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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1주년 장영달 우석대 총장 “다산사상 접목, 100년 발전 청사진 그릴 것”

조직의 심부름꾼을 자처하는 수장, 바로 우석대 장영달 총장이다. 지난해 3월 취임 당시부터 다산사상을 접목한 개혁적 실용주의대학 기틀을 잘 다져온 그는 올해 본격적인 그림을 펼쳐낼 예정이다. 또 우석대의 개교 40주년을 맞아 100년 발전 청사진을 그려 학교 성과를 새롭게 다진다. 장영달 총장으로부터 취임 1주년 소감과 올해 학교 운영계획 및 비전 등을 들어본다. - 정치권 등 다양한 전문분야에서 활동하셨지만 대학 총장직은 처음이십니다. 발디딜 틈도 없이 취임식장을 찾아주신 많은 분들 앞에서 우리 우석대학교 학생들을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일을 맡기든지, 기필코 제대로 완수해낼 능력과 정신을 가진 우석대학교형 인재로 키우겠다고 다짐한 기억이 선명합니다. 사실 우석대학교와 인연을 맺기 전만 해도 대학과 대학 교직원들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선입견이 없지 않았습니다만,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우리 우석대학 교직원들이 무한한 열정을 앞세워 학생들의 성공을 위해 부단하게 노력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직원들은 불철주야 잔무를 마다하지 않았고, 교수들도 늦은 밤까지 학생들의 사회진출을 돕기 위해 강의실을 지키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이렇게 우석대학교의 위상과 미래를 밝히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구성원들을 위해, 총장으로서 어떻게 응원을 보낼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컸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여러분들의 심부름꾼입니다. 우석대학교 구성원들이 최대한 용기를 잃지 않고, 학생들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다는 심정으로 지난 1년을 보냈습니다. 앞으로도 총장에 앞서 심부름꾼이 되겠다는 다짐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개혁적 실용주의대학도 줄곧 강조하셨습니다. 구체적인 실천방안이 궁금합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과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늘같이 소중하다는 인본주의를 강조하는 말들입니다. 이는 우석대학교 설립자이신 고(故) 서정상 박사의 건학이념인 황금백만냥불여일교자(黃金百萬兩不如一敎子)와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개혁적 실용주의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집대성한 철학입니다. 설립자의 건학이념과 다산의 경세철학이 가장 가깝게 상통합니다. 저는 그동안 줄곧 전국의 어느 대학에서도 느낄 수 없는 인격 지식 실력을 갖춘 인재를 기르자고 강조했습니다. 이같은 인재는 개혁적 실용주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완성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학생들에게 강경화 외교부 장관을 비롯한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는 저명한 지도자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노심초사한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 갈수록 약세인 문(文)사(史)철(哲) 분야를 활성화하기 위한 계획은 무엇입니까. 우석대학교는 김근태민주주의연구소와 더불어 동아시아평화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세계적인 반전평화운동가이자 인권법학자인 서승 석좌교수를 필두로 자칫 한국의 대학사회에서 소홀히 다뤄질 수 있는 역사와 이념을 포괄적으로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저는 우석대학교가 다른 대학과 비교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만의 문화와 철학을 앞세워 특화된 인재를 배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석대가 진정한 학생중심대학, 실용주의대학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우석가족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기대합니다. - 1년간 다양한 분야의 명사들이 초청돼 전국적으로 화제가 됐습니다. 그동안 서승 전(前) 일본 리츠메이칸대(立命館大) 교수와 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을 비롯해 각계의 저명한 분들을 석좌교수로 모시며 국내 대표 민주평화실용융합경제과학 특화대학으로 발돋움하겠다는 전략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여성 외교부장관인 강경화 장관과 박원순 서울시장 등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분들을 학교로 초청해 우리 학생들의 호연지기를 키울 수 있는 특강을 마련했습니다. 오는 21일에는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을 초청합니다. 올해도 우석의 젊은이들에게 도전정신을 심어줄 수 있는 명사들을 꾸준히 초청할 계획입니다. 진보와 보수 등 정치성향과 문화인문경제정치사회 등 분야에 관계 없이 배울점이 있는 인물들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소설<국수>의 저자 김성동 작가의 강연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여름 휴가 때 읽었던 소설로 다시 입소문을 탄 작품이지만, 질곡 많은 근대사를 통해 우리의 민족혼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학생들에게 의미 있다고 여겨집니다. - 특히 강경화 외교부장관을 초청하기까지의 뒷이야기도 궁금합니다. 강경화 장관은 지방대학 가운데선 유일하게 지난해 9월 7일 우석대학교에서 특강을 가졌습니다. 강경화 장관과는 국회의원 시절부터 친교가 있었습니다. 강경화 장관은 15년 넘게 UN에서 근무한 뒤 백발을 휘날리며 장관 임명장을 받기 위해 국내에 들어왔습니다. 귀국 직후에는 아무래도 국내 사정이 어두울 수밖에 없었던 만큼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꾸준하게 자문을 건넸습니다. 우연스럽게 우석대학교 강연이 가능한지를 물었는데, 처음에는 지난해 5월 어느날로 특강날짜를 잡았습니다. 그러다 남북관련 현안이 봇물처럼 터지면서 일단 보류가 됐고, 이렇게 바쁜 분을 대학 특강에 모시는 건 경우가 아니겠다하고 미련을 접었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날짜를 직접 선택해서 연락이 왔습니다. 총장님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말이죠. 강경화 장관은 워낙 스타장관이라서 대학특강 요청이 쇄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화여대와 모교인 연세대를 제외하고 우석대학교 특강이 유일합니다. -학교의 중장기적 과제는 무엇입니까. 우리 학생들에게 과연 우석대학교를 선택하길 잘했다는 자부심을 심어주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교수는 학생들이 무엇을 원하고 뭘 배우고자 하는지 늘 깨어있는 자세로 고민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직원들은 교수 및 학생들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야 합니다. 단기적으로 우석대학교를 선택한 학생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야한다면, 한발 더 나아가서는 우석대학교를 선택해서 행복하다는 공감대를 넓혀야 합니다. 결국 우석대학교의 브랜드화가 필요할 것입니다. 더불어서 이제 우석대학교는 지역과 지역경제의 상생자로 안착해야 합니다. 전주캠퍼스는 완주와 전북에서, 진천캠퍼스는 진천과 충북과의 협력체계를 더욱 강화하고 다양한 사업을 펼칠 것입니다. 지역사회의 진정한 파트너로 인정받는 일은 우석대학교 발전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지방자치단체와 대학의 끈끈한 협업체계가 구축된다면 강력한 시너지효과를 발휘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석대학교가 지역의 실버세대에게 재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협업프로그램이 활성화된다면 지역사회 기여는 물론 학령인구 급감의 수렁에서도 빠져나올수 있을 것입니다. - 올해는 우석대학교 40주년입니다. 학교 구성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사람으로 치면 불혹(不惑)에 해당하는 나이입니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완성체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석대학교의 40주년에는 대한민국에서, 전북과 충북의 지역공동체에서, 흔들림 없는 자세로 성숙된 인격체를 양성하는 고도의 교육기관이 되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우석가족은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며 5만여명의 동문들을 사회에 배출했고, 동문들은 전북과 대한민국을 발전시키는 동량으로 성장했습니다. 지난 40년을 돌이켜보면서 우석대 구성원들은 자부심과 뿌듯함을 느꼈으면 합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미래 100년을 희망차게, 야심차게 준비했으면 합니다. 어느 때보다 주인의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심부름꾼으로 남아 열심히 지원하겠습니다. ● [장영달 총장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 앞장제14~17대 국회의원 활동 1948년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나 전주고등학교와 국민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국민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학위를,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유신반대 민청학련 사건과 긴급조치 위반으로 7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92년부터 2008년까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제14151617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제49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제16대 국방위원회 위원장, 열린우리당 최고위원, 제17대 국회 운영위원회 위원장, 제34대 대한배구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 기획
  • 김보현
  • 2019.03.11 20:35

