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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기업 도전과 성공 스토리] 백년가게 쌍용반점

"경력을 거꾸로 읽어 보세요. 그냥 얻어지는 경력은 없습니다." 카피라이터 출신 정철 작가가 펴낸 <내 머리 사용법>(리더스북)의 일부분이다. 중화요리 외길 인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고영수(71) 대표를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다. 고 대표는 1973년 9월 군산에 중화요리 전문점인 쌍용반점을 열었다. 당시 동네 주민들이 찾던 쌍용반점은 50년이라는 세월 동안 대로변에서 바다가 보이는 외곽으로 자리를 옮기고 주말만 되면 가게 앞에 줄을 서는 어엿한 중년 가게로 자리매김했다. 고 대표가 스물한 살에 문을 연 쌍용반점은 군산전통명가, 백년가게로 인정받았다. 군산이 다른 지역에 비해 유명 중화음식점 비율이 높은 편에 속하지만, 그 안에서도 쌍용반점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 대표는 "군산전통명가, 백년가게 등으로 인정받은 것이 무색해지지 않도록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손님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내어 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강조했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한 그릇 한 그릇 정성을 다해야 무너지지 않고 오래 가는 가게가 될 수 있다고 믿어요." 고영수 쌍용반점 대표는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는 손님에게 감칠맛 나는 음식 한 그릇을 내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패스트 푸드처럼 빨리 나오는 것이 특징인 중화요리지만 고 대표는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그때 한 그릇 한 그릇을 만들기 시작한다. 고 대표는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벌려면 미리 끓여 놓고 주문 들어오면 다시 한소끔 끓여서 손님 상에 내 주면 되지만 돈 신경 안 쓰고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그때그때 만든다는 철칙을 가지고 영업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50년 동안 쌓아온 공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신념을 원칙으로 이 자리까지 왔다"고 설명했다. 쌍용반점의 자랑은 정성이다. 군산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활용해 바지락, 홍합, 오징어 등 군산에서 나오는 어패류를 쓰고 소뼈로 국물을 우린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매일같이 새벽 시장에 나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싱싱한 식재료만 사는 일을 반복한다. 그는 "하루의 시작은 장보기다. 요즘은 시대가 좋아져 직접 가서 사지 않아도 되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사야 마음이 놓인다. 5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니 이제 그냥 먹고 자는 일처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장 보러 다닌다. 우리 가게 음식이 신선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했다. 50년 세월을 달린 고 대표에게도 간절한 바람이 있다. 바로 짬뽕을 세계인의 음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고 대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 노하우를 다음 세대에게 전수하는 것도 우리의 임무다. 계속 대를 이어갈 수 있도록 차근차근 인력을 확보하고 전수해 짬뽕이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음식이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고영수 쌍용반점 대표 "만약 혼자 했다면 이 자리까지 올 수 없었을 거예요." 쌍용반점은 50년 됐지만 쌍용반점 직원들은 짧게는 20년 길게는 40년 역사를 자랑한다. 고 대표는 인터뷰 내내 50년이 지나도 사랑받고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주변 사람들 덕분이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50년 전 대로변 작은 몸집의 쌍용반점은 타지역 사람들보다는 동네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가게였다. 한 그릇이라도, 조금은 먼 거리라도 자전거를 타고 배달하면서 단골을 만들기 시작했다. 고 대표에 따르면 당시 화교가 아닌 한국 사람이 중화요리를 하면 대부분 실패했지만 오랜 시간 호흡을 자랑하는 직원들과 아낌없이 사랑을 주는 동네 주민들이 있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군산 바다가 보이는 외곽에 건물을 짓고 쌍용반점도 자리를 옮겼다. 동백대교가 나면서 대로변에 있던 쌍용반점도 철거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 대표는 아무리 오랜 시간 영업했지만 자리를 옮기면 손님이 줄면서 매출도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고 대표는 "아무래도 대로변에서 장사를 시작했기 때문에 외곽으로 빠지면 확실히 손님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다가 보이기 때문에 횟집이라면 장사가 잘 될지 몰라도 중화요리를 했기 때문에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며 가게 이전하던 날을 회상했다. 하지만 고 대표의 걱정과 달리 손님들에게 바다가 보이는 위치의 중화요리 전문점은 신선했는지 하루하루 입소문을 타더니 대로변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손님이 찾았다. 그러나 즐거움은 잠시였다. 쌍용반점도 코로나19를 피해갈 수 없었다. 예상도 못 했던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매출은 하루가 다르게 급감했다. 코로나19 이전과 비교해 1/3로 줄었다. 그는 "인건비 걱정이 너무 컸다. 매출이 생각보다 더 줄어서 고통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어려웠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고 인원 제한도 풀리면서 손님들이 다시 오시기 시작했다. 거의 80% 정도 회복됐고, 조금만 더 지나면 100%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기대했다. 고 대표가 코로나19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직원들 덕분이다. 그는 "오랜 시간을 지내서 그런가 직원들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는 이야기를 했다. 조금만 참고 이겨내자, 살아가다 보면 이런 일도 있다면서 함께 응원해 주고 토닥여 줘서 버틸 수 있었다"며 직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향후 쌍용반점은 며느리 또는 중화요리 전문점 영업을 꿈꾸는 유능한 젊은 세대가 대를 이어갈 전망이다. 고 대표는 "며느리에게 이야기는 했지만, 꼭 가족이 대를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화요리에 관심이 있는 젊은 친구들이 있다면 그 친구들에게 물려 줄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전북에 있는 모든 백년가게 대표님들이 장인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손님과 마주하면서 오랜 시간을 갈고 닦으면서 이 자리까지 오지 않았나. 모두가 영업도 잘 되고 또 대물림도 잘 돼서 전라북도의 맛을 이어갔으면 좋겠다. 정말 간절한 소망이다"고 마무리했다. 고 대표는 전북백년가게협의회 부회장, 한국외식업중앙회 군산시 지부장 등을 맡고 있다. 박현우 기자

  • 기획
  • 박현우
  • 2023.03.22 17:27

완주 산업지도 바꿀 ‘수소특화 국가산단’ 패스트 트랙에 올리자

‘수소특화 국가산업단지’는 완주군이 풀어야 할 수소 인프라의 마지막 퍼즐이었다. 수소 기업과 연구기관, 지원센터 등 핵심 인프라를 완벽하게 갖춘 완주군은 수소 전문기업을 담아낼 큰 물그릇이 필요했다. 이런 고민은 정부의 신규 국가산단 후보지에 ‘완주 수소특화 국가산단’이 포함되는 등 수소 인프라의 최종판을 완성함으로써 일거에 해소됐다. 남은 과제는 공기를 단축할 수 있도록 정부가 패스트 트랙(fast track)에 올려놓고 대규모 국비 투자에 나서는 일이다. 유희태 완주군수는 지난 16일 ‘수소특화 국가산단 선정 관련 기자회견’을 통해 “완주 역사상 첫 국가산단이 조기에 완공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수소 전문기업 유치에 돌입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역동적이고 신속한 대응에 나선 완주군의 개발방향 등을 살펴봤다. 총 투자효과 9조 100억 원 산업단지 부지 조성비만 2562억 원에 육박하는 ‘수소특화 국가산단’은 봉동읍 일원에 165만㎡, 약 50만평 규모로 조성되는 완주군 역사의 첫 국가산단이 조성된다. 국가산단의 비전은 ‘우리의 꿈, 세계 1등 수소산업 글로벌 경쟁력 확보로 초격차 시대를 열다’로 정해졌다. 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수소 전문기업을 집적화하고 수소 혁신생태계를 조성하며, 연구개발(R&D) 지원 시스템을 구축하는 큰 그림을 그리자는 취지이다. 기업들의 직접투자액은 3조 840억 원, 생산유발 효과는 5조 9274억 원에 달할 것으로 관측된다. 총 투자 효과만 9조 114억 원에 이르는 셈이다. 또 투자에 따른 직접고용 인원은 7380명에 육박하고, 고용유발 효과 역시 2만 46명에 달하는 등 총 2만 7400명의 일자리 창출 효과가 기대된다. 완주군은 이에 발맞춰 △중대형 수소모빌리티 △수소저장용기 △수소용품(수전해와 연료전지·수소추출기) 등 3가지를 중점적으로 육성한다는 방침이다. 완주군은 “대한민국, 나아가 세계 수소경제를 선도해 나갈 ‘그랜드 디자인’을 그리고, 정부와 전북도·수소기업들과 함께 힘차게 전진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균형발전 디딤돌 역할 완주군의 기존 6개 산단과 달리 ‘수소특화 국가산단’은 정부가 관리하고 지원하는 만큼 향후 추진과정과 기업유치 등의 속도전이 예상된다. 이는 정주여건 개선과 기업들의 투자를 담아내는 데 호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실제로 완주군이 수소 진입기업과 핵심업종 173개사를 대상으로 입주의향을 조사한 결과, 41%에 해당하는 72개사가 입주 의향을 밝혔기 때문이다. 이들 기업이 희망하는 부지수요도 175만 8800㎡에 육박, 산업시설용지 면적(88만㎡)의 2배에 달하고 있다. 기업들이 몰려오면 완주군의 새로운 100년 먹거리를 창조할 차세대 신산업 육성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될 전망이다. ‘수소특화 국가산단 조성’은 완주군과 전북도, 나아가 대한민국이 ‘세계 1등 수소산업’으로 나가는 데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이다. 완주군과 전북도의 새로운 발전적 모멘텀 확보와 균형발전의 든든한 디딤돌을 구축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협치가 낳은 새 역사 수소특화 국가산단 선정은 완주군의 간절한 소망과 행정·정치권과의 긴밀한 공조와 협치가 낳은 합작품이다. 유희태 군수는 “취임 이후 지난 8개월여 동안 단 한순간도 ‘수소특화 국가산단’을 생각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고 말했다. ‘모두가 누리는 미래행복도시 완주’를 구현하기 위해 ‘수소특화 국가산단 조성’이 꼭 필요한 만큼 중앙부처는 물론 정파를 가리지 않고 중앙 정치권을 찾아가 끊임없이 설득하고 건의했다. 김관영 전북도지사를 비롯한 안호영 의원과 국민의힘 정운천 의원 등 전북 국회의원들도 수소특화 국가산단 선정의 필요성을 국토부에 강하게 전달하는 등 힘을 몰아주었다. 김 지사는 '새만금 그린수소와 완주 수소특화 국가산단이 연계할 경우 지역경제 활성화를 통한 균형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논리로 국토부를 설득하는 등 최전선에서 활동했고, 안 의원과 정 의원도 위기 때마다 구원투수 역할을 충실히 했다. 패스트 트랙 적용 여론 정부는 수소특화 국가산단 등 국가첨단산단이 신속히 조성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한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패스트 트랙(신속 조사)을 적용, 통상 7개월가량 걸리는 예비타당성 조사를 2개월로 단축하고 후보지 발표부터 착공까지 7~8년 걸리는 것을 5년으로 단축한다는 방침이다. 전략적으로 시급한 산단은 2026년 말 착공, 본격화한다는 구상이다. 완주군 애향운동본부와 완주산업단지진흥회, 완주군여성단체협의회 등 각급 기관들은 잇따라 환영 성명서를 내고 수소특화 국가산단을 패스트 트랙에 올려 신속히 추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건의하고 나섰다. 완주군 애향운동본부(본부장 정완철)는 “완주군 역사상 첫 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서는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차원에서 애향 군민들이 크게 환영하고 있다”며 “이제 남은 것은 정부가 조기에 수소특화 국가산단이 조성될 수 있도록 패스트 트랙을 적용하고 국비를 집중 투입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완주군새마을회와 바르게살기운동본부 완주군협의회, 한국자유총연맹 완주군지회 등도 환영 입장에서 “패스트 트랙 적용으로 수소산단이 신속히 완공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유희태 완주군수 “모든 일 동시 추진, 국가산단 속도 높일 것” 유희태 완주군수는 완주가 후보지로 선정된 지난 15일 “앞으로 추진할 ‘수소특화 국가산단’이 조기에 착공하고 완공될 수 있도록 적극 나설 것”이라며 “수소 전문기업과 연구기관·지원시설이 활발히 움직일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 군수는 “조기 착공과 기업유치 등을 단계적으로 추진하지 않고 모든 일을 동시에 추진해 속도를 높여 나갈 것”이라며 “군청 조직을 총 가동하고 LH 등 사업시행자와 신속한 협의를 통해 하루라도 빨리 완공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 군수는 “완주군은 수소 전문기업과 연구기관, 산업단지 등 3각 기반을 모두 갖추고 있다”며 “‘수소특화 국가산단’ 선정이 전후방 연관산업 육성의 촉진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유 군수는 “글로벌 수소경제 1번지를 향한 완주군의 도전은 이제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며 “‘모두가 누리는 미래행복도시 완주’ 실현을 위해, 군민행복과 지역발전을 위해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우보천리(牛步千里)’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 기획
  • 김재호
  • 2023.03.21 15:51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④함박 눈을 맞으며 고대 유적지인 용안-익산-삼례길을 지나다.

