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2023-06-01 00:28 (Thu)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기획

[정전 70주년]인천상륙작전의 빛과 그림자 (하)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 초반 전세를 순식간에 뒤집었으나, 인천 지역은 피해가 막심했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전세를 뒤집기 위해 육·해·공의 병력과 화력을 총동원하면서 상륙지 월미도는 쑥대밭이 됐고, 인천 시내가 파괴됐다.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세계 전쟁사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꼽히는 군사 작전의 이면은 지역 차원에서만 간간이 다뤄질 뿐이다. 전갑생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Archive Ⅱ)에서 발굴한 <사진 1>을 살펴보자. 인천상륙작전 당일인 1950년 9월15일 인천 월미도 동쪽 마을의 한 민가가 폭격을 맞아 불타고 있고, 소총을 든 유엔군 병사들은 수색 활동을 하는 듯한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사진 1>의 행간을 조금 더 읽어보자. 활활 타오르는 민가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며칠 전 월미도 일대 공습에서 대대적으로 퍼부은 화염 무기 '네이팜(Napalm)탄'의 위력을 보여준다. 집에 난 불을 꺼야 할 집주인이 사진 속에서 보이지 않는 건 폭격으로 인한 희생 또는 피난으로 섬에 살던 주민들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문이 남는다. 정말로 전쟁 상황에서 피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을까.  ■단테가 그린 지옥, 월미도 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 지역 피해에 대해선 정부의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8년 '진실'로 규명한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 보고서와 미국, 프랑스 기자들이 쓴 한국전쟁 논픽션들을 종합했다. 상륙작전 닷새 전인 1950년 9월10일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미 해병대항공단 항공기들이 월미도 동쪽 지역에 세 차례에 걸쳐 95개(tank)의 네이팜탄을 투하하고, 육지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유엔군은 9월13~14일 월미도와 인천항 등 시내 일대 함포사격과 공습을 감행하며 다음날 상륙을 개시한다. 월미도 동쪽엔 120가구 약 600명이 사는 마을이 있었다. 당시 월미도에 주둔한 북한군 추정 병력은 미군 기록상 1천명이었다. 한국군 참전자 회고록엔 4문의 고사포와 400여명의 병력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됐다. 월미도 주민 전모(당시 17세) 씨는 네이팜탄이 투하된 날 "폭탄이 떨어지자마자 불이 확 붙어 온 동네가 불바다가 됐다"고 증언했다. 주민 유모 씨(당시 27세)는 같은 날 새벽 집에서 잠자다 속옷 바람으로 뛰쳐나와 갯벌로 도망쳤다. 갯벌로 대피한 주민들은 미 항공기의 기총소사를 피하려고 서로에게 진흙을 발라줬다고 한다. 공습이 잠시 멈췄을 때 돌아온 마을은 화염에 휩싸이고 있었다. 유 씨의 시아버지는 머리에 파편 2개가 박힌 채 희생됐다. 집집이 희생자의 시체를 가매장했다. 폭격이 다시 시작되자 생존자들은 불타버린 집과 희생자들을 다 수습하지도 못한 채 월미도를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월미도에서 민간인이 최소 100명 희생됐다고 결론을 내렸다. 인천상륙작전 현장에 있던 프랑스 종군기자 앙리 드 튀렌(Henri de Turenne)이 쓴 당시 르포기사가 '한국전쟁통신'(2012·눈빛)에 실려 있다. 그는 월미도의 모습을 "정녕 단테가 그린 지옥이었다"고 묘사했다. "항만 전체가 을씨년스런 자줏빛으로 환하게 불타올랐다. 바다와 하늘은 피처럼 검붉었다. 몇 시간 동안 끊임없이 쏘아 대는 함포들이 모든 함정을 뒤흔들었다. (중략) 코세어 전투기들은 우리 전방 200m 앞 해안까지 네이팜탄을 끊임없이 퍼부었다. 그 거대한 불기둥을 치솟게 하는 포격은 어둠 속에서 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들을 환하게 비춰 주었다." 인천 시내 폭격 피해도 컸다. 전갑생 연구원이 미군 자료 등을 발굴·분석해 쓴 '인천과 한국전쟁 이야기'(2020·글누림)를 보면 인천 시내 폭격은 9월7일부터 21일까지 이어져 시내 곳곳이 완전히 파괴됐다. 특히 유엔군 상륙 직전인 14일 오전 5시 55분부터 월미도와 인천 일대 59.8시간 동안 폭격 작전이 전개돼 폭탄, 네이팜탄, 기총소사가 78차례 진행됐다. 또 1000-1B 범용폭탄 100개가 투하되고 115개의 로켓 공격이 이뤄졌다. 이어 15일 오후 5시 5분 로켓함 3척이 20분 동안 6천여 발의 로켓을 인천으로 발사했다. 이 기간 인천 지역 인명 피해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전갑생 연구원이 NARA에서 발굴한 1950년 9월15일에 촬영된 <사진 2> 속 건물들이 불타고 무너진 인천 시내 모습이 당시 피해 상황을 가늠하게 한다. 앞서 소개한 '한국전쟁통신'의 9월16일 르포기사를 다시 인용해본다. "섬과 내륙을 잇는 인천은 여전히 연기가 치솟는 죽음의 도시였다. 담배공장은 엄청난 화염에 휩싸여 타오르고, 그 화염 기둥은 30m 높이로 치솟아 지독한 악취를 퍼트렸다. 한 청년이 끔찍한 부상을 입은 할아버지를 손수레에 싣고서 황량한 대로를 걸어 내려왔다."  ■민간인 희생은 예상됐다 인천상륙작전 직전 월미도와 인천 일대 폭격은 초토화 목적의 '전략폭격'이었다. 여러 정황상 유엔군은 월미도 일대 민간인 거주지와 인천 시내 민간시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인천항은 1945년 해방 직후부터 1949년 철수하기 전까지 미군의 군수 보급 통로이었고, 부평에 군수보급기지(Army Service Command 24th Corps·현 캠프마켓)가 있었다. 당시 시가지 지도와 정밀한 항공사진도 확보하고 있었다. 월미도에도 한국전쟁 전까지 미군기지가 있었다. 폭격 피해를 본 월미도 주민들은 1기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서 "동네는 완전히 무너졌지만, (전쟁 전부터 있던) 미군 부대 막사는 폭격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인천상륙작전은 북한군에게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유엔군과 한국군이 전세를 일거에 역전해 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총공세였다.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 총사령관이 병사들에게 "늦어도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 이유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얼마나 화력을 쏟아부었는지 낙동강 전선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쓴 한국전쟁 논픽션 '콜디스트 윈터'(2009·살림)를 보면, 낙동강 전선을 지킨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미8군 사령관은 "월미도와 인천에 있는 애송이들을 상대하느라 우리보다 더 많은 탄환을 썼다. 우리는 적의 지상 병력 90%를 감당하면서도 그만한 지원을 못 받았다"고 했다. 인천 앞바다는 조수 간만의 차이가 심한 갯벌 지대로 상륙작전을 감행하기엔 악조건이 많았다. 월미도와 인천 시내 일대 대규모 전략폭격은 상륙작전의 '불확실성'을 모조리 제거하기 위한 '절멸 작전'이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악마의 무기라 불리는 네이팜탄 투하가 연결된다. 네이팜탄은 알루미늄, 비누, 팜유, 휘발유 등을 섞어 젤리 모양으로 만든 네이팜을 연료로 하는 무기다. 3천℃의 고열을 내면서 반지름 3m 이내를 불바다로 만든다. 전쟁역사가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는 '폭격의 역사'(2015·어문학사)에서 "도시 소이탄(네이팜탄) 공격의 주된 목적 중 하나는 전시 생산을 지탱하는 노동력 그 자체의 직접적인 파괴"라며 "공업 노동력, 즉 생산과 관련된 민간인의 붕괴에는 노동자뿐 아니라 그 가족과 이웃을 불태워 버리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고 했다. 전갑생 연구원은 "유엔군은 인민군 치하에 있던 인천 지역의 모든 주민을 사실상 적으로 간주했고 민간의 피해를 '부수적 희생'으로 봤다"며 "민간인은 전쟁 중 공격의 대상이 돼선 안 되는 헤이그협약 등 국제규범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인일보/박경호기자

  • 기획
  • 기타
  • 2023.04.24 15:24

[뉴스와 인물] 한종관 전북신보 이사장 "기업이 잘 돼야 지역경제도 살아난다"

지난 2월 말 전북신용보증재단(이하 전북신보) 신임 이사장에 이론과 실무를 두루 갖춘 금융 전문가인 한종관(63) 이사장이 취임했다. 코로나19의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미국-중국의 패권 싸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고물가·고금리 등으로 인한 경기침체가 발생하면서 소기업·소상공인의 고충이 커지는 실정이다. 전북신보의 역할이 막중하기 때문에 한 이사장이 뚝심과 강한 추진력으로 전북지역 (중)소기업·소상공인에 디딤돌 역할이 돼야 하는 시기다. 한 이사장도 전북신보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라는 것을 알고 취임 후 발 빠르게 각 부서, 지점 등에 업무 보고를 받고 업무 파악에 나섰다. 직원들에 전북신보의 역할을 강조하고 직원 개개인에게 세밀한 피드백을 주는 등 조직의 정체성과 업무 인프라를 재정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취임한 지 2개월이 지난 한 이사장을 만나 전북신보의 역할, 전북지역 경제의 실정, 전북신보 추진 사업 등에 대해 들어봤다. - 늦었지만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전북신용보증재단의 가족으로 고향의 중소기업·소상공인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돼 영광입니다. 지난 39년 동안 줄곧 중소기업·소상공인과 관련된 기관에서 일해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 중소기업·소상공인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귀향했으니 그간의 경험을 총동원해서 전북지역 경제 발전을 위해 온몸을 던지겠습니다." - 고향이 진안이고 학창 시절도 전북에서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나고 자란 곳에서 일하게 되셔서 기분이 남다를 것 같은데요. "대학 시절 전북애향장학재단의 장학금으로 학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취업 때문에 서울에서 40여 년을 살았지만 단 한 번도 고향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늦게나마 고향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됐다는 기쁨과 함께 한편으로는 무거운 책임감도 느끼고 있습니다. 학창시절 고향으로부터 받은 큰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뛸 각오로 임하려고 합니다." - 전북신보가 지난해 창립 20주년을 맞이했는데요. 지난 20여 년을 돌아본다면요. "전북신보가 설립된 지 20년이 지났다는 것은 어엿한 성년이 됐다는 의미와도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업무 인프라도 재정비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상황에 놓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보증 업체 수 5만 5000개, 보증 잔액 1조 5000억 원으로 전북지역 경제를 지탱하는 핵심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업무 영역과 인프라가 미흡해 도민의 요구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 그렇다면 이사장님이 생각하시는 전북신보의 가장 큰 과제는 무엇인가요. "전북도에 14개 시·군이 있지만 전북신보의 영업점은 8개, 직원을 83명에 불과합니다. 원격지 기업까지 실효성 있게 지원하기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루빨리 조직, 업무 인프라를 짜임새 있게 갖춰서 실질적인 지원이 이뤄지도록 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예산 부족만 탓할 수는 없어요. 전북신보가 도민의 눈높이에 맞춰 현장감 있게 기업의 성장 발전, 일자리 창출, 지역경제 발전, 삶의 질 등 전북지역 경제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 올해 전북신보가 중점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이 있다면요. "신용보증을 지난해보다 많은 6000억 원 이상으로 확대 공급하려고 합니다. 14개 시·군과 은행 간 매칭 출연을 통해 원격지 기업까지 자금이 원활하게 지원되도록 추진할 것입니다. 성실 실패자의 경제활동 재개를 돕기 위한 다시 서기 프로그램도 적극 추진하고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했지만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분들에게는 채무 감면, 재도전 보증을 지원해 재기할 수 있도록 도울 생각입니다." - 전북신보의 경영 컨설팅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어떤 조치도 없이 금융(보증)만 지원하는 것은 자칫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수 있습니다. 최근 2년 동안 전북신보의 경영 컨설팅을 받은 기업의 2년 생존률은 87.1%인데 일반 창업기업은 55.9%로 집계됐습니다. 전북신보가 금융(보증)과 비금융(컨설팅)을 동시에 지원하는 융합형 종합지원기관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해 주는 통계입니다. 이에 창업기업에 대한 경영 컨설팅 서비스도 크게 확대하려고 합니다. - 지역에서 전북신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기업이 힘들 때 든든한 버팀목이 돼야 합니다. 기업은 보통 성장 단계에서 몇 차례 죽음의 계곡에 직면하게 됩니다. 아이디어와 기술 사업화에 성공해도 자금이 부족해서 상용화에 실패하면 결국 도산하게 됩니다. 전북신보는 중소기업·소상공인 지원을 위해 설립된 비영리 공익기관인 만큼 기업에 소나기가 내리고 우박이 쏟아질 때 기업에 우산을 씌워 주는 구원투수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앞으로 전북신보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실 계획인가요. "이제는 새로운 미래 20년을 준비할 때입니다. 조직·체계적인 경영혁신을 추진하기 위해 현재 TF(태스크 포스)를 구성해 마스터 플랜 뉴 비전 2026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전북신보가 융합형 종합지원기관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고 고객의 보증 수요와 접근성을 고려해 영업조직을 크게 확충할 예정입니다. 기업의 성장 단계별 맞춤형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지역별 상인회, 시·군, 전북신보, 대학이 모두 참여하는 지역협의체를 구성해 지역 특화산업을 활성화하는 마중물 역할도 적극 수행해 나갈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최근 전북국제금융센터 건립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요. "전북국제금융센터의 성공적인 건립은 매우 중요합니다. 센터는 서울, 부산에 이어 전북을 제3의 금융중심지로 지정하기 위한 기본 인프라인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센터를 중심으로 금융 타운을 조성해 국민연금 투자운용사, 금융회사 지역본부, 한국투자공사, 농협은행 본점 등을 유치함으로써 제3의 금융 허브(중심지)로 키워 나간다면 전북지역 경제의 성장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끝으로 도민, 중·소상공인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그동안 전북이 많이 발전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합니다. 중소기업·소상공인은 전북지역 경제의 뿌리입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나무가 크게 자랄 수 있듯이 기업이 잘 돼야 전북지역 경제가 살고 일자리가 늘어날 것입니다. 온갖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새로운 미래에 도전하는 기업인이 애국자 중의 애국자라고 생각합니다. 사업 운영과 관련해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전북신보를 찾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항상 중·소상공인의 곁을 든든하게 지키는 버팀목이 되겠습니다." 한종관 전북신용보증재단 이사장은 진안 출신으로 전주신흥고, 전북대 경영학과,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과, 전북대 일반대학원 회계학과를 졸업했다. 신용보증기금 상임·전무이사, 한국경영혁신중소기업협회 경영혁신연구원장, 서울신용보증재단 이사장, 중앙대 경영경제대학 겸임 교수, 서울시립대 자유융합대학 초빙교수 등 지난 39년동안 금융 등과 관련된 일을 한 전국통 금융전문가다. 이밖에도 인사혁신처 주식백지신탁심사위원회·일자리위원회 민간 일자리 전문위원 등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2013년에는 금융산업 발전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산업포장, 2020년에는 대한민국 가장 신뢰받는 CEO 경영대상(리더십 경영 부문)을 받았다.

