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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정전 70년] 낙동강 방어선 전투 (상)

1950년 6·25전쟁 발발과 함께 북한군에 파죽지세로 밀린 국군과 유엔군은 7월 말 낙동강까지 철수했다. 이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후퇴하려 해도 내어줄 땅이 남아있지 않았다. 낙동강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해 대구와 최후 거점인 부산은 지켜내야 했다. 유엔군 지상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고수 아니면 죽음(Stand or Die)’의 결의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곳서 피아는 ‘죽느냐, 사느냐’의 각오로 부딪쳤다. ◆왜관철교 폭파와 잔학한 미군 학살 8월 3일 아침부터 왜관철교 주변에는 사이렌이 울리고 전단이 뿌려졌다. 오후 6시까지 지역에서 퇴거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해 사살한다는 포고였다. 낙동강 방어선 내 적 게릴라 침투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주민과 피난민들은 우왕좌왕했다. 오후 8시 30분 미군은 왜관철교를 폭파했다. 왜관쪽 둘째 경간 63m가 끊어졌다. 북한군이 강을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지만 다리를 건너려던 많은 피난민도 희생됐다. 북한군이 낙동강을 건너면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북한군은 9일 왜관 낙산리 금무봉(268m)에 들이닥쳤다. 새벽에 개인 화기와 옷을 머리에 이고 건너편 노티 나루터에서 깊이 1.65m의 낙동강을 건넜다. 한참 후 이를 발견한 미군은 보·포병 사격을 가했으나 적들은 금무봉으로 올라갔다. 다음날 오후 케이 미 제1기병사단장은 경전차 소대와 보병을 돌격시켜 정상을 탈환하고 달아나는 적을 섬멸했다. 적은 700여명, 미군은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미군이 처음 한국군 지원병을 편입, 병력을 보충했는데 이것이 카투사 탄생의 계기가 됐다. 왜관읍 303고지에서는 15일 미군이 북한군에 집단 학살당했다. 이곳에서 북한군은 미군 포로 46명의 손을 묶고 계곡에 몰아넣은 뒤 기관총을 난사했다. 6명이 살아남아 북한군의 야만성과 낙동강 전투의 치열함을 알렸다. 16일 미 B-29 폭격기 98대는 낙동강 서쪽 강변에 960t의 융단폭격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 폭격이었다. ◆국군 최대 전과올린 안강·기계 전투 4일을 전후해 길안 일대에 배치됐던 국군 수도사단이 북한군 습격을 받고 의성 방향으로 철수하면서 의성-청송-영덕을 연결하는 구간의 간격이 발생했다. 국군의 취약점을 간파한 북한군 제12사단은 국군이 배치되지 않은 산악 지역을 통과해 7일 오후 도평동(기계 북방 40km)을 점령하고 8일에는 죽장(기계 북방 20km)에 도달했다. 국군은 북한군의 목표가 기계-안강-경주 축선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으나 대응방책을 찾지 못했고, 그 사이 북한군 제12사단은 10일 기계까지 거침없이 진출했다. 낙동강 방어선의 위기였다. 10일부로 포항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됐다. 그러나 가용한 병력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새롭게 편성중인 제25연대를 안강 지역에 투입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의성에 있던 수도사단에 이동명령이 하달됐다. 수도사단 제1연대로 안강에서 북한군의 진출을 차단하고, 제18연대로 기계에서 북한군의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안강-기계 일대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을 섬멸하기로 했다. 실로 대담한 결심이었다. 수도사단의 안강 도착이 빠르냐, 북한군의 경주 또는 포항 진출이 빠르냐의 시간 싸움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전환됐다. 기계에 진출했던 북한군 제12사단이 후속부대의 진출 지연과 보급부진으로 멈춰선 것이다. 18일 기계 일대에서 총공격이 시작됐고 끈질기게 저항하던 북한군은 후방이 차단되자 철수하기에 급급했다. 북한군은 많은 전사자를 남겨둔 채 일부 패잔병만이 비학산 일대로 도주했다. 동해안 지역 최대 위기가 가까스로 수습됐다. 수도사단은 이 전투에서 북한군 1천245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장비를 노획하는 전과를 획득했다. 전쟁 발발 후 국군이 거둔 최대의 전과였다. ◆반전의 연속 포항지역 전투 2일 영덕에서 철수했던 북한군 제5사단은 청송-기계 축선의 제12사단과 영덕-포항 방향으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영덕을 방어 중인 국군 제3사단 제22, 23연대는 치열한 근접전투를 반복했지만 제23연대 진지가 돌파되면서 방어선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전투력이 저하된 국군 제3사단은 역습과 철수를 반복하면서 영덕 남쪽 강구를 거쳐 10일에는 강구 남쪽 장사동으로 철수했다. 11일에는 북한군 제766유격연대의 일부가 포항 시내까지 진입해 국군과 유엔군은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포항의 위기 상황을 보고 받은 제8군사령관은 연일비행장 확보를 위해 미 제19연대 제3대대로 브래들리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해 포항에서 연일비행장에 이르는 도로를 차단했다. 포항 북방에서는 북한군 제5사단 일부가 홍해까지 진출해 국군 제3사단은 장사동 일대에서 포위됐다가 17일 오전 6시쯤 유엔 해군 함정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구룡포로 철수했다. 포항 탈환 임무를 받은 민기식부대(민부대)는 18일 새벽 포항 시내로 진입해 북한군 180명을 포로로 잡고 포항을 탈환했다. 이후 동해안 지역 전선은 9월까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시산혈하의 다부동 전투 8월 초 낙동강 방어선 대구 방향에는 북한군 5개 사단이 집중 공격을 감행했다. 특히 북한군 제1, 13, 15사단 등 3개 사단은 5일부터 8일간에 걸쳐 낙동강을 도하한 후에 국군 제1사단을 압박하면서 대구 공격에 안간힘을 다했다. 당시 대구는 대한민국 정부와 미 제8군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는 핵심 지역이었다. 국군 제1사단은 방어지역 조정에 따라 13일 다부동 일대의 새로운 방어선에 배치됐다. 국군이 다부동 진지에 도착했을 때 북한군 일부가 한발 앞서 328고지와 유학산을 점령하고 있었다. 제1사단 방어선 중앙이 돌파되고 다부동이 점령당할 위기의 순간이었다. 또 18일 새벽 가산에 침투한 북한군이 사격한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지자 대구의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날 충격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했다. 국군 제1사단은 위기를 타개하고 계획된 방어선을 회복하기 위해 미군과 협동으로 적진돌파 작전을 전개했다. 이는 한·미 간 최초 협동작전이었다. 미군이 국군의 전투력을 신뢰하지 않았던 그 동안의 관례에 비춰 파격적인 조치였다. 북한군도 18일 전차를 새로 보충 받아 보전협동으로 전면적인 야간공격을 개시함으로써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되풀이되었다. 이때 국군 제1사단에서는 매일 평균 600~700명의 인원손실이 발생해 병력이 감소하게 되자, 신병과 학도병으로 보충했다. 