1884년 11월 9일 9시 15분 포크는 개화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김노완 군수가 이끄는 병사와 군졸 나팔수들로 이루진 환송 행렬과 함께 용안을 떠나 익산으로 향했다. 눈이 일부 쌓이고 젖은 길을 지나 10시에 ‘걸망장’(Kuul mang chang)에 이르렀다. 이곳은 용안의 경계로서 호남읍지(1872년경)에서 ‘검망장(劍望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규장각 소장 ‘1872년 용안현지도‘에서는 ’금성시(錦城市)‘라는 명칭으로 나타나 있다. △용안의 ‘걸망장’(함열 금성장터)을 지나며 친절한 주민들을 만나다. 걸망장이라는 말은 상인들이 등에 매고 다니는 걸망을 맨 등짐장수인 ‘부상(負질 부 商장사 상)’과 보따리를 이고 지고, 안고 다니는 ‘보상(褓포대기 보)’ 즉, 보부상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된 장터를 뜻하는 것으로 전한다. 이곳 걸망장은 ‘검성(劍城)’으로도 쓰였는 데 ‘금성(錦城)’으로 쓰이며 금성장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원 위치는 현재의 함열여고옆으로 추정된다. 이후 1911년 11월 호남선철도(1914 완전 개통) 중 대전-함열까지가 먼저 개통되며 역이 위치한 함열읍 와리 지역으로 시장이 옮겨져 현재 함열중학교 밑이 아랫장터, 그 위는 윗 장터라고 불렀다고 한다. 포크는 장터가 열렸던 이곳에서 책과 개고기를 팔고 있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1884년 양력 11월 9일은 음력 9월 22일로 현재도 익산 함열 장날이 2, 7일 오일장으로 열리는 데 바로 포크가 9월 22일 장날 이곳을 지났던 것이다. 그리고 용안현감은 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포크를 소개하였고 포크는 친절한 사람들의 태도에 호감과 친근감을 갖게 되었다. 이같이 포크는 용안에서 현감의 환대와 길에서 마주친 처음 보는 외국인을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들로 인해 전라도에 대한 긍정적 인상과 우호적 분위기를 갖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같은 인상은 이후 전주를 방문하여 더욱 강해졌다. 한편, 포크는 타 지역에서 조선 사람들의 문자 해득력의 수준과 문자를 통한 정보전달의 실제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다. 그런데 걸망장터에서 책이 판매되고 있었다는 기록은 그 같은 의구심 해소에 도움이 되었다고 파악된다. 특히, 전주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이래 꾸준히 성장한 상업적 책 간행과 판매 상황을 직접 금성장터에서 확인하고 기록으로 남겨 그 의미가 크다. △미륵사지앞 주막에서 익산의 ‘길라잡이’를 만나다. 포크 일행은 춥고 질척해진 길을 지나 석불주막(석불사거리)을 지나고 12시 35분경 익산(현재 금마)에서 5리 떨어진 주막에 도착했다. 이곳은 바로 ‘구원점막(舊院店幕)’ 즉, ‘옛날 역원마을 주막’으로 현재 익산 미륵사지 앞에 있었던 주막이었다. 점막(店幕)은 ‘주막’으로 불리는 상인과 여행자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사설 숙소를 가리킨다. 조선전기에는 조정에서 원(院)을 설치하여 숙박을 제공하였으나 조선후기 상업이 점차 발달하면서 상인과 여행자가 증가하자 민간의 사설 숙박 장소인 점막이 증가하게 되었다. 18세기 중반 점막은 장시의 발달과 함께 교통로를 중심으로 확대되었는데 김정호의 <대동여지(大東輿志)>에는 일부 누락된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996개의 원점(院店)이 확인된다.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읍지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 역원에 포자를 설치하고 주점을 두어 물자유통의 장소로 삼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점막이 상업유통의 장소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포크는 자신을 기다리던 익산의 ‘길라잡이’를 이곳에서 만났다. “(구원점막)에는 어제부터 나를 기다렸던, 빨간 겉옷을 입은 6명, 나팔수 2명, 악단 6명, 깃발을 든 소년 2명 그 외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뿌”하는 나팔 소리와 함께 우리는 출발했다. 그리고 이어서 기이한 악단이 연주를 시작했고 진기한 행렬을 길게 이루며 익산으로 향했다.“ 이들 길라잡이는 길을 인도해 주는 사람으로 말의 어원은 지로나장(指路羅將)이다. 지로는 가리킬 지 指, 길 로 路로 길을 인도한다는 뜻으로 이 지로나장이 길나장으로 변하고 접미사 '-이'가 붙어 ‘길나장이’란 말이 생겼다. 나장은 군관(軍官) , 취수(吹手) 등과 함께 앞에서 길을 인도했다.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에서는 지로나장이 까치옷으로 단장하고 깃을 꽂고 앞에 선다고 묘사했다. 그런데 포크는 이 같은 길라잡이와 나팔수들의 과잉 행동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표현했다. ”호위대(길라잡이)는 앞서가며 길을 열고 서둘러 식사와 숙소를 준비한다. 서울을 출발하면서 이 절차는 시작됐다. 지방 관청에서 다음 관청으로 호위대를 보내라고 명령이 내려간다. 고위 인사가 여행할 때 진행되는 표준 관행이었다. ... 빨간 겉옷의 나팔수 두 명, 파랑과 흰색이 섞인 겉옷의 길라잡이 두 명, 그리고 아전 두 명이었다. 우선 그들은 길을 열기 위해 사람들을 언덕 위로 몰아내면서 나를 화나게 했다. ” 그러나 이후 경상도로 넘어갔을 때 너무 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어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 되자 이들의 행동을 묵인하게 되었다. △눈덮인 용안-익산-삼례길에서 고대유적을 지나다 포크는 자신이 지난 익산길에 대해 “오늘 길과 들판 주변에서 비석처럼 다듬어진 오래되고 커다란 돌들이 꽤 많이 눈에 띄었다. 특히 고대의 유물로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라며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즉, ‘고대 유물’들이 이 공간에 많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었다. 포크가 지난 곳은 백제 최대의 석불이 남아있는 ‘석불사거리’를 지났고 익산의 길라잡이를 만난 곳이 세계유산 미륵사지 앞이었으며 익산에서 삼례로 올때 왕궁유적과 동서고도리 석인상들도 지났었다. 필자는 이 기록을 보며 함박눈이 수시로 내려 포크가 사진을 찍지 못한 점이 너무 아쉬웠다. 만약 날씨만 좋았다면 고대 유적에 큰 관심이 많은 포크가 어쩌면 미륵사지탑이나 왕궁리 탑, 석불사 석불 등을 사진으로 남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한국 고대사에서 가장 귀중한 유적들의 원형이 더 잘 기록된 사진이 남겨졌을 텐 데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포크는 눈 내린 길을 지나 익산관아(현 금마면 사무소)로 진입했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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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20 18:49

익산 국가식품클러스터 ‘글로벌 식품시장의 新 중심’ 도약

익산 국가식품클러스터 2단계가 국가산업단지 후보지로 선정되면서 글로벌 식품시장의 新 중심으로 도약이 기대된다. 1단계 국가산단 지정 이후 15년 만의 쾌거로, 정부가 국내를 넘어 전 세계 식품산업의 전진기지로 다시 한 번 국가식품클러스터를 선택하면서 익산이 또 다른 전기를 맞게 됐다. 기업·연구기관·전문 인력 및 관련 인프라 확충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는 물론 한류 열풍을 타고 K-푸드에 대한 글로벌 수요가 급팽창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식품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제고와 농식품 수출 확대에도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20일 시청 상황실에서 열린 브리핑에 따르면 새롭게 조성될 2단계는 ICT 기술과 문화가 접목된 식품문화복합산단으로서 ‘식품의 6차 산업화’를 견인한다. 새로운 산업 패러다임을 반영한 2단계 산단은 기존 1단계의 내·외연을 확장함과 동시에 미래 신산업을 수용할 수 있는 혁신 거점으로 조성될 전망이다. 익산시는 1단계에 이어 미래 혁신기술이 더해질 2단계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글로벌 식품산업 성장 발판을 마련하고 그린바이오·농생명 분야와 연계한 클러스터 구축으로 대한민국 식품산업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계획이다. 푸드테크 기반으로 미래 유망 식품산업 집중 육성 2단계 사업은 기존 국가식품클러스터 산단 인근에 오는 2028년까지 207만㎡(63만 평) 규모로 조성된다. 투자액은 산단 조성비 3855억 원과 기업 직접 투자비 2조 2970억 원 등 총 2조 7825억 원에 달하며, 이에 따른 지역 생산유발효과는 5조 3480억 원, 고용유발효과는 1만 8086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2단계의 가장 큰 특징은 전통 식품산업의 생산·가공·유통·서비스 과정에 ICT 기술을 접목한 ‘푸드테크’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기존 식품산업에 푸드테크 기술을 결합해 대체식품, 메디푸드 등 미래 유망 식품산업을 집중 육성한다는 방침이다. 아울러 기존 12개 기업지원시설을 연계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수출 중심의 한국형 식품클러스터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생산과 문화 결합된 복합산업단지로 개발 2단계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 생산과 지원, 문화가 결합된 미래형 신산업단지로 조성된다. 기존 1단계가 식품 제조 중심이라면 2단계는 미래형 산단으로서 견학과 전시, 체험이 가능한 식품문화복합산업단지로 개발하고, 국내외 산업 성장을 선도하는 ‘글로벌 식품시장의 新 중심’으로 도약하는 것이 목표다. 이를 통해 영세한 국내 식품기업을 앵커기업으로 성장시키고 전문 인력 양성과 일자리 창출까지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하고 사회적 가치 창출에 기여한다는 계획이다. 1단계 성공적 마무리, 식품수도 성장 동력 마련 1단계 산업단지는 지난 2008년 선정 이후 232만여㎡(70만 평) 규모로 조성됐다. 현재 126개 기업이 계약을 체결해 78.8%의 분양률을 보이고 있으며, 108개 공장(벤처기업 포함)이 가동 중이다. 이들의 연평균 매출액은 약 52억 원으로 국내 식품산업 평균인 16억 원보다 3.3배 높고, 5년 평균 매출 성장률 역시 7.1%로 국내 식품산업 평균보다 5배가량 높다. 이는 12개 기업지원시설과 산·학·연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원스톱 지원 체계로 최적의 입지 여건을 조성한 결과다. 또 창업부터 비즈니스, 매출 신장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지원 사업이 기업 성장 생태계 구축에 약할을 톡톡히 했다. 이처럼 탄탄하게 구축된 지원 시스템 덕분에 1단계 산단은 기업들의 투자 문의가 잇따르고 있으며 오는 2025년이면 완판될 것으로 예상된다. 1단계 분양이 마무리되면 약 4조 원의 생산유발효과, 2만 2000여명의 고용유발효과가 기대된다. 시는 개발행위허가제한지역 지정, 토지거래허가구역 지정, 예비타당성 조사 등 각종 행정절차를 거쳐 내년 12월까지 2단계 산업단지계획을 승인·고시하는 것이 목표다. 이후 사업 시행자가 선정되면 공사 기간까지 포함해 약 5년 후 2단계 산단 조성이 마무리될 예정이다. 2단계 산단이 본격적으로 운영되면 1단계와 함께 다양한 경제적 시너지 효과를 거둘 것으로 예상된다. 철저한 준비로 15년 만에 맺은 결실 현재 세계 식품시장은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지난 2021년 GDP의 경우 전체 제조업 대비 식품산업이 17.8%를 차지하는 등 중요성이 확대되고 있어 집중적인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에 시는 지난 2012년부터 한국식품산업클러스터진흥원을 비롯한 12개 기업지원시설과 126개 식품기업을 유치해 분양률을 끌어올리는 등 2단계 사업 추진 근거를 마련해 왔다. 지난해 8월부터는 국토교통부의 신규 국가산단 후보지 공모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전국 식품기업 가운데 투자 의향이 있는 기업을 대상으로 2단계 사업 수요 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 결과 전국 80여개 기업에서 입주 의사를 표명했으며 이를 토대로 공모 제안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이후 국토교통부의 심사와 증빙 자료에 대한 검토, 현장 심사 등을 거쳐 국가첨단산단으로 선정됐으며 2단계 사업을 본격화하게 됐다. 이는 지난 2008년 1단계 사업을 시작한 지 15년 만에 맺은 결실이다. 이 과정에서 익산시와 익산시의회는 물론 한병도·김수흥·정운천 국회의원 등 지역 정치권의 적극적인 지지가 큰 역할을 했다. 정헌율 시장 “익산, 세계적인 식품 수도로 도약” “우리나라 100년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국가식품클러스터가 새롭게 시작됩니다.” 20일 정헌율 익산시장은 ICT 기술을 접목한 국가식품클러스터 2단계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대한민국 식품산업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국내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안정적 기반이자 미래형 산업단지로서 식품클러스터 비전에 맞는 완결된 단지로 거듭나는 것이 핵심이다. 이번 2단계 선정은 1단계의 성공적인 마무리가 기반이 됐다. 공격적인 투자 유치 활동으로 분양률을 80% 수준까지 끌어올렸고 12개 기업지원시설을 연계한 체계적인 지원 시스템으로 기업들의 비약적인 매출 성장도 이끌었다. 2단계가 본격화되면 2조7825억 원에 달하는 생산유발효과와 일자리 창출 등 다양한 경제적 파급 효과가 기대된다. 아울러 익산이 명실상부한 국내 식품산업 혁신성장의 메카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 시장은 “1단계가 식품 제조 위주였다면 2단계는 ICT 기술과 문화가 접목된 식품문화복합산단으로 조성된다”며 “새로운 산업 패러다임을 반영한 지역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국가식품클러스터는 미래 기술 융합 시대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급변하는 세계 식품시장을 선도해 나갈 것”이라며 “네덜란드 푸드밸리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식품수도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기획
  • 송승욱
  • 2023.03.20 15:32

취임 1주년 맞은 김용현 완주산업단지진흥회장 "정부·지자체, 기업이 투자하고 일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야"

