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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Pic] 이리역 폭발사고 39주년…'달콤 씁쓸' 11월 11일한국-이란 축구경기·'하춘화 리사이틀' 평온했던 날 / 이재민 1674세대…익산 시가지 재편 '아이러니'
김재호  |  jhkim@jjan.kr / 등록일 : 2016.11.10  / 최종수정 : 2016.11.11  17:29:32

11월 11일은 연인들,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빼빼로데이다. 좋아하는 지인들끼리 달콤한 초콜릿을 선물하며 우정과 사랑을 확인한다. 달달함,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러나 아쉽게도 어떤 이들에게는 11월 11일이 더는 낭만의 빼빼로데이가 아니다.

11월 11일은 농업인의 날이다. 농민들의 자부심을 고취하고, 농업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정부가 만든 법정기념일이다. 2006년부터는 이날에 ‘가래떡 데이’란 이름이 붙었다. 11월 11일이 가래떡 데이가 된 것은 쌀 수입과 쌀 소비 감소 등 영향으로 침체기에 빠진 쌀산업 보호 필요성이 갈수록 커진 탓이다. 가래떡 데이 단 하루만이라도 쌀로 만든 제품을 많이 소비해 달라는 농부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 안타깝고 우울한 날이다.

11월 11일은 또 천지를 뒤흔든 ‘이리역 폭발사고’가 발생한 날이다. 이 사고 또한 성장우선주의 대한민국에 만연했던 안전불감증, 부정부패의 소산이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사회가 반성하고 나아가야 할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다.

 

   
▲ 이리역 폭발사고로 역 구내가 웅덩이로 변하고 잔해만 남았다. 1977년 11월 12일 촬영.

 

당시 참사를 직접 겪은 익산 시민들로서는 꿈에서도 떠올리기 싫을 만큼 충격적이었던 이리역 폭발사고 39주년을 맞아 당시 사고를 되짚어 본다.

1977년 11월 11일 금요일 이리역(現 익산역)은 평온했다. 호남선과 전라선이 갈라서는 철도교통의 중심역으로 자리 잡은지라 여객열차와 화물열차가 전주역에 비해 훨씬 빈번했지만 역을 통과하는 열차들은 정해진 시간과 신호에 따라 목포로 가고, 서울로 갔다.
 

한국-이란 축구경기

이날 밤이다. 텔레비전에서는 월드컵 축구 한국과 이란 A매치가 생중계되고 있었다. 당시 한국축구는 이란에 크게 열세였다. 1974년 9월 테헤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이란과 첫 대결을 벌인 한국축구는 2대 0으로 완패했다. 그 3년 뒤인 77년 이날, 아르헨티나 월드컵 최종 예선 경기에서 만난 한국과 이란의 경기는 온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13만여 명의 이리 시민들도 상당수가 텔레비전 앞에서 축구경기를 보고 있었다. 이날 테헤란 원정경기에서 한국은 이영무 선수가 2골을 넣었지만 역시 2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삼남극장 하춘화 리사이틀

똑같은 시각, 이리역 코앞에 있는 이리시 창인동 삼남극장에서는 700여 명의 관객이 모인 가운데 인기 가수 하춘화 리사이틀이 열리고 있었다. 코미디언 이주일 사회로 진행된 이날 쇼에서 하춘화는 히트곡을 10분가량 부른 뒤 분장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주일 씨도 휴식하며 넥타이를 고쳐매고 있었다.

세상은 그렇게 평온했다.

밤 9시 15분 ‘꽈광 꽝!!!’

테헤란 축구경기장, 한국과 이란팀이 멍군장군하며 골을 주고받는 치열한 접전이었다. TV 앞에서 응원하던 시민들의 손에는 땀이 배었다. 3년 전 분패를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한국팀이 이란 골문을 향해 강슛을 날리고, TV 앞 시민들이 골인을 염원하며 환호성을 울리는 그 순간이었다.

“꽈광! 꽝! 꽝!...”

천지를 뒤흔드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천장과 벽이 무너지고 유리창이 깨져 파편이 튀었다. 평화롭게 축구경기를 시청하던 시민들은 안방에서, 가게에서, 사무실에서 아비규환에 빠졌다.

 

   
▲ 이리역 폭발사고 직후인 1977년 11월 12일, 이리역 인근 철인동 모습.

 

   
▲ 이리역 폭발사고로 주변 창인동 가옥이 전파되고 개만 홀로 남아있다. 1977년 11월 12일 촬영.

 

   
▲ 이리역 폭발로 창인동 등 주변 집들도 전파됐다. 1977년 11월 12일 촬영.

 

가수 하춘화의 히트곡 열창으로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른 삼남극장 안.

갑자기 ‘꽈광’하는 폭발음과 함께 2층 천장이 붕괴하면서 5명이 깔려 사망하고 100여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극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 하춘화 리사이틀 공연을 하고 있던 이리 시내 극장이 이리역 폭발사고로 무너져내렸다. 1977년 11월 12일 촬영.