이로 인해 중대장이나 소대장이 부하들의 이름은 물론이고 얼굴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이영욱 매일신문 기자 hello@imaeil.com <인터뷰> “총신이 벌겋도록 쏘고 수류탄 던졌다” 다부동전투 참전-이동철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 대구지부장 “조금 전까지 이야기 나누던 전우가 북한군 총탄에 시뻘건 피를 쏟으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정말 머리가 확 돌았어요. 그때부터 무서운 게 없더군요. 총신이 달아오르도록 M1소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지요. 전투가 소강상태가 되면서 전우의 주검을 수습할 때 불쌍하다는 생각이 엄습하면서 눈물이 앞을 가렸어요.” 낙동강 방어선 다부동전투 수암산 고지전에 참전했던 이동철(91)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 대구지부장은 이야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에게 치열했던 전투 현장과 눈앞에서 산화해간 전우에 대한 기억은 어제처럼 또렷하다. 이 지부장은 1950년 8월 중순 국군 1사단 12연대 2대대 5중대 이등병으로 다부동 전선에 투입됐다. 훈련은 첫날 부대편성과 응급처치, 둘째와 셋째날 소총 분해결합, 실탄 8발 사격이 고작이었다. 1사단에 전입한 그는 다음날 해질녘 수암산 쪽으로 이동했다. 그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그는 “수암산 고지를 차지하려고 돌격하는데 박격포와 수류탄이 비처럼 쏟아졌어요. 북한군 박격포는 정말 지독했고, 그때 전우들이 정말 많이 죽었다”면서, “이후 영천 신령전투 현장으로 이동했고, 이후 수색병으로 활동했다”고 말했다. 이어 “대대장이 수류탄 가지고 적 탱크를 저지할 사람을 뽑는다고 해 자원했는데, 이는 수색대원을 모집하기 위한 연막이었다. 수색대원이 되어 도로에 대전차 지뢰를 매설해 후퇴하던 적의 마차 3대와 적군을 폭사시키기도 했다”며,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지원이 없었으면 우리는 수류탄, 야포, 박격포 한발도 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 지부장이 기억하는 백선엽 사단장은 무섭지만 따뜻한 지휘관이다. 1사단 사령부가 있던 동명국민학교서 백 사단장을 처음 봤다. 그는 “처음 본 사단장님은 무서웠다. 큰 덩치와 철모에 시커먼 보안경을 걸친 모습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도였다”면서, “그러나 북진 과정에 박격포 포신을 메고 가는 병사를 보면 자신이 대신 메고, 지프에서 내려 병사들과 함께 담배연기를 흩날리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하면서 정말 부하를 사랑하는 지휘관임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고 백선엽 장군님이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한 것은 너무나 분하고, 개탄스럽습니다. 만약 다부동이 뚫렸다면 대구와 부산이 함락되어 은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겁니다. 우리의 형제자매, 전우의 목숨을 빼앗고 전 국토를 피로 물들인 북한을 적이라고 부리지도 못하는 그들은 다부동전투 영웅 백 장군님을 입에 올릴 어떤 자격도 없습니다.” /매일신문 이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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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13 15:20

[한국전쟁 정전 70년] 마산방어전투

1950년 8월 1일 하동과 함양, 진주를 점령한 북한군 6사단은 마산 접경에 이르렀다. 방호산 6사단장은 “마산을 점령하면 적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다. 우리의 최종 목표인 부산 점령은 시간문제이다”라고 말하며 승리를 장담했다. 그러나 경북 상주에 주둔 중인 미 25보병사단이 8월 3일 마산으로 급파하면서 전투 양상이 달라졌고, 마산을 지키고 뺏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국군과 미군 1000여명, 북한군 4000여명 등 무려 5000여명이 전사한 참혹한 ‘마산방어전투’. 북한군에 대부분 국토를 빼앗기고 마산이 무너지면 부산마저 위태로운 상황에서 방어전투는 전쟁의 승패를 가를 수 있는 ‘막느냐 무너지느냐’의 중요한 전투였다. 만약 패배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중요했지만, 미군 주도 전투란 이유로 기념관 하나 없이 잊어 가고 있다. ◇죽음으로 지켜라= 1950년 8월 1일 북한군 6사단은 남침 36일 만에 진주를 점령한 데 이어 마산 현동 검문소에 집결했다. 6사단장 방호산은 중국에서 항일 활동을 하고 소련 유학까지 다녀온 북한군 내 뛰어난 전술가였다. 또 중국 국공내전에 참전해 전쟁 경험이 풍부한 조선족들로 구성된 북한군 6사단 7000여명은 함안·진동 고산지대를 먼저 확보한 후 마산 점령을 노리고 있었다. 당시 이 일대를 주둔하고 있던 국군은 1000여명에 불과했다. 미 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은 급히 경북 상주에 주둔 중인 미 25보병사단을 250㎞ 넘는 마산으로 단 2일 만에 이동시켰다. 이에 맞춰 진주에서 후퇴한 미 24사단도 창녕에 낙동강 방어선 진지를 구축했다. 워커 중장은 “240km의 낙동강 방어선의 더 이상 철수나 후퇴는 없다. 죽음으로 지켜라”고 말하며 결의를 다졌다. 이로써 마산을 점령하려는 북한과 사수하려는 국군과 미군은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특히 요충지였던 해발 739m 높이 서북산은 고지의 주인이 19번이나 바뀌었다. 서북산은 함안군 여항면과 창원시 마산 합포구 진북면·진전면 경계에 있어 산 정상에 오르면 인근 함안과 마산 일대, 진주가 보여 전쟁의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다. 서북산을 지키는 과정에서 1000여명의 아군이 전사했을 정도로 참혹했다. 산 정상은 수없는 미군 함포 사격과 공군기의 네이팜탄으로 인해 나무가 사라지고 정상 높이가 낮아져 미군은 이 산을 ‘늙은 중머리 산’, ‘네이팜’이라고 불렀다. 만일 방어전투에서 패배했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바뀌기 전까지 대한민국은 절박한 위기였다. 마산과 당시 임시수도인 부산까지는 직선거리로 40~50㎞에 불과했다. 방어전투에서 패배했다면 부산이 위험했고,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도 힘들어졌을 수 있었다. 결국 마산방어전투에서 한미동맹군 승리로 북한군의 부산 점령을 막을 수 있었고, 국군과 UN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방어전투 승리로 9월 16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반전의 기회를 가져왔다. ◇한미동맹의 상징= 지난 1월 29일 방문한 격전지 중 하나인 마산합포구 진북면 옥녀봉 정상. 옥녀봉에는 전투가 벌어진 지 70년이 넘었지만, 당시 참혹한 흔적들을 느낄 수 있었다. 옥녀봉은 물자 수송이 용이한 도로가 인접한 요충지로 미군과 북한군의 탈환전이 이뤄졌던 곳이다. 정상에는 미군의 함포 사격으로 인해 생긴 구덩이와 참호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현장을 동행한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회장이 금속탐지기로 발굴 작업을 하자 탄피, 벨트 버클 등이 발견됐다. 배 회장은 “이 일대에 수십차례 발굴 작업을 했는데 아직도 전투에 쓰인 총알 탄피, 파편, 버클 등이 나온다. 이만큼 방어전투가 치열했다는 것을 뜻한다”며 “남의 나라에 와서 목숨을 바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군인들이 잊히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한미동맹의 상징이기도 한 이 전투가 정전 70주년에 맞춰 적극 재조명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가장 치열했던 서북산 전투 당시 로버트 리 티몬스 대위는 중대장으로 중대원 100여명과 함께 고지를 지키던 중 북한군 습격으로 부상을 입고, 후송 중 북한군 기관총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전사 당시 티몬스 대위에게는 7살 아들이 있었다. 