정석케미칼은 국내 도료업계 1위 기업이다. 연매출 800억 원 정도지만, 요즘 정석케미칼의 행보는 대기업 못지 않은 괄목성장 면모를 보이고 있다. 지난 30년 넘게 꾸준한 연구개발로 신제품 히트작을 내놓은 도료 전문기업에서 전고체 전지(Solid-state battery)의 핵심 소재로 쓰이는 황화리튬(Li2S) 개발에 성공하며 첨단 에너지 기업으로 부상한 것이다. 정석케미칼을 이끄는 주인공은 김용현 대표이사다. 명실상부한 사원주주 대표인 그는 남선북마 광폭 행보를 하며 전북 경제의 중심 인물로 부상했다. 완주산업단지진흥회 회장 취임 1주년을 맞은 김용현 대표를 만나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필요한 것 등 기업인으로서 그의 생각을 들어봤다. 완주산단진흥회장 취임 1주년이 됐습니다. 소감 한 말씀 해주시죠. "저는 국민에게 4대 의무가 있고, 기업에는 사회공헌의 의무가 있으며, 기업인은 지역 내 업체들과 소통하여 그들의 어려움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지원과 협력 방안을 제안하는 등 지역 발전을 위한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이러한 저의 철학적 관점에서 완주산단진흥회장은 기업인으로서 의무와 봉사를 할 수 있는 뜻깊은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정기적인 대화와 간담회를 주최하고, 주변 기업과 주민들의 의견을 취합하여 기관에 전달하는 등 끊임 없이 소통하고 협력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할 일이 너무 많고, 해야할 일 또한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완주군은 기존 완주산단, 테크노밸리 1산단에 이어 테크노밸리 2산단, 농공단지까지 조성됐습니다. 정부의 수소특화국가산단도 유치했는데, 완주군 산단 370만 평 시대에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민선8기 출범 이후 유희태 완주군수와 전북도, 정치권 등의 노력으로 수소특화국가산단을 완주군에 유치했습니다. 테크노밸리 제2산단의 100% 분양도 조만간 기대됩니다. 이에 발맞춰 완주산단진흥회장으로서 기업들이 기반을 잡고 경쟁력을 높일 수 있도록 현황을 파악, 맞춤형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연계하는 등 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할 것입니다. 완주군은 지금 처럼 적극적으로 기업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투자에 힘써주었으면 합니다. 기업들의 해외시장 진출을 지원하고, 청년인재 확보에 힘을 보태고, 지속가능한 발전 사업에 귀 기울이고, 지역 상생협력 네트워크 구축 시 함께 하였으면 합니다. 기업의 애로사항 및 활성화를 위해 완주군이 항상 함께 했으면 합니다." 전북경총 회장으로서 전북경제 활성화를 위해 가장 시급히 해결돼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최근 TV를 보는데 전라북도에서 도전하고, 도약하고, 성공스토리를 쓸 수 있는, 기업하기 좋은 전라북도라는 CF 문구를 봤습니다. 기업이 전라북도에서 도전하고 도약하고 성공신화를 달성하려면 행정기관에서도 완주산단, 완주테크노밸리 1·2산단 등 산단이 가지고 있는 강점을 십분 발휘, 기업이 활발히 활동 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사격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환경과 주민의 생활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규제를 완화하고, 사업확장을 위한 기업들의 지원사업을 연계하는 등 산단에 속해있는 기업들이 행정의 지원사격 아래 더욱 전진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완주군과 전라북도, 산업통상자원부 등이 기업 중심 배려와 지원을 해야 합니다." 정석케미칼은 최근 완주테크노밸리 제2산단 부지 3만 3213.2㎡(1만 47평)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이차전지 전고체 생산공장인데, 독자들을 위해 소개해 주시죠? "국내 대표적 도료 생산업체인 정석케미칼이 전고체 전지(Solid-state battery)의 핵심 소재로 쓰이는 황화리튬(Li2S) 개발에 성공, 양산체제를 갖췄습니다. 정석은 완주 테크노밸리 제2 산업단지에 525억 원을 투입, 이차전지 전해질 원료인 황화리튬(Li2S) 공장을 세울 예정입니다. 휴대전화기와 전기차 등에서 주로 사용하는 리튬이온전지는 많은 금속 중에서도 가볍다는 장점이 있지만, 전기차 화재 사고나 여러 차례 휴대전화 폭발사고에서도 알 수 있듯 고온고압 환경에서 화재 등 안전성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정석케미칼은 차세대 전지로 전고체 배터리에 주목, 2019년부터 핵심 물질인 황화리튬 연구개발에 착수했고, 3년여 만에 황화물계 전고체 전지 원료인 고순도 황화리튬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황화리튬은 고체 전해물을 구성하는 물질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점이 있지만, 제조 방법이 까다롭고 공기 중 반응에 민감해 국내 기술로는 제조에 한계가 있었지만, 정석케미칼 연구진이 성공해 국내 처음으로 대규모 양산체제에 돌입했습니다. 테크노2단지 부지는 대량생산을 위한 제2공장 신축을 위한 것입니다." 황화리튬 배터리의 장점은 무엇이며, 글로벌 시장 진출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요. "'황화리튬'은 전해질(물처럼 극성을 띤 용매에 녹아 이온을 형성함으로써 전기가 통하는 물질) 활성화를 유도하는 핵심 소재로, 안정성이 높아 전고체 배터리 시장에서 활용도가 높습니다. 정석케미칼은 황화리튬 개발, 대규모 생산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에너지 소재 산업에 진출했습니다. 세계 시장에 진출, 2030년 연간 매출액 5000억 원 달성이 목표입니다." 정석케미칼은 도료 전문생산업체입니다. 꾸준한 R&D 투자와 혁신적 제품을 지속적으로 개발하며 연매출 1000억 돌파를 앞두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어떤 제품들이 있을까요. "주요 산업인 도로 표지용 도료, 건축용 도료, 산업용 도료 이외에 친환경 에너지 소재 분야를 신 성장 산업으로 선정하고 연구와 투자에도 집중하고 있습니다. 황화리튬 뿐만 아니라 수소 연료 전지 분리막에 사용되는 이오노머 수지의 양산 및 사업화를 서두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정석케미칼은 현재에 만족하고 안주하지 않는 기업입니다. 도로용 페인트는 선을 긋고 미끄럼방지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안전을 위하고 환경을 생각하여 눈이 내리거나, 도로에 비가 내린 뒤 도로가 얼 경우를 대비한 제품 등 일반 도료에 그치지 않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 첨단 기술제품을 내놓고 있습니다." 향후 정석케미칼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2022년은 전략적으로 개발한 황화리튬 전고체 전해물질 양산에 성공, 한걸음 도약한 한해였습니다. 2차전지 핵심 소재기업으로 회사의 이미지를 바꿔놓았고, 미래 첨단 먹거리 사업에 진출했습니다. 2030년까지 전고체 전해물을 구성하는 핵심 물질인 황화리튬 생산량 확대 및 수소 연료전지 핵심 소재 생산을 통해 연간 매출액 5000억 원 을 달성한다는 비전을 갖고 신산업 에너지 기업으로 거듭나겠습니다." 정석케미칼은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기업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굳이 한가지를 꼽자면 미래인재와 같이 하는 것 입니다. 대한민국이 OECD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어려운 학생들이 있습니다. 본사가 전북에 있는 만큼 지역 내 우수한 인재들을 위해 해마다 전북대, 전주대, 완주 소재 학교 등 학생들에게 장학재단을 통해서 장학기금 및 학생들을 위한 도서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기업 발전와 지역사회를 위해 한 말씀 해 주시죠? "존중과 배려를 바탕으로 리더의 솔선수범과 지역 간 협업을 강화해서 지역사회가 자랑스러워하는 기업, 기업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향토기업 정석케미칼은 한단계 도약할 준비를 하고 세상으로 힘차게 나아가자는 ‘비도진세(備跳進世)’의 정신으로 힘차게 정진(精進)하고자 합니다. 지역민들의 격려와 따뜻한 시선 부탁 드립니다." 김용현 대표는 김용현 대표는 정석케미칼을 매출 1000억을 넘보는 도료업계 1위로 성장시켰다. 최근에는 전고체 연료전지 핵심인 황화리튬 양산에 성공하며 정석케미칼을 미래 에너지기업 반열에 올렸다. 그는 평소 기업 매출의 8% 이상을 연구개발(R&D)에 투자하고, 전체 직원의 12%를 기술연구원으로 가동할 정도로 새로운 기술을 적용한 신제품 개발에 꾸준히 노력해 왔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작은 불편에도 주목’하며 기술 개발에 열중했고, 이런 경영의지 속에서 정석은 지난 30년간 60개 이상 특허 등 지식재산권을 취득했다. 열반사 기술을 적용한 도료 제품은 한여름 도로온도를 낮추고, 결빙을 막아 주목을 끌었다. 국내 최초이자 유일하게 폴리우레아 노면 표지용 도료를 선보였고, 방사성 폐기물의 안정된 처리를 위한 ‘폴리머고화’ 설비 및 고화재료를 개발해 공급하고 있다. 이런 경영 의지는 2020년 대한민국 노벨사이언스상 과학기술대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김 대표는 근래 자랑스러운 전북인대상, 완주군민대상, 중소기업기술혁신 국무총리 표창 등을 수상하며, 전북 스타 기업인으로 우뚝 섰다. 최근에는 전북경영자총협회 회장, (사)전북평화 경제 포럼 회장, 전북도 노동위원, 전북 노사 민정 협의회 위원, 완주산단 진흥 회장, 전북인재 평생교육진흥원 이사 등 사회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지역 장학금 쾌척 등 노블리스 오블리제 실천에도 힘쓰고 있다.

  • 기획
  • 김재호
  • 2023.03.19 15:21

[갈 길 먼 전라감영 복원 (하)대안] 지지부진한 전체복원, 국비 지원으로 속도내야

전라감영의 전체 복원은 전주가 전라도의 중심지라는 역사적 상징성과 관광문화 거점 도시의 역할 등 자긍심 회복,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다. 박제화 되지 않고 전체 복원을 위해서는 행정과 정치권의 협치가 중요하지만 그동안 전주시는 제대로 된 논의를 하지 못했다. 전체 복원을 위한 예산 확보가 가장 큰 과제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전라감영은 강원 감영이나 경상 감영과 여건이 다르다. 강원과 경상감영은 국가지정문화재여서 국비 지원을 받지만 전라감영은 도지정문화재여서 국비 지원을 받지 못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시는 전체 복원에 투입될 예산 규모를 책정해 놓고 예산 확보를 위한 방안을 찾고 있다. 부지 확보도 전라감영 전체 복원을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다. 감영에서 가장 넓은 범위를 차지하는 공간은 남편 부지(전주완산경찰서 방향). 그러나 이 곳은 현재 완산경찰서가 들어서 있어 경찰서가 이전하지 않으면 확보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전주시는 지난 2020년 전라감영 동편 부지를 복원한 1단계 사업을 완료한 후 오는 2030년까지 총사업비 1200억 원을 투입해 감영의 나머지 서편과 남편 부지를 확보해 전체 복원을 완료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시는 전북도로부터 도유지인 서편부지를 확보해 광장으로 정비하고 지난해부터 발굴 작업과 3D 스캔을 진행하는 등 전체 복원의 물꼬를 텄다. 하지만 남편 부지는 국유지인 전주 완산경찰서 용지와 사유지가 혼재해 있어 확보를 위한 후속 절차는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전라감영 전체 복원의 최대 관건인 완산경찰서 이전은 지난 2009년 전라감영 복원 추진위원회가 구성된 이후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그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됐다. 전주시도 전라감영 전체 복원 계획이 가시화된 직후, 완산경찰서와 구체적 논의를 시도 했지만 이전할 부지가 확정되지 않으면서 계획은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부지와 예산 확보는 전라감영 전체 복원을 위해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할 과제지만 이들 중 어느 쪽도 만만한 과제가 아니다. 예산 확보도 국비 지원을 추진하고 있지만 국가지정문화재나 사적으로 지정되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이다. 전라감영은 현재 도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 시는 지난 전라감영 동편 복원 사업비 104억 원을 모두 도·시비로 충당했다. 따라서 예산확보를 위해 국가지정문화재 추진을 서둘러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지만 국가문화재나 사적 지정은 복원의 절차와 과정을 고려해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도 높다. 전문가들은 전라감영을 국가지정문화재나 사적 지정이 아니라 전주의 역사 '고도(古都)' 지정을 추진하는 방법도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시 관계자는 “후백제의 수도이자 조선 왕조의 발흥지 였던 전주의 역사성을 부각해 경주‧부여‧공주‧익산에 이어 전주가 국내 다섯 번째 ‘고도’ 로 지정되는 것을 추진 중이다” 며 “고도가 지정되면 국비 확보에 어느 정도 진전이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고 밝혔다. 이준서 기자

