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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소통 2019 시민기자가 뛴다] 도시공원 일몰제 시행 눈앞…우리 동네 공원이 사라진다

어느 날 건강을 위해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이른 새벽부터 올라갔던 기린봉 자락, 툴툴대는 아들 녀석을 어르고 달래서 올라갔던 완산칠봉, 항암치료를 마친 삐쩍 마른 엄마손을 붙잡고 살살 걸었던 건지산 자락, 대학시절 캠프스 커플의 단골 데이트 장소였던 천잠산 자락, 햇살 좋은 날이면 유모차에 막내를 태우고 돌다왔던 다가산 자락 , 퇴직 후 우리 부부에게 걷는 재미를 알려준 황방산 자락, 봄이 왔다고 벚꽃을 흐드러지게 피워준 아직 이름도 모르는 우리 집 옆 산자락. 전주는 도심을 이어주는 내 둘레산과 도시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외 둘레산이 공원으로 잘 보존되어 있어 시민들은 산과 함께한 일상과 추억을 많이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소중한 도시의 한 자락들을 내년 7월 1일이 되면 공원이라 부를 수 없게 된다. 그곳은 그날이 오면 사유지라고 불리게 된다. 더 염려되는 것은 공공성을 잃어버린 사유지 공간들이 녹지가 아닌 도로, 아파트, 상가, 주택 이런 공간들로 개발되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공원 부지 없애는 도시공원일몰제 공원일몰제가 도입된 계기는 경기도 성남시에서 학교 부지를 도시계획시설로 결정한 후 실제로 사업은 집행되지 않고 장기간 재산권 행사만 금지되자 땅의 주인들이 도시계획법 제23조에 대해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하면서부터다. 헌재 판결의 배경이 된 경기도 성남시 학교부지는 당시 서울 강남 인근의 분당 신도시 등 개발압력이 높았던 지역이다. 지목이 대지로 설정되어 있는 곳을 도시계획시설부지로 지정 이후 장기간 방치된 것이 주된 이유다. 도시공원일몰제란 2007년 7월 기준으로 도시계획시설로 지정된 공원은 2020년 7월까지 부지를 매입하지 않을 경우, 공원지정이 일괄적으로 해제되는 것을 의미한다. 외견상 공원으로 조성된 경우에도 지자체가 부지를 매입하지 않으면 해제대상으로 취급되며, 아직 조성되지 않은 공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공유지 역시 지자체가 부지를 매입하지 않는 경우 마찬가지로 공원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도시공원은 녹지, 유원지, 광장 등과 함께 공간시설로 구분되는데 교통시설, 방재시설, 환경기초시설 등의 건설에 밀려서 집행하지 못한 책임이 크다. 전국적으로 공원의 결정면적(2015년 기준)은 934㎢이고 이중 미집행 면적은 516㎢로 공원의 경우 미집행 면적이 55.2%에 달하고 전체 도시계획시설 미집행 면적의 85.7%가 공원면적이다. 이쯤 되면 공원을 해제하기 위해 내려진 판결 아닌가 하는 볼멘소리가 쏟아져 나올 수준이다. 2020년 7월 1일 이후에도 미집행 공간들을 공원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토지를 매입하고 이를 공원으로 조성해야 하는데 그 비용이 무려 47조 5000억 원으로 추정된다. 이중 10년 이상 장기미집행 공원의 사유지 보상비가 17조 2000억 원가량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제도 안에서 이 비용은 모두 지자체들의 몫이다. 전주시 역시 현재의 도시공원 면적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는 3501억 원의 매입 예산이 필요하다. 공원조성비까지 고려할 때는 1조 1524억 원의 돈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방자치단체에서 부담하기에는 너무 큰 예산이다. 도시공원의 해제일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중앙정부가 대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민간에서 볼 때 그 대책은 4400개의 사라질 공원을 지키기에는 매우 터무니없는 수준이다. 2019년 중앙정부가 책정한 도시공원일몰제 대응 예산은 79억 원이다. 79억 원도 지자체가 장기미집행 공원 토지매입을 위해 지방채를 발행하는 경우 5년간 이자의 최대 50%를 지원하는 금액이다. 미집행 공원의 사유지 매입비만도 17 조가량이 필요한 상황에서 이자비용으로 79억 원을 책정했다는 것은 도시공원을 지키는 것에 중앙정부의 의지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면서 정부는 민간공원 특례 제도를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민간공원 특례제도는 시행사가 도시공원의 30%에 수익시설을 설치하고 나머지 70%를 공원으로 조성해 지자체에 기부채납을 하는 방식이다. 30%의 수익시설에서 70%의 공원 조성 비용까지 마련해야 하기에 공공성의 확보보다는 신규택지개발로 이어져 새로운 도시문제를 떠안아야 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실제 민간공원 특례사업으로 추진되는 지역들은 대부분 아파트 단지 조성계획으로 추진되고 있어 아파트 공급과잉이라는 지역문제를 가중시킨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정부 지원 반드시 필요 중앙정부의 대책이 미흡하자 전국 시민사회단체들의 공동행동의 요구가 커지고 있다. 2020 도시공원일몰제 전국 시민행동(전국 시민행동)에는 현재 275개의 전국 단체가 참여하여 도시공원을 지키기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전국 시민행동에서는 지자체의 무거운 짐을 덜어줄 수 있는 중앙정부의 지원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첫 번째는 해제되는 미집행 공원면적 중 국공유지를 제외시켜달라는 것이다. 당초 이법은 사유재산권 보호를 위해 마련된 제도이기 때문에 국공유지와는 관련이 없는 사안이기도 하다. 다음으로는 도시공원 매입을 위해 20년 장기 지방채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하고, 발행 시 원금의 80%를 국고에서 지원하도록 법을 개정하는 것이다. 실제 중앙정부가 도로, 철도, 댐 등의 기반시설 시행 시 국가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공원역시 도시생활권을 지키기 위한 핵심 기반시설임을 인식하고 중앙정부가 이를 지키기 위한 예산도 지원해야 한다. 또한 도시자연공원구역에 대한 재산세 50% 감면과 상속세 40% 감면할 수 있도록 재산세법과 상속세법의 개정도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지자체가 매입 계획을 수립하고 지구지정을 한 시설에 대하여 실효 시점을 연장해 주는 것도 필요하다. 도시공원을 지키는 것은 지방자치단체와 지역민들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전국 시민행동은 향후 중앙정부의 책임 있는 대책을 요구하기 위해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과 연대하여 활동을 펴 나갈 계획을 가지고 있다. 전북에서는 환경운동연합과 생명의 숲, 녹색연합 등이 중심이 되어 지역단체들과 공동행동을 진행할 계획이다. △생활 속 환경권을 지키는 기본적인 국민의 요구 요즘 미세먼지는 피할 수 없는 환경테러로 느껴질 만큼 두려운 존재이다. 맘껏 숨 쉴 수 있는 권리를 잃어버린 국민들은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국립 산림과학원이 도심과 도시숲에서 미세먼지를 비교한 결과 숲에서 PM10의 경우 25.6%가 도심보다 낮게 측정되었다. 초미세먼지인 PM2.5는 40.9%가 낮게 나타났다. 또한 시흥 산업단지에 조성된 완충숲을 분석했을 때도 비슷한 결과를 보였으며 완충숲 조성이 완성된 최근 3년 동안 미세먼지 나쁨일 수가 31% 줄어들었다고 한다. 도시공원은 도시민뿐만이 아니라 전 국민이 잃어버린 맘껏 숨 쉴 수 있는 권리를 찾아 줄 중요한 해답이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최명국
  • 2019.04.15 20:12

[전북의 재발견] 익산 아가페 정양원 : 바람소리도 조용히 머물다가는 사색의 공간

"인간도 자연도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감을 깨닫게 해주는 곳" 오늘 소개해드릴 곳은 바람 소리도 조용히 머물다가는 사색의 공간인 익산시 황등면 율촌리에 있는 아가페 정양원입니다. 정양원 소개에 앞서 이곳을 방문하고자 하시는 분들을 위해 먼저 말씀드릴 이곳은 65세 이상의 어르신들이 모여 노년을 평화롭게 준비하는 곳이기에 최대한 조용한 가운데서 정양원을 돌아보셨으면 하는 부탁을 드립니다. 정양원 입구에 들어서면 좌측으로는 어르신들이 기거하는 건물이 우측으로는 1백만 제곱미터(35,000여평)의 자연 수목 농장이 펼쳐져 있습니다. 쭉쭉 뻗은 메타스퀘어 나무들 아래 활짝 핀 목련꽃과 개나리가 반기는 입구를 지나 바로 우측 샛길로 들어가면 정양원 수목 힐링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수목 사이를 천천히 거닐다 보면 수목들이 내뿜는 신선한 공기에 가슴까지 정화되는 기분이 들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거닐다 보면 어느덧 조금은 낯선 풍경과 맞이하게 됩니다. 나무들 사이 햇살이 비추는 곳에 마련된 곳, 정양원 안에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잠시 발길을 잡아두는 이곳에서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해 잠시 묵상하실 수 있습니다. 녹음 짙은 정양원을 거닐다 보면 어느 순간 숲과 하나 되어 있는, 아니 숲의 일부가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닿을 듯 곧은 나무들, 군락을 이룬 나무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까지. 정양원 숲은 인간을 복잡한 도시의 부속물이 아닌 자연과 물아일체가 되게 하는 공간입니다. 정양원 어느 곳도 수목들이 모두 예쁘고 잘 가꿔져 있기에 어떤 카메라로 어떤 구도로 사진을 찍어도 자연의 색상과 함께 사진이 예쁘게 나옵니다. 그러나 잠시 정양원에 들러 햇살과 함께 인생 샷을 찍고자 하신다면 정양원 숙소 뒤 메타스퀘어 길을 추천합니다. 정양원 북쪽에 빼곡하게 심어져 정양원의 벽과 바람막이로 하늘을 향해 팔 벌리고들 서 있는 메타스퀘어들과 그 나무들 사이로 나 있는 작은 오솔길. 햇살 좋은 날 이곳을 거닐며 여러분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면 분명 그 사진은 여러분의 인생 명작 중 한 장이 될 것입니다. 아가페정양원은 창립자이셨던 서정수 신부님의 원훈인 靈肉事情(영육사정)을 가족의 차원에서 보필하는 공동체운영체로 65세 이상 국민기초생활수급권자로서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는 어르신이 심사를 거쳐 입소 및 생활하실 수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어르신들의 연령은 80이 넘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이 바로 그분들께서 생활하시는 평화롭고 조용한 일상의 공간이기에... 이곳을 지나신다면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파란 하늘 아래 수만 그루의 나무들의 드넓은 수목원과 그 안에서 하루하루 여생을 조용히 살고 계시는 많은 어르신이 계신 아가페 정양원. 정양원 수목들이 뿜어내는 맑은 공기와 좋은 기운을 천천히 호흡하고 느끼며 걷노라면 일상의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진정한 참 나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아가페정양원 : http://www.agap.or.kr/introduce_01.htm /글사진=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김찬권

  • 기획
  • 기고
  • 2019.04.15 17:54

대한민국 임시헌장 서예작품 국회 설치한 윤점용 한국서예협회 이사장 “숭고한 뜻 새기며 붓 들었죠”

