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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② 춘포역] 넓은 들녘 보며 가을 기다리던 봄나루 역국내 가장 오래된 역사…한때 하루 200명 이용 / 전라선 복선 전철화 완료되며 철로·플랫폼 철거 / 일제 강점기 '호소카와 농장' 수탈의 역사 간직
전북일보   |  desk@jjan.kr / 등록일 : 2017.02.17  / 최종수정 : 2017.05.03  18:02:30
   
▲ 3일 오후, KTX가 춘포역을 스쳐 지나가고 있다. 권혁일 기자

 

햇볕이 따뜻하던 지난 3일, 익산시 춘포면.111번 버스가 10~20분 간격으로 멈췄다 가는 버스정류장을 끼고 돌아 빛바랜 아스팔트가 두툼한 이불처럼 깔린 길로 들어섰다. 마찬가지로 빛이 바랜 만국기가 공중에 걸려 있고, 저 멀리 소나무 위로 빼꼼 고개를 내민, 역시 빛바랜 옥색 역사(驛舍)지붕이 보인다.그 저채도의 풍경 위로 채도 높은 녹색과 연두색의 방음벽을 두른 고가철도가 지난다. 언뜻 수도권 도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선하역사(線下驛舍)처럼도 보이지만, 역사와 철로 사이엔 이제 어떤 접점도 없다. 철로는 역사에 눈길 한 번 주지도 않고 그대로 지나친다.춘포역은 그런 풍경 속에 서 있었다.

 

   
▲ 지난 3일, 춘포역 찾아가는 길. 멀리 빛바랜 만국기가 걸려 있고, 그 뒤로 춘포역사가 있다. 그 뒤로 지나가는 것은 전라선 철도다. 권혁일 기자

 

만경강 물이 만든
대장촌

한자로 봄 춘에 물가 포를 쓰는 춘포(春浦)는 우리말 이름 ‘봄개’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개’는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뜻하는데, 그래서 ‘봄 나루’ 또는 ‘봄개 나루’라고도 한다.
이 일대는 일제 강점기부터 20여 년 전까지는 ‘대장촌(大場村)’이라고도 불렸는데, 큰 대에 마당 장을 붙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춘포지역은 야트막한 구릉 하나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사방이 훤히 뚫려 있는 평야 지대다.
‘산 비슷한 것’이라고 해봐야 북동쪽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봉개산’이 전부고, 춘포면 중심지는 만경강 제방에 올라서면 훤히 내다볼 수 있다.

 

   
▲ 지평선이 참 반듯하다. 넓고 평탄한 춘포지역 농경지. 권혁일 기자


춘포면의 남쪽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 흐르는 만경강은 춘포 지역의 정체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애초 ‘개’, ‘나루’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 자체가 만경강을 떼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고, ‘대장’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큼 넓고 평탄한 들녘은 만경강 물이 쉬지 않고 흙을 날라 쌓아 만든 것이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만경강’이라는 이름 또한 ‘논 100만 이랑’에서 온 것이니, 만경강의 정체성 또한 춘포에서 얻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본다. 원래는 모래 사(沙) 자를 써 ‘사수’, ‘사탄’ 등으로 불리던 것이 일제 강점기에 ‘만경강’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넓고 비옥한 땅이 일본인들 눈에 띄지 않았을 리가 없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일본인들이 정착하며 이 지역에 붙인 이름이 ‘대장촌’이다. 대장촌은 우리식 독음이고, 그들은 ‘오오바무라’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춘포 지역을 만든 것이 또 하나 있다.

 

한국 최고(最古)의 역
춘포역


“여 근방이 왜정 때 만들어진 거여. 사람들도 원래 여기 살던 게 아니고 다 객지에서 와서 정착한 거여. 지금이사 3세대까지 있지만. 저 뒤쪽 마을도 원래는 없었어.”

춘포역에 대해 질문하자, 마을 주민 양기만 씨(60)의 입에서는 그가 어머님께 들은 이야기부터 본인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이야기까지, 옛날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1914년, 전라선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가 개통하면서 춘포역도 문을 열었다. 개통 당시의 이름은 대장역. ‘춘포역’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1996년이다.
옥색 슬레이트 지붕이 얹어진 작은 역사(驛舍)와 화장실 건물, 역사 앞 소나무 한 그루와 공터 정도가 전부인 이 소박한 역은, 몇 되지 않는 ‘전라선 원년멤버’다.