  • 기획
  • 이준서
  • 2023.03.14 15:14

[정전70주년 공동기획] 낙동강 방어선 전투(上)-피와 죽음으로 막아낸 북한군 8월 공세

1950년 6·25전쟁 발발과 함께 북한군에 파죽지세로 밀린 국군과 유엔군은 7월 말 낙동강까지 철수했다. 이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후퇴하려 해도 내어줄 땅이 남아있지 않았다. 낙동강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해 대구와 최후 거점인 부산은 지켜내야 했다. 유엔군 지상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고수 아니면 죽음(Stand or Die)’의 결의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곳서 피아는 ‘죽느냐, 사느냐’의 각오로 부딪쳤다. ◆왜관철교 폭파와 잔학한 미군 학살 8월 3일 아침부터 왜관철교 주변에는 사이렌이 울리고 전단이 뿌려졌다. 오후 6시까지 지역에서 퇴거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해 사살한다는 포고였다. 낙동강 방어선 내 적 게릴라 침투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주민과 피난민들은 우왕좌왕했다. 오후 8시 30분 미군은 왜관철교를 폭파했다. 왜관쪽 둘째 경간 63m가 끊어졌다. 북한군이 강을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지만 다리를 건너려던 많은 피난민도 희생됐다. 북한군이 낙동강을 건너면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북한군은 9일 왜관 낙산리 금무봉(268m)에 들이닥쳤다. 새벽에 개인 화기와 옷을 머리에 이고 건너편 노티 나루터에서 깊이 1.65m의 낙동강을 건넜다. 한참 후 이를 발견한 미군은 보·포병 사격을 가했으나 적들은 금무봉으로 올라갔다. 다음날 오후 케이 미 제1기병사단장은 경전차 소대와 보병을 돌격시켜 정상을 탈환하고 달아나는 적을 섬멸했다. 적은 700여명, 미군은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미군이 처음 한국군 지원병을 편입, 병력을 보충했는데 이것이 카투사 탄생의 계기가 됐다. 왜관읍 303고지에서는 15일 미군이 북한군에 집단 학살당했다. 이곳에서 북한군은 미군 포로 46명의 손을 묶고 계곡에 몰아넣은 뒤 기관총을 난사했다. 6명이 살아남아 북한군의 야만성과 낙동강 전투의 치열함을 알렸다. 16일 미 B-29 폭격기 98대는 낙동강 서쪽 강변에 960t의 융단폭격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 폭격이었다. ◆국군 최대 전과올린 안강·기계 전투 4일을 전후해 길안 일대에 배치됐던 국군 수도사단이 북한군 습격을 받고 의성 방향으로 철수하면서 의성-청송-영덕을 연결하는 구간의 간격이 발생했다. 국군의 취약점을 간파한 북한군 제12사단은 국군이 배치되지 않은 산악 지역을 통과해 7일 오후 도평동(기계 북방 40km)을 점령하고 8일에는 죽장(기계 북방 20km)에 도달했다. 국군은 북한군의 목표가 기계-안강-경주 축선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으나 대응방책을 찾지 못했고, 그 사이 북한군 제12사단은 10일 기계까지 거침없이 진출했다. 낙동강 방어선의 위기였다. 10일부로 포항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됐다. 그러나 가용한 병력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새롭게 편성중인 제25연대를 안강 지역에 투입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의성에 있던 수도사단에 이동명령이 하달됐다. 수도사단 제1연대로 안강에서 북한군의 진출을 차단하고, 제18연대로 기계에서 북한군의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안강-기계 일대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을 섬멸하기로 했다. 실로 대담한 결심이었다. 수도사단의 안강 도착이 빠르냐, 북한군의 경주 또는 포항 진출이 빠르냐의 시간 싸움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전환됐다. 기계에 진출했던 북한군 제12사단이 후속부대의 진출 지연과 보급부진으로 멈춰선 것이다. 18일 기계 일대에서 총공격이 시작됐고 끈질기게 저항하던 북한군은 후방이 차단되자 철수하기에 급급했다. 북한군은 많은 전사자를 남겨둔 채 일부 패잔병만이 비학산 일대로 도주했다. 동해안 지역 최대 위기가 가까스로 수습됐다. 수도사단은 이 전투에서 북한군 1천245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장비를 노획하는 전과를 획득했다. 전쟁 발발 후 국군이 거둔 최대의 전과였다. ◆반전의 연속 포항지역 전투 2일 영덕에서 철수했던 북한군 제5사단은 청송-기계 축선의 제12사단과 영덕-포항 방향으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영덕을 방어 중인 국군 제3사단 제22, 23연대는 치열한 근접전투를 반복했지만 제23연대 진지가 돌파되면서 방어선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전투력이 저하된 국군 제3사단은 역습과 철수를 반복하면서 영덕 남쪽 강구를 거쳐 10일에는 강구 남쪽 장사동으로 철수했다. 11일에는 북한군 제766유격연대의 일부가 포항 시내까지 진입해 국군과 유엔군은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포항의 위기 상황을 보고 받은 제8군사령관은 연일비행장 확보를 위해 미 제19연대 제3대대로 브래들리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해 포항에서 연일비행장에 이르는 도로를 차단했다. 포항 북방에서는 북한군 제5사단 일부가 홍해까지 진출해 국군 제3사단은 장사동 일대에서 포위됐다가 17일 오전 6시쯤 유엔 해군 함정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구룡포로 철수했다. 포항 탈환 임무를 받은 민기식부대(민부대)는 18일 새벽 포항 시내로 진입해 북한군 180명을 포로로 잡고 포항을 탈환했다. 이후 동해안 지역 전선은 9월까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시산혈하의 다부동 전투 8월 초 낙동강 방어선 대구 방향에는 북한군 5개 사단이 집중 공격을 감행했다. 특히 북한군 제1, 13, 15사단 등 3개 사단은 5일부터 8일간에 걸쳐 낙동강을 도하한 후에 국군 제1사단을 압박하면서 대구 공격에 안간힘을 다했다. 당시 대구는 대한민국 정부와 미 제8군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는 핵심 지역이었다. 국군 제1사단은 방어지역 조정에 따라 13일 다부동 일대의 새로운 방어선에 배치됐다. 국군이 다부동 진지에 도착했을 때 북한군 일부가 한발 앞서 328고지와 유학산을 점령하고 있었다. 제1사단 방어선 중앙이 돌파되고 다부동이 점령당할 위기의 순간이었다. 또 18일 새벽 가산에 침투한 북한군이 사격한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지자 대구의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날 충격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했다. 국군 제1사단은 위기를 타개하고 계획된 방어선을 회복하기 위해 미군과 협동으로 적진돌파 작전을 전개했다. 이는 한·미 간 최초 협동작전이었다. 미군이 국군의 전투력을 신뢰하지 않았던 그 동안의 관례에 비춰 파격적인 조치였다. 북한군도 18일 전차를 새로 보충 받아 보전협동으로 전면적인 야간공격을 개시함으로써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되풀이되었다. 이때 국군 제1사단에서는 매일 평균 600~700명의 인원손실이 발생해 병력이 감소하게 되자, 신병과 학도병으로 보충했다. 이로 인해 중대장이나 소대장이 부하들의 이름은 물론이고 얼굴조차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이영욱 매일신문 기자 hello@imaeil.com <인터뷰> “총신이 벌겋도록 쏘고 수류탄 던졌다” 다부동전투 참전-이동철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 대구지부장 “조금 전까지 이야기 나누던 전우가 북한군 총탄에 시뻘건 피를 쏟으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정말 머리가 확 돌았어요. 그때부터 무서운 게 없더군요. 총신이 달아오르도록 M1소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지요. 전투가 소강상태가 되면서 전우의 주검을 수습할 때 불쌍하다는 생각이 엄습하면서 눈물이 앞을 가렸어요.” 낙동강 방어선 다부동전투 수암산 고지전에 참전했던 이동철(91) 다부동전투구국용사회 대구지부장은 이야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에게 치열했던 전투 현장과 눈앞에서 산화해간 전우에 대한 기억은 어제처럼 또렷하다. 이 지부장은 1950년 8월 중순 국군 1사단 12연대 2대대 5중대 이등병으로 다부동 전선에 투입됐다. 훈련은 첫날 부대편성과 응급처치, 둘째와 셋째날 소총 분해결합, 실탄 8발 사격이 고작이었다. 1사단에 전입한 그는 다음날 해질녘 수암산 쪽으로 이동했다. 그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그는 “수암산 고지를 차지하려고 돌격하는데 박격포와 수류탄이 비처럼 쏟아졌어요. 북한군 박격포는 정말 지독했고, 그때 전우들이 정말 많이 죽었다”면서, “이후 영천 신령전투 현장으로 이동했고, 이후 수색병으로 활동했다”고 말했다. 이어 “대대장이 수류탄 가지고 적 탱크를 저지할 사람을 뽑는다고 해 자원했는데, 이는 수색대원을 모집하기 위한 연막이었다. 수색대원이 되어 도로에 대전차 지뢰를 매설해 후퇴하던 적의 마차 3대와 적군을 폭사시키기도 했다”며,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지원이 없었으면 우리는 수류탄, 야포, 박격포 한발도 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 지부장이 기억하는 백선엽 사단장은 무섭지만 따뜻한 지휘관이다. 1사단 사령부가 있던 동명국민학교서 백 사단장을 처음 봤다. 그는 “처음 본 사단장님은 무서웠다. 큰 덩치와 철모에 시커먼 보안경을 걸친 모습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도였다”면서, “그러나 북진 과정에 박격포 포신을 메고 가는 병사를 보면 자신이 대신 메고, 지프에서 내려 병사들과 함께 담배연기를 흩날리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하면서 정말 부하를 사랑하는 지휘관임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고 백선엽 장군님이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한 것은 너무나 분하고, 개탄스럽습니다. 만약 다부동이 뚫렸다면 대구와 부산이 함락되어 은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겁니다. 우리의 형제자매, 전우의 목숨을 빼앗고 전 국토를 피로 물들인 북한을 적이라고 부리지도 못하는 그들은 다부동전투 영웅 백 장군님을 입에 올릴 어떤 자격도 없습니다.” 매일신문 이영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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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13 15:20

[갈 길 먼 전라감영 복원 (상)실태] 3년 되도록 관광객 '외면'… 관리는 '엉망'

조선시대 전라도를 관장하던 전라감영이 복원된 지 3년째를 맞았지만 여전히 전주시민과 전주 관광객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 인근 한옥마을과 연계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데다 전라감영 기둥 곳곳이 갈라지고 곰팡이가 서려 있는가 하면 십자나사못이 박힌 곳도 있는 등 역사적 가치 또한 떨어진다는 목소리다. 특히 현재 동편만을 복원한 미완의 상태에서 남편 부지에 해당되는 완산경찰서 이전에 대한 협상도 전혀 진행하지 않은 상태로 전체 복원에 대한 시의 의지가 미약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전라감영의 실태와 문제점을 짚어보고 개선하기 위한 대안을 2차례에 걸쳐 조명한다. 지난 2020년 전주시는 104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옛 전북도청 자리에 전라감영의 동편 복원을 완료했다. 당시 시는 이번 전라감영 복원으로 전주가 전라도의 수도라는 역사적 상징성을 되새김과 동시에 풍패지관과 한옥마을을 연계하는 새로운 문화관광거점의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당초 기대와 달리 복원된 전라감영은 사람들의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고, 수많은 관광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인근 한옥마을과는 대조되는 등 도심속 외딴 섬처럼 외면받고 있다. 시에 따르면 올해 전라감영의 1일 평균 방문객은 200명대로 같은 기준 4000명에 달하는 경기전의 2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시는 감영의 관광 활성화를 위해 매년 4억 원 이상의 예산을 들여 다양한 홍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지만 방문객 수는 개방 당시인 지난 2020년대 이후 꾸준히 하루 200명대에서 답보 상태다. 이는 전라감영이 한옥마을에 비해 관광지로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 장점이 부족하다는 점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시민 김모 씨(56)는 "수년째 저렇게 생 나무형태로만 놔두길래 복원이 완료됐나 싶었는데, 한편으론 도색을 해야하지 않나 생각했다"면서 "그냥 너른 공간에 건물들만 덩그러니 있어 한번 휘 둘러본뒤 볼것이 없고 주차공간도 부족해 다시는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재 전라감영 인근에 마련된 주차 공간은 20대 규모의 민간 유료 주차장 뿐으로 시에서 운영하는 공영주차장은 전무하다. 여기에 전라감영과 연계할 인근 상권이 형성되지 않은 점도 관광객의 발길을 끌지 못하는 이유다. 시의 미흡한 관리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전라감영 개방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건물에 색을 입히는 단청 작업은 착수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현재 전라감영 내 주요 건물의 목조 기둥 대부분이 갈라지고 곳곳이 검게 변색된 상태다. 또 일부 기둥은 곰팡이가 피어 있기도 했다. 또한 복원된 전라감영 건축물 일부가 현대 건축 공법의 흔적을 대놓고 드러내 문화재로서 역사적 가치를 훼손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실제 전북일보가 전라감영 곳곳을 돌아본 결과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선화당과 정문인 중삼문 등에서 현대 건축에서 사용되는 십자나사못이 박혀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복원 당시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거쳐 생목만을 사용하는 등 전통공법을 고수했다는 시의 설명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전북대 한옥건축학과의 한 교수는 “역사적인 문화재라도 이곳을 방문한 관광객의 안전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 철물 등의 현대 건축 자재를 사용하는 경우는 더러 있다”며 “전라감영과 같이 안전과는 무관한 외부 장식용 시설에 십자나사못 등을 사용해 마감 처리하는 방식은 문화재 복원 차원에서 문제의 여지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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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준서
  • 2023.03.12 16:46

“'행정혁신·적극행정' 완주군은 둘 다 최고를 지향합니다”