대한민국 국회의 뿌리인 임시의정원 개원 100주년을 맞아 지난 10일 서울 국회의사당 본관 로텐더홀에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담은 초대형 서예작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서예협회 호암 윤점용 이사장이 직접 한 자 한 자 붓으로 새겨 완성한 작품. 지난해 11월 서예진흥법 국회 통과에 이은 한국 서예계의 큰 경사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서예작품을 완성한 윤점용 이사장에게 의미와 소회 등을 들었다. -직접 쓴 서예작품이 국회의사당에 설치됐습니다. 작품에 대해 설명해주시지요. 1919년 4월 11일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헌장(大韓民國 臨時憲章) 전문이 담겼습니다. 국회 로텐더홀 제1회의실 입구에 설치됐고, 작품 크기는 가로 710cm, 세로 235cm입니다. 서체는 국한문 혼서이기 때문에 예서체 중 광개토대왕비 필의(筆意, 붓을 놀릴 때의 마음가짐)와 한글 훈민정음 언해본 중 용비어천가 필의를 병행해서 완성했습니다. 졸박(拙樸, 서툴지만 순박함)하면서도 묵직한 느낌을 주는 서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서예의 위상이 더욱 높아진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에 담긴 의미를 말씀해주신다면.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임시의정원에 의해 완성된 대한민국의 첫 헌법입니다.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표기했어요.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으로 바뀐 거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그 헌법이 성립하게 된 사상적 바탕은 일제 강점기 한민족이 함께 참여한 거족적인 민족운동인 31 운동에서 비롯됐어요. 독립을 염원했던 한민족의 의지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대형 서예 작품으로 완성한 것입니다. 국회 로텐더홀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임시헌장에 담긴 민족의 의지를 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이나 소회를 들려주시죠. 100년 전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고 만든 임시헌장을 붓으로 직접 쓴다는 것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뜻을 깊이 새기며 붓을 들었고, 무거운 책임감으로 글을 썼습니다. 임시헌장은 선포문을 포함해 총 480 여자에 이르고, 한 글자만 틀려도 처음부터 다시 써야 했기 때문에 쉽지 않은 작업이었습니다. 또 서예의 예술성보다는 역사기록물로서의 사실성에 중점을 둬 네모반듯하게 써야 하는 제한도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 서예진흥에 관한 법률안이 지난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국회 유성엽 의원이 대표발의 했고, 많은 서예인이 힘을 모아 이룬 성과라는 평가입니다. 올 6월께 서예진흥법이 시행될 예정인데요. 계획하고 계신 사업이나 과제는. 서예진흥법이 국회를 통과했다고 해서 침체됐던 서예가 일순간에 부흥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우선 초중고 정규 커리큘럼에 서예과목을 설강해야하고 폐과된 대학 서예과를 다시 부활시키는 운동을 펼쳐나가야죠. 두 번째로는 국립서예원 설립을 계획하고 추진해야합니다. 그래서 서예가 전통문화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붐을 일으켜야 합니다. 과제는 서예인들의 화합입니다. -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계십니다. 올 제12회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에서 중점을 두고 계신 것은 무엇일지요. 지난해 5월 서예비엔날레 집행위원장을 맡고 치르는 첫 행사이기 때문에 사실 큰 부담을 느낍니다. 우선 올해는 그동안 힘써주셨던 원로 조직위원들께서 이선으로 물러나고 새로운 조직위원으로 세대교체됐어요. 청년작가 초청을 더 확대하고, 원로작가와 신진작가의 융합을 꾀했습니다. 예산이 한정돼 있어 어려움이 있어요. 서예비엔날레는 전북에서 치르는 세계적인 대규모 문자예술행사인 만큼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합니다. 서예인뿐만 아니라 자치단체나 정치권에서도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으면 합니다. - 강암 송성용 선생, 산민 이용 선생을 이어 한국 서예의 큰 맥을 이루고 계십니다. 자부심도 크실 텐데요. 강암 선생님께서도 그러셨고 산민 선생님께서도 사람이 먼저다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글씨는 바르게 가르치면 되는데, 사람 근본은 쉽게 바꿀 수가 없어서 어려움이 따른다는 얘기죠. 근본이 바르게 서야 서예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서예의 기본은 정신입니다. 바른 정신이 깃들지 않은 서예는 얕은 재주부림에 지나지 않아요. 어린아이가 처음 연필을 잡고 글씨를 배워 자기 이름 석 자를 썼을 때처럼, 순수한 정신 속에 순수한 작품이 태어난다고 생각해요. 저 또한 후학들이 그렇게 맑고 순수한 작품을 써 나가길 바랍니다. - 전북도민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전북은 서예의 본고장입니다. 전국 각지에서 전북 출신 서예가들이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송하진 전북지사께서는 중앙정부에서 파견 온 공직자들에게 전북에 머무는 동안 적어도 서예와 판소리 한 대목은 배워가는 것이 최고의 수확이다며 권장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많은 도민이 그러한 마음으로 서예를 아껴주셨으면 합니다. ○ [윤점용 이사장은] 서예진흥법 국회 통과 앞장강암산민 선생 맥 이어 익산 출신으로 전주대 경영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미술학 석사를 받은 윤 이사장은 그동안 회원전, 초대작가전, 해외 교류전 등을 통해 전북서예 활성화를 이끌었다. 문자의 상형성을 회화적으로 표현해온 그의 붓 길은 힘차고 호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스승은 강암 송성용 선생의 제자인 산민(山民) 이용 선생. 윤 이사장은 지난 2014년 제10대 한국서예협회 이사장에 선출됐으며 2017년에는 11대 이사장으로 추대돼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서예진흥법 국회 통과를 위해 전국 서예인들의 힘을 모으는 데 앞장 서 왔다. 또한 대한민국 서예대전을 최초로 지방에서 개최하는가 하면 국가차원의 서예교육과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현재 한국서예단체 총협의회 공동대표, 전주대학교 객원교수, 예술의전당 운영위원, 세계서예비엔날레 집행위원장, 한국서예협회 전라북도지회 고문, 국립전주박물관회 이사, 학교법인 경초학원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 기획
  • 이용수
  • 2019.04.14 20:15

[전북의 재발견] 고창읍성 벚꽃투어 : 광주에서 고창까지 드라이브 여행

고창 '당일치기' 여행 전북 고창으로 자동차 여행을 떠납니다. 광주 집에서 출발하면 고창읍까지 40분이면 넉넉하게 도착할 수 있는데요. 한반도의 첫 수도라는 캐치프레이즈에서 보듯 고창은 역사와 자연문화 그리고 예술이 아름다운 풍경과 한데 어우러져 엄청난 관광 잠재력을 가진 곳입니다. 당일여행 코스를 짜는 데만도 16가지 코스를 놓고 고민하다 결국 대표 관광코스인 고창읍성, 무장읍성과 청보리 밭을 융합한 드라이브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전날까지 제법 쌀쌀한 날씨 덕분에 맑고 파란 하늘이 보기 좋았는데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고창으로 드라이브를 떠난 날 하필이면 날도 흐리고 미세먼지도 나빠 창문을 열지 못하고 달렸습니다. ​ 봄볕 가득한 날 싱그러운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싶었는데 말이죠. 그렇지만 고창 읍성에 예쁘게 피었을 벚꽃을 생각하니 미세 먼지마저도 안개로 보입니다. 머리에 돌을 이고 성곽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 승천이라 고창읍성 답성 놀이는 지금도 모양성 축제 때 재연하는 놀이인데요. 1678년 여덟 개 현의 장정들을 동원해 성을 개축하고 성곽을 다지기 위해 부녀자들을 동원하면서 머리에 돌을 이고 돌면 극락승천한다라고 꼬드긴 것이 시작이라고 합니다. 성곽을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무념무상 천년 묵은 이끼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끼를 넉넉히 받아준 성곽들은 오랜 세월만큼 포근해 보이는데요. 개나리랑 진달래가 배웅해주는 길은 혼자 걸어도 심심하지 않습니다. 느릿느릿 걸어도 지루하지 않고, 구불구불 길이 재미나서 마냥 걷고 싶은 길입니다. 소나무밭에 진달래 새색시가 지나는 길손에게 새초롬한 인사를 하군요. 고창읍성에서 드라마나 영화를 찍을 때 단골로 쓰는 장소입니다. 잔잔한 벚꽃 향에 눈이 먼저 갑니다. 짧은 봄 벚꽃 늘어진 읍성 길이 너무 좋아 미소가 절로 피는데요. 벚꽃 개화율은 70% 정도로 이번 주가 절정일 듯합니다. ※고창읍성 관람안내 관람시간 : 연중무휴 09시~18시 (야간 18시~22시) 관람료 : 성인 2천원, 청소년/군인 1200원, 어린이 800원 읍성 나들이를 가뿐히 완주하고 내려오는 길에 판소리 박물관 옆에 고즈넉한 초가집이 눈에 들어와 바쁜 걸음 했습니다. 고창은 판소리의 고장이기도 한데요. 고창의 명창들을 길러낸 신재효 선생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고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2015년에 개봉한 영화 "도리화가"는 판소리 학당 동리정사의 수장 신재효와 소녀 명창 진채선의 이야기를 담았죠. 배우 류승룡이 신재효 역할, 수지가 진채선 역할이었습니다. 뒷마당으로 오니 동백이 봄의 정취를 더합니다. 사립문이 열려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들어와도 괜찮다는 것인데요. 무료 관람입니다. 고택을 앞에서 바라만 봐도 늘 긴장된 일상에서 나를 편안하게 해 주는 듯합니다. 고택에는 당시 신재효 선생과 제자들의 판소리 공부를 재연하고 있는데요. 누가 진채선일까 궁금해집니다. 때맞춰 스피커로 판소리 한마당이 들려 고수가 장구로 장단을 맞추니 제자들은 하나같이 목청을 높여 따라 부르는 것 같습니다. ※신재효 고택 관람안내 관람시간 : 연중무휴 09시~18시 관람료 : 무료 신재효 고택을 나와 고창 판소리의 면모를 하나하나 둘러보고자 판소리 박물관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이순(耳順)은 귀가 순해져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데 이순을 코앞에 둔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도 판소리는 귀를 순하게 만들어 마음마저 잔잔하게 해줍니다. 시대별 음반이 즐비하지만 전설적인 쑥대머리 음반이 가장 눈에 띕니다. 때맞춰 오밀 조밀 아이들이 어여쁘게 모델이 되어 주었네요. 고창초등학교 1학년 친구들이 체험 학습 왔는데 판소리가 뭐지 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하지만 관람하는 내내 판소리가 들려오기에 보고 듣는 체험으로는 딱 일 듯합니다. 고창군청과 사단법인 동리문화 사업회에서 매년 11월 6일 동리 신재효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판소리 진흥에 공이 큰 연장자나 연구가에게 주는 상이 바로 동리대상인데요. 모두 한 업적 이루신 분들로 반갑기만 합니다. 2층에서는 헤드폰으로 명창의 소리를 실감 나게 들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몇 개는 고장인지 작동이 안 돼 듣고 싶었던 오정해의 판소리를 듣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판소리박물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 09시~18시(하절기), 09시~17시(동절기) 휴관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과 추석날 관람료 : 무료 ※고창읍성 광장에서 펼쳐질 축제 안내 KBS 국악한마당 : 2019년 4월 12일(금) 오후 5시 봄꽃 동리정사에 물들다 : 2019년 4월 13일(토) 오후 2시(1부), 오후 4시(2부) 고창읍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동학 농민혁명의 봉기가 일어난 무장읍성을 만납니다. 사적 제346호로 지정된 문화재로 고려 시대 무송(茂松)과 장사(長沙) 두 고을을 합하면서 성과 관아를 새로 만든 것이 시초입니다. 요즘 말로 신도시인 것이죠. 전라도 여러 고을에서 2만여 명의 장정을 동원해 둘레 1470척(445m), 높이 7척(2m)의 성벽을 쌓았다고 하는데, 그 배도 넘게 보입니다. 또한 성 밖으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못을 2127척(644m)이나 팠다고 하니 대단한 역사이지 싶습니다. 하늘, 처마, 지붕, 산호를 닮은 나무, 초록 흙더미가 어우러진 멋진 풍경인데요, 4월 9일 일만여 동학혁명 농민군이 3일 동안 전열을 가다듬은 곳입니다. 오랜 세월 쓸쓸함 더해서 짙어진 이끼는 돌비석에 앉아 세월을 낚습니다. 천년 고목은 파수꾼을 자처하고 있는데요, 세월 이기는 장사 없는 무장 고을 현감들이 송덕비가 되어 모여 있습니다. 양지바른 곳에 앉은 취백당 기와지붕은 변함없고 시원한 마루는 윤이 반질거립니다. 기둥 주춧돌은 말발굽처럼 든든하고 무엇 하나 버릴 게 없는데요, 원래 이름은 무장과 장사의 뒤 글자를 떼어내 송사라 불렀다가 영조 때 현감 최집이 깊은 뜻이 없다고 해서 취백으로 바꾸었습니다. ※제1회 고창 무장읍성 축제 안내 2019년 5월 18일 첫 개최 슬로건 : 무장읍성 602년 조선시대 과거로 가자 눈이 부시고 시립니다. 하늘은 빛을 잃었는데 청보리는 색을 잃지 않아서 고마웠습니다. 드넓은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도 좋겠지 싶은데요, 그냥 바라만 봐도 힐링입니다. 보리밭을 사이에 두고 달구지라도 타고 지나가면 딱 좋을 뷰인데요, 오늘 여러 곳을 돌아다니라고 피곤하고 지친 몸에 새로운 기운이 솟습니다. 보리가 아직 자라지 않아 숨바꼭질하기엔 턱도 없지만, 이제 4월 20일이면 엄청난 사람이 몰리는 청보리밭 축제가 열립니다. 한 달 가까이 고창을 대표하는 축제가 열리는데요, 보고 있는 풍경은 4월 5일 풍경으로 축제까지는 보름 정도 남았습니다. 역시 보리밭 길은 걸어야 제 맛입니다. 지평선 끝까지 걸어도 좋은 청보리밭인데요. 보리밭 사잇길~로 노래도 흥얼거리고 숨바꼭질도 하면서 걸을 5월을 그리며 고창 당일 자동차여행을 마칩니다. /글사진 = 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심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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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12 16:55

