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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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 찾기 나선 이인철 전북체육발전연구원장 "기록 수집·과거 돌아보는 일 게을리 한 대가 크다"
김은정 기자  |  kimej@jjan.kr / 등록일 : 2017.03.30  / 최종수정 : 2017.03.30  23:32:20
   
▲ 이인철 전북체육발전연구원 원장이 소장하고 있는 지역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고 있다. 안봉주 기자
 

3월 초, 전주시청 로비에서 흥미로운 전시회가 열렸다. ‘전주의 기억’을 내세운 이 전시회는 시민들이 소장했던 다양한 기록물과 근현대 전주의 사료들로 관객들을 불러 들였다. 역사가 단지 과거가 아니라면, 그 지나간 역사가 오늘을 있게 하고 또한 우리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면 그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내려고 하는 노력은 치열해질수록 의미 있는 일이다. 지나간 시대의 기록은 오늘의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바로 그 통로다.

이 전시회에서 눈길을 모았던 자료가 있었다. 원로 체육인 이인철 전북체육발전연구원 원장이 소장한 자료로 엮여진 특별전시회였다. 지역의 근현대 역사와 체육의 역사가 관객들을 만난 자리, 이 귀한 기록물을 소장하고 있는 그에게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원장은 그동안에도 여러 차례 전시회를 통해 지역 근현대사의 증거(?)를 우리 앞에 내놓았었다. 오래전부터 지역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도 아닌 그가 지역의 역사와 지나간 시대의 기록과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

이인철 원장(88)을 만났다. 올해 미수를 맞았지만 그는 여전히 젊다. 꼿꼿한 자세에 정갈한 수트를 차려입은 그로부터 물리적 나이를 짐작하는 일은 어렵다. 그 뿐인가. 놀라울 정도의 기억력과 막힘없는 언변은 그의 일상이 얼마나 큰 활력으로 차있겠는가를 짐작케하고도 남는다.

그는 25년 전, 전주종합경기장 안에 전북체육발전연구원을 개설했다. 체육 분야는 물론, 지역의 역사부터 생활문화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록과 자료를 주목해 수집하고 정리해온 그의 삶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곳이다.

인터뷰는 온갖 자료들이 빼곡히 들어차있는 연구원에서 있었다. 여기 저기 쌓여있는 자료들은 나름대로 질서를 갖고 있는 듯 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이 원장은 끊임없이 자료를 가져와 소개했다.

“역사는 기록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기록의 소중함을 잊고 살았어요. 안타까운 일이지요. 전공자도 아니고 지식도 깊지 않은 내가 해온 일은 사실 단순합니다. 뒤돌아보면 순전히 개인적 취미로 해온 일인데 그래도 그 결실이 지역사를 바로 찾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한 일이죠. 후학들을 위해 무엇인가 기여하고 싶다는 바람이 작게라도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 그것만으로도 보람 있습니다.”

그의 공간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기억의 증거’들은 이제 곧 역사가 될 것이다.

-자료가 많습니다. 직접 정리하시나요.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모았던 것들인데 어느 때부터인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쌓이게 되었어요. 그냥 방치하면 정리하기 더 어려워지니 나름대로 분류를 해놓는 정도입니다.”

-체육발전연구원이란 문패가 무색할 정도로 얼핏 보기로도 역사적 자료가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었습니까.

“젊은 시절에 운동을 했었어요. 52년도니 꽤 오래전 일인데 사격을 했었죠. 제가 전북사격선수 1호입니다. 체육 분야에서 활동하다보니 문학이나 미술 등 문화 쪽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과 교류가 있었어요. 자연히 취미가 생기더군요. 지역의 문화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여러 통로로 만나는 역사적인 자료를 보며 나중에 후진들에게 좋은 양식이 되지 않겠는가 싶었어요.”

-개인적인 취미로 시작하신 일이겠습니다.

“그렇긴 한데, 한편으로는 이제 고향이 되어버린 이 지역에 봉사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면서 얻은 일이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이런 자료들이 기여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자료 수집은 언제부터 시작하셨습니까.

