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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 이종호
굵은 소나무 껍질이 세월의 깊이를 말해준다. 솔 향은 둔해진 후각을 자극하고 아름드리 적송의 의연한 자태는 잠자던 이미지를 깨운다.

 

마음이 울적하고 삶의 좌표를 찾지 못해 방황할 때 찾아가는 곳이 국사암에서 불일암 가는 길이다. 지리산 골골마다 아름다운 길이 있지만 이 길은 내 몸의 생태계를 원시로 회귀해주는 묘한 마력이 있다.

 

어느덧 내 몸은 편리함만 좇아가는 문명화된 도시적 삶에 익숙해져 있다. 걷는 시간이 많지 않아 몸은 점점 둔해지고 마음마저 삭막해진 느낌이 들 때면 훌쩍 떠나는 곳이 국사암이다. 암자는 지친 영혼을 달래주는 안식처요, 가문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단비다. 훌쩍 떠나면 반겨줄 곳이 있고 기댈 수 있는 곳이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헝클어진 머리도 추스르고 검게 그을린 마음도 헹구어 바람에 말릴 수 있는 곳으로 떠났다.

 

솔잎이 떨어진 산길은 살포시 내린 비에 젖어 발바닥의 촉감이 부드럽다. 작년에 보았던 나무들도 반갑게 맞아준다. 노란 생강나무꽃과 눈웃음을 하고 돌아서자 갈참나무가 해맑게 미소 짓는다. 붉은 문양으로 단장한 서나무도 살갑게 다가온다.

 

수많은 나무가 공존하며 살아가는 걸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경쟁에서 승리하는 사람만이 짱짱하게 버티는 우리네 삶과 비교하면 산속 나무들은 얼마나 순수하고 덕스러운가. 인간은 나이 들수록 병들고 추해져 말년에는 단절된 삶을 살다 사라지는데 나무는 해가 갈수록 품위 있고 의젓한 자태를 갖추고 있으니….

 

한참을 걷다 보니 심장이 점점 빨라지며 호흡도 가빠진다. 잠자던 몸의 이곳저곳에서 격렬한 반응으로 신호를 보낸다. 느리게 돌던 혈관 속의 피가 빠르게 움직인다. 세포가 기지개를 켜자 몸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머릿속도 맑은 기운이 들어와 투명해진다. 산이 주는 행복 바이러스다.

 

스님 한 분이 장삼 자락을 스치며 지나간다. 지금도 구도의 길을 찾아 떠날 때의 초발심을 지니고 있을까? 아니면 속세를 그리워하는 마음일까? 괜한 의문을 품으며 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불일암이 가까운 듯 거센 물소리가 들린다. 불일폭포다. 수직으로 파문을 일으키며 낙하하는 물줄기가 햇살에 비쳐 무지개를 연출한다. 물살은 깨지고 부서지고 흰 포말을 지으며 계곡을 따라 흘러간다. 불일폭포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흘러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어 생명의 물로 환원할 것이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쓴 지리산 유람기를 보면 세속에서 그리는 이상형인 청학동 가는 길이 불일폭포를 지나는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내가 서 있는 이 길이 바로 현실의 땅과 이상향의 경계인 것이다. 몸은 현실이고 마음은 이상향으로 가는 경계에 서 있는 나의 심정과 닮았다.

 

때로는 삶이 힘겹고 좌절을 겪을 때 건너는 피안의 세계. 결국 내 마음이 안과 밖 사이를 구분 짓는 것은 아닌지. 문득 떠오른 이런 생각들이 각성을 일으키는 분발심으로 작용하는 나를 바라본다. 생각이 일어나는 뿌리를 찾아가면 내가 보인다. 이 길 위에서 어느덧 내 마음은 촉촉한 생명의 물로 촉촉하다.

 

△수필가 이종호씨는 1999년 〈표현〉신인문학상으로 등단. 계간〈문예연구〉편집장·계간〈역사와문화〉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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