  • 기획
  • 박현우
  • 2023.04.23 16:14

[참여&공감 2023 시민기자가 뛴다] 버려진 '폐마스크', 재활용할 수는 없을까?

코로나바이러스로부터 시민을 지키던 마스크, 플라스틱 칸막이 등이 이른바 '코로나 트래쉬(Trash)'가 돼 오늘날 지구의 또 다른 위험이 됐다. 코로나 트래쉬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길거리, 산, 바다 곳곳으로 영역을 펼친다. 때로는 인간이 낳은 이기심에 동·식물까지 플라스틱 오염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에 지역사회에서 폐마스크를 어떻게 재활용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회용 마스크의 주성분은 플라스틱 중 가장 많이 재활용되는 소재인 폴리프로필렌(PP)이다. 이는 주로 젖병, 주방 용기, 의료용품 등에 사용된다. 탄소와 수소로만 결합해 다른 플라스틱과 달리 환경호르몬을 배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폴리프로필렌을 소각 및 매립을 하게 되면 심각한 환경오염이 발생한다. 마스크는 일반 생활폐기물로 분류돼 쓰레기종량제 봉투에 담겨 버려진다. 종량제 봉투에 담긴 마스크는 불에 태우거나 땅에 묻는 방식으로 처리되고 있다. 재작년 한국폐기물자원순환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지난 2020년 국내에서 사용된 마스크는 약 67억 개며, 이중 약 38억 개가 소각, 21억 개가 매립됐다고 한다. 코로나 시기에 버려진 폐마스크의 총수량을 환경부에 문의했지만, 마스크는 생활폐기물로 집계돼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우리의 필수품이었던 마스크가 땅에서 완전히 분해 되기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마스크 필터 부분인 폴리프로필렌은 분해되는데 450년이 걸리며, 귀걸이 부분인 폴리우레탄(PU)은 약 300년, 콧등 부분인 철심은 100년 이상 걸릴 것으로 추측된다. 소각 역시 환경오염에 치명적이다. 마스크를 태우면 폴리프로필렌에선 이산화탄소, 폴리우레탄에서는 질소화합물이 배출된다. 미국 환경보호청은 폴리프로필렌 1T를 소각할 시 3.07T의 온실가스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이는 다른 재활용 품목을 태울 때 배출되는 온실가스보다 높은 수치다. 페트(PET)의 경우 2.25T, 폴리염화비닐(PVC)은 1.38T, 종이는 0.04T의 온실가스를 만든다. 즉, 마스크는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페트병을 태울 때 보다 36%나 많은 온실가스를 내보낸다. 그렇다면 환경부와 각 시청은 왜 폐마스크를 재활용하지 않고 소각하거나 땅에 묻는 걸까? 환경부 생활폐기물 관계자는 "코로나바이러스가 묻은 폐마스크가 폐마스크 수거함에 섞여 있을 시 2차 감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폐마스크를 재활용하기까지는 재원으로서의 가치와 인건비도 함께 고려해야 해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일각에서는 폐마스크를 재활용하기 위해서는 마스크 부직포와 코를 고정하는 얇은 철사를 일일이 분리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공공기관과 기업은 마스크·필터 산업체와 함께 폐마스크를 재활용하고자 폐마스크 수거함을 설치하고 있다. 작년 10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 서울지부는 마스크·필터 산업체인 제이제이글로벌과 회사 건물 1층 로비에 수거함을 비치했다. 황인용 심평원 서울지원 과장은 "지역사회의 환경 보존에 도움이 되고자 수거함을 설치하게 됐다"며 "고용노동부를 비롯해 사옥 내 공공기관, 기업에 방문하는 시민들이 주로 많이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심평원을 비롯해 여러 기관과 협업하고 있는 제이제이글로벌은 수도권과 전주, 대구, 부산 등 14곳 지역에 총 50개의 수거함을 설치했다. 평균 한 달을 기준으로 수거함에는 약 14kg의 폐마스크가 쌓인다. 전필화 제이제이글로벌 이사는 "한 달마다 수거함을 비우고 있기에 폐마스크에 남은 바이러스로 2차 감염이 발생할 위험은 크지 않다"고 설명했다. 또, 수거함 안을 바이러스 항균 금속인 구리 재질의 부직포로 두르고 있다고 덧붙였다. 전 이사는 "지금까지 2차 감염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수거된 폐마스크는 자원 순환센터에서 재활용된다. 먼저 폐마스크의 콧등 부분인 철심을 거름망으로 분리한 후 폐마스크를 분쇄·파쇄한다. 이후 약 200~250℃의 고열로 폐마스크를 녹이면 작은 플라스틱 알갱이인 펠릿(Pallet)이 탄생한다. 펠릿은 의자, 화분, 병뚜껑까지 다양한 플라스틱 제품의 원료로 사용된다. 작년 5월, 제이제이글로벌은 우리은행과 협업해 펠릿 30%를 함유한 등받이 좌석 의자 1000개를 만들었다. 이는 작년 6월 12일, 한국사회복지관협회를 통해 전국 취약계층 1000가구에 전달됐다. 전 이사는 "현재 신세계백화점과 수거함 설치를 논의하고 있다"며 계속해서 수거함 비치를 확산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폐마스크 재활용이 전국적으로 확산하기까지엔 여러 어려움이 존재한다. 재작년 국민위원회가 발표한 하루 기준 2000만 개의 마스크가 버려진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수거함의 수량은 매우 적은 편이다. 또, 수거함 50개 중 40개가 수도권에 설치돼 있어 지방의 폐마스크 재활용 참여율은 더 낮을 것으로 예상된다. 폐마스크를 재활용했을 때 창출되는 수익도 현저히 낮다. 마스크 1kg(약 330장)를 재활용할 시 약 100원가량의 펠릿을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마스크 철심 분리 비용이 많이 들어 업체가 가져가는 수익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전 이사는 "폐마스크로 재탄생된 펠릿을 볼펜의 원료로 쓰는 등 제품 활성화가 된다면 폐마스크 재활용이 활발히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장진호 전북환경운동연합 팀장은 "자원 순환 문제는 우리의 생활과 가장 밀접하다"며 "정부 기관 및 지자체의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안유진 전 전북대신문 편집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기타
  • 2023.04.19 15:50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②문경·상주의 견훤 유적과 문화유산

