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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뚜벅 전북여행] 전북 이색 박관 : 가족과 함께 봄나들이 하기 좋은 곳

"이색 박물관에서 특별한 추억을" 전라북도에는 구석구석 가볼 만 한 이색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중 완주군에는 삼례책박물관, 술테마박물관, 가톨릭성물박물관 등 이색 박물관들이 모여 있는데 전라북도 완주 여행을 하며 꼭, 들려볼 만한 곳으로 추천해봅니다. 삼례책마을은 삼례문화예술촌과 함께 완주 여행의 필수코스 중 한 곳입니다. 특히 봄이 오면 봄나들이 떠난 이들이 마을을 거닐며 둘러보기 좋은 곳입니다. 책마을센터와 헌책방, 북카페, 갤러리 등으로 구성된 건물은 삼례문화예술촌과 삼례역, 등 군산, 익산, 김제와 더불어 양곡 수탈의 현장이었던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삼례책마을은 일제식민지 수탈의 역사를 담은 양곡창고 등을 개조하여 만들어진 공간으로 완주를 찾은 이들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지역 재생을 위해 문화공간으로 만들어간 공간에는 빼곡히 들어선 고서들과 헌책들이 자리하며 그 안에 담긴 역사를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책 냄새를 맘껏 맡으며 책 속엔 어떤 보물이 있을지 살펴보는 매력도 있습니다. 주소 :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삼례역로 68 관람 시간 : 매일 10시~18시 (휴무 : 설, 추석 당일) 책 박물관은 강원도 영월에 세워졌던 것을 2013년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으로 이전해왔고 철수와 영이-김태형 교과서 그림도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안쪽으로는 상설전으로 송광용이라는 인물이 중학교 때부터 40년간 그려온 만화형식의 일기를 볼 수 있고, 별도로 조성된 전시공간에는 기획전으로 구스타프클림트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완주군에 자리한 대한민국술테마박물관은 술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은 물론 대한민국의 모든 술을 만날 수 있는 이색 박물관입니다. 전통주 뿐 아니라 맥주 와인등과 함께 술과 발효음식 등에 대한 다양한 체험을 해볼 수 있으며 술 빚기 전문 과정 등도 진행하며 술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지역별 대표 명주부터 시작해 근대로 오며 빠르고 가볍게 즐기도록 변형된 소주와 먹거리 등의 모습도 살펴볼 수 있고 역사 속에 있을 법한 오래된 술병들이 가득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술은 단순히 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고 성장하며 살아가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 해왔던 문화 그 자체였지만 일제강점기에 전통 주조 방식의 맥을 끊는 과정을 통해 많이 단절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최근 다시 지역마다 맥주를 제조하거나 막걸리를 비롯한 다양한 방식의 주조가 연구되기 시작했고 전통주 뿐 아니라 와인 등도 꽤 좋은 품질의 술을 만들어내기 시작해 바야흐로 술 전국시대가 되어가는 듯 합니다. 술 박물관의 시음코너에서 지역별 대표 명주들을 시음해보기도 하며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주소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덕천전원길 2 홈페이지 : http://sulmuseum.kr 완주군 천호성지에 자리한 성물박물관은 가톨릭의 역사와 함께 이 땅에 자리 잡은 천주교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곳입니다. 책 그리고 술 에 이어 세 번째 이색 박물관으로 종교와 관련된 다양한 유물과 세계 각국에서 각자의 개성을 담아 만든 조각 들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아기예수의 탄생의 순간을 정말 다양한 나라에서 표현하였는데, 저마다 다른 복식과 감각이 담겨 있어 이렇게 모아보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양한 종류와 크기, 개성이 있는 십자가들도 모여 있는 곳입니다. 다소 종교적인 공간인 데다 성스러운 느낌이 들기까지 하는 이곳은 천주교 박해로 인해 죽어간 순교자들의 유해도 함께 소장하고 있습니다. 처음 한국에 천주교가 전파된 뒤로 이어진 천주교 박해 사건 등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이색 박물관입니다. 봄날에 둘러보는 전라북도 완주의 이색 박물관들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다양한 주제로 다양한 관심사와 유물과 기록들을 모아 소개하고 있는 이색박물관에 들렀다 온 가족이 즐거운 봄나들이로 만들어 가보면 어떨까 합니다. /글사진 = 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강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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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26 11:34

[한바탕 전주 즐기기] 봄바람 휘날리는 전주 '바람쐬는길' 자전거 코스

봄바람 맞으며 즐겁게 달려보자 '바람쐬는길' 자전거 코스 꽃들이 하나씩 피어나는 화창한 봄 날씨가 찾아왔습니다. 1, 2월 잠시 휴식 기간을 가졌던 전주시 공영자전거 대여소도 봄날을 맞이하여 다시 활기차게 운영을 재개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께 치명자산과 생태박물관을 지나는 '바람쐬는길' 자전거 코스를 소개해드리려고 하는데요. 기존의 한옥마을 코스가 너무 혼잡하게 느껴지셨던 분들이나, 너무 자주 이용하여 지루함을 느끼셨던 분들에게 강추해드리는 코스입니다. 가장 중요한 공영자전거 대여소 이용에 대해 먼저 안내해드릴게요! 위치는 총 6곳으로 어느 곳에서든 대여/반납이 가능합니다. 자연생태관 대여소에서 빌리더라도 덕진공원 대여소에서 반납할 수 있다는 것은 대중교통을 이용하시는 시민분들께는 아주 좋은 팁이 될 것 같습니다. ​ 자연생태관 대여소 : 전주시 자연생태관 입구 치명자산 대여소 : 한옥마을 임시주차장 옆 한옥마을(오목대) 대여소 : 오목대 시내버스 승강장 뒤 한옥마을(향교) 대여소 : 전주향교 앞 전주천 자전거 길 전주천(생태자전거놀이터) 대여소 : 전주시 자원봉사센터 아래 전주천 자전거길 덕진공원 대여소 : 전북대학교 기숙사 맞은편 4, 5, 9, 10월 : 09시~18시 하절기 (6~8월) : 09시~19시 동절기 (3, 11, 12월) : 10시 ~17시 매주 월요일, 추석 명절 휴무 1, 2월 운영중단 자전거는 1시간에 1,000원으로 매우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간단한 핸드폰 인증을 한 뒤 1인용, 2인용 자전거 중 선택하여 이용하시면 됩니다. 주의해야 할 점은 휴대폰 인증이 불가능한 분들은 이용이 어려울 수 있으니 휴대폰을 필수로 지참해주셔야 해요! 또한 결제는 현금으로만 가능하니 이 점 또한 참고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자전거 대여소들도 많이 있지만 자연생태관 대여소를 추천해드리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로는 넓은 주차시설입니다. 자연생태관 자전거 대여소의 가장 큰 장점은 차를 이용하는 분들에게 넓은 주차장 시설이 이용 가능하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다른 자전거 대여소들에 비해 주차에 대한 부담 없이 자전거 코스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아주 매력적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로는 단순히 자전거 코스만 즐기기에는 단조롭다고 느끼시는 분들에게 자연생태관이라는 새로운 볼거리가 제공된다는 점입니다. 저 또한 자연생태관을 둘러보았는데요. 다양한 체험거리와 볼거리들이 있어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특히 반딧불이 정원의 해설과 함께 실제 반딧불이를 관람할 수 있는 등 체험형 학습이 결합된 것이 굉장히 유익했습니다. 자연생태관에서는 다둥이, 그린카드, 경로 우대 등 다양한 할인 혜택도 제공하고있는데요. 아이들과 함께 자연생태관에 들러 전주의 생태계에 대해 알아보고 직접 전주천을 자전거로 돌아다니며 실제로 체험하는 시간을 가지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자연생태관에서 치명자산 방향으로는 차의 운행도 적었고, 자전거 우선 도로로 지정되어 있어 위험 부담 없이 자전거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자연생태관에서 치명자산까지 연결되는 도로는 바람쐬는길이라는 도로명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도로명대로 바람을 즐기며 쭉 자전거를 타며 전주천과 함께 그야말로 힐링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색다른 가족 봄나들이 코스를 찾고 계신다면 오늘은 바람쐬는길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글사진 = 전주시 블로그 기자단 송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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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26 11:14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과 전주의 책판