[찾아가는 군산이야기] 영화 속에서 만나는 군산, 촬영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

여행을 즐기는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자신이 찾아간 지역을 온전히 알고 느끼며, 체험하는 것이지요. 영화를 보고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보는 영화 촬영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소중하고 뜻깊은 추억으로 다가가기 때문에 여행객들에게는 여행의 재미를 더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군산은 1914년 전북에서는 최초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탄생하여 영화의 도시로 많은 영화가 촬영되었고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촬영되고 상영되고 있답니다. 1914년 이전에는 군산좌라는 극장 겸 공연장이 생겼으며, 1920년대 초에 희소관이란 전북 최초의 영화 상영관이 등장하였지요. 또한 군산은 1948년 이만 헝 감독의 영화<끊어진 항로>를 시작으로 2013년 <남자가 사랑할 때> 2018년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화가 촬영된 곳이랍니다. 40년대 김두한을 중심으로 조선 사나이들의 배짱과 우정 그리고 의리를 다룬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 1,2,3> 시리즈는 히로쓰 가옥에서 촬영되었으며, 이후 바람의 <파이터>,<타짜>,<동갑내기 과외하기>,<가비>등의 촬영 장소로 꾸준히 그 진가를 발휘하였답니다. 근대문화유산인 해망굴은 전수일 감독의 <핑크>, 구) 군산세관은 <백자의 사람, 조선의 흙이 되다> 등이 촬영되었지요.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는 군산에서 80% 이상이 촬영되었는데요. 특히 월명동에 있는 초원사진관을 배경으로 촬영되어 지금도 초원사진관은 군산을 여행하는 많은 사람에게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정원과 다림의 풋풋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특히 여심을 흔들었던 한석규의 미소와 음성, 심은하의 자연스러운 외모와 미소로 청순미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답니다. 영화 속의 추억 한 장면으로 지금까지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남자가 사랑할 때>의 배경이 된 경암 철길마을은 군산 여행으로 많이 찾고 있는 유명한 곳이기도 합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화 마니아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는 장소들이 군산에는 아주 많이 있습니다. 최근에 상영된 <군산:거위를 노래하다>는 군산에서 여행하기 좋은 잘 알려진 장소들 특히 일본식 건물과 옛 흔적이 남아 있는 건물들의 흔적을 배경으로 하여 군산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여행객들에게 여행의 충동을 느끼게 하는 영화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촬영된 명소들은 군산에서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곳들로 주목받고 있다는 것 많이들 아실 거예요. 군산에는 여러 가지의 많은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여행 장소를 고를 수 있지만, 특히 영화의 배경이 된 곳을 찾아가면서 군산 여행을 하시는 것도 추억의 한 장면을 간직하는 여행이 될 겁니다. 자 ~ 그럼 군산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찾아가는 장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여행하면 사랑의 감정을 더욱더 깊게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장소들을 좀 더 보실까요?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에서 황정민이 도박하는 장면이 촬영되었던 장소이지요. 영화의 포스터와 함께 황정민의 사인이 함께 있습니다. <남자가 사랑할 때> 황정민과 한혜진이 멋진 영화를 만들어 냈던 곳 그곳이 바로 빈해원 중국집이랍니다. 중정형의 긴 홀의 빈해원은 차이나타운이 생각나는 곳이기도 하지요. 60년의 전통을 가진 중국 식당으로 중국 현지 식당에 와 있는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장면들을 찾아보고 내가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이 외에도 <타짜>, <변호인> 등 유명 영화 촬영지로 유명합니다. 참고로 2018년 내부 공간의 독특한 구성으로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723호로 지정되었답니다. 해망굴은 1926년 군산 내항과 시내(지금의 원도심인 중앙로)를 연결하기 위하여 만든 터널입니다. 실제 목적은 호남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좀 더 빠르고 편하게 항구로 나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아픈 추억이 담긴 장소이지요. 반타원형의 터널로 길이가 130m인데 예전에는 차량이 통행했으나 지금은 사람들만 다니는 곳으로 굴 안에 들어가면 서늘한 느낌이 일제 강점기 때 이 해망굴을 통해서 수많은 물자가 일본으로 반출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며 그 안에 담긴 조선인들의 피와 땀이 떠올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답니다. 해망굴 입구 주변은 총탄의 흔적도 있는데 한국전쟁 중 이곳에 인민군 지휘소가 있어 연합군이 기관총 폭격을 가해 남겨진 총알 자국이랍니다. 군산 해망굴은 최근에 등록문화재 184로 지정되었으며, 예전부터 영화 촬영지로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유명합니다. 해망굴에서 찍은 영화들은 <8월의 크리스마스> 허진호 감독 1998년 <화산고> 김태균 감독 2001 <품행제로> 조근식 감독 2002년 <최후의 만찬> 손영국 감독 2003년 <여고생 시집가기> 이덕환 감독 2004년 <청연> 윤종찬 감독 2005년 <초승달과 밤배> 장길수 감독 2005 <소년, 천국을 가다> 윤태용 감독 2005년 <구미호 가족>이 현곡 감독 2006년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군산의 영화 촬영 명소랍니다. 군산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영화 촬영지이며, 영화 촬영지로서의 잠재력이 가득한 지역이며 군산 여행객으로서 군산의 멋진 곳을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글사진 = 군산 사이버기자단 강경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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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11 16:44

[전북의 재발견] 천년 고찰 완주 화암사 "천년 역사를 간직한 사찰 나들이"

완주군 불명산 깊숙이 위치한 화암사는 694년에 창건되어 천년이 넘는 시간을 지키고 있는 사찰입니다. 특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인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수도하였고 신라의 대학자 설총이 학문을 익힌 곳이라 하니 감회가 더욱더 새로웠습니다. 이렇게 역사적 의의가 큰 화암사는 불명산 중턱 깊숙이 있지만 잘 조성된 숲길을 따라 20여 분 이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산길을 이용해 차량으로도 사찰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화암사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이 바로 우화루입니다. 정면에서 본 우화루는 2층 목조건물로 보이지만 사실 단층건물입니다. 건물 몸체와 비교하면 거대한 누각이 위엄과 함께 세월의 무게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화암사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국보 316호인 극락전입니다. 1425년에 세워진 화암사 극락전은 국내에 유일하게 남은 하앙식 식 건축양식(건물 밖에 기둥을 세워 처마를 받치게 한 양식, 처마를 길고 크게 올릴 수 있다.) 건물로서 역사적 학술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묵묵히 천삼백 년을 버티고 있는 화암사를 보니 늙어간다라는 말보다 멋이 들어간다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화려한 단청은 없지만 화려했던 지난 세월이 곳곳에 묻어 사찰의 멋과 위엄을 잘 알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화암사에서 국보인 극락전만큼 유명한 것이 바로 동종입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0호로 검은빛의 이 동종은 높이가 105cm에 지름이 69cm로 이 종이 만들어진 16세기 동종 가운데 큰 편에 속하고 있습니다. 종의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용이 내려앉은 듯하며 다양한 무늬와 갑옷을 입은 듯 위용이 정말 멋있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본 기자가 방문한 날엔 동종을 관람할 수가 없었습니다. 화암사를 방문하며 가장 크게 드는 생각이 정말 작다였습니다. 위 사진으로 보이듯 건물과 건물 누각이 서로 맞닿아 있을 만큼 건물의 간격이 촘촘하며 매우 작은 사찰인데요. 사찰이라기보다 종가의 고택이라는 느낌이 더욱 컸습니다. 보통 용이나 거북이 등 으리으리한 조각상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도 화암사는 작은 대나무 수로를 따라 소박하지만, 운치 있게 흐르며 산행에 지쳤을 나그네의 목을 축여주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작고 소박한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의 본 모습이 아닐까요? 해 질 녘에 화암사를 방문하니 운 좋게 화암사에서 노을을 감상할 수 있었는데요. 그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특히 화암사를 품은 불명산이 노을의 붉은 빛을 받자 산 전체가 붉게 물들어 버리는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꼭 불타는 듯한 이 모습 때문에 불명산이라고 부르는 걸까요? 남들보다 더 성공하고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치열히 경쟁해야 하는 삶에 지쳤다면 잠시 완주 화암사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크고 화려한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화암사는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몸소 말해줄 것입니다. /글그림=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배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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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11 16:22

