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5-11-14 15:50 (Fri)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경제 chevron_right 산업·기업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18)쌍방울 ③성장기

전국적으로 판매량이 급증하자 쌍녕섬유는 1968년들어 종전 판매과를 판매부로 승격시키고, 인력도 30여명으로 대폭 증원해 전국 판매망을 포괄했다. 당시 섬유의 주원료인 면사의 국내 공급물양이 수요에 크게 미치지 못해 섬유업계가 원료확보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1970년대 초반에는 면사(綿絲)파동이 일 정도였다. 하지만 쌍녕섬유는 이봉녕 사장이 전국 방적공장을 찾아다니며 원사확보에 주력했고, 제품 판매 호조가 이어지면서 회사는 급신장했다. 1968년에는 우리나라 섬유업계 최초로 품질관리 시스템을 도입하고, 품질관리부를 운영했다. 염색기술자를 스카웃해 염색기술을 보강하는 한편 신제품 개발에도 주력했다. 제품도 다양화해 1966년 '파이렌'이라는 신사용 내의, 1967년 '뉴티'라는 티셔츠를 개발해 소비자들의 호평을 받는 등 외의류 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준비도 했다. △ 해외시장에 눈을 돌리다 1963년 출범한 쌍녕섬유는 불과 45년 후 전국 섬유 시장을 뒤흔들었고, 이봉녕 사장은 해외 시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0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관람한 이봉녕 사장은 참담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일본의 기술은 크게 앞서 있었고, 내의류 품질은 물론 종류도 다양했다. 시설과 기계가 고도화돼 있었고, 경영자나 종업원 모두 품질개선을 위해 연구개발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다. 큰 충격이었다. 결국 이 사장은 견본용으로 가져간 쌍방울 메리야스는 내놓지도 못한 채 신형 편직기만 사들고 귀국했다. 그러나 일본 방문에서 이 사장이 받은 충격은 보약이 됐다. 포기할 수 없었다. 품질 향상을 위해 자신은 물론 종사자들 모두를 향해 채찍질했고, 2년 후인 1972년 다시 견본품을 들고 일본을 찾았다. 그리고 일본 시장에서 품질을 인정받은 쌍녕섬유는 수출 교두보를 확보, 상반기부터 수출에 들어갔다. 품질에 까다로운 일본 진출 그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었다. △ 새로운 출발 쌍녕섬유는 1971년 당시 620개에 달하는 국내 메리야스 관련업 중에서 내수기반을 확고히 한 몇 개의 업체에 속했다. 국내의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에 힘입어 낮은 가격의 제품으로 수출하는 기업이 많았지만, 쌍녕섬유는 꾸준히 자본과 기술을 축적하고 품질을 향상시키며 국내 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다지는데 주력했다. 그 결과 1970년대 중반 이후 쌍녕섬유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메리야스업체로 부각됐다. 당시에도 메리야스업계는 여전히 지역 대표업체들이 시장을 분할하고 있었지만, 쌍녕은 창사 10여년만에 전국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쌍녕섬유가 공장 설비의 대규모 확장을 계획한 것은 제품 판매량에서 선발업체들을 제치고 앞서나가기 시작한 1970년부터였다. 전주공업단지는 1967년 조성돼 입주가 시작됐지만, 이리공업단지는 1969년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봉녕 회장은 전주와 이리공단 입주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문제는 염색 공정에 중요한 수량과 수질이었다. 수차례의 수질 검사 결과, 이리지역의 수질이 낫다고 판단이 나왔다. 이리공단에 1차로 1만 평을 매입하면서도 원수를 충분히 끌어들일 수 있도록 공단 내에서도 가장 낮은 지역을 택했다. 