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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에 머문 최치원의 향기> 역사적 사실·판타지적 설화, 스토리텔링 소재 가득정읍에 뿌린 풍류 씨앗, 가사문학의 맥 형성 / 고군산군도 곳곳엔 탄생·신선 설화 전해져
기고   |  desk@jjan.kr / 등록일 : 2017.07.11  / 최종수정 : 2017.07.13  17:11:09
   
▲ 통일신라 때 태산고을이었던 정읍 칠보면 무성리에 고운 최치원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무성서원.
 

△ 풍류를 말하다

통일신라 말 고대 동아시아의 문장가였던 최치원은 풍류를 말했다. 다소 어려운듯 하지만 여기서 풍류는 국유현묘지도 즉 우리나라에 깊고 오묘한 뜻이 있다는 말이다. 그 기원은 밝 사상인 천신을 섬기는 고조선에서부터 전승되었고 유,불,선 삼교가 담겨있다. 풍류를 실천하는데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원리를 따른다고 한다. 천지에 살아있는 것들은 가정에서는 식구와 만나고 마을에서는 마을사람을, 나라는 백성과 만나는 등 천지만물과 제대로 만나야 풀어진다는 뜻이다.

1200년이 지난 지금도 최치원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또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교류의 아이콘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당나라 말기 토황소격문으로 황소에 기의 날개를 꺾어놓은 글솜씨와 인품이 동북아를 포용한 동인주의(同人主義)를 갖은 국제인, 조국 신라를 사랑한 동민주의(同民主義)를 가진자로서 동북아시아의 진정한 문화영웅이기 때문이다.

   
▲ 1967년 무성서원을 떠나 47년만에 정읍에 돌아온 최치원 초상화.

필자는 지난해 7월 강소성 양주시에 갔다. 최치원의 성장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 싶어서다. 최치원은 12살의 나이로 유학길에 올랐다. 남이 백 번 할 때 천 번 한다는 각오로 6년만에 과거 진사과에 합격했다. 20세에 첫 발령을 받았던 율쉬이 현에는 최치원의 비석이 있었다. 성 밖에 서민들의 삶을 보살피기 위해서 지나다니던 길목에 있었다. 비석 옆으로 멀어져 가는 오솔길이 보였다. 그 당시는 당나라도 신라도 말세지말의 혼돈에 싸여있었다. 그 혼돈 속에서 한줄기 빛이 되고자 외롭게 걸어갔던 최치원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 최초 생사당의 주인공

중국의 황제로부터 자금어대까지 선물 받았던 최치원은 당대를 풍미한 동아시아의 문인들과 소통할 정도의 문필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에서도 관리로서 성공의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치원은 혼돈의 시기에 있었던 신라로 귀국해 자신이 당나라에서 경험한 선진적인 정치이론을 가미한 〈시무10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린다. 하지만 진골귀족 세력에 밀려 야심찬 개혁은 실패로 끝나버렸다. 신라하대 사회의 극심한 분열과 갈등을 회통과 조화의 정신으로 극복하고자 했으나 실패한 후 변방 외직을 자청해 고개 넘어서 외로이 태산에 다다랐다.

왕권강화와 나라의 안녕을 위해 온 삶의 열정을 바친 정책은 버려진 풀잎처럼 말라버렸다. 그러나 태산에서 따뜻한 선정을 베풀었다. 정읍에는 최치원이 태수로 재직했던 흔적을 담은 문화경관이 남아있다. 무성서원과 피향정 그리고 유상곡수이다.

   
▲ 무성서원 입구에 위치한 현가루.

태산의 옛 이름이 무성이다. 무성서원 입구에는 현가루가 있다. 그 이름은 ‘공자의 제자 자유가 무성고을에서 악기와 노래로 예를 가르쳤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무성서원은 일반적인 서원과는 다른 독특한 구조다. 무성서원은 학문적 기능보다 제향공간으로서의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문화경관이다. 최치원은 풍류로 선정을 베풀다가 태산이 견훤의 후백제 땅에 이르니 부성(西山)으로 떠났고 백성들은 그의 사랑을 못 잊어 최치원을 섬기는 생사당을 지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정읍에는 최치원에 풍류의 씨가 떨어졌다. 최치원이 뿌린 풍류의 씨앗이 송시열, 송강, 정극인으로 이어지는 가사문학의 맥을 형성한다. 이는 풍류의 연장선인 것이다. 그가 만든 두 개의 연못 사이 피향정 연꽃이 만개해 향기가 고일 때 선비들 모여 앉아 풍류를 논했다. 그 풍류의 씨앗은 가사문학으로 꽃피웠다. 바라건대 그 옛날 최치원 선생이 뿌린 풍류의 씨가 수풀이 되어 정읍과 새만금 땅에 무성하길 바란다.