[전북 천리길] 부안 마실길 3코스 - 적벽강 노을길따라 걷기 좋은 곳

평화롭고 드넓은 바다 너머로 뜨겁게 떠오른 눈부신 태양따라 걷기 좋은 부안 마실길 전북 바닷길이 유명한 곳이 바로 부안이죠. 부안 마실길 따라 걷다보면 한국판 모세의 기적을 볼 수 있는 신비의 섬 하섬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성천항을 따라 도로 아래 산기슭으로 향하는 적벽강 노을길이 본격 시작되는 곳, 그 곳 바다 위 홀로 떠있는 하섬을 만납니다. 물때를 만나면 간조 때 바다가 갈라지면서 하섬 까지 들어갈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됩니다. 조금씩 오르막길을 만나도 해변을 따라 걷다보면 서해바다 아름다운 풍경에 발걸음이 가벼워집니다. 성천항에서 적벽강을 지나 격포항까지 10km 적벽강 노을길 해안 코스에서 잠시 휴식할 수 있는 쉼터 마실길안내소가 있는 반월마을이 반갑습니다. 본격적인 적벽강 길에 들어서면 전북 서해안권 국가지질공원 적벽강 해안절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차곡차곡 쌓인 지층이 거대한 절벽으로 장관을 이루고 자연의 신비로운 모습 그 자체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적벽강의 아름다운 매력 또 한 가지는 수년간 파도에 둥글둥글해진 몽돌이 펼쳐진 적벽강 해안가입니다. 각기 다른 바위와 돌이 파도의 세월만큼 단련되고 주위 풍경과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계절마다 멋진 풍경으로 천리길 탐방객을 맞아주는 적벽강! 어느 때보다 푸른 하늘과 파란 바다가 마치 하나로 이어진 듯 합니다. 작은 수성당을 지나 격포해수욕장까지 다다르면 격포항에 하루를 마무리하고 항구에 도착한 어선들이 바다 향기를 뿜어냅니다. 전북 서해안권 국가지질공원 두 번째 채석강은 부안 변산반도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채석강은 퇴적층이 파도의 침식에 의해 형성된 해식절벽과 해식동굴이 장관입니다. 채석강 둘레를 따라 자연의 신비로움을 직접 보며 푸른 바다 파도치는 해안선을 바라보며 부안 마실길 마지막 코스에 다다릅니다. 서해안 바다 수평선 따라 뉘엿뉘엿 해넘이가 시작되는 시간이 찾아옵니다. 무엇보다 적벽강 노을길 코스는 뜨겁게 이글거리는 바다위에 노을 풍경이 장관입니다. 해넘이 시간을 맞춰 천리길 코스 계획하면 아름다운 노을과 해넘이를 만날 수 있습니다. /글사진 = 전라북도 블로그 기자단 이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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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08 17:30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52. 지정환 신부의 시간

삼월은 봄의 길목에서 새싹을 틔우고 꽃을 맞이하는 때이다. 희망을 상징하는 이 시기 봄처럼 우리 곁에 온 사람이 있다. 임실 치즈로 유명한 지정환 신부이다. 본명이 디디에 세스테벤스(Didier tSerstevens)인 그는 삼월 전주에서 지정환이란 한국이름을 얻으며 우리와 인연을 맺었다. 1931년 벨기에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였지만, 고등학교 때 극장에서 본 한국전쟁의 참혹한 영상이 운명처럼 그를 한국으로 이끌었다. 당시 가장 위험한 나라로 떠나는 그를 주변에서 말렸지만,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에 희망을 주고자 사제가 된 다음 해에 제노바에서 배를 타고 2달 만인 1959년 12월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부산항에 도착했다. 1960년 3월 첫 발령을 받아 전주교구 전동성당에 온 그는 본명 디디에의 발음과 비슷한 지를 성으로 하고, 전주교구의 김이환 신부의 이름 환을 따 정의가 환하게 빛난다는 정환이란 이름을 받아 훗날 임실 지씨의 시조가 된다. 1961년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아 간 부안은 농촌이지만 농사지을 땅이 부족해 선교보다는 배고픔을 먼저 해결해 줘야 하는 곳이었다. 마침 부안은 정부주도로 간척사업을 하고 있어 주민들을 설득하고 간척허가를 받아 바닷물을 막고 농지로 만드는 고된 작업을 함께 한다. 무리한 탓에 건강 이상이 생겨 담낭 제거 수술을 받으면서도 3년 만에 100ha(약 삼십만 평)의 땅을 만들어 한 가구당 약 3천 평씩 100가구가 나누게 되었다. 스스로 나는 쓸개 없는 사람이여라고 농담하는 지신부는 농부들에게 땅이 생겼으니 잘 살꺼라 안심하며 요양차 벨기에로 떠났다. 그러나 6개월 후 돌아와 보니 많은 농가가 땅을 팔거나 더러는 노름으로 땅을 잃어 피땀으로 일군 부안간척사업은 실패나 다름없었다. 간척지의 특성상 염분 때문에 벼가 죽기까지 하자 당장 먹고 사는 게 힘든 농민들은 기다리지 못하고 땅을 처분한 것이다. 