마침내 1972년부터 공장부지 조성 및 공장 건설에 들어갔고, 1973년 3월에 새로운 설비를 갖춘 공장이 가동에 들어갔다. 기존 동이리공장에는 100여명이 잔류해 생산을 계속하고, 이리공단 공장에는 300여명의 인력이 가동됐다. 새 공장은 최신 대규모 설비를 갖춰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이제 쌍녕섬유는 이봉녕 개인 기업을 넘어서고 있었고, 새로운 출발이 필요했다. 쌍녕섬유공업사는 1972년 6월7일 상호를 쌍녕섬유공업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자본금을 3200만원으로 총3만2000주의 주식을 발행했다. 대표이사는 이봉녕이었다. △ 업계 선두에 이르기 까지 쌍녕섬유는 1973년 8월23일 편면 남 티셔츠 등 7개 품목에 대해 코튼마크 승인을 얻는다. 이는 당시 메리야스 내의류 생산업체 중 무궁화상사에 이어 두 번째에 해당한다. 코튼마크는 대한방직협회가 미국국제면화협회의 협조하에 1971년부터 시행한 것으로 면 제품의 우수성을 보증했다. 공장 규모가 커지자 1973년 8월부터는 매월 5060명의 종업원을 공개 채용하기 시작했는데 몇개월 후 쌍녕의 종업원은 거의 두 배 규모로 늘어났다. 회사는 항상 활력이 넘쳤다. 동이리공장은 쌍녕에서 분리 독립, 서안섬유주식회사가 됐다. 이 무렵 쌍녕은 성장일로였지만, 국내 경제와 섬유업계는 1973년 10월 중동전 발발과 함께 터진 석유파동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내수성장과 함께 수출까지 활기를 띠면서 국내 섬유업계는 1967년 20.7% 성장, 1973년 23.4% 성장 등 매년 20% 이상의 성장세를 달려왔지만, 석유파동 후인 1974년에는 불과 1.3% 성장에 그친 것. 석유파동과 선진국의 소비 둔화, 수입억제정책 등으로 인해 1975년에도 어려움이 계속됐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쌍녕이 약진을 계속해 1975년부터는 국내 최고 메리야스업체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던 것은 몇가지 이유가 있다. 석유파동 이전에 이리공단 이전을 마쳤고, 수출에 주력하지 않고 내수시장을 적극 공략해 경쟁력 우위를 점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자기혁신으로 경영을 쇄신한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974년 쌍녕의 내수부문 매출액은 5억 2000만원에 불과했지만, 1975년에는 29억 8900만원으로 무려 6배가 신장했다. 이어 1976년에는 전년대비 100% 성장한 56억 1200만원에 달했고, 1977년에는 112억300만원으로 처음 내수부문 매출 100억원을 돌파했다. 물론 쌍녕의 약진은 꾸준한 기술개발과 품질향상 노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1973년부터 일본의 가다쿠라공업주식회사와 기술교류를 시작했고, 1976년부터는 기존 제품과는 달리 직조방법과 소재를 다양화한 제품을 본격적으로 개발해 선보였다. 추동절 내의시장을 겨냥한 순모 내의, 앙고라, 리플, 론샤니 등이 그것이다. 1976년 말에는 증설과 보수작업을 마무리하고, 이 과정에서 신형 기계를 도입했다. 1977년에 설치한 자동선염기와 신형 표백기 설치로 염공시설의 자동화를 이뤘다. 또 1977년에는 1일 2500톤의 폐수를 처리할 수 있는 현대식 폐수처리 시설을 준공, 생활환경 개선과 수질오염 방지에 획기적 전환점을 이루었다. 1977년 들어 그동안 부진하던 수출도 호조세를 보였다. 일본 최고 품질을 인정받고 있는 가다쿠라 등 4개 업체와 수출계약을 하고, 새로 개발된 리플 내의류는 중동시장에서 호평을 받았다. 미국 앤더슨사오하 스포츠 티셔츠 수출 등 일본과 중동, 미국, 유럽 시장으로 수출이 크게 늘어났다. 이처럼 경영이 안정 궤도에 오르면서 쌍녕섬유는 방적업에 진출한다. 이봉녕 사장은 1977년 3월4일 자본금 10억원으로 쌍녕방적주식회사(대표이사 이봉녕)을 출범시키고, 그해 3월25일에는 쌍녕섬유주식회사 상호를 '주식회사 쌍방울'로 변경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5.06 23:02