‘혁신(革新)’과 ‘적극(積極)’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한쪽이 없거나 헛돌면 수레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혁신 없는 진취적인 자세는 공허하고, 적극적이지 못한 혁신 또한 효과를 거둘 수 없다. 그래서 둘을 얼마나 절묘하게 잘 엮어내느냐가 디지털 혁명시대의 행정 경쟁력을 좌우할 수 있다. 완주군은 최근 행정안전부로부터 행정혁신과 적극행정 2개 부문에서 ‘우수기관’ 평가를 받았다. 둘 다 ‘우수하다’고 호평을 받은 곳은 전북 14개 기초단체 중 완주군이 유일하다. 혹자는 2개 부문의 고평가를 받은 ‘더블 챔피언’의 비결을 ‘도전과 열정’의 조직 분위기에서 찾는다. 정확한 답을 찾기 위해 완주군정을 살펴봤다. 적당히 NO! 적극적 YES! 사례 1. 문화역사과의 장기재 주무관은 웅치전적지 국가사적 승격의 숨은 공신이다. 그는 7년의 숙원을 풀기 위해 그야말로 남선북마(南船北馬), 사방으로 바쁘게 뛰어다녔다. 수시로 현장에 가보자는 여러 언론의 대응에도 적극적이었다. 한 언론인은 “저렇게 소신을 갖고 열심히 뛰는 공무원은 처음 봤다”고 상찬했다. 그는 작년 12월에 완주군의 ‘2022년 적극행정 우수공무원 선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사례 2. 민원인 A씨는 교량 위치가 자택과 가까운 데다 높게 재설치 돼 거주안전의 위협을 느꼈다. 완주군은 사전컨설팅을 통해 타당성 검토를 받아 A씨의 요청을 해결할 수 있었다. 우기철 이전에 공사를 원활히 추진해 재해 피해도 예방할 수 있었다. 주민의 행정 신뢰도가 제고된 것은 불문가지다. 두 사례는 완주군 적극행정의 단편일 뿐이다. 완주군은 불합리한 규제를 개선하는 등 공공의웅 이익을 위해 창의성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업무를 추진하는 ‘적극행정’이 일상사이다. 이는 ‘적당히’라는 단어가 통용되지 않는 완주군의 분위기에서 비롯한다. 유희태 완주군수는 “모든 업무에 ‘적당히’를 버리고 ‘적극적’이라는 단어를 붙이자”고 독려한다. 심지어 민원은 귀찮은 것이 아니라 선물처럼 귀하게 여기고 적극적으로 처리해 나가자고 당부한다. 정부 인정한 적극행정 행정안전부가 전국 243개 지자체를 대상으로 ‘2022년 적극행정 종합평가’를 실시해 최근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완주군은 적극행정 활성화 노력과 인센티브 부여, 적극행정 추진 성과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우수기관’으로 선정됐다. 이번 평가는 일상적인 관행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시각에서 창의적이고 적극적으로 업무를 추진해 성과를 낸 지자체를 선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평가를 위한 5대 항목 16개 지표에는 기관장의 적극행정 이행노력과 추진의지, 우수사례 평가, 주민 체감도, 홍보 노력 등이 5점에서 최고 10점까지 높은 배점을 차지했다. 결국 단체장의 의지와 우수사례에 대한 주민들의 만족도, 적극 홍보 등이 우수기관 선정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셈이다. 완주군은 적극행정 실행계획을 수립하는 등 군민 수요에 부응하는 적극행정 공직문화를 조성해 왔다. 또 민원해결 공무원에 대한 포상지원 신설 등 직원들의 적극행정 관심도를 제고하고,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통해 적극행정 문화를 장려해 왔다. 이런 다양한 노력이 완주군을 ‘적극행정 1번지’로 격상시킨 주요인이라는 분석이다. 행정혁신 유일하게 ‘우수’ 낡은 뗏목으로는 거센 파도가 위협하는 대양(大洋)을 항해할 수 없듯, 행정도 구태의연한 사고와 부정적인 시각으로는 광속(光速)의 디지털 혁명시대를 선도할 수 없다. 행정안전부의 최근 ‘2022년 지방자치단체 행정혁신 평가’에서 완주군은 전북 14개 기초단체 중 유일하게 ‘우수기관’으로 선정됐다. 전국 82개 군(郡) 지역 중에서는 3위에 랭크된 성적표다. 2021년 군 단위 15위였던 완주군이 무려 12계단 껑충 뛰어오른 것이다. 이는 민선 8기 출범을 전후해 벌이고 있는 대대적인 혁신 작업 결과물로 평가된다. 살을 에는 고통을 참고, 뼈를 깎는 혁신 노력이 뒤따르지 않은 한 거두기 힘든 성적 상향이다. 완주군은 특히 호남권 군 지역 중에서는 최초로 2017년 이후 6년 연속으로 ‘혁신 우수기관’ 대열에 포함돼 더욱 주목받고 있다. 혁신 작업이 단순한 1회성이 아니라 지속성을 갖고 각 분야에서 끊임없이 실행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단체장 혁신 리더십’ 부문도 ‘우수’로 평가되는 등 10개 부문 중에서 무려 8개의 ‘우수’를 싹쓸이 했다는 점이다. ‘적극행정’과 ‘혁신행정’ 2개 분야에서 행안부 평가의 ‘우수기관’에 선정됨에 따라 완주군은 ‘더블 챔피언’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도내 기초단체 중에서 ‘2개 부문 우수 평가’는 완주군이 유일하다. “국내 최고를 지향한다” 행정혁신과 적극행정에서 앞서가는 완주군의 비결은 뭘까. 항상 ‘긴장’과 ‘경계’의 끈을 놓지 않는 조직의 특성, 그리고 ‘최고’와 ‘최초’를 지향하는 조직 분위기에서 비롯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도농(都農) 복합도시는 행정 전 분야에서 긴장하며 새로움을 추구하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지만, 반대로 경계가 풀리고 긴장을 완화하면 모든 분야에서 뒤쳐질 수 있다. 완주군은 인근 대도시를 경계하며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해 행정혁신과 적극행정을 선도하는 모델로 부상했다는 말이다. 여기다 단체장과 직원들의 열정과 도전 에너지가 결합하며 폭발적 위력을 발휘, 완주군의 각종 수상에 유난히 ‘최고’와 ‘최초’가 많다는 분석이다. 완주군은 이에 만족하지 않는다. 국내 최고의 행정혁신과 적극행정을 지향한다. MZ세대 등 2030세대의 적극행정 관심도를 높이고, 인허가 분야 등 군정 전반에서 적극행정이 확산할 수 있도록 박차를 가한다는 방침이다. 적극행정에 대한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강화하고 면책제도 또한 활성화 한다는 구상이다. 민선 8기의 사실상 원년인 올해에도 행정혁신의 고삐를 바싹 죄어 ‘혁신과 적극’의 두 바퀴를 힘차게 굴린다는 방침이어서 향후 성과에 비상한 관심이 쏠린다. 유희태 완주군수 “주민행복 위해 땀 흘리고 혁신할 것” 유희태 완주군수의 최근 표정이 유난히 환하다. 그는 “직원들이 노력해준 덕분에 ‘행정혁신’과 ‘적극행정’ 2개 부문에서 우수기관으로 선정됐다”며 “앞으로도 주민행복과 지역발전을 위해 행정혁신과 적극행정이 활성화되도록 지원 시스템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유 군수는 “행정의 주인은 주민이고, 주인의 행복을 위해 대민행정부터 ‘적당히’가 아닌 ‘적극적’으로 임해 달라고 당부해왔다”며 “주민들의 눈높이에 맞춰 적극행정을 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 부여와 면책제도 강화 등에 나설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혁신은 익숙한 것과 결별하고 새로운 것과 만나는 것”이라며 “주민의 행복과 지역발전을 위해서라면 기존의 관행이라도 과감히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 군수는 또 “경제가 어려운 만큼 기업유치와 일자리 창출 등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보다 적극적인 자세와 혁신적인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다짐했다.

  • 기획
  • 김재호
  • 2023.03.08 14:59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③포크, 가마타고 삼남대로를 거쳐 전라도에 들어오다

△전라도로 가는 첫 길 삼남대로와 영호남 도로의 분기점 ‘삼례’ 포크의 조선 남부지역 조사는 <대동지지>에 나와 있는 8대로인 해남로(충남,전북,전남지역)를 통해 시작됐다. 그리고 통영로(경남)와 동래로(경남,경북,충북) 를 기본 여행길로 정했다. 해남로는 통칭 한양에서 삼남(三南;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지방으로 통하는 대로라는 의미에서 ‘삼남대로’라고 불리었다. 포크는 1884년 11월 1일 자신의 숙소가 있는 ‘갓점골’ 즉, 현재 서울 청계천 3가 수표교와 을지로 인근의 입정동(笠井洞)에서 출발해 용산 삼각지 부근인 ‘밥전거리’를 지나 한강을 건너 동작진-과천으로 이어진 해남로길로 접어들었다. 이때 서울 근교의 뚝섬을 건널 때 절이 하나 있었는데, 그 절의 화장실이 얼마나 깊던지, 용변을 본 후 이것들이 바닥까지 도달하려면 1년이 걸린다는 말을 들으며 조선인의 허풍과 유머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이 길로 전주를 지나 나주까지 방문한 포크는 나주에서 방향을 틀어 자신이 조선에서 꼭 보고 싶어했던 경남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과 통영의 ‘거북선’을 보기 위해 광주를 거쳐 담양-순창-남원으로 이동해 앞서 10대로중 유일하게 영남과 호남지역으로 길이 나뉘는 삼례에서 ‘해남로’와 갈라진 ‘통영별로’ 길을 이용해 해인사를 방문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길이 조선의 가장 중요한 관도로서 이미 춘향전 이도령 어사행차길이기도 했으며 1597년 이순신 장군이 경남 합천 초계에 주둔한 “도원수 권율 막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아 백의종군을 위해 갔던 길로 그 분기점은 삼례였다. 즉, 삼례는 전라도와 경상도로 나뉘는 분기점으로 조선시대까지는 현재의 영∙호남선이 갈리는 대전과 같은 역할을 한 곳이었다. △포크의 충성스러운 가마꾼 조선시대 신분이 높은 사람이 타고 다니던 주요 이동 수단은 가마였다. 당시 지방여행을 위해 조선의 고관들은 4명이 교대로 드는 가마를 이용했는 데 포크도 이를 활용했다. 포크가 처음 가마를 탈때의 상황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 수 있다. “나는 사방이 막힌 모양의 아담하고 정갈한 가마를 탔다. 내 가마에는 챙이 넓은 펠트 모자를 쓰고 헐렁한 흰 옷을 입은 네 명의 가마꾼이 배정되었다. 신분이 높은 조선인이 여행하는 가장 과시적이고 사치스러운 방법이었다.”라고 했다. 11월 9일 용안을 떠나 익산으로 가면서 “익산에 도착하기 전에 눈이 서너 번 무섭게 쏟아졌다... 길은 형편없어서 끔찍할 정도였다. 나는 가마꾼이 가여웠다. 그들은 진정 용감하고 주의 깊게 우리들을 운반했다. 그들의 일은 지독하게 힘들었다.”라고 기록했다. 또 가마꾼은 보교(步轎; 포크는 “포케요pokeyo”라고 썼다)라 불렸는데 “이들은 길이 험하면 ‘제미(chemi)‘ 라는 욕설을 하거나 길을 막고 얼쩡거리는 사람들에게는 욕을 퍼 붓는다. 그리고 고개를 오를 때 너무 힘들면 가마꾼들은 “아이고, 죽겠다(O-ui-i-go, chuketta!)라고 말했다.”라고 기록해 매우 구체적인 한국어 표현도 남겨 놓았다. 포크는 이들에 대해 “불평이 많지 않고 굳센 노새처럼 강하고 참을성이 있으며 주인이 하루 이틀 숙박을 하거나 기다릴 때면 투전이나 막걸리와 소고기, 밥에 몰두한다.“ 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긴 여행동안 포크는 가마꾼들에게 꽤 호감을 느껴 두 명에게 '순둥이'와 '들창코'같은 별명을 붙였다. 이 같은 가마꾼들의 성격은 필자가 70년대 동네 택시회사 기사분들에게서 느꼈던 이미지와 묘하게 중첩되어 시대가 달라도 비슷한 업종의 특성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가마꾼들의 이동 속도는 10리(포크는 10리를 3.2마일=5.15km로 보았다.)를 1시간 내외로 진행했고 1일 최대 80-90리를 진행했다. 가마 1대의 운송방식은 4명이 2인 1조로 교대하며 담당했는데 가마를 직접 들지 않는 나머지 1조는 가마 옆에서 10분마다 휴식할 때 가마의 지지대를 들어 올려 동료들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도록 어깨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이는 1888년 명성황후의 시의로 내한했던 릴리어스 H. 언더우드(연세대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의 부인)의 “가마꾼은 4명이 2명씩 쌍을 이뤄 가마를 드는 데 휴식을 취하는 가마꾼들은 매 10분마다 30초가량 잠시 가마를 들어주었고, 두 쌍은 매 3마일(4.8km)마다 교대를 했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포크가 가마꾼에게 지불한 일당 포크의 여행 기록 가운데 흥미로운 내용은 엄청난 동전 궤짝을 말에 싣고 다닌 부분이다. 포크는 식사비와 기타 비용을 현장에서 지급했는데 특히, 보교 즉, 가마꾼에게 일정 기간마다 급료를 지급했다. 포크가 가마꾼과 협상한 요금은 매 10리당 50푼이었다. 그리고 하루 90-80리를 가는 것을 약속하고 매일 진행 거리를 <대동여지도>를 통해 확인하고 일당을 지급했다. 이 같은 가마꾼 1명의 일당은, 당시 조랑말 타는 비용(10리 50푼)과 같아 결국 가마당 4인의 비용은 말타는 것보다 네 배 비용이 들었다. 포크가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최종적으로 이들에게 지급한 액수는 한 달 보름 동안 총 168,000푼이었다. 이는 대략 하루에 한 사람 당 320푼이었다. 그런데 조선 시대 ‘냥(兩)-전(錢)-푼(分)’의 화폐단위가 현재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느냐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쌀 1섬(20말) 공정가가 5냥이었던 점을 바탕으로 현재 가치(2011년 물가 기준)를 환산해 1냥=7만원, 1전=7000원, 1푼=700원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를 근거로 계산하면 가마꾼의 일당이 22만4000원으로 상당한 고액이 된다. 그런데 조선정부는 1883년 2월 주조이익을 높여 긴급한 재정난을 모면하기 위해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했었다. 따라서 당오전에 의해 최소 5배 정도의 초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 고려돼야 한다. 한편, 1894년 <교남수록>에 나타난 1끼 밥값 평균이 2전 8푼(28푼)으로 10년전인 1884년 포크가 지급한 25-30푼과 비슷한 상황임을 감안할 때 1894년 1끼 밥값 28푼을 실제 4,000원(2011년) 정도로 계산한 견해를 따르면 결국 가마꾼의 일당은 최소 4만5700원 정도가 된다. 그런데 또 포크가 방문한 전라도에서는 당오전 통용이 안되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실제 일당은 평균 일당 수준 5만여원에서 최대 2배인 10여만원까지도 상정해 볼 수 있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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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3.06 16:08

성기상 한국곤충산업중앙회장 “곤충은 인류의 미래식량, 곤충산업은 친환경산업”