부안의 실정에 실망하던 중 1964년 임실 성가리 소나무집이라는 작은 임시성당의 주임신부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그가 도착한 임실도 당시에는 민둥산에 풀만 자라는 척박한 농촌이었다. 우연히 만난 당시 문필병 임실군수는 신부님! 이곳을 떠날 땐 가난한 임실을 위해서 뭔가를 남겨 주세요!라는 부탁을 한다. 그 간절한 당부에 고민에 빠졌던 지신부는 삼례의 오기순 신부가 선물한 산양 두 마리를 시작으로 임실 치즈의 역사를 쓰게 된다. 10여 명의 마을 청년들과 함께 산양의 젖을 짜고 사육 두수를 늘리며 협동조합을 설립했지만, 곧 난관에 봉착했다. 산양유에 대한 선호도가 낮아 판매도 힘들고 온도에 민감한 산양유가 쉽게 상했기 때문이다. 그 처리를 고민하던 지신부는 치즈를 떠올렸고 치즈를 모르는 청년들에게 치즈는 두부 같은 거여라며 함께 치즈 만들기에 도전한다. 산양유를 굳히면 치즈가 되는 줄 알고 약탕기와 비눗갑을 사용해 두부를 만드는 간수도 넣어도 보고 누룩도 넣어봤지만, 치즈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벨기에에서 가져온 응고제를 발견하고 치즈를 만들게 된다. 본격적인 치즈 상품화를 위해 첫 번째 공장을 주민들과 함께 짓고 두 번째 공장은 벨기에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지었다. 사실 그가 한국의 농촌에서 치즈를 만들고 공장을 짓는다 하자 가족들은 치즈를 좋아하지 않는 디디에가?라며 의아해했지만, 지신부를 믿고 지원해 주었다. 하지만, 균등한 품질의 치즈 생산에 실패하자 핵심기술을 배우기 위해 유럽으로 건너갔다. 벨기에와 프랑스의 치즈공장을 돌다 기적적으로 이탈리아 장인에게 비법을 전수 받고 이를 수첩에 빼곡히 적어 석 달 만에 임실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사이 주민들은 양을 처분해버렸고 홀로 남은 청년 신태근과 비법을 적어온 수첩을 보며 마침내 1969년 균일한 맛과 향을 지닌 치즈를 만든다. 이후 다시 뭉친 주민들과 공장 뒤편에 있는 산에다 정과 망치만으로 굴을 파 숙성기간이 긴 치즈를 만들었지만, 한국 사람에게 낯선 치즈의 수요는 적었다. 고민에 빠진 신부는 직접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서울로 가 외국인이 많이 머무는 호텔과 한국최초의 피자가게를 찾아갔다. 외국인 신부와 농부가 만든 신선한 치즈에 대한 호기심은 이내 그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산양유가 부족할 정도로 주문이 쇄도했다. 많은 양의 치즈가 필요해지자 산양 대신 젖이 풍부한 젖소를 기르게 되었고 이는 오늘날 임실치즈의 토대가 된다. 임실치즈가 자리 잡는 사이 다발성신경경화증이라는 병이 생긴 지신부는 치료차 벨기에로 떠나며 모든 권한을 주민들에게 돌려주고 공수신퇴(功遂身退)란 말을 남긴다. 그가 평소에 존경한 노자의 공을 이루었으면 미련 없이 물러난다.는 말을 실천한 것이다. 지신부의 산양 두 마리와 청년으로부터 시작된 임실치즈는 국내 치즈 산업의 자양분이 되고 임실 치즈테마파크와 축제의 자산이 되어 지역의 경제발전의 큰 축이 되었다. 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신부는 휠체어를 탄 채 완주 소양의 별아래 집과 전주의 무지개 장학재단을 오고 가며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사역을 맡았다. 2016년 정부로부터 공을 인정받아 한국 국적을 받은 지신부는 현재, 장애인들이 자립하고 사회와 만나는 것에 가장 많은 관심을 두고 그들의 삶이 나아지는 데에 힘을 쏟고 있다. 그와 뜻을 함께하는 임실치즈농협, 지정환 치즈피자의 체인점들은 매달 무지개 장학재단에 브랜드 사용료로 장학금을 기부하고 있고 세영재단과 그 사랑을 받은 무지개가족도 함께 기부하고 있다. 그의 방에는 무지개가족의 일원이 자립교육으로 동양화 자수를 배우고 나서 선물한 십자수 초상이 있다. 내 장례식에는 저 십자수를 영정으로 쓰고 노래 만남을 불러줘요라는 말을 한다. 양띠인 그가 치즈를 만들고 장애를 겪으며 장애인과 함께하기까지 그 여정에 담긴 역경과 사랑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지금까지 언제나 함께하고 나누는 삶을 이어가는 지정환 신부는 가장 소중한 것은 지금이라고 한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고 내가 지금 해야 할 일들을 잘 해가는 것이 기쁨이 되는 시간이라고 담담하게 전하는 그의 말이 깊은 울림을 준다. 지금, 찬란한 봄이 열리는 삼월 우리 곁에서 함께 하는 지정환 신부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 발자취에 담긴 시간의 흔적을 존경하고 지금의 시간을 아낌없이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봄과 함께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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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07 20:43