△전국에서 유일하게 私版(사판)의 기록이 남아있는 전주 조선시대 전국에서 책을 찍을 때 만든 책판의 목록을 기록한 冊板目錄(책판목록)이 있다. 이 책판목록에서는 주로 관청에서 출판한 책판을 다루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1885년에 필사된 完營客舍冊板目錄(완영객사책판목록), 1778년경에 필사된 各道冊板目錄(각도책판목록), 1780년경 또는 1814년 이후 필사된 冊板錄(책판록) 등 몇 가지 책판목록에는 전주의 서점에서 출판한 책판의 목록을 全州私板(전주사판) 또는 私板(사판)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전주의 경우에만 私板(사판)의 기록이 나오는데, 이 私板은 서점에서 책을 발간할 때 사용한 목판을 말하는 것이다. 1750년경에 쓰인 諸道冊板錄(제도책판록)에서는 구체적으로 南門外 私板(남문외 사판), 西門外 私板(서문외 사판)으로 표시하고 있다. 전주의 南門外는 남문밖이나 남밖으로 불렸고, 西門外는 서문밖으로 불렸다. 이 私板(사판)을 통하여, 이미 1700년대 초반에 전라도의 首府인 전주에 영리를 목적으로 사적인 출판을 하는 출판소가 존재한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책판 목록을 종합하면, 전주에서는 18세기에 이미 판매용으로 추정되는 책이 42종이 발간되었다. 家禮(가례), 講譜論語(강보논어), 講譜周易(강보주역), 九雲夢(구운몽), 論語大全(논어대전), 論語大全諺解(노어대전언해), 唐音(당음), 大學大全(대학대전), 大學大全諺解(대학대전언해), 東萊博議(동래박의), 童蒙先習(동몽선습), 杜律(두율), 禮記奎璧(예기규벽), 孟子大全(맹자대전), 孟子大全諺解(맹자대전언해), 史略(사략), 史要聚選(사요취선), 三經奎璧(삼경규벽), 三國志(삼국지), 三略(삼략), 喪禮抄(상례초), 書傳大全(서전대전), 書傳大全諺解(서전대전언해), 小學(소학), 小學大全諺解(소학대전언해), 詩傳大全(시전대전), 詩傳大全諺解(시전대전언해), 兒戱原覽(아희원람), 韻考(운고), 類合(유합), 剪燈新話(전등신화), 全韻玉篇(전운옥편), 周易大全(주역대전), 周易大全諺解(주역대전언해), 中庸大全(중용대전), 中庸大全諺解(중용대전언해), 中庸或問(중용혹문), 千字(천자), 草千字(초천자), 通鑑(통감), 寒喧箚錄(한훤차록), 訓義小學(훈의소학). △서계서포, 칠서방, 다가서포, 문명서관, 완흥사서포, 창남서관, 양책방 南門外(남문외)라는 이름에 해당하는 출판소는 七書房(칠서방)이 해당될 것이다. 칠서방은 사서삼경을 찍어내 전국적으로 유명한 출판사이다. 전주 칠서방의 고무도장에는 全州 南門外 西天里/七書房/主 張在彦(전주 남문외 서천리/칠서방/주 장재언)으로 칠서방이 고무인의 주소에 南門外로 나오고 있다. 西門外(서문외)을 가리키는 서점으로는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인 西溪書鋪(서계서포)를 들 수 있다. 이미 여러 책의 간기에서 西門外가 보인다. 서계서포에서 사용한 고무도장에 全州郡 西門外 石橋西邊/西溪書/主卓鐘佶(전주군 서문외 석교서변/서계서포/주 탁종길)이란 주소와 출판소, 주인 이름이 보인다. 少微家熟點校附音通鑑節要卷之十三 道光十一年(1831)辛卯八月日 西門外開板 崔永 喪禮初要, 光武七年(1903) 癸卯秋 完山西門外 重刊 일반적으로 판매용 책인 완판방각본의 시작은 童蒙先習(동몽선습)으로 보고 그 발간연도를 1714년으로 보고 있다. 刊記(간행기록)에 西門外라고 쓰인 책들은 대체로 서계서포에서 발행한 책으로 이해된다. 서계서포가 명시된 책들은 대체로 1800년대 초반과 중반에 많이 발간된 책들이다. 御定奎章全韻 西溪書鋪 1860년, 『簡牘精要』 西溪書鋪 1861년 전주의 최초의 서점인 서계서포에서는 1800년대부터 1911년까지 한글 고전소설인 화룡도, 조웅전, 유충열전, 심청전, 초한전, 소대성전, 장풍운전, 열여춘향수절가, 이대봉전, 구운몽, 삼국지 등 17종의 고전소설을 찍어냈다. 이 서점에서 발간된 소설이 아닌 판매용 책은 21종에 이른다. 그리하여 광복 74년에 이르는 오늘날까지 대한민국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가장 많이 오른 소설은 판소리계 소설인 춘향전, 심청전, 토별가 등이다. 심청전 大韓光武十年丙午(1906) 孟春完西溪新刊 열여춘향슈졀가 完西溪書鋪 서계서포와 다가서포를 중심으로 발간된 완판방각본 한글고전소설은 서울의 경판본과 비교되어 전국적으로 팔리게 되었다. 특히 완판본 한글고전소설은 판소리계 소설이 중심이 되었고, 영웅소설이 대부분이었다. 경판본과 비교하여 3배 정도의 분량이 많고 서사구조가 잘 짜여 있으며, 또한 전라도 사투리가 많이 들어 있어서 그 재미가 매우 풍부하였다. 전주 천변에 있던 칠서방에서는 七書(四書三經)를 비롯하여 32종의 판매용 책을 간행하였다. 여기서 사용한 七書 冊板은 1870년 전주의 河慶龍(하경룡)이 감영의 책판을 임대소장하여 출판한 것이다. 이 全州府 河慶龍 藏板(전주부 하경룡 장판)의 간기를 갖는 책판은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매우 유명한 책판이다. 칠서방은 서울의 ?東書館(회동서관)과 함께 大韓每日申報(1908년 07월 04일자)에 최신 신간 서적광고를 냈다. 칠서방은 1908. 6. 6.부터 1908. 7. 19까지 황성신문에 32차례의 서적 광고를 냈다. 20세기 초, 일제의 간섭으로 판권지를 붙이게 되면서 구체적으로 출판소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 서점들은 서울, 대구 등 전국과 교류를 하는 매우 큰 출판사로 자리하고 있었다. 西溪書鋪 (서계서포, 탁종길, 1911), 多佳書鋪(다가서포, 양진태, 1916), 文明書館(문명서관, 양완득, 1911), 完興社書鋪(완흥사서포, 박경보, 1912), 昌南書館(창남서관, 장환순, 1916), 七書房(칠서방, 장환순, 1916), 梁冊房(양책방, 양승곤, 1932년) 전주가 교육의 도시로 일컬어진 것은 주로 희현당과 완판본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현재 전주시, 전주역사박물관, 전주완판본문화관, 전북대학교 등에 보관된 완판본 책을 매우 소중히 다루어야 할 것이다.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인 서계서포와 칠서방에서 발간한 책과 이 책방을 운영한 모든 사람들은 앞으로 전주문화를 이야기하는 데 필수적인 문화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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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25 20:37

[한바탕 전주 즐기기] 전주 완산꽃동산 사진 스폿 Best 3

2019년 전주 벚꽃의 개화 시기는 작년보다 1주일 이상 빨라졌다고 합니다. 예상치 못한 시기에 벚꽃이 만개하면서 벚꽃놀이를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내년을 기약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거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벚꽃이 지는 시기는 곧 완산꽃동산의 봄꽃 개화를 알리는 시기이기도 한데요! 오늘은 충분히 누리지 못한 꽃놀이에 아쉬움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겹벚꽃이 만개하는 완산꽃동산의 사진 스폿을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매년 봄마다 화려한 꽃들이 반기는 전주완산꽃동산은 전주한옥마을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습니다. 겹벚꽃, 철쭉, 영산홍, 꽃사과 등 화려한 봄꽃들이 즐비한 곳으로 4월 중순을 시작으로 4월 말까지 겹벚꽃이 만개할 때쯤 많은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입니다. 많은 분이 완산꽃동산의 만개 시기를 궁금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완산꽃동산은 4월 셋째 주를 기준으로 약 80% 정도 개화가 되었는데요. 4월 마지막 주 최고 절정을 이룰 것으로 예상됩니다. ​ 꽃동산 정상에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정자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형형색색의 분홍빛 카펫으로 수놓은 아름다운 겹벚꽃과 완산꽃동산의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습니다. 완산꽃동산에는 겹벚꽃 터널이 3곳으로 나뉘어있습니다. 첫 번째 터널은 전주완산시립도서관 인근에서 걸어 올라오다 보면 바로 찾으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터널은 완산칠봉 출구로 가는 길에 있습니다. 양쪽에 겹벚꽃이 줄을 지어 터널을 이루고 있어 가운데 서 있기만 해도 인생 샷을 찍을 수 있는 스폿입니다. 세 번째 터널은 꽃동산 중심부에 있는 겹벚꽃 터널입니다. 중심부에 위치한 겹벚꽃 터널은 만개 시기에 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는 점 미리 참고해주세요! 군락을 이루고 있는 철쭉 스팟은 꽃동산의 숨겨진 스팟 중 한 곳입니다. 철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철쭉 군락 내부로 들어가면 철쭉에 둘러싸여 몽환적인 느낌의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도심 속에서 즐기는 4월 꽃잔치, 전주 완산꽃동산. 이번 주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따뜻한 봄 햇살 아래서,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글사진 = 전주시 블로그 기자단 임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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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25 16:28