지난 2022년 11월 15일 세계 인구는 80억 명을 돌파했다. 인구의 증가는 식량문제와 직결된다. 곤충산업은 인구증가에 따른 식량위기를 해결할 미래의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른다. 우리나라에서 곤충산업이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 전이지만 현재는 ‘세계 1위’ 수준에 올라 있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나온다. 곤충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지난 2010년 결성된 (사)한국곤충산업중앙회가 지난 1월 초 제7기 회장단과 임원진을 구성했다. 3년 임기의 제7기 회장에 회원 수 절대열세 지역인 전북 출신이 이름을 올려 화제다. 진안읍 가림리(마이산 인근)에서 ‘마이산홍벵이’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성기상 대표가 그 주인공. 진안지역에서 전국단위 농업인 조직의 회장을 배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어서 지역사회의 관심이 뜨겁다. 지난달 22일 제주도 소노캄 제주에서 열린 ‘곤충산업 재도약을 위한 2023년 곤충산업 발전 심포지엄’ 겸 제7기 회장단 출범식에서 성 회장은 취임식을 가졌다. 지난 1일 홍벵이 농장 사무실에서 그를 만나 곤충 산업의 미래 전망과 회장으로서의 포부를 들어봤다. 전국 조직인 (사)한국곤충산업중앙회 수장이 되셨습니다. 회원 수 절대 열세인 전북지역에서 회장이 나와 지역사회의 관심이 뜨거운데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미래 식량문제 해결의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세계적 관심사가 되고 있는 곤충산업 분야에서 회장을 맡게 돼 어깨가 무겁습니다. 출신지역을 따지지 않고 회장직을 맡겨 준 것은 ‘곤충산업이 잘 되기를 바라는 회원님들의 소망이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한국곤충산업중앙회는 전임 제6기 회장이 건강상의 문제로 사퇴하는 바람에 공석 상태가 발생, 4~5개월가량 비대위 체제로 운영돼 왔습니다. 제가 비대위를 이끌다 회장으로 취임했는데 임기는 지난 1월 1일부터 오는 2025년 12월 31일까지입니다.” 사육과 제조 등 곤충산업에 입문한 계기는. “가족 중 한 명이 큰 병으로 대수술을 받은 후 ‘좋다는 것’ 다 먹여 봤지만 회복이 더뎠습니다. 그런데 굼벵이를 먹으면서 회복 속도가 정말 빠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래서 굼벵이에 매력을 느껴 사육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값비싼 굼벵이를 맘껏 먹게 하려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임상 체험적으로 효험이 너무 뚜렷해 아예 전업으로 삼게 됐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곤충산업의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세계 인구가 급증하면 인류는 식량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는데 그 타개책의 하나로 지목되는 게 곤충입니다.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곤충은 좁은 공간에서도 사육이 가능한 데다 단위 면적당 생산량 또한 다른 작물에 비해 월등히 높습니다. 또 컨테이너나 아파트처럼 층을 쌓은 구조물에서도 사육이 가능해 토지이용 효율이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둘째, ‘다기작’이 가능해 연간 여러 차례의 출하가 가능합니다. 종류에 따라선 월 1회 출하가 가능한 곤충도 있습니다. 셋째, 소량에서도 질 좋은 단백질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게 곤충입니다. 이 세 가지를 충족하는 식량은 곤충 말고는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농업과 먹거리라는 관점에서 곤충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농업과 먹거리라는 측면에서 곤충은 ‘극한 유기농’이라 할 정도로 친환경적이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곤충농업의 가장 큰 장점은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농약을 쳤다가는 곤충이 전멸하기 때문입니다. 곤충농업은 그 어떤 축종도 따라갈 수 없는 ‘유기농의 대표 종목’이라 하겠습니다. 둘째, 곤충농업은 분뇨 발생이 소·닭·돼지 등 타 축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습니다. 대기·수질·토양 오염 따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친환경적인 것입니다. 장점 하나를 덧붙이자면, 곤충은 식탁에 올라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짧습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어떤 하나의 먹거리가 식탁에 오르기까지는 짧아야 50년 길게는 100년가량의 검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곤충이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검증기간은 10년이 채 안 됩니다.” 우리나라 곤충산업의 현주소는. “우리나라는 불과 10여 년 사이에 세계적 곤충산업의 선두주자, 즉 곤충 선진국으로 부상했습니다. 공식적인 데이터는 없지만 한국이 곤충산업 세계 1위라는 공감대는 은연중 확산되고 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은 곤충산업 후진국이었습니다. 곤충사육에 관한 많은 것들을 다른 나라에서 배워 왔습니다. 하지만 이젠 정반대입니다. 예전 곤충선진국들이 우리나라를 찾아와 곤충사육이나 관련 산업과 관련한 많은 것들을 배워 가고 있습니다. 지난해 세계 각지 난민을 지원하는 유엔 산하 ‘월드뱅크’에서 농업진흥청을 찾아와 한국을 식량위기해결 파트너로 제안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곤충 선진국으로 인정받는 하나의 바로미터라 하겠습니다. 곤충 농업은 우리나라가 농업분야에서 유일하게 세계 1위에 오른 분야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지난 2019년 1월 15일 ‘곤충의 날’을 제정해 곤충산업의 위상을 세워놓았습니다. 농업분야에서 국가가 기념일을 지정한 품목은 곤충 말고는 없습니다. 세계적으로도 곤충의 날을 제정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나라는 지난 2010년 ‘곤충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습니다. 곤충 육성법이 있는 유일한 나라가 됐습니다. 하지만 이런 정도로는 아직 많이 미흡합니다. 지금보다 움직임이 더 빨라야 다른 나라에 추월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북지역의 곤충산업 현황과 현재 위치는 어떤가요. “전국적으로 3000농가 안팎의 농민이 곤충을 사육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전북지역 농민은 300농가가량입니다. 전북지역은 타 지역에 비해 곤충 농가의 수가 적고 도청 또는 시군의 관심도 또한 그리 높은 편이 아닙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현재 전북지역 출하 곤충의 품질은 국내 최고 수준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곤충산업이 세계 1위인 점을 감안한다면 전북산 곤충을 세계 최고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라북도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우리나라에 아직 없는 곤충산업 거점단지 조성에 나서야 합니다. 전북지역은 거점단지가 돼야 할 2가지 명분이 있습니다. 첫째, 전주 혁신도시에 농업진흥청과 국립농업과학원 등이 들어와 있습니다. 곤충산업의 흐름을 좌우할 국가기관과 긴밀한 협조를 하는 데 아주 적합한 환경 속에 있는 것입니다. 둘째, 전라북도는 호남평야를 배경으로 늘 ‘농도’를 표방해 왔습니다. 전북지역은 역사적으로는 임진왜란 때 최후의 나라 곳간 역할을 하면서 조선팔도를 지키는 뒷심이 됐습니다. 당시 조선군의 최후 군량미 조달 지역이어서 ‘약무호남 시무국가(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란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 두 가지가 거점단지 조성을 위해 전라북도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이유입니다. 7년 전 도내 곤충인들이 전북지역을 한국곤충산업 거점단지로 조성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전북도청은 그동안 미온적이고 소극적이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분발해 세계 곤충산업 메카 기반 조성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향후 곤충농업의 전망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아주 밝다고 봅니다. 세계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하루에 굶어죽는 세계 인구는 2만 5000명가량이라는 보고서가 있습니다. 유엔에 따르면 지난 2019년 전 세계 인구의 8.9%인 약 6억 9000만 명이 영양실조에 걸렸다고 합니다. 식량 위기의 시대입니다. 이를 해결할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르는 게 곤충농업입니다. 앞서 설명했듯 세 가지 면에서 다른 농업보다 월등한 비교 우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농업과 비교 불가할 정도로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많고,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며, 분뇨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 축산이어서 ‘극한 유기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곤충에 대한 ‘징그럽고 해롭다’는 기존의 부정적 이미지를 버려야 합니다. 부정적 이미지는 익충과 해충 가운데 하필 해충의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 잡아서입니다. 많은 곤충은 익충입니다. 익충은 원물(곤충 그 자체) 말고도 액상, 분말, 환, 파우치 등 다양한 형태로 가공돼 식탁에 오릅니다.” 앞으로 포부를 말씀해 주십시오. “곤충산업은 성장 가능성이 무한한 블루오션 영역입니다. 회장 재임기간 동안 블루오션 세계시장 선점을 위한 성장의 기초를 탄탄히 하는 게 저의 목표입니다. 판매촉진을 위한 수출 길을 열고, 곤충산업의 뿌리를 튼튼히 하기 위해 품목농협을 설립할 것이며, 곤충식품 안정화를 위해 곤충의 먹이원을 표준화하고 궁극적으로는 원물의 표준화도 이뤄낼 것입니다.” 성기상 회장은 지난달 22일 한국곤충산업중앙회장에 오른 성기상 대표는 현재 진안읍 가림리 마이산 인근에서 마이산홍벵이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진안읍 연장리 출생으로 동국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그는 건축 관련 사업을 하던 중 가족 가운데 한 명이 큰 병을 수술하고 나서 굼벵이 복용 후 빠른 회복력을 보이자 굼벵이 사육을 시작, 곤충산업에 입문했다. 곤충의 매력에 빠져 지난 2017년 전주 기전대학교에서 곤충산업학을 본격적으로 전공, 젊은 시절 물리학 학사에 더해 늦은 나이에 곤충산업학 학사를 추가 취득했다. (사)한국곤충산업중앙회 총무이사와 수석부회장을 지냈으며 ‘진안군헬스푸드 플랫폼 구축 사업단’ 단장을 맡기도 했다. “타고난 친화력과 붙임성을 바탕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반장이나 회장 자리를 도맡았습니다.” 학창시절 친구들이 한결같이 털어놓는 그에 대한 기억이다. 강한 카리스마, 이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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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승호
  • 2023.03.05 13:47

[지난 주 '핫클릭' : 2월 26일~3월 3일] 전주시 제2청사 신축 계획 '관심 집중'

△ 2월 26일~3월 3일 2월 마지막 주이자 3월 첫째 주, 전북일보 홈페이지를 방문한 독자들이 가장 많이 읽은 기사는 김태경 기자의 '전주시 800억원 들여 제2청사 신축'이다. 올 4월부터 시의회 청사 옆 삼성생명 빌딩 일원 3006㎡ 부지를 매입한 뒤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지하 1층~지상 9층 규모, 연면적 1만3800㎡ 규모로 신축하는 것이 사업 내용. 두 번째는 이종호 기자의 '전주지역 재개발 3중고'다. 자재비 폭탄과 고금리, 법률 개정에 따른 사업 지연으로 멀어지는 서민의 내 집 마련 꿈과 갈등을 짚었다. 세 번째로는 천경석 기자의 '새만금 이차전지 산업 거점 급부상'이다. 기업들이 선호하는 투자처로 새만금 국가산업단지가 급부상하며 지난해 21개 기업 1조 1852억 원 투자유치 성과를 이뤘다고 전했다. 이중 이차전지 분야는 5379억 원 규모로 전체 투자 유치액의 45.4%를 차지했다. 이밖에 이환규 기자의 '워터파크 안 부럽다⋯군산에 대규모 해양레저체험장 조성', 송승욱 기자의 '익산 대간선수로에서 카누를? 도심 속 수변 공간 눈길'이 뒤를 이었다. 이밖에 엄승현 기자·이준서 수습기자의 '기본적인 가격표시도 안 지키는 전주한옥마을', 김윤정 기자의 ‘고심에 고심’ 정운천 의원 전주을 불출마 가닥' 등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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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용수
  • 2023.03.04 14:00

[전북 기업 도전과 성공 스토리] 백년가게 신가네정읍국밥

"음식과 문화를 선도하는 기업, 신가네정읍국밥입니다." 3대를 이어 60여 년 전통의 맛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신가네정읍국밥이 식당을 넘어서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중소벤처기업부는 30년 이상 명맥을 유지하면서도 오랫동안 고객의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고 인정해 신가네정읍국밥을 백년가게로 선정했다. 백년가게는 지난해 12월 기준 전국에 1356곳, 전북에 81곳이 있다. 신가네정읍국밥은 3대를 이어온 전통 그대로의 맛을 살리고 만민이 향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겠다는 창립 이념을 가지고 65년째 역사를 쓰고 있다. 65년 달려오면서 신가네정읍국밥 가맹사업을 펼친 결과 현재 정읍(본점), 전주, 부안, 고창, 광주, 목포, 여의도, 통영, 무안 등 가맹점 10여 곳을 두고 있다.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맛의 일관성 덕분이다. 김종성·신은미 대표는 "3대째 이어지는 가업이고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어느 순간 맛의 일관성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밤낮으로 이 맛의 일관성을 찾는 데 시간과 정성을 들여 비법 양념 스프를 개발했다. 가맹점에서도 본점 그대로의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4년에 걸쳐서 스프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가맹점 어느 곳에서 먹어도 "확실히 본점이 맛있지"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신가네정읍국밥은 몸집을 키우면서도, 키우고 나서도 고객들에게 최선의 서비스와 맛을 제공하기 위해 끊임없는 개발·연구하고 있다. "대를 이어오면서 내려온 가르침이 '먹을 것 주는 기쁨이 가장 크다'는 말입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든 고객이 뜨거운 국밥 한 그릇으로 요기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볼 때의 기쁨이 가장 크다는 의미다. 이는 3대째 내려온 신가네정읍국밥의 가르침이다. 신가네정읍국밥의 역사는 1958년 정읍시 신태인읍에서 시작됐다. 신은미 대표의 고모인 신순애 씨가 시작해 신 대표의 엄마인 조금자 씨가 물려받고 2002년에 김종성(56)·신은미(53) 대표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후에는 부부의 아들인 김관우 씨(전주대 외식산업학과 3년)가 대를 이어갈 예정이다. 김 대표는 "1급 자동차 정비사로 대기업에서 현장근무와 외국생활을 경험했다. 호주에서 3년 정도 살았을까, 한국으로 발령받았다. 당시 장모님이 건강상의 이유로 가게 문을 닫아야겠다고 했었다. 자리도 잡았고 맛도 있었기 때문에 그냥 닫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커서 가업을 물려받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루 서너 시간씩 자면서 영업했다. 조그마한 평수에서 시작했는데 그동안 가업을 이어오면서 맛이나 단골 등 다져온 것이 많아서 타 지역에서도 찾아오는 국밥집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작은 국밥집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몸집을 키우면서 이제는 수출까지 내다보고 있다. 아들에게 바통을 넘기는 이유 중 하나다. 수출은 대를 이어가면서 장인 정신을 고집하고 비법을 전수하기보다는 조금 더 몸집을 키울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다 떠올린 대안이다. 수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밀키트를 개발하는 등 기반을 다지고 있다. 신가네정읍국밥은 중소벤처기업부 밀키트 개발사업을 통해 메뉴 중 하나인 정읍국밥과 철판순대볶음을 모티브로 한 곱창순대떡볶이 밀키트를 개발했다. 밀키트는 현재 인천국제공항, 네이버 스토어 등에 입점돼 있다. 전국을 넘어 세계로 성장 발판을 확대할 백년가게 신가네정읍국밥의 모습이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신가네정읍국밥 김종성·신은미 대표 "음식 앞에서는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았으면 해요." 김종성·신은미 대표(이하 대표)는 신가네정읍국밥을 물려받았을 때 장애를 가진 친구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됐다. 친구는 대표에게 "우리는 밥 먹을 데가 없다.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곳도 턱없이 부족하고 주차장은 물론 비장애인들의 시선이 있어서 어디 가서 밥 먹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이에 대표는 본점을 장애인 친화 식당으로 탈바꿈했다. 식당과 최대한 가까이 장애인 주차 자리를 만들고 전동 휠체어도 들어올 수 있도록 조성했다. 또 어려움이 있으면 직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출입구에 비상벨도 설치했다. 대표는 "새로 조성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식당도 휠체어가 들어올 수 없어 바깥에서 밥을 먹는 장애인도 다수 있었다. 지금 조성하고 나니 그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시선 신경 쓰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이렇듯 대표가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고객이다. 정직, 정도, 정성, 정진이라는 네 가지 철학을 가지고 고객을 대하고 있다. 음식의 재료부터 엄선해 정직으로 고객의 먼저 생각하고, 가맹사업에서 법·원칙을 지키며 약속을 엄수하는 정도경영을 하고, 고객에게 정성을 다하겠다는 초심으로 노력하고, 3대를 이어온 전통 그대로의 맛 자존심을 걸고 정진하겠다는 목표다. 오랜 시간 고객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비결이기도 하다. 이 자리까지 오는 동안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는 "오랜 시간 역사를 이어오다 보니 위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솔직히 이혼 도장 찍고 법원 앞까지도 갔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저희뿐만 아니라 모든 자영업자의 이야기다. 당시 못 참고 이혼했다면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없었다"며 "시간이 해결해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처음 시작할 때 무일푼으로 한국에 왔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위기나 고생은 5, 6년이다. 생각보다 안 되고 어려워도 조금만 참으면 행복이 온다는 걸 배웠다"고 했다. 대표는 인터뷰 내내 고객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끊임없이 고객들이 관심과 사랑을 보여 줬기 때문이다. 대표는 "사실 국밥 치고 저렴한 가격은 아니다. 그래도 많은 고객이 식당을 찾는다. 심지어 10분 정도 기다릴 때도 있는데 자리 안 떠나고 차례를 기다릴 때 너무 감사하다. 고객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음식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뭐 하나라도 챙겨갈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어서 연구하고 있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다"고 말했다.