[익산에ON多] '구룡마을 대나무 숲' 죽림 속 죽향 따라 떠나는 익산 힐링여행

익산시가 생태 숲으로 잘 가꾸고 지켜야 하는 귀중한 대나무 숲입니다.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곧게 자라기는 누가 그리 시켰으며...'로 시작되는 윤선도의 죽에 실린 노래가 생각나는 곳. 익산 구룡마을 대나무숲으로 떠나는 익산 힐링여행입니다.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군자의 곧은 행실로 비유되는 대나무. 백제왕도 익산에 있는 그 푸르른 죽림 속에서 백제의 역사를 다시 한번 떠올려봅니다. '찬란했던 백제문화를 일본에까지 전해주며 꽃을 활짝 피웠던 그 백제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망해 버렸을까?'하는 생각이 대나무에 바람 스치듯 지나갑니다. 대나무 숲이 있는 구룡마을은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지요. 시골마을 치곤 110가구나 되는 큰 마을로 마을 한복판 제일 높은 언덕배기엔 수령이 무려 300년이나 되는 보호수 느티나무가 이 마을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며 수호신처럼 마을을 지키고 있고요. 느티나무 밑엔 모정(정자)이 있어 마을 사람들과 대나무 숲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휴식처가 되어주고요. 이곳 정자 앞에는 대나무 숲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으며 구룡마을 대나무 숲이 바로 코앞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네요. 구룡마을 대나무 숲은 실제로 담양 죽녹원 대나무숲보다도 훨씬 큰 한반도에서 제일 큰 대나무 숲으로 옛날 우리나라 3 대 5일 장의 하나였던 강경장을 통해 구룡마을 소쿠리와 대바구니 등이 전국으로 팔려나갔지요. 이곳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대나무로 만든 대바구니 등을 팔았기에 생금밭이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이 대나무 숲은 인기 드라마 추노와 영화 최종 병기 활의 촬영지이었으며 작년 2월(76회)과 12월(122회)에는 두 번에 걸쳐 MBN의 집시맨이 촬영된 곳으로 전국에 널리 알려진 익산의 대표 힐링여행지 웰빙여행지입니다. 백제왕도 익산은 경주 못지않은 경주에 버금가는 역사유물이 많은 유적 역사 도시이지요. 백제의 마지막 왕궁이었던 왕궁리 유적지와 무왕이 태어난 곳 그리고 무왕 왕릉으로 확정된 쌍릉까지 무왕의 발자취를 따라 만들어진 익산의 둘레길이 백제무왕길 입니다. 무왕의 옛길인 샘이지요. 역사유적 탐방코스로 어디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자랑스러운 익산의 둘레길이랍니다 홀로 둘레길 트레킹을 하는 탐방객을 만나 인증사진 한 장 남겨주었답니다. 이 무왕길을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 코스가 바로 구룡마을 대나무 숲이지요. 대나무 숲길을 조성해 놓은 '금마면 구룡마을 대나무 숲길', 가족과 함께 사랑하는 연인과 손에 손잡고 산책하기 좋은 곳 데이트하기 좋은 곳으로 주목을 받는 곳이기도 하지요. 익산 금마는 고대국가 시절 네 번이나 도읍으로 지정될 정도로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첫 번째는 고조선 준왕이 기원전 198년경 남하하여 금마에 수도를 세웠을 때이고요. 두 번째는 마한의 수도였던 금마가 마한 54소국을 총괄하던 도읍지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고구려 왕손 안승이 세운 보덕국의 수도이었고요. 마지막이 백제의 무왕이 왕궁으로 천도한 곳이지요. 금마는 익산의 한 시골 마을이며 지금도 그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구룡마을 대나무 숲은 초여름 밤이면 반딧불이의 불빛이 반짝이는 진풍경을 볼 수 있는 청정지역이랍니다. 대나무 숲이 있는 금마면 구룡마을 주민들은 마을 안에서 펼쳐지는 진풍경에 초 여름밤이 즐겁기만 하지요. 전체 면적 5만여㎡(1만 5천여 평)의 대나무 군락지에 서식하는 반딧불이 때문이랍니다. 숲 전체에서 반짝이는 반딧불이 불빛이 장관을 이루어 황홀경에 빠져드는 곳 파랑 노랑 반짝이는 반딧불이의 불꽃 향연에 애어른 할 것 없이 누구나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구룡마을 대나무 숲은 미륵사지 창건의 전설이 내려오는 미륵산의 고찰인 사자암 바로 아래에 있는 산세 수려한 청정지역에 위치하다 보니 반딧불이의 불꽃향연이 펼쳐지는 곳이랍니다 또 반딧불이만큼이나 청정지역에서만 사는 사슴벌레도 구룡마을에선 흔하게 볼 수 있지요 오직 청정지역에서만 사는 반딧불이와 사슴벌레 등의 서식지가 환경오염 등으로 멸종 위기에 처해 있지요 구룡마을 대나무숲을 친환경적으로 좀 더 잘 가꾸고 보존한다면 무주 반딧불이만큼 유명한 관광자원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곳 익산 구룡마을 대나무 숲의 반딧불이와 사슴벌레 풀벌레 이야기는 신문 등 매스컴에 여러 번 소개된 바 있습니다. 대나무 숲을 한 바퀴 돌아보면 구룡마을 대나무 숲이 얼마나 규모가 큰지 알 수가 있습니다. 구룡마을 전체가 대나무 숲이랍니다. 대나무 숲의 입구와 주차장은 건축 중인 한증막 왼쪽이고요. 입구를 지나쳐 올라가다 보면 미륵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인 계곡이 대나무숲을 빙 둘러싸고 있어 반딧불이 서식지로 안성맞춤인 듯합니다. 삼각 형태의 그림 같은 펜션도 대나무숲 옆에 보이네요. 제가 거닌 산책코스는 북쪽에 있는 출구로 들어가서 대나무 숲 산책로를 따라 찜질방이 있는 남쪽의 입구까지 구경하고 한 바퀴 빙 돌아 다시 출구까지 입니다. 대나무 숲에는 생명의 광장과 만남의 광장 그리고 우물이 있는 우물 터 광장까지 세 곳의 광장이 있고요. 광장을 중심으로 '명상의 길'과 '소통의 길'이란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지요. 이리저리 마치 미로처럼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대나무 향기 맞으며 산책하다 보니 혹시 길을 잃진 않을까 걱정도 되더라고요. 물론 이정표가 여기저기 여러 곳에 있지만 그래도 대나무숲이 워낙 넓고 울창해서요. 이곳 구룡마을 대나무 숲은 주요 수종인 왕대가 북방한계 선대에 있어 생태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입니다. 옛날엔 우리나라 3대 오일장의 한 곳이었던 강경 오일장을 통해 익산의 죽제품이나 소쿠리와 바구니들이 전국으로 팔려나갔지요. 2005년 겨울 혹독한 추위로 대나무가 큰 냉해를 입어 왕대가 거의 고사하는 위기를 겪었으며 마을 주민들과 익산시 그리고 환경단체 등에서 고사한 대나무를 베어내고 생육환경을 개선하는 등 노력을 기울여 현재까지도 경관이 복원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구룡마을에는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있지요. 바로 뜬 바위입니다. 마을 제일 위쪽에 있는 집채만 한 큰 바위가 뜬 바위이며 큰 바위 위에 또 하나의 큰 바위가 올라가 있는 형태로 고인돌과 비슷한 형태를 한 바위입니다. 달 밝은 밤에 천사가 내려와 옹달샘에서 목욕하고 이 바위에서 명주를 짰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곳이지요. 뜬 바위 입구엔 단군을 모신 단군성전이 있고 이 성전 옆길로 올라가면 바로 뜬 바위가 있고요. 뜬 바위 윗돌 위에는 미륵산에 사는 장수가 오줌을 싸서 흘렀던 골과 반지 고리 그리고 가위를 놓았던 가위 자리 모양이 있다 합니다. 와이투케이가 직접 올라가 볼 수가 없어 확인할 수가 없었으니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랍니다. 뜬바위는 평소엔 윗돌과 밑돌이 딱 붙어있으나 섣달그믐날 자정이 되면 두 돌의 사이가 떠서 명주실을 양쪽에서 쥐고 뜬바위에 넣고 당기면 걸리지 않아 뜬바위 라고 하였고요. 구룡마을 대나무 숲 인근엔 익산의 주요 대표 여행지가 모두 몰려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며 백제 무왕 때의 유적들인 미륵사지(사적제150호)와 미륵사지석탑(국보제11호) 그리고 왕궁리유적지(사적제408호)와 왕궁리오층탑(국보제289호)이 있으며 무왕이 탄생한 생가지와 최근 백제 무왕 릉으로 확정 판명된 쌍릉(사적 제87호) 등이 이 대나무숲 반경 2km이내에 있어 여행하기 딱 좋은 곳이 바로 익산입니다. 대나무 숲을 여행하는 동안 대나무 향기 맡으며 대나무 바람 소리 들으며 파란 하늘에 푸른 대나무 쳐다보며 눈과 귀 코까지 호강했던 하루이었습니다. '꽃 피는 봄날' 익산으로 대나무 향기 따라서 떠나는 힐링여행 떠나보지 않으시렵니까? 여러분들의 익산 여행은 평생 추억으로 남을 것입니다. /글사진 = 익산시 블로그 기자단 유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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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07 11:29