△ 최치원의 판타지 공간

   
▲ 장자도에서 바라본 고군산군도.

정읍과 함께 군산에는 탄생설화가 판타지적으로 유포돼있다.

특히 고군산의 해양지역에 최치원에 관한 설화와 유적이 풍부하다. 그 핵심에 군산 옥구가 최치원의 고향이라는 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최치원의 출생지는 경주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대표적인 설이 옥구 내지는 고군산 출생설이다.

서유구의 〈교인계원 필경〉의 서문에는 “공의 이름은 치원이요, 자는 해부요 고운은 호이니 호남 옥구 사람이다” 라고 쓰여있다.

고군산군도는 63개의 섬 중 유인도가 16개다. 그 중 최치원과 관련된 명칭이 여러 곳이다.

신시도는 고군산도에서 가장 넓은 섬이다. 주봉인 월영산은 가을이 되면 단풍진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최치원이 정상에서 가야금을 타며 글을 읽었는데 그 소리가 중국까지 들렸다고 한다. 월영산에 올라 섬과 섬이 이어지면서 그려낸 비경을 보고 있노라면 스스로 신선이라고 느끼지 못할 사람이 없다. 신시도는 문창현에 속하며 심리, 신치라고도 불리었다.

심치는 ‘최치원의 새로운 깨달음이 치솟았다’, 심리는 ‘최치원이 바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문창은 최치원이 고려 현종한테 받은 시호다. 옥구향교에는 문창서원이 있어서 최치원을 배향하고 있다.

대각산은 최치원이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는 산이다. 정상에 올라 고군산도를 바라보노라면 그 전경이 ‘가히 신선이 노닐던 곳이 맞구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대각산과 월영봉 사이에 되내기샘과 그 전설이 있다. 하늘의 은하수가 쏟아져 바다가 되었고, 별들이 내려와 고군산 섬들이 되었다고 한다. 하늘 위 감로수는 땅으로 흘러 되내기샘이 되었는데 밀물 때면 바다에 잠겼다가 썰물 때면 샘물로 솟아나 최치원이 마시고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 최치원의 판타지 공간Ⅱ

최치원의 금돼지 설화가 있다. 최치원의 아버지가 무장으로 고군산에 온 뒤 그의 부인이 금돼지에게 납치된 것을 구해와 최치원을 낳았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간척으로 이미 육지가 된 내초도에 금돼지굴이 남아있다.

고군산도의 최치원 설화를 〈최고운전〉이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신선이 노니는 섬인 선유도는 물론 원래 자천대가 있던 선연리 등의 지명도 최치원을 신선으로 보던 지역민의 생각을 반영한다. 고군산 지역에 각인된 최치원은 홍길동 류의 선도 계통의 영웅이다. 하지만 홍길동이 무사적 영웅이라면 최치원은 문화적 영웅이라는 차이가 있다. 최치원은 바다의 신선으로 그의 탄생 담과 영웅담이 서해를 중심으로 중국 대륙과 한반도를 넘나들며 펼쳐진다.

요컨대 전북에는 역사적 사실로서 뿐만 아니라 판타지적인 설화로서 최치원에 관한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가득하다. 지금은 바다의 시대이다. 그 옛날 해민의 꿈을 펼쳤던 최치원의 흔적이 향기로 묻어있는 새만금지역에 최치원의 꿈이 맘껏 펼쳐지길 바란다.

문화는 ‘사회 구성원에 의해 공유되는 지식, 신념, 행위의 총체’라고 한다. 역사적 진실 차원보다 지역 주민들의 생각의 진실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 문정현 사단법인 아리울역사문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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