아들인 리처드 티몬스는 아버지를 이어 군인이 됐고 이후 주한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했다. 또 티몬스 대위 손자도 미 육군 대위로 한국 근무를 자원해 1996년부터 1997년까지 판문점 인근 미 2사단 최전방 초소에서 근무했다. 3대에 걸쳐 대한민국 자유와 평화를 지킨 것이다. ◇인터뷰 “마산 뚫렸으면 지금의 대한민국 없었을 것”-마산방어전투 유일 생존자 류승석 노병(93, 1950년 당시 학도병) “마산이 무너졌으면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은 없었을 겁니다.” 마산방어전투 참전자 중 현재 유일한 생존자인 류승석(93)씨는 방어전투 중요성을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류씨는 본인이 고령이라 이제 기억이 흐릿해지고 몸도 예전과 같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가 전하는 전쟁의 참상은 생생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고 얼마 뒤 류씨는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다. 마산 월영동에서 단 일주일간 훈련을 받은 뒤 진주, 남원, 순천, 하동의 전투를 거쳐 8월 다시 마산으로 돌아온다. 그가 방어전투 투입되기로 결정된 뒤 받은 주된 임무는 북한군 정보수집이었다. 전투 당시 미군과 국군 정보가 일치하지 않아 혼선을 겪었기에 군은 학도병들을 북한군 진지에 투입해 적의 전력, 위치 등을 파악하기로 했다. “특무대 간부가 북한군 진지에 투입되기 전 학도병들에게 ‘너희들은 산 생명이 아니다’고 말하며 목숨을 걸고 적 정보를 파악하라고 하더군요. 너무 어린 나이라 죽음이 무섭지도 않고 단지 전쟁이 났으니 적과 싸워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투입된 부대원 30명 중 류씨를 포함한 15명은 진동, 나머지 15명은 함안으로 향했다. 그들은 인민군처럼 보이기 위해 인민군복을 입고 공산당 문양이 박힌 모자를 쓴 채 적진으로 들어갔다. 임무 기간은 일주일이었지만, 아군이 없는 적진에서 임무 수행은 어렵다고 판단해 5일 만에 복귀를 결정했다. 진동에 투입된 15명의 학도병 중 살아 돌아온 이는 5명뿐이었다. “저희는 북한군으로 위장했기에 복귀하기로 한 날에 맞춰 아군 진지로 와야 미군 공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틀 일찍 복귀했기에 하마터면 미군이 학도병들을 북한군으로 착각하고 총을 쐈을 수도 있죠.” 류씨는 목숨을 걸고 전투에 참여했지만, 대한민국에서 그의 학도병 활동에 대한 공식 기록은 없다. 참전유공자로 인정받은 것도 그가 학도병을 나온 후 곧장 공군으로 입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학도병들이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국군 해병대와 미 25사단이 공격에 들어갔습니다. 승전으로 해병대는 특진하는 등 공을 인정받았지만, 저희는 학도병이었기에 아무것도 없고 제대로 된 기록조차 없습니다.” 노병의 마지막 소원은 마산방어전투를 기억하고 미래 세대들이 안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전쟁기념관이 건립되는 것이다. 류씨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학생과 시민들을 찾아다니며 안보 교육에 나서고 있다. “한국전쟁 중 타 전투들은 전쟁기념관이 있어 매년 그곳에서 관련 행사들이 열리고 지역 학생들이 안보 교육을 받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구한 마산방어전투는 기념관도 없이 잊히고 있죠. 죽기 전 기념관이 건립돼 방어전투가 계속 국민들에게 기억됐으면 합니다.” 경남신문=박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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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27 14:59

[한국전쟁 정전 70년] 호남전투

6·25 한국전쟁 당시 ‘호남전투’는 북한군이 진출하기 시작한지 11일 만에 호남지역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지난 70여년간 조명받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호남에 대한 애국심을 왜곡하며 ‘무혈입성’이라는 지적과 함께 ‘치욕의 전투’라고 까지 이야기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던 ‘불독’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북한군 최정예 6사단이 호남에서 수일간의 시간을 보낸 덕에 부산을 방어할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11일간 호남에서는 큰 전투는 없었지만 전사(戰史)에 유례없는 빠른 이동을 하던 북한군 6사단의 진군에 맞서 ‘지연전투’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호남의 전역에서 수많은 희생이 발생했다. 지역민들을 지키기 위한 호남 전투경찰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혈서를 쓰고 지원한 호남지역 학도병들 바로 그들이다. ◇파죽 지세 북한군 6사단 방호산 사단장이 이끈 북한군 6사단(이하 6사단)은 개성 북쪽에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10분부터 30분간에 걸친 포병 공격준비 사격을 실시한 후 공격으로 전환했다. 6사단은 북한군 중에서도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정예부대였다. 그들의 뿌리가 중국 내전에 참전한 제166사단이기 때문이다. 6사단이 보유한 주요 장비는 T-37 전차 4대, SU-76 자주포(76㎜) 16문, 122㎜ 평사포 8문, 122㎜ 곡사포 16문, 45㎜ 대전차포 48문, 120㎜ 박격포 18문, 82㎜ 박격포 81문 등이다. 다양한 전투경험을 가진 병력들과 최신형 장비를 보유한 6사단의 전투력은 막강했다. 6사단 예하 부대들은 공격 첫날인 6월 27일 한강을 건너 하루만에 김포공항을 점령하고, 영등포 방향으로 진출했다. 7월 3일에는 서울에 진출한 북한군 타 사단들과 함께 수원에 진출해 7월 6일 평택, 7월 8일 천안을 거쳐 서해안을 따라 기동했다. 6사단은 천안~공주 방향으로 향하던 북한군 4사단과 천안~대전 방향으로 진출하는 북한군 3사단을 뒤따라 서해안 축선인 천안~예산 방향으로 진출함에 따라 전투력의 손실없이 서해안을 타고 내려왔다. 6사단은 목포항과 여수항 등을 거쳐 서해안 일대로 우회해 호남지역을 점령하고 마산으로 진격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6사단의 선두부대가 호남지역을 공격한 것은 7월 16일부터다. 이들은 호남지역 진입 직전 603모터사이클연대까지 배속받아 파죽지세의 속도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호남지역의 상황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 육군은 보병 8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호남지역에는 제 5사단이 주둔(예하 2개 연대 중에서 제 15연대는 전주, 제 20연대는 광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부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수도방위에 나서 호남지역에는 국군 병력이 전무했다. 당시 육군본부는 부족한 호남방어선을 위해 전북지역에 7사단을, 전남지역에 5사단을 새로 꾸리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수도권 방어선이 무너져 내리면서 호남지역은 병력 뿐 아니라 무장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국군 정규군이 없는 상황에서 충청, 호남 지역 전투경찰과 해병대원 일부, 징집자 등 급조한 군경 합동부대로 ‘7사단’을 꾸렸지만 이름만 사단일뿐 총기조차 완벽히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북한군 6사단의 주력인 1연대가 충남 논산에 속한 강경읍을, 13연대는 서천 장항읍과 군산 방향으로, 15연대는 익산 웅포면 방향으로 밀고 들어왔다. 