  • 기획
  • 박현우
  • 2023.03.01 17:18

[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기획] 끝나지 않은 전쟁 기억해야 할 미래_마산방어전투

1950년 8월 1일 하동과 함양, 진주를 점령한 북한군 6사단은 마산 접경에 이르렀다. 방호산 6사단장은 “마산을 점령하면 적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다. 우리의 최종 목표인 부산 점령은 시간문제이다”라고 말하며 승리를 장담했다. 그러나 경북 상주에 주둔 중인 미 25보병사단이 8월 3일 마산으로 급파하면서 전투 양상이 달라졌고, 마산을 지키고 뺏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국군과 미군 1000여명, 북한군 4000여명 등 무려 5000여명이 전사한 참혹한 ‘마산방어전투’. 북한군에 대부분 국토를 빼앗기고 마산이 무너지면 부산마저 위태로운 상황에서 방어전투는 전쟁의 승패를 가를 수 있는 ‘막느냐 무너지느냐’의 중요한 전투였다. 만약 패배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중요했지만, 미군 주도 전투란 이유로 기념관 하나 없이 잊어 가고 있다. ◇죽음으로 지켜라= 1950년 8월 1일 북한군 6사단은 남침 36일 만에 진주를 점령한 데 이어 마산 현동 검문소에 집결했다. 6사단장 방호산은 중국에서 항일 활동을 하고 소련 유학까지 다녀온 북한군 내 뛰어난 전술가였다. 또 중국 국공내전에 참전해 전쟁 경험이 풍부한 조선족들로 구성된 북한군 6사단 7000여명은 함안·진동 고산지대를 먼저 확보한 후 마산 점령을 노리고 있었다. 당시 이 일대를 주둔하고 있던 국군은 1000여명에 불과했다. 미 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은 급히 경북 상주에 주둔 중인 미 25보병사단을 250㎞ 넘는 마산으로 단 2일 만에 이동시켰다. 이에 맞춰 진주에서 후퇴한 미 24사단도 창녕에 낙동강 방어선 진지를 구축했다. 워커 중장은 “240km의 낙동강 방어선의 더 이상 철수나 후퇴는 없다. 죽음으로 지켜라”고 말하며 결의를 다졌다. 이로써 마산을 점령하려는 북한과 사수하려는 국군과 미군은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특히 요충지였던 해발 739m 높이 서북산은 고지의 주인이 19번이나 바뀌었다. 서북산은 함안군 여항면과 창원시 마산 합포구 진북면·진전면 경계에 있어 산 정상에 오르면 인근 함안과 마산 일대, 진주가 보여 전쟁의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다. 서북산을 지키는 과정에서 1000여명의 아군이 전사했을 정도로 참혹했다. 산 정상은 수없는 미군 함포 사격과 공군기의 네이팜탄으로 인해 나무가 사라지고 정상 높이가 낮아져 미군은 이 산을 ‘늙은 중머리 산’, ‘네이팜’이라고 불렀다. 만일 방어전투에서 패배했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바뀌기 전까지 대한민국은 절박한 위기였다. 마산과 당시 임시수도인 부산까지는 직선거리로 40~50㎞에 불과했다. 방어전투에서 패배했다면 부산이 위험했고,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도 힘들어졌을 수 있었다. 결국 마산방어전투에서 한미동맹군 승리로 북한군의 부산 점령을 막을 수 있었고, 국군과 UN군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방어전투 승리로 9월 16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반전의 기회를 가져왔다. ◇한미동맹의 상징= 지난 1월 29일 방문한 격전지 중 하나인 마산합포구 진북면 옥녀봉 정상. 옥녀봉에는 전투가 벌어진 지 70년이 넘었지만, 당시 참혹한 흔적들을 느낄 수 있었다. 옥녀봉은 물자 수송이 용이한 도로가 인접한 요충지로 미군과 북한군의 탈환전이 이뤄졌던 곳이다. 정상에는 미군의 함포 사격으로 인해 생긴 구덩이와 참호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현장을 동행한 배대균 마산방어전투기념사업회 회장이 금속탐지기로 발굴 작업을 하자 탄피, 벨트 버클 등이 발견됐다. 배 회장은 “이 일대에 수십차례 발굴 작업을 했는데 아직도 전투에 쓰인 총알 탄피, 파편, 버클 등이 나온다. 이만큼 방어전투가 치열했다는 것을 뜻한다”며 “남의 나라에 와서 목숨을 바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군인들이 잊히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한미동맹의 상징이기도 한 이 전투가 정전 70주년에 맞춰 적극 재조명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가장 치열했던 서북산 전투 당시 로버트 리 티몬스 대위는 중대장으로 중대원 100여명과 함께 고지를 지키던 중 북한군 습격으로 부상을 입고, 후송 중 북한군 기관총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전사 당시 티몬스 대위에게는 7살 아들이 있었다. 아들인 리처드 티몬스는 아버지를 이어 군인이 됐고 이후 주한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했다. 또 티몬스 대위 손자도 미 육군 대위로 한국 근무를 자원해 1996년부터 1997년까지 판문점 인근 미 2사단 최전방 초소에서 근무했다. 3대에 걸쳐 대한민국 자유와 평화를 지킨 것이다. ◇인터뷰 “마산 뚫렸으면 지금의 대한민국 없었을 것”-마산방어전투 유일 생존자 류승석 노병(93, 1950년 당시 학도병) “마산이 무너졌으면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은 없었을 겁니다.” 마산방어전투 참전자 중 현재 유일한 생존자인 류승석(93)씨는 방어전투 중요성을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류씨는 본인이 고령이라 이제 기억이 흐릿해지고 몸도 예전과 같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가 전하는 전쟁의 참상은 생생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고 얼마 뒤 류씨는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다. 마산 월영동에서 단 일주일간 훈련을 받은 뒤 진주, 남원, 순천, 하동의 전투를 거쳐 8월 다시 마산으로 돌아온다. 그가 방어전투 투입되기로 결정된 뒤 받은 주된 임무는 북한군 정보수집이었다. 전투 당시 미군과 국군 정보가 일치하지 않아 혼선을 겪었기에 군은 학도병들을 북한군 진지에 투입해 적의 전력, 위치 등을 파악하기로 했다. “특무대 간부가 북한군 진지에 투입되기 전 학도병들에게 ‘너희들은 산 생명이 아니다’고 말하며 목숨을 걸고 적 정보를 파악하라고 하더군요. 너무 어린 나이라 죽음이 무섭지도 않고 단지 전쟁이 났으니 적과 싸워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투입된 부대원 30명 중 류씨를 포함한 15명은 진동, 나머지 15명은 함안으로 향했다. 그들은 인민군처럼 보이기 위해 인민군복을 입고 공산당 문양이 박힌 모자를 쓴 채 적진으로 들어갔다. 임무 기간은 일주일이었지만, 아군이 없는 적진에서 임무 수행은 어렵다고 판단해 5일 만에 복귀를 결정했다. 진동에 투입된 15명의 학도병 중 살아 돌아온 이는 5명뿐이었다. “저희는 북한군으로 위장했기에 복귀하기로 한 날에 맞춰 아군 진지로 와야 미군 공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틀 일찍 복귀했기에 하마터면 미군이 학도병들을 북한군으로 착각하고 총을 쐈을 수도 있죠.” 류씨는 목숨을 걸고 전투에 참여했지만, 대한민국에서 그의 학도병 활동에 대한 공식 기록은 없다. 참전유공자로 인정받은 것도 그가 학도병을 나온 후 곧장 공군으로 입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학도병들이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국군 해병대와 미 25사단이 공격에 들어갔습니다. 승전으로 해병대는 특진하는 등 공을 인정받았지만, 저희는 학도병이었기에 아무것도 없고 제대로 된 기록조차 없습니다.” 노병의 마지막 소원은 마산방어전투를 기억하고 미래 세대들이 안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전쟁기념관이 건립되는 것이다. 류씨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학생과 시민들을 찾아다니며 안보 교육에 나서고 있다. “한국전쟁 중 타 전투들은 전쟁기념관이 있어 매년 그곳에서 관련 행사들이 열리고 지역 학생들이 안보 교육을 받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구한 마산방어전투는 기념관도 없이 잊히고 있죠. 죽기 전 기념관이 건립돼 방어전투가 계속 국민들에게 기억됐으면 합니다.” 경남신문=박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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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27 14:59

[지난 주 '핫클릭' : 19~24일]1조 규모 새만금 도로사업, 지역업계 훈풍 불까

△2월 19일~24일 2월 넷째 주 전북일보 홈페이지를 찾은 방문자들이 가장 많이 본 기사는 천경석 기자의 '1조 원 규모 새만금 지역 간 연결도로 건설사업, 올 하반기 추진'이다. 새만금의 중심거점이자 도시 서비스 중심지역인 2권역(수변도시)·3권역(관광레저 지역)과 주변의 국도를 연결하는 20.7km(6차로)의 도로 건설사업을 소개했다. 이 사업은 ‘새만금사업 지역기업 우대기준’이 적용, 침체된 전북지역 건설 산업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와 관련 새만금개발청은 3~4월 중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7~8월에 공사를 발주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두 번째 많이 읽힌 기사는 김태경 기자의 '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 본격 철거…마이스산업 집적단지 조성 신호탄'이다. 이 기사는 본격화된 야구장 시설물 해체작업 현장을 다뤘다. 야구장 철거 공사는 오는 3월 28일까지 진행할 예정이다. 세 번째는 정윤성 화백의 만평 '윤석열 정부 아나바다 대책'으로 '아껴쓰고… 나눠주고… 바꾸거나… 다 전 정부 탓' 급소를 찌르는 풍자가 돋보였다. 이밖에 문정곤 기자의 '고군산군도 케이블카 무산?‘, 박현우 기자의 '소프라이즈! 반값 한우에 하나로마트 오픈런' 등이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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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25 14:00

[조법종 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②전라도를 처음 찾은 포크, 금강에서 좌초된 미군함을 도운 익산 용안현감과 만나다.

