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산골 무주가 아름다운 것은 넉넉하고 덕스러운 덕유산 때문이요. 덕유산이 경이로운 것은 심산유곡의 대명사인 구천동과 천혜의 33경 때문이다. 나제통문에서 70리를 장장 흘러가는 금강 상류 구천동 계곡을 따라 32경이 연이어지며 덕유산 향적봉에서 그 경이로움이 절정을 이루게 된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던 나제통문 앞에 서면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를 멸망시킨 동족상잔의 비극을 떠올리게 된다. 거북바위가 숨어 있는 형상의 은구암을 지나 청금대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거문고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백옥 빛 물길을 따라 오르면 용이 승천하려고 십년을 공들였다는 와룡담이다. 일사대를 휘감아 오르는 물이 마치 누운 용 형상의 바위를 맴돈다. 옛적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학소대의 노송은 어디로 갔는지 행적이 묘연하다.
조선 말기의 문신 일사 송병선이 아름다운 경치에 매혹되어 서벽정을 짓고 후진을 양성했던 일사대는 천년송을 머리에 인 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봄이면 철쭉이 개울을 곱게 물들이는 함벽소는 한 폭의 동양화다. 가의암에서 바둑을 두던 신선들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추월담은 임진왜란 때 명장 김천일 장군의 장인이었던 양 도사가 가을밤 연못에 비치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달을 보고 도를 깨친 곳이다. 만조탄은 구천 승려들의 먹을 쌀 씻은 물이 흘러서 뜨물재 또는 뜸재로 불리는 10경의 명소다.
구천계곡을 휘어 감는 맑은 물이 급류를 타고 돌아 쏟아지는 파회의 폭포수에서는 물보라가 일며 일곱 빛깔 무지개가 피어오른다. 백옥처럼 깨끗한 마음 같다는 수심대와 세심대에서 세속에 찌든 심신을 씻고, 물거울로 불리는 수경대에 설익은 내 삶을 비춰본다. 월하탄은 기암을 타고 쏟아지는 은빛 물결이 달빛에 비치는 장관을 연출한다. 신라 인월화상이 절을 짓고 수도하던 인월담을 지나면 칠봉의 사자가 내려와 목욕한 사자담이다. 반석이 깔려 있는 청류동과 선녀들이 구름을 타고 내려와 목욕을 하고 비파를 뜯었다는 비파담, 신선이 차를 달여 먹고 담배를 피웠다는 다연대에 서면 마치 선계에 와있는 듯 싶다.
백련사 계곡과 월음령 계곡의 물이 만나는 곳은 구월담이다. 여울소리가 거문고의 음률처럼 들리는 금포탄과 심산유곡의 청류와 바람소리가 절묘하게 하모니를 이룬다. 칠봉의 호랑이가 산신령의 심부름을 가다가 안개 때문에 빠져서 울부짖었다는 호탄암에서 안심대까지 이어지는 맑은 계곡은 청류계로 불린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어느 신하가 세조에게 쫒기다 여기에 와서 마음을 놓았다는 안심대는 백련사를 오가는 산꾼들의 휴식처다. 신양담에서는 무성한 숲 터널이 이어지다 비로소 하늘이 열리며 햇빛을 볼 수 있다.
거울처럼 물이 맑은 명경담과 구천폭포는 선녀들이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놀았던 음밀한 놀이터다. 백련사 스님들이 몸과 마음을 씻었다는 백련담을 지나면 여러 개의 직소폭포들이 연꽃처럼 다가오는 연화담이다. 사바세계를 떠나는 중생들이 속세와의 연을 끊는 곳 이속대는 백련선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백련사에서 지척이다. 백련사에서 다리쉼을 하고, 허위허위 숲길을 오르면 어느덧 33경의 절정인 덕유산 향적봉에 닿는다.
아마도 향적봉에서 산하를 굽어보는 조망은 산꾼에게 주어진 특권일 게다. 장엄한 일출과 산허리를 휘감은 황홀한 구름바다, 겨울산행의 백미인 설원과 눈꽃터널, 덕유평전의 푸른 초원길과 늦여름의 원추리의 향연도 환상적이다. 바로, 덕유산의 경이로움과 구천동 33경에 내 마음을 빼앗긴 이유다.
△수필가 김정길 씨는 2003년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 수필집 〈어머니의 가슴앓이〉 등 4권의 수필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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