봄비가 오락가락하는 4월 중순, 아침 일찍 설레는 가슴을 안고 문경으로 향했다. 경북 문경은 1100년 전 천하를 호령했던 풍운아 견훤(진훤)왕이 태어난 곳.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만큼이나 다양한 유적과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견훤왕은 이곳 문경과 상주 일대에서 15세 무렵까지 활동하다 신라군에 입대해 출세의 길을 걷게 된다. 일행은 9시30분 문경버스터미널에서 이도학 교수(한국전통문화대)를 만나 동행키로 했다. 이 교수는 문경 출신으로 우리나라 백제사의 최고 권위자다. 문경에서의 일정은 아채(아차)마을- 말바우(말바위)- 궁터마을- 가은역·아자개 장터 코스. 그리고 오후에는 상주에서 견훤산성- 견훤사당- 사벌국왕릉·병풍산성-상주박물관- 경천대를 답사키로 했다. △ 아채마을 금하굴과 숭위전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문경시 가은읍 갈전2리 아채마을. 견훤왕 출생지 전설이 서려 있는 이곳은 마치 뭇오리가 호수에 내려앉은 형상(群鴨投湖形)이나 금비녀가 땅에 떨어진 형상(金釵落地形)이라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너른 ‘속개들’ 옆으로 옥녀봉이 솟아 있고 연접한 산봉우리들이 출렁거리며 펼쳐진 모습이 범상치 않아 보인다. 마을 초입에 놓인 자그마한 다리를 건너면 오른편에 금하굴이 나타난다. 그 뒤편 언덕에는 숭위전(崇威殿)이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이 있다. 금하굴은 <삼국유사>에서 광주북촌(光州北村) 지렁이(蚯蚓)설화의 현장이다. “옛날에 부자 한 사람이 광주 북촌에 살았다.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매번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관계하고 갑니다’라고 하자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 두거라’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날이 밝아 실을 따라 북쪽 담 밑에 이르니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잉태하여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삼국유사> 후백제 견훤 조) 바위 사이로 보이는 금하굴은 꽤 깊어 보였다. 여기서 광주 북촌을 이 교수는 글자 형태가 비슷한 상주(尙州)의 오기(誤記)로 보고 있다. 금하굴 뒤편 언덕에는 2002년 세워진 견훤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사당 안에는 ‘후백제시왕(後百濟始王)’이라는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문경향교 주관으로 향사가 봉행되며 초헌관은 문경시장이, 종헌관은 견훤왕의 후손인 견씨종친회장이 맡는다고 한다. △ 용마 낚아챘다는 말바우 일행은 인근 청동기시대 유물인 4형제 바위와 순천김씨 고택을 둘러보고 농암면 연천리 개천가에 있는 말바우로 향했다. 말바우는 소년시절 견훤왕이 용마를 낚아챘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얘기는 이렇다. “이곳 큰 바위에 용마가 나타나자 견훤왕은 허수아비 뒤에 숨어있다 용마를 낚아챘다. 이 용마를 타고 용마가 화살보다 빠른지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말에 탄 견훤왕은 화살을 쏨과 동시에 말을 몰았다. 하지만 용마는 가은산에 도달했으나 화살이 보이지 않았다. 용마가 화살보다 늦었다고 생각한 견훤왕은 용마의 목을 베어버렸는데 그때야 날아온 화살이 땅에 떨어졌다. 견훤왕은 ‘아차’하고 슬퍼했다. 이때부터 용마가 나타난 바위를 용(말)바우, 목을 벤 가은산을 아차산, 마을을 아차마을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어 견훤왕이 궁궐을 짓고 군사를 훈련시켰다는 궁기1리 궁터마을을 둘러봤다. 그리고 가은역 부근의 아자개장터에서 골뱅이(다슬기) 국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가은역은 전국의 폐역사(廢驛舍) 중 유일하게 카페로 모습을 바꾼 곳이다. △ 문경·상주·원주에 산재하는 견훤산성 오후에는 상주로 이동해 견훤산성을 찾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봄비가 슬쩍 비치며 길을 막았다. 오랜 가뭄 끝에 오는 봄비는 축복이긴 하나 답사에는 훼방꾼이었다. 고심 끝에 올라가지 못하고 드론을 띄워 사진만 찍기로 했다. 우리나라에 견훤(산)성이라 불리는 곳이 서너 군데 있다. 견훤왕이 태어나거나 격전지였던 곳이다. 그중 문경의 견훤산성은 농암면과 가은읍 경계에 있는 356m의 성재산에 소재한다. 지금은 무너진 돌무더기가 산 정상 둘레에 군데군데 남아 있을 뿐이다. 이곳에는 견훤왕이 누이와 성쌓기 내기를 했다는 구전이 내려온다. 이웃 상주 견훤산성은 경상북도기념물 제53호로 지정돼 있다. 상주 시내에서 속리산국립공원 문장대로 가는 길목인 화북면 장암리 산봉우리(해발 545m)에 위치하는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둘레는 650m, 높이 7∼15m 협축식으로 치성 4개소에 바른층쌓기를 했다. 성 안에 건물지와 우물 1개소, 저수시설 2개소가 자리한다. 5세기말∼6세기초에 쌓은 견고한 성으로 인근 보은의 삼년산성과 비슷한 시기에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상주 견훤산성으로 가는 길은 깊은 산중이어서인지 꽤나 추웠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이미 져버린 벚꽃 군락이 만개해 눈을 즐겁게 했다. 또 상주시 화서면 하송리와 동관리에 위치한 성산산성도 견훤성으로 불리고 있다. 둘레가 3340m에 이르는 토석혼축성으로 견훤왕과 관련된 대궐터 지명이 전해진다. 그리고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포진리에도 견훤성터가 있다. 이곳은 견훤왕이 전주에 도읍을 정한 뒤 몸소 군대를 이끌고 진출한 곳이다. 궁예 휘하에 있던 왕건과 일전이 벌어져 크게 패했다. 견훤성에서 4km 떨어진 곳에는 왕건 군대가 주둔했다는 건등산(建登山)이 있다. △ 상주 견훤사당과 병풍산성 다음으로 찾은 곳은 상주시 화서면 하송1리 청계마을에 있는 견훤사당. 산벚꽃과 목련, 진달래가 꽃대궐을 이루는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 왼편으로 꺾어들면 호젓이 서 있는 견훤사당과 마주할 수 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57호로 지정된 견훤사당은 앞면 1칸, 옆면 2칸의 조촐한 건물로 앞에 판자로 짠 두 짝의 출입문이 있다. 실내는 마룻바닥이며 뒷면 중간에 설치된 선반에는 흐릿하게 ‘후백제대왕신위(後百濟大王神位)’라 쓴 위패가 모셔져 있다. 천장 상량문에 청나라 연호인 도광(道光) 23년이라 쓰여 있어 1843년에 지어진 건물임을 알수 있다. 이곳 주민들은 매년 정월 보름에 수호신인 견훤왕께 정성껏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난세의 영웅 사당 치고는 초라한데다 표지판 하나 없어 찾는데 애를 먹었다. 사당을 뒤로하고 일행은 사벌국왕릉에서 병풍산성을 바라보았다. 이 왕릉은 신라 54대 경명왕의 아들인 박언창의 묘소다. 이곳에서 병풍산성이 가까이 보이기 때문이다. 해발 365m의 병풍산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병풍산성은 둘레가 1864m로 수륙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정상에서 보면 낙동강 수계와 경작지, 산세가 한눈에 보여 적의 동태나 움직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견훤왕의 아버지 아자개가 웅거했던 곳이다. 끝으로 일행은 상주박물관에 들러 이 지역의 역사와 유물유적을 훑어보고 경천대로 향했다. 경천대는 낙동강 상류가 한눈에 들어오는 경관이 아주 빼어난 곳이다. 어두워지는 낙동강을 보며 견훤왕의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조상진 논설고문 견훤왕의 가계(家系)와 성씨 견훤왕의 출생과 가계(家系), 성씨는 어떻게 될까. 먼저 <삼국사기>를 보자.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이다. 본래 성은 이(李)였는데 후에 견(甄)을 성으로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는 농사지으며 자기 힘으로 살아가다가 이후 집안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처음에 견훤이 태어나 젖먹이로 포대기에 있을 때 부(父)가 들에서 농사를 짓자 모(母)가 남편에게 음식을 보내려고 아이를 수풀 밑에 두자 호랑이가 와서 그에게 젖을 먹여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듣고는 기이해하였다.”(<삼국사기> 권50, 견훤전) 견훤왕은 867년 상주 가은현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경북 문경시 가은읍이다. 이와 관련해 광주출신이라는 설이 있는데 광주는 출생지가 아니라 그의 초기 근거지라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의한다. 아버지인 아자개는 농사짓는 농민이었다. 여기서 <삼국사기>는 견훤왕의 성씨가 본래 이씨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믿어도 좋다’는 주장과 당시 견훤가는 성이 없었고 아버지 아자개가 장군이 된 후 붙인 것이라는 주장으로 나뉜다. 아자개는 신라 헌강왕 11년(885)∼진성여왕 원년(887)에 사불성(沙弗城·경북 상주)을 근거지로 군대를 일으켜 장군을 호칭하는 호족으로 성장했다. 아자개는 부인 2명과 5남 1녀를 두었다. 그중 첫째인 상원부인에게서 난 큰아들이 견훤이며 아자개는 둘째부인 자식들을 총애했다. 견훤왕도 여러 명의 부인과 10명 이상의 자식을 두었다. “견훤은 아내와 첩이 많아서 자식을 십여 명 두었는데, 넷째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으므로 견훤은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그에게 전하려 했다. 그의 형 신검·양검·용검 등이 그것을 알고 근심하였다.”(<삼국유사> 후백제 견훤 조) 그러면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甄萱)왕의 성씨에 대해 살펴보자. 이와 관련해 이도학 교수는 ‘견훤’이 아닌 ‘진훤’으로 읽어야 맞다고 주장한다. 견훤의 ‘견(甄)’에 대한 음가는 ‘견’과 ‘진’ 2가지가 있고 현재 교과서 등에서 ‘견훤’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동사강목> <증보문헌비고> <완산견씨세보> 등에도 모두 진훤으로 음가를 달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반박하는 학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조상진 논설고문

  • 기획
  • 조상진
  • 2023.04.18 17:53

류창수 전라북도 국제관계대사 "전북도 영업사원 역할에 최우선"

지난 1월 전라북도 국제관계대사로 주가봉대사를 지낸 류창수 대사(56)가 부임했다. 정읍에서 태어나 군산에서 유치원에 입학한 기억이 난다는 전북 사람. 그리고 본적은 익산이다. 전북과 인연도 인연이지만, 초등학교 전학만 5번. 공직에 있는 부친을 따라 전국을 돌아다녔다. 공직 입문 후 본인을 따라 그의 가족도 전국을, 그리고 해외를 돌아다녔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 그렇게 좋은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하지만, 그의 다양한 경험이 '전북'으로 볼 때는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부임 3개월. 전북의 브랜드를 알리는 '전북도 영업사원'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하는 류창수 대사를 만나 앞으로의 구상을 들어봤다. 전라북도 국제관계대사 부임 3달이 지났는데 소감이 어떠신지요? "26년간 외교관으로서 공직 생활을 하면서 제가 태어난 고향인 전북에서 국제관계대사로 봉사할 기회를 얻게 돼 영광스럽기도 하고 어깨가 무겁습니다. 최근 격변하고 복잡해지는 국제 정세 속에서 중앙 정부뿐 아니라 지방정부 차원에서의 외교와 국제협력 또한 매우 중요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 전북 역시 경제적 재도약과 혁신을 위해서는 활발한 외교와 국제협력이 필수적이어서 국제무대에서 쌓은 제 경험을 바탕으로 전북 발전에 최대한 기여할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현재 우리 전라북도의 국제협력을 진단하신다면? "현재 전라북도는 미국, 중국, 베트남, 일본 등 5개국 내 11개 지역과 우호 자매 결연을 맺어 협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습니다. 전북도는 김관영 도지사의 강력한 추진력과 리더십 아래 우호자매 결연 지역을 더욱 다변화하면서 교류활동의 내실화에 역량을 집중 하는 중입니다. 지난 2월 김관영 지사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상공회의소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인도네시아 서부 수마트라와는 우호교류 의향서를 체결함으로써 우리 전북 기업들이 이들 지역에 진출하는 데 필요한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내년에는 전북도가 특별자치도로 출범합니다. 이에 맞춘 방향성이 있다면? "내년 출범하는 전북특별자치도로서의 국제교류 협력 사업은 우리 기업들의 해외 진출 지원과 외국 기업 투자 유치 등 전북 경제의 도약과 혁신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에 초점을 맞춰 추진돼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다양한 전북형 문화 외교 사업과 해외 원조 사업 등도 병행 추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전북도의 국제교류가 외교부 등 유관 기관, 현지 대사관, 우리 민간 기업이 함께 유기적인 협업을 통해 ‘팀 코리아’를 이뤄 진행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또한 국제교류를 더욱 활성화하고 국제화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지난 2015년 설립된 전북국제교류센터와의 협력을 강화해 나가고자 합니다." 도내에는 5월 아태마스터스대회, 8월 세계잼버리 등 계획된 국제행사도 많습니다. "아태 마스터스대회와 세계 잼버리 등 국제 행사들은 코로나 이후 본격 개최되는 대면 국제 행사들로 전북의 브랜드와 이미지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지역 경제와 관광을 활성화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국제행사의 성공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전북 도민 모두가 자기 행사라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따뜻한 마음으로 참가자들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세계 각국의 모든 참가자들이 전북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귀국할 수 있도록 도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다양한 국제 행사 개최와 국제기구 진출 등이 우리 전북의 경제와 관광 활성화, 세계적 인지도를 향상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모든 도민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봉대사로 계시기도 했는데요. 전북도가 아프리카 지역과의 교류를 확대하려고 하는 모습인데요. "아프리카는 잠재력이 큰 대륙입니다. 아프리카 대륙은 54개 국가와 14억 명 인구를 가진 가장 큰 시장이며 30대 이하 인구가 6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젊은 대륙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전체 교역량에서 아프리카 대륙이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1.4%에 불과해 앞으로 우리가 새롭게 개척해야 할 미래 시장이기도 합니다. 가봉에서 재직했을 때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한국을 롤 모델로 삼고 우리 경제성장의 노하우와 경험을 전수하기를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지난 3월 29일 개최한 전북-아프리카 경제통상 협력 세미나는 매우 뜻깊은 행사였고, 아프리카 진출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현지 시장 정보와 네트워크 부족 등을 해소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습니다. 앞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할 수 있도록 관계기관 등과 함께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협력을 펼쳐 나갈 예정입니다." 전북의 강점으로 꼽히는 것이 한식, 한지 등 K-컬쳐인데요. 공공외교의 중요성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 외교는 정부 간 외교뿐 아니라 외국 국민과 직접 소통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이 지닌 매력을 널리 전파하고 국가 이미지를 개선하는 공공외교의 중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전북은 우리나라에서 한국적인 문화적 콘텐츠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지역이며, 지금 세계를 휩쓸고 있는 K-POP, K-Movie 등 한류의 본류에는 우리 ‘전북’이 있습니다. 전북은 K-컬처의 의식주, 즉, 한옥·한복·한식 등의 전통을 가장 잘 보존하고 발전시켜 왔으며, 제가 근무했던 아프리카 가봉대사관도 전북도가 지원한 재외공관 한스타일 연출 사업으로 우리 한국의 전통적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큰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최근 정부에서 국제 행사에 집중하는 모습입니다. 2030 세계박람회 유치에 전북도 또한 노력한다고 하던데요. "2030 부산엑스포는 기후위기·디지털 격차 등 다양한 문제를 논의하고, 미래 문명을 선도할 비전을 공유하는 장이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부산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 이탈리아 로마, 우크라이나 오데사 등이 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전북도 차원에서도 중요성을 인식하고 아태마스터즈와 잼버리와 관련해 유치 활동을 병행하고, 엑스포 유치위원회와도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있습니다. 전북의 유치 경험을 토대로 노하우 등 도움이 된다면 적극적으로 힘을 모아 뛰겠다는 것이 김관영 지사와 제 생각입니다. 오는 11일 최종 선정에서 좋은 결과가 있도록 전북도 또한 노력하겠습니다." 외국인들에 대한 인식과 관련해 도민들에게 당부의 말씀이 있다면. "전북에는 이미 유학생, 결혼 이민자 등 6만여 명의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외국 기업들의 전북 진출 증대와 코로나 이후 해외 관광객 증가, 우리 인구 고령화 추세 등에 따라 도내 외국인 수는 점차 증가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외국인 주민들이 그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서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우리 주민들과 잘 어울려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전북도의 국제화와 선진화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도 차원에서도 전북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행복하고 성장해 나가도록 정주여건 조성과 시민의식이 고취될 수 있도록 정책적 노력을 기울여 나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전라북도 국제대사’로서 각오는? "저는 글로벌 복합 위기 상황에서 우리 전북 기업의 해외 진출 기회를 발굴하고 대외 리스크를 감지하는 ‘전북도 영업사원’ 역할에 최우선 중점을 두겠습니다. 코로나19가 진정되면서 지난 1월 이후 도청 민원실에서 여권 발급 민원이 폭주해 내방객들이 장시간 대기해야 하는 상황을 파악하고 외교부와 협의해 도청뿐 아니라 전주시청에서도 여권 발급이 가능하도록 추가 지정을 받았습니다. 올해 하반기에는 전주시청에서도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도민들이 편익 증진을 직접 체감할 수 있도록 행정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데 기여 할 수 있어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지역경제를 부흥시켜 도민들의 삶의 질을 더욱 높이려는 전북이 글로벌 생명 경제 도시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해 힘을 보태겠습니다." 류창수 국제관계대사는 정읍 출신으로 제39회 행정고시로 공직에 입문했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를 취득했다. 1998년 외교통상부 입부 후 미국 1등 서기관, 이라크참사관, 주중국 참사관, 주센다이 부총영사, 주가봉대사를 역임했다. 통상 외교 전문가로 알려진 류 대사가 전북도에서 주목하는 부문은 '공공외교'다. 외국 국민과 직접 소통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전북의 매력을 전파하는 것. 그러한 차원에서 전북도와 지자체가 맺은 자매, 우호 도시와의 지속적인 소통과 교류 내실화도 강화하겠다는 각오도 밝혔다. 도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도 힘을 쏟을 계획이다. 그동안의 활동 경험을 행정에서 펼치는 것 이외에도 직접적인 소통과 활동에도 나가겠다는 구상이다. '전북도 영업사원'으로서 해외뿐 아니라 전북의 미래인 학생들에게도 본인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달하겠다는 계획이다. 류 대사는 "외교부에서 지자체 대사들에게 다양한 활동을 장려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라며 "전북에서만 100개 가까운 학교가 신청했다. 학생 수가 적고 규모가 작은 학교부터 먼저 찾아갈 생각이다"고 말했다. 류 대사는 "그동안 오랜 해외 공관 근무를 통해 얻은 노하우와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전북이 보전해 온 ‘콘텐츠’가 도 차원의 공공외교를 통해 외국인들의 시각과 눈높이에 맞춰 더욱 널리 알려지고 전파될 수 있도록 다듬어 나갈 계획이다"고 강조했다.