 

   
▲ 역 광장 소나무 앞에서 몸을 낮추고 바라본 춘포역사. 권혁일 기자


또 춘포역사는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철도역사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우리나라에서 춘포역사보다 오래된 철도역사는 없다.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에 등록문화재 제210호로 지정됐는데, 같은 날 군산 임피역사도 등록문화재 제208호로 지정됐다. 닮은꼴인 두 건물이 나란히 ‘가장 오래된 역사’와 ‘두 번째로 오래된 역사’다.

 

   
▲ 옛날 플랫폼과 선로가 있던 자리에서 바라본 춘포역사. 그 모습이 군산 임피역과 흡사하다. 권혁일 기자

 

역이 들어서고, 역이 들어서니 사람이 모인다. ‘대장촌’은 그렇게 형성됐다.
광복 이후에도 1960년대 ‘만경강 모래찜’이 유명하던 시절에는 하루 150~200명씩 춘포역을 이용했고, 익산 지역에서 섬유산업이 발달한 1970년대에는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이 역을 통해 출퇴근하곤 했다.
1978년 철도통계연보에 기록된 1977년 실적을 보면, 그해 춘포역(대장역) 승하차 인원은 무려 29만9022명.
전라선 전북 구간 21개 역(익산역 제외) 가운데 전주·남원·동이리(동익산)·덕진·오수·삼례역에 이어 7번째로 많은 인원이 이용한 것인데, 같은 해 19만2078명이 이용한 관촌역이나 18만4839명이 이용한 임실역보다도 10만 명 이상 많은 기록이다.

 

   
▲ 춘포역사. 권혁일 기자

 

그러나 도로교통이 발달하면서 춘포역의 수요는 점차 줄었다.
열차가 서던 마지막 해인 2007년 한 해 이곳에서 열차를 탄 사람은 132명, 내린 사람은 159명. 그래서 이용객 합이 291명이었다.
양 씨는 “요즘은 교통이 좋으니까 개의치 않는다”면서, “자가용 승용차나 버스를 타면 된다”고 말했다. 하긴, 익산과 삼례를 잇는 111번 버스가 면소재지 중심을 10~20분 간격으로 가로질러 가는데 구태여 기차를 고집할 이유도 없긴 하겠다.

그렇게, 춘포역은 지금은 열차가 서지 않는, 아니 열차가 서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역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2011년, 전라선 복선전철화가 완료되며 철길은 콘크리트 구조물 위로 올라갔고, 춘포역 구내의 철길과 플랫폼은 흔적도 없이 철거됐다. 철길이 베고 누워 있던 침목은 뽑혀 나뒹굴다가 역 광장 가장자리의 연석이 되었다.

 

   
▲ 3일 오후, 무궁화호 열차 한 편성이 동쪽 삼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춘포역 구내의 옛 철길은 모두 걷힌 지 오래라 ‘위험한 철길로 다니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무색하다. 권혁일 기자

 

   
▲ 춘포역 플랫폼 자리에서 북서쪽 동익산 방향을 바라본 모습. 권혁일 기자

 

   
▲ 3일 춘포역 플랫폼 자리에서 동쪽 삼례 방향을 바라본 모습. 옛 철길과 플랫폼은 흔적도 없다. 바닥에 깔린 자갈이나 모래도 나중에 새로 채워 넣은 것이다. 권혁일 기자

 

그래도 역사는 잘 보존돼 있다. 안에는 춘포 지역의 역사(歷史)에 관한 내용이 정리돼 있고, 역무원실이었던 공간은 일종의 작은 도서관처럼 꾸며져 있다.
건물 자체가 작으니 볼거리가 많지는 않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소박한 맛이 있다.
2007년까지 운행되고 이후 자취를 감춘 군산~전주 간 통근열차 시각·운임표가 그대로 걸려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 춘포역사 내부. 권혁일 기자

 

   
▲ 춘포역사 내부. 권혁일 기자


역은 이제 지역 문화 거점으로서의 기능도 맡고 있다. 익산문화재단이 진행하고 있는 ‘근대문화유산 박물관 춘포’ 사업이 주민들에게 호응을 얻으면서다.
해당 사업을 맡고 있는 익산문화재단 예술지원팀의 김지은 씨는