당시 제7사단장 민기식 대령은 육군본부에 수차례 무기와 탄약 등을 요청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결국 민 대령은 예하 2개 연대의 후방 이동을 건의하고 무장을 갖춘 사단사령부 요원을 포함한 1개 중대 규모만으로 지역 방어에 임했다. 어떠한 지원책도 마련할 수 없었던 육군본부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7사단 3·9연대를 즉시 부산으로 이동하게 하고 1개 대대를 차출해 지연전을 감행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국군 제1사단이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 미군과 더불어 북한군 3개 사단을 격멸한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전투’의 국군 주요병력이 호남자원이었고, 호남의 병력자원이 다른 전투에 차출되었다는 점 그리고 호남출신 군인들이 이끈 승전은 6·25당시 호남이 패배의 전투만을 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11일간의 호남 지연전투의 중심은 전투경찰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호남은 위기에 처했다. 당시 전남·전북 경찰국은 치안국의 지시에 따라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경찰병력을 전투부대로 개편했다. 국군과 미군 그리고 경찰은 금강저지선을 구축해 방어에 나섰다. 7월 16일 밤 호남경찰은 충남 양촌에서 첫 전투를 시작으로 장항전투, 강경 수복전투를 치르며 지연작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병력 증원으로 전세가 불리하자 익산 방면으로 후퇴했다. 호남 전투경찰들은 만경강 일대에 국군과 함께 조촌(만경강)방어선을 구축했지만 7월 19일 김제경찰서 대원들은 막강한 전력을 가진 북한군 6사단과의 청하전투에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조촌(만경강)방어선이 무너진 후 북한군은 정읍, 순창을 거쳐 광주로 남하했다. 7월 23일 광주 산동교에서 경찰과 국군은 북한군 6사단과 전투를 벌였다. 영광 삼학리에서는 영암, 화순 등 인근 지역에서 차출된 경찰관들이 북한군 제6사단과 지연전투를 벌이다 대부분 전사했다. 북한군은 전차와 중무기를 앞세워 광주와 전남 서부지역을 점령한 후 동부지역으로 진군했다. 호남지역 대부분이 점령된 상황에서도 곡성경찰은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후퇴하지 않고 지역을 사수했다. 곡성경찰 한정일 서장은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압록교전투에서 북한군에 승리를 거두었고, 500여 명의 전투경찰 대대를 편성해 태안사에서 전투를 이어나갔다. 북한군은 호남을 빠르게 장악하고 진주를 통해 경상도로 진출할 계획이었으나 이러한 지역 전투경찰들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7월 16일 공격을 시작해 7월 31일이 되어서야 진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항의 결과는 호남지역 경찰대의 궤멸로 이어졌으나, 간발의 차이로 미군이 방어선을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호남 전투경찰은 북한군의 잔당인 빨치산들과 전투를 이어가면서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나선 어린 학생들 1950년 7월 25일 ‘화개장 전투’는 전남 일대를 장악한 후 신속하게 동진하려는 북한군 6사단과 맞서 싸운 전투다. 북한군의 하동 진입을 지연시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이 전투는 6·25전쟁에서 전남지역 학도병이 치른 첫 번째 전투였다. 한국전챙 초기 국군 주력이 거의 무너진 상황에서 호남지역의 중요한 임무는 지역방어와 함께 병력을 충원해 전선으로 파견하는 것이었다. 호남지역의 전세가 위험해지자 다급해진 국군 5사단은 청년학생층에 주목해 7월 13일 5사단 15연대는 여수·순천 학도병을 조직했다. 이 과정에서 전남지역 학생이 대거 학도병으로 자원했다. 3~4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호남 지역 학생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혈서를 쓰고 여수·순천·광양·벌교·보성·강진 등지에서 모인 것이다. 학도병으로 자원했던 학생의 출신학교와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순천매산중·매산여고·매산고에서 펴낸 ‘매산백년사’와 ‘한국전쟁시 학도의용군’ 등의 기록에 따르면 17개 고교에서 180여 명의 학도병들이 모였다. 이들은 출정식을 거쳐 중대를 편성한 후 곧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훈련은 주로 제식훈련, 총검술, 각개전투 정도였다. 실전훈련을 쌓지 않은 학도병에게도 출동명령을 내릴 정도로 호남지역의 전황은 계속 악화됐고 결국 학도병들은 9일간의 훈련을 마친후 손에 소총 한 자루만 쥐고 전선으로 투입됐다. 학도병들은 출동 다음날 아침에서야 총기의 분해와 결합, 실탄 장전, 조준 방법 등 무기 조작법을 익혔을 뿐 전혀 사격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여수·순천 학도병은 퇴각한 전투경찰 부대와 화개장의 화개교 건너편인 화개파출소 뒤편 야산에 주둔했다. 전차를 앞세운 막강한 화력의 북한군 1000여 명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이들은 북한군의 동진을 지연시킴으로써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줬다. 여러 문헌을 종합해 보면 철모 대신 교모를 쓰고 전투복 대신 교복을 입고 싸운 70여 명의 소년들이 전사하거나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다. 6·25전쟁에서 호남지역 호국영웅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보여준 희생과 공훈을 기리고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우는 호국·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자 지난 2020년 순천에 호남호국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광주일보=정병호 기자 “희생한 경찰들 예우 못받아…보훈처, 참전경찰단체 인정해야” -정전까지 호남전투 모두 참전 -순창 가마골 전투서 얼굴에 총상 “내 앞에서 북한군의 총탄에 쓰러져 간 전우들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현상호(90) 대한민국 6·25참전 경찰국가유공자회 광주시 경찰유공자회장은 70여년 전 호남지역을 지키기 위해 생사를 같이한 전우들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현 회장의 경찰공무원 인사기록카드에는 ‘1951년 4월 20일 순경 임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1934년생인 현 회장은 17살의 어린나이에 전남경찰국 소속 경찰이 됐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전남지역의 많은 경찰들이 전투경찰로 활약하다 희생돼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현 회장은 해양소년단의 경험으로 경찰에 입문하게 됐다. 수많은 전투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현 회장은 어린 나이의 호기에 무서운 게 없었다고 회상했다. 