[카드뉴스] 군산 불주사 희개미 습격

  • 기획
  • 전북일보
  • 2019.04.25 10:34

[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프롤로그

전북일보사 등 전국 주요 9개 신문사로 구성된 한국지방신문협회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건명원 원장의 글을 기획해 게재합니다. 최교수는 한국의 인문학 바람을 이끄는 대표적인 철학자로 삶과 세상을 읽는 통찰력과 혜안을 제시할 것입니다. 새로워져야 할 때, 새로워지지 않으면 현재 가지고 있는 새로움 정도가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급속하게 더 낡아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한 단계 도약해야 할 때, 도약하지 못하면 지금 수준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급속한 하강을 하게 되는 것 또한 세상의 이치다. 우리는 지금 답답한 처지에 있다. 중진국의 함정이라고도 한다. 말레이시아, 태국, 브라질,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나 칠레도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대표적 사례다. 우리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말들이 있어 온지 오래다. 2013년 한국 경제를 끓는 냄비 속 개구리에 비유하면서 한국의 침체와 하락 가능성에 경종을 울렸던 컨설팅 업체 맥킨지가 2018년에 한국 경제가 더 나빠졌다고 재차 경고를 했다. 한국 경제는 여전히 물이 끓는 냄비 속 개구리 상태다. 5년 전보다 물 온도는 더 올라갔다. 나는 이 말 속에서 날카로움도 읽지만 조롱도 발견한다. 이런 조롱을 받을 나라는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세계에서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표현하면서 박수를 보내주던 일이 그리 오래전도 아니다. 현대사에서 한강의 기적을 말할 때, 독일이 이룩한 라인강의 기적도 함께 말하지만, 기적이라면 한강의 기적만이 기적이다. 독일의 그것은 있다가 없어진 것을 회복한 것이지만, 우리는 없던 것을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적을 이룬 나라고, 기적을 이룬 국민이다. 이런 기적을 이룬 나라는 사실상 인류 현대사에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식민지 시절을 보내다 독립하여 이 정도의 성취를 이룬 나라가 대한민국 외에는 없다.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룬 유일한 나라다. 원조 받던 국가에서 원조 하는 나라로 탈바꿈한 것도 우리가 유일하다. 자원과 기초적인 물적 토대 없이 이 정도의 발전을 이룬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해냈다. 다른 나라들은 모두 식민지 착취를 통해서 발전의 토대를 갖췄지만, 우리는 외부의 착취 없이 우리만의 힘으로 이룬 것이니 발전의 내용 또한 다른 나라와 비교 하자면 더 도덕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높이는 딱 여기까지라는 점이다. 끓는 냄비 속에 있으면서도 뜨거워지는 줄을 모르는 형국이다. 기적을 이룰 정도로 그렇게 근골을 잘 사용하고 영특하던 우리가 끓는 냄비 속에 있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무지 속으로 빠져버렸다. 우리는 한계에 갇혔다. 우리를 한계에 가둘 정도로 몸에 밴 익숙한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따라 하기라고 표현할 수 있는 종속성이다. 해방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룬 발전과 번영은 이 따라 하기의 속도와 효율성이 빚어낸 결과다. 우리는 물건을 우리가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돈을 벌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만들기 시작한 것을 들여와 만들어 돈을 벌었다. 우리가 만든 제도로 우리 삶을 제어하고 북돋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만든 제도를 들여와 우리 삶을 거기에 맞췄다. 우리가 독립적으로 한 생각으로 우리의 세계관을 삼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만든 철학을 우리의 비전으로 하며 살았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이룬 발전과 번영의 속살이다. 이 일을 세계 유례없이 잘해냈다. 그러나 따라 하기로 살 수 있는 높이는 여기까지다. 따라 하기에 습관이 되면 삶의 태도와 사유 구조가 한 쪽으로 치우치거나 종속적인 삶을 살기 쉽다. 그렇게 되면, 이익보다는 명분에 집착하고, 지적이기 보다는 감각적이고, 실재보다는 도덕에 빠지며, 본질보다는 기능에 집중한다. 명분과 도덕은 정해진 기준을 수행하는 일이므로 과거의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태도에서는 미래를 여는 도전보다는 과거를 헤집는 일에 빠진다. 당연히 이미 알고 있는 것이나 믿고 있는 것만을 수행하려 들지, 그것들을 바꿔 새로움을 기약하는 혁신적 도전에 나서지 못한다. 사회가 멈추고 썩기 시작하는 이유다. 새로워져야 할 때 새로워지지 못하면, 썩는다. 도약해야 할 때 도약하지 못하면 하강한다. 우리는 조선 말기에 이미 경험했다. 이 나라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우리가 다급한 이유는 조선 말기 다산 선생의 이 절절한 경고가 지금 우리에게 어느 하나 어긋남 없이 해당되기 때문이다. 국가 단계의 높이에서 통치력을 행사했던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이 마지막이다. 김대중 대통령 이후의 통치력은 감성적 민족주의에 매몰되거나 권위주의적 시대가 남긴 탐욕과 특권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과거의 운동권 이념을 넘어서지 못한 상태에서 반대쪽 진영을 부정하려는 기능적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정도 이상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이명박과 노무현 사이나 박근혜와 문재인 사이에 있는 수평적 차이를 수직적 차이로 착각하지 말자. 높이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다. 같은 높이에서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있을 뿐이다. 이게 나라냐라는 구호로 시작한 진영이 이젠 이건 나라냐라는 말을 듣는다. 이게 나라냐라고 주장한 쪽과 이건 나라냐라고 주장한 쪽 사이가 얼마나 멀까? 4대강 보를 만든 쪽과 허무는 쪽 사이는 또 얼마나 멀까? 같은 높이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방송 장악은 어느 정권에서나 똑같다. 안하무인의 인사, 어용 기자들의 득세, 표현의 자유 억압, 불통, 협치 실종, 권력의 청와대 집중, 낙하산 인사, 블랙리스트 등은 어느 정권에서나 모두 나타났다. 다름이 없다. 같은 높이에 있으면서는 사실 다르기가 더 어렵다. 다름이 없는 이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아무리 다르다고 각자 주장해도 모든 진영이 실제로는 같은 높이의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계를 뚫고 올라서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점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자. 즉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법으로는 이미 할 일을 다 해버린 민족이라는 사실이다.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도달할 그 높이에 이르는 도전 이외에는 가져야 할 사명도 달리 없다. 중진국의 한계에 이른 우리는 이제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도전에 나서야 한다. 전술적 차원에서의 사고를 전략적 차원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 대답에 익숙한 지적 활동성을 질문을 시도하는 방향으로 바꿔야 한다. 건국 세력이 산업화 세력에 의해 도태되고, 산업화 세력이 민주화 세력에 밀려나는 과격한 운동을 통해서 우리의 역사가 진보했듯이 이제는 민주화 세력도 도태되어야 한다. 민주화 세력도 이미 구세력이다. 민주화 세력을 도태시킬 새로운 세력의 형성을 도모해야 한다. 당연히 창의적이고 독립적인 삶의 태도가 필요해진 이유다. 따라 하기로 갈 수 있는 최고점까지 왔으니, 따라 하기가 아닌 방법으로만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 다른 결과는 다른 방법으로만 얻을 수 있다. 다른 결과를 기대하며 방법과 태도를 바꾸는 것을 혁신이라고 하지 않은가. 그런데 전략적이고 선진국적인 높이로 상승하는 일이 가능하기는 한가?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문명의 파라다임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상황에서라면 이는 불가능에 가깝다. 1820년 대분기 이후에 후진국과 선진국 사이의 교체는 없었다. 이 말은 한 번 후진국은 계속 후진국에 머물기 쉽고, 한 번 선진국은 계속 선진국이기 쉽다는 말이다. 각 단계를 결정하는 높이의 시선에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축복이 왔다. 바로 몇 백 년 계속되던 파라다임이 깨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기존의 파라다임에 균열이 생기고 틈이 생긴 것이다. 후발 주자들이 자신의 단계를 뛰어넘어 한 단계 더 상승할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존의 파라다임이 깨져야 하는데 우리의 국력이 가장 강해진 지금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 문제는 우리가 그 축복을 직시하고 있는가의 여부와 그 축복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가의 여부다. 애석하게도 아직까지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본질보다는 기능, 실재보다는 도덕, 이익보다는 명분, 질문보다는 대답에 더 비중을 두는 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시선이 항상 미래보다는 과거를 향해 있다. 미래를 여는 도전보다는 먼저 과거를 한 점 오차 없이 헤집는 일을 해야 더 진실하게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도록 훈련되었다. 따라 하기에 익숙해지면 결국 미래보다 과거를 더 중시하게 되는 심리를 갖게 된다. 입으로는 미래를 말하지만 사실은 과거를 산다. 그래서 과거의 규정으로 미래의 전개를 제어한다. 과거에 정해진 규제로 있어본 적이 없던 미래의 변화를 제어하는 일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빅데이터의 시대에 데이터를 모으지 못한다. 초 융합 연결의 시대에 원격 의료를 막는다. 4차 산업혁명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인 공유경제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이것은 과거로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더 큰 문제는 그렇게 해야 진실한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우리가 훈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일어나는 문명적인 혁명의 시기에도 과거로 과거로만 계속 회귀하려 한다. 이 절박한 시점에 삶의 방식이나 태도가 전면적이고도 근본적인 각성을 통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각성이 없으면 여기까지만 살다 가지 이 이상의 삶을 누리지는 못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후손들에게 영광이 아니라 치욕을 물려줄 수도 있다. 진영 지키기에 빠진 우물안 개구리들은 역사의 열차에서 내려야 한다. 낡은 문법을 지키는 투사들은 이제 필요 없다. 차라리 경쾌한 도전에 나서는 젊은 무모함이 더 의미 있다. 우리가 어떻게 생존해 온 민족인데, 우리가 어떻게 되찾아 어떻게 발전시킨 나라인데, 여기까지만 살다가도 괜찮겠는가? 낡은 문법과 결별하여 새로운 문법으로 무장하고 새로운 태도를 가져야만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밖에 없다. 부질없다, 부질없다. 정해진 모든 것.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모든 언어들, 모든 생각들. 백설의 새 바탕에 새 이야기 새로 쓰세. 새 세상 여는 일 말고 그 무엇 무거우랴. 새 말 새 몸짓으로 새 세상 열어보세. -최진석(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 ------------------------------------------------- ■필자 약력 ◆글:최진석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건명원 초대원장 서강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 석사, 베이징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 저서 탁월한 사유의 시선 나는 누구인가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저것을 버리고 이것을경계에 흐르다 ◆삽화:송필용 전남대 미술교육과, 홍익대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서울 학고재갤러리, 이화익갤러리 등 개인전 20회, 1996년 제2회 광주미술상 수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작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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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24 20:20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음악과 노래와 춤이 있는 민속악

