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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Pic] 6월 민주항쟁, 30년 전 그날은…
김재호 기자  |  jhkim@jjan.kr / 등록일 : 2017.06.09  / 최종수정 : 2017.06.26  14:50:18

1980년 봄에 피로 얼룩진 디딤돌을 놓았다. 7년 후인 1987년 봄에는 피로 범벅이 된 디딤돌 위에 올라서서 민주주의의 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일제와 그 앞잡이, 군사독재자와 그 주변에서 호가호위하던 무사들, 독재정권과 결탁한 자본가의 위력 앞에서 굴하지 않았다. 시나브로 자랐다. 2016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이어진 촛불혁명으로 더욱 단단해졌다. 2017년 봄, 5·9 대선으로 탄생한 문재인정부에 거는 국민적 기대가 하늘을 찌르는 분위기다.
길가의 잡초 하나도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햇볕과 건조, 온습, 비바람과 동식물이 휘두르는 온갖 물리력을 견뎌 내야 꽃을 피워 벌·나비도 불러들일 수 있다. 길가의 잡초 하나도 그럴진대, 사람 사는 사회가 피땀 없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겠는가.
오늘날 한반도의 제한된 평화, 민주주의는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운 군경과 애국 민주열사 등의 용기와 그에 동참한 수많은 국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는 숱한 시련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슬기롭게 극복해 나왔다.
그 주변에, 혹은 가운데에, 혹은 조금 비켜선 곳에 서 있던 50대 직장인의 기억을 통해 6월을 다시 본다.

'애국'과 '정의'가 바로 서는 '나라'

한국인에게 6월은 남다르다.현충일과 6·25전쟁 발발일, 6·10 민주항쟁기념일, 6·15남북공동선언기념일 등 역사적 의미가 깊은 날들이 많다. 핏빛과 희망이 뒤엉켜 있다. 애국과 민주, 그리고 통일 대업의 열망이 6월 태양 아래 이글거린다.

지난 6일 현충일 추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애국이, 정의가, 원칙이, 정직이 보상받는 나라를 만들어 나가자”고 말했다. 대통령이 언급한 애국, 정의, 원칙, 정직은 지난 몇십 년 간 구겨져 왜곡된 채 민중의 삶을 짓눌렀다. 애국애족 업무를 관장하는 부서는 장관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원칙과 정의 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탄압받았고, 불이익을 받았다. 그 최종 결정체가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비리 형태로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냈다. 애국이, 정의가, 원칙이, 정직이 외면받는 나라는 결국 망하고 만다는 절박함이 문 대통령의 언급에 묻어있다.

 

   
▲ 지난 3월 10일,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는 이정미 당시 헌재소장 권한대행의 주문이 나오는 순간, 전주 객사 인근에 모인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주인공들

올해 6월 10일, 1987년 6월에 발발한 6·10민주항쟁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6월이 되면, 그 무렵에 대학을 다닌 50대는 마음속에 자화상을 한 번쯤 그려볼 것이다. 소위 운동권에서 뛰었던 대다수 사람은, 정치적 이념을 같이 하든 다소 차이가 있든, 지난 촛불혁명과 문재인 대통령 시대에 큰 자부심을 가질 것이고, 운동권을 외면했던 사람들은 어떤 미안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적극적 운동권은 아니지만 시국을 고민하고, 때로 참여했던 사람들은 아쉬움이 있을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간은 무 자르듯 돈키호테형과 햄릿형으로 양분되지 않는다. 반드시 행동하는 양심만 양심인 것은 아니다. 행동을 주저하고, 실행을 하지 않았어도 관심과 응원과 고심이 일선에서 뛴 운동권, 행동하는 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지난 런던 테러 당시 노숙자들이 부상자들을 구한 사례처럼, 인간적 양심과 가치를 잃지 않았다면 모두가 ‘우리’라는 사실이다.

 

   
▲ 1987년 6월 10일, 전주 종합경기장 사거리에서 열린 민주화 시위.

 

주변인 신세가 된 87년 복학생

나는 55세 남성 직장인이다. 또래보다 1년 늦은 82학번으로 대학물을 먹었고, 1984년 2월에 입대, 28개월간 군복무를 했다. 86년 5월에 전역, 어머니를 도와 모내기부터 가을걷이, 추곡수매까지 한 해 농사를 지었다.