"행복한 친정나들이 고맙습니다"

전북농협이 2007년부터 펼치고 있는 농촌지역 외국인 이주여성의 모국방문 지원 사업을 4년째 이어갔다.전북농협(본부장 김종운)은 3일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결혼 후 오랜 기간 친정을 방문하지 못한 도내 농촌지역 다문화가정 13부부를 초청, 모국 방문 항공권 교환권과 체재비로 모두 650만원을 전달했다.이번에 고국 나들이를 하는 이주여성들은 전북농협이 일선 시군지부를 통해 추천받아 최종 선발한 중국(7가정), 필리핀(4가정), 베트남(1가정) 등 3개국 13가정이다. 이주 여성은 3년 이상 국내에 거주하며 한국 국적을 취득했으며, 1가구 당 왕복 항공권과 함께 별도의 체재경비로 50만원씩 지급됐다.이날 농협의 지원으로 친정나들이 선물을 받은 고창 알린브이프엔테스 씨(필리핀)는 결혼 후 8년만에 남편과 자녀를 데리고 친정을 방문하게 됐다.또 완주군 고산의 김홍 씨(중국)는 "2003년 이후 7년만에 고향을 방문한다. 고향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고 말했다.농협 김종운 본부장은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달라도 이주여성들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소중한 이웃들이다" 며 "농촌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모두가 관심을 갖고 돕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전북농협 농촌지원팀 유금례 차장은 "앞으로도 다문화가정 모국방문 지원사업과 함께 1:1 맞춤영농교육, 다문화가정 전통혼례, 다문화여성대학 운영 등 이주여성들이 농촌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한편 전북농협은 농협문화복지재단의 후원을 받아 2007년 17가정(71명), 2008년 9가정(41명), 2009년 13가정(59명), 2010년 13가정(55명) 등 총 52가정(210명)의 모국방문을 지원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5.04 23:02

천안함 인양 지원 대우조선에 국민격려 이어져

천안함 인양을 위해 막대한 생산차질을 감수하고 최신형 해상 크레인을 투입한 경남 거제의 조선소 대우조선해양에 국민들의 격려가 쏟아지고 있다. 30일 현재 대우조선 홈페이지에는 최신형 해상크레인 '대우 3600호'가 천안함을끌어올리는 장면을 본 국민들의 격려글이 50건 이상 이어지면서 게시판을 가득 메우고 있다. '진발'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네티즌은 "손실을 감수하고 구조활동에 참여했다는소식을 들었다. 대단한 결정을 했다"며 "대우조선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기업"이라고 격려했다. 아이디 '감동받은 시민'도 "기업은 이윤을 위한 집단이지만, 나라와 국민을 위해 손해를 적극 협조한 모습에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며 "앞으로 나에게 대우조선은일등기업으로 기억될 것"이라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크레인을 타고 직접 인양작업에 참여한 대우조선 선거그룹 서용완 부장은 국민들의 격려를 접하고서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국가의 큰일에 보탬이 될 수 있어 좋았다"며 "고인들에게 작은 위로라도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답했다. 앞서 대우조선해양은 4일 천안함 함수 인양을 위해 이 회사 해상크레인 '대우 3600호'를 백령도에 투입했다. 이 크레인은 대형 슈퍼블록 탑재작업 등에 투입되는 핵심 생산설비였지만, 이회사 남상태 사장은 "국민적 관심사인 천안함 사태 해결을 위해 적극 지원해야 한다"며 투입 결정을 내렸다. 대우조선은 '대우 3600호'를 대체할 다른 크레인을 외부 업체에서 1일 1억원 가량에 임대하고 이에 따른 임대료를 국방부 측으로부터 보상받기로 했지만 생산 차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대우조선 관계자는 "대우3600호는 대우조선 작업현장에서 가동하기에 최적화된최신설비였지만 임차 크레인은 장비도 노후한데다 작업현장과도 맞지 않는다. 처음에는 700억원 가량의 손해가 날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국가적 비상사태에 힘을 모으는 것이 우선이었다"며 "다행히 철저한 사전준비 등을 통해 생산 차질을 최소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대우3600호는 해군 평택 2함대에서 인양된 선체의 육상거치 작업을 돕고있으며 마무리되는 대로 옥포조선소에 귀환할 예정이다.