선친일기를 통해 100년 전 전주를 재조명

조그만 일기장 속에는 1916년 전주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눈에 보이는 한벽루와 다가산의 풍광을 가감 없이 기술하고 있다. 일기의 주인공은 진안 용담현에서 태어나 20살인 1916년에 전주농업학교에 입학한 이상래(1896~1979)학생이다. 일찍 진안 주천의 사립화동학교를 졸업하고 전주에 오니 문화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휴일이면 명승지인 오목대, 덕진운동장, 한벽당, 다가정 등을 친구들과 다니면서 상세한 기록을 남긴다. 1916년 전주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지만, 그 당시의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간혹 사진이나 문서를 통하여 사료를 접하기도 하지만, 출처가 분명하지 않아 활용하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이에 전주시에서는 전주 관련 기록물을 통한 전주정신을 찾기 위하여, 각종 사진, 문서, 박물류 등(1910년 이후)을 2017년부터 수집공모하게 된다. 그래서 2017년도 제1회 전주시기록물공모전을 개최하게 되었는데, 전주시민의 많은 호응이 있었고 여기서 선친일기는 내용의 소중함을 인정받아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일기는 양도 많지 않고 기간도 1916년 5월부터 8월까지 약 3개월만 기록하고 있다. 지질도 좋지 않다. 만지면 부서지는 갱지에 가는 세필로 썼다. 그리고 625사변으로 피난을 다니면서 일기장의 앞뒤가 다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이러한 보잘 것 없는 것이 어떻게 자료를 인정받게 되었을까. 바로 선친일기 속에는 전주의 자료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당시는 일제강점기라 학교생활도 군사교육이나 다름없는 교육이라, 모든 기록에 한글을 쓰면 제재를 당하고 있기에 조심스럽게 국한문과 일본어를 섞여 쓴 것이다. 특히 국어를 쓸 때도 語라 쓰고 있어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다 보면 임금이 나라안에 있지 못하고 나라 밖에 있는 것을 이체자로 쓴 것이다. 선친일기 속에는 한벽당에 있는 서당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지금에 와서 서당 얘기를 하면 먼 과거의 얘기 갖지만 이 서당은 금재 최병심(1874~1957)이 타계하기 전까지 운영되었다. 일기 속에는 서당에 관한 얘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1916년 6월 4일 일기를 옮겨 본다. 돌아오는 길에 한벽루 근처에 있는 최씨의 서재에 들러 구경하였다. 사방인 대밭인 가운데 2-3동의 초가가 있고 동자 5,6명과 갓을 쓴 학동 6,7명이 소매가 넓은 도복을 입고 단정히 앉아 독서하고 마당에는 해당화 백작약 등의 꽃이 교태를 부리며 우리들을 맞이하였다. 죽간(竹竿) 한 가지를 주인에게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 일기 속에서 말한 최씨서재는 금재 최병심의 서당이다. 바로 이곳은 한벽당 옆 최담유허비가 있는 교동 산 7-9번지이다. 이곳은 사방이 대나무밭이였고 초가집이 3채 있었다고 금재의 손자 최동호씨도 증언한다. 너무나 일기장과 일치한다. 서당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으며 바로 옆에 흐르는 옥류천은 물이 맑아 이 물로 콩나물을 길렀다고 전한다. 바로 이곳은 또 전라도의 최고의 명필인 이삼만이 살던 집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바위에 암각서가 많이 현존하는데 바로 이것이 이삼만의 글씨이다. 금재 최병심은 이곳에 살면서 학동들을 가르치면서 우리나라는 반드시 광복된다는 의지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교육의 목표가 뚜렷했다. 한 사람이라도 독립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갓을 쓰고 학생들에게 도복을 입혀 공부를 시켰던 것이다. 전라선철도를 설계할 때 한벽당으로 설계하여 철거의 위기에 처하자 금재는 끝까지 투쟁하여 한벽굴을 뚫게 한 장본인이다. 과거 학계에서는 왕조실록이나 관에서 발행한 고문서는 역사성을 인정하지만, 지역의 역사는 향토사로 인정하여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 때 전주 분조를 기록한 죽계일기나 고종 때 완산동에 살았던 정교의 대한계년사는 중요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공모에 선정된 선친일기는 비록 3개월의 짧은 기록이지만 전주시사에도 기록되지 않는 전주-이리간 경편철도 기록이 나오고, 덕진공원의 운동장에서 전주구락부 주최로 전국자전거대회를 개최하였다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사사로운 일기가 역사가 될 수도 없다라고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역사의 한토막을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친일기를 통해 1916년도 전주를 살피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되었고, 소중한 자료를 사장하지 않고 후손들이 번역하여 전주시민에게 제공까지 하고 있다. 이 선친일기는 출품자의 관점에서 이름을 붙여졌지만 이제는 전주시민의 일기가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일기를 쓴 이상래의 호를 따서 시강일기로 불렀으면 하는 바램이다. 이 일기 속에는 전주의 많은 인류학적 문화코드가 숨겨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가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예를 들어 다가정에서 제1보통학교와 제 2보통학교가 운동회가 벌어지는 광경이 있다. 이 사실을 통하여 두 학교가 왜 본 학교에서 운동회를 안 하고 다가산 아래에 와서 연합운동회를 했는가도 연구해 봐야 할 것이다. 시강일기에는 전주에서 벌어지는 사월 초팔일의 관등행사, 삼천동의 농장견학, 누에 키우기 실습, 전주단오절 행사 등을 기술하고 있어 좀 더 세심한 연구가 필요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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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11 20:36

최신현 전주시 총괄조경건축가 "하늘, 빛, 물, 땅…생명의 가치 존중하는 '진정한 정원도시'로"