“체험 행사를 하니까 주민들이 모이고, 주민들이 모이니까 ‘춘포역이 어떻게 바뀌면 좋겠다’ 하는 이야기들이 나왔죠. 역사 앞 주차장도 그 과정을 통해서 조성할 수 있었어요. 일단 주민들이 모이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역사(驛舍)가 항상 열려있는 것은 아닌데, 아무래도 이곳을 관리하는 익산문화재단의 인력이 모자라는 탓이다. 물론 그냥 겉만 보고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역사에 명예역장·익산문화재단·춘포면사무소 연락처가 붙어 있으니 문이 잠겨 있다면 이 연락처로 문의해보자.
김지은 씨는 “올해 목표가 상시 개방이라며, 상시 개방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농장, 정미소, 역…
결국 '한 덩어리'

춘포역에서 나와 사거리를 지나 남쪽으로 쭉 걷다 보면 높은 둑이 저 앞에 보인다.
그 둑을 한 100m쯤 남겨놓고 붉은 벽돌과 푸른 기와가 인상적인 농어촌공사 춘포지소 건물(일제 강점기 당시 우정국 건물)을 낀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걷는다.
마치 작은 성(城)처럼도 보이는 일본풍 건물, 이른바 ‘에토 가옥’이 눈에 들어온다.
둘러져 있는 높은 울타리 뒤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온다. 소리만 들어봐도 개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 이른바 ‘에토 가옥’으로 불리는 건물. 1940년대에 지어졌다. 권혁일 기자


일제 강점기에 이 지역은 대지주 호소카와(細川) 가문의 농장이었는데, 1940년대에 지어진 이 건물은 당시 농장에 소속된 에토(江藤)라는 사람이 살던 집이라고 한다. 춘포역과 같은 날 등록문화재 제211호로 지정됐다.
주민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군산 ‘히로쓰 가옥’처럼 마음대로 들어가거나 할 수는 없지만, 행사가 있거나 할 때 가끔씩 개방되기도 한다고.

그런데 호소카와? 어쩐지 이름이 익다. 바로 일본의 자민당 독주 체제를 끝내고 총리가 되었고 총리 시절 “과거 침략 행위와 식민 지배에 깊이 반성하며 사과한다”고 말했던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이 농장 창업주의 손자다.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지난 2014년, ‘탈 원전’을 내걸고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하기도 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지지하고 나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춘포 지역에는 1920년대에 지어진 ‘김성철 가옥’이라는 옛 건물도 남아 있다.
농어촌공사 건물 사거리에서 에토 가옥의 반대편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집인데, 마당의 일본식 정원이 특징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일반에 개방되지 않기 때문에 들어가서 볼 수는 없다.
이 집을 그나마 볼 수 있는 방법이라면 만경강 둑 위에 올라가서 보는 정도가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보더라도 잘 보이지는 않는다.

김성철은 일제 강점기에는 호소카와 농장의 직원이었고 광복 이후 60년대에는 익산을 지역구로 삼아 국회의원(제6대·7대)을 지내기도 한 인물이다. 지난 2004년 별세했다.

 

   
▲ 만경강 둑에서 내다본 '김성철 가옥'. 권혁일 기자

 

호소카와 농장의 유산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김성철 가옥 주변의 골목길로 들어가면 허름한 공장 같은 건물을 찾을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호소카와 도정공장’이었던 ‘대장 정미소’로,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전에 한 차례 도정 작업을 거쳐 무게와 부피를 줄이는 역할을 했다.
1914년에 지어졌는데, 그러니까 춘포역과 동갑이다.
농장에서 나온 곡식은 이 정미소에서 도정을 거쳐 춘포역에서 전라선, 군산선 열차를 타고 군산항에 가 일본으로 날라졌을 것이다.
만경강 제방에 올라서면 한눈에 볼 수 있는 이 풍경들이, 결국은 전부 한 덩어리다.

 

   
▲ 대장 정미소. 3일 취재팀이 찾았을 때는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권혁일 기자

 

   
▲ 대장 정미소의 철문 사이로 들여다 본 대장 정미소. 권혁일 기자

 

   
▲ 대장 정미소. 권혁일 기자

 

익산문화재단은 춘포역을 기점으로 농어촌공사 건물과 에토 가옥, 만경강 둑방길, 대장 정미소 등을 한 바퀴 도는 트래킹 행사를 이따금씩 연다. 그 밀도가 군산의 근대역사문화거리와 비견할 만하다.
다만 느낌은 조금 다르다. 군산이 ‘근대 도시’ 느낌이라면, 춘포는 같은 ‘근대’라고 해도 도시적인 느낌은 덜하고, 묘하게 목가적인 분위기마저 든다.
익산시 관계자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군산은 아무래도 수탈된 양곡을 반출하는 항구였고, 그래서 여러 건물이나 세관 같은 것이 남아있죠. 반면에 여기는 수탈이 이뤄지던 곳이고 농장이었으니까 조금 다르죠.”
   