대학원 시절에 우리음악의 악(樂)의 개념에 대해 토론한 기억이 있다. 서양음악과 달리 음악과 노래와 춤이 함께 어우러지는 특징이 있다고들 했다. 지금 과연 그럴까? 서민 예술로서 음악과 노래와 춤이 함께 어우러진다는 민속악. 과연 그런지 두 명의 전문가들에게 물었다. 국립민속국악원 류기형 예술감독. 50대 중반을 맞이한 그는 30년 동안 마당극패 우금치를 이끌어온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 전라북도립국악원 관현악단장 조용안. 많은 이들이 그를 전라북도 판소리북의 대들보로 여긴다. 몇 해 전 쉰을 넘어선 그는 40년 가까이 판소리북을 치고 있다. 남원과 전주에서 이들을 만나며 그들이 겪고 있는 민속악의 오늘과 바라는 미래를 듣고자 했다. △류기형 국립민속국악원 예술감독 악가무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열린 사고 필요 류기형 감독을 만난 건 4월 비오는 어느 날이었다. 남원에 있는 국립민속국악원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업무를 바삐 끝내고 온 그는 필자의 질문에 서슴없이 답했다. 필자는 이렇게 물었다. 우리 민속악은 음악, 노래, 춤이 어우러진다는 총체적인 악(樂)의 예술관을 가지고 있지요. 서민적이라는 특징도 있고요. 총체성과 서민적 성격의 관점에서 민속악을 접하고 있는 현재와 바라는 미래는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류 감독은 소통과 동시대성을 강조했다. 민속악에서 중요한 것은 대중과의 소통이죠.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서 악, 가, 무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열린 사고가 필요하고요. 하지만 현재는 음악은 음악, 노래는 노래, 춤은 춤으로 가르는 장르화된 사고가 많은 듯합니다. 민속악은 시대에 살아있어야 하잖아요? 동시대성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명인, 명창 선생님들을 보면 장르에 한정되지 않고 음악, 노래, 춤을 두루 익히고 펼쳤잖아요? 분야별로 장르화되고 개별화 되는 현상은 일면 서구식 제도 교육의 영향으로도 보입니다. 전공을 세분하고 전공에만 집중하게 하는 현상이 있잖아요? 장르별로 개별화 되다보면 공연에서 악, 가, 무를 갖춘 공연자 10명이면 될 것이 50명도 더 필요하게 되는 상황이 되요. 오늘날 공연시장에서는 다재다능을 필요로 하는 것이 트랜드인데 우리 민속악의 흐름은 그와 반대로 가는 것 같아서 아이러니해요. 공연자들의 문제의식이 중요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류 감독은 겪고 있는 오늘에 대해 얘기했다. 공연현장에서는 생동감 있는 사고가 필요합니다. 내가 왜 그것까지 해야 하나? 하는 식의 경직성을 극복해야지요. 현재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있습니다. 주말 상설공연이 있는데 일종의 갈라쇼 형식의 공연이에요. 이 공연에 연출 개념을 도입하고 사회자를 없애고자 했죠. 크고 작음을 떠나서 공연은 관객의 마음을 담아야 하잖아요? 관객의 마음은 그릇에 담긴 물 같아서, 관객의 마음을 담은 그릇이 공연 내내 고요하게 물위에 둥둥 떠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흐름을 만드는 것이 연출이고요. 그것을 시도하고자 했던 것이죠. 하지만 사회자를 없애는 등 기존과 달라진 패턴에 대한 문제제기를 좀 받았어요. 어디나 마찬가지겠죠. 여기만 그런 게 아니고요. 변화는 언제나 처음에는 낯설기 마련이고, 문제제기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소통하고 믿음이 생기면 될 것이라고 봐요. 민속악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좋은 방향으로 함께 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조용안 전 전라북도립국악원 관현악단장 민속악은 틀이 없어 조용안 명고. 그를 만난 건 전주 아중리에 있는 커피숍이었다. 역시 4월 어느 날에. 민속악에 대한 마찬가지 질문에 옛 선생님들께 들은 농담을 얘기해줬다. 민속악은 민간의 음악이고 서민적인 음악이죠. 궁중음악이나 무속 등 여러 분야에서 서민의 생활로 함께 옮아온 것이라고 봐요. 오늘날에는 민속악이 보편화되었죠. 예전에는 소위 잽이들만 하는 음악이었지만. 과거에는 궁중음악하는 사람들이 민속악하는 사람들을 은근히 무시하고 그랬대요. 그러면서도 몰래 민속악을 했다고 하더군요. 정악하시는 어떤 선생님께서 나도 (공연장에서) 병풍 뒤에서 산조 여러 번 불었다.는 농담을 자주 하셨거든요. 병풍 뒤에서 악기를 분 정악잽이들이 꽤 있었다고 하더군요. 몰래 했던 민속악이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고루 접하는 음악이 되었죠. 궁중음악이나 정악은 규정된 틀이 명확한 음악이죠. 반면 민속악은 틀이 없어요. 그래서 발전가능성이 많죠. 그리고 일류와 삼류의 구분도 심하고요. 민속악이 음악, 춤, 노래가 함께 했던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재삼 물었다. 조용안 명고는 명인들의 교류를 얘기해줬다. 예전에는 명인들끼리 서로 교류를 자주했대요. 소리 명인에게 춤 명인이 가서 소리 배우고, 춤 명인에게 기악 명인이 춤 배우고, 서로 그랬대요. 전국 각지의 명인들이 서로 그랬다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진도 씻김굿의 박병천 선생과 진주 검무 김수악 선생이 자주 교류했대요. 서로 번갈아 가며 춤추고, 반주하고, 소리하고 그렇게 예술 자체가 좋아서 즐기고 교류했다는 거에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음악과 노래와 춤이 함께 했고요. 지금은 어떤지 물었다.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지금은 한 가지하기에도 버거운 상황이에요. 살기에 너무 바빠요. 중간세대인 저라도 명인 선생님들의 그 감성과 멋을 후대들에게 이어주는 매개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사람들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표현해 주는 예술을 찾아 왔다. 민속악은 서민들을 대변하는 예술이었고 지금은 좀 더 보편화되었다. 시민들이 주인인 오늘날, 자신들의 예술로서 시민들은 과연 민속악을 택하고 있는가? 류기형 감독과 조용안 명고는 각자의 자리에서 민속악의 오늘을 겪으며 좀 더 밝은 내일을 꿈꾸고 있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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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23 17:56