지난해 연말에 만났던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90세의 일본인 건축가 츠바타교수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인생 후르츠>다. 건축가인 츠바타 슈이치 교수는 고베 근처의 신도시 고조지 뉴타운 의 도시계획에 참여하지만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지향해온 그의 신념은 실현되지 못한다. 영화는 그럼에도 뉴타운을 떠나지 않고 도시 한가운데에 300평 땅을 사들여 숲을 만들고 일구어 그 땅에서 자란 나무와 식물과 더불어 살며 행복을 지켜가는 노부부의 일상을 그렸다. 300평 땅에 들여놓은 노부부의 주택은 고작 15평. 남은 땅은 모두 나무와 식물에게 넘겨준 노부부의 선택이 가져온 결실은 놀랍다. 감동은 또 있다. 츠바타 교수의 나무심기다. 한 사람의 가치 있는 신념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태도를 바꿀 수 있는지를 일깨우는 츠바타 교수의 삶이 전해준 울림은 깊었다. 최신현 전주시 총괄조경건축가(61)를 만났다. 총괄조경건축가란 직함은 낯설다. 건축이나 디자인의 경우 한 도시의 관련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데 총괄책임자로 참여하고 있는 선례가 있지만 조경 분야는 전주가 처음이니 그럴만하다. 그는 조경이 단순히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경관을 디자인하는 일이라는 것을 자신이 디자인한 공간의 힘으로 일깨워준 조경건축가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간 중에는 그의 손을 거친 곳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공원으로 손꼽히는 서서울 호수공원이나 북서울 꿈의 숲, 서울 종로 걷고 싶은 거리를 비롯한 각 도시의 의미 있는(?) 공원이나 조형물의 거개가 그의 생각과 손을 거쳤다. 전주가 도시경관 디자인을 주목하면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배경도 여기에 있을 터다. 그럼에도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그가 연고도 없는 전주라는 낯선 도시의 경관을 총괄하는 만만치 않은 일을 맡게 된 이유다. 돌아온 답은 명쾌했다.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예요. 전주라는 도시의 규모나 인구, 주변 환경은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아직 건강함이 살아있다는 가능성을 보았어요. 시장님의 의지와 철학도 제 마음을 끌었죠. 전주를 오간지 10여회. 그는 이미 전주라는 도시의 매력에 빠졌다고 했다. 소풍가는 것처럼 전주행 새벽 기차를 타면서 늘 마음이 설렌다는 그가 들려주는 조경이야기는 특별했다. -총괄조경건축가란 역할이 다른 도시에도 있을까요. 아마 처음일겁니다. 서울시가 건축과 디자인 분야에 총괄책임자 제도를 두고 있지만 도시 전체에 대한 총괄조경 역할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책임이 무겁습니다. -직함에 대한 낯설음도 있지만 조경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아직은 단편적이어서 그 역할에 대한 궁금증이 큰 것 같습니다. 조경은 단순히 나무를 심은 일만이 아닙니다. 햇빛 바람 물 땅 등 눈에 보이는 그 모든 것이 대상입니다. 처음 총괄조경가라는 역할을 제안 받았을 때 많은 여건을 생각했습니다. 제게는 도시 규모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어요. 길지 않은 시간에 제가 도시를 바라볼 수 있는 규모라는 것이 한계가 있지 않겠어요. 서울도 많은 자문을 하고 있지만 서울 같은 거대도시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사실 미미하거든요. 그러나 전주 같은 규모나 인구, 주변 환경을 갖고 있는 도시는 그런 면에서 아주 매력적이었어요. 도시의 규모가 크지 않은데다 내부에 산이나 하천이 잘 발달되어 있고 특히 전주천 삼천의 경우는 도시의 규모에 비해 생태적 양호함이나 건강함이 돋보였어요. 장점이 많은 도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전주 같은 오래된 도시들은 도시 경관의 재편이 매우 절실한 때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개발 중심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소중한 것들의 가치를 많이 잃어버린 상황에서 다시 재생의 화두는 잃어버렸던 가치를 회복하는 일이 되고 있더군요. 조경도 그 연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맞습니다. 도시는 살아 있는 생명인 사람부터 시작 되어 사람이 살기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기본적으로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도시들은 사람이 중심이 되지 못하고 생명이 없는 건축이나 공간이 사람을 압도하는 공간이 되어버렸어요. 조경은 그 도시가 안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고 생명력을 회복하는 통로입니다. 전주가 갖고 있는 하늘, 빛, 물, 땅의 생명력을 회복시켜 공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과제지요. -전주가 갖고 있는 생태적 건강성을 말씀하셨는데 둘러보면 도심 안에 나무도 많지 않고 여느 도시와 차별성이 크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외향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경관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는 녹시량이 얼마나 되느냐는 겁니다. 도시의 경관은 평면적으로 보이는 녹지의 면적이 얼마나 되느냐보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거나 차를 타고 다닐 때 보이는 녹시량이 훨씬 더 중요한 가치를 갖습니다. 전주는 그러한 녹시량을 늘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도시입니다. -전주가 천만그루 정원도시를 목표로 내세웠습니다. 선언적인 의미이기도 하지만 우선은 나무를 많이 심는 것이 목표 아닐까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환경에서 면적을 의도적으로 넓혀가는 것보다는 한정된 공간에서 녹시량을 확장해나갈 수 있는 방법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전주를 걷거나 차를 타거나 어디를 가도 녹시량이 충만한 도시로 그릴 수 있다고 봅니다. 전주만의 문화와 역사가 있듯이 전주만이 가질 수 있는 도시의 풍경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지요. -현재의 전주 경관은 어떻습니까. 지금의 녹지는 단순화 되어 있어요. 그것을 다양화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진짜 전주의 모습이 보이게 하는 것이 과제지요. 저는 전주가 다양하면서도 통일성을 가진 도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생명의 가치를 높여 주는 것입니다. -전주의 경관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시민들의 참여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맞습니다. 시에서 아무리 천만그루 정원도시 만든다 해도 시민들이 호응하지 않으면 효과도 의미도 없습니다. 시의 정책도 중요하지만 시민들이 녹시량에 대한 가치를 알게 되고 함께 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의미가 있겠지요. -결국은 시민들의 인식의 변화가 중요할 것 같은데 쉽고 빠르고 편한 것에 익숙해진 환경에서 쉽지만은 않은 일일 것 같습니다. 나무나 숲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으나 아직은 그 가치나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는 부족하니까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이어서 사랑을 주면 그만큼 답을 해줍니다. 나무를 심고 정원을 가꾸는 기쁨을 보다 많은 시민들이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정원도시 전주를 만들 수 있습니다.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정원도시 전주는 어떤 도시입니까. 시민들이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기쁨으로 동참해 만들어지는 도시를 꿈꿉니다. 그러려면 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경제적 가치도 올라가는 도시가 되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저는 전주가 경관으로서만이 아니라 정원 산업이 중심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정원이 만들어지는, 그래서 진정한 정원도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정원산업은 아직 생소한데요. 다양한 식물들을 재배해 산지나 유통의 중심이 되고, 정원을 가꾸는 일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도구가 집결되어 시장이 형성되는 환경을 만드는 일입니다. 정원과 관련된 모든 것을 산업화하는 일인데 이미 많은 도시들이 정원산업을 주목하고 있지만 전주가 먼저 나선다면 성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정원산업의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데 경제적 가치가 높아지면 자연적으로 정원이 만들어지게 되고 이러한 샘플 정원들이 계속 만들어지면서 정원도시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시에 제안한 것이 있는데 전주에 가든센터를 만들자는 겁니다. 정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구할 수 있는 전문적인 마켓이죠. 산업이 토대가 되면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통로도 넓어질 수 있겠지요. -정원도시 전주가 어떤 방식과 과정으로 이루어질지 궁금합니다. 저는 천천히 가는 디자인을 하고 싶습니다. 사실 교통이 편리하다고해서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거든요. 지금은 모든 길들이 그냥 걸어가기 바쁜 형태로 되어 있잖아요. 걷다가 쉬기도 하고, 잠깐 어딘가 바라보고 싶기도 하는 도시의 거리가 만들어지면 얼마나 좋겠어요. -현재의 여건에서 그런 재편이 가능할까요. 곳곳에 작은 공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큰 예산을 들이지 않고도 사람들이 걷고 싶은 길, 쉬고 싶은 공간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 거리와 공간이 하나의 점이라면 그런 점들이 선으로 연결되고 다시 이어져 면이 되는 그런 도시가 되면 사람과 사람들의 관계가 달라지고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지게 됩니다. 도시 환경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생각해보면 여행을 갈 때 우리가 찾아가는 곳이 어디일까요. 바다나 산 숲,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곳을 찾아가지 않습니까. 그것은 아까 이야기한 녹시량과도 관계가 있는데 녹시량이 많아지면 사람들의 내면이 바뀌게 되어있습니다. 서로 돕고 배려하는 삶이 자연스럽게 배이게 되지요. -전주에 식재할 나무도 고민이겠습니다. 처음에 전주를 찾았을 때 시내 거리에 유독 남천이 많이 심어져 있는 것을 보고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나무가 좋다 나쁘다를 따지는 것은 기준이 옳지 않습니다. 나무는 각자 갖고 있는 특성이 달라서 그 다름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다름과 다름을 모아 좋은 경관을 만들어내는 것이 디자인의 역할이지요. 남천은 가을에는 열매나 단풍이 좋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계절은 별 특색이 없지요. 계절마다 특색 있는 나무를 고루 심어 계절별로 모습이 달라지는 도시를 만든다면 좋겠지요. 전주는 도시의 전통성에 맞는 수종을 특성화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영국의 정원이 발전된 도시에 가면 몇 백종 수종이 같이 어우러져서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주시민들이 살아 있는 생명의 다양성을 보고 즐기고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그런 경관을 만들어내는 것이겠지요. -말씀 들으면서 조경과 건축이 따로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주의 건축물들은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오간 것이 10여회 되는 것 같습니다. 건축물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평가하기 어려운데 공공건축물은 질적으로 조금 더 좋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공공건축이 앞서가면 일반건축물들도 따라 올 수 있으니까요. 앞으로 공공건축의 질을 높이는 방안을 같이 고민하고 모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다른 도시보다는 건축물의 층고가 낮고 특히 구도심 쪽은 경관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래된 도시마다 활력을 잃었던 구도심 재생이 한창입니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사업의 대부분이 하드웨어에만 치중되어 있더군요. 조경 경관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결국 도시 경관을 재편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 같은데요. 건축이 중심이 되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조경은 여전히 아웃사이더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도시들은 조경과 건축이 같은 위치에서 협의하고 같이 땅을 만지면서 건축 배치를 합니다. 저는 도시가 생명력을 가지려면 살아 있는 생명이 먼저 존중받고 그 다음에 죽어 있는 건축물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환경은 늘 건축이 앞서 갑니다. 그러니 도시의 맥락이 살기 좋고 아름다운 도시로 가기 보다는 삭막한 도시로 갈 수 밖에 없게 되지요. -정원도시 전주의 미래가 궁금해집니다. 저는 전주를 하나의 숲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주가 갖고 있는 잠재력을 지키고 살려 어떻게 하면 가치 있는 도시로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제가 제안하는 일만으로 도시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나하나 제안하고 만들어가려고 합니다. 저의 제안이 몇 사람의 인식을 바꾸고 그 몇 사람이 다시 몇 사람의 생각을 바꾸면서 서서히 변화하는 것, 그것을 저는 가장 가치 있는 전주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 [최신현 대표는] 지자체 첫 총괄조경가, 대표작 '서서울 호수공원' 최신현 대표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조경과 건축을 아우르는 공간 디자이너다. 그의 이름 앞에 조경가나 건축가가 아닌 조경건축가란 직함이 더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린 시절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건축 디자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학에서도 건축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지망했던 학교를 떨어지고 난 후 조경 분야로 진로를 바꾸었다. 조경과의 만남은 그의 표현대로라면 운명과도 같았다. 입시 준비를 하고 있던 그를 조경의 가치에 눈뜨게 해준 사람은 미국에 살고 있던 아버지의 친구였는데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의 조경은 전공한 연구자도 거의 없었던 미개척분야여서 조경학과를 개설한 대학이 드물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조경학과를 개설한 영남대에 입학했다. 알수록 빠져드는 조경 분야는 그에게 공부하고 연구하는 기쁨의 대상이었다. 대학원(홍익대)에 들어가 환경설계학을 공부하면서 조경에 대한 그의 철학은 훨씬 더 폭넓고 깊어졌다. 조경회사와 엔지니어링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공간 디자인의 영역은 그의 삶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실천하는 통로로 자리 잡았다. 조경은 알수록 깊어지는 분야였다. 조경을 제대로 하려면 건축과 토목, 시공까지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론으로도 전문성을 갖추고(서울 시립대 대학원 박사과정), 조경기술사 자격증까지 갖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현장을 지키면서 학업을 병행했던 그는 주경야독의 결실을 같은 길을 가고자하는 후배들과 나누고 싶어 대학 강의를 즐기면서도 도시의 환경을 바꾸는 크고 작은 현장을 지키는 일 또한 열정과 신념으로 이어냈다. 2002년, 이상향을 뜻하는 유토피아처럼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곳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은 회사 씨토포스 를 설립한 이후 그가 참여한 사업의 결실은 곳곳에서 빛났다. 대전 서구 탄방근린공원조성계획, 광주 5.18묘역 조성사업 기본계획, 인천대공원 조성, 서울 종로 걷고 싶은거리 기본계획, 행당도 복합휴게시설 기본계획제안, 대가야 역사 테마 관광지 조성 기본계획, 월드컵 공원조성 기본설계, 서울시 서서울 호수공원, 북서울 꿈의 숲, 제주 라이프 가든을 비롯해 전국 각 지역의 수많은 공모사업 현상설계에서 대상을 수상하거나 당선됐다. 이중에서도 서서울호수공원은 경관디자인의 중요성을 널리 알린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공간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 들어온 숲과 공원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으며 생명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삶의 태도를 공유하게 되었다. 영남대 교수를 거쳐 지금은 서울시 건축정책위원과 도시공원위원, 인천공항공사 조경 자문위원을 맡고 있으며 매력만점 삼양동 마을 만들기 총괄계획가와 전주시 총괄조경건축가로 활동하면서 도시의 환경을 바꾸는 가치 있는 일을 실현하고 있다.

  • 기획
  • 김은정
  • 2019.04.11 20:36

[전북의 독립현장] 임실, 학생 주도 촉발…장수, 장터 중심으로 만세운동 펼쳐

임실 오수지역 31 만세운동은 1919년 당시 전국 10대 의거지 중 하나로, 3월 10일 오수보통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촉발됐다. 오수보통학교의 만세운동은 임실 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31운동이었다. 장수지역에도 자유와 독립을 선포하는 독립선언문이 전달돼 장터 등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독립을 열망하는 지역민들의 항거는 들불처럼 지역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임실지역 서울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에서 보통학교 학생들의 의해 3월 10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어린 학생들의 의거에 일본인 교장과 주재소 순사들은 크게 당황해 험한 말로 학생들을 억압했다. 이후 이달 12일에는 임실읍내에서 2000여 명의 군중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임실 장날이었던 이날 오전 10시쯤 시장 한복판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퍼지자, 모여든 장꾼이 합세해 만세를 불렀다. 태극기가 나부끼고 독립선언서가 배포됐다. 당시 임실읍 뒷산에는 봉화가 높이 올려지며 만세운동이 격화됐다. 오수면과 임실읍에서 촉발된 만세운동은 청웅면, 지사면, 강진면 등 인근 면을 거쳐 남원, 순창, 장수 등 인접지역으로 전파됐다. 3월 23일 오수지역에서 다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기송, 이만의, 오병용 등은 천도교인 및 개신교인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시위 군중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 최대 2000여 명을 헤아렸다. 이들은 시장 내의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과 면서기들에게 같은 민족으로서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이날 저녁 남원헌병분견대와 임실경찰서에서 파견한 무장 병력이 출동해 발포하자 만세 시위대는 일단 해산하였다가, 300~400명씩 무리를 지어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한 삼혁당 김영원은 일본경찰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1919년 8월 26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김영원을 비롯해 만세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들은 출옥한 뒤 영춘계(迎春契)를 조직했다. 당시 영춘계에 참여한 오병용, 이기송, 이윤의 등 35명은 밭을 갈면서도 봄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영춘계원 35명 중 21명이 국가유공자로 추서될 정도로 임실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영춘계는 일본경찰의 탄압으로 4~5년 만에 해산됐다. 임실군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념도록 영춘을 간행했다. 이 기념도록에는 임실지역 만세운동 기념비 소개와 함께 국가유공자 목록, 각 지역별 31 만세운동 개요, 국가유공자들의 판결문, 국가유공자의 소장 자료, 임실지역 천도교 활동을 알 수 있는 개인소장자료, 기획원고 등이 수록됐다. △오수 만세운동 지도자 이기송 이기송(1888~1939)은 1919년 3월 23일 임실 둔남면 오수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오수리에서는 이미 3월 10일에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돼 임실군 내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그러나 일본인 교장의 압력으로 더 이상 학생들의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이기송은 오병용이만의 등과 연락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이날 장터에 모인 군중 앞에서 독립운동의 당위성에 대해 호소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기송은 일본경찰에 붙잡혀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오수면 둔덕리에 뿌리내린 전주이씨 문중은 이기송을 비롯해 총 16명의 애국지사를 배출했다. △장수지역 장수 산서면 동화리는 1919년 정봉수 열사를 중심으로 15명의 애국지사들이 지역주민들을 모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쳤던 곳이다. 1919년 3월 19일 인근지역인 임실 지사면의 박정주, 안성섭 등은 동화 장날을 맞아 장꾼들을 격려하며 만세를 부르고 시위행진을 벌였다. 일제는 시위가 격렬해지자, 발포하는 등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어 22일 장수 번암면 노단리 장터에서도 독립만세가 울려퍼졌다. 다음날인 23일에는 산서면 사계리에서 주민 30여명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장수군은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나라사랑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동화리 괴정마을 입구에 기념비를 건립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이와 관련, 장수군은 지난달 1일 산서면사무소와 31운동 기념비에서 10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이날 참석자들은 면사무소에서 31운동 기념비 구간을 가두행진하며 만세 삼창을 외쳤다. 또 유족 대표의 독립선언문 낭독과 산서중고등학교 학생들의 31절 합창과 만세 삼창도 진행됐다. △민족대표로 한국 불교 수호에 앞장선 장수 출신 백용성 장수에서 태어난 백용성(1864~1940)은 31독립만세운동의 민족 대표이자 어려운 불교 경전의 한글화를 처음으로 시도한 경전 번역인이었다. 31운동 당시 백용성은 한용운의 추천으로 민족 대표 33인에 포함됐다. 1919년 3월 1일에 백용성을 포함한 민족 대표들은 서울 종로의 태화관에서 민족 독립을 절규하는 만세삼창을 했다. 이 일로 구금돼 고초를 겪고 1921년 3월에 석방된 백용성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금강경>을 순 한글로 번역간행하는 일이었다. 이후 삼장역회를 설립해 수많은 경전을 한글로 번역간행했다. 1928년에 한글로 된 <화엄경>을 간행하는 기념비적인 일을 해냈다.