 

하춘화 씨도 벽돌 파편에 맞아 어깨 부상을 당했고, 함께 있던 이주일 씨도 벽돌에 머리를 크게 다쳤다. 이주일 씨는 느닷없는 재난 현장에서 하춘화를 등에 업고 극장 밖으로 대피했다. 훗날 하춘화 씨는 “이주일 씨는 제 생명의 은인”이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당시 이주일 씨는 무명이었지만, 이리역 폭발사고 이후 인기 코미디언으로 크게 성공했다.
 

안전불감증

1977년 11월 9일 인천에서 화약류를 잔뜩 싣도 광주로 향하던 한국화약(주)(이 회사는 훗날 '한화'가 된다. '한국화약'을 두 글자로 줄여보자)의 화약열차는 10일 오전 11시 31분 이리역에 도착했다. 곧이어 1605호 화물열차에 중계됐고, 이리역 구내 4번 입환대기선(入換待期線)에 섰다. 화약류 등 위험물을 적재한 화물열차는 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곧바로 통과시켜야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리역 측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이른바 '급행료'와 연관돼 있다는 진술이 후에 나왔다.

한국화약 호송직원인 신무일 씨(당시 35세)는 화약 수송이 늦춰지자 역 앞에 있는 식당에서 술을 잔뜩 마신 뒤 화약열차 안에 촛불을 켠 다음 닭털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잤다. 발끝이 뜨거웠을까. 어느 순간 신무일은 잠을 깼다. 일어나보니 촛불이 넘어졌는지 침낭과 화약상자에 불이 붙은 것을 보았다. 깜짝 놀란 그는 화약열차 밖으로 뛰쳐나와 ‘불이야’를 외치며 힘껏 달아났다.

화약 호송 담당자인 그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화약열차 안에는 무려 30톤에 달하는 화약류가 실려 있다. 다이너마이트 상자가 914개나 실려 있다. 무려 22톤이다. 초산암모니아 상자도 200개(5톤)나 되고, 초안(硝安) 폭약 상자 100개(2톤), 뇌관상자 36개(1톤) 등을 합하면 모두 1250상자 30톤가량의 화약류다. 이게 한꺼번에 폭발하면….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화재를 진압하기는커녕 ‘불이야’를 외치고선 달아났다.
 

참혹한 현장

9시 15분, 어둠 속으로 도주하는 신무일 뒤에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수많은 파편이 튀어 날았고, 폭발 충격과 파편 등으로 현장 반경 8㎞가 쑥대밭이 되다시피 파괴됐다. 이리역에서 불과 700m 떨어진 창인동의 한 가옥에는 10톤이 넘는 기관차 몸통이 날아와 집을 박살 냈을 정도였다. 사고 후 모습을 드러낸 폭발 현장도 참혹했다. 깊이 10m, 직경 30m가 넘는 거대한 웅덩이가 생겼고, 화약열차와 함께 입환대기선에 서 있던 열차들은 폭발 충격으로 뒤집혔다. 철로는 잘리고 엿가락처럼 휘었고, 그 엿가락들이 곳곳으로 날아가 모든 것을 파괴해버렸다. 이는 1945년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600분의 1 정도 폭발력으로 추정됐다.

 

   
▲ 이리역 폭발사고로 역 구내에 있던 열차들이 부서져 잔해만 남아있다. 1977년 11월 12일 촬영.

 

   
▲ 폭발 위력으로 열차가 뒤집히고 날아가 바퀴만 남아 있다. 1977년 11월 12일 촬영.

 

폭발과 함께 발생한 정전으로 갑자기 암흑천지가 되자 놀란 시민들은 손전등과 양초 등을 동원해 부상자를 응급조치했다. 시내 곳곳에서 경보 사이렌이 울렸고, 사람들은 건물 밖으로 대피했다. 6·25전쟁이 다시 터졌나, 지진이 일어났나 싶어 시민들은 공포에 떨며 밤을 지새웠다.

이날 폭발사고 후 전라북도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사망 59명, 중상 185명, 경상 1158명 등으로 총 1402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이리역 근무 역무원과 열차 기관사는 물론 일반 시민들의 피해가 컸다. 가옥은 전파 811동, 반파 780동, 소파 6042동 피해로 집계됐다. 공공시설물을 포함한 재산피해 총액이 61억 원으로 파악됐다. 집을 잃고 모현동 일대에 마련된 천막생활을 하며 겨울을 나야 했던 이재민도 1674세대 7873명에 달했다.

 

   
▲ 이리역 폭발사고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의 천막촌 입촌식. 1977년 11월 25일 촬영.

 

 

 

 
▲ 이리역 폭발사고로 집을 잃은 시민들은 추운 겨울을 천막촌에서 보내야 했다.