  • 기획
  • 천경석
  • 2023.04.16 17:11

[지난 주 '핫클릭' : 9~14일] '공무원 정년 연장' 2주 연속 '뜨거운 감자'

△9일~14일 '공무원 정년 연장' 화두는 지난 4월 첫째 주에 이어 2주 연속 '뜨거운 감자'였다. 연두빛 잎사귀들이 초록빛으로 향하고 있는 둘째 주, 전북일보 방문자들은 천경석 기자의 '공무원 정년 1년씩 늘어나나⋯최종 65세까지' 기사를 가장 많이 클릭했다. 이 기사는 문득,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개혁가인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떠오르게 한다. 두 번째로 즐겨 본 기사는 안봉호 선임기자의 '최근 10년간 3조 원 이상 가치의 금강호 물 바다로 방류'다. 이 기사는 가뭄으로 옥정호의 저수율이 바닥을 드러낸 가운데, 금강호 수자원을 활용하고 이를 통해 토사매몰 현상도 줄여 군산항의 경쟁력을 높여 나가야 한다는 목소리를 담았다. 이종호 기자의 '사업 추진 18년 만에⋯전주 감나무골 재개발 10월 착공'이 뒤를 이어 맹추격했다. 전주시가 최근 사업조합이 접수한 서신동 40-4번지 일대 11만8444㎥에 1914가구의 신규 아파트 건립계획을 승인한 내용을 다뤘다. 10월 착공, 오는 2026년 7월 준공할 예정이다. 이밖에 문민주 기자의 '전북 1조 2000억 LG화학 유치 임박⋯이차전지 기업 집적화 가속' , 이환규 기자의 '매일 밤 군산 앞바다에 미디어파사드 반짝’, 송은현 기자의 '동물 없는 전주동물원⋯벚꽃놀이 오는 사람이 더 많아' 등이 주목을 받았다.

  • 기획
  • 이용수
  • 2023.04.15 14:00

‘다이내믹 완주’⋯수소특화 국가산단 선정 등에 청년 몰려 온다

인구는 모든 지표의 결정판이다. 각각의 지표는 돌고 돌아 결국 인구로 수렴한다. 잘 사는 동네와 못 사는 마을의 지표도 인구 변화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사람이 떠나면 살기 힘든 고장이고 인구가 몰리면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해석하면 절대 틀리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완주군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라 할 법하다. 전국의 기초단체마다 인구가 줄어드는 ‘수축 사회’를 걱정하는 마당에 매달 인구가 350명 가까이 늘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완주군의 인구증가를 견인하는 세대가 바로 2030세대라는 점은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청년들이 몰리는 완주, 그곳엔 도대체 어떤 정책적 비결이 숨어 있을까? 민선 8기 완주군정에 확대경을 들이댔다. ‘마의 수축기’ 극복 완주군 인구는 지난 2018년부터 2021년까지 ‘마(魔)의 수축기’로 통한다. 2017년 말 9만 5970여 명으로 정점을 찍었던 주민등록상 인구가 인근 대도시 아파트단지 건설로 4년 동안 4500명 이상 빠져나가, ‘잃어버린 4년’이란 말까지 나왔다. 완주군이 ‘수축 사회’의 늪에서 벗어나 인구증가의 전환점, 이른바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를 만든 때는 민선 8기가 출범한 2022년 하반기부터다. 완주군 인구는 작년 7월 이후 증가세로 급반전, 9월(-56명)만 제외하고 내리 5개월 동안 적게는 48명(10월)에서 최고 646명(12월)까지 전월대비 인구가 급증했다. 올들어서는 매달 세 자리 수로 늘고 있다. 완주군의 올 3월말 현재 주민등록인구는 총 9만 4265명으로, 전월보다 727명이 불어났다. 민선 8기 출범 이후 지난 9개월 동안 3113명 급증하는 등 매월 350명 가까이 순유입 됐다. 주택과 직장, 가족 등의 문제로 완주를 떠났던 사람들이 되돌아오는 ‘U턴 현상’도 뚜렷해지고 있다. 삼봉지구와 행정복합타운의 아파트 입주가 도움이 됐지만 귀농귀촌 활성화와 인구 유입책 강화, 기업 유치, 일자리 창출에 대한 기대감이 맞물리며 2030세대와 중장년층 유입이 크게 늘어 전반적인 인구증가를 견인했다는 분석이다. 전입 규모 2000명 돌파 완주군은 인구증가에 3가지 특정이 있다고 분석했다. 우선, 눈여겨 볼 포인트는 전출보다 전입이 더 많은 ‘전입초과 현상’이다. 올 3월만 봐도 전입인구가 2256명을 기록한 반면 전출은 1473명으로, 780여 명의 사회적 증가를 시현했다. 출생보다 사망이 더 많은 자연적 감소(54명)을 고려해도 전체 인구는 720여 명 순증한 셈이다. 전입 규모는 작년 하반기 이후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는데, 최근에는 월중 2000명을 돌파했다. 주로 귀농귀촌 활성화와 정주여건 개선에 따른 효과로 풀이된다. 두 번째 특징은 이른바 ‘도외(道外) 전입’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올 3월 중에만 ‘타 시도 전입’은 374명으로, 다른 시도로 전출 간 인원(289명)보다 85명이 더 많았다. 주로 수도권과 충청권에서 완주로 주소지를 옮기는 ‘도외 전입’인 데, 전체 전입의 16.6%를 견인할 정도로 큰 힘이 되고 있다. 전북 안에서 인구가 서로 이동해 시군마다 ‘풍선 효과’에 희비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완주군은 수도권과 충청권 등 전북 이외의 인구유입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읍·면 인구변화도 관전 포인트다. 올 2월 중 완주군의 13개 읍면 중에서 인구가 늘어난 곳은 삼례(699명)와 용진(32명), 비봉(12명), 이서(10명), 동상(10명), 경천(3명), 소양(1명) 등 7곳에 달했다. 인구증가가 단순히 한두 지역에 국한했던 과거와 달리 전 지역으로 확산하고 있는 양상이다.. 청년들이 몰려온다 완주군의 인구증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은 청년인구(18세 이상 39세 이하) 증가다. 올 3월에만 청년인구는 293명이나 급증, 전체 인구증가(727명)의 무려 40.3%를 견인했다. 특히 작년 7월부터 올 3월까지 민선 8기 9개월 동안 연령대별 인구변화를 분석한 결과 청년 인구는 1만 8898명에서 2만 98명으로 무려 1200명이나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전체 인구증가(3131명)의 38%를 청년인구가 담당하면서 ‘활력 넘치는 청년완주’를 그려가고 있다. 대학과 취업 문제로 젊은이들이 지역을 등지는 상황에서 기초자치단체의 청년인구 증가는 전국적으로도 이례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도 전체 인구증가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구대상’이 될 법하다. 완주군은 청년이 정착하고 성장할 수 있는 청년활동 생태계 조성과 주거비용 부담을 덜어주는 청년주거 지원, 청년 창업과 일자리 확대 발굴, 청년정착 지원금 지원 등 각종 청년정책이 실효를 거두며 2030세대의 대거 유입으로 이어졌다고 보고 있다. 역동성이 선순환 고리 완주군의 인구증가 기반은 ‘역동성’에서 나온다. 곳곳에서 국가산단 유치, 기업투자 유인, 문화관광 기반시설 확충, 스포츠마케팅 추진, 정주여건 개선 등 그야말로 ‘다이내믹(Dynamic) 완주’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선 8기 출범 이후 ‘기업 프렌들리(friendly) 행보’를 앞세워 대규모 기업투자 유치에 나선 결과 최근 신규와 증설투자 협약 체결 규모만 5000억 원을 넘어섰다. 지난 3월에는 국토부의 신규 국가산단 후보지 발표에 ‘수소특화 국가산단’ 50만 평이 선정돼 향후 산단 조성에만 2562억 원의 막대한 투자가 불을 뿜게 된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썰렁했던 테크노밸리 제2산단도 매달 분양률을 높여가며, 올 하반기 100% 완판을 기대할 정도다. 삼례문화예술촌 등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급증하며 지난해 완주군 관광객 수는 432만 명을 돌파, 전년대비 280% 증가율을 기록하며 코로나19 이전(2019년) 수준을 훌쩍 넘었다. 삼봉 웰링시티와 용진 운곡지구 등의 아파트 현장엔 입주민들의 꿈과 희망이 부풀어간다. 완주군은 이미 올해 초 ‘전북 4대 도시’ 도약을 선언하고, ‘모두가 누리는 미래행복도시 완주’를 향해 성큼성큼 보폭을 넓히고 있다. 경제, 사회, 문화, 체육 등 각 분야에서 확확 변하는 ‘역동성’이 인구를 끌어들이는 매력으로 작용해 선순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유희태 군수 “일자리와 교통 중심지 만들어 인구 유입할 것” 유희태 완주군수는 “최근 9개월 동안 매월 평균 350명 가까이 인구가 늘고 있고, 특히 청년인구 증가가 견인하고 있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라며 “지역의 일자리를 늘리고 교통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되면 향후 인구증가 전망은 더욱 밝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유 군수는 “올 한 해에만 귀농귀촌하려는 5000세대 가량이 완주로 몰려올 것으로 기대한다”며 “귀농·귀촌인들이 하루빨리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지원하는 시스템을 강화해 완주군민으로 자리 잡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 군수는 또 “수소특화 국가산단의 선정으로 입주의향 기업들의 직접고용 효과만 7300여 명에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며 “일자리 창출과 교육 투자 확대, 교통기반 확충 등을 통해 인구 기준 시 전북 4대 도시로 도약할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기획
  • 김원용
  • 2023.04.13 16:45

[전북 가담항설] (2) 지금은 꽃동산, 100년 전엔 동학농민군 피 물든 '완산칠봉'