[뚜벅뚜벅 전북여행] 전주 덕진공원 : 싱그러운 봄날의 풍경

떠올리기만 해도 기분 좋은 계절, 봄이 찾아왔습니다. 방구석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이대로 봄을 떠나보내기엔 아쉬운 노릇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설레는 이 계절과 어울리는 전주 덕진공원을 소개해드릴게요. 다 함께 봄을 만끽하러 떠나볼까요? 전주 덕진공원은 덕진구 일대에 자리 잡은 넓은 유원지로, 시민들의 편안한 쉼터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이곳은 여름철에 꼭 가봐야 하는 장소로도 유명해요. 매년 7월~8월 무렵엔 연꽃이 활짝 펴서 수려한 풍경을 자아냅니다. 하지만 사실 여름철뿐만 아니라 사계절 언제 어느 때라도 방문하면 좋은 곳이에요. 봄에는 수양버들과 창포가 무성하게 피어 있답니다. 또한 인공호인 덕진호를 품고 있어서 많은 수생 식물과 야생 오리를 관찰할 수 있어요. 시민들의 쉼터이자 자연의 보고와도 같은 공간입니다. 호반을 가로지르는 연지교는 가볍게 걷기 참 좋아요. 호수 바람이 제법 선선하게 불어와서 다가올 여름철 늦더위도 식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덕진공원이 매력적인 이유는 누구와 와도 좋다는 것이에요. 혼자, 가족, 연인, 친구 등 상관없답니다. 혼자와도 볼거리가 많아 쓸쓸하지 않습니다. 공원에서 힐링을 즐길 수 있어요. 이곳에선 딸을 위하는 어머니의 마음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사진에 결코 담을 수 없는 마음을 찍어봤습니다. 공원 풍경도 멋지지만, 사람 풍경도 참 아름답지 않나 싶어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새까맣던 머리가 어느새 백발이 되었어도 세 명의 우정은 영원할거라 생각합니다. 할머니 세분께서 소녀처럼 연신 까르르 웃음 짓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때론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가 되어주기도 해요. 그 중 벽진폭포에서 사진을 찍어보는 건 어떠세요? 폭포의 청량한 분위기가 어우러져 사진이 풍성해질 거라 생각해요. 삶을 살다보면 언제나 역사의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배우며 자랐고, 또 역사를 만드는 중입니다. 덕진공원 역시 특유의 역사를 품은 공간인데요, 공원 곳곳에선 역사와 관련된 조형물이 보입니다. 녹두 장군으로 유명한 전봉준 동상도 보입니다. 조선 후기 동학 농민 항쟁의 지도자로서, 부패한 관리 규탄 및 시정에 힘쓰셨지요. 이를 기리는 동상은 1981년에 설치됐다고 합니다. 더불어 목가적인 서정시의 대가인 신석정 시인의 시비는 물론, 애국지사를 위한 동상,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3층 석탑도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걸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여러 조형물을 보며 역사 회고도 가능해요. 전주덕진공원 위치 : 전북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1가 1314-4 /글사진 = 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김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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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23 16:34

[찾아가는 군산이야기] 군산 오성산의 매력 : 삼나무 숲 우거진 군산의 진산 오성산에 올라보자

군산은 평야 지대가 많다 보니 높은 산이 없습니다. 최고로 높은 산이라고 해봤자 230m의 망해산, 그다음이 227m의 오성산입니다. 해수면과 접하다 보니 내륙으로 치면 500~600m는 되는 산인데요, 오늘 오르려는 오성산은 군산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진산이라 불리는 명산입니다. ​오성산에 오른다고 하니 등산? 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상까지는 아스팔트로 잘 포장된 도로가 이어졌기에 승용차로 편하게 오를 수 있습니다. 물론 등산 코스도 있습니다. 오르는 길 또한 드라이브하기에 딱 좋은 코스인데요, 전나무 숲길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공기는 말로만 듣던 피톤치드입니다. 미세먼지가 나쁨으로 표시된 날이지만, 여기서만큼은 창문을 열고 달려도 좋습니다. 오성산 드라이브 코스는 두 곳에서 오를 수 있는데요, 하나는 금강철새조망대 쪽에서 구불1길인 비단강 길을 따라 오를 수 있고, 또 한 곳은 군장대학교 쪽에서 오를 수 있습니다. 군장대학교 입구에서 오성산 정상까지는 약 2km로 자동차로는 5분이면 오를 수 있지만, 걸어간다면 40분 정도 소요되는데요, 자전거 동호인들도 즐겨 찾는 길로 길이 좁고 구비 진 길이 많아 교행 시 주의가 필요하며 경적은 금물입니다. 5분 정도 걸려 오성산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다 보니 정상은 모처럼 한가합니다. 이곳에는 전망대와 기상대가 있으며 패러글라이딩 활강장과 운동기구가 있어 평상시에도 많은 군산시민이 찾는 곳인데요, 백제인의 우국충절의 기상을 돋보인 오성인의 묘가 있어 해마다 9월이면 오성문화제전이 열리는 곳이죠. 오성인의 묘까지 올라가는 계단 등 전체적으로 새롭게 단장하는 공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좌우로는 배롱나무가 심어져 있어 꽃이 필 무렵이면 환상적인 계단이 되는데요, 군산시에서 얼마나 오성인의 묘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오성산은 군산의 진산으로 군산 시민들의 정신적 지주인 명산입니다. 바로 여기에 묻힌 백제 오성인의 호국 정신을 이어받았기 때문인데요, 영조 33년인 1757년부터 1765년까지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은 전국 읍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임피현 고적조 기록을 보면, "백제 말기 부여로 쳐들어가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오성산에 이르러 안개로 길을 잃고 헤맬 때 마침 장기를 두고 있는 다섯 노인을 만나 백제의 수도 사비로 가는 길을 묻자 다섯 노인이 '백제를 치러 온 적군에게 길을 가르쳐 줄 수 없다'고 항거했는데, 이에 격분한 소정방이 검을 빼 목을 잘랐다"고 합니다. 후에 소정방이 이들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오성산 위에 그들을 다섯 노인을 묻고 극진히 장사를 지냈다고 하는데요, 오성인의 묘는 백제인의 충절을 표상하고 있으며 군산문화원에 오성문화제전위원회를 두고 해마다 오성문화제전을 개최해 오성인의 넋을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해도 오성문화제전은 오성산에서 열리는데요, 봉제 선언, 헌공다례, 초헌아헌종헌례, 독축, 헌시 낭송, 헌화, 오성인의 혼풀이로 오성대제례가 열리고 이어 개막식과 문화행사로 이어집니다. 오성산의 또 다른 명물은 패러글라이딩 활강장입니다. 날이 좋은 날에는 이곳에서 창공을 나는 패러글라이딩의 물결을 자주 만날 수 있는데요, 오늘은 강풍주의보가 내려진 날로 패러글라이딩 활강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습니다. 하지만, 군산 앞바다까지 막힘없이 펼쳐진 장면을 보니 가슴이 탁 트이는데요, 언젠가는 꼭 이곳에서 군산의 하늘을 날아보고 싶습니다. 전망대에서 군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봅니다. 철새조망대와 금강생태공원을 끼고 유유히 흐르는 금강을 봅니다. 군산항까지 막힘없는 조망이 시원합니다. 역광에다 미세먼지도 있어 깨끗하지는 않지만, 이 정도 뷰만으로도 힐링이 됩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해넘이까지 보면 딱 좋겠는데요, 차가운 강풍으로 두텁지 못하게 차려입은 옷을 원망해 봅니다. 금강 너머는 충남 서천군 장항입니다. 야트막한 구릉 사이로 산보다 두 배는 더 높은 굴뚝이 보이는데요, LG산전 장항공장입니다. 옛날에는 우리나라 비철금속제련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장항제련소로 굴뚝산업의 메카였습니다. 철새조망대도 가까이에서 봅니다. 군산에 올 때마다 들러보지만, 조류독감으로 들르지 못한 곳입니다. 철새의 군무의 기하학적 무늬를 꼭 보고 싶었는데 말이죠. 오성산은 군산 구불길 1코스인 비단강 길이 지나는 곳입니다. 금강이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펼쳐가는 길로 채만식 문학관, 금강철새조망대, 금강호관광지, 오성산, 나포십자들로 이어지면서 군산의 전설과 역사, 자연과 생태를 모두 만날 수 있는 길입니다. 총거리 17.2km에 대략 6시간 정도 걸리는데요, 점심을 먹고 군데군데 살피다 보면 하루는 온전히 잡고 출발해야 합니다. 날 좋은 날 바람결에 묻혀 금강 따라 비단강 길을 걸어보는 것도 군산을 아름답게 만나는 방법이 될 것인데요, 금강을 오성산에서 바라보는 것도 군산 여행의 백미인 것 같습니다. /글사진 = 심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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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23 16:28

[참여&소통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우리밀 살리기 : 글로벌 시장과 로컬 시장의 균형이 필요하다