[전북의 독립현장] 한강 이남 최초 만세운동 군산 3.5운동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의 독립이오하고 답했을 것이다. (백범 김구) 1919년 1월21일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만주 지린의 2.1 무오독립선언재일 조선유학생을 중심으로 2.8독립선언이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국민을 하나로 단합시켰고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종교인과 학생중심의 군산 3.5만세운동, 10여명이 3만명 되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니 서울평양의주선천원산진남포 등 7개 도시에서 만세운동이 동시에 일어났다. 3월 2일 함흥수안황주중화강서대동해주개성 등으로 확대됐으며 3월 3일 서울에서 치러진 고종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많은 국민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학생중심의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그 날 군산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군산 만세운동은 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운동이다. 군산 3.5만세운동은 당시 구암동산에 위치한 군산영명학교(현 제일중고)를 졸업하고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재학중이었던 김병수 학생에 의해 시작됐다. 그가 민족 33인 중 이갑성 애국지사로부터 독립선언문 200여매를 전달받아 2월 26일 군산에 내려와 영명학교 은사인 박연세(구암교회 장로) 교사집에서 이두열김수영고석주김윤관김연묵이동욱문용기 등을 만나 서울의 독립운동을 은밀히 알리고 군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는 것에 협의했다. 이후 박연세 교사는 같은 학교 교사들과 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문 3500매와 태극기를 만들었고, 3월 6일 서래장날을 기점으로 거사를 준비했으나 5일 새벽 군산경찰서 일본인 경찰 10명이 무장하고 나타나 주모자인 박연세이두열김수영 등을 연행해 거사는 좌절될 위기에 놓였다. 이 같은 사태가 벌어지자 당시 표면에 드러나지 않게 활동하던 김윤실 교사는 학생간부들과 긴급회의를 열고 곧바로 시위를 열자고 결의했다. 당시 학생이던 양기철전세종김영후송기옥이도준홍천교고준명유복섭오한길간규언강인성 등이 앞장서 시위에 들어가니 같은 기독교 계통의 학교인 멜본딘(현 군산 영광중여고) 여학교의 학생도 합세했다. 또 시민 정문선김영상전종식문재봉홍종억전봉신박동근임종우이병관이 합세하며 그 수가 500여명으로 늘었다. 경찰서 앞에 이를 때는 1000여명으로 늘어나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하늘에 사무쳤다. 군산의 기미 3.5독립만세운동은 1903년 2월 미국 예수교 남장로회선교회에서 기독교선교를 목적으로 설립한 영명학교와 멜본딘여학교 교사학생궁멀 예수병원 사무원과 구암교회 성도 등 기독교인이 주축이 되어 시작됐다. 이어 천주교불교범종교와 시민도 합세했다. 민족의 자주독립을 외쳤던 3.1만세운동은 군산 구암동산에서 3월 5일 발원해 총 28회에 걸쳐 연인원 3만700여명이 참여했으며 사망자 53명실종 72명피해인원 195명이 발생했다. 군산의 3.5만세운동은 호남 최초한강 이남 최초의 거사이며 전북지역 최다수의 순국자가 발생한 만세운동으로 군산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구암교회 건물을 3.1운동 역사공원으로 조성했다. 공원 안에는 100주년 기념관과 추모공원 등이 조성돼 있다. △일경의 제지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 김제 원평장터 독립만세운동 당시 김제군에서도 3월 2일 이미 김제읍 천도교구실에 독립선언서가 도달됐다. 교구장 공문학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교인 김봉빈안백균 등을 통해 죽산부량 등 각 면에 배포하고 인근 고을에 전포했다. 3월 5일 군산옥구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크게 전개돼 김제군에서도 지사청년이 앞장서 연락망을 구축해 연락을 취했다. 3월 4일에는 김제역 대합실에서 독립선언서 20장 등이 발견되고, 6일에는 읍내에서 선언서가 산포되고 운동이 진행되는 듯 했으나 일본 경찰 등에 의해 무산됐고 경계는 더욱 삼엄해졌다. 그러나 도내에서 만세 함성이 매일같이 울려퍼지는 분위기 속 김제군도 잠잠하게 있을 수만은 없다고 판단해 3월 20일 오후 김제 동남단인 수류면 원평리 원평장터를 시작으로 만세운동을 벌였다. 수류면 구월리 청년 배세동은 13일 전주읍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참가하고 돌아와 수류리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일찍이 결심하고 3월 16일 같은 마을 전도명전도근전부명이병섭김성수 등과 함께 모여 3월 20일 원평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결정했다. 배세동 등의 주요 인물들은 선언서태극기 제작 등을 준비했고, 이병섭 등은 각지의 동지를 규합하는 연락망을 가동하는 등 업무를 맡았다. 20일 오후 원평장터에서 전도근전부명 등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눠줬고 배세동은 9척(약 2m 70cm)이 넘는 긴대에 큰 태극기를 게양해 들고 나서 만국 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고 손병희선생 등 33인이 나라의 독립을 선포하였으니 우리도 당당한 독립국민이 될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나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자고 외쳤다. 독립만세가 울려퍼지자 김대희 등 수백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따라 나섰다. 시장 곳곳에서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감시하고 있던 일본 경찰의 무력에 군중은 해산되고 배세동 등 10여명이 잡혀가 6개월에서 1년의 강제형을 당했다. 4월 4일 만경장날에는 만경공립보통학교 훈도생도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임창무오연길장태석이석재 등은 일찍부터 독립정신을 동기생에게 전했고 익산군 오산면 애국지사 문용기 등과 비밀 연락을 취했다. 4일 정오께 임창무가 34학년 생도 모두를 교정에 불러 모아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니 우리도 동참해야 한다며 태극기를 들고 앞장서 독립만세를 부르니 100여명이 모두 대열에 합류해 독립만세를 부르며 뒤따랐다. 임창무의 만세대열이 시장에 나가자 수백명이 합세해 만세를 불렀다. 순찰 중이던 순사와 승강이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만세대열은 한참동안 시장을 돌며 진행됐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김제경찰서 무장대가 출동해 폭력을 행사하며 제지했고, 결국 대열은 해산되고 주동인물인 임창무 등이 붙잡혔다. 계속되는 독립만세운동은 더욱 강화되는 일본 경찰의 탄압에 의해 좌절됐다. 그러나 애국지사와 애국동포들의 독립염원구국의 활동은 계속됐다. 그 중 김제면의 조기렵김환김성택과 금구면의 송산선쌍감면의 조용철 등은 정읍의 이헌부안의 신헌황해도 활주의 김선복경남 거창의 임양재 등 독립투사들과 김제무주정읍목포 등 각지에서 동지를 모으고 애국 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 등 활동을 하다 1920년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 기획
  • 박태랑
  • 2019.03.06 20:23