현 회장은 “돌이켜보면 적군의 총탄에 쓰러져 간 사람이 전우가 아니라 나 였을 수 있었을 텐데 그땐 아무 것도 몰랐다”면서 “당시에는 보급이 없고 주먹밥 한개에 의지해 전남과 전북을 두발로 걸어다니며 북한군과 전쟁을 벌였다”고 말했다. 1951년 경찰이 된 후 정전이 될 때까지 호남의 모든 전투현장에 참가한 현 회장은 1951년 8월 전북 순창군 가마골 전투에 투입돼 밤을 새며 고지를 지키다 얼굴을 스치는 총탄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는 6·25 당시 전투 경찰로 고생한 이들이 제대로 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현 회장은 “6·25 경찰참전용사들은 보훈처 단체로 인정 받지 못해 제대로 예우 받지 못한 채 이제는 하나둘 세상을 등지고 있다”면서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경찰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6·25 참전 경찰 단체를 보훈처에서 인정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광주일보=정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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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13 15:02

[한국전쟁 정전 70년] 대전전투

1950년 7월 19-20일 치러진 대전지구전투는 단 이틀 간의 전투였음에도 1150여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는 투입된 병력 중 1/3 수준으로, 당시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대전전투는 6·25 전쟁 발발 후 대전지역에서 치른 최초의 방어전투였던 데다, 전쟁 초기 거의 모든 전투가 그랬듯이 '패배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6·25 전쟁에서 3.5인치 로켓포로 북한군 T-34 전차를 파괴한 최초의 전투라는 점, 대전을 지나 남진을 계획했던 북한군을 며칠 동안 대전에 묶어두며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 시간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 등에서 높은 의의를 갖고 있다. 이 같은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리고자 대전시는 2015년까지 지역 군부대 주관으로 열리던 지역행사를 넘어, 2016년부터 시 주관 행사로서 대전전투 전승 기념식을 열기 시작했다. 해당 연도에는 대전전투 참전 용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대전지구전투 호국영웅비도 건립됐다. ◇ 전쟁의 서막, 19일 새벽=1950년 7월 3일 한강을 넘은 북한군은 5일 경기도 오산에서 미군과 처음 전투를 치렀다. 미 24사단은 평택-천안, 전의-조치원, 금강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키면서 대전에 집결했다. 미 24사단에 내려진 임무는 18일 포항으로 상륙할 예정인 제1기병사단이 영동 부근에서 반격준비를 마치는 20일까지 대전을 사수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미 24사단 윌리엄 에프 딘 소장은 주력 34연대를 유성에서 갑천을 건너 대전시내를 이르는 길목인 월평산성 쪽에 배치하고, 영동에 있던 19연대 2대대와 금산의 수색중대를 대전으로 이동해 지원하도록 하는 등 전투력을 증강시켰다. 북한군의 본격적인 대전 공격은 19일 오전부터 시작됐다. 북한군은 야크 전투기와 전차로 대전 외곽을 공격하면서 일부 부대를 대전-옥천 사이의 요충지로 침투시켰다. 야크 전투기가 옥천 인근 철교와 대전비행장을 폭격한 데 이어 북한군 제4사단 5연대는 유성방면에서, 제16연대는 논산방면에서, 3사단은 금강을 건너 대평리에서 대전으로 진격했다. 가수원과 정림동, 유천동, 월평동과 계룡로, 서대전네거리 등에서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대전을 긴급 방문한 워커 사령관(왼쪽)은 딘 소장(오른쪽)에게 "20일까지 대전을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제공◇ 대전 시내가 뚫린 20일 새벽=북한군이 전날에 이어 20일 새벽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면서 미 24사단은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새벽 3시쯤 북한군의 전차와 보병들이 유성 방면에서 공격해 오면서 북한군 전차는 미 34연대 1대대 방어 진지를 통과해 후방으로 이동했다.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에 34연대 1대대와 19연대 2대대는 끝내 철수 명령을 내렸다. 통신두절로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던 딘 소장과 34연대장은 직접 3.5인치 로켓포를 쏘며 대응하는 등 분전했다. 이에 적의 전차가 파괴됐지만 일부는 시내로 진입하면서 시내를 휘젓고 다녔다. 서남쪽을 방어하던 미군도 밤새 전투를 펼쳤지만 오전 정림동 고개를 내줬다. 병력과 화력에서 열세를 보인 미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전에서 물러나려던 미군은 후퇴 과정에서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철수 시기가 늦어진 탓에 대전 후방은 우회 공격한 북한군에 의해 이미 차단된 상태였다. 북한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으로 대전시내 전역을 수중에 넣었고, 이미 금산과 옥천으로 향하는 도로까지 진출해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남동쪽으로 빠져나가려던 미군은 판암동과 세천터널을 장악한 북한군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금산 쪽 도로를 경유한 철수도 인민군 매복에 걸려 길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병력 열세와 지휘계통 붕괴, 퇴로차단으로 인한 혼란이 겹치며 미군은 급격히 무너졌다. 이날 오후 미군이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금산과 옥천으로 빠져나가면서 전투가 끝났다. 대전전투에 참전한 미군 3933명 중 전사 48명, 부상 228명, 실종 894명 등 모두 1150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전투장비도 65%나 잃었다. 그 과정에서 딘 소장은 퇴로를 잃고 헤매다 북한군에 잡혀 포로가 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대전을 다시 수복한 미군이 대전형무소에서 발견한 시체. 이 가운데 40구는 미군의 시체였다. 1950년 7월 20일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은 다시 포로가 된 미군의 상당수를 즉격처형한 것으 로 알려졌다. 사진 제공=대전일보◇ 3년여 동안의 포로=20일 대전전투에서 패한 딘 소장은 모든 연락이 끊긴 채 일부 부하를 수습해 금산을 거쳐 후퇴 길에 오른다. 부상병에게 물을 떠다 주려다 계곡으로 굴러 떨어져 실신했고, 길을 잃은 채 홀로 산 속을 방황하게 된다. 한 달여 헤매던 딘 소장은 8월 25일 전북 진안군에서 좌익의 밀고로 포로가 됐다. 딘 소장은 6ㄱ25 전쟁 중 포로가 된 최고위 미군 장교였다. 딘 소장 실종 직후 미군은 대전역으로 기관차를 보내 구출을 시도했지만 역 안에서 딘 소장을 발견하지 못했고, 적의 공격으로 후퇴에 오른 결사대는 세천역에서 또 집중적인 공격을 받기도 했다. 옥천역에 도착했을 때 생존자는 미군 1명, 철도원 2명에 불과했다. 딘 소장은 압록강 근처 만포진에서 3년여 동안 포로생활을 하다 휴전이 이뤄져 1953년 9월 4일 석방됐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그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했지만 딘 소장은 "지휘관으로서 나는 훈장을 받을 자격조차 없다"고 밝히는 한편, 한국정부에 자신을 밀고한 사람을 선처해 달라고 호소해 감형을 받도록 했다. 