“1955년 즈음이었던 것 같아요. 50년 전후로 험한 상황이었었잖아요. 그때 시대정신이나 역사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1957년에 ‘야화지 사건’이라는 필화 사건이 일어났어요. 〈야담과 실화〉란 월간지에 조영암이란 작가가 이 지역 사람들과 특성을 매우 악랄하게 폄훼해 글을 썼습니다. 그대로 둘 수 없어 잘 아는 신문기자에게 이야기하고 언론을 통해 보도 될 수 있게 했어요. 도민 궐기대회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일이 아주 커졌지요. 그런 일을 겪으면서 지역의 역사를 바로 알려줄 증거들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료 수집은 그래서 시작했어요.”

-역사의식이 투철하셨군요.(웃음)

“당시에는 경찰에 몸담고 있었는데, 역사적 소용돌이에 놓인 국가를 위해 젊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고했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자료 수집을 하기 시작했고, 공적으로는 당시 신문기자였던 전영래씨와 도모해 청년회의소를 만들었어요. 지금은 사업가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고 있는 ‘JC’ 전신이지요. 이를테면 청년운동의 씨앗을 만든 겁니다.”

-자료가 다양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역사 분야 사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역사 분야가 많아요. 특히 일제 강점기에 관한 기록이 집중적으로 많죠. 일제 때 빼앗기거나 묻혀버린 사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리 멀지 않은, 아직은 그 역사를 경험한 세대들이 생존해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대 역사의 많은 부분이 왜곡되거나 폄훼되어있습니다.”

-전주부사 완역을 주도하셨던데요.

“전주부사 번역은 일제강점기 역사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또 다른 왜곡을 가져오는 상황을 알게 된 후에 가장 큰 과제로 안고 있었던 작업이었습니다. 전주의 역사와 문화 자산은 조선시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유산의 대부분이 일제 강점기에 파괴되었죠. 전주부사는 비록 일본인들에 의해 쓰인 것이지만 전주의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번역의 의미는 거기 있습니다.”

-전통문화도시로서의 정체성을 미래의 가장 큰 유산으로 삼고 있는 전주로서는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바로 찾는 일이 절실하다는 말씀이군요.

“물론입니다. 그런 점에서 전주부사 번역 말고도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일본에 구성되어 있는 ‘전주회’를 통해 그 당시의 기록과 기억을 찾는 일입니다.”

-전주회는 전주 출신 모임인가요.

“맞습니다. 전주회는 전주에 연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에요. 처음에는 전주에서 태어났거나 살았던 사람들이 모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후손들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오래전부터 여러 통로를 통해 642명 회원 명단을 알아내 모든 회원에게 편지를 썼었어요. 6~7년 전의 일인데, 그중 420통이 되돌아왔어요. 그렇다면 나머지는 전달되었다는 것 아니겠어요. 기대를 갖고 몇몇 사람들과는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는데 개인의 힘으로는 지속하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끝내 중단되고 말았는데, 언젠가는 누군가 꼭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습니까.

“많지는 않지만 일본 지역에 살고 있는 전주 출신들을 확인한 것도 성과랄 수 있겠지요. 후속작업이 이어진다면 좋은 자료가 될 겁니다.”

-전주부사 번역 이후로도 많은 일을 하셨지요.

“요즈음 K스포츠재단이 화제인데, 얼마 전에 그 전신인 〈체육육성기금〉에서 제가 갖고 있던 자료를 모아 체육사 책을 만들었어요. 20만권을 제작해 전국적으로 배포했는데 귀한 사진 자료나 기록을 거의 망라했지요. 체육사의 한편을 정리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전주부사 번역 이후 전주부사에 실린 사진만으로 재밌는 이야기책을 만드셨던데요.

“도시의 기억을 찾는 일의 중요한 통로가 된 작업입니다. 단순한 사료만으로 설명되어지던 수많은 역사적 유산들이 새롭게 가치를 더하거나 제대로 확인되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사진이 갖는 힘은 증거의 가치를 더하는데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진행하시는 작업이 궁금합니다.