  • 산업·기업
  • 연합
  • 2010.04.30 23:02

[지역상품이 부자전북 만든다] (36)고창영어조합법인

원기를 보충하는 음식으로 알려진 뱀장어를 가정용 메뉴로 개발한 고창군 성내면 고창영어조합법인(대표 이재정)의 '선운산풍천장어구이'. 고창의 특산물인 복분자와 풍천장어를 조합한 이 제품은 손질한 뱀장어의 비린내를 제거한 뒤 복분자 양념을 입혀 원적외선으로 여러 번 구워 영하 35℃에서 급속 동결한 제품이다. 전자레인지·오븐에 2~3분 익히면 고유의 질감·향이 되살아나 장어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유명 호텔과 대형마트 납품 등으로 13명의 직원이 월평균 6.5톤을 생산해 지난 2008년 16억원, 지난해 18억원의 매출을 올려 매년 12% 가량 매출 상승세를 기록하고 있다. 현재 일본·미국에 복분자 장어구이를 수출할 예정이다.고창군영어조합법인은 지난 1984년 성내양어장으로 출발했다. 정부로부터 '선도 어업경영업체'로 지정받은 뒤 뱀장어 가공설비를 개발했다. 지난 1999년에는 정부지원 수산물 가공공장으로 선정돼 완전 조리된 장어구이를 만들어 수산전통식품 품질인증을 획득했다.제품 개발 초기에는 장어를 굽는 최적의 온도·시간을 찾기 위해 장어굽기를 반복, 수백㎏의 장어를 버리기도 했다. 굽는 온도·시간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만큼 최상의 맛을 내는 지점을 찾아 지난 2004년 '장어구이제조방법및장치특허'를 획득했다.지난 2007년에는 정부로부터 철탑산업훈장상을 수여받았고 바이전북 13호 인증을 획득했다. 지난해에는 농수산식품부 선정 수산물대전 금상을 수상하는 등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았다.이 대표(54)는 "장어는 손질하기가 어려워 가정에서 손쉽게 데워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 일본·유럽 등을 벤치마킹해 장어를 가공할 수 있는 기계를 고안했다"고 설명했다.이어 올해를 제 2 도약의 원년으로 삼는다는 계획도 밝혔다. 그는 "국내 최초 '풍천장어'라는 상표로 프랜차이즈 사업을 구상하고 있으며, 올해 30억원 매출을 목표로 한다"면서 "장어동그랑땡·장어쿠키 등 다양한 신제품을 유명대학과 공동개발하는 등으로 국내 장어업계의 선두자리를 고수할 방침이다"고 말했다.

  • 산업·기업
  • 이세명
  • 2010.04.29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국내 내의 제조업 간략한 역사

우리나라에 메리야스 제품인 양말류가 전래된 것은 1780년대 쯤으로 추정된다. 천주교 선교사들이 들여온 것으로 보이는 양말류는 버선에 비해 편리하고 실용적이어서 관심을 끌었다. 개화기 무렵, 고무신과 양복, 양말류는 대중화 단계에 들어갔다. 면화 재배가 성행하고, 면포도 생산됐다. 그러나 개화기 이후 조선은 일본 방적산업의 원료 공급지에 불과했다. 일제에 눌려 조선 자본이 성장할 틈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서울과 평양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직포공장, 메리야스공장, 고무신공장 등이 성장하고 있었다. 1900년 서울 종로에 종로직조사가 설립됐고, 1919년 설립된 경성방직은 순수 민족자본에 의한 면방직산업의 맥을 이어갔다. 1920년대 들어 평양을 중심으로 양말공장이 대거 들어섰다. 당시 평양에서 생산된 양말은 전국 생산량의 60% 정도를 차지했다. 1933년 평양에 설립된 조선메리야스합명회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메리야스 내의류 생산업체였다. 조기, 횡기, 태환기 등 일본에서 들여온 설비를 갖춘 조선메리야스는 전량 주문생산 방식으로 제품을 생산했다. 이처럼 메리야스공업이 활기를 띠면서 평양 중심의 메리야스공업은 서울과 부산, 대구 등 각지로 확산됐고, 20여개 업체는 중국으로 설비를 옮겨 생산하기도 했다. 1941년 기준 국내 메리야스업체는 482개였는데, 평남 163개 서울경기 103개, 전북 5개 등의 분포를 보였다.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구와 부산, 경남북지역의 메리야스 공업이 발달했다. 평양의 조선메리야스합명회사 박형준 사장과 삼공양말의 손창윤 사장 등이 설비를 남한으로 옮겼고, 영남지방은 6.25 전화 속에서 인민군의 포화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활필수품인 메리야스류의 공급이 부족하자 정부가 전후복구사업 측면에서 정책적으로 지원했다. UN의 구호 면사 방출, 시설 확충을 위한 산업기계자금 지원 등에 힘입어 메리야스산업은 시설 확장 및 현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 당시 원조물자는 제분제당면방산업 등 이른바 삼백(三白)산업 형성의 토대였다. 그러나 전후 의류 절대부족 상황을 벗어나고, 미국 원조도 끊긴 1957년 이후 메리야스업계도 대대적인 재편의 회오리에 휩싸였다. 1957년 내의류와 양말장갑 생산업체는 무려 1107여개에 달했지만 이후 영세부실업체들이 대거 퇴출되고, 새로운 기업이 탄생했다. 1954년 형제상회를 설립, 자본을 축적하던 이봉녕에게는 다시없는 기회였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4.29 23:02

