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에 매달린 호박을 건사하는 넝쿨손. 바투 쥠이 옹골차다. 고구마 순을 추어올린다. 우두둑, 줄기마다에 내린 하얀 고독들도 따라 뽑힌다. 쇠해지는 귀뚜라미 소리에 밭 자락의 까마중도 서둘러 제 온 곳으로 갈 채비를 하는 텃밭.
수돗간 옆 자두나무에서 늦여름을 갉아먹은 쐐기가 미끄러진다. 내 생각의 실타래도 아득한 기억 저편으로 굴러간다. 옆구리 연한 살을 쏘인 것 같은 통증의 시간들. 나는 쐐기 한 마리와 함께 산다. 습관처럼 솟구치는 생각의 독점들 때문에 힘들었을 내 가족과 주변들을 향한 참회의 쐐기.
옆구리 쓰리는 횟수가 늘어나면서부터 나는 사람 목소리보다 텃밭의 생명들 속삭임에 귀 기울였고 통증을 잊게 하는 자두의 신맛에 익숙해졌다. 고추, 토마토, 땅콩, 단호박, 해갈음을 알리는 매화. 살갑고 사근사근하지 않아도 좋다. 눈으로 하냥 매만지다가 내려놓는 아쉬움은 섹스다. 지나온 허물들이 눈물샘에 들 때는 서둘러 하늘을 본다.
‘지이~나 가버린 이~일을 헤아려, 보오네~’ 손전화 노랫말이 텃밭을 덮는다. 왕치가 더듬이를 들어 낯선 소리를 벗겨낸다. 틀림없이 교장으로 재직 중인 지인일 것이다. 토요일만 되면 등산을 가자며 조르는 그는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성미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잘 받지 않는다는 지청구를 늘 듣는다. 전화에 연연하지 않는 것은 성격 탓도 있으나, 전화 올 곳도 특별히 기다려지는 전화도 없다. 그러나 8년 동안 폴더폰을 쓸 때는 폰걸님들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일이 낙이었다. 그녀들이 스마트폰으로 스마트하게 바꾸라고 전화를 걸어 내 귀와 입의 거미줄을 걷어 주었다. 오랫동안 그녀들은 나를 찾았다. 그러나 폴더폰을 더 이상 고칠 수 없다는 판정은 결국 나를 스마트하게 했다. 스마트폰으로 바뀐 뒤부터 그녀는 멀어졌고 나도 전화에 무관심이다. 이러한 나를 보고 Y 교장은 사회생활 운운하며 성화다. 추어올리던 고구마 넌출을 놓고 토마토 지지대에 걸어놓은 전화기를 향해 간다. 받기도 전에 끊긴다. 액정에 나타난 이는 예상대로 Y 교장이다.
다시 벨이 울린다. ‘나는, 나는 처얼~없는 나는, 자유인인가~’ 가수 남화용의 ‘나는 자유인인가’ 노랫말에 끌리는지 왕치가 몸을 돌린다. 가만 바라본다. 왕치도 내 표정을 향해 투박한 더듬이 길게 뽑아 다가온다. 저 더듬이 사이로 여름이 머물다 갔고 가을이 오고 있다. 이 별에서 살아가고 사라지는 수많은 것 속에서 어떤 인연인가. 누가 저 이름을 나에게 주었는가. 나는 배귀선이고 너는 왕치. 노자는 ‘명가명 비상명’이라 하였으나, 어찌 이름 하지 않으면 기억할 수 있을까. 생과 사는 ‘비상명’이라 할지라도 과정은 이유이고 이름이다. 맑음도, 흐림도 뒤에 비를 두고 있듯 인식이 보이지 않을 뿐 너와 나, 무에 다르랴. 곁, 콩꽃 작은 입술이 푸르디푸른 휘파람을 분다.
“배 선생님, 학생들 시화전을 하는데 선생님의 시도 몇 편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Y교장의 목소리다. 귀뚜라미 소리만큼이나 날 세울 줄 알았는데 의외다. 귓불에 걸려 유리구슬 몇 개 짤랑거릴 거라 긴장했던 귀가 순해진다. 그러나 웬 걸 한 마디 더 걸친다.
“아따, 근디 어쩐 일이다요, 전화를 두 번 만에 다 받고?”
“전화를 밭에 걸어 놓고 있었습니다.”
“늘 말하던, 그 시밭 말이오?”
감나무의 까치소리에 익어가는, 가을볕 한나절이다.
△배귀선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 '문학의 오늘'의 시 부문으로 등단했다. 현재 부안에서 다랭이 밭을 부치며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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