우리밀의 자급률이 1% 이하로 떨어지고 3년째 재고가 쌓여가면서 밀 생산농가도 반절 이상 줄고 있다. 우리는 처음에 미국으로부터 무상으로 밀가루를 공급받았지만 지금은 수입 밀가루에 의존도가 99%에 이르렀다. 수입 곡물상들은 돈방석에 앉아있고 세계 거대 곡물기업들은 종자의 권한까지 다 가져갔다. 세계화 시장에서도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지려면 지역을 지켜야 하고 지역 생태계가 유지되어야 수출과 수입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자국의 생태계를 풍요롭게 지키면서 필요한 부분은 수입해서 적정하게 교류해야 한다. 자국의 식량 재화 가격이 적자가 나는 순간 생태계는 빠르게 무너진다. 우리밀이 재고가 쌓였는데 어떤 농민들이 밀농사를 짓겠는가. 겨울철 밀은 이산화탄소 흡수에 큰 역할을 하고 있어서 기후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에도 수입밀이 가격을 후려쳐 들어오는 세계화 시장에서 로컬 생태계는 지탱하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졌다. 수입밀의 과잉공급으로 우리밀 시장은 이미 숨넘어가기 직전이다. 우리밀은 수입밀에 비해 3배~6배가량 비싸서 가격경쟁력이 떨어져서 우리밀 가공업체들이 줄고 있어서 밀 생산도 줄고 있다. 밀의 글로벌 시장 의존도를 줄이고 로컬 시장을 복원하지 않는다면 겨울철 밀농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수입밀 의존도 극심우리밀 고사 위기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밀은 7~8종이 전부인데 시에이치에스(CHS), 카길, 시비에이치(CBH), 글렌코어, 시지 아이(CGI) 등 글로벌 공룡기업들이 생산하고 제분하고 유통하고 있다. 그 기업들을 통해서 국내에도 60년 동안 지속된 8개 제분업체의 과점구도를 유지하면서 수입해오고 있다. 특히 빅 3, 대한제분, 씨제이(CJ), 제일제당은 전체 밀가루 시장의 75%가량을 3등분하고 있다. 후발주자로 파리바게트의 spc는 밀다원을 인수하면서 수입 밀가루 생산량은 4년 만에 2013년 19만t을 달성하면서 제분업계 4위 삼양사의 생산량과 맞먹고 있다. 어쨌든, 농가들은 밀 농사를 포기하고 있고 1970년대 초 밀 자급률은 15%를 웃돌고 농사가 잘된 해에는 40%에 육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밀가루 무상원조로 국내 밀 생산기반은 빠르게 약화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정부의 분식장려정책으로 수입밀 의존도가 심화됐고, 1982년 밀수입 자유화, 1984년 국산 밀 수매제도 폐지 등이 이어지면서 1990년 국내 밀 자급률은 0.05%까지 떨어져 우리밀은 완전히 사라질 지경에 처했다. 과잉 무역은 고용 없는 성장을 부르고 세계화는 빈곤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글로벌 시장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에서 해결할 수 있는 기본 식량을 수천 km 떨어진 곳에서 수입하지 말자는 뜻이다. 장거리 무역을 모두 폐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국 생태계를 무너뜨리는 무역을 하지 말고 불필요한 운송을 줄이고 지역사회경제를 튼튼히 하자는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를 줄이고, 기업이 독점하고 장악하는 글로벌 시장과 로컬 시장의 균형을 잡자는 것이다. 식량은 전 인류에게 날마다 필요한 것이므로 생산과 운송, 판매에 작은 변화가 생겨도 큰 파장이 일어날 수 있다. 비효율을 감추는 보조금, 대다수 국가는 농업 보조금을 대규모 산업 농기업에 몰아준다. 세계 무역기구 회원국 사이에서 보조금의 2/3는 부유한 거대 농가가 받는다. 농업 연구 자금도 생명공학과 화학, 에너지 집약 단일품종 농업에 크게 편중돼 있다. 어떤 평가에 따르면 해마다 전 세계에서 식량과 농업 연구에 쓰이는 돈은 490달러에 달하는데 유기농 규격을 준수하고 거기에 부합하는 지식과 기술, 수단에 쓰는 돈은 1% 미만이다. 세계화를 지원하는 공공정책의 방향을 지역화로 바꾸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까닭은 전 세계의 정책 결정권자들이 대기업과 은행의 요구를 계속 들어주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의 과도한 무역이 낮은 가격으로 소비자에게 내놓을 수 있는 이유는 물류와 유통에 지원되는 어마어마한 보조금 때문이다. 또한 그 비용은 환경과 생태계가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다. 탄소발자국을 높이는 화력발전소 때문에 당장 우리나라가 미세먼지로 고통받고 있지 않는가. 지역에 필요한 재화는 수출 시장 의존도를 높여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공기관부터 우리밀 사용을 장윤영 천년누리 전주빵 대표 얼마 전에 농촌진흥청에서 우리밀 관련 행사가 있어서 다녀왔는데 우리밀을 살려야 한다고 하면서 농촌진흥청 1층 매점에는 수입밀로 만든 베이커리 제품만을 팔고 있다. 농촌진흥청 주도로 밀 품종 육종을 추진하고 있다. 농식품부는 밀 전용 농기계 보급과 수확 후 건조저장 가공시설 확충을 진행 중이라는데 정작 농촌진흥청에서는 수입밀로 만든 빵을 팔고 있으니 비싼 우리밀을 사용하면서 먹거리 원칙을 지켜가고 있는 지역 소농들과 우리밀 가공업체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건 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 현상이다. 삼락농정을 주장하는 전라북도의 도지사 인증상품도 다수가 수입밀과 수입농산물로 가공한 제품들이 다수다. 아무런 혜택도 없는데 누가 비싼 우리밀을 사용하겠는가. 농식품부와 농촌진흥청은 국민들과 기업들에게 우리밀을 많이 써달라고 당부만 하지 말고 우리밀을 쓰고 있는 가공업체들이 비싼 우리밀을 포기하지 않고 쓸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줘야 한다. 또 모든 공공기관에 우리밀로 만든 제품이 들어갈 수 있도록 각종 인증과 혜택에 인센티브를 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서 주어야 한다. 수입밀의 100% 대체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1% 자급률 위기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1980년대에 밀 자급률이 40% 이상이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가능한 것부터 차근차근 실행하고 충청남도의 사례처럼 지자체에서 도와준다면 밀의 로컬 시장은 복원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아질 수 있다. 밀의 국가수매제도 부활을 추진하고 있고 국립 식량과학원에서 밀연구팀을 마련하여 밀의 자급률을 높이고 품종을 연구 개발하기 위한 전담팀을 꾸렸다고 하니 군대와 학교 등 공공급식에서 우리밀의 로컬 시장이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해보겠다. 또한, 정부와 지자체는 향후 천지가 개벽할 통일의 시대를 준비하는 현시점에서, 지속 가능한 환경과 지속 가능한 먹거리, 지속 가능한 경제에 대한 공약들을 꼭 실천해주기를 바랍니다. /장윤영 천년누리 전주빵 대표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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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22 17:49

김천환 전북개발공사 사장 "지방공기업 사회적 역할 충실, 도민 사랑 이끌어 낼 터"