이 같은 행보로 미국 사회를 감동케 한 딘 소장은 1981년 82세로 운명했다. ◇ 단순한 패배 아닌, 전략적 승리=대전전투 패배 후 미군은 병력의 1/3 수준을 잃었고, 북한군은 사로잡은 미군 포로 중 상당수를 즉결처형하기도 했다. 대전은 7월 20일부터 9월 29일까지 67일간 북한군의 지배 하에 있었다. 이처럼 대전전투는 많은 희생을 기록했지만 전문가들은 단순한 패배로 기록하지 않는다. 48시간 동안 격렬하게 치러졌던 대전전투가 있어 미군과 한국군은 후방에서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의 본격적인 참전은 국군의 사기를 높였고, 대전에서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면서 지휘체계를 정비할 시간을 얻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미군 지휘부는 북한군의 전투력을 재평가하고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게 됐다. 미 제1기병사단이 영동 일대에 투입돼 낙동강에 저지선을 펴도록 시간을 벌어주기도 했다. 이에 대전전투는 오늘날 전략적인 승리로 재평가되고 있다. 대전 서구 보라매공원에는 대전지구전투 당시 대전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미군 전사자 명단이 기록돼 남아 있다. 7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전쟁의 상처와 희생정신은 곳곳에 녹아 있다. 한신협ㄱ대전일보=정민지 기자 <인터뷰> "대전전투를 기억해주세요" "여기저기서 폭격이 이어졌습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대전을 지키겠다고 전우들이 힘을 합쳤죠. 결국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26일 대전시 동구보훈회관에서 만난 노병은 전투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7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눈가에 깊어진 주름처럼 기억마저 흐릿해질 법도 하건만 전혀 개의치 않은 모습이었다. 노병의 이름은 김용대. 우리 나이로 올해 아흔세 살이 됐다. 김 할아버지는 국방경비대 9연대에 입대해 1901036이라는 군번을 받았다. 때는 1950년, 미 제24사단과 북한군 사이에 대전전투가 일어난 해였다. 그의 나이 스물둘이었다. 대전전투는 한국전쟁 때인 1950년 7월 14일부터 21일까지 대전지역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다.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격전을 펼쳤지만, 사단장마저 북한군의 포로가 되면서 결국 패퇴하고 만다. 당시 그는 신탄진 금강철교에서 펼쳐진 방어 작전에 투입됐다. 김 할아버지는 "낮이고 밤이고 항상 폭음소리가 쿵쿵 들렸다"며 "교대로 정찰하며 적군만 나타나면 반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치열한 대치 끝에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김 할아버지로선 늘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인민군과 제대로 된 교전을 펼치지 못하고 끝내 대전을 내어줬다는 점에서 일종의 부채 의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인민군이 폭격 때문에 밀고 들어올 수 없게 되자 조치원하고 공주 쪽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며 "잘못하면 포위를 당할 수 있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치러진 전투를 일일이 놓고 평가한다면 선뜻 '성공한 전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6.25 전쟁 개전 초기 북한군의 노도와 같은 공격을 막아줬고, 후속 부대의 전개 시간을 벌어줄 수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김 할아버지는 "대전은 국토의 중심으로, 이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짝궁이었던 전우는 폭격에 당해 오른쪽 다리가 끊어졌다"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어 "결국을 대전을 함락시키게 내줬지만 방어 작전을 했기 때문에 열흘이고 보름이고 지연할 수 있었다"며 "물론 방어를 잘했다고 볼 순 없지만 그래도 대전전투가 회자되지 않아서 가끔은 아쉽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그는 대전전투를 비롯, 6.25 전쟁이 잊혀 가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김 할아버지는 "항상 가슴이 아픈 게, 후손들이 6.25 사변을 알고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 한다"며 "우리의 과거를 기억해 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신협·대전일보=김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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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30 14:42

[한국전쟁 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전쟁 기억해야 할 미래 - 프롤로그

경기도 파주시 창동리 임진강 하구에서 동쪽을 향해 달려가면 일련 번호가 매겨진 팻말이 500~600m 간격으로 줄지어 있다. '0001호'로 시작하는 팻말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한반도를 가로질러 육지가 끝나고 바다를 만나는 강원도 고성군 명호리까지 248㎞ 달려간 뒤에야 '1,292호'로 마침표를 찍는다. 남쪽을 향한 696개와 북쪽을 향한 596개의 녹슨 표지판은 이곳이 남과 북을 가르는 '군사분계선(Military Demarcation Line)'임을 알려준다. 남과 북은 한반도의 동·서를 가로지른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DMZ)'를 사이에 두고 언제 다시 재개될 지 모르는 '전쟁의 폭탄'을 품은 채 살얼음판을 걷 듯 70년을 보내고 있다. DMZ을 만들어낸 한국전쟁은 1950년 6월25일 발발해 1953년7월27일 정전협이 체결되면서 중단됐다. 1,129일 동안 300만명의 사망과 실종자를 낸 동족상잔의 비극은 남과 북을 갈라놓고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마침표(.)'가 아닌 쉼표(,)'만 찍어놓고 여전히 대치 중이다. 이렇게 70년을 맞은 정전(停戰)의 시간, 그 물밑으로는 어떤 역사가 흐르고 있을까. 전북일보 등 지역 대표 언론 9개사가 소속돼 있는 한국지방신문협회는 한국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독자들과 함께 '끝나지 않은 전쟁'을 테마로 한국전쟁의 상흔을 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기억'의 공간으로 향한다. △첫 번째 여정 '쉼표' 그 첫번째 여정은 '쉼표(,)'다. 한반도가 포성에 휩싸인 1950년 6월25일 부터 포성이 멈춘 1953년 7월27일까지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대한민국은 이들의 희생으로 자유를 지켜낼 수 있었다. 한국전쟁 첫 승전 전투인 '춘천 대첩',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필요한 시간을 벌어준 '대전 전투', 임시 수도 부산을 지켜낸 '마산방어 전투', 대한민국을 구해 낸 '낙동강 전투', 한국전쟁의 분수령 '인천 상륙작전', 그리고 정전을 앞두고 처절하게 치러진 최후의 전쟁 '백마고지 전투'까지…. 박격포로 달려오는 적의 전차를 막을 수 없게 되자 화염병과 폭약으로 적의 전차에 뛰어들어 파괴한 젊은 군인을 비롯해 "내가 물러나면 나를 쏴라"면서 부하들을 독려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사단장 등 전장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조국과 자유를 휘해 희생한 영웅들의 숨소리를 찾아가는 길이다. △두 번째 여정 '물음표' 하지만 전쟁은 영웅들의 스토리만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누군가는 전장이 아닌 집에서, 마을에서 이유없이 죽어가야만 했다. 