​전국적인 꽃놀이 명소로 소문나면서 매년 2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전주 ‘완산칠봉 꽃동산’. 지난 주말에도 만개한 봄꽃을 즐기기 위해 수많은 시민이 이곳을 찾아 완연한 봄의 한가로움을 만끽했다. 하지만 120여 년 전 이곳은 동학농민군의 피로 얼룩진 전쟁터였고, 수백 수천의 민초들이 지배층의 수탈에 맞서 목숨을 바쳤던 처절한 항쟁의 현장이었다. 화사하고 아름답게 핀 꽃동산의 이면에는 이들의 한과 눈물이 켜켜이 쌓여 있는 것.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알고 있는 시민은 얼마나 될까. 완산동에 터를 잡고 오래 살아온 주민 사이에서 '동학농민혁명 당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동학농민군이 완산칠봉에서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뿐, 아마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1894년 4월 완산칠봉에서 벌어졌던 민초들의 항쟁 현장을 되짚어봤다. △전주화약에 가려진 ‘완산전투’ 완산전투는 1894년 1차 동학농민혁명 당시 완산칠봉에서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과 '진압을 위해 한양에서 파견된 조선 중앙군인 경군' 사이에 일어난 전투다. 그러나 완산전투는 '전주화약'에 가려져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학생들이 접하는 교과서에서도 동학농민군이 전주성 점령 이후 별 어려움 없이 조정과 화약을 맺고 자진 해산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 완산전투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은 1894년 4월28일부터 5월3일까지 8일간 완산칠봉 등지에서 경군에 맞서 일진일퇴의 격전을 벌였다.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다음날, 한양에서 내려온 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 부대가 전주성에 도착해 포위를 시작했다. 전주성을 포위한 경군의 규모는 1500명이었으며, 이들은 서양식 무기인 ‘개틀링 기관총’· ‘크루프 야포’ 등을 갖춘 조선 최정예 신식 군대였다. 홍계훈은 부대를 세 군데로 나눠 각각 오늘날 신흥고등학교 인근 다가산 황학대와 한옥마을 오목대, 그리고 완산칠봉 등지에 배치했다. 이후 평지성인 전주성을 향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크루프 야포를 동원한 포격을 가했다. 기껏해야 임진왜란 당시에나 쓰이던 ‘화승총’·‘천보총’ 등을 다루던 동학농민군에게 500m 밖에서 날라오는 경군의 포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당시 경군이 쏜 포탄이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에 떨어지기도 하는 등 전주성 곳곳이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결국 동학군은 경군의 포위망을 뚫고자 공세를 감행했고, 이내 완산칠봉을 중심으로 양측의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2~3만 명에 달하는 동학군은 천보총과 갑주를 갖춘 기병을 앞세워 공세를 퍼부었으나, 언덕 위에서 동학군을 내려다보며 조준 사격할 수 있는 경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황토현 전투에서 동학군을 총탄으로부터 지켜주던 장태(대나무를 쪼개 원형으로 이어 붙인 방어구) 역시 언덕 지형에선 무용지물이었다. 게다가 경군은 당대 최신 무기인 개틀링 기관총 진지마저 구축한 상태였고 결국 동학군은 경군의 압도적인 화망에 밀려 패퇴했다. 전투 직후 홍계훈이 조정에 올린 ‘양호초토등록’에 따르면 8일간 세 번의 교전 끝에 완산칠봉 산자락에서 전사한 동학군은 2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에 비해 경군은 전사자 1명과 부상자 2명만을 내었을 뿐이었다. △무관심 속 잊혀진 동학농민군 발자취 완산전투는 당시 전주성 인구가 2만 명이 채 안 됐던 것을 감안한다면 2000명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한 만큼 상당히 규모가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동학군이 수세에 몰린 전투였으며 청일 양국의 파병으로 인해 당황한 조선 조정이 급하게 전주화약을 체결해 마무리 지었고, 이에 묻힌 면이 있다. 현재 완산칠봉에 있는 완산전투 기념 시설은 관련 내용을 기술한 ‘동학전적비’가 유일하다. 해당 비석은 80년대 건립된 이후 오랫동안 관리 기관 없이 방치되다 보니 부식이 심하게 이뤄져 육안으로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게다가 지난 1991년 동학군의 전주성 점령을 기념해 민간단체가 건립한 ‘전주성입성비’의 경우 기념비 하단에 새겨진 ‘나라일을 돕고 백성을 편하게 한다’는 동학의 교리인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도울 보(輔)’가 ‘보전할 보(保)’로 잘못 새겨져 있다는 지적이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현재까지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지난 2019년 전주시가 건립한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인 ‘녹두관’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해 인근 꽃동산을 찾은 연 평균 수십 만 명의 관광객에 비해 방문 인원이 현저히 적은 실정이다. 사실상 관련 지식이 없다면, 완산칠봉을 찾은 방문객이 이곳이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역사적 현장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셈이다. 이에 대해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은 “완산칠봉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사한 수많은 농민들의 원혼이 잠들어 있는 역사적 현장이지만 유해 발굴을 위한 기본적인 학술조사조차 진행되지 않은 상황”이라며 “완산전투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지자체와 관련단체가 관심을 가지고 완산칠봉의 역사적 의미를 시민들에게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기획
  • 이준서
  • 2023.04.13 16:04

[후백제 역사, 다시 일으키다 - 문헌사료로 본 후백제] ①견훤의 후백제 역사 어떻게 읽을 것인가

1100년 전 전주에서 일어난 후백제는 역동적인 국가였다. 하지만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지라 왜곡·폄하되었다. 전북일보는 후백제특별법 통과를 계기로 후백제학회와 공동으로 이를 바로잡고자 한다. △역사읽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역사는 소설이 아니라 과학이다. 과학은 보편적인 진실에 과정과 결과가 분명하다. 그런데 역사는 인간의 기록이기에 진실과 거짓, 주관성과 객관성이 공존한다. <삼국사기>열전 견훤전은 사실(史實)과 허구(虛構)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교묘하게 편집되어 있다. <삼국사기>견훤전은 후백제 후대 기록으로 사료적 가치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견훤전은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는 역사소설같다. 역사는 실재의 기록이라면, 소설은 상상력으로 쓴 이야기다. 역사와 소설을 구분하고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게 역사학자의 몫이다. 역사학자는 사료(史料)를 맹신하는 고정관념으로 역사해석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역사학자들은 보편적 진실에 입각하여 사료의 취사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삼국사기>견훤전을 객관적으로 올바른 역사읽기를 하려고 한다. △견훤의 시대정신 <삼국사기>열전 견훤전에 “이 때 신라 진성왕 재위 6년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들이 정권을 농락하고 탈취하였으며 국가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다. 게다가 흉년기근이 덮치어 백성들은 유민(流民)으로 떠돌아다니고 배고픔에 지친 백성들이 무리지어 벌떼처럼 일어났다(是 新羅 眞聖王 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政柄 綱紀紊弛 加之以饑饉 百姓流移 群盜蜂起).”고 밝혔다. 이 사료는 신라하대의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견훤이 신라 서남해방수군의 비장으로 순천만에서 거병하게 된 배경을 밝혀놓았다. 첫째, 왕실 측근세력이 정권농락하여 권력을 찬탈하고, 둘째, 지배층의 부패타락으로 국가기강이 문란 해이해지고, 셋째, 자연재해로 백성들의 기근(굶주림)이 심화되고, 넷째, 농토잃고 굶주린 백성들이 흩어져 돌아다니고, 다섯째, 굶주린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키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이었다. 이러한 말세적인 생활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견훤이 농민봉기를 일으킨 군도들을 이끌고 무진주(광주)를 습격한 것이다. △삼한정통론을 세우고 전주에 도읍을 정하다. 견훤은 892년 무진고성에서 8년간 노력하였지만 건국의 꿈은 좌절되었다. 광주 전남 지역의 호족세력들은 견훤에 동조를 하지 않았다. 광주 전남의 친신라 호족들은 나주 영암 영산강 등 서남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견훤은 지방호족들과 정치적 연대에 실패하고 고심 끝에 새로운 전략을 구상한다. 마한의 땅 광주 전남 대신에 백제의 땅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기로 결심한다. 그 결심에는 명분이 필요하였다. 그 명분은 백제의 역사와 정신을 잇겠다는 것이다. 견훤은 두 가지의 명분을 내세웠다. 하나는 백제가 금마산에 개국한지 600년이 되었다(百濟開國金馬山六百餘年)는 것과 내가 어찌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지 않고 의자왕의 숙분을 풀어준다고 할 수 있겠는가(今予敢不立都於完山 以雪義慈宿憤乎)는 두 가지였다. 전자는 견훤의 역사관이다. 견훤은 백제가 금마산에 개국한지 600년이 되었다는 익산백제론을 주창하였다. 견훤은 왜 익산백제론을 구상하였을까. 전남 광주에서 건국 실패가 구상의 동기였을 것이다. 견훤은 나주 영암 마한계 호족세력들과 정치적 연대에 실패한 후 마한의 발상지(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가 익산 금마라는 역사인식을 갖게 된 듯하다. 금마는 고조선의 준왕이 남래하여 마한을 태동시킨 곳이다. 견훤은 금마에서 마한-백제의 정통성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견훤의 광주 구상은 삼한정통론의 정립이었다.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은 고조선→기자조선→한→마한→백제→후백제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정통성이다. 백제의 땅 익산 금마에서 마한-백제의 정통성을 잇고 의자왕의 숙분을 풀기 위하여 전주에 후백제를 도읍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우리나라 역대 국왕가운데 삼한정통론을 정립한 국왕은 견훤왕이 유일하다. 삼한정통론과 전주입도론(全州立都論)은 견훤의 투철한 민족자존의 역사관을 보여준다. 견훤왕의 광주선언에서 전주입도론을 밝힌 만큼 후백제천도론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후백제 견훤왕 삼국통합을 꿈꾸다. 삼한정통론은 삼국통합의 꿈으로 이어졌다. 견훤왕은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황산벌에서 백제를 멸망시킨 것(新羅金庾信卷土 歷黃山至泗沘 與唐兵合攻百濟滅之)에 분개하였었다. 후백제의 건국이념은 민족자존을 지향하는데, 외세의존형 국가통합은 모순이라는 점이다. 견훤의 후백제 미래전략은 삼한정통론에 근거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진정한 통합이다. 견훤왕은 900년에서 918년까지 후백제의 영토를 굳건하게 지켰다. 내륙으로 대야성을 공격하고, 서남해 영산강유역 지키기에 힘을 쏟았다.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였지만, 916년에 건국한 거란과 국경 갈등으로 후백제의 견제력이 약해졌다. 견훤왕은 920년경부터 국가운영에 자신감을 갖고 삼국통합을 구상한다. 삼국통합의 의지는 반왕건․친궁예적 성향이 강한 중원(청주 철원)지역으로 진출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중원지역을 장악한 예천,문경 등 경북 서북부 지역을 공략하면서 합천,창원,김해 지역으로 진격하면서 신라 수도 경주를 향하였다. 견훤왕은 925년 2차 조물성 전투에서 성주까지 진격하여 경주 공략에 한발 더 다가갔다. 마침내 927년 견훤왕은 신라 왕도 경주를 공격하고 경애왕을 단죄한다. 한발 늦게 신라 구원군으로 내려온 고려군은 공산전투에서 후백제군에게 전멸당하였다. 기세등등하던 후백제 군대은 930년 정월 안동전투에서 고려군에게 참패당하였지만, 곧 바로 전열을 재정비하고 고려 왕도 개성 공격에 나섰다. 마침내 932년 9월 고려 왕궁 송악궁을 향하여 예성강 유역으로 진격하였다. 후백제 수군은 예성강 유역 염주, 백주, 정주 지역으로 상륙작전을 펼쳤다. 후백제 수군은 예성강 유역에 상륙하여 군선, 병선 1백여척을 불사르고 저산도 목장의 말 3백필도 빼앗아 돌아갔다(萱遣一吉湌相貴 以舡兵入高麗禮城江 留三日 取鹽․白․貞三州船一百艘焚之 捉猪山島牧馬三百匹而歸). 후백제 수군이 3일간 머물렀다는 뜻은 왕궁을 포위하여 송악궁을 함락시켰다는 것과 다름없다. 왕건은 신하의 도움으로 도망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권력욕이 강한 왕건의 체면은 구겨졌고 대단히 모욕적 사건이었다. △후백제 왕건의 음모로 견훤의 후백제 무너져 고려 태조 왕건은 거란과 국경분쟁에 국력을 소모하면서 후백제의 견제를 방심한 것이 송악궁 함락의 요인이었다. 후백제군은 군사들의 사기가 충천해 있었고, 왕건은 견훤왕에게 군사력으로 대결에 자신이 없어졌다. 932년 9월 송악궁이 함락당한 직후에, 왕건은 후백제멸망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고려 태조 왕건은 935년(청태2년) 이전에 이찬 능환에게 지시하여 견훤의 아들인 양검, 용검과 후백제 멸망 음모를 꾸미도록 하였다. 음모의 시나리오는 935년(청태2) 3월에 완성되었다. 왕건은 파진찬 신덕과 영순을 견훤왕의 장남 신검에게 보내어 반역의 음모를 권하여 후백제 왕실을 교란시켰다. 그동안 역사학계는 왕건의 음모 사실을 은폐하였다. 오늘날 역사학자들마저 승자의 역사에 동조할 필요는 없다. 후백제사학자 이도학 교수가 <삼국사기> 후삼국사(견훤전,궁예전) 기록은 “영화 대본같은 잘 짜여진 각본에 불과”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 연극, 소설은 역사성을 띨 뿐이지 역사는 아니다. /송화섭 전 중앙대 교수 불편한 <삼국사기> 견훤전 읽기 김부식의 견훤과 후백제 왜곡은 <삼국사기>열전 견훤전 편재에서 시작되었다. <삼국사기>는 삼국의 왕조사를 편성하는 방식인데 후백제의 견훤왕을 인물 열전에 편재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이러한 편재는 견훤왕을 국왕으로, 후백제를 왕조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편협성을 드러냈다. 김부식이 견훤의 후백제를 열전에 편재하므로서 한국사 서술에서 후백제가 푸대접당하고, 견훤은 역사의 죄인이 되었다. <삼국사기> 편찬 책임을 맡은 김부식은 과연 사관(史官)이 맞는가. 사관은 당대의 역사적인 사건을 사실(史實) 그대로 기록하는 관리를 말한다. 사관의 책무는 당대의 역사를 기록하여 문서화하는 일이다. 따라서 사관은 실재의 사건을 편견없이 정확히 객관적으로 기록해야 한다. 역사는 정확한 기록과 객관적인 기술이 생명이다. <삼국사기>견훤전은 사실과 허구가 뒤엉켜있다. 사실은 역사이지만, 허구는 소설이다. 진정한 역사는 소설이 될 수 없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말미에 ‘삼국사기를 올리는 글(進三國史表)’에서 스스로 신하(臣下) 임을 밝혔다. 그리고 <삼국사기>는 “사고에 보관할 내용이 못되지만 휴지로 버리지 말라”고 부탁하고 있다. 이 구절은 <삼국사기>가 관찬서(官撰書)가 아닌 사찬서(私撰書)라는 고백이다. <삼국사기>는 삼국 역사기록이지만 1145년에 편찬되었다. <삼국사기>는 삼국시대 당대의 역사기록이어야 마땅하나 삼국의 역사는 후대 기록이다. 견훤의 후백제는 900년에서 936년까지의 왕조사인데, 200여년 후의 <삼국사기>열전에 실려있다. 당대가 아닌 후대 기록이 어찌 정확할수 있겠는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승자의 기록일지라도 편견없이 정확하게 기록해야 사료적 가치가 있다. 후삼국사를 후대에 기록하면서 왜곡하였다면 사서(史書)로서 가치가 없다. 김부식은 <삼국사기>견훤전에 견훤을 극악한자(其劇者)라고 혹평하였는데, 논왈(論曰)에서 “궁예 견훤같은 흉악한 자가 어찌 감히 우리 태조를 상대로 대항할 수 있겠는가, 다만 태조에게 백성을 몰아다 준 자에 불과할 뿐이다(而況裔․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但爲之歐民者也)”라고 붙였다. 이처럼 편견의 역사관을 가진 김부식이 쓴 견훤전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자문교수단(기고 및 동행 취재) 강봉룡(목포대 교수), 강원종(전주문화유산연구원 학예연구실장), 곽장근(군산대 교수·가야문화연구소장), 김재홍(국민대 교수), 노기환(문화재청 백제왕도추진단 학예연구관), 박해현(초당대 교수), 백승호(중국 절강대 교수), 송화섭(전 중앙대 교수·후백제학회장), 유철(전주문화유산연구원장), 이도학(한국전통문화대 명예교수), 전상학(전주문화유산연구원 조사부장), 정상기(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조명일(군산대 초빙교수), 조범환(서강대 교수), 조법종(우석대 교수), 진정환(국립익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최인선(순천대 교수), 최흥선(국립익산박물관장), 홍창우(전남대 강사) △ 기획취재팀 조상진(논설고문), 김영호(문화교육부), 김태경(사회부), 오세림·조현욱(사진부)