당시만 해도 벼농사를 지으려면 물 대기가 용이한 논 한쪽에서 모를 길러야 했다. 벼 묘판을 만들려면 일찍부터 서둘러야 했다. 봄은 왔어도 땅속은 그렇게 차가웠다. 우리 농투성이 부모님들은 장화도 신지 못한 채 그런 논일을 해냈다. 그때 대학 친구들 사이에서는 “늬 부모는 깻잎 팔아 등록금 내주는데…”라는 말이 많았다.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는 환경이었고, 부모님들은 허기진 배를 달래가며 벼농사, 깻잎농사 지어 자식 등록금을 주었다. 내 자식만은 이런 힘든 일을 하게 만들지 않겠다. 그들은 자식을 용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한 해 농사를 짓고 1987년 3월 복학했다. 1년간 농사를 지으면서 내 머릿속에 남은 것은 취직에 대한 갈망이었다. 농부는 봄부터 가을까지 고된 노동에 시달린다. 진흙투성이가 돼 모내기하고, 농약 살포하고, 비료 뿌려 벼를 길러낸다. 가을 추수철이 되면 벼 베기와 벼 말리기, 볏단 쌓기, 운반과 탈곡, 수매, 방아 찧기 등 온갖 과정들이 여간 힘들지 않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손을 보았는가. 그들의 손은 ‘갈퀴손’이다. 그들의 이마와 얼굴에는 산천의 계곡이 박혀 있다. 그리되는 것을 어머니도 나도 원치 않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취직은 헛된 망상이었다. 나 자신을 돌아보니 머릿속에 남은 것이 없었다. 대학 1·2학년은 흥청망청 보냈다. 군대·농사 3년은 공백기였다. 농사짓다가 학교에 돌아온 내 앞에 드리워진 장막은 높고 두껍고 암울했다. 취직의 문을 어떻게 뚫을 수 있단 말인가.

 

   
▲ 1981년 6월 8일, 전북대 캠퍼스에 걸린 현수막들.

 

취업파와 운동권

복학생에게 비친 대학풍경은 크게 구분됐다. 취업파와 학구파, 운동권 그런 식이었다. 운동권은 용기 있는 사람, 나보다 대중과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 의식 있는 사람, 사람다운 일을 하는 부류로 비쳤다. 상대적으로 학구파와 취업파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이기적인 존재로 비치는 듯했다.

일제 강점기에 비춰보자면, 운동권은 독립운동가였고 학구파와 취업파는 이를 외면하며 개인적 영달 챙기기를 앞서 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운동권을 비난하거나, 학구파·취업파를 비난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처지를 이해했고, 서로를 마음으로 응원했다. 운동권이나 취업파나 순수한 젊은 청춘들이었다. 다만 이른바 ‘짭새’들이 심어놓은 장학생들은 적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경계했고, 그들은 자유스럽지 못했다.

당시는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비롯해 <해방전후사의 인식>, <노동의 철학> 등 대학가 의식화 필독서가 많았다. 나도 몇몇 도서를 읽었다. 얼마 전 새롭게 주목받은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등은 읽지 않으면 ‘덜떨어진 놈’, ‘머릿속이 텅 빈 놈’ 쯤으로 인식되는 분위기가 있었다. 적지 않은 친구들은 그런 소위 ‘의식화 도서’를 읽었고, 동아리 활동에서 시대 상황에 대한 자극을 받는 것 같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소위 참여문학은 관심이었다. 시와 소설은 감성과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사람의 진솔한 삶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언어의 마술사가 돼 기교를 잘 부려도 그게 훌륭한 문학작품이 되는데 한계가 있다는 생각도 가졌다. 역사가만 역사가인 것은 아니다. 문학인도, 기자도 역사가다. 하지만 모두가 가치 있는 역사 기술자는 아니다. 그런 차원이다.

 

   
▲ 1987년 6월 10일, 전주 종합경기장 사거리.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군중을 '진압'하고 있다.

 

"형들은 부끄럽지도 않아요!"

   
▲ 1987년 2월 7일, 서울 명동성당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故 박종철 추도회가 열렸다. 전북지역에서는 전주 고백교회에서 추도회가 열린 가운데, 경찰들이 삼엄한 경비에 나섰다.
   
▲ 6월 6일, 전주 중앙성당 앞 팔달로에 전북대생 200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연좌 농성을 벌였다.
   