△포크, 최초로 대동여지도 들고 전라도를 찾다 조선주재 미국 최초 무관으로 복무를 시작한 포크는 외교관이자 일종의 공식적인 정보원으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 즉, 포크는 부임후 3개월이 채 안된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구체 정보를 직접 조사했다. 먼저 9월 22일부터 10월 7일까지 16일동안 서울 북서부, 경기 개성지역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2차로 1884년11월 1일부터 12월 14일까지 44일동안 경기, 충청, 전라, 경상지역을 돌고 문경새재를 넘어 충주를 거쳐 서울로 복귀하는 조사를 진행했다. 포크는 이때 미 국무부에서 요구한 조선에 대한 군사적 정보와 지역현황을 포함한 모든 방면의 정보를 조사하고 기록했다. 그리고 포크는 조선정부가 제공한 '대동여지도'로 전체 일정을 짜고 이동수단으로는 당시 양반의 지방여행 시 활용한 가마를 타고 여행을 했다. 흥미로운 것은 포크는 자신이 휴대한 조선의 지도에 대해 정밀함에 감탄하면서, 하루에 80∼90리를 가기로 약속한 가마꾼들과 시비가 생길 때마다 대동여지도를 놓고 거리를 따지는 상황이 연출됐다. 종래 대동여지도의 사용에 대한 이야기는 이보다 10년 후인 1894년 청일전쟁과 이후 1905년 러일전쟁, 그리고 이어진 일본의 한국 토지측량에 '대동여지도'를 사용했다고 전했는 데 이번 기록을 통해 1884년에 미국인 포크에 의해 가장 먼저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포크는 직접 현장 사용을 통해 '대동여지도'의 정확성을 확인한 최초의 서양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포크는 나침반, 회중시계, 기압계, 온도계를 휴대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온도, 기압 측정자료를 남겨놓았다. 특히, 미국이 관심 있었던 금광 등 지질광물 자원관련 정보도 기록하고 있다. 포크는 이와함께 각 지역의 공간 정황과 산성 등 군사적 방어거점 및 읍성 등의 지리적 특성을 기록하면서 순간 순간 스케치 형식으로 그림을 남겨 지형과 공간 특성을 기록했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미국 CIA가 가장 대표적인 휴민트의 전형으로서 그를 소개할 정도로 뛰어난 정보원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전라도에서 좌초된 미 군함을 도운 용안현감을 찾다. 포크의 조선 남부지방 여행목적 가운데 가장 먼저 해야할 임무는 금강에 진입했다 좌초됐던 미군함 앨럿호(USS Alert:경계호)를 도와준 관리를 찾는 일이었다. 흥미롭게도 이 사건은 현재 한국, 미국 기록에서 확인할 수 없는 유일한 기록으로 미 군함을 이용해 금강에서 증기선 운항 여부를 확인하려던 것으로 보인다. 포크는 앞서 공주에서 충청감사가 이 사실을 모르는 것에 충격받아 조선의 지방 행정체계에 실망했었다. 그런데 전라도 용안지역에 진입하며 용안현감이 미군함을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미국측의 공식 감사를 전했다. 앨럿 호(USS Alert)는 미국 해군의 1,020톤, 전장 60.88m 전폭:9.8m의 철제 포함(gunboat) 증기선으로 포크가 1876년 아시아 분함대에 배속되어 처음 승선했던 배였다. 당시 포크의 주요 임무 가운데 금강, 영산강, 낙동강의 수심조사가 있었는데 이는 조선의 세금 운반을 위한 증기선 운항 가능성 확인이었다. 이는 미국이 조선에 증기선을 판매하기 위한 사전 조사작업이었고 이를 위해 조창이 있는 전라도 용안에 대한 조사가 필요했다. 특히, 미국 군함이 이를 파악하기 위해 직접 금강으로 진입했다는 사실이 이번 자료로 확인되어 당시 조선의 조세운반 화륜선 구매경쟁에 미국이 적극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앞서 미국이 보빙사 귀국선으로 최신의 트랜튼호(USS Trenton)를 제공한 점과 나주를 꼭 가야되는 이유로 영산강 수심과 증기선 운항 가능여부 확인이었다는 점과도 연결된다. △용안 현감부인의 ‘매우 훌륭한 전라도 음식’ 에 반한 포크 포크가 찾은 용안현감 김노완은 개화파 인물로 1880년 2차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을 방문해 군사훈련을 받고 돌아온 군인이었다. 1881년 신식군대인 별기군 창설에 관여했다가 1882년 임오군란때 총에 맞아 죽을 뻔한 존재였다. 이후 1882년에는 지평현감을 거쳐 1884년 1월 용안현감으로 부임했다. 1885년 6월 '전라감사계록'에 나타난 평가에 의하면 그는 매우 성실하게 현감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평가됐다. 또한 백성들은 그를 위한 선정패를 세우고 있음을 포크가 기록했다. 김노완은 1884년 갑신정변(12월 4일∼6일)의 와중에서 피해를 보지 않고 계속 관직을 유지했는데 그와 관련된 마지막 자료는 1899년 법부품보에 ‘을미사변 복수를 도모한 용의자’로 나타나 민비(사후 명성황후 추증)살해에 대한 복수 활동에도 참여한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포크는 타 지역에서 경험하지 못한 격조있는 손님접대와 전라도 음식을 용안에서 맛보았다. 포크는 2일간 머무는 동안 현감 아내의 세심한 배려를 통해 품격있는 전라도 음식과 손님접대를 받았다. 즉, 숙소에 꽃 화병을 놓고 수시로 감,배 등 과일을 제공하고 술잔에는 국화꽃을 띠우는 등 다른 곳에서는 접할 수 없는 품격있는 대접을 받았다. 포크는 이때 받은 식사대접의 내용을 그림과 자세한 음식설명과 함께 ‘매우 훌륭한 성찬’이라고 표현했다. 포크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라감영에서도 비슷한 방법으로 정리했는데 전주에서 ‘포크 밥상‘을 개발한 것처럼 ‘용안현감 김씨부인 밥상’을 익산에서도 개발하면 좋을 것 같다. [차림내용] 밥,소고기무국,소고기 구운 것,삶은 계란,간 천엽, 육회 , 생선 젓갈, 튀김(전?),무채와 나물, 작은 그릇의 소고기국, 김치, 식초, 차가운 국수, 구운 통닭, 조개 젓, 생굴, 배, 김치, 감, 화로 위의 뜨거운 요리(호두, 소고기, 콩, 버섯, 그리고 적어도 4가지의 다른 야채와 허브가 모두 섞였다-신선로)/ 술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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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2.20 15:29

뉴스와 인물- 임만규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장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이 출범한 1995년부터 20년 가까이 근무했던 ‘뼛속까지 상용맨’이 지난 연말 전주공장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상용차가 멈추는 순간 물류, 돈 흐름이 멈춘다. 그 사명감으로 일한다”는 뼛속까지 상용맨의 주인공은 임만규 전 현대차 울산5공장장으로, 그는 일찌감치 자동차산업에서 연료전지 트렌드가 대세를 이룰 것이라고 판단, 대학원에서 연료전지 석사 학위를 취득하는 등 치밀한 준비 끝에 울산 5공장에서 연료전지차 넥쏘 생산을 지휘한 인물이다. 임 공장장은 연료전지 자동차를 준비하는 자만이 황금 같은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천, 세계적 친환경 수소상용차 심장 전주공장 지휘봉을 잡았다. 지난 연말 부임한 제13대 임만규 공장장(56)을 지난 13일 전주공장 집무실에서 만났다. -1995년부터 2013년까지 20년 가까이 전주공장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으십니다. 공장장 부임 소감을 말씀해 주시죠. “1995년 전주공장이 전북지역에 처음 뿌리를 내린 이래 13번째로 제가 중임을 맡았는데, 전주공장 성장과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는 전주공장 초창기부터 생산 부문과 지원 부문 업무를 두루 섭렵했고, 현장 구석구석까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전 부문에 걸쳐 많은 직원들과 두루 인맥을 쌓아왔기 때문에 한발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영철학은 ‘우문현답’ 네 글자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저는 현장 직원들과 기회 있을 때마다 대화와 소통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상호 관계를 돈독히 다지고, 이를 통해 중대형 상용차 생산 공장만의 문화를 만들고, 가장 전주공장답게 성장 발전시켜 나가겠습니다.“ -지금 산업계에서 연료전지는 핵심 분야입니다. 과거 전주에서 연료전지 석사학위를 취득했는데, 당시 어떤 동기, 계획이었는지요? “현대자동차는 1998년 세계 자동차기업들 중 가장 발빠르게 수소연료전지차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2000년엔 미국 캘리포니아 연료전지 시범사업에 참여하면서 싼타페 모델 연료전지차를 처음으로 선보였습니다. 2004년엔 미국 국책사업인 연료전지 시범운행 시행사로 선정되며 미국 전역에서 수소연료전지차 32대를 시범운영해 차세대 친환경 자동차 개발경쟁에서 한 발 앞서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후 2007년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미쉐린 챌린지 비벤덤’에서 환경평가 전 부문 최고등급을 획득했으며, 2008년엔 미국 대륙 동서 횡단, 같은 해 12월 한번 충전으로 633km 완주, 2009년 미국 '수소연료전지 로드투어 2009'에서 2655km 완주 등을 통해 기술력을 입증했습니다. 제가 대학원에서 연료전지 부문 석사 학위를 취득한 건 이 무렵입니다. 지난 100년 동안 자동차시장을 지배해 온 건 내연기관차였지만, 앞으로의 자동차산업을 지배할 건 수소연료전지차 같은 친환경 자동차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자동차 기업에 몸담은 한 사람으로서 시대적 트랜드를 앞서나가야 한다고 판단했고, 그러려면 머지않은 미래에 전 세계 자동차산업의 핵심 아젠다로 대두될 연료전지 분야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제 예상은 적중했고, 덕분에 울산 5공장에서 연료전지차 넥쏘를 생산하였으며, 이제는 세계 최초로 수소버스와 수소트럭 양산시스템을 구축한데 힘입어 최근 전 세계 친환경 상용차업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전주공장에서 근무할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친환경 자동차 트랜드를 선도해 나가는데 제 모든 역량과 열정을 쏟아 부을 계획입니다” -현대차는 수소연료전지를 동력으로 하는 상용차를 세계 최초로 양산하고, 수출까지 하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의 경쟁력, 향후 발전 방향을 말씀해 주시죠. “세계 수소시장은 2050년 약 3500조원, 세계 에너지 소비의 18%를 차지할 걸로 예상됩니다. 따라서 미래의 블루오션 수소경제 주도권을 누가 차지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현대자동차는 2013년 세계 최초로 수소차 투싼을 양산한데 이어 수소트럭과 수소버스 부문에서도 세계 첫 양산을 기록하는 등 경쟁사들보다 한 발 앞서 있습니다. 이 선두주자로서 유리한 고지에서 경쟁을 이끌어 나간다는 전략입니다. 정부도 수소차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오는 2030년까지 수소상용차 3만대를 보급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고, 수소상용차에 대한 보조금도 시내버스의 경우 지난해 1억5000만 원에서 올해 2억1000만 원으로, 고속버스는 2억원에서 2억6000만 원으로 대폭 늘리기로 했습니다. 수소상용차 보급대수도 지난해 버스 340대, 수소청소차 10대 수준에서 올해는 버스 700대, 수소트럭 및 청소차 220대로 대폭 늘릴 계획입니다. 저희가 친환경 상용차 부문에서 일약 ‘퍼스트 무버’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고, 전주공장 중대형 상용차가 글로벌 선두주자로 도약할 수 있다고 확신 합니다” -전주공장에서 생산 개시된 스타리아가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지난해 10월부터 양산, 3개월간 600여대 정도 생산했습니다. 올해는 정상 속도에 돌입, 연간 8000대 가량 생산할 예정입니다. 스타리아 생산은 전주공장의 외형적 매출 신장 효과, 나아가 전주공장 출범 이래 처음으로 ‘다른 차종을 들여와 양산 체제에 들어갔다’는 점 등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노사 간 협력을 통해 생산물량을 공장 간에 서로 주고 받음으로써 ‘모두 같이 윈윈’할 수 있는 유연한 생산시스템을 구축했고, 좀 더 다양한 차종 생산을 소화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점에서 향후 괄목할 만한 변화와 도약을 기대합니다” -기업 경영에서 중요한 우수 인재 확보와 건강한 노사관계에 대한 소견을 말씀해 주시죠. “저희 전주공장은 소통 능력이 뛰어나고 직무 전문성을 갖춘 플랜트 필요역량 보유 우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북 지역거점 대학 출신 우수인재들을 발굴하기 위해 많은 관심과 노력을 쏟고 있으며, 인터넷 가상공간을 활용한 메타버스 채용설명회 등 인재들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노사가 의견이 다르면 대립각을 세우고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는 일이 부지기수였습니다만, 글로벌 Top3에 도달한 현 상황에서는 경쟁사, 고객 등 전 세계 모든 시선이 저희 현대차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내연기관의 축소, 전동화 등 자동차 산업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어 저희 현대차 노사관계 역시도 변화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적 흐름에 직면했습니다. 향후 노사관계는 원칙을 지키며,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원칙을 무시하고 임시방편적 문제해결을 한다면 저희 전주공장은 서서히 경쟁력을 잃고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이는 결국 큰 피해로 이어질 것입니다. 제 스스로가 진솔한 소통과 대화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생각입니다." -취임 후 지난 1월 18일 안전경영 선포식을 개최했습니다. 안전은 일상생활에서도 중요한데, 사업장에서 더욱 강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올해 안전경영 선포식 슬로건 중 하나가 ‘안전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필수조건’이라는 겁니다. 저희 현대자동차는 최고경영자로부터 ‘안전 최우선으로 최고의 품질우수 공장 실현’을 생산공장 운영방침으로 표명하고 산업사고를 예방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안전분야에 대규모 투자를 확대하여 저희 전주공장에서만 작년에 약 89억원을 집행하였으며, 올해는 약 76억원의 투자를 진행할 것입니다. " -현대차 전주공장은 지역사회공헌 활동을 적극 펼치고 있습니다. 올해 어떤 계획들을 진행하는지요. “올해 사회공헌사업 방향은 크게 3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ESG 경영 실천입니다. 전주공장 임직원들이 참여하는 헌혈 활동 캠페인을 통해 소아암 환자를 돕고, 잔반 줄이기 활동 후 매칭 펀드 형태로 결식아동 돕기 기부금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두 번째는 버려지는 플라스틱을 솜으로 만들어 아이들 인형을 만들어 나눠주는 활동, 플로깅 활동, 크리스마스 버스 운영 등입니다. 세 번째는 전북지역 교통약자들을 위한 이동 편의 제공으로, 올해는 상반기 중 저희 전주공장에서 세계 최초로 양산에 들어가는 고속버스급 수소전기버스를 활용해 도내 각급 기관들과 함께하는 다채로운 사회공헌활동을 지원할 방침입니다." △임만규 공장장은 임만규 공장장은 청주기계공고와 금오공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후 1990년 공채로 현대차에 입사했는데, 1995년부터 2013년까지 전주공장에서 근무했다. 전주공장 근무 시기인 2008년 전주대학교 대학원에서 ‘연료전지’ 석사 학위를 받은 연구 노력파다. 덕분에 그는 울산5공장에서 수소연료전지차 넥쏘 생산을 지휘했고, 이어 세계적 수소연료전지 상용차 생산기지로 부상한 전주공장을 책임지는 임무까지 맡았다. 전주공장의 특징과 운영현황 전반을 잘 꿰뚫고 있고, 울산에서 생산실장과 공장장 임무를 수행하며 공장 운영 능력은 물론 직원들과의 소통능력도 쌓았다. 전주공장을 수소버스와 수소트럭 등 친환경 상용차 생산부문 글로벌 리더로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게 임 공장장의 포부다. 완주=김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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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재호
  • 2023.02.19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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