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근무가 없던 막내딸과 함께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외손녀의 발레 수업을 구경했다. 앳된 여섯 살의 외손녀는 엄마와 함께 모처럼 서울에 오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보더니 함박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마음껏 실력발휘를 하며 의기양양하다.
외할아버지는 수업이 끝나고 나온 외손녀가 하도 깜찍하고 기특해서 덥석 안아주고 싶어 팔을 벌렸지만 냉정하게 뿌리치며 제 엄마에게 달려가 손을 꼭 잡고 놓지를 않는다. 그러더니 점심을 먹으러 내려가려던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마디 던진다.
“엄마, 이제 회사 나가지 마!”
외손녀의 갑작스럽고 단호한 말에 모두는 뜨끔하며 당황스러워 했다. 잠시 후 막내딸이 딸아이와 눈을 맞추고 나긋나긋 말했다.
“엄마가 회사에 가야 발레도 배우고 책도 사고, 또 ‘담은’이가 좋아하는 음식도 많이 사먹을 수 있잖아?”
그러나 외손녀는 그 이유도 이제는 달갑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나도 외손녀의 폭탄 발언을 잠재울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선 듯 떠오르지 않는다.
“엄마, 얘가 전엔 안 그랬는데 요즘 가끔 이러네요.”
막내딸이 내게 하소연이라도 하듯 콧등을 찡긋하며 불편한 심정을 전한다. 조금 전까지 앙증맞은 발레 몸짓으로 기쁨을 주더니 점심시간 내내 우리를 근심 속으로 몰아넣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제 엄마가 회사에 나가 돈을 벌기 때문에 자기 선물도 사주고, 예쁜 옷도 산다며 어미의 출근을 당연시하고 아침마다 엄마의 출근길에서 고사리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직장에 다니는 엄마 때문에 갓난아기 때부터 보모에게 맡겨 길러져 보모의 등이 안락한 요람이요 보모의 품과 냄새가 포근한 엄마였다. 그래서 직장에서 돌아와도 보모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던 아이가 내심 서운했지만 오히려 다행이라 여겼다. 대개 아이들은 갓난이 때부터 낯가림을 안 하고 덥석덥석 안겨 귀여운 것인데, 외손녀는 보모 외에는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는 예민함 때문에 안아보고 싶은 우리 내외의 간절함에도 매번 서운하기만 했다. 그래서 막내딸은 그런 제 딸 때문에 늘 우리에게 미안해하며 외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지금은 벌써 엄마가 되었지만 나의 막내딸도 병설 유치원 제도가 없던 시절, 나이 어린 가정부에 맡겨져 쓸쓸한 하루를 보내야 했다. 나의 맞벌이 시절이었다. 다섯 살 막내딸은 아침마다 출근을 서두르는 엄마를 보며 늘 불안한 마음에 힘들었을 것이다. 출근길을 가로막으며 울어대는 아이를 우격다짐으로 겨우 뿌리치고 도망쳐 나오면 골목 끝까지 들려오는 딸의 울음소리는 내 가슴을 후벼 파며 종일 심한 통증이 되곤 했다. 직장을 그만두어야겠다는 갈등 속에서 세월이 갔고, 아이들은 고맙게도 바르고 지혜롭게 잘 자라 주어 육아와 살림에 쫓기던 직장생활의 엄마를 후회하지 않게 했다.
유난히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하던 그 막내딸, 그 딸의 딸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불쑥 던진 한마디가 계속 마음을 저리게 한다. 네 명의 자녀를 돌보며 직장 일과 살림, 그리고 여러 선영을 모셨던 종부의 고단했던 내 삶이, 특별한 자랑일 수만은 없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나의 옛 시절이니, 동생 하나 낳길 소망하는 속마음도 덮어둘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어미는 육아를 우선으로 해야 하지만, 가계에 도움도 되고 무엇보다 자기 전문성을 살리는 일이 있다는 긍지는 직장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담은아, 요즘 왜 할머니 전화도 안 받아?”
“할머니, 나도 요즘 힘들어.”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 하는 내 간절함을 거부하는 냉정한 외손녀다. 유치원 다니랴, 수영 배우랴, 발레 배우랴. 악기공부 하랴, 여섯 살 외손녀도 요즘 무척 바쁘고 힘들어서 전화 못 받는단다. 엉뚱한 이유도 귀엽기만 하니 우리 내외도 분명 ‘손녀 바보’가 틀림없다.
제 핑계처럼 어린 몸이 바쁘다니 제 엄마의 어린 시절처럼 종일 어미만 찾으며 쓸쓸한 하루를 보내지는 않을 것 같아 차라리 힘든 게 낫지 않을까 싶어 다행이다.
△김덕남씨는 〈대한문학〉으로 등단했으며, 한국 수자원공사가 주최한 ‘제 5회 K-water 물 사랑 공모전’에서 수필부문 은상 수상했다.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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