[카드뉴스] 24시간 운영 옛말

  • 기획
  • 전북일보
  • 2019.03.06 18:49

[찾아가는 군산이야기] 군산 청암산 둘레길, 사계절 걷기에 좋은 곳

아직은 겨울옷을 벗지 못했지만 어디선가 불쑥 봄이 얼굴을 내밀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군산의 둘레길 중에서 특히 봄이 오면 생각나는 곳이 있는데요. 바로 청암산 둘레길입니다. 물론 4계절 걷기 좋은 곳으로 알려졌지만, 개인적으로는 봄에 만난 청암산 둘레길 풍경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여러 풍경 중에서 왕버들 나무의 연둣빛 빛깔은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 청암산 둘레길을 미리 한 번 돌아보면서 봄맞이 준비를 하려 합니다. 청암산(118.8m)은 군산시 옥산면에 있는 산입니다. 군산호수와 접하고 있는 산이지요. 낮은 산이라서 산이라 하기보다는 뒷동산 정도로 불러도 될 정도로 아담합니다. 낮은 산이면서도 유명하게 된 이유는 숲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군산호수 물을 군산시 상수도 제2수원지로 사용했습니다. 당시 수자원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입산 금지가 되어 숲과 생태가 잘 보전되었습니다. 1939년부터 대아저수지 물을 공급받아 2001년까지 식수원으로 사용했습니다. 2001년에 용담댐이 준공되고 용담댐 광역 상수도(완주 고산면에서 정수된 물을 공급)가 군산시에 공급되면서 저수지는 상수도 수원지 기능이 상실되고 공업 용수원으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군산시에서는 2008년 군산호수(옥산저수지 이름을 사용하다가 회현면 주민 반대로 변경)로 이름을 바꾸고 입산 금지를 해제하여 공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청암산 둘레길을 그렇게 해서 탄생했습니다. 청암산 둘레길은 등산로를 따라 걷는 길과 군산호수 수변을 따라 걷는 수변로가 있습니다. 시간은 수변로가 더 걸리지만, 호수를 가까이 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수변로를 이용하게 됩니다. 걷는 방향도 항상 오른쪽에서 시작해서 왼쪽으로 돌아 나오는데 제방 주변의 억새 길이 좋아서 그런 것 같아요. 운치 있는 억새 길을 걸으며 둘레길 걷기를 시작하면 기분이 좋거든요. 절반쯤 억새 길을 걷다가 제방으로 올라와 걷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시원하게 뻗은 제방길과 넓게 펼쳐진 호수 풍경이 마음을 탁 트이게 해줍니다. 제방 끝에 다다르면 정자와 둘레길 표지석이 있습니다. 정자는 반대 방향에서 오는 사람들을 위한 쉼터이고 표지석은 둘레길 걷기를 시작한 팀을 위한 것입니다. 표지석을 보면 등산로와 수변로의 특징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제방 길을 지나 수변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수변 길가에는 대나무가 많은데 입구부터 보이기 시작합니다. 맞은편에는 벚나무 가로수인데 꽃이 활짝 핀 벚꽃길이 기대됩니다. 수변 길은 대부분이 자연 그대로의 흙길입니다. 역시 걷기에는 흙길이 가장 좋지요. 느낌도 좋고, 건강에도 그렇고요. 단점이라면 비나 눈이 내린 후에 길이 질퍽거린다는 것인데요. 그런 곳은 돌이나 나무를 이용하여 보완해 놓아 불편함이 없습니다. 돌도 그냥 평범한 돌이 아니라 맷돌 모양으로 만들어 징검다리를 연상하도록 배치했습니다. 그 덕분에 불편한 구간이 아니라 오히려 운치 있는 길이 되었네요. 지나는 길에 산림욕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곳도 있습니다. 아직은 날씨가 쌀쌀해서 그늘에 앉아있기에는 부담스러워 그냥 지나쳤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그때는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야겠습니다. 둘레길을 걸으며 주변 풍경을 보기도 하고 꽃이나 나무를 관찰하기도 합니다. 풍경이 멋진 구간에서는 풍경에 집중하고 그렇지 않은 곳을 지날 때는 주위에 더 관심을 보이지요. 지금 시기에는 꽃을 보기가 어려우니까 자연스럽게 나무에 눈길을 주는 빈도가 높습니다. 여러 번 찾은 곳이지만 아직 이름을 모르는 나무가 많은데 나무에 걸린 이름표가 도움이 됩니다. 한 번 보고 다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보다 보면 나무 이름이 반사적으로 입에서 나오는 날이 있겠지요. 들레길을 걸으며 대나무숲을 지나는 구간이 몇 군데 있는데요. 대나무 숲길은 청암산 둘레길의 명소 중의 하나입니다. 일반 숲과는 다른 느낌의 청량감이 있어 좋답니다.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고요. 호수 수변에 군락을 이루는 왕버들 나무 군락지를 지나기도 합니다. 이곳 역시 청암산 둘레길의 명소입니다. 왕버들 나무는 물을 좋아해서 물 가까이 서식하고 있는데 호수와 어우러져 군락을 이룬 모습이 특별해 보입니다. 특히 봄에 연둣빛 잎이 필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아요. 대나무숲에 생태 학습장도 만들었습니다. 청암산과 군산호수에 사는 동물과 식물에 대한 상세한 자료가 준비되어 있어 어린 학생들 현장 교육하는 데 활용하면 좋겠네요. 어느 구간에서는 나무로 만든 길을 지납니다. 땅에 습기가 많아 길 전체를 나무를 이용해서 해 놓은 것 같아요. 구석구석 손길이 많이 간 것을 느낄 수 있는 둘레길입니다. 수변 길의 특징은 호수의 물이 산 모양에 따라 산속으로 깊이 들어왔다가 다시 나갔다를 반복합니다. 그런 이유로 수변 길의 거리가 등산로에 비해 길게 되었고요. 이 구간을 지날 때는 호수 건너편 풍경을 가까이서 볼 수 있습니다. 군산호수에는 겨울철에 철새들이 많이 찾아오는데 건너편 물가에서 한가롭게 놀고 있는 새들 모습도 보입니다. 청암산의 숲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간섭을 받지 않아 자연스럽게 숲의 천이가 이루어졌습니다. 산 아래쪽에는 참나무를 비롯한 활엽수가 상당히 많이 퍼져 있습니다. 숲의 천이 과정에서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래도 아직은 소나무가 차지하고 있는 영역이 훨씬 넓어 소나무와 활엽수 그리고 호수가 삼박자를 이룬 조화로운 모습입니다. 수변 길 전체 코스의 중간쯤 지날 때 다시 왕버들 나무 군락지를 지나게 됩니다. 앞에서 보았던 왕버들 나무 군락지는 길에서 건너다보면서 지나왔다면 이곳은 군락지를 통과해서 지나는 구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수변로의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라고 생각하는 곳입니다. 바로 옆에 있는 쉼터에서 차 한 잔 마시면서 쉬기에도 좋은 곳이지요. 둘레길 중간중간에 쉼터가 있는데요. 특히 호수가 보이는 이런 곳에서는 잠시 쉬었다 가고 싶어집니다. 특별한 것을 하지 않고 그냥 앉아서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될 것 같아요. 차나무 사이를 지나기도 합니다. 자생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심어 놓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곳에서 차나무를 만난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호숫길을 걸으며 모래사장을 보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요. 하지만 이곳에는 작은 모래사장도 있답니다. 바람이 만들어 놓은 풍경입니다. 이러한 사소한 풍경도 청암산 둘레길을 걸으며 만나는 소소한 즐거움입니다. 청암산 둘레길은 수변로와 등산로가 수시로 만났다 멀어지기를 반복합니다. 수변로와 등산로를 바꾸어 가면서 걸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구간에서는 등산로를 이용했습니다. 산 능선을 따라 걷는 길입니다. 오른쪽 마을에 있는 오토캠핑장이 한눈에 보입니다. 청암산 둘레길은 여러 장점이 있습니다. 호수와 산이 접하고 있는 수변 길은 두 가지 풍경을 다 볼 수 있고요. 대나무숲, 왕버들 나무 군락지를 지나는 구간은 포토존으로 최고랍니다. 그 외에도 호수와 산이 어우러져 만들어주는 풍경은 걷는 내내 소소한 즐거움을 전해줍니다. 4계절 걷기에 좋은 곳으로 알려졌지만, 개인적으로는 봄 풍경이 기다려집니다. 왕버들 나무 군락지가 연둣빛으로 물드는 시기에 꼭 다시 찾아보고 싶네요. / 글사진 = 군산시 사이버기자단 김왕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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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05 10:39

자사고 재지정 평가 앞둔 상산고 박삼옥 교장 “자사고·일반고, 상호보완·상생발전할 수 있는 길 모색해야”