▲ 6월 10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전북지역에서도 활활 타올랐다. 전주시 금암동 전북일보사 앞 기린대로도 시위 장소 중 하나였다.
   
▲ 전날 대학생 이한열을 쓰러뜨린 최루탄은 6월 10일에도 날아다녔다. 이날 오후 6시께 전주 종합경기장 사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던 전북대 학생 및 종교계 인사들이 최루탄 진압에 흩어지는 모습.
   
▲ 분노한 시위대는 금암동 파출소로 몰려갔다. 시위대는 파출소 유리창을 깨고, 경찰 오토바이를 불태웠다. 이는 이리(익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금암동 파출소 정문에 걸려 있는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글귀가 참 인상적이다.
   
▲ 시위는 계속됐다. 6월 20일, 전주 중앙성당 앞 팔달로를 채운 군중.
   
▲ 6월 23일에는 '민주부활을 기원하는 천주교 전주교구 정의 평화 대행진'이 열렸다. 수녀들의 손에 들린 촛불이 어쩐지 낯이 익다.
   
▲ 6월 23일, "호헌철폐"를 외치며 전주 코아백화점, 그러니까 지금의 세이브존 앞에서 학생 수천 명이 연좌농성을 벌였다. 주변 상가의 사람들이 음료수와 빵을 시위대에 나눠주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 6월 26일 열린 '국민평화대행진'. 이날 오후, 전주시민 2만여 명이 팔달로에 나섰다.
   
▲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 참석한 시민들이 행진 후 전주서중 로터리(현 진북광장)에서 횃불을 밝히며 늦은 시각까지 시국 토론을 벌였다.
   
▲ 7월 9일 열린 故 이한열 열사 추도식.

87년 봄, 새 학기 대학 현장은 심상치 않았다.
전두환이 민의를 제대로 읽지 않고 4·13 호헌조치를 말했을 때 학내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져 갔다.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거나 대열을 맞춰 학내를 오고 가며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쳤다.  

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씨가 치안본부에 잡혀가 고문 도중 사망한 사건,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당국의 거짓말 탄로 등으로 독재 정권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던 상황에서 전두환이 기존 간접선거를 고수, 독재정권을 이어가겠다는 야수의 이빨을 거침없이 드러내자 전국이 발칵 뒤집힌 것이다.

취업이 절실했지만 머릿속이 비어 있던 촌놈에게 어지러운 시국은 싫었다. 매일 학교에 가지만 데모에 제대로 참여도 하지 않고 어영부영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세월은 흐르는데 공부할 분위기가 안 되니 화가 났다. 어지럽고 절박한 시국이었지만, 데모는 운동권이나 하는 것쯤으로 자기 합리화하고 생활하는 부류들이 많던 시절이다. 나도 그런 부류였다. 그렇지만 시국 상황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이다. 그 날이 6월 10일이었고, 그게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좀 더 확실하게 알았다. 방송 뉴스와 당일 아침 신문, 그리고 학교 대자보의 내용들이 학교 앞 경찰력과 학교 안 시위대 세력에 영향을 줬다. 6월 9일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던 연세대 시위 현장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이한열 씨가 쓰러졌고, 결국 숨졌다. 시위대는 더욱 강렬해졌고, 경찰력의 대응도 강했다.

어느 날, 강의실에 같은 과 여학생이 나타났다. 그는 남원이 고향이었는데 운동권이었다. 하얀색 티셔츠 차림의 그 학생의 얼굴은 땀으로 가득했고 크게 상기돼 있었다.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렸다. 그 학생의 표적은 나를 비롯한 복학생 무리였다. 30년 전 일이라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그는 말했다.
 

“형들은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이럴 수 있는 거예요? 부끄럽지도 않아요?”


그렇게 호통치고선 나가 버렸다. 그랬다. 우리는 비겁했다. 이 땅이 독재정권에 유린당하고, 동료 학생이 경찰 직격탄에 맞아 죽어 가는 엄중한 시국이다. 시와 소설을 놓고선 한가롭게 참여문학이 어떻거니, 순수문학이 어떻거니 갑론을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독재자들 밑에서 취직해 무슨 호의호식하겠다는 것인가.
 

헌신과 희생의 산물


양심은 있었다. 미안했다. 우리는 그 길로 강의실을 나와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며 학내 시위에 동참했다.