  • 기획
  • 최명국
  • 2019.04.10 19:59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지역 출판 생태계 살리는 고창한국지역도서전

지역출판인들의 잔치, 한국지역도서전이 5월 9일부터 12일까지 나흘 동안 고창에서 열린다. 첫 회 제주, 작년 수원에 이어서, 내년에는 개최지가 대구라니, 아무래도 군 단위 작은 지역에서 전국을 아우르는 도서전 개최가 낯설게 느껴지지만 기초단위 작은 시군에서부터 지역을 기록하는 힘을 북돋자는 취지라니 오히려 살갑다. △지역에 살다, 책에 산다 2019고창한국지역도서전은 지역에 살다, 책에 산다를 주제로 삼고 있다. 줄이면 <지역 살다, 책 산다>이다. 살림의 지역생태계, 살아나는 지역 출판생태계를 화두로 삼고 있는 것이다. 지역이 살아나는 데 바탕은 책의 살림, 출판생태계의 건강한 살림이라는 메시지이다. 산다는, 살림의 뜻 말고, 지역 책을 사자는 뜻도 슬쩍 넣었다고 한다. 사야 살려지는 이치. 이 살림은 단지 책 짓고 읽는 사람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지역 안에서 지역출판생태계의 건강성을 되새기자는 뜻도 담았다. 그동안 지역도서전이 로컬기록자와 지역출판인들이 기획한 생산자 중심이었다면 책방, 도서관 같은 출판생태계의 다른 한쪽 끝, 독자(소비자)를 이어보자는 고민의 결과다. 생산부터 소비까지 모두 건강해야 그 유기체, 생태계가 건강하게 되니까요. 이번 도서전이 출판을 매개로 하지만, 지역을 건강하게 하자는 의미가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죠. 행사를 함께 준비하는 고창군청 김성숙 도서관팀장의 설명이다. △전라도 지역 책공간을 담는 한국지역도서전 기념도서 한국지역도서전은 매해 기념도서를 출판해왔다. <동차기 서차기 책도 잘도 하우다예> 제주한국지역도서전 기념도서 제목이다. 전국 방방곡곡 책 짓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 제주 말을 제목으로 삼은 책이다. 지난해 수원한국지역도서전 기념도서는 <나는 지역에서 책 지으며 살기로 했다>로, 지역출판 편집자들의 삶을 담아낸 책이다. 지난해까지 기념도서의 주제가, 지역기록자, 출판인들의 생각과 고민, 현장을 담았다면 이번 2019 고창한국지역도서전 기념도서는 지역의 책공간을 찾아서를 주제로 삼는다고 한다. 전국의 작은책방, 색깔있는 도서관, 책과 머무는(북스테이) 공간을 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 지역 곳곳의 공간을 담고 있지만, 이번 도서전이 열리는 전라권역 책 공간이 중심에 있다. 지난 3월부터 시작한 전라권역 책공간 탐사는 일단락됐다. 전남으로는 완도의 완도살롱, 여수 동동책방, 목포 퐁당퐁당으로부터 순천 심다와 그림책도서관, 도서관옆그림책방(도그), 곡성의 길작은도서관으로 이어졌다. 광주는 계림동 헌책방거리를 휘감으며 광주의 대표 작은책방이며 북스테이 동네책방숨을 비롯해, 흰책검은책방, 책과생활을 더듬었다. 전북에서는 전주의 잘익은언어들, 책방놀지, 카프가서점, 소양고택을 휘감아 전주헌책방거리에서 홍지서림과 한가네서점을 담았다. 전국 다른 지역의 책공간은 지역출판사 친구들이 맡아 도와주고 있다. 울력으로 품앗이로 찾고 기록하고 채우는 한 권의 책,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당신의 마음에 위로를 덧댑니다, 잘 익은 언어들로 2019한국지역도서전 기념도서 안에 들어간 호남의 책공간, 특히나 전북의 작은책방 가운데 한 공간을 중계하려고 한다. 전주 잘익은언어들이다.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에 다소곳한 잘익은언어들은 공감책방이라는 수식을 달았다. 책방 통유리에는 책방지기 이지선 대표가 고심해 적은 글이 붙어 있다. 설익은 섣부른 언어들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지만 성숙하고 싶은 생각에서 나오는 언어들은 누군가를 위로하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잘 익은 언어들은 그 위대한 언어들의 힘을 알기에 한 문장, 한 문장 잘 익은 글들을 당신께 전하고자 합니다.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를 읽고 떠오른 단어의 조합은 책방의 이름이 됐다. 광고계에서 카피라이터로 긴 시간 일해 잔뼈가 굵은 이 대표는 2013년 여름, 서울을 떠나 고향인 전주로 내려왔다. 전주 생활 5년 만인 2017년 10월에 책방을 열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꿈만 꾸던 이 대표가 책방을 열게 된 건, 순전히 우리 동네에도 책방이 있으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에서였다. 오가는 사람들은 힐끗 책방을 구경하기도 하고, 발길을 멈추고 잘 익은 언어들의 세계로 들어서기도 한다. 그때마다 이 대표는 환하게 웃으며 사람들을 반긴다. 하교 시간이면 학원으로 향하는 아이들 웃음소리에 이 대표는 괜스레 문을 열어두고 밖으로 나간다.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안녕!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스스럼없이 대한다. 오늘도 역시나 잘 익은 언어들의 문은 활짝 열려있다. △온 마을이 책이다, 2019고창한국지역도서전의 공간 2019고창한국지역도서전은 책마을해리와 책마을 둘러싼 나성리(월봉마을, 성산마을) 공간에서 열린다. 마을 안 구조물을 책의 공간으로 다듬고, 마을길을 따라 책담들로 꾸민다. 책의 공간 책마을해리는 이제 지역의 기록과 지역책의 생태계가 꿈틀거리는 지역출판의 현장으로 변신중이다. 지역출판인들이 모여 지역 책, 마을에 산다. 온 마을이 책이라고 외친다. 지역을 기록하고 지역의 이야기를 출판하는 일, 지역의 소멸을 늦추고 지역을 재생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고창한국지역도서전 이대건 집행위원장은 말한다. 고창한국지역도서전이 열리는 기간에 맞춰, 고창에서는 전북도민체전, 전라예술제와 더불어 청보리밭축제가 열린다. 그야말로 고창방문의 절정기이다. 지역과 책 안에서 즐겁고, 책 바깥에서 흥겨운 5월, 고창에서 전국 방방곡곡 이야기로 건강한 책의 생태계와 만날 수 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 기획
  • 기고
  • 2019.04.09 20:00

[참여&소통 2019 시민기자가 뛴다] 클럽 버닝썬 철저한 수사 요구한 전북 남성들의 목소리

지난해 서지현 검사가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의 성추행을 알리면서 확산된 미투(#metoo) 운동은 한국사회 여성들의 용기 있는 고발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북에서도 연극계를 비롯해 곳곳에서 미투가 이어졌다. 전북지역 미투 운동은 여성들의 용기있는 말하기와 함께하겠다는 목소리, 위드유(#with you)가 등장하면서 힘을 받았다. 전북지역 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전북시민행동이 바로 그것이다. 전북시민행동은 미투운동의 지지와 함께 문화제와 집회를 여러 차례 열면서 미투 당사자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켰다. △돈과 사회적 지위 악용한 성폭력 만연 정치계에서부터 체육계, 예술계, 교육계 등 다양한 부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성폭력 사건은 돈과 사회적 지위를 이용한 여성에 대한 성폭력 사건이라는 공통 분모를 갖고 있다. 그리고 가해자들의 침묵과 집단의 2차 가해도 비슷한 경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위드유 운동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미투 운동을 응원하고 성폭력 사건을 피해자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남성들의 목소리가 적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페미니즘과 미투 운동을 남성 혐오, 젠더 갈등으로 보는 남성들의 시선이 여전히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실제로 여러 남성 중심의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면 여성들의 미투 운동을 조롱하거나 비아냥 거리는 표현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남성들의 목소리가 더 이상 화살이 돼 여성들에게 향해서는 안 된다. 웹하드에 버젓이 100원에 유통되는 불법 촬영 영상물에서부터 고 장자연씨 죽음, 김학의 사건 등 검찰의 과거사 재수사 문제, 클럽 버닝썬 사건과 남성 연예인들의 불법 촬영과 유포까지 남성에 의해 벌어진 성폭력에 대한 비판과 자성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이들 사건은 일부 남성 연예인 및 권력층의 왜곡된 성문화로 볼 문제의 수준을 넘어섰다. 경찰과 검찰, 사법부의 유착과 성 접대까지 개인이 아니라 남성 집단의 문제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가운데 전북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자성하는 남성들의 조직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남성들의 위드유와 자기 반성 지난 3일 전북에서는 주목할만한 남성들의 목소리가 성명서를 통해 발표됐다. 여성의 몸을 이용한 성착취 카르텔 범죄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전북지역 남성시민 성명 참가자라고 소개한 49명의 전북 시민이다. 이들은 클럽 버닝썬 사건, 고 장자연 씨의 죽음, 김학의 사건, 몰카 촬영 문제 등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성범죄들을 성착취 카르텔 범죄라고 규정하고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많은 여성단체들과 시민들이 이들 사건에 대한 규탄과 해결을 촉구하는 과정을 목격하며 남성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고민하며 성명을 준비했다는 두 남성이 주축이 돼 약 40여 명의 남성들이 동참했다. 이들은 비즈니스를 위해 성범죄를 자행하고, 약물강간이 횡행하며, 불법촬영물이 버젓이 생산, 소비, 유통되는 과정을 볼 때,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착취가 이 사회에서 얼마나 조직적인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의견을 냈다. 그리고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이뤄졌지만 여성의 몸을 이용한 범죄라는 점,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와 폭력이 산업화 되고 이를 공권력이 비호하는 상황은 가히 카르텔 범죄라고 할 만하다고 봤다. 그래서 이들은 성착취 카르텔 범죄라고 칭했다. 그리고 이들은 남성으로서 침묵했던 것에 대한 일종의 자기 반성도 성명서에 담았다. 세대와 계층을 가리지 않는 이 카르텔의 끔찍함에 치가 떨립니다. 사법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국가와 공권력이 이러한 범죄 앞에 없었다는 것에 분노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역시 남성으로서 나도 모르게 일상에서 이와 유사한 장면을 외면하고 눈 감았던 순간은 없었는지 되돌아 보게 됩니다. 일상에서의 성차별과 불평등이 묵인되면서 여성시민에 대한 폭력을 용인하는 환경을 만든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성명서 내용 중에서 이 성명서에 동참한 한 남성은 성착취 카르텔, 이 사회의 한 남성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면서 철저한 수사로 피해자들의 상처를 보듬고, 가해자들에겐 강력한 처벌, 그리고 우리 사회와 남성들에게 경종을 울려야 할 때이다고 참여 이유를 밝혔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남성만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실현될 수 있기 위해서는 성착취 카르텔 범죄가 철저하게 수사되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성착취 카르텔 범죄, 전북도 예외가 될 수 없어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에서부터 미투 운동까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와 성차별은 결코 멀리 있는 문제가 아니라 전북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나가던 여중생을 전 여자친구와 닮았다는 이유로 거리에서 폭행을 한 사건, 대학교에서 인권을 가르치던 강사들의 성폭력 사건, 전 유도 선수의 미투 등은 모두 전북에서 일어난 일들이며 강남역 살인사건 등과 닮아 있다. 또한, 전북여성노동자회가 운영하는 평등의 전화 상담 통계를 보면 직장내 성희롱에 대한 상담이 최근 5년 동안 약 3배나 늘었다. 전북여성노동자회는 미투 운동의 영향으로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해결하려는 당사자들의 적극적인 상담이 늘어난 것이라고 봤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2016년 전국의 기업 접대비는 무려 10조원에 육박한다. 이 중 이른바 유흥업소라고 불리는 곳에서 사용된 접대비도 1조원을 넘어섰다. 남성들의 성 접대가 산업적인 수준에 이른다는 것을 반증하는 통계라고 볼 수 있다. 여성의 몸을 소비하고, 성폭력 문화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왜곡적인 남성 문화에 대한 성찰이 전북에서도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 가운데 전북지역 남성들이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나는 그런 남성이 아니다라는 말에 머무르지 않고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적 환경에 대한 책임을 나눠지고자 한다는 이들의 다짐을 하나하나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하나. 경찰과 검찰은 클럽 버닝썬 사건, 고 장자연씨의 죽음, 김학의 사건을 어떤 의혹도 남지 않도록 철저히 수사해서 단죄해야 합니다. 하나. 정부와 국회 특검 도입 등을 통해 권력의 유착 의혹에 대해 철저히 밝혀내고 엄중하게 처벌하는데 나서야 합니다. 하나. 우리는 여성시민을 착취하는 여성의 몸을 이용한 성착취 문화가 척결되고 성착취 카르텔이 해체되도록 다른 시민들과 힘을 모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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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08 20:46

