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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금요수필]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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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미

그들은 현란했고 때론 숨죽이도록 애틋했다. 인물도 출중한 젊은 남자들의 가슴을 저린 트롯이란 장르의 노래 경연에 빠졌다. 감히 어느 한 구절도 흉내 낼 수 없는 가사와 간드러진 음색에 빠지고 몸짓에 녹아들어 시간의 흐름도 잊게 했다. 경연이 끝나자 순위 밖 참가자들 까지 못다 한 끼와 노래로 가라앉은 분위기를 흔들어 노래에 얽힌 먼 추억까지 불러와 흥분과 향수를 넘나들게 했다.

내가 처음 노래를 흥얼대 본 것은 여섯 살쯤이었다. 사업에 문제가 생긴 외삼촌이 나보다 한살 아래인 딸 '옥경이'를 우리 집에 잠시 맡겼던 때 부터다. 뽀얀 피부에 인형 같은 옥경이는 가끔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깜빡이며 "한 많은 대동강아, 변함없이 잘 있느냐~"는 노래를 구성지게 잘 불렀다. 주위 사람들에게 '유성기에서 나오는 소리 같다'는 칭찬이 부러워 나도 옥경이 흉내를 내며 목청껏 "한 많은 대동강아~"를 불렀으나 칭찬을 받기는커녕 가족들이 배꼽을 잡고 웃는 통에 옥경이에게 괜한 트집으로 고집을 부리다가 혼만 났던 기억이 있다.

또 하나의 추억은 학교에 하나 있는 풍금 반주에 맞춰 배우던 초등학교 시절 동요는 또 다른 재미였는데 3학년 때였던가? 그때는 반공을 국시의 제1로 삼고로 시작하는 혁명 공약을 외우던 60년대였다. 그 시절 '멸공 돌격가'를 지정곡으로 한 교내 '반공 노래 경연대회'가 있었다.   그런데 평소 나는 남 앞에 서는 것을 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서 학급 대표로 뽑혔는데 전교 열두 반에서 한 반에 한 명씩 12명 출연자 중 첫 번째로 무대에 올랐다.

그날도 역시 떨지 않고 '보아라. 하늘 높이 휘날리는 저 깃발을...'하고 배운대로 씩씩하게 시작했으나 거기까지였다. 갑자기 그 뒤의 가사와 곡이 머리에서 하얗게 지워져 멍하니 서 있다가 휘청 거리며 내려온 기억은 지금도 가끔 꿈속에서 나타난다.

그렇다고 흑역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음악이론이 0점에 가깝지만, 어려서나 젊어서는 가사가 맘에 들면 가곡이든 가요든 쉽게 익히기도 했다. 고 1때였다.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의 위를 나르는 애달픈 마음....' 김동명 작사 '수선화'가 너무 좋아 열심히 익혔는데 공교롭게도 그 곡이 실기시험 곡이 되었다. 그래서 연말 음악 발표회 합창단원으로 뽑혀 뒤쪽 한자리를 차지했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요즘도 기를 쓰고 익히는 노래가 있다. "괜찮아, 이 정도면~' 쓱쓱 문 질러서 시원해진 등짝을 흔들며 자연스럽게 나오는 흥얼거림이다. 효자노릇 톡톡히 한 효자손을 침대 뒤 원래 자리에 숨기듯 치워두고 돌아서자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과 마주한다. 꼬리 빗으로 빗어지는 소털같이 변해버린 한줌내기 머리카락, 화장품과 멀어져 버린 얼굴은 상 늙은이로 가는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도 괜찮다. "아~ 내가 어때서~" 다시 흥얼대는 가사와 멜로디. 한(恨)과 흥(興)이 곁들인 곡에 한 구절 한 구절 귀에 쏙쏙 들어오는 가사가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 열심히 따라불러 보지만, 의욕만 저만치 앞선다. 그래도 괜찮다. 나야, 나야 나, 괜찮아, 나 정도면~' 멋지게 못 부르면 어떤가?

위로되고 안도가 되는 가사에 딱 맞게 붙여진 곡을 나 혼자도 이렇게 즐길 수 있으니. 훗날 세계적 유행병에 불안해하던 때 노래로 위안을 삼았던 기억 속 또 하나의 흔적으로 남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도통 기억이 없는 늑막염을 앓았다는 X-ray에 남은 흔적같이 스치듯 떠오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용미 수필가는 '수필과 비평'으로 등단했으며 행촌수필 회장, 수필과비평 전북지부장, 진안문학 편집장을 역임했다. 수필집 <그 사람>, <창밖의 여자>, <물 위에 쓴 편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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