 

신속한 복구 조치

폭발사고 후 당시 황인성 전북도지사는 전투복장으로 현장을 찾아 상황 파악 등 수습에 나섰고, 사고발생 1시간여 만인 10시 30분께 내무부에 상황 보고한 것으로 알려진다. 박정희 대통령도 이튿날 오전 육군 헬리콥터를 타고 이리에 도착, 도지사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았다. 정부의 복구 지원은 신속했다. 일요일인 11월 13일 최규하 국무총리 주재로 관계장관 회의를 개최했고, 청와대도 11월 19일 회의를 열어 신속한 복구지원을 결정했다. 육군 공병단이 투입되는 등 민관군이 신속한 복구에 힘을 모았다.

 

   
▲ 1977년 11월 15일, 이리 남성국민학교 교정에서 수많은 조문객이 모인 가운데 비명 속에 숨진 56명의 넋을 달래는 합동 위령제가 열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리시는 폭발사고로 처참하게 파괴됐기 때문에 복구사업을 통해 신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리역이 신축됐고, 중앙동 간선도로가 4차선으로 뚫렸다. 모현동에는 1180세대 규모의 주공아파트가 들어섰다. 이 아파트는 2010년 재건축됐다. 사고 1년여 만에 140억 원이 투입돼 이리시는 그나마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 이재민들의 새 보금자리인 모현아파트 입주식이 이리역 폭발사고 8개월만에 거행됐다. 1978년 7월 8일 촬영.

 

솜방망이 처벌

신무일은 도주했다가 시민들에게 붙잡혀 경찰에 인계됐다. 그는 1978년 2월 24일 전주지법 군산지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화약열차를 역 구내에 대기시킨 철도 직원은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부안 위도 서해훼리호 사고, 전남 진도 앞바다 세월호 사고와 다를 바 없는 인재였다. 화약류는 통과시키고 역 구내에 두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화약호송담당자가 만취상태에서 화약상자 위에 촛불을 켜둔 채 곯아떨어졌다. 실화 혐의 등으로 기소된 신무일은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냈음에도 불구, 징역 10년을 받았을 뿐이다.
 

KTX 익산역으로 거듭나다

이리역은 1912년 3월 6일, 대전~이리 간 호남선과 군산선 개통을 계기로 문을 열었다. 1929년 9월 준공된 역사는 이리역폭발사고로 무너졌고, 1978년 11월 10일 새 역사가 준공됐다.

 

   
▲ 이리역 폭발사고 1년 만에 새 역사가 준공됐다. 1978년 11월 10일 촬영.

 

   
▲ 이리역 폭발사고 1주년, 새 역사 준공식이 열린 가운데 참석한 관계자들이 준공 테이프를 끊고 있다.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당시 '큰영애'로 불림)의 모습이 보인다. 뒤로 보이는 건물들이 죄다 공사 중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리시와 익산군 통합으로 역명이 1995년 9월 1일부터 ‘익산역’으로 바뀌었다. 2008년 장항선 종착역이 군산역에서 익산역으로 바뀌면서 익산역은 충청 서부지역을 경유하는 상행선을 확보하게 됐다. 또 KTX 시대에 맞춰 진행된 신역사가 2015년 9월30일 준공됐다.

 

   
▲ 현재 익산역의 모습. 2016년 8월 30일 촬영. 권혁일 기자

 

   
▲ 현재 익산역의 모습. 2016년 8월 30일 촬영. 권혁일 기자

 

   
▲ 익산역 플랫폼에 KTX산천 열차가 멈춰 있다. 2016년 8월 30일 촬영. 권혁일 기자

 

   
▲ 익산역 장항선 플랫폼에서 바라본 모현 e편한세상 아파트. 1978년 지어진 모현 주공아파트 자리에 재건축된 것이다. 권혁일 기자


2015년 4월 2일 고속열차(KTX) 호남선이 개통, 익산역은 초고속열차 시대를 맞았다. 익산역에서 출발한 KTX는 용산역까지 1시간6분만에 주파한다. 이어 오는 12월에는 수서발 고속열차(SRT)가 개통된다. 이에 따라 익산역은 용산발 23회, 수서발 20회 등 모두 43회의 호남선, 그리고 14회의 전라선 고속열차가 통과하는 중심역으로 우뚝 서게 됐다.
 

국민의 고향역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이쁜이 꽃분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익산역은 순창 출신의 작곡가 임종수 선생이 학창시절에 황등역과 익산역을 오가며 통학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지은 대중가요 ‘고향역’에 얽힌 사연으로도 유명해졌다. 익산역 측은 수년 전부터 플랫폼에 ‘고향역’ 노래를 흘려보내며 국민 애창곡이 된 ‘고향역’의 본향임을 알리고 있다. 역 광장에는 고향역 노래비도 건립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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