[전북의 재발견] 정읍 '봄' 여행 : 걸어서 한바퀴

"전통과 여유가 있는 정읍 여행" 광주로 가기 위해 KTX 호남선을 타면 광주송정역에 도착하기 전에 잠깐 들리는 곳이 바로 정읍역입니다. 광주에서 정읍까지는 차로 1시간이면 도착할 정도로 가까운데요. 광주에서 거주하는 저로서는 이번에 처음으로 정읍 여행을 떠나보았습니다. 타지역에서 대중교통을 통해 정읍을 방문하는 방법은 KTX역과 버스터미널이 있는데요. 먼저 KTX를 이용하면 정읍역에서 익산역까지 20분, 광주송정역에서 정읍역까지 20분 정도 걸립니다. 그리고 버스터미널은 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이 함께 모여 있습니다. KTX를 타고 정읍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정읍천인데요. 처음에 정읍천을 방문했을 때 작은 하천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큰 기대를 안 했는데 도착해서 보니 생각보다 넓어 놀라웠습니다. 보통 정읍에서는 3, 4월이 되면 정읍천 양옆에 피어 있는 벚꽃이 만개해서 정읍 벚꽃 축제가 열리는데요. 올해는 개화가 늦어서 방문했었을 때에는 벚꽃이 아니라 노란 개나리꽃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정읍역에서 정읍천을 따라서 도착한 곳은 정읍의 전통시장인 샘머리 시장이었는데요. 샘머리 시장은 우리나라에서 104년의 역사를 가진 전통시장입니다. 요즘 국내 여행을 떠나는 많은 사람에게 전통시장투어가 인기가 많은데요. 전통시장 투어를 하는 이유를 찾아보면 그 지역의 특산물들을 쉽게 볼 수 있고 흥정을 통해서 저렴한 가격에 구매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전통시장 주변에는 그 지역을 대표하는 특산물로 만든 유명한 맛집은 물론 주변에 가볼 만 한 곳이 함께 있는데요. 샘머리 시장에서 유명한 맛집으로는 순대국밥이 일품인 화순옥과, 국내산 팥 100%를 사용하는 팥죽집들이 있습니다. 구불구불한 샘머리 시장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샘머리 시장의 야한 야시장 축제. 올해로 5년째 맞는 샘머리 야시장은 시장 내 다목적 광장을 중심으로 오후 3시부터 9시까지 진행이 됩니다. 국악과 가요, 댄스, 외국인 팀 공연까지 볼거리가 풍성했습니다. 그리고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는 육전과 장어구이, 튀김 등 먹거리 또한 다양했는데요. 다음 야시장은 5월 9일 '정읍 샘고을 시장 와글와글 시장가요제'와 연계해서 열릴 예정이라고 하니 정읍을 방문할 계획이시라면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구불구불한 샘머리 시장을 지나 제가 찾아간 곳은 정읍시청 옆에 있는 충무공원 이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이 전라북도 정읍에 있었다는 사실, 혹시 아시나요? 충무공 이순신은 1589년 12월 정읍현감으로 부임해서 1591년 3월 이임할 때까지 1년 4개월간 정읍을 다스렸는데요. 어렸을 때 저도 이순신 장군을 좋아해서 이순신 장군과 관련 유적지를 방문하고 싶었는데 광주와 가까운 정읍에 이순신과 관련된 유적지가 있었다니 정말로 신기했습니다. 참고로 충무공원은 이순신뿐만 아니라 독립열사들의 묘까지 있어 가볍게 산책을 즐길 수도 있는데요. 이순신을 좋아하신다면 꼭 한 번 방문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정읍을 대표하는 유명한 음식은 무엇이 있을까요? 정읍은 최근에 특산물을 활용한 귀리 떡갈비와 쌍화차 묵은지 삼합, 사과맥적 등 대표 음식을 개발하고 있는데요. 저는 정읍에서만 먹을 수 있는 핫한 맛집을 다녀왔습니다. 생갈비 매운탕과 비빔짬뽕, 그리고 매콤 탕수육이란 음식 메뉴 들어보셨나요? 먼저 생갈비 매운탕을 판매하고 있는 곳은 6대째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갈비박스입니다, 그리고 비빔짬뽕, 볶음 탕수육을 판매하고 있는 곳은 양자강으로 양자강은 백종원의 3대 천왕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곳인데요. 참고로 양자강은 재료 소진 시 영업이 종료되기 때문에 비빔짬뽕과 볶음 탕수육을 먹고 싶다면 정읍에 도착하자마자 방문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사실 저녁 6시 정도에 방문했는데 운이 좋게 비빔짬뽕을 취소를 하신 분이 있어서 마지막으로 비빔짬뽕을 먹을 수 있었는데요. 비빔짬뽕을 간단히 소개한다면 짬뽕계의 이단아라고 할 정도로 국물이 적은 특이한 짬뽕입니다. 비빔짬뽕을 맛있게 먹는 법이 있다면 가득 들어있는 돼지고기와 오징어를 면과 함께 잘 비비면서 먹으면 더욱 풍성한 식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빔짬뽕은 일반 짬뽕과 다르게 양 또한 풍부해 비빔짬뽕 다음으로 특별한 볶음 탕수육은 양념치킨 소스와 비슷한 맛이 난다는 여러 후기처럼, 정말로 탕수육인데 약간 매콤하면서 양념치킨 맛이 납니다. 배불리 식사를 마치고, 후식을 즐기러 제가 방문한 곳은 근처에 있는 정읍 쌍화차거리였는데요, 혹시, 쌍화차 드셔보신 적 있으신가요? 쌍화차란 당귀, 천궁, 계피, 감초 등의 한약재를 물과 함께 약탕기에 달여서 마시는 차로 정읍 쌍화차거리에 있는 쌍화차는 보통 30시간 이상을 다린다고 하는데요. 쌍화차 하나만 주문했는데 땅콩부터 시작해서 쌍화차, 가래떡, 그리고 마즙 까지 코스로 나와서 신기했습니다. 정읍에 와서 쌍화차를 처음 먹어봤는데 쌍화차 안에 밤과 대추, 잣이 가득 들어있어서 놀랐습니다. 특히 밤은 쌍화차가 적당히 스며들어서 더욱 맛이 좋았고 몸이 허할 때 먹는 보약을 차로 마신다고 생각하니 최근에 쌓여있던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쌍화차를 마시며 수다도 떨고 휴식을 취한 후 정읍 시내 구경을 하면서 정읍터미널을 향해 발걸음을 움직였는데요. 정읍의 밤거리 LED로 꾸며져 있어서 화려했습니다. 저는 이번에 걸어서 가볍게 정읍 시내를 중심으로여행을 다녀왔는데요. 시간이 있다면 내장산 생태공원, 칠보물테마유원지, 백제가요정읍사오솔길 등도 방문해 보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글사진 = 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노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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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08 18:45

[전북의 재발견] 한반도 첫수도 고창의 유적 : 고인돌 박물관·봉덕리 고분군

"고창에서 만나는 다양한 문화유산" 4월이면 수학여행을 떠나는 시기이기도 하죠? 학창시절 인기 수학여행지로는 꼽히는 곳은 단연 경주인데요. 경주에 가면 넓은 초원에 큰 고분과 함께 많은 유적과 유물을 만날 수 있죠. 또 문화 해설사의 이야기를 귀로 듣고 수첩에 열심히 메모했던 추억은 다 가지고 계시죠.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할 만큼 그 옛날 경주로 떠난 추억 여행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전라북도에서는 이러한 문화 유적지를 어디서 만나볼 수 있을까요? 그리 멀지 않은 곳, 고창이 바로 있습니다. 고창 역시 경주만큼이나 유적지와 유물들이 가득하고 역사 깊은 도시인데요. 주말 아이들과 봄 소풍으로 한반도 첫수도에 걸맞은 고창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과 유적지를 돌아보세요.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대규모 고인돌 유적지가 있는 곳! 고창 고인돌유적은 전북 고창군 죽림리와 매산리 일대에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로 약 1,764m 범위에 447기가 분포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인돌 군집을 이루고 있어요. 10t 미만에서 300t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고인돌이 분포하며 탁자식, 바둑판식, 지상석곽형 등 다양한 형식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데요. 고창 고인돌 유적은 고창 죽림리 지석묘군(사적391호)로 지정관리하고 있습니다. 문화탐방의 묘미는 적게 걷고 힐링하면서 눈으로 많이 담아두는 것이 최고지요. 고인돌 박물관에는 넓은 문화공간을 열차를 타고 느낄 수 있는 고인돌 탐방열차가 있는데요. 모로모로 기차를 타고 선사시대 문화마을을 체험하기도 하고 초원위에 웅장하게 자리한 고인돌을 관람할 수도 있습니다. [고창 죽림리 지석묘군 : 지석묘란 선사시대 무덤형식의 하나로 고인돌로 고창 아산면 죽림리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약 1.8km에 이르는 야산 기슭에 440여 기의 고인돌이 무리를 지어있다. 기원전 400~500년 무렵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집단 무덤으로 이 지역을 지배했던 족장들의 가족무덤인 듯 하다. (출처:문화재청) ] 참고로 해설사와 함께하는 세계유산으로 떠나는 여행이 11월까지 마지막 주 수요일에 3인의 문화관광해설사가 탐방객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고인돌 유적으로 떠나는 여행 신청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고인돌공원길 74 고인돌박물관 문의처 : 고창고인돌박물관 560-8676 고창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명칭은 마한의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인데요. 모로비리국의 영역에서 다른 어떤 지역보다 청동기는 물론 철기 등의 유물이 풍부하게 출토되고 있어 이미 선진적인 정치 집단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고창읍 도산리의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부터 마한의 모로비리국까지 천제단으로 이용된 듯합니다. 이런 근거로 첫째, 시신을 매장할 관이 모두 열려 있고 높아 사체를 중요시하는 이들에게 있어 보관의 안전성이 떨어집니다. 둘째, 유독 이 고인돌 한기만 멀리 떨어져 있고, 주변의 죽림리 고인돌들과는 다른 특이한 탁자식 구조입니다. 셋째, 도산리 고인돌의 모양은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신성한 존재였던 고구려의 삼족오와 같이 새를 연상하게 합니다. 이를 토대로 도산 사람들은 달이 가장 먼저 크고 밝게 빛나는 정월 14일 자정에 천제를 거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창지역은 마한의 모로비리국의 정설입니다. 마한 소국들의 국읍에 정치세력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근거로 군사 방어시설인 성곽과 거대한 고분, 천제단 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고창 도석리 지석묘 주소 :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536 고창 봉덕리 고분군은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무덤을 말합니다. 2015년 대한민국 사적 제53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요. 총 4기의 분구묘로 이루어져 있으며 1호분과 2호분의 경계지점은 대규모 자연 구릉을 굴착하여 조성하였는데 이런 고분 축조 방법은 영산강 유역을 비롯한 마한 백제지역에서 확인된바 없는 매우 독특한 축조법입니다. 발굴조사 당시 1호분의 분구 내에서는 석실, 옹관, 석곽 등 다양한 매장시설이 확인되었으며 4호 석실에서는 화려함이 돋보이는 금동 신발과 같이 중국제청자반구호 포함 소호장식유공광구호등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봉덕리 고분군의 축조세력이 당시 고창지역의 최상위 계층임을 알 수 있답니다. 봉덕리 4개 고분 중 1호분은 장축72m,단축 50m, 높이7m규모로 경주의 신라 왕릉보다도 커 깜짝 놀랐습니다. 가까이 서면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앵글로 어마어마한 크기입니다. 봉덕회관 주소 : 고창군 아산면 봉덕길 20-1 이 유적은 주구 널무덤(토광묘)과 주구묘가 동일 지점에서 동시에 발굴된 중요한 고분군입니다. 출토 유물로는 이중구연호호형토기컵형 토기직구호큰 항아리등의 다양한 토기류와 쇠칼환두도쇠화살 촉쇠날등의 철기류, 유리옥수정제옥, 무늬는 없으나 윤기 있고 투명한 자마노로 만든 옥류 등도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 마한 유적의 밀집도가 높고, 기원후 3~5세기 유적이 집중된 점으로 볼 때 마한의 모로비리국의 국읍 이었음을 알려주는 실체적 근거입니다. 딱딱하기만 한 문화유산에 가려진 고창의 다양한 문화유산들을 자연그대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자연최대 생명의 습지! 고창고인돌공원과 연결되어 있는 운곡 람사르습지를 지나면 둘레가 무려 16m,높이5m,무게가 300t이나 되는 동양 최대의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선사시대의 발자취가 남겨져 있는 곳! 고창! 한반도 첫 수도라는 말처럼 고창의 유적지를 이곳저곳 다니다보면 어렵기만 했던 역사시대의 생활이나 물적 자원, 유물 등을 알아보고 고창이 아마도 한반도의 첫수도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전북의 의미 있는 첫수도! 고창으로 문화여행&역사여행 떠나보세요. /글사진 = 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최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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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08 18:33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54. 여산이 빚은 술과 가람