▲ 만경강 둑에서 볼 수 있는 투명 안내판. 실제 위치에 겹쳐 볼 수 있다. 권혁일 기자

 

   
▲ 이렇게 고양이와 그 고양이를 따라다니는 강아지도 있고. 권혁일 기자

 

제방 위 그 자리에서 뒤로 돌면 만경강이 흐르고 있고, 그 건너편은 전주시 덕진구와 김제시 백구면이다. 또 행정구역상으로 춘포면에 속하는 구담마을도 강 건너편이다. 직강화 공사 이전, 옛 만경강 물길의 흔적이다.
‘조류 인플루엔자(AI) 방역을 위해 출입을 자제해 달라’는 내용의 현수막 뒤로 넓은 둔치가 눈에 들어온다. 한쪽에는 키가 꽤 커 보이는 억새들도 몸을 흔들고 있다.

 

   
▲ 조류 인플루엔자(AI) 방역을 위해 만경강 변 출입을 자제하라는 현수막인데, 강변으로 내려가는 길이 막혀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소 허술해 보인다. 권혁일 기자

 

   
▲ 새로 놓인 만경강 다리 위에서 바라본 만경강. 멀리 삼례 지역의 건물들이 보인다. 권혁일 기자


그 옛날 전국 각지에서 모래찜질을 하러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는 만경강 변은 고요했다. 다만 멀리 새들만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시선을 쭉 이어나가니 뿌연 공기 가운데서 높은 건물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완주군 삼례읍이다.
저 멀리 보이는 전라선 철길로 열차 한 편성이 삼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권혁일 기자

 

필름 속 추억으로 남은 ‘춘포 모래찜’
“춘포 모래찜질은 신경통에 도움을 주고 혈액순환에도 좋다고 소문이 나서 유명해졌다. 민물과 짠물이 섞이는 이곳은 하얀 백모래가 깔려있고 조수물과 민물이 드나들면서 모래에 짠물 염기가 있어서 몸 전체에 바르고 땀을 빼고 나면 몸이 가뿐해졌다.” (익산문화재단 ‘춘포 백년, 사람 이야기’ 中)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넘어갈 무렵, 1960년대 춘포역은 ‘만경강 모래찜’을 즐기기 위해 찾아온 발길이 이어져 문전성시를 이뤘다.
만경강 변 모래로 찜질을 하면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가 입소문을 타고 퍼져 전라도·충청도 일대에서 인파가 몰렸다는 것이다. 덕분에 돈을 받고 모래밭에 구덩이를 대신 파주는 아르바이트도 유행했다고 한다.

그 당시 모래찜 인파를 상대로 3원, 5원씩 받고 ‘물장수’를 했다는 한 주민은 “지금은 논밭뿐이지만 50~60년 전에는 모래찜질하려고 여기를 참 많이들 찾아와 역 앞이 사람들로 빼곡했다”“그땐 전주 3공단 없을 때라 물도 맑았다”고 설명했다.

 

   
▲ 모래찜질을 하러 만경강 변에 모여든 인파. 1965년 6월 1일 촬영. 전북일보 자료사진


지금은 만경강 하류에 놓인 농업용 보의 영향으로 이 일대에서 하얀 자태를 뽐내며 반짝거리는 모래사장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남아 있는 흑백 자료사진을 보며 당시 풍경을 머릿속에 그려볼 뿐이다.

익산문화재단 문화예술사무국 예술지원팀 김지은 씨는 “춘포 주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동참해준 덕분에 ‘근대문화유산 박물관 춘포’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기회가 되면 ‘춘포 모래찜’과 같이 춘포역과 관련된 이야기와 사진을 모아 많은 사람들이 알도록 전시하고 싶다”고 밝혔다.

간혹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한가로운 날이면 가족·연인과 주고받던 모래 장난에 웃음꽃 피던 때가 떠오르는 분들도 있겠다. 그렇게 춘포역이 간직한 작은 추억 하나는 할머니·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 보따리 속에 자리 잡았다.

김태경 기자

 

   
▲ 일러스트=이권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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