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내내 자올자올 졸다가 친구의 농원에 놀러갔지요. 그냥 한 바퀴 휘 돌아볼 요량이어서 운동복을 입은 채로 편한 신발 직직 끌며 어슬렁거렸어요. 친구 내외는 없네요. 가까운 절에 기도드리러 간 게지요. 팔순의 어머님이 가끔씩 정신을 놓으시거든요.
마당 한 쪽엔 바람이 미루나무 잎을 되작되작 들추며 놀고 있었고 작은 꽃들은 눈을 뜬 채 졸고 있었어요. 풀들도 팔 다리를 힘없이 늘어뜨리고는 끄덕끄덕 졸음에 잡혀있네요. 간간히 끼어드는 산비둘기의 딸꾹질 소리로 고요가 잠깐씩 일그러지기도 했어요.
현관 앞 평상에 앉아계신 친구 어머님께 건성으로 인사를 했어요. 어머님도 내 인사는 아랑곳 않고 대문 너머 큰길 쪽만 기웃거리시네요. 멀리서 가물거리는 모습만으로도 아들은 용케 알아보시거든요. 혼자서 농원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오라는 데도 없고 갈 데도 없어 마냥 늘어지기 좋은 날이었지요. 대강대강 농원의 농작물과 화초들을 스치며 지나가는데 선명하고 말간 꽃대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갓 태어난 병아리의 종아리처럼 발그레했지요. 친구 내외가 오랫동안 기른 둥근바위솔이지요. 얼마 전까지도 아무 기척 없이 잎만 덩그렇더니 제 깜냥으로는 여린 꽃대를 끙끙 밀어 올렸나 봅니다. 앙증맞다는 생각을 하며 가까이 다가서다가 흠칫 물러섰습니다.
눈 밝은 햇살이 둥근바위솔의 갓 피어난 꽃숭어리 위에 둘러주신 원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법 나이를 먹은 바위솔은 몸 전체가 휘우듬하니 기울어져 있었고, 묵은 잎 위에 올린 새 잎은 마치 부처님이 앉아계신 연화대처럼 보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싱싱한 연화대였습니다. 비스듬히 기운 연화대에 앉아 온몸 빨개지도록 용을 쓰던 어린 꽃대가 이제 막, 한 생각 터트리신 겁니다. 깨우치는 순간을 지켜보며 기다려 준 햇살이 얼른 후광을 씌워드렸고요. 늘어질 대로 늘어져 신발 직직 끌고 다니던 나도 재빨리 두 손 모으고 싶었습니다. 신발 고쳐 신고 옷섶 여몄지요.
세상일을 하나씩 놓아가는 친구 어머님도, 어머님의 마른 손을 요리조리 핥아주고 있는 고양이도 부처님이었지요. 세상에나! 자꾸 미끄러지는 모래 비탈 위에 그지없이 편안하게 가부좌한 강아지 똥은 또 어떻고요. 자기 농원에 이렇게 많은 부처님을 두고 친구 내외는 어느 부처님에게 빌러 갔을까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풀들은 그대로 한 송이 꽃이네요. 보드랍고 여린 상추 잎 안에는 세상의 모든 길이 다 환하게 들어있어요. 화려했던 봄꽃을 지우고 꼬투리에 든 열매들은 둥글어지기 시작했고요. 알 속의 갑갑한 시간을 잘 견딘 애벌레는 나무와 외로움을 나누어 가졌어요. 제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제 일에 정성인 모든 것들이 다 깨달은 것들이었어요. 바다를 의식하지 않고 졸졸 흐르는 도랑물 소리가, 마당귀에 의젓하게 서 있는 미루나무 세 그루가, 미루나무에서 놀고 있는 천진한 바람이 나에게는 경전이네요.
혼자서 끙끙 앓다가 웃다가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꼼짝 못했네요. 햇살이 몸을 기울여 마지막 고운 빛만을 골라 하늘 가득 펼쳐놓으시고는 휘적휘적 서쪽 산을 넘어가네요. 친구 내외가 대문을 밀치는 소리가 내 적막을 흔들고 나서야 발이 저리다는 것을 알았어요. 돌아가는 길엔 휘파람 한 곡조 불며 주머니 속에서 짤그락거리는 생각들로 물수제비나 뜰까요?
△김영 시인은 김제 출신으로 지난 1995년 〈자유문학〉으로 등단한 뒤 시집 〈눈 감아서 환한 세상〉, 〈다시 길눈 뜨다〉, 〈나비 편지〉와 수필집 〈뜬 돌로 사는 일〉, 〈쥐코밥상〉, 〈잘가용 어리광〉 등을 냈다. 독서대상 대통령상, 신지식인상, 전북문학상, 전북시인상, 전북여류문학상 등을 받았다. 현재 전북시인협회장를 맡으며, 김제 만경여고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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