늙어가면서도 술잔을 놓을 수 없고 / 늙어가면서도 분필을 던질 수 없다 / 분필과 술잔으로나 내 한 생을 보낼까 가람 이병기(嘉藍 李秉岐, 1891-1968년) 선생의 <내 한 생(生)>이란 시이다. 애주가이자 선생으로 살아온 그의 삶이 오롯이 드러난 시구이다. 가람선생이 생전에 술 복, 제자 복, 난초 복 세 가지 복을 타고 나 스스로가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 말한 것에는 그가 태어나 말년을 보내고 잠들어 있는 전북 익산의 여산(礪山)과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의 가양주와 깊은 관련이 있다. 여산은 호남의 땅이 시작되는 곳으로 국도 1호선이 지나는 곳에 있다. 예로부터 여산은 많은 사람과 사연이 지나가는 중요한 길목으로 길손들에 의해 술맛 좋기로 소문이 난 곳이었다. 여산의 술이 맛있고 유명한 데에는 지역에서 나는 쌀과 물도 좋지만 땅이 지닌 힘도 있는 듯싶다. 특이하게도 여산에 있는 천호산(天壺山, 마을에서 불린 이름 호산)은 단지나 병에 사용되는 한자 호(壺)를 쓰고 있다. 여산의 산 이름 호산에 고급술에만 붙인다는 춘(春)자를 붙여 호산춘(壺山春)이 탄생했다. 춘자를 붙인 이유는 중국에서 고급술을 춘주(春酒)라 칭한 것에 유래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여산의 호산춘 외에도 서울의 약산춘, 평양의 벽향춘 등 춘(春)자를 붙인 술들이 있다. 고문헌에도 호산춘에 관한 기록이 많다. 우선 『산림경제』 <여산방>에 호산춘을 빚는 법이 처음 등장하는데, 멥쌀와 누룩을 사용하여 13일 간격으로 세 번에 걸쳐 빚어내는 삼양주(三養酒)로 기록되어 있다. 『고사십이집』에는 호산춘(壺山春)은 여산에서 나온 술로 여산을 호산이라 불렀기에 나온 이름이라 정의하면서 술 빚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익의 『성호전집』에는 <호산춘(壺山春)>이란 시가 실려 있는데 호산춘 술 빛이 잔에 그득 담겼으니 / 그대의 깊은 정에 감사해 백 잔도 불사하리라며 호산춘을 가져다준 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구가 남아있다. 여산 외에 다른 지방에도 호산춘이라는 이름의 술이 있지만, 문헌에 나오는 호산춘의 호(壺)와는 다른 호수호(湖)자를 쓰고 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명주로 불린 호산춘은 호(壺)자를 쓰는 여산의 술을 말하는 것임에 분명하다. 호산춘은 가람 선생 집안을 중심으로 여산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 술로 알려졌지만, 정작 그는 호산춘이란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1951년 3월 5일, 나의 회갑. 일기가 화창하다. 헌수를 받고 또 내빈들과 종일 마셨다. 크게 취하였다. 1955년 4월 14일, 비가 온다. 두견주를 빚었다. 1956년 1월 1일, 만발한 매화와 한잔 마셨다. 가람 선생이 19세인 1909년 4월부터 1966년 6월까지 58년간 쓴 <가람일기>에도 술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지만 호산춘을 마셨다는 대목은 보이지 않는다. 가람 선생의 가문에서 내려오는 가양주는 선생의 25대 조부인 이현려(1136-1216년)가 고려 의종조 때 소부감판사 겸 지다방사(궁중의 살림 특히 음식 담당)로 있으며 빚어 내려온 술이라 전해지고 있다. 오래전부터 음식과 술을 잘하는 집안으로 알려진 연안이씨 가문에서 내려오는 가양주는 고려 시대 궁중에서 마시던 술이라 하여 임금님 술로 불리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미루어 보아 여산에서 거주하는 연안 이씨 가문에서 빚던 술인 그 임금님 술이 호산춘으로 불리며 후손들을 중심으로 여산 지역에 그 명맥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가람 선생의 동생이며 독립유공자인 이병석 선생의 장녀인 어머니(이경희)에게 술 빚는 법을 배운 이연호(1946년생) 명인이 호산춘의 전수자이다. 이연호 명인은 농림부에서 주최한 2013년 궁중 술빚기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고, 2018년엔 전북 무형문화재 제64호 여산호산춘 보유자로 지정되며 인정받았다. 공부를 잘했던 다른 형제와 달리 나는 펜싱선수라 시간이 많았어요. 어머니가 술을 빚을 때 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어깨너머로 보았던 것이 외가 집안에서 임금님 술로 불린 호산춘을 전승받게 된 셈이 되었네요. 어릴 적에 술을 담아 오면서 주전자 주둥이에 슬쩍 입을 대고 마시던 그 감칠맛이 지금도 생각나요. 술이 익듯이 느리게 말을 하며 빙그레 미소 짓는 이연호 명인의 말맛 또한 일품이고, 시중에 팔지 않는다는 호산춘을 건네받아 마셔보니 850여 년의 세월이 담긴 술맛이 가히 명품이다. 호산춘은 맑고 고고한 빛을 지녔으며 단맛과 과실의 깊은 향이 입안에서 감돌다 부드럽게 흘러드는 목 넘김이 좋은 술이다. 가람 선생은 국문학자이자 시조 시인으로 한글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와 더불어 술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 것은 이 깊은 술맛 때문인 것 같다. <가람일기>에 등장하는 두견주와 국화주에 대하여 이연호 명인은 호산춘에 꽃을 더해 즐긴 가람 선생의 꽃주이자 계절주라며 그간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가람 선생의 집안에 내려온 가양주는 옛 제조방식과 연못 옆 정자에서 누룩을 띄우는 것도 그대로 전승되어 이연호 명인이 사는 함열의 집에서도 연못 옆 정자에서 누룩을 띄운다. 그러한 연유로 연못의 습기를 머금은 최상품 누룩이 군내 없는 풍미를 만드는 것 같다. 명인에게서 귀한 호산춘을 건네받고 그 술을 그리워할 가람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술을 올리고 내려오는 길에 새소리와 댓잎이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가람 선생의 별을 읊조렸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햇살이 눈부신 날 봄볕은 별처럼 반짝이고 아름다운 시구가 피어난 가람 선생의 생가 주변이 정겹다. 수우재(守愚齋)라 이름 지어진 생가 옆에는 가람 문학관이 있어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인 가람선생의 삶의 궤적을 살펴볼 수 있게 해 놓았다. 한 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꽃이 피었으니 술을 마시자며 청했을 가람선생의 마음이 느껴지는 시이다. 봄꽃이 다투어 피어나는 시기, 여산을 찾아 화초와 술을 사랑한 선생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곡주에 꽃을 띄워 올려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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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04 16:17

[전북의 독립현장] 부안, 학생들까지 앞장선 만세시위...고창, 총·칼에도 굴하지 않는 청년들의 항거

나는 밥을 먹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잠을 자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해왔다. 이것은 나의 몸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도산 안창호 부안지역의 31운동은 3월 중순부터 4월까지 각 종교계와 청년, 학생 등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조직적으로 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일본 순사들의 탄압에도 줄포보통 학생들까지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등 4월 중순까지 부안 지역에 만세운동의 불을 지폈다. 고창도 고종황제의 국장을 기점으로 청년들과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이 진행됐다. 특히 1919년 시작된 만세운동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1920년에 또다시 독립만세운동의 의지를 이어가는 등 고창의 만세운동은 구국의 혼을 불사른 성지로 평가된다. △부안 인근 지역 동지들까지 함께한 독립운동 불씨가 학생들에게로 1919년 31 만세운동이 시작된 후 부안군의 천도교인들은 이웃 고을인 정읍군의 천도교측과 긴밀한 연락을 취해 가며 30일 부안읍 장날에 기해 거사를 계획했다. 3월 중순경부터는 예수교측 및 일반 청년층과도 만나 부안군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고 25일에는 실천단계로 들어갔다. 특히 부안군내의 청년 중 동진면의 은희송이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원래 일본의 순사보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각 지역에서 31운동이 일어남과 함께 자기의 지난날을 반성하며 뜻을 고쳐 독립운동에 힘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 병을 이유로 순사보의 직을 그만둔 뒤 병을 치료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군내 및 정읍군 등지로 다니며 은희상 등 동지가 될 만한 사람들을 찾아 독립운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또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그는 3월 26일경 천도교 및 예수교측의 인사들과도 연락을 취하면서 3월 30일 부안읍 장날을 기하여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예수교측에서는 전도 교인들을 통하여 전도를 가장해 각 면동을 순회하면서 만세운동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고 은희송 등 청년들은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해 배부했다. 하지만 이를 눈치 챈 일본은 경계를 삼엄하게 해 운동의 전개를 어렵게 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30일 오후 8시께 부안읍 뒷산에 만세운동을 알리는 봉화가 타오르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일기 시작했다. 봉화는 빠르게 산을 옮겨가며 번져 갔고 이에 따라 만세 함성도 부안읍 전체에 차례차례 울려 퍼졌다. 4월 7~8일에는 줄포에서 공립보통학교 3~4학년 생도들을 중심으로 학교 교정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려 계획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당시 만세시위를 주동했던 김태순, 박기봉, 김동섭, 이병근, 박병섭 등은 4월 18일 줄포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이들은 태극기를 비밀리 제작해 18일 아침 보안면사무소 게시판과 큰길가 소나무 등에 매달았다. 오전 11시 수업시간이 끝나자 이들은 시장으로 달려가 태극기를 장사꾼들에게 나누어 주며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주변에 경계를 하고 있던 줄포경찰서 순사들이 이들을 제지했고, 주동 학생 중 4년생 김태순, 김동섭, 서용순, 이병근, 박병섭, 이병갑 등이 체포되었다가 학교장과 부모들에 의해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날 밤 10시, 학생들과 주민들은 인근 부락에서 봉화시위와 독립만세를 외치는 행진 등 만세운동의 불씨를 이어갔다. △무장면의 만세운동 횃불 고창 전역으로 무장면 광산 김씨 후예 김영완은 고종황제의 국장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상경했다. 이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의 시위행렬에 참가한 그는 독립선언문 등 유인물을 가지고 무장으로 내려와서 친족 김용표, 김상수, 친우 이용욱, 이준구, 김진호, 박흥선, 오태근, 박흥수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결행하기로 했다. 3월 15일 무장 장날을 이용해 거사를 단행하기로 한 이들은 장꾼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오전 10시가 되자 이용욱, 김용표 등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고, 김영완은 군중들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해 대열을 남산으로 이끌며, 그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들은 태극기를 높이 들고 선두에 서서 군중을 지휘하며 무장면 네거리로 행진하며 선언문을 살포하고 남문을 지나 면사무소와 주재소 앞으로 나가며 수백 명 군중과 함께 행진했다. 얼마 후 고창에서 증원된 수십 명의 일본경찰 병력이 총칼로 강압해 시위군중을 해산하였고, 끝까지 항거한 주동자 김영완, 김용우, 김두남, 김영해 등은 현장에서 검거됐다. 다른 주동자들도 다음날 모두 검거돼 고창경찰서로 압송된 후 갖은 고문을 당하고 정읍 재판소로 옮겨져 형을 받았다. 김영완은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어 복역하다가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그해 11월 5일에 옥사했다. 3월 21일에는 고창읍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인 김승옥, 오동균, 김창규 등과 청년들이 결성한 고창청년회원은 조직, 공작, 연락동원에 이르는 계획을 은밀하게 준비했다. 21일 오전 1시 청년회원들과 고창보통학교의 일부학생 등 100여명이 모양성에 올라가 손에 태극기를 들고 회동했다. 김승옥이 나서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선동연설을 하였으며 오동균은 선언문과 독립가 등을 배포해 군중들의 궐기를 호소했다. 이에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시내로 내려와 시장거리를 통과, 시가지를 누비며 시위행진을 했다. 도중에 일본경찰의 저지를 받게 된 군중은 군청으로 이동했지만 총을 쏘며 달려온 경찰의 폭압으로 강제 해산 당하기도 했다. 현장에 앞장섰던 행동대원 김명만이 먼저 잡히고 이어 김승옥, 오동균, 김창규 등 10명이 체포되었다. 고창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형을 선고받은 김승옥, 오동균 등은 그해 8월에 서울에 있는 고등법원에 상고하며 조선사람으로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은 조선사람의 본분이다며 이것이 불의의 일도 불량한 일도 아닌데 어째서 처벌하느냐고 항쟁했지만 모두 기각 당했다. 이후 3월 28일에는 흥덕면에서 애국청년들과 학생들의 만세 시위가 진행됐고 다음해인 1920년 3월에는 성내면 월산리에 거주하는 청년 이종철과 학생 이대성, 이종주, 유판술 등이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만세운동을 결의하고 독립선언문의 등사 취지문 작성준비를 하는 등 독립을 향한 만세운동의 불씨를 이어갔다.

