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고 난 후 산 숲은 로맨틱하다. 물기 머금은 잎은 한층 더 푸르다. 푸른 잎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은 은초롱으로 빛난다. 그 싱그러움에 이끌려 눈부신 햇빛도 숲을 향해 달려들고 새들도 숲 속에서 노래를 부른다.
지난 주 가까운 산에 올랐다. 숲길을 걸을 때 푸른 기운이 허공에 가득했다. 머리 위로 파란 물이 듣는 듯 했다. 불어오는 초록바람에 심란한 내 마음을 세탁했다. 콧속으로 흡입된 청량한 공기가 메마른 내 영혼까지 씻어냈다.
지금 전국의 산야는 온통 초록 일색이다. 산도, 들도, 강도, 도시도 초록이다. 그야말로 싱싱한 녹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나무들로 빼곡한 숲은 마치 초록빛 바다와 같다.
만약 모든 나무들의 색깔이 까만색이나 하얀색이라면 어떻게 될까. 까만색은 너무 어두워 답답하다. 혐오감이 느껴질 것이다. 밤낮으로 시커먼 가로수가 늘어서 있다고 가정해보자. 마치 저승사자들이 일렬횡대로 늘어서서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하얀 나무는 또 어떤가. 너무 밝아서 춥고 싸늘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산에 모든 나무들이 하얀색으로 도색돼 있다면 사시사철 한 겨울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또 가로수나 정원수가 하얀색이라면 이는 마치 소복을 여인처럼 느껴질 것이다. 물론 백의의 천사나, 방금 웨딩마치를 한 신부 같기도 하겠지만….
초록, 그곳엔 무한한 생명이 숨 쉬고 있다. 초록은 자연과 평화를 상징한다. 초록은 정신 활동에 지친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고 지적 능력을 향상시켜준다. 초록은 심리적으로 자극을 주지 않고 감정의 안식을 얻는다. 초록으로 뒤덮인 숲은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준다.
독일 작가 아스트트 폰 호노레드 드르프는 “사랑이 푸른 화환을 쓰면 내 모든 감각은 초록색이 된다. 가슴 속에서 사랑을 갈망하는 자는 언제나 초록색을 지닐만하다. 그러므로 사랑의 기가 꺾인 자는 절대로 초록색을 걸쳐서는 안 된다.”는 연애시를 발표한 바 있다. 아랍권에서 ‘알 카디르’는 ‘초록빛 남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황야에서 방황하던 유목 민족들을 물가로 인도해 생명을 유지시켜준다. 깨달음의 여행을 떠난 알 카디르는 마침내 생명의 산 위의 구름 위로 올라가 생명의 물을 마시자 그의 옷은 초록색으로 바뀌었고 영생을 얻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꽃봉우리, 잎새, 과일 등 모든 식물에서 색의 시작은 초록이다. 이처럼 땅에서 자라나는 모든 것에는 초록색이 가장 먼저 주변을 장식하는 것이다.”고 역설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색깔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빨강색을 좋아하고, 노란색을 좋아하고, 또 어떤 사람은 분홍색과 자주색을 좋아하기도 한다. 그러나 꼭 한 가지를 집어내라면, 그것은 초록이다. 나는 그 많은 색깔 중에서 연초록을 좋아한다. 정서가 불안정할 때 초록이 옆에 있으면 생명력을 회복시키고 마음에 평화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희망을 말할 때 ‘내일의 푸른 꿈을 꾸자’라고 하지, 노란 꿈이나 빨간 꿈을 들먹이지 않는다. 그만큼 초록은 절대적인 희망의 상징이다.
5월도 어느덧 하순으로 접어든다. 지난 6일이 입하(立夏)였기에 절기상으론 이제 여름에 해당한다. 이쯤 되면 천지만물은 성장속도가 빨라 무성히 자라기 시작한다. 신록의 나뭇잎은 윤기를 더하고 그렇지 않은 나무들은 마지막으로 싹을 틔워 푸르름의 여름으로 넘어가고자 몸부림친다.
이제 곧 녹음이 무성해지는 여름이 올 것이다. 아니, 벌써 여름이 온 듯하다. 한여름 짙푸른 숲에 들면 어둑하고 서늘한 산의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다. 여름은 청춘의 계절이다. 청춘은 젊고 패기가 넘친다. 따라서 초록의 의미는 생명력, 안심, 진정, 긴장이완, 묵상이다. 초록은 내가 살아있다는 생명의 빛이다.
△수필가 신영규씨는 1995년 월간〈문예사조〉, 1997년〈수필과비평〉으로 등단. 수필집 〈숲에서 만난 비〉 〈사랑을 소매치기 당한 여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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