왜 무참한 죽임을 당해야 했는지에 대해 가해자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한국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 알려지지 않은 그 피해는 상당했다. 그래서 두번째 여정은 '물음표(?)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민간인들의 사망과 부상, 실종은 99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중에는 북한군은 물론 국군과 유엔군의 무참한 학살로 끔찍한 죽음을 맞은 민간인들도 많다.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불리는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이 대표적이다. 1950년 5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대전 동구 산내 골령골에서 벌어진 남북의 민간인 학살은 최소 1,800여명에서 최대 7,0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전남과 전북, 경남, 그리고 제주에서는 정부와 경찰이 죄 없는 민간인들이 좌익으로 몰아 살해한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이 자행됐지만 희생자 수 규명 등 진실 규명이 이뤄지지 않고 있고, 네이팜탄 폭격으로 인천 월미도 일대에서 희생된 100여명의 마을주민 역시 인천상륙작전의 기념비적 승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한국전쟁 이후 호남을 색깔 이데올로기로 물들게 한 '빨치산'의 역사와 아픔 등 숨겨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전쟁의 잔혹사를 찾아가는 여정은 1,129일 간의 전쟁보다도 더 아픈 여로가 될 듯하다. △세번째 여정 '말줄임표' 세번째 여정은 '말줄임표(…)'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이야기다.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고 기록해 우리가 이루지 못한 일을 후세에 연결시켜 주기 위한 길이기도 하다. 전 국토의 10%만 남은 절체 절명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전투는 낙동강 방어선, 일명 ‘워커 라인(Walker Line)’을 기점으로 한 낙동강 전투다. 이 곳에서의 승리로 국군과 유엔군은 대 반격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중요한 낙동강 전투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사실상 거의 없다. 낙동강 전투의 의미와 기념사업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기간 1,023일 동안 대한민국의 임시수도 였던 부산에는 당시 청부청사 등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현재 동아대 소유로 돼 있는 임시수도 정부청사는 국가등록 문화재로 지정돼 관리중이며 세계 유일의 유엔묘지와 2022 부산비엔날레 무대로 활용됐던 부산항 제1부두 창고 등의 유산이 남아있다. 세계전쟁사에 기록돼 있는 인천상륙작전을 오늘 다시 반추하고, 국립현충원에 잠들어있는 전사들을 다시 떠올리며, 마산만 전투와 춘천대첩의 기념관을 세우기 위한 노력들도 모두 후대에 역사로 전하기 위함이다. 아픔을 기억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아픈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게 똑같은 시련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짊어져야 할 또다른 책무다. 한국전쟁의 아픈 상처를 기록으로 남기고 자유와 조국을 위해 이름모를 산하에서 초개처럼 쓰러져간 영웅들을 기리기 위한 움직임은 그래서 중요하다. 때문에 세번째 여정의 또다른 의미는 '현재 진행형(Ing)'이다. △네 번째 여정 '느낌표'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평화의 댐 인근에는 백암산을 바라보며 철조망을 두른 언덕 안에 녹슨 철모를 쓴 10여개의 '비목'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1964년 어느날 화천군 백암산에서 수색대 소초장으로 근무하던 젊은 소위가 백암산 계곡에서 봤던 돌무덤과 이끼 낀 나무비(碑)를 떠올리며 만든 가곡 '비목'의 탄생지이다. 백암산은 1953년 6월부터 정전협정이 이뤄진 7월 사이에 벌어진 금성 전투의 핵심 전투이자 강원도 화천 백암산을 사수하려는 국군 5사단과 8사단, 6사단 7연대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고지전을 벌이며 피로 지켜낸 전장이다. 이곳에서 쓰러져간 국군 장병들의 유해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습되지 못해 돌무덤 밑에 남겨졌거나 이름모를 골짜기에 방치되기도 했다. 가곡 '비목'을 쓴 청년 장교 한명희씨가 보았던 비목의 주인공도 백암산 전투에서 스러져간 젊은 영웅 중 한명 이었을 것이다. 나라의 부름에 꽃 같은 젊음을 바친 비목의 주인이 꿈꿨던 모습은 어땠을까? 이름모를 산하에 묻힌 선열들과 우리가 희망하는 정전의 쉼표(,)가 종전의 마침표(.)로, 그리고 끝내는 통일 한반도에 한민족의 기쁨과 환희로 물결치는 느낌표(!)가 가득찬 모습을 기대하며 독자 여러분을 '기억'으로 향하는 여정에 초대한다. 강원일보=이명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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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16 16:56

[한국전쟁 정전 70년] 춘천대첩

‘치열하게 대전차포를 쏘는 군인들, 그 뒤에서 손으로 포탄을 들어 올리는 학도병, 지게에 포탄을 실어 나르는 시민….’ 춘천시 근화동 소양2교 부근 ‘춘천대첩 기념 평화공원’에 있는 한 조형물의 모습이다. 이는 낙동강 전투,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6·25 전쟁의 3대 대첩으로 꼽히는 ‘춘천대첩’ 의 의미를 한 눈에 보여준다. 춘천지구 전투는 1950년 6월 25일부터 6월 27일까지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제19연대가 북한군 제2군단 소속의 제2사단에 맞서 전개한 방어 전투였다. 국군 뿐만 아니라 경찰, 학생, 제사(製絲)공장의 여공을 비롯한 수 많은 시민들이 북한의 기습 공격에 함께 나선 전투였다. 이로써 병력 열세를 딛고 ‘24시간 내로 춘천을 점령해 수원 방면으로 기동, 국군을 포위한다’는 북한의 목표를 좌절 시킨 전투였다. △전쟁의 징후, 새벽 기습 공격 1950년 6월 19일 오후 3시. 춘천 방면을 방어하는 제7연대에 투항한 북한군 1명이 북한의 공격 개시 정보를 털어놓았다.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6월 23일 야간 작전 회의를 소집하고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하며,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에게 외출·외박 통제를 건의했다. 김 대령은 이를 허가했다.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포병 공격 준비사격이 시작됐다. 화천에서 춘천에 이르는 관문인 ‘모진교’ 남쪽에 배치된 국군 9중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 중대장, 소대장이 전사하며 지휘 체계가 무너졌고, 북한군은 모진교를 점령했다. 당시 북한의 전투력은 국군 보다 병력면에서 4배, 화력면에서 10배 우세했다. 양구에서 춘천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했던 북산면의 ‘내평리’도 위기였다. 