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전주한옥마을을 느린 걸음으로 걷는다. 학창시절을 보냈던 낯익은 골목들이 예전과 달리 활기가 넘친다. 이제는 화려한 색채로 물든 생동감이 내 걸음을 경쾌하게 한다. 한복을 입고 거리를 누비는 풋풋한 젊은이들이 한옥마을의 꽃으로 피고 있다. 근래 집안 대소사나 기념일에 입는 예복처럼 간주되던 한복을 젊은이들이 여행 중에 입고 들뜬 기분을 만끽한다.
한옥마을에 이는 한복 입기 열풍을 타고 나의 옛 추억이 떠오른다. 한옥마을에 학교가 있었던 나는 그 주변에서 자취를 하면서 살았다. 좁은 골목 끝에 처마가 낮은 기와집에서 살았던 자취방은 늘 썰렁했다. 귀가할 때도 맞아주는 가족이 없고, 저녁이 되어도 동생이 귀가를 하면 더 이상 찾아올 사람도 없던 아담한 공간이었다. 숙제를 마치고 밤이 깊어지면 습관처럼 편지를 썼다.
하굣길에 무거운 책가방을 마루에 내려놓기 전, 행여 반가운 편지가 있나 두리번 거렸다. 방문 앞에 놓인 편지를 보면 외로움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다. 편지가 생활의 일부분이던 시절이다.
정기적으로 부모님께 안부 편지를 드려서 걱정을 덜어드렸고, 멀리 있는 친구에게 자정이 넘을 때까지 편지를 썼다. 다음날 학교 가는 길에 빨간 우체통에 넣고 돌아서면 그때부터 답장이 올 때까지는 희망의 시간이었다. 나와 몇 년 동안 편지를 주고 받았던 영숙이가 생각난다.
서울로 시집간 사촌언니의 막내시누이었던 영숙이는 나와 편지친구였다. 사촌언니 신혼집에 놀러 간 것이 나의 첫 서울나들이였다. 언니는 동갑내기 영숙이를 친구로 소개해 주면서 함께 시내구경을 다녀오라고 했다. 친구를 따라 나선 서울구경은 동네에 국한되었지만 산골소녀인 내 눈에는 가장 화려한 서울 거리였다.
그 만남 이후 영숙이는 나와 편지친구가 되었다. 서울 멋쟁이소녀 아니랄까봐 고운 편지지에 예쁜 글씨로 쓴 편지를 보내 나를 주눅 들게 했다. 어느 날은 예쁜 편지지 한 귀퉁이를 리본처럼 접어서 보내주기도 하고 매번 다른 모양으로 접은 편지지가 들어 있어 따라 접는 것도 흥미로웠다. 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기다리는 동안 나는 서울의 거리를 상상했고, 영숙이의 편지에 담겨올 서울 소식을 기다렸다.
편지의 품은 정말 넓다. 소녀인 내 마음을 설레게 한, 한 통의 편지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꿈을 함께 심어 주었다. 그리고 친구에게 뒤지지 않는 사연을 쓰려고 책도 읽고 사색도 하면서 노력했다. 덕분에 서울 친구 따라 하기를 하면서 감각도 키웠고 무엇보다 문장실력도 쌓아갈 수 있었다.
편지를 기다리는 설렘이 어찌 소녀시절 뿐이랴! 내가 중년에 만난 동생과 거의 두 주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를 받고 한 주가 지나면 동생의 편지를 다시 읽고 대답도 하고 또 나의 근황을 전달하면서 답장을 쓰는 즐거움에 푹 빠졌었다. 그때 받은 편지를 노트에 붙여 보관했더니 근사한 책 한 권이 되어 내게는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편지는 문학 장르로 구분한다면 수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다른 점은 형식이 있다는 것이다. 편지에 형식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힘이다.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고 내 사연을 적으면 맛깔스런 한 편의 수필이자 편지가 완성된다. 마음을 활짝 열고 쓰다보면 따뜻한 편지 한 통을 쓰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편지를 쓰려면 시작이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편지의 형식에 따라서 쓰기를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수필집 한 권을 출간했다. 늘 부족하지만 문인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발단은 단연 학창시절 주고받은 편지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고운 한복을 입고 전통의 숨결이 느껴지는 전주한옥마을을 탐방한 즐거움을 지인에게 감동의 손편지로 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
△황점숙씨는 2006년 〈좋은문학〉으로 등단했다. 현재 전북수필 회원과 (사)한국편지가족 전북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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