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0일 어느 방송 대담에서 이학수 정읍시장은 동학농민혁명 특별법 개정을 주장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1월 고부 관아에서부터 조병갑의 폭정에 우리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는데, 특별법에는 3월 무장기포로 되어있어 바로잡아야겠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
정읍 시민의 일부는 무장기포를 부정하고 그래서 동학농민혁명 하면 정읍이 전부인 것으로 간주하고, 모든 것을 정읍에서 소유해야 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먼저 신용하 교수의 글을 옮겨보면 "동학농민혁명운동은 1894년 1월 11일 고부민란이 발생했다가 군수가 교체되고 신임군수 박원명이 설득하자 자진 해산 한 뒤, 전봉준의 설득으로 무장대접주 손화중 포와 태인 대접주 김개남 포, 그리고 금구 대접주 김덕명 포 등 3개 포가 연합하여 전봉준을 책임자로 한 남접 도소를 설치하고 1894년 3월 20일 기포함으로서 농민혁명운동이 봉기하게 된 것"이다.
또 배항섭 교수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1894년 3월 20일 무장에서 발포된 〈무장포고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무엇보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변혁지향세력이 늦어도 1892년부터 구상하고 기도한 일련의 ‘반란’ 계획과 그 실현을 위한 움직임의 최종 귀착점이었고 이날 발포된 〈포고문〉이야말로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어느 날 갑자기 발발한 것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수록(隨錄)에는 “이달(1894 음) 3월 22일 무장·고창·흥덕 3현의 농민군 3000여 명은 사·후포에서 숙박을 하고, 23일 줄포에서 점심을 먹은 후 유시(오후 5~7시)에 고부를 향해 출발 하였고, 이날 밤 고부성을 점령하였다.”고 기록되 있고, 기행현의 홍재일기에는 “3월 23일 동학인 4000여 명이 남쪽에서 고부 백산에 다시 모인다고 한다. 3월 27일 동학군이 어제 백산으로 군진을 옮기고 오늘 본읍에 들어왔다”고 써있다.
그렇다면 고부성에 23일 밤에 들어가서 26일에 백산으로 옮기기까지 왜 3일씩이나 고부에 머물러 있었을까?
무장현 구수내에서 전봉준을 도솔대장으로 삼고 대장기에는 5만년수운(五萬年受運)이라 새기고, 보국안민창의(輔國安民倡義)의 깃발을 들고 출발하여 무장읍성을 코앞에 두고 지나가면서도 신경도 쓰지 않고 지나쳤던 농민군들이 고부성을 치고 사흘씩이나 머무른 이유는 앞서 후임 고부군수 박원명이 소요하는 농민들에게 술·밥을 대접하며 회유하니 농성하던 군민들은 뜻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고 모두 흩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안핵사 이용태와 역졸 800여 명은 우박처럼 흩어져 들어와 부녀자를 강제로 욕보이고 재산을 노략질 하여 빼앗고, 남정네들을 매질하여 때리면서 포박하기를 고기 꿰듯이 하니 온 군에 사는 백성들의 원통함이 골수에까지 스며들었다. 그리고 두 달 남짓 후 농민군들이 치고 들어와 관리들을 처단하여 몰아내고 복수를 해 주었다.
조선시대 수많은 민란이 있었지만 성공한 예가 없었거니와 이렇게 농민군이 응징을 해주다니.. 당시 무장∙고창∙흥덕의 농민군과 고부군민들은 함께 어울려 밤새는 줄 모르고 울분을 토하고 또 희망을 노래했을 것이다.
그 뒤 손화중포 정읍 농민군도 김개남포의 태인 농민군도, 금구·원평의 김덕명포 농민군도 합류해 백산에서 군제를 다시 편성했으니, 총 대장에 전봉준, 총관령에 손화중·김개남, 총참모에 김덕명·오시영, 영솔장에 최경선, 비서에 송희옥·정백현 등이 추대됐다.
/진윤식 (사)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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