  • 기획
  • 기고
  • 2023.04.11 17:34

[한국전쟁 정전 70년] 인천상륙작전, 빛과 그림자 (상)

인천상륙작전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 버린 한국전쟁 초반 전세를 순식간에 뒤집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바꾼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년 6월6일)에 비견될 만큼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질퍽대는 갯벌로 둘러싸인 악조건의 인천으로 대규모 병력이 상륙, 낙동강 전선에 집중한 북한군의 허를 찌른다는 작전 구상은 대담함을 넘어 무모해 보였다. 그 난관을 돌파한 상륙작전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총반격하는 발판이 됐고, 이후 한국전쟁을 상징하는 전투이자 신화로서 지위를 굳건히 다졌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도 전쟁은 3년 가까이 이어진 후에야 정전에 이르렀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펼쳐진 전황이 한국전쟁을 교착 국면에 빠지게 하면서 상륙작전의 성공을 퇴색시키기도 했다. 상륙작전 전후 민가와 시가지를 향한 대대적 공습으로 월미도와 인천 도심은 만신창이가 됐다. 인천 지역의 피해에 대해선 다음 하(下)편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압도적 상륙작전 1950년 9월15일 새벽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은 함대 261척, 미 해병대 1개 사단과 육군 7개 사단을 비롯한 총 7만5000명의 병력이 투입된 육·해·공 입체 작전이었다. 미 해군은 20㎞에 걸친 반원형 대형을 펼쳐 200여척이 넘는 함선을 서서히 전진시켰고, 상륙정(LST)들이 탱크와 해병대를 싣고 일렬로 월미도를 향했다. 프랑스 종군기자 4명의 기록을 묶어 낸 '한국전쟁통신'(2012·눈빛)에 실린 르포기사의 한 장면을 보자. "6시 30분, 큰 상륙정들이 섬의 갯벌에 앞문을 들이대고, 적군의 전방에서 아무런 저항도 없는 것에 다소 당황한 해병대를 토해 냈다.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아홉 대의 불도저 탱크들이 포로의 패인 구덩이 속에서 거대한 벌레처럼 비틀대며 숲으로 포를 쏘았다. 삼십 분 만에 해병대는 섬의 정상을 차지했고, 연대장은 미국 성조기를 꽂았다." 미 해병 제5연대 3대대가 이날 오전 6시 33분 월미도(그린비치)에 상륙했을 땐, 이미 섬은 항공모함 탑재기 코르세어(Corsair)가 퍼부은 공습으로 불타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월미도에서 60㎞ 떨어진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전투기들은 월미도 위에 파리 떼처럼 몰려들었고, 모든 함정에서 끊임없이 함포를 퍼부어 "땅을 말랑말랑하게 했다"고 '한국전쟁통신'은 전한다. 미 해병대가 큰 저항 없이 상륙 3시간 만에 월미도를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던 이유다. 이어진 상륙은 밀물을 기다리다 이날 오후 5시 30분부터 인천 북서쪽 해안(레드비치·현 동구 만석동)과 남서쪽 해안(블루비치·현 미추홀구 용현5동)에서 감행했다. 미 제5연대 1·2대대는 레드비치로 상륙해 응봉산과 항만시설을 확보했다. 미 제1연대는 블루비치로 상륙해 수봉산을 차지했다. 16일부터 월미도와 인천항으로 한국군과 유엔군 지원부대들이 차례로 상륙했으며, 인천 시내에서 적군 소탕 작전을 벌여 일사천리로 인천을 탈환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에 주둔하던 북한군 병력 2천여명을 전멸했다. 18일 오전 인천시청(현 중구청) 앞 광장에서 인천시장 취임식이 열렸는데, 인천시장을 지냈던 표양문(1907~1962)이 임시시장을 맡았다. 9월17일 오전 5시 45분께 미 해병대는 부평 원통이고개(현 인천도시철도 1호선 부평삼거리역에서 동수역 일대)에서 경인가도를 통해 인천으로 진입하던 북한군 전차부대를 기습해 서울 가는 길목을 확보했다. 한국군 해병대 제3대대는 경인선 부평역 일대에서 북한군과 교전을 벌여 김포비행장으로 향하는 미 해병 제5연대에 길을 터줬다. 미 해병대와 한국 해병대는 9월19일부터 한강을 건너 서울 진입을 시도했으나, 시가지를 요새화한 북한군의 방어망을 쉽게 뚫지 못했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교대로 투입돼 북한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압도적 전력으로 밀어붙인 인천상륙작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흘렀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지 13일만인 9월28일 한국군과 유엔군은 마침내 서울을 수복했다. △기습작전은 아니었다? 인천상륙작전을 기습 작전으로 보긴 어렵다. 북한은 한국전쟁 초기부터 미군이 한반도 중간 지점에서 상륙 또는 공수작전을 펼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박태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가 쓴 '한국전쟁'(2005·책과함께)에 실린 소련의 한 암호전문을 보면 1950년 7월 김일성은 미군이 군대 후방 또는 북한 쪽 항만에 상륙·공수 작전을 할 위험성이 있다며 스탈린에게 무기를 신속하게 공급해달라고 요청한다. 중국은 상륙작전 대상 지역이 인천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북한에 경고하기도 했지만, 낙동강 전선이 고착화하면서 북한군은 인천에 추가로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미 합동전략계획단은 9월 상륙작전 대상지로 인천, 군산, 주문진, 아산만 등을 검토했다.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유엔군 총사령관은 대부분 참모가 반대하는 인천을 고집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한국전쟁에 관해 쓴 '콜디스트 윈터'(2009·살림)에서는 맥아더의 당시 구상에 대해 "거의 모두가 인천은 해군을 싫어하는 사악한 천재들이 만든 도시라고 생각했다"고 평했다. 인천 앞바다는 최대 9m까지 치솟는 조수 간만의 차로 상륙 시간이 제한됐고, 썰물 때는 1~4㎞의 갯벌을 걸어야 했다. 상륙지점인 월미도는 항구 한가운데에 있어 수비대를 주둔시켜 방어하기 적합할 뿐 아니라 상륙 지역을 둘로 나누게 했다. 상륙작전의 악조건은 다 갖춘 셈이다. 그럼에도 인천은 상륙지로 낙점됐다. 인천은 서울이 가깝고 인천항, 김포비행장, 경인선 등 인프라를 갖춘 군사 요충지였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기 위한 교두보이면서도 낙동강 전선을 연결하는 북한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차단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예상대로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의 한국군과 유엔군이 대구, 김천, 대전, 수원을 거쳐 북상하며 총반격에 나섰다. 서울 수복이 13일이나 걸리면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빛바랜 측면도 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을 시도하는 동안 서울과 중부지역 북한군은 후퇴해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박태균 교수는 '한국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 후 열흘 남짓한 시간이 없었다면 북한군이 만주에서 전열을 정비해 중국군과 함께 다시 진격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결국 유엔군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라고 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이어진 한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은 전쟁을 끝맺지 못했다.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미국 대통령은 서울 수복 다음날인 9월29일 미군의 38선 돌파를 승인하면서 만주 등 국경 지역에는 한국군만 진출하게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중국, 소련과 직접 충돌하지 말자는 차원이었다. 하지만 맥아더 사령관은 유엔군을 압록강과 두만강을 향해 북진시켰고, 결과적으로 중공군의 참전을 불렀다. 맥아더 사령관은 병사들에게 "빠르면 추수감사절, 늦어도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장진호 전투 등 미군의 막대한 희생과 1·4후퇴가 뒤따랐다. 한국전쟁 연구자인 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은 "인천상륙작전이란 대규모 작전을 기획한 목적은 애초 미 국무부 원칙대로 38선까지 밀어 올리고 전쟁을 끝내고자 했던 것"이라며 "38선을 중심으로 정전 체제로 가기 위한 작전이었으므로 북진 이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 의미가 퇴색됐다"고 말했다. 경인일보=박경호기자

  • 기획
  • 기타
  • 2023.04.10 14:52

[뉴스와 인물] 황성익 중진공 전북지역본부장 "위기를 기회로 살려낼 것"