택지개발 사업을 시작으로 임대주택 보급 사업으로 확대된 전북개발공사가 관광에 기반한 모항해나루가족호텔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데 이어 지금은 새만금 신재생에너지 분야 개발사업에 뛰어들었다. 명실공히 글로벌 공기업으로서 자리를 매김하고 있다. 올해 처음 시작하는 신재생에너지 사업은 새만금 수상태양광 사업으로 전북개발공사는 지역사회 주도형으로 진행되는 별도의 전북 몫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35년의 토목직 공직생활을 바탕으로 탄탄한 전북의 지도를 그려온 김천환 새만금개발공사 사장에게 거는 기대가 높다. 김천환 사장에게 전북개발공사가 나아갈 방향과 함께 미래 전북을 만들기 위한 청사진을 들어봤다. △35년의 공직생활 접고 공사 수장이 되셨는데 소감은? 전북도에서 최초로 시행된 도의회 인사청문회의 검증을 거쳐 공사의 사장으로 임명돼 막중한 책임감을 느낍니다. 지난 2018년 6월에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전북 발전을 위해 달려온 공직 생활을 마감하면서 도민의 공복으로서 저에게 맡겨진 소임을 대과없이 마쳤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아쉬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그간의 공직 생활 경험을 토대로 제 마지막 열정을 전북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자 전북개발공사 사장 공개 모집에 응모했고, 의회 역시 전북 당면과제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조직관리 능력이 있다고 인정해 줘 중책을 부여 받았습니다. 앞으로 도민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지역발전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공사가 풀어 나가야할 가장 큰 숙제들은 무엇인지요? 전북개발공사의 가장 큰 존재 이유는 다양한 지역개발사업 추진을 통한 도민의 복리향상 및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그간의 택지개발, 관광시설 등 수익사업을 통해 확보된 재원을 서민의 주거안정을 위해 임대주택 등에 재투자하는 공익사업을 추진해왔는데, 최근 대내외적인 경영환경 변화에 따라, 지역개발의 패러다임이 대규모 택지개발 방식에서 지자체와 연계된 소규모 맞춤형 택지개발, 도시재생, 신재생에너지 등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가장 시급하게 추진해야할 사항은 지역 특성에 맞는 사업추진과 매년 고정 수입을 낼 수 있는 안정적인 수익사업 등을 발굴해야 하며, 그동안의 수요자와의 일방적인 소통방식을 쌍방향 소통 방식으로 전환하여 고객만족도 향상도 도모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비록 작은 조직일지라도 큰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조직의 효율성과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는 조직개편도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경영철학과 임기동안 계획은? 지방공기업은 설립 목적에 맞도록 공익성과 수익성이 잘 조화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사의 경영이 성과를 내기위해 단순히 계량적인 경영이익에만 매몰되어서는 안되며, 수익성을 기반으로 공익성이 잘 조화되어야 공기업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진정한 성과가 창출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사는 앞으로 택지개발 및 신재생에너지 사업 등을 통해 발생된 경영수익을 공공임대주택 등 공익사업에 지속적으로 재투자할 계획이며, 이를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 도민의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부 핵심가치 참여, 유관기관 협력강화, 현장중심경영, 직원 소통 강화 등 4대 전략 방향을 설정해 지속 가능한 경영을 실현하겠으며, 공익사업 강화를 통한 공사의 설립목적 달성과 외부고객 및 내부 직원의 만족도를 높여 나가겠다. △올 해 공사가 역점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은? 창립 20주년을 맞은 공사는 사회적 기반의 책임경영을 확립하고, 참여와 협력의 민주적 경영체계를 도입하며, 국정과제 및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등을 경영목표에 반영하고자 미션비전을 재수립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미션비전을 기반으로 공사의 중장기 경영전략을 새롭게 수립해 5년, 10년 후에도 현재와 같이 도민의 공공복리 증진과 공기업으로서 사회적 역할에 더욱 충실해진 전북개발공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공사는 올해에도 무주택 서민을 위한 공공임대주택 건설을 확대하여 5개단지 1972세대(전주 만성 B-2 832, 만성 A-2 830, 군산 130, 진안 100, 무주 80)를 계속 추진하고 있으며,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택지개발사업과 지자체 대행사업을 병행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한 새만금 지역 내 태양광 발전사업 참여 등을 위해 전라북도와 연계하여 새만금개발청과 지속적으로 협의해 나가고 있습니다. △새만금 신재생에너지 추진 사업의 현황과 향후 과제는? 산업통상자원부에서 발표한 재생에너지산업 경쟁력 강화방안에 전북도의 새만금 재생에너지 클러스터 조성사업이 대표사업으로 포함됐습니다. 새만금 재생에너지 클러스터 조성사업은 지난해 10월 문재인 대통령께서 참석한 가운데 열린 새만금 비전 선포식에서 송하진 도지사께서 발표한 사업으로서, 새만금에 태양광 3GW, 해상풍력 1GW 단지조성 등 11개사업이 진행되는 대형 프로젝트 입니다. 지난 3월 군산 새만금산업단지에 재생에너지 제조기업이 공장을 착공해 2022년까지 475억원을 투자해 300여명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새만금 재생에너지 클러스터 조성의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또한 한국수력원자력은 34명으로 구성된 새만금추진단을 출범해 새만금 내수면에 0.3GW 수상태양광을 선도사업으로 추진할 예정이고, 아직 새만금 태양광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사업계획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전북개발공사도 지역사회 주도형으로 전북 몫을 배정받아 추진할 계획으로 있습니다. 우리공사가 참여하는 태양광 발전사업은 지역업체, 지역자재, 지역인재를 최대한 활용하여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것이 당면 과제라 생각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도민을 위한 지방 공기업으로써 공사의 미션인 도민의 행복을 짓는 미래공간 창조를 통해 도민의 사랑을 끌어내겠다. ● 김천환 사장 뚝심과 열정 그리고 소신 제가 가진 장점이라면 바로 뚝심 아니면 열정 아니겠습니까? 특혜란 단어를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전북 발전의 토대만 만들수 있다면 과감한 선택과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토목직 하급공무원으로 시작해 3급 부이사관까지 올라가 전라북도 토목계의 전설로 불리는 김천환 전북개발공사 사장이 제2의 신화를 써 내려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지난 1일 전북개발공사 사장으로 취임한 김 사장은 전북도의 역점사업인 삼락농정, 융복합 미래산업, 여행체험, 새만금 세계잼버리 등의 정책과 공조를 맞춰 지역 발전을 견인하겠다는 계획이다. 김 사장의 경영철학은 바로 뚝심과 열정으로 2019년 한 해는 이를 바탕으로 변화와 혁신을 이끌어 낼 것을 약속했다. 김 사장은 전북개발공사는 비바람이 내리치고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언제도 도민과 함께하는 동행자가 되겠다며 냉철하면서도 뜨거운 가슴을 가진 공정하고 자랑스런 도민의 공기업으로 거듭나겠다고 밝혔다. 이어 단순 계량적인 경영이익에만 매몰되지 않고 , 수익성을 기반으로 공익이 잘 조화될 수 있도록 동료, 직원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하나되어 나가겠다며 전북개발공사는 명실공히 택지개발, 임대주택 사업에 이어 호텔사업, 이제는 신재생에너지사업까지 아우르는 글로벌 공기업으로 나설 수 있는 초석을 다지겠다고 밝혔다. 김 사장은 군산 옥구 출신으로 지난 1984년 공직에 입문해 전주시 완산구청장, 전북도 건설교통국장 등의 주요 보직을 역임하다 지난해 6월 명예퇴직 한 후 지난 4월1일 전북개발공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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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강모
  • 2019.04.21 19:42

[전북의 천리길] 지리산 둘레길 2구간 '운봉~인월'…지리산의 기운을 받으며 흥얼거리며 걷는 길

남원의 요천에는 꽃비가 내리고 폐역이 된 구 서도역에도 벚꽃잎이 하나둘 바람에 날리던 날 지리산 둘레길 2구간을 걷기 위해 운봉을 찾았습니다. 운봉(雲峰)은 지리산 한쪽에 기대어 있어 지리산의 기운을 온전히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운봉에서 인월까지 이어지는 지리산 둘레길 2구간을 사부작사부작 걸으며 힐링의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지리산 둘레길 2구간은 운봉(雲峰)읍사무소에서 시작합니다. 읍사무소에서 인월면(引月面) 가는 방향으로 차도를 따라 걸으면 지리산 둘레길 2구간 시작을 알리는 표지판을 볼 수 있습니다. 표지판이 알리는 길로 접어들어 100여 m 가면 서림공원입니다. 서림공원에는 두 기의 석장승과 당산나무가 있습니다. 장승은 민간 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 입구에 세워 경계를 표시하면서 잡귀를 물리치는 마을 수호신 역할을 합니다. 보통 나무로 만들어 사용하는 데 오랫동안 사용하기 위해 돌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석장승에는 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데요. 벙거지를 쓰고 있는 모습이라든지 자유 분망한 표정이 재미있습니다. 서림공원에서 이런저런 구경으로 시간을 꽤 보냈습니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도착 지점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는 과정이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서림공원을 출발해서 람천 제방을 따라갑니다. 벚나무 꽃길입니다. 벚꽃이 활짝 피려면 일주일 이상 더 지나야 할 것 같네요. 람천을 따라 걷는 길 풍경은 여느 둘레길과 좀 다릅니다. 가까이에는 좌측에는 람천이 흐르고 우측으로는 논과 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운봉평야를 가로질러 걷는 길입니다. 조금 더 멀리 시선을 던지면 왼쪽은 고남산과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오른쪽에는 바래봉과 고리봉이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운봉평야와 지리산 풍경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걷다보면 첫 번째 다리가 나옵니다. 신기교입니다. 신기교를 건너 이제는 반대편 제방길을 걷습니다. 이곳은 벚나무를 늦게 심어 그늘을 만들어주기에는 부족합니다. 대신 신기마을 가까이 가면 화백나무가 맞이합니다. 마을 숲을 복원하기 위해 신기마을에서 심은 나무입니다. 신기마을은 느티나무 마을 숲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신기마을에서 사반교를 건너 다시 반대쪽 제방길로 갑니다. 사반교 위에서 인월 방향을 바라보니 황산이 가까이 보입니다.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크게 무찔렀던 황산대첩의 장소입니다. 황산을 앞에 두고 걸으며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 봅니다. 황산대첩은 고려 말 1380년 왜구들이 오백척의 대 선단을 이끌고 진포(군산)에 침입하면서 시작됩니다. 이때 최무선이 만든 신무기 화포로 배를 불태우고 왜구를 무찌릅니다. 이것이 진포대첩입니다. 여기서 살아남은 왜구들은 옥천을 거쳐 경상도 지역으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왜구들과 합류하여 다시 약탈합니다. 성주, 함양을 약탈하고 북상하기 위해 인월에 주둔하게 됩니다. 이곳에 이성계 장군이 파견되어 황산에서 왜구를 무찌른 것이 황산대첩입니다. 황산대첩을 생각하며 걷다 보니 황산대첩비가 있는 곳까지 왔습니다. 중요한 역사의 현장을 직접 보게 됩니다. 지리산 둘레길 2구간의 장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지리산의 자연경관은 물론 이 지역의 문화, 역사 유적을 함께 볼 수 있답니다. 황산대첩 유적지 안에는 새로 만들어 세운 황산대첩비와 비각이 있지만 주목해야 할 또 하나는 파비각(破碑閣)입니다. 황산대첩비는 조선 선조 때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그때 부서진 비를 보존하고 있는 곳이 파비각(破碑閣)입니다. 황산대첩비 옆에 있는 마을이 비전마을입니다. 황산대첩비와 전각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들어와 살면서 만들어진 마을입니다. 이곳에는 운봉 출신인 가왕 송홍록 명창과 박초월 명창의 생가를 복원해 놓았습니다. 운봉은 바로 판소리 동편제를 탄생시킨 고을입니다. 비전마을을 출발해서 다시 제방길을 따라 걷습니다. 황산 바로 앞까지 왔습니다. 넓은 운봉 들판이 끝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황산정 국궁 수련장 표지판을 지나면 큰 도로에 있는 화수교를 만납니다. 화수교를 건너 운봉 방향으로 가다가 좌측으로 들어섭니다. 여기서부터는 숲길을 이용해서 흥부골 자연휴양림까지 갑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건물 뒤쪽을 지나게 됩니다. 숲길은 임도라서 넓어 편하게 걸을 수 있습니다. 지리산 둘레길 2구간 절반은 람천 제방길을 들판을 바라보며 걸었다면 남은 절반은 숲길을 걷는 것입니다. 숲은 겨울에서 깨어나 봄의 소리를 전해줍니다. 요란한 봄의 울림은 아니었지만 잔잔한 봄의 느낌이 전해집니다. 잠시 봄 분위기를 느끼며 걷는데 내리막길이 나타납니다. 내리막길 끝에 흥부골 자연휴양림이 있습니다. 이곳은 남원시에서 운영하고 있는데요. 오토캠핑장과 숙박시설 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잠시 쉬었다 가도 좋겠습니다. 종점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이제 종점으로 향하는 마지막 구간으로 향합니다. 자연휴양림 관리사무소를 지나 도로를 따라 100여 m 내려가면 표지판이 오른쪽 숲길로 안내합니다. 숲에는 마침 진달래가 활짝 피어 봄 분위기가 물씬 납니다. 숲길은 중간에 도로를 만나기도 하지만 마을까지 이어집니다. 지리산 둘레길 2구간 끝에 달오름마을이 있습니다. 지리산 둘레길 2구간이 끝나고 3구간이 시작되는 곳이라서 마을 담장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고 민박 간판들이 곳곳에 보입니다. 종점에 서자 3구간 시작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입니다. 둘레길의 끝은 곧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삶과 맞닿아 있습니다. 지리산 둘레길 2구간을 통해서 운봉평야의 봄을 느껴보았고 지역의 문화, 역사 유적도 두루 돌아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지리산의 정기를 듬뿍 받은 것이 의미가 있었습니다. 둘레길 걷기를 통해서 얻은 기운으로 한 달은 활기차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네요. /글사진 = 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김왕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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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19 17:10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55. 치명자산에 깃든 환한 빛, 지정환 신부