제7중대가 철수 하고 있을 때 춘천경찰서 내평지서는 국군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북한군에 포위됐다. 내평지서장 노종해 경위와 경찰관 12명, 대한청년단원들은 내평지서 주변에 모래 주머니를 쌓아 진지를 구축하고 1시간 이상 맞섰다. 치열한 교전 끝에 노종해 경위 등 11명이 전사했다. 경찰들이 격전을 치르는 동안, 국군 제2대대는 소양강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경찰청은 내평지서 전투 전사자를 포함해 6·25 전쟁 전사자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2000년 강원경찰충혼탑을 세웠다. 해마다 강원경찰청장들은 부임 후 춘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이곳을 들러 추모하고, 임기를 시작한다. △포탄을 나른 시민들 … 첫날 방어 성공 남침 공격 첫날 소양강을 건너 춘천을 점령 하려던 북한군의 계획은 실패했다. 여기에는 ‘옥산포 전투’가 있었다. 옥산포는 북한강 상의 작은 포구로 화천에서 춘천으로 내려오는 길목의 요충지다. 국군 제7연대의 경계 진지를 돌파한 북한군 제6연대는 SU-76자주포를 앞세워 내려왔다. 정오에 북한군의 주력이 넓은 보리밭에 나타나자 제7연대 제1대대는 사격을 개시했다. 병력 손실을 입고 퇴각한 북한군은 오후2시께 자주포 10대를 앞세워 다시 옥산포로 공격해 들어왔다. 이를 기다리고 있던 제2소대는 57㎜ 대전차포로 북한의 자주포를 타격했다. 곧 바로 특공조가 휘발유병과 수류탄으로 적 자주포 3대를 파괴했고, 자주포에서 뛰어내려 도주하려던 승무원을 생포했다. 북한 제2군단장 김광협은 옥산포 남쪽에서 패배했다는 보고를 받고 “안색이 흙색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국군이 각종 실탄을 확보하는데 춘천 시민들의 힘이 컸다. 제16포병대대는 소양강 북쪽의 대대탄약보급소에 있던 탄약을 소양강 건너편 남쪽으로 옮겨 포탄 5,000발 등을 확보했다. 제16포병대장 김성 소령은 “학생, 시민들의 도움으로 탄약을 대부분 운반할 수 있어 탄약 부족은 걱정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소양강 방어선 전투 첫날 전투에서 패배한 북한군은 제2사단장을 교체하는 강수를 뒀다. 해임된 이청송의 후임으로 부임한 북한 제2사단장 최현은 26일에는 춘천을 점령하려고 했다. 국군 제7연대가 전쟁 첫날 춘천을 지켜, 원주에 주둔하고 있던 제19연대가 증원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제19연대 2대대는 우두산 일대의 방어 진지를 점령하고 제7연대 1대대를 지원할 태세를 갖췄다. 26일 새벽 3시께 북한의 공격이 시작됐다. 북한군은 오전10시부터 SU-76 자주포를 소양강 북쪽에 두고 봉의산(강원도청 뒷산) 연대 관측소는 물론이고, 소양강 제방 진지에 직격탄을 퍼부었다. 북한의 총공격에 대전차포 소대원들이 두려운 마음에 진지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를 목격한 소대장 심일 중위는 진지로 뛰어들어 직접 대전차포 사수가 되어 사격을 개시했다. 대전차포 소대는 북한군의 춘천시내 진입을 막았다. 북한군은 소양교 돌파가 실패하자 가래묵나루로 소양강 도하를 시도했지만 국군의 포격을 받았다. 북한군은 엄폐물이 없는 강변의 모래사장에서 일방적으로 포격을 맞으며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제6사단은 이틀에 걸쳐 춘천을 사수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전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작전상 후퇴와 춘천 함락 북한군은 27일 새벽 5시부터 소양강변과 봉의산 일대에 포격을 시작했다.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춘천의 행정기관, 시민이 탈출 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지연전을 실시하기로 결심했다. 27일 정오 무렵, 국군 제7연대의 방어도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북한군은 자주포를 앞세워 이날 13시께 소양로 1가에서 4가를 점령하며 사실상 춘천의 중심부를 모두 점령했다. 오후 6시께 춘천의 최종 방어선이 돌파됐고 임부택 중령은 철수를 명령했다. 북한군이 시가지에 진입하자 시민들도 피난을 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3일간 치열하게 북한군 제2군단의 진격을 저지함으로써, 개전 초반 국군이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28일부터 북한군 시체를 소양강에서 건져내는 작업이 시작됐다. 꼬박 3일이 걸렸다. 이 작업을 했던 노병 김장현씨는 훗날 춘천지구 전투 연구진과의 인터뷰에서 “그 이후 해마다 6월 26일과 8월 추석이 되면 소양강에 가서 술을 한잔 부어놓고 영혼이라도 편히 잘 살라고 기원했다”고 말했다. 자신과는 개인적으로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인데 죽였다는 무거운 마음 때문이었다. 당시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도 없었다. 전쟁을 기록하고 기억해야 하는 건, 이런 비극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 아닐까? 강원일보=신하림 기자 <인터뷰> “위기의 순간, 학생들은 후퇴 없이 포탄을 날랐다” 학도병 참전- 박기병 재외동포저널 회장 춘천대첩 기념 평화공원에는 ‘6·25 참전 학도병 기념탑’이 있다. 탑 뒤편에는 강원도립 춘천농업대(현 강원대), 춘천사범학교(현 춘천교대), 춘천공립중학교(현 춘천고), 도립 춘천농업대학 부속농업중학교(현 소양고), 춘천고등여학교(현 춘천여고)에 재학 중이었던 500여명의 명단이 새겨졌다. 춘천사범학교 8회 학도병 명단 중에는 ‘박기병’이 있다. 국내 언론계 대표 원로인 양구 출신 박기병(91) 재외동포저널 회장이다. 대한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한 그는 ‘춘천대첩 기념관을 건립하자’는 칼럼을 꾸준히 쓰며, 춘천대첩을 후대에 알리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당시, 박 회장은 춘천사범 학교 3학년 졸업반으로 교생실습을 나갔다. 이날 오후에는 피난민 행렬이 시내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배석 장교(교련 교사)는 “우리 학생들도 이런 난국에는 국방의 의무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박기병 회장을 비롯한 춘천사범학교 학생들은 학도호국단 단원으로 춘천대첩에 참전했다. 탄약고(현 남춘천역 인근)에서 포탄을 들어, 포 진지였던 춘천사범학교까지 날랐다. 당시 16포병대대는 춘천사범 학교 앞에 105㎜ 포를 배치했다. 박 회장은 “포탄을 하나만 들어도 벅찼고 낑낑댔지만, 학생들은 후퇴하지 않고 날랐다” 며 “우두동에 있던 동방제사 춘천공장의 여공들도 주먹밥을 만들어 군인과 학생들에게 제공하며 도왔다”고 말했다. 그는 6·25 전쟁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춘천대첩이 변변한 기념관 없이 잊혀지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박기병 회장은 “중국 산동성의 유공도에 가 보면 갑오전쟁기념관이 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에게 패전했지만 후세에게 왜 패전했는지, 망국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 교육의 장으로 만든 기념관” 이라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강조했다. 강원일보=신하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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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1.16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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