  • 기획
  • 엄승현
  • 2019.04.03 20:47

[문화&공감 2019 시민기자가 뛴다] 전북의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걷다 ① 여산으로 들어서다

2019 시민기자가 뛴다-문화&공감은 전북지역 문화예술계 전문가들이 지역 문화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담론을 만들어내는 공간입니다. 올해는 조용섭 협동조합 지리산권 마실 대표이영남 버들눈도서관장고형숙 부채문화관 기획팀장(화가)조세훈 문화인류연구자(전 전북도립국악원 교육학예실장)가 참여해 도내 곳곳에서 의미 깊은 지역 역사문화 콘텐츠 등을 조명합니다. 문화&공감은 오는 9월까지 매주 수요일자에 게재됩니다. 이순신 장군이 전북의 길을 걸어 백의종군하며 지나간 지 채 4개월도 되지 않아 호남의 보루 남원성과 전주성이 함락되었고, 그 길을 따라 왜군의 일부 세력은 충청도로 북진하기도 했다. 그 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전북 지역의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걷는 일은 역사를 회고하고, 고난의 백의종군이 나라의 희망으로 승화하는 과정을 잘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콘텐츠다. 사람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직접 전북권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를 도보로 답사해본다. 길을 걸으며 현재 길이 이어지는 상황과 <난중일기> 속 상황을 교차해 설명하고, 경유하는 지역의 이야기들을 엮을 예정이다. (사)한국체육진흥회의 자료(트랙)에 의하면 백의종군로의 총 거리는 676km에 이르며, 논산과 여산의 경계인 쟁목고개에서 남원과 구례의 경계인 밤재에 이르는 5박 6일 노정 전라북도 관내의 거리는 약 140km가 된다. 연재 기사마다 25키로 내외, 소요시간 7시간 분량을 다룬다. 길 안내는 (사)한국체육진흥회의 gpx트랙을 참고했다. 난중일기에 나오는 일자는 원문 그대로 음력으로 표기했으며, 번역문은 노승석의 <증보 교감완역 난중일기>를 인용했다. 첫 편은 여산으로 들어서는 길이다. 다음 편은 여산~삼례 구간을 연재할 예정이다. △여산으로 들어서다 4월 21일 맑음. 일찍 출발하여 은원에 이르니, 김익이 우연히 왔다고 한다. 임달영이 곡식을 사오려고 은진포에 왔다고 하는데, 그 행적이 매우 괴상하고 거짓되었다. 저녁에 여산 관노의 집에서 잤다. 한밤중에 홀로 앉았으니, 비통한 마음을 어찌 견딜 수 있으랴.(난중일기) 4월 1일 의금부의 옥을 나선 후, 남쪽을 향해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은 본가가 있는 충남 아산에 들르는데, 이곳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된다. 출옥한 장군을 보기 위하여 여수에서 배를 타고 올라오던 모친이 도중에 별세를 하고 만 것이다. 하지만 장군은 호송하던 의금부 관원의 재촉으로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4월 19일 길을 나서게 되고, 공주와 논산을 거쳐 4월 21일 여산에 도착한 것이다. 백의(白衣)를 입은 죄인의 몸이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하룻밤을 보내는 숙소도 이렇듯 노비의 집을 찾아야만 했다. 전장에서 장병들을 지휘하며 적을 상대하고 있어야 할 자신이 지금 처해있는 모습, 갑작스런 모친의 죽음과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떠나야만 했던 상황은 장군을 절망감과 무력감, 그리고 애통함으로 잠 못 이루게 하였을 것이다. 3월 하순이 시작될 즈음 시작한 전북권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 도보답사는 마침 내리는 비로 인해 다음날로 미루고, 이순신 장군이 하룻밤을 머물렀던 익산시 여산면의 여산동헌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전라도의 관문인 여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서울(京)과의 거리는 4백 44리이다.라고 나온다. 여산은 현재 익산군에 속한 면단위 마을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익산시 낭산면, 망성면, 논산시 연무읍(황화면)을 관할하는 여산군을 이루고 있었고, 도호부로 승격된 적도 있다. 여산군의 관아였던 여산동헌은 조선말기에 지어진 건물로 추정되는데, 구조는 다소 바뀌었지만 옛 조선시대 관아의 모습을 잘 보여줬다. 동헌 옆의 백지사터는 1868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 때, 신도들의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겹겹이 덮어 질식시켜 죽이는 백지사(白紙死)형이 집행된 순교의 현장을 추념하기 위해 조성한 공간이다. 비가 내려 스산한 날씨 때문인지 사람 얼굴에 종이를 덮고 있는 조형물에서 더욱 처연함이 느껴졌다. ○ 이순신 장군이 걸어온 길 백의종군로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파죽지세로 북진하는 왜군에 밀려 전쟁 발발 20일 만에 한양 도성이, 2달여 만에 평양성이 함락되며, 임금 선조는 의주로 몽진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조선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전쟁의 양상은 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이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명나라와 일본이 조선은 배제한 채 강화협상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3년 6개월여 걸쳐 진행되던 강화협상은 결렬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조선 침략을 명하면서 1597년 1월 전라도를 주 침공 루트로 하는 정유재란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협상이 결렬되고 전쟁의 기운이 고조되던 1597년 1월, 가등청정이 곧 부산포로 들어올 계획이니 잘 대비해서 전쟁을 미리 막아라라는 이중간첩 요시라의 반간계를 접한 선조는 이순신 장군에게 부산해역으로의 출전을 명한다. 하지만 장군은 출전이 불가하다는 몇 가지 이유를 장계로 올리고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장군은 사헌부의 탄핵을 받게 되고, 조정을 기망하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 적을 치지 아니하여 나라를 등진 죄를 포함한 4가지 죄목으로 2월 26일 한산도 통제영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압송된다. 그리고 모진 고문을 당하고 사형이 임박한 시점에서 판중추부사 정탁의 전쟁 중에 장수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탄원(伸救箚신구차)에 힘입어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게 되고,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게 된다. 이렇게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명받고 1597년 4월 1일 서울 의금부를 출옥하여 남대문-수원-아산-논산-여산-삼례-전주-임실-남원-운봉-구례-순천-구례-하동-단성-삼가를 거쳐 6월 4일 권율 도원수 군진이 있는 합천(초계)에 이르는 노정을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라고 한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은 출옥 후 약 4개월 후인 8월 3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면서 끝나게 된다. 당초 이순신 장군은 삼남로를 통해 충남 논산에서 전북 여산으로 들어서서 삼례로 이동한 후, 통영별로를 따라 전주-남원을 거쳐 함양으로 가서, 이곳에서 합천으로 이동하려고 한 듯하다. 그런데 함양으로 가기 위해 운봉에 도착하여 머물고 있을 때, 권율 도원수가 순천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진행 방향을 바꾸어 남원에서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가게 되며, 5월 26일 다시 구례를 출발하여 경남 하동-단성-삼가를 거쳐 도원수 군진이 있는 합천(초계)에 이르는 노정이 이뤄지게 된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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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02 20:25

[한바탕 전주 즐기기] 잔잔하게 산책하기 좋은 전주 바람쐬는길

한벽루 아래에 있는 터널부터 색동마을까지 이어지는 전주의 바람 쐬는 길을 아시나요? 한옥마을이나 자만벽화마을 같은 유명한 관광지에서도 걸어서 5분 거리면 갈 수 있는 곳으로 산책로가 잘 놓여있습니다. 유명 관광지에서 여행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잠시 복잡한 관광지에서 벗어나 한적하게 걸을 수 있는 바람 쐬는 길을 산책해보시는 것도 참 좋을 듯합니다. 저는 이 지도에서 별표를 친 곳부터 산책을 시작하였습니다. 바람쐬는길의 시작점은 작은 터널입니다. 어둡지만 신비로운 분위기의 터널을 천천히 걷다 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복잡했던 생각이 정리되는 듯한데요. 서로 다른 두 공간을 이어주는 터널의 특성을 생각해보니, 이 통로를 통과하면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디디는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터널을 나오자마자 왼편에는 승암산의 산맥이 이어지고 오른편에는 잔잔하게 전주천이 흐르고 있습니다. 많은 산책로 중 이렇게 산과 강이 둘러싼 곳은 많이 없는데, 이 바람쐬는길은 멋진 자연경관을 동시에 즐길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차도와 분리되어 나무 데크로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오가기 편리하고 안전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습니다. 산책로를 조금만 따라가다 보면 전주자연생태박물관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전주자연생태박물관은 저렴한 입장료로 다양한 체험학습을 즐기고 전주 생태의 변화과정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전주천에 사는 생물들의 정보를 알고 싶으시다면 꼭 방문해보시길 바랍니다.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http://ecomuseum.jeonju.go.kr/)를 확인해 주세요. 전주자연생태박물관 위치ㅣ전주시 완산구 바람쐬는길 21 전화ㅣ063)288-9540 운영시간ㅣ9:00~ 18:00(월요일 휴무) 바람쐬는길의 산책로는 두 갈림길로 나뉘는데요. 위쪽으로는 산책 데크를 따라 가는 길이 있고 아래쪽으로는 전주천 가까이서 산책하는 길이 있습니다. 지금은 위쪽길로 올라가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아래쪽 길로 가볼 예정입니다. 전주자연생태박물관 바로 옆에는 게스트하우스 겸 카페로 운영되는 '오래된미래'가 있습니다. 1층은 카페, 2층은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되는데요. 1층 카페로 들어서자 전주천의 경관이 잘 보이는 통유리 창과 벽면을 빼곡이 채운 책들, 사장님의 취향이 잘 보이는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카페라 그런지 아늑하고 포근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산책 도중 잠깐 쉬어가기에 참 좋은 장소라는 생각이 드네요. 음료는 대추를 동동 띄운 진한 오미자차를 추천드립니다. 오래된 미래 위치ㅣ전주시 완산구 바람쐬는길 35-19 전화ㅣ010)3143-0732 카페를 나와 계속 걸어가니 위쪽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보입니다. 이 돌계단을 오르면 승암사가 보이는데요. 절 뒤에 있는 바위가 좌선하는 승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절 이름이 승암사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절 앞에서 커다란 고목이 저를 맞이하고 있었는데요. 봄이되면 예쁜 꽃을 피운다고 하니 정말 기대가 됩니다. 부드러운 승암산의 능선에 둘러싸여 있는 승암사는 작지만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바람쐬는길과 무형유산원의 모습을 한 번에 볼 수 있습니다. 산책하시다가 승암사에 방문하셔서 마음의 힐링을 얻고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승암사 위치ㅣ전주시 완산구 바람쐬는길 47-13 승암사 길을 계속 걷다 보면 왼편에는 아기자기한 가정집도 보이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전주천의 자연이 점점 더 잘 드러납니다. 치명자산 입구도 바람쐬는길에 있는데요. 걸어서 약 30분이면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고 하니, 날이 더 풀리면 꼭 산에 올라가 완산구의 풍경을 볼 예정입니다. 치명자산 입구를 조금 더 지나면 양쪽으로 큰 나무가 심어진 멋진 산책로가 나옵니다. 지금은 앙상한 나뭇가지만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푸른 녹음이 우거져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날이 너무 변덕스러워서 돌아갈 때쯤 구름이 걷히고 해가 떠서 참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이 포스팅을 보시는 분들이 날씨에 따라 변하는 바람쐬는길의 다양한 분위기를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아 돌아가면서도 열심히 사진을 찍어보았습니다. 돌아가는 길에는 전주천 아래쪽으로 놓여있는 산책로를 이용해보았습니다. 전주천을 좀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고 그곳에 있는 나무나 꽃들을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게 여겨집니다. 천에는 다양한 생물들도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물들의 정보가 궁금하시다면 아까 언급했던 생태박물관에 생물종에 대한 정보가 잘 나타나 있으니 방문해서 알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지나온 터널로 돌아오면서 바람쐬는길을 따라가 본 산책은 끝이 났습니다. 우연히 찍은 달팽이 표지판을 보니, 이 길은 천천히, 느긋하지만 편안한 산책을 하며 마음의 편안함을 되찾기에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주변에 한옥마을 같은 화려한 관광지가 있지만, 이 포스팅을 보시고 이곳에서도 조용하고 편안한 산책을 하며 추억을 쌓아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글사진 = 전주시 블로그 기자단 손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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