[다시쓰는 전북 기업사] (17)쌍방울 ②창업기

▲ 형제상회 호남지역 최대 도매상 형제상회는 개업 1년만인 1955년에 10평에서 30평 규모로 커졌다. 취급 물량이 많아지면서 잡화상으로 커졌다. 생활의류 절대량이 부족하던 때여서 물건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양말도매상에서 내의류 도매상으로 성장한 형제상회는 종업원이 18명에 달했고, 1958년 무렵 대전 이남의 충청권과 호남지역 최대의 메리야스 도매상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규모가 커지면서 형제상회는 소규모 메리야스 제조업체에 자본을 대주고 생산품을 납품받기도 했다. 하지만 형제상회의 판매량이 워낙 많아 전체 물량의 절반 정도는 대형 메리야스 업체에서 공급받아야 했다. 하지만 대형 메리야스업체는 형제상회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대량으로 물량을 쏟아내며 도매상에게 떠맡기기도 해 곤욕을 치러야 했다. 판매 물량이 제때 공급되지 않아 애를 태우기도 했다. 이봉녕은 결국 마음에 드는 제품을 직접 생산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굳히고, 사업 구상에 들어간다. 그러나 1958년 메리야스업계가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거쳐 1107개이던 업체가 726개로 감소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봉녕은 품질이 떨어져 소비자에게 외면받는 기업, 자금력이 취약한 기업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 창업 시기를 놓고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1962년 9월 동이리역 부근인 이리시 인화동 2가 57번지에 대지 280평, 건평 200평 규모의 공장을 마련하고, 삼남메리야스공업사를 출범시켰다. 중고 편직기 7개, 재단기로 작두 4대와 핸드나이프 1대, 염색시설을 갖췄다. 종업원은 50명이었고, 동생 창녕이 공장장을 맡았다. 그러나 메리야스 장사를 하면서 품질은 물론 소비자들의 성향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던 이봉녕에게 초기 제품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기술자들과 다툼도 잦았다. 그렇게 탄생한 첫 제품이 '삼남표'라는 상표를 부착하고 시장에 나왔다. 하지만 1년이 지나서야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갈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삼남메리야스는 자금압박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 이봉령 사장 불량품 모두 불태워 창업 후 지난 1년을 결산했지만, 기업의 미래가 밝지 않았다. 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조직적이고 일관성 있는 운영체제가 절실했다. 이봉녕 사장은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다. 먼저 1963년 3월1일 상호를 쌍녕섬유공업사로 변경했다. 형제를 의미하는 쌍(雙)자와 봉녕(奉寧), 창녕(昌寧)의 이름 끝자인 녕(寧)을 조합한 것으로, 외형적으로는 단순히 상호만 변경한 조치였다.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창업주 이봉녕 사장이 비로소 사업가로서의 뚜렷한 미래와 목표를 가지고 새로운 출발선에 섰음을 의미했다. 훗날 쌍방울이 1963년 3월1일을 그룹의 실질적인 출발 기점으로 잡은 것도 이런 연유였다. 당시 메리야스업계는 1962년 6월 단행된 화폐개혁으로 초래된 자금난과 구매력 감소 등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원료난으로 조업을 단축하고, 휴업하는 공장도 많았다. 쌍녕도 마찬가지였다. 이봉녕 사장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품질개선과 원가절감을 통한 경쟁력 확보라고 믿었다. 그는 면 제품에 대한 혜안을 갖고 있었고, 자사 제품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다. 불량품은 종업원들이 보는 앞에서 가차없이 불질러버렸다. 이에 주변에서 불평의 소리가 나오자 이봉녕은 "소비자를 속이고 불량품을 생산공급하는 기업은 사기꾼과 다를 바 없다"고 강조했다. 그 결과 쌍녕은 19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시장에서 품질 우수성을 인정받았고, 경영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제1차 경제개발 계획이 성공하면서 국가 경제가 성장, 섬유산업도 성장 국면에 들어갔다. 쌍녕도 제품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판매가 호조세였지만 전국 판매망은 어림없는 상황이었다. 충청전라도를 뛰어넘어 서울과 부산, 대구 등 전국 시장으로 진출이 절실했다. ▲ 쌍방울의 등장 이봉녕 사장은 '삼남표'라는 상표가 전국 소비자들의 의식 속에 파고들기 어렵다고 판단, 상표 변경을 모색한다. 그래서 나온 상표가 '쌍방울'이다. 쌍방울은 사람들이 항상 몸에 밀착하고 애용해야 할 속옷류에 대한 명칭으로서는 정감을 느끼게 했고, 또 상호인 쌍녕의 한글식 표기여서 거부감도 없었다. 쌍녕섬유공업사는 1964년 10월부터 새로운 상표 '쌍방울'을 출시했다. 다만 충청과 호남지역 출하제품에 한해서는 삼남표를 당분간 사용키로 했다. 쌍녕섬유공업사가 쌍방울 상표를 앞세워 전국 시장에 진출하던 1965년 무렵, 국내 메리야스업체는 500여개에 달했다. 서울과 부산대구, 그리고 전북지역에 대부분 업체가 밀집했다. 주요 상표는 서울의 독립문표무궁화표태복, 부산의 왕자표캉가루표기차표매표, 대구의 지구표청포도메리야스, 광주의 남영백마표, 전북의 백양태창메리야스금성섬유해신대성메리야스 등이 대표적이었다. 따라서 쌍녕이 전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각 지역 유수의 상표 벽을 허물어뜨려야 했다. 이봉녕 사장이 꺼낸 첫 카드는 서울판매부 설치였다. 서울판매부의 성공은 쌍녕섬유가 전국적 유통망을 구축하는 시금석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1965년 서울판매부 설치 후 쌍방울표가 서울 대표 브랜드 독립문표와 무궁화표의 벽을 뚫고 서울에 안착하는데는 1년 이상 걸렸다. 이어 부산에 판매 거점을 마련한 쌍녕은 전국적으로 판매망을 확대해 나갔다. 1960년대 중후반들어 쌍방울이 전국적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 산업·기업
  • 김재호
  • 2010.04.29 23:02