우리 인문대 시위대는 정문 쪽으로 진출했다. 최루탄이 뿌옇게 뒤덮였고, 격렬한 투석전으로 정문을 전후한 중앙대로 등에는 깨진 돌멩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저쪽은 헬멧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학생 시위대는 맨 몸이었다. 몽둥이든, 최루탄이든 스치기만 해도 중상이다.

우리도 투석전에 가담했다. 몇몇은 보도블록을 캐내어 던지기 알맞은 크기로 깼다. 어떤 학생들은 그 돌멩이를 다른 학생들에게 공급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야, **가 맞았다. 직격탄에 맞았어.”


나는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쓰러져 있었다. 나는 급히 그쪽으로 달려갔고, 우리는 나무숲 뒤로 몸을 숨겼다. 전경이 발사한 최루탄이 허벅지를 타격했는데, 바지가 찢어지고 피가 철철 났다. 그이의 허벅지에는 지금도 상처가 남아 있다.  

그렇게 시위대에 참여한 나는 충경로 집회 등에 몇 번을 더 참가했다. 우아동 전주역 앞 시위 등에도 참가했다. 그때마다 청바지를 입고 하이바를 쓴 경찰, 백골단은 두려운 존재였다. 체포조인 그들은 시위대가 달아나면 쫓아가 가격하고 체포했다. 나는 몇 번이나 잡힐 위기에 처했지만, 골목과 옥상 등을 이용해 피할 수 있었다. 재수 없게 붙잡힌 시위대는 그들이 휘두르는 곤봉에 크게 두들겨 맞았다. 멀리 숨어서 그런 장면을 지켜보노라면 등골이 오싹했다.

6월 29일 민정당 대표이던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등을 골자로 하는 6·29선언을 하면서 나의 시위대 참여도 끝났다. 그날 나는 도서관 한쪽의 사무실 TV 화면에 비친 노태우의 회견을 지금도 기억한다. 많은 학생은 안도했고, 뿌듯해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박종철, 이한열 등 수많은 희생, 피와 땀으로 그해 10월 헌법이 개정됐다. 1987년 10월 12일 국회를 통과한 제9차 헌법개정안이 10월 27일 국민투표에 부쳐졌고, 확정된 것이다. 나는 그날 아침 일찍 투표하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지난봄에 치열하지 못했기에 무임승차하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음은 떨칠 수 없다.

대통령 직선제, 임기 5년 단임 등을 골자로 한 제9차 헌법개정은 민정당 세력으로서도 늦출 수 없었다. 전두환 권력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선 노태우의 대권을 성공시켜야 했고, 노태우가 6·29선언 약속을 착실히 이행해 나가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 주어야 했다.

아쉽게도 그들의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15년 만의 국민 직접선거에서 군사정권의 일당인 노태우가 보통사람들의 탈을 쓰고 당선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6월 민주항쟁은 절반의 승리가 됐고, 그 5년 후에도 국민은 군사정권의 후예들과 결탁한 세력을 지지했으니 안타까울 뿐이었다.

어쨌든, 87년 6월 민주항쟁은 결국 꽃피웠다. 운동권의 최일선에서 시위를 기획하고, 실행한 학생들이 애쓴 결과였다.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헌신하지 않았다면 이 땅의 민주화는 지금도 먼 이야기일지 모른다.

이제 6월 항쟁의 결과물인 ‘87년 헌법’을 뛰어넘자는 여론이 끓는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의장 취임부터 개헌을 챙기고 있고, 문재인 대통령도 개헌을 공언했다. 표면적 출발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 등을 근본적으로 손보자는 것이지만, 30년이 된 헌법인 만큼 이제 새 시대에 걸맞은 가치관이 배어 있는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계기로 혹독했던 독재의 잔재들이 제거됐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 1987년 10월 27일 열린 개헌 국민투표. 사진은 전주 평화 제1투표구에서 찍혔다.

 

   
▲ 직선제 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후, 개표가 시작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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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사
전두환이 쳐죽일놈은 잘살고 있고,,,,,이 개같은 놈들을 잡아다가 똥물에 쳐박아 순자보고 핥으라 하자...
(2017-06-16 07:16:06)
이효진
지난 시대의 모습을 흑백사진으로 보게 되네요. 소중한 기억입니다.
(2017-06-13 08: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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