전주천 변에는 치명자라는 독특한 이름의 산이 있다. 원래 승암산(중바위산)이라 불렸었는데 7명의 천주교 순교자들이 묻힌 후에는 순교자라는 뜻의 치명자(致命者)란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그곳에는 전북 완주군 이서면 초남리 사람으로 전라도의 첫 천주교 신자였고 호남의 사도로 불리는 유항검(1756-1801년, 세례명 아우구스티노)과 그의 처 신희, 그리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위해 결혼 4년 동안 동정을 지키다가 처형되어 동정부부 순교자로 알려진 그의 아들 유중철(요한)과 며느리 이순이(루갈다)를 비롯한 일곱 명의 가족 순교자들의 합장묘가 있다. 1801년(조선 순조 원년) 천주교도를 박해한 신유박해 당시 유항검은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 땅에 잠입시켰다는 이유로 전주 풍남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처형 직후 그의 재산은 몰수되고 호남 천주교의 발상지였던 그의 집은 파가저택(破家瀦宅, 죄인의 집을 헐어버리고 그 집터에 연못을 만드는 형벌)의 형을 받아 헐려 연못이 되었다. 이후, 그의 친지들이 그들의 시신들을 수습하여 유항검의 고향인 초남리와 인접한 김제군 용지면(현 제남리) 바우백이에 임시로 묻어둔 것을, 1914년 4월 19일 전주 전동성당의 주임신부인 프랑스인 보두네(Baudenet) 신부와 신도들이 승암산으로 옮겨 합장했다. 치명자산 인근 전주천변에 푸르스름한 빛을 띤다 하여 초록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진 곳 역시 천주교 신자인 두 명의 15세 소년이 순교한 터이다. 1886년에 남종삼(요한)이 순교한 뒤, 아들 남명희도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국법에 따라 성인(15세)이 되는 해까지 처형이 연기되었고, 그를 불쌍히 여긴 전라 감사가 배교하고 새 삶을 찾으라.고 수차례 권고하였으나,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듬해 그가 성년이 되자 전라 감사는 남명희와 성명 미상의 홍봉주의 아들을 처형하게 되는데 차마 목을 베지 못하고 초록바위 위에서 전주천 아래로 떠밀어 수장시켰고 그 슬픔을 지닌 초록바위는 천주교 성지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천주교는 17세기 초 중국에서 들여온 서적을 통하여 조선에 처음 소개되어 전파되면서, 유교 이외의 어떤 종교나 학문도 엄격히 금지하던 그 시절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전주는 한국 최초의 자치 교구로 박해를 피해 피신해 온 신자가 많았었는데,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순교한 곳이다. 윤지충은 외사촌 정약용에 의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전해진다. 그는 1791년 어머니가 죽자 외종사촌인 권상연과 상의하여 천주교 의식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아 당시 거주했던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에서 전주로 압송되어 풍남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그들이 순교한 지 100년 뒤인 1891년 순교 터인 풍남문 앞에 보두네 신부가 터를 마련하고, 1908년 명동성당을 완공한 프와넬(Poisnel) 신부의 설계로 착공하여 1914년 준공된 성당이 전동성당이다. 당시 일제가 전주에 신작로를 낸다는 구실로 풍남문 성벽을 헐었는데 그 성벽의 돌을 가져와 성당의 주춧돌로 사용하여 순교 장소에 있던 돌로 신앙의 요람임을 입증하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천주교의 역사가 짙게 남은 전동성당은 지난 4월 13일에 선종(善終)한 지정환(Didier tSerstevense)신부가 1960년 전주교구로 와 한국이름을 얻은 곳으로 그가 전북에 발자취를 남긴 출발점이기도 하다. 작년 12월과 지난 3월에 만난 생전의 지정환 신부는 모든 일은 다 우연이 아닌 운명이고 다 계획에 따른 것이라는 말을 했다. 내 이름 성이 한자로 지(池)인데, 사실 땅지를 생각한겨. 농민들 밑에 들어가려고 땅지 같은 지씨가 된거여. 이것이 운명이지. 벨기에의 귀족이 한국의 상놈이 된 거여 지신부는 그렇게 사람들 밑에 들어가 거하며 첫사랑이라 말하는 부안을 비롯해 고향으로 여기는 임실의 농민들과 무지개 가족인 장애인들과 전주와 완주에서 함께 했다. 기존의 자신을 버리고 무명(無名)으로 그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에게 배우고 그들을 인정하며 그사람들이 가지고있는것으로 부터 시작하였다고 했다. 그들에게 다가가 함께 있어라. 그들에게 배워라. 가르치는 게 아니여~ 먼저 배워! 그리고 사랑해라~ 이 말은 신학대학 시절부터 소명으로 지녀온 말로 성직자로 한국에서 살았던 60년간 사랑을 실천하고 헌신하는데 지신부의 지침이 되었다. 평상시에 무명, 무교육, 등 없을 무(無)자를 자주 쓰게 된 이유도 임실뿐만이 아니라 도착해 만나는 사람마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고 우리는 가진 것도 없다란 말을 수도 없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직자로 창세기에 무에서 유를 만드신 하느님을 본받아 할 수 있는 것을 했다고 하였다. 그 중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소외 받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과 교육이었다. 무지개 가족이 1984년 설립되었을 당시 수용시설과 같은 곳을 지신부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시설로 바꾸고 싶었다. 1층의 넓은 방에 중증 장애인과 경증 장애인 두 사람씩 거처하며 서로 돕게 하였고, 2층에는 독방을 만들어 봉사자가 열심히 일하고 쉴 때 충분히 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후 그 공을 인정받아 호암재단에서 받은 상금을 마중물로 하여 장학재단을 설립했으며 그것이 지금의 장애인을 돕는 무지개 재단이 되었고, 이후 거처 공간도 자립관(自立館)이란 이름으로 하여 장애인들이 온전히 자립에 대한 의지를 다질 수 있도록 했다. 한국에서, 그것도 전북에서 60여년을 지내 온 이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라 지신부의 운명이었고 전북의 행운이었다. 지신부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자의 공수신퇴(功遂身退) 천지도(天之道)란 말처럼 공을 이루었으면 물러나는 것 이도 하늘의 뜻이라 했다. 지신부의 장례식장에는 그의 유언대로 그의 방 안에 있던 십자수를 영정으로 하고 장례미사에는 노사연의 <만남>을 작별의 노래로 함께 불렀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훈장을 추서 받았으며 신자와 임실군민들을 비롯한 도민들과 사랑을 받은 장애인들의 감사와 애도 속에 전주교구 성직자의 묘소가 있는 치명자산에 묻혔다. 지신부가 남긴 정의롭고 환한 흔적은 지역의 천주교 성지에 더해 그가 한없이 사랑했던 임실과 완주와 전주를 비롯하여 부안과 전북을 아우르며 묘소가 있는 치명자산에 이르기까지 지신부를 기리는 길로 오랫동안 기억되며 지역에 남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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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1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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