[지역상품이 부자전북 만든다] (35)㈜세인푸드

진안·장수, 강원 횡성의 쌀과 임실 자연치즈가 어우러진 쌀피자. 기름기가 빠져 담백하고 고소한 순쌀 도우(dough·반죽)에 익산 단호박, 경기 여주 고구마 등을 얹어낸 피자는 그야말로 영양식이다. 전주시 인후동 ㈜세인푸드(대표 정희균)의 '미사랑 임실치즈피자'는 도우의 쫀득쫀득한 맛과 함께 참살이 피자로 각광받고 있다.현재 전국 60개 가맹점에서 매월 4만6000판의 피자를 생산하고 있다. 지난 2008년 92억원, 지난해 11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특히 ㈜세인푸드는 도내 기업이지만 60개 가맹점 중 46개가 서울·경기·대전·충남·충북·인천 등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산재, 지역 업체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다. 피자업계 최초로 순쌀 도우를 개발, 국내산 재료를 고집하고 도우를 반죽할 때도 채종유(카놀라유)를 사용해 트랜스지방을 예방한 점 등이 참살이 흐름과 맞아 떨어졌다.정 대표(43)는 "미사랑 임실치즈피자 한 판에는 쌀밥 2공기 반 분량의 쌀이 들어있어 어린이의 식사대용으로 손색이 없으며, 일부 소비자가 기존 밀가루 피자에서 느끼는 알레르기·아토피·소화불량·더부룩함 등의 문제점을 해결했다"면서 "피자소스는 인위적인 첨가물을 사용하지 않고 토마토와 10여종의 허브로 만들었고 저온숙성방식으로 쌀 도우를 숙성해 쫄깃함을 더했다"고 소개했다.지난 2006년 5월 12명의 직원이 모여 설립한 ㈜세인푸드는 7개월 뒤 바이전주 인증을 받았고 이듬해 소비자들의 권유로 바이전북 인증을 받았다. 지난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연속 한국프랜차이즈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산업·기업
  • 이세명
  • 2010.04.27 23:02
경제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