“남북분단의 불행한 민족사를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6·25 민간인 학살조사연구회’ 사업인데요. 1950년 9월 26일, 전주를 점령한 인민군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수감자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사건이 있었어요. 그들 중 300여명은 가족들에게로 돌아갔는데 175명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습니다. 전주 효자공원묘지에 합동 안장되어 있어요. 당시 보도연맹 사건 등 인민군들이 남한에 들어와 반동분자라고 내세워 학살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알려진 것만으로도 5900명이 넘지 않습니까. 그중 80% 정도가 전라남북도 사람들일 겁니다. 통탄할 일이지요. 그렇다고 좌익들은 안 당했나요. 11사단의 양민 학살도 대단했지요. 통일을 이야기하면서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에 대한 추모제나 그 진상을 밝히는 일을 묻어둔다면 그것은 또 다른 역사적 죄를 짓는 일이예요. 비극적인 이 역사를 정리하는 일을 전라북도에서 먼저 시작하자는 겁니다. 〈6.25 피살자 묘역 사업〉은 그 첫걸음이죠.”

-특별히 이 문제에 주목한 이유가 있습니까.

“북한에서 넘어와 경찰공무원이 되었는데 첫 부임지가 전주였어요. 당시 전주형무소에 쌓여있던 시체를 보았었는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큰 충격으로 안겨 있습니다.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사건’ 규명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지요.”

-지난해에 희생자 추모비가 제막됐죠.

“추모비는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사건을 규명하는 사회적 공론을 시작하는 자리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기록을 찾는 일이나 학살현장 발굴 사업 등 해나가야 할 일이 많지만 이제 본격적인 걸음을 뗐으니 정부와 자치단체의 관심이 더해진다면 잘 진행되리라고 믿습니다.”

-자료 수집 뿐 아니라 실제로 역사를 규명하는 일에까지 나서는 일이 쉽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긴 한데 이런 세월을 보내다보니 이제는 일상이 되었어요. 지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막힌 곳의 물꼬를 찾아내는 일은 우선 자료가 바탕이 되죠. 다행히 50년대부터 별 의무감 없이 수집해온 자료들이 연구자들에게도 좋은 사료가 된다니 즐거운 일입니다.”

-이즈음 각 자치단체들마다 도시의 역사를 찾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록의 중요성을 이제 새롭게 깨닫는 것이겠죠.

“실제 제가 갖고 있는 자료 전시로 여러 도시들을 갈 기회가 있는데, 그 관심이 놀라울 정도로 높습니다. 기록하는 일, 그리고 그 기록을 수집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해왔으면 아마도 우리사회가 이런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기록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리고, 과거를 돌아보는 일에 게을리 했던 대가가 참으로 큽니다.”

-그런데 이런 자료들은 어떻게 수집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자료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 이후에는 사진 한 장이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합니다. 여러 해를 걸려 사진 한 장 구한 경험도 있어요. 그러다보니 이 사람이 자료를 많이 갖고 있다더라, 혹은 찾는다더라 하는 소문이 퍼져 먼저 제공해오는 고마운 분들도 있습니다.”

-건강은 어떻습니까.

“아주 좋습니다. 아침 9시면 출근해 6시에 퇴근합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빠짐없이 주 5일 정상 출퇴근하며 지냅니다. 주말에는 책을 보죠. 아직도 여러 가지 할일이 있다고 생각하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즈음은 어떤 책을 읽으십니까.

“역사책을 많이 읽는 편이예요. 지금은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이 문제가 되니 잊지 않으려면 스스로 책을 읽는 수밖에 없어요.”

그는 ‘전직 경찰’출신이다. 수많은 직업을 거쳤지만 그에게는 20대, 딱 10년 몸담았던 ‘경찰’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남북전쟁으로 어수선했던 시절, 사찰을 주로 다루는 부서에 근무했던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투철한 반공주의자이면서도 이념에 대해 뚜렷한 철학을 갖고 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사회주의자였던 김철수 선생이 있습니다. 그 어른은 오염되어 가는 사회주의를 지키려했던 분이예요. 사회주의를 단순한 ‘빨갱이’라는 개념과 혼돈하면 안 됩니다. 나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답게 살아야 하는가를 연구’하는 것이 사회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에 대한 관점이 다를 뿐이지요.”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 그가 수집한 기록이 가치를 더하는 이유도 거기 있겠다 싶었다.