3월말 자사고 재지정 평가를 앞두고 교육청들의 평가 기준 상향에 학교들이 집단반발하고 있다. 이중 전북교육청과 전주 상산고등학교의 갈등은 더욱 첨예하다. 사회통합대상자 등 꾸준히 지적이 제기된 평가지표에 관해 일부 교육청이 수정했지만 전북은 요지부동이다. 또 재지정 통과 점수가 70점인 타 지역에 비해 전북만 80점이어서 공정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상산고는 공평한 잣대를 요구하고 있지만 도교육청은 교육청 재량이라는 입장이다. 박삼옥 상산고 교장으로부터 자사고 재지정 평가 기준에 대한 학교 측의 입장과 자사고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 평가기준을 두고 전북교육청과 학교간 갈등이 첨예한 상황입니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 출범한 옛 자립형 사립고는 강원, 경북, 울산, 전남, 전북에 있는 5개 학교입니다. 전북을 제외한 4개 시도를 포함해 자사고가 있는 10개 시도의 평가기준은 70점이고 전북만 80점입니다. 또한 옛 자립형 5개중 4개 학교의 교육청은 일부 평가지표의 시정 요구를 받아들였거나 받아들일 계획입니다. 그러나 전북교육청만 시정요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재지정 평가의 목적은 지정목적의 달성이 불가능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인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 목적을 무시하고 정치적 목적으로 평가기준을 높이는 것이나, 법적인 근거가 없는 지표로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 학내 의견은 평가거부, 평가는 받되 취소상황이면 행정소송제기, 사회일각의 의견처럼 타 시도로의 학교이전 등으로 매우 불만스러운 상황입니다. 교육청의 핍박과 학내의 불만을 보면서 교장으로서는 매우 참담한 심경입니다. - 상산고 측에서 수차례 평가 기준 수정을 요구하는 등 강경 대응을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현재의 평가기준으로는 지정취소를 전제하고 평가한다는 것으로밖에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학부모, 동문 및 상산고 주변 지역민은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상산고 주변의 지역민들은 상산고가 재지정 취소되면 상권이 완전히 쇠퇴해 생활근거와 일자리를 잃게 된다고 걱정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공론화를 통하여 여러 가지 활동 방향을 정하고 있으며 학교보다 훨씬 더 강경하게 시정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상산고가 일반고로 전환한다면 전북의 수많은 인재가 서울 등 타 시도로 또는 외국으로 떠나가게 되고, 전북의 인구감소는 심화되며, 기업유치에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권교육 폐지 주장이 자사고 폐지론의 주요 근거로 나오고 있는데요. 저는 특권교육이라는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상산고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김대중 정부의 요청으로 전기에 학생을 선발한다는 전제하에 자립형 사립고로 지정됐습니다. 상산고는 법인에서 지난 15년 동안 학생 수업료의 77%에 해당하는 451억 원을 지원해 오늘에 이르렀고, 국가의 재정결함보조금을 지원 받지 않고 매년 지원받지 않는 45억원 상당은 일반고 지원에 쓰인다고 봅니다. 상산고가 특권학교라면 국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하면서 등록금은 상산고의 1/3 이하만 내는 일반학교나 국민의 세금으로 국가의 전적인 지원을 받으며 전기보다 더 일찍 학생을 선발하는 영재고는 특별한 특권학교인가요. - 그렇다면 학생들이 상산고 입학을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상산에 들어오면 내신이 일반학교에 비해 매우 불리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과정과 프로그램 때문에 지망하는 학생이 많습니다. 상산고는 그동안 수능과 관련 없는 다양한 교양과목을 포함한 교육과정과 창의체험활동 등을 개발해 급변하는 미래사회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인재를 기르는데 중점을 두어왔습니다. 상산의 경쟁력은 자율적인 교육활동을 통해 튼튼한 기초실력을 쌓고 서로 배려하며 창의적인 인재를 교육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국 모든 시도에서 온 학생들이 전북의 문화와 전통 및 역사를 이해하면서 서로 다름 속에서 배우고 발전하는 점이 큰 장점입니다. - 재학생들의 성과는 어떻습니까. 학생들은 학교내외에서 다양한 동아리활동과 봉사활동 및 창의적 체험활동을 통하여 미래에 필요한 인재로 성장하는 한편 대학입시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고 있습니다, 지난 6년 동안 소위 SKYS라고 하는 서울대, 고대, 연대, 성균관대에 합격한 학생은 매년 평균 210명에 이르며 카이스트, 포항공대에도 많게는 40명 이상 합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입시결과 때문에 상산고가 입시위주의 교육을 한다고 하는데, 그동안 실행해온 대학입시와 관련이 없는 다양하고 특성화된 교육과정을 보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자사고, 또 전북지역과 상산고는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앞으로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 자사고는 교육의 다양화, 특성화를 더욱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변화에 대응하여 기초실력을 튼튼히 하되 끊임없이 새로운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해 다양화돼가는 국민의 교육수요를 충족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상산고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업의지가 강한 학생들을 선발하기 위하여 노력해왔고, 또 선발에 그치지 않고 그들에게 맞춤형 교육을 실시했지만, 앞으로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도록 선발과 교육에 더욱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상산고의 우수한 교육프로그램을 전북지역의 일반고에 확산시키는 데에도 더 노력해 자사고와 일반고가 상호 보완하는 체제로 가면서 상생 발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하겠습니다. - 전북도민에게 한말씀 해주신다면. 전북 도민들께서는 타 시도에서 온 학생들이라 할지라도 내 자식같이 사랑으로 이끌어서 이들이 전북을 자신의 고향처럼 여기고 사랑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들은 훗날 전북의 큰 자산이며 확실한 우군이라는 점을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 [박삼옥 상산고 교장은] 경제지리학 분야 세계적 석학 정읍에서 태어나 전주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지리학과를 거쳐 미국 죠지아대학교에서 경제지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에서 30여 년 동안 근무하고 정년퇴임한 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와 가천대학교 석좌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대에 재직하는 동안 사회과학대학 학장, 서울대학교 최종의결기구인 평의원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평의원회의장으로 4년여 동안 일하면서 서울대학교 법인화를 이끌었다. 그는 경제지리학자로서 대한지리학회장, 한국지역학회장, 산업클러스터학회장 등을 지냈고, 국제적으로는 태평양지역학회장, 세계지리학연합 경제공간위원회 의장, 세계지역학회 상임이사 등을 역임했다. 세계지역학회지의 편집자와 여러 국제학술지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도 경제지리학 및 지역학분야에서 국제적으로 최고 학술지인 미국의 <경제지리학저널>, 영국의 <지역연구> 등의 편집위원과 영국의 <지역발전과 정책>의 편집자로 활동하면서 한국을 외국에 알리고 지역경제발전과 지역 간 불균형 완화에 대한 이론과 정책수립에 공헌하고 있다. 그의 연구결과와 이론은 한국의 지역혁신정책, 산업클러스터, 혁신도시, 국가식품클러스터, 연구개발특구법 등 정책에 직접 반영되기도 하였다. 그는 세계적인 학술활동과한국의 학문발전에 공헌한 점이 인정돼 2016년 9월에 대한민국학술원상을 수상했다.

  • 기획
  • 김보현
  • 2019.03.04 20:26

[전북의 재발견] 전주 이색카페 '색장 정미소' - 차 한 잔에 추억 한 모금

전주한옥마을에서 남원 방향으로 자동차로 약 5분 거리에 자리 잡은 색장 정미소는 오래된 정미소를 고친 복합 문화카페입니다. 고가구, 골동품, 민속품 등이 전시돼 있으며, 문화 관람료를 내면 차까지 마실 수 있습니다. 추억이 담긴 골동품과 벽면 가득 채워진 예술 작품들을 보며 차 한 잔에 추억 한 모금까지 마실 수 있는 곳이랍니다. 사르르 오래된 정미소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늑한 나무 냄새와 함께 다양한 고미술품이 가득해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듯합니다. 고가구, 골동품, 민속품이 전시되어 있는데요. 문화 관람료 4,000원을 내면 그날의 커피를 무료로 드실 수 있답니다. 커피 외에 전통 차는 추가 요금을 내시면 되는데요. 따뜻한 쌍화차와 함께 고소한 누룽지를 마시니 배도 든든하고 건강해지는 듯합니다. 쌍화차를 마시며 지금도 소리가 잘 들리는 축음기 음악도 감상할 수 있답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사용했다는 나무 아이스박스에서 그 당시 삶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는 고가구와 민속품을 찾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작은 다락방을 연상케 하는 색장 정미소 2층, 3층에는 옛 시절 모습이 담긴 사진과 갓 도정한 쌀이 나오는 시설이 있었는데요.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친구와 연인, 가족 누구와도 함께 머무르면 좋을 듯합니다. 색장 정미소 옆 감 나무집 옛 건물을 복원하여 애기똥풀 미술학교가 문을 열었는데요. 전주한옥마을에 여행 왔다가 인연이 되어 7년째 생활미술 작품을 만드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림을 꼭 액자에 넣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우리 주변 물품 어디에서나 활용할 수 있는 미술로 거듭난 게 이곳의 매력 포인트입니다. 색장 정미소 옆에 또 하나의 숨겨진 찻방이 있는데요. 이곳은 옛 시골집의 서까래와 툇마루를 그대로 살려 자연 친화적인 공간으로 꾸며 놓았습니다. 오붓하게 따스한 햇볕을 느끼며, 여유를 만끽하기에 그만입니다. 색장 정미소 안팎으로 다양한 미술작품, 골동품, 민속품이 전시되어 있는데요. 사라져가는 옛 물건을 모아 정겨운 이야기를 담아낸 추억의 장소가 색다른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해 봅니다. 다가오는 봄 미술작품을 보면서 감성은 채우고, 추위는 녹이면 어떨까요? 색장 정미소 주소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색장길 2-15 전화 : 063-272-2460 /글사진 = 전북 블로그 기자단 이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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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04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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