지난 2019년 12월 처음으로 발생한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퍼지고 시간이 흘러 안정세를 찾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물가뿐만 아니라 원자재 가격까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경기 침체, 고물가·고금리까지 이어져 중소벤처기업계가 큰 타격을 입었다. 국내에서도 특히 전북은 타 지역에 비해 산업 구조, 각종 경제 지표 등이 취약한 만큼 중소벤처기업도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청년층 인구 유출 등으로 인력난까지 이어지며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이하 중진공) 전북지역본부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코로나19 유행 상황이 한창인 2년 전 부임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경기 침체, 고물가·고금리 상황까지 전북지역 중소벤처기업의 어려운 상황을 함께 겪은 황성익(57) 중진공 전북지역본부장을 만나 현장 목소리와 위기 극복 대안, 계획 등을 들어봤다. 부임하신 지 2년이 됐습니다. 소회가 어떠신지요. "순환보직이어서 입사 후 여러 지역에서 근무했었는데 전북지역은 처음 발령받아 오게 된 곳입니다. 많은 분이 마치 가족처럼 친구처럼 친근하게 대해 주시고 정이 많은 지역 정서 때문인지 고향에 온 것처럼 낯설지 않았습니다. 부임하던 때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경제 상황이 매우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특히 전북지역은 각종 경제분석 자료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조업, 고부가가치 산업 등이 취약한 곳이기에 중진공이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 전북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지역 내 중소벤처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통해 지역경제 주역을 견인하고자 하는 미션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성과는 어떤지요. "2021년도에는 코로나19 사태로 급격한 변화와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 중소벤처기업들의 위기 극복을 위한 약 2700억 원 규모의 정책자금을 신속하기 집행할 수 있는 비대면 시스템을 적극 도입해 집행했습니다. 지역균형 뉴딜 실현을 위해 지자체와 지역혁신기관의 연계지원체계 구축 후 전북지역 자동차 소재·부품·장비기업 211개 사에 총 487억 원을 지원했습니다. 또 지역사회 코로나19 고통 분담과 사회적 경제 활성화를 위해 디지털·지역산업·사회안전망 혁신에 초점을 맞춘 3대 혁신성과도 창출했습니다. 2022년도에는 정책자금 대출 외에도 ESG 경영혁신 바우처 사업, 탄소중립 지원을 위한 전용 자금을 확대 운영했습니다. 상환 도래 대출금의 선별적 만기 연장, 소액 성실상환제도, 집중 관리기업 지정 등 제도를 도입해 대출금 상환 부담도 완화했습니다. 인구소멸 위험지역이 상대적으로 많은 전북도의 청년층 인구 유출을 보완하고자 청년창업사관학교 운영, 사업성 및 기술성이 양호한 청년 CEO에게는 낮은 금리의 청년전용창업자금을 지원하는 등 현장에서 필요한 것들을 아낌없이 지원했습니다." 코로나19에 3고(고금리·고물가·고환율)까지 덮치면서 중소벤처기업이 많은 위기를 겪었습니다. 여러 기업의 위기 극복을 돕기 위한 많은 고민과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코로나19 여파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원자재 가격의 급격한 상승 등이 더해져 많은 중소벤처기업이 위기 상황 속에서도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중진공도 중소벤처기업 곁에서 극복과 도약을 준비할 수 있도록 능동적이고 선제적인 정책 지원을 추진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자 노력했습니다. 정책 자금의 경우 미래전략산업 분야를 중점 지원했고 위기 기업에는 긴급 유동성을 공급했습니다. 산업구조 재편에 대응해 구조혁신지원센터를 개소해 구조혁신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올해도 중진공은 3고 장기화, 실물경기 둔화 등으로 복합위기에 놓인 중소기업의 어려운 대내외 경영 환경에 대해 한발 앞선 정책지원과 혁신 노력으로 경제구조 전환을 주도하고 K자형 양극화를 지속적으로 해소해 나가면서 위기를 기회로 살려내고자 합니다." 2년 동안 중진공 전북지역본부장의 시선으로 바라본 전북지역 중소벤처기업의 상황은 어떤가요. 가장 개선해야 할 점과 그에 대한 해결책은요. "지난해 한국은행 발표 자료에 따르면 전북도의 경제력 지수는 전국 최하위라는 결과 보고가 있었고 전북도의 산업구조 및 각종 경제 지표만 봐도 타지역에 비해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66년 이후 인구가 감소하고 있고 인구 감소율이 전국 최고 수준에 청년층의 역외 유출로 고령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 경제기반이 악화하고 있습니다. 전북지역 중소벤처기업의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첨단업종 및 고부가가치 품목의 기업도 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며 경제활동인구의 지속적인 감소로 인력 채용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역특성을 반영해 정책자금은 스마트 농생명·식품, 미래지능형기계, 탄소복합소재, 조선해양 에너지 분야에 우선 지원하고 있습니다. 청년층 인구가 지역 내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청년 근로자의 자산 형성 지원을 위한 청년 재직자 내일채움공제 플러스(3년 재직 시 1800만 원 이상 수령) 상품을 출시했습니다. 청년 창업가 양성을 위한 청년창업사관학교 등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전라북도 특장차산업 클러스트(산업단지) 구축에 힘을 실을 계획입니다. 민간(기업·협회), 정부(지자체·중앙), 유관기관 등 상시 열린협업협의회를 결성해 운영하고 김제 백구 2차 특장차단지 활성화 지원을 위해 입주기업 유치(입지 제공), 자금, 인력, 수출 지원 등 특장차 산업의 지속성장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중진공 전북지역본부가 지역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중진공은 정부의 중소기업 정책 집행 최일선에서 기업 현장과 정책 간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어서 현장의 목소리를 가장 많이 듣고 신속하게 수렴해 정부에 제안할 수 있는 강점이 있습니다. 중진공은 이런 강점을 살려 기업 의견이 정책에 잘 반영될 수 있도록 하고 정부의 정책 방향이 현장에 잘 녹아들 수 있도록 중소벤처기업부, 전북도 및 기업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기업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대출금 만기 연장, 긴급정책자금 등 신속한 지원과 아울러 정부의 산업구조 재편 방향을 능동적이고 선제적으로 반영해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중진공 전북지역본부의 주요 사업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올해는 정부의 2023년 경제정책 방향 목표인 위기 극복과 경제 재도약 및 신성장 4.0 전략 등 추진계획에 맞춰 △인재 양성 △글로벌 협력 △금융 지원 △규제 혁신 등 다양한 사업을 혁신해 중소기업이 선제적으로 위기에 대응하고 재도약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입니다. △인재 양성 부문에서는 우수인력이 기업에 적기에 공급될 수 있도록 지역 대학과의 연계·협력을 내실화하고 기업인의 교육·문화·힐링 공간 조성을 위한 전북연수원을 2025년 완공 목표로 실시·설계 착수했으며 지자체 내일채움공제를 기존 완주·익산형에서 전주시까지 확대 운영해 근로자 장기 재직을 이끌며 일자리 창출을 강화하고자 합니다. △글로벌 협력 부문에서는 국내·외 현장 조직의 강점을 최대한 살려 국내 기업과 해외 바이어, 해외 기업과 국내 바이어를 긴밀하게 연결하는 중진공형 해외사업 모델을 추진하고자 해외 17개국의 20개소 수출 인큐베이터를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로 확대 개편하며 현지 사무소 역할에만 그쳤던 기존 인큐베이터에서 벗어나 수출기업을 적극적으로 돕는 특화 프로그램을 추가 운영하고자 합니다. △금융 지원 부문에서는 전년도와 비슷한 규모의 정책자금을 중소기업 경영안정 및 생존을 위한 운전자금 중심으로 상반기 내 72%까지 집행해 신속히 유동성을 공급할 예정입니다. 기술성과 사업성이 우수한 기업을 대상으로 민간은행 대출금의 이자 일부를 보전해 주는 이차보전 사업으로 중소기업의 구원투수로 나서려고 합니다. △규제 혁신 부문에서는 지역본부에 설치한 기업성장응답센터를 중심으로 모든 공공기관과 협력해 현장 애로사항을 적시에 파악하고 관계부처에 선제적으로 정책을 제안함으로써 중소기업 규제 애로 해소에도 힘쓸 방침입니다." 앞으로 중진공 전북지역본부를 어떻게 이끌어 가실 계획인가요. "앞서 말씀드린 중진공이 기업과 정부의 허브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정책자금 등 인재 양성, 글로벌 협력, 금융 지원, 규제 혁신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전북지역 경제 발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중소기업 종합지원기관으로 거듭나도록 현장에서 한 발 더 열심히 먼저 뛰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도민·중소기업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금석위개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쇠와 돌을 뚫는다는 뜻으로 강한 의지로 전력을 다하면 어떤 일에도 성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현재 대내외 경제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렵고 전북지역의 여러 지표도 긍정적이지 않지만, 우리 전북도민, 중소벤처기업인들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성장할 수 있는 저력과 역량을 충분히 가지고 계십니다. 저희 중진공도 한발 앞선 정책 지원과 헌신적인 노력을 다할 것이며 늘 곁에서 함께하겠습니다." 황성익 중진공 전북지역본부장은 서울 출신으로 서울 장훈고등학교, 서강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지난 1992년 1월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에 입사해 2018년 감사실 청렴추진팀장, 2019년 서울북부지부장, 기금관리실장, 성과보상기획처장 등을 지냈다. 2021년 7월 중진공 전북지역본부장으로 부임해 전북지역 곳곳에 있는 중소벤처기업을 다니며 현장 목소리를 듣는 등 전북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 기획
  • 박현우
  • 2023.04.09 17:36

[참여&공감 2023 시민기자가 뛴다]벼랑 끝에 선 저소득층의 꿈과 희망, ‘자활’

'2023 참여&공감 시민기자가 뛴다'는 전북지역 사회, 환경, 교육, 문화계 등 각계 전문가들이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담론을 만드는 공간입니다. 올해는 백영규 전북광역자활센터 센터장, 장진호 전북환경운동연합 활동가, 안유진 전 전북대신문 편집장, 정성수 향촌문학회 회장, 하송 완주 소양초등학교 교사, 구혜경 전북문화관광재단 기획홍보팀장 등이 참여해 도내 곳곳의 이야기 등을 전합니다. '2023 참여&공감 시민기자가 뛴다'는 오는 11월까지 매주 목요일자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자활사업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립 능력을 키워주는 국가 제도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근거해 지난 2010년 10월부터 시행된 이 제도는 근로 능력이 있는 저소득층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기능습득을 지원하고 근로 기회를 제공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교육과 근로 환경 제공을 통해 사회경쟁력을 키우는 것이다. 제도적 한계와 모순을 지적하며, 새로운 패러다임 또는 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로 풀어나갈 과제가 많다. 하지만 자활은 저소득층의 자립 능력을 키우는 희망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이 가운데 전북지역에서 현재 추진되는 자활사업과 기관들을 살펴본다. △우리의 실생활에 녹여진 자활사업 자활사업은 일반적으로 자활근로사업을 의미한다. 기존 공공근로처럼 한시적으로 제공하는 일자리가 아니라, 근로기회를 제공해 자활기반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유형별로는 시장진입형과 사회서비스형, 인턴·도우미형, 근로유지형, 시간제, 청년자립도전사업 등으로 수요와 공급을 고려해 운영 중이다. 이 사업의 가장 성숙된 단계인 시장진입형은 투입예산의 30% 이상 수익금이 발생하고, 취업 도는 자활기업 창업을 통한 시장진입을 지향하는 유형이다. 사회서비스형의 경우 수익형과 공익형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수익형은 매출액이 총사업비의 10% 이상이 발생해야 하며, 공익형의 경우 무료간병서비스, 정부양곡배송, 무료 집수리, 무료 빨래방 등 시·군·구의 승인을 받은 뒤 운영 가능하다. 인턴·도우미형은 일반 기업 등에서 자활 인턴사원으로 근무하면서 기술·경력을 쌓는 취업 유도형 자활근로 사업이다. 대상업체는 단순 노무지원 형태를 지양하고, 자활 유도가 용이한 요리, 운전, 제과·제빵 등 기술 습득이 가능해야 한다. 도우미형의 경우 지자체 또는 사회복지시설에서 업무수행 보조·지원을 하는 사업이다. 근로유지형의 경우 현재의 근로 활동과 자활을 유지하면서 상위 자활사업 참여를 준비하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며, 시간제는 돌봄·간병·건강 등의 사유로 종일 일자리 참여가 어려운 저소득층을 위한 사업이다. 하루 4시간 근무를 원칙으로 오전/오후 교대 근무 또는 근무시간 선택 등 사업기관과 협의 하에 자율적으로 결정, 참여할 수 있다. 빈곤의 대물림을 방지하기 위한 청년자립도전자활사업은 청년들의 공동체 회복에 중점을 두고 자산형성지원 통장 가입과 내일키움장려금, 교육비 지원 등을 운영한다. 이 같은 유형별로 전국의 표준화된 5대 사업은 간병과 집수리, 청소, 폐자원 재활용, 음식물 재활용 사업 등이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와 트렌드에 발맞춰 현재는 집수리, 청소, 폐자원 재활용 사업이 운영되고 있다. 덧붙여 영농, 도시락, 세차, 친환경사업, 프렌차이즈, 편의점 등 지역별 특성을 고려한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 자활사업 견인하는 희망 꽃 '자활기업' 자활사업과 자활기업은 상호 맞물려 저소득층의 탈빈곤을 돕는 톱니바퀴와 같다. 자활을 활성화하는 데 기관의 역할은 한계가 있다. 시장에 진입한 자활기업의 성패 여부가 자활사업의 질과 양을 좌우한다. 취약계층의 공동창업으로 탈빈곤을 꾀하고 있는 자활기업은 2인 이상의 수급자 또는 저소득층이 상호 협력해 조합이나 사업자 형태로 자활사업을 운영하는 업체다. 자활사업에서 자립을 위한 마지막 단계라고도 할 수 있다. 전북지역에는 84개의 자활기업이 있다. 업종도 다양하다. 집수리를 비롯해 청소, 정부양곡배송, 식품가공업, 세탁, 가사간병 등 각자의 기업에서 자활을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자활기업도 사회적경제기업처럼 사업의 안정을 위한 다양한 지원 속에서 경영활동을 펼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자활기금 또는 신용보증자금을 활용한 융자, 자활기금을 활용한 전세점포임대지원, 전문컨설턴트와 연계한 창업 컨설팅 지원, 사업개발비 지원, 한시적 인건비, 전문가 인건비 등 자활기업의 탈 빈곤을 위한 다양한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 자활 현장에서 흘리는 자립의 희망 땀방울 전북지역에는 저소득층의 자립을 지원하는 기관으로 전북광역자활센터를 비롯해 17개의 지역자활센터가 활발하게 지원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업단은 185개소이며, 1600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 중이다. 광역자활센터와 17개 지역자활센터는 저소득층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창업을 지원하는 것이 핵심 목표로 하고 있다. 자활의욕 고취를 위한 교육 등을 통해 수급자들의 근로의욕을 높이고 다양한 교육과 훈련과정을 제공해 자활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지역사회에 필요한 서비스와 저소득층에 필요한 서비스 제공으로 사회적서비스 확대와 사회적자원의 개발과 동원을 통해 사회적 연대를 실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공공기관 연계 사업을 통한 세차, 자원재활용, 군부대와 연계한 청소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 공익성을 추구해 사회적 일자리사업으로 편익을 제공했다. 노동의 가치를 우선으로 자활기업 창업과 육성은 근로취약계층의 사회통합을 추구해 이들이 주체로 참여하는 사회적 기업문화를 조성해 호응을 얻고 있다. 사회적 경제관계에서 다양한 주체들과 경쟁과 협력으로 상생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활사업의 성과를 특정한 수치에 맞춰 평가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고민이 적지 않다. 자활사업 성과는 참여자 규모, 프로그램 참가율, 수익률, 자활성공자 비율, 참여자 만족도, 상위프로그램 진입률 등을 지표로 한다. 하지만 참가율, 수익률, 성공률 등 통계치를 기본으로 하고 있어 제도적 한계로 그 수치가 매우 낮을 수밖에 없다. 이는 전국적인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활사업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면 통계적인 수치를 넘어 사회적 통합 성과 등 다양한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이 같은 부분은 자활사업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과 틀의 변화에 대한 주장을 불러온다. 특히 사회적 통합 성과 평가를 통해 사회의 건강성 유지와 사회적 통합을 향해 얼마나 근접했는가를 살펴야 한다. 자활사업은 건강한 사회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백신이다. 자활사업은 노동의 기회, 경제의 기회, 사회참여 기회를 통해 커다란 유기체를 움직이는 정교한 톱니바퀴의 한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백영규 전북광역자활센터 센터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기획
  • 기고
  • 2023.04.05 18:24

