 엄마나 아빠라고 말한다. 사람들의 미혼모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결혼했든지 안 했든지 다 엄마이다. 미혼모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한 거다. 모두 엄마니까 엄마라고 생각하고 인식해야 한다 (페트리, 주한 핀란드 대사관 프로젝트 코디네이터) 더 이상 우리의 아이들을 해외로 입양 보내서는 안 된다. 아동은 친가정에서 보호되어야 하고 친가정이 보호하기 어려울 경우 국내에서 보호할 가정을 찾아야 한다. 헤이그 국제 아동 입양협약은 아동이 우선적으로 원가정에서 보호되어야 하고, 원가정에서 보호하기 어려울 경우 국내에서 보호할 가정을 찾아야 한다. 마지막 수단으로 외국에서 적합한 부모를 찾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대표적인 입양기관인 홀트 아동복지회는 국내 입양 추진 원칙에 대한 노력을 하지 않고 해외입양을 우선하고 있다고 보건복지부 주의 통보를 받았다. 한국 정부도 지난 2013년 5월 24일 이 협약에 서명하고, 2017년 10월 비준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현재 계류 중인 상태다. 아동권 보호를 위한 핵심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공공의 역할이 더 강화돼야 하고, 친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아동 입양 상담과 입양 대상 아동의 보호와 양육도 공공의 아동 보호 체계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미혼부모들도 떳떳하게 자신의 아이들을 입양 보내지 않고 키울 수 있도록 법적 정책적 경제적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장윤영 천년누리 전주빵 대표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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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20 17:38

[카드뉴스] 일제강점기 군산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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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20 14:02

[카드뉴스] 시외버스 승강장 설치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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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20 13:41

[카드뉴스] 무서운 10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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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20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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