● [이인철 원장은] 북한서 넘어와 '전북체육 역사 산증인'으로

   

이인철 원장은 1929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정미소를 운영했던 부모님은 기독교를 신앙으로 삼았다.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북한에서 그의 집안은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 역시 철원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민주청년동맹에서 활동했으나 숙청 대상으로 감시 받는 삶을 견디지 못해 목숨 걸고 삼팔선을 넘었다. 오갈 데 없이 혈혈단신이었던 그는 명동성당 옆에 움막에서 살면서 배추장사, 미군부대의 깡통장사, 군밤장사 등 온갖 잡일로 생계를 꾸렸다.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현실은 막막했다. 탈출해온 이듬해 6·25전쟁이 났다. 남아 있는 가족들이 피난을 왔지만 아버지는 오지 못했다. 철원노동당사 폭파 계획에 연루되어 총살을 당했다는 것을 가족들로부터 들었다.

전쟁이 났으니 무조건 도망쳐야했다. 군대에 가려했으나 피난 가는 길에 트럭에 실려 학도병으로 끌려가는 학생들을 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우연히 〈북한 진주 경찰관 모집〉에 응시해 합격했다. 대구에서 경찰관이 되었지만 전라북도 경찰국으로 배속됐다. 1950년 가을, 전주로 오면서 그는 전주사람이 됐다.

무주경찰서와 전주경찰서에서 근무했던 그는 정치문화반장, 사찰반장 등을 거쳤다. 사찰 업무를 주로 했지만 원칙과 상식으로 일하고 싶었다. 엄혹한 시절, 정부에서 부역자를 처리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인민군 치하에서 부역했던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어 관리하는 업무가 맡겨졌다. 그의 관리대상이던 부역자 명단을 갖고 사찰(?)을 하다 보니 이 명단이 억지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저 밥 먹고 살기 위해 잠시 동원되었던 억울한 사람들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단을 없애 더 이상 사찰을 할 수 없게 만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경찰로는 꼭 10년을 일했다. 3.15부정선거 사태로 책임자를 정하면서 이유도 없이 직분 때문에 엮여 옷을 벗었다. 퇴직금 한 푼 없이 쫓겨난 뒤 살길이 막막했다. 그때 그를 먹여 살린 사람들은 그의 사찰 대상이었던 남부시장 상인들이었다. 여러 해 남부시장에서 장사꾼으로 살았던 그는 전주의 한 산소 제조공장 상무로 취직이 되었다. 그의 경영 능력을 주위 사람들이 눈여겨보았다. 경영자로서 삶이 시작되었다. 전북연탄의 전신인 ‘일자표 연탄’ 사장을 거쳐 부산과 인천 등지의 규모 있는 회사 임원으로 발탁돼 근무했다. 80년 광주항쟁이 나자 광주 출신들이 운영했던 그의 회사는 부도가 났다. 그 책임을 그가 져야 했다. 전주로 돌아왔을 때 집도 경매로 넘어가고 거처할 집한칸 마련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비닐하우스를 짓고 아내와 꽃가게를 차렸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92년 전북체육발전연구원을 설립했다. 지역을 위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결과였다. 그 뒤 25년, 그는 지역사를 바로 찾는 일에 나섰다. 50년대부터 이어온 자료 수집이 큰 힘이 되었다. 〈실록전북체육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체육사〉를 발간했으며 〈전주부사〉를 번역해 일제강점기 전주의 역사를 기억해내는 통로를 만들었다.

전라북도 체육회 상임고문, 전주시 통합체육회 상임고문 등을 맡고 있는 그는 전북체육사의 산증인이다. 크고 작은 지역사 연구에 발 벗고 나선 지금은 지인들이 ‘이 박사’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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