오택림 전북도 챗지피티 연구모임 단장 "인공지능, 도정 정책에 접목"

오픈에이아이(OpenAI)가 개발한 대화형 인공지능 챗봇 '챗지피티(ChatGPT)' 열풍이 불고 있다. 챗지피티를 행정 영역에 접목하려는 중앙부처, 지방자치단체의 움직임도 시작됐다. 전북도 역시 챗지피티 연구모임을 구성하고 업무 혁신, 시책 발굴에 챗지피티를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나섰다. 전북도 챗지피티 연구모임 단장을 맡은 오택림(54) 전북도 미래산업국장은 4일 "인공지능 등 최첨단 기술을 업무에 접목해 업무 혁신을 선도하고 성공 사례를 공유함으로써 도민에게 다양한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시책을 만드는 밑거름이 되도록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연구모임은 이날 정식 출범과 동시에 청내 직원을 대상으로 챗지피티 등 인공지능 챗봇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이상준 전북대 전자공학부 교수를 초청해 특강을 열었다. 자발적으로 특강에 참여한 직원만 30명. 챗지피티를 활용한 업무 효율화에 직원들의 관심이 높다는 걸 엿볼 수 있었다. 쳇지피티 활용이 가능한 대표적인 업무로는 보도자료와 보고서·연설문 작성, 소셜네트워크용 홍보 문구 작성, 자료 조사, 번역 등이 거론된다. 오 단장은 "챗지피티는 인공지능이 우리 일상 속으로 스며드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며 "인공지능 정책 마인드 강화를 위해 연구모임을 한 달에 한 번씩 개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어 오 단장은 "직원들의 단순 일상 업무 탈출을 위한 챗지피티 활용 모범사례를 만들고, 적용 가능한 업무 분야를 발굴해 업무 생산성을 높이겠다"며 "연구모임이 선도적으로 인공지능 등 최첨단 기술을 업무에 접목해 전북도정 정책의 품질을 높여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 기획
  • 문민주
  • 2023.04.04 18:02

[전북 가담항설] (1) 모악산에 김일성의 시조묘가 존재한다?

전북은 고대 마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수천 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지역이다. 그만큼 전북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얽히고설켜 탄생한 수많은 이야기가 지역 곳곳에 담겨 오늘날까지 도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담항설(街談巷說)'은 거리나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뜻한다. 전북에 살거나 여행하면서 들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과연 사실일까' 한 번쯤 고개를 갸우뚱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번 기획보도에서는 그런 '오래된 소문' 중 특히 젊은 층이 궁금해할 만한 이야기들을 모아 '소문의 진실' 을 짚어본다. "만약 전쟁이 나더라도 김일성의 시조 묘가 있는 전주는 폭격하지 못할 것이다." 북한의 무력 도발이 빈번해지는 요즈음 전주 시민의 입에 간간이 오르내리는 말이다. '김일성의 시조 묘'에 대한 이야기는 청소년부터 6·25 전쟁을 겪은 노인까지, 전주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로 다양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북한이 핵 쏠 징후가 보이면 무조건 전주로 피난 가야 한다'는 게시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다. 과연 김일성의 시조 묘가 전주에 있고, 이러한 이유로 전주는 북한의 무력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을까? 모악산 현장을 가봤다. △ 김일성의 시조 묘가 있는 모악산 전주와 김제, 완주에 걸쳐 있는 모악산. 아기를 안고 있는 형상을 띠고 있어 ‘어머니의 산’이라 불리는 이곳 모악산은 북한 김정은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전주 김씨' 시조 김태서의 묘가 있는 곳이다. 북한의 무소속대변지 ‘통일신보’는 김일성 일가의 본관은 전주 김씨이며, 그의 시조 김태서가 1254년 고려 고종 41년에 일족을 데리고 전주에 정착했다고 지난 1999년 3월6일자를 통해 밝혔다. 김일성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 에도 김일성의 조상이 전주에 살다 살길을 찾아 이북 지역으로 이주했고 증조부인 김응우 대부터 만경대에 정착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김일성 일가에겐 만경대뿐만 아니라 전주도 태생적 뿌리가 되는 관심 지역이었던 셈이다. 북한이 운영하는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 가 6‧15남북공동선언 4주년을 기념해 발행한 특집에 따르면 지난 2000년 6월15일 환송오찬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자신이 '전주 김씨'라고 밝혔으며, 그해 8월에는 방북한 언론사 대표 중 장영배 당시 전주MBC 사장에게 '시조 묘가 있는 전주에 꼭 방문하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당시 전북경찰청은 김 위원장의 방문을 가정해 전주 김씨 시조 묘 주변에서 경호 훈련을 했으며 완주군은 모악산 입구와 시조 묘에 이르는 구역을 정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전주 김씨 종친회는 김일성 일가와의 연관을 전면 부정하고 있다. 전주 김씨 종친회 관계자는 "족보에 김일성 일가와 관련된 내용은 없다"고 했다. 1915년 편찬된 전주 김씨 대동보가 6·25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됐고, 이때 김일성 일가가 살았던 평양남도 대동군 일대가 누락돼 전주 김씨와의 연관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박정희 정권 시절 반공 정서를 고려해 전주 김씨 가문에서 김일성 일가와 관련된 내용을 삭제' 한 것으로도 본다. △6·25 전쟁 당시 전주서 민간인 학살한 북한군 전주 김씨 종친회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회고록 등을 근거로 '김일성 일가의 본관이 전주 김씨' 라는 것은 사실이다. 이 때문에 북한의 무력 공격에 대한 위험이 제기될 때마다 “전주 김씨 시조 묘가 있는 모악산 일대의 전주와 완주는 무사할 것”이라는 얘기가 설득력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막연한 입소문과 달리 정작 북한군은 6·25전쟁 당시 전주를 점령한 후 민간인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다. 1950년 6월 25일 기습 남침 후 한 달여 만에 전주를 점령한 북한군은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도내 우익 인사를 전주형무소(옛 전주교화소)에 수감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소장된 한국전쟁 관련 문서에 따르면 당시 전주형무소에는 민간인 900여 명에 우익 인사까지 모두 1040여 명이 수용돼 있었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등 반격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북한군은 9월 28일 퇴각을 앞두고 전주형무소 재소자 500여 명을 공산주의 체제에 반하는 반동분자로 분류해 사살했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전주형무소 학살 사건은 유족들의 노력으로 세간에 알려졌으며, 지난 2019년부터 전주시를 중심으로 유해발굴조사가 진행됐다. 유해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전주대학교 한 교수는 “지난 2019년 9월부터 2020년 1월까지 조사를 마무리하고 희생자 293명의 유해를 수습해 봉안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북한군의 전주형무소 민간인 학살 사례로 볼 때 '김일성 시조 묘가 있는 전주는 폭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는 믿기 어렵다. 그런 비극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북한의 무력도발이 현실화된다면 전주와 완주도 안전지대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 대북 군사 안보전문가인 북한대학원대학교 김동엽 교수는 "군산에 주한 미군 공군 기지가 있는 점 등을 고려했을 때 전주가 북한의 정밀타격 대상에서 제외되지는 않을 것이다"고 내다봤다.

  • 기획
  • 이준서
  • 2023.04.03 18:21

[조법종교수의 전라도 이야기] ⑤전라도 관문 삼례에서 접한 조선의 현실

1884년 11월 9일 포크 일행은 기묘한 악단과 함께 익산으로 진입했다. 포크의 방문을 기다린 익산 주민들은 지붕 위를 포함해 모든 곳을 뒤덮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포크를 맞이했다. 그러나 포크는 이들을 무시하고 가장 신속한 동작으로 관아 맞은편 집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포크의 가장 큰 스트레스, ”화장실 가기“ 포크가 조선의 지방을 조사 과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 중의 하나가 ‘화장실’ 이용이었다. 9월달 그가 처음 개성에서 접한 조선의 화장실에 대한 묘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방문 밖에 나타나면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개성 객사?) 정원 건너편 70피트(21미터) 정도의 거리에 ‘변소’가 있었다. 낡아서 다 쓰러져가는 헛간의 바닥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고, 구멍 주변에는 ”쪼그려 앉아 일을 볼 때 필요한 돌” 몇 개를 모서리에 얹어 놓았다. ‘변소’에 갈 때면 한 명 또는 두 명의 병사가 반드시 함께 했으며, 나머지 몇 명은 내가 가는 길을 열기 위해 낮고 긴 소리로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내가 화장실을 이용할 때마다 거의 매번 누군가는 발로 걷어차였다. 이들이 불쌍하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화장실에 가는 것이 너무 싫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포크가 기록한 상황별 한국어 표현 중 화장실 간다는 표현을 두 가지로 나눠 기록한 부분이다. 즉, ‘화장실에 간다’는 일반적인 표현은 “뒤퍼(Tui-po)로 기록하고 ‘똥 싸러 간다는 천박한 표현’은 ”똥누(Ttong-nu)“로 표기해 화장실이 급할 때 사용할 현실적 표현까지 남겨두어 웃음이 났다. 특히, 19세기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기록에 거리에 용변이 널려있고 화장실이 불비한 상황과 140여년이 지난 현재 2020년대 대한민국 화장실문화가 세계인의 칭찬과 부러움의 대상이 된 점을 비교해보면 우리의 노력에 따라 세상이 바뀌는 모습을 실감케 한다. △10년후, 동학농민혁명의 중심, 삼례에 도착하다. 익산군수의 환대와 시끌벅적한 잔치상을 뒤로하고 포크는 3시 5분 익산(금마)을 출발했다. 4시 10분에 누추한 작은 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남쪽으로 길을 계속 가서 5시에 삼례찰방도(S'hum-nye chalpang-do)에 도착했다. ‘찰방도(察訪道)’란 조선시대 정보 통신을 위해 10대로를 중심으로 말과 인력을 관리하는 ‘역참’을 설치하고 책임자인 ‘찰방’ (종6품)을 둔 곳으로 현재 전라북도 일원의 12개 역을 관할했다. 삼례도는 조선시대의 10대로 가운데 한양에서 제주로 구간에 설치되었는 데 ‘삼례도역’은 일본 헌병주차대와 일본인 소학교로 이용되다가 광복 후에 삼례 동부교회로 이용되고 있다. 삼례도 찰방역의 7개 건물들 가운데 본청은 덕류당(德流堂)이고 말을 위해 제사지내던 마신당(馬神堂)은 교회 뒤편의 언덕에 있었는데 1990년 초 필자 방문시 관련된 당골할미가 수년전 돌아가신 이후 관련 공간은 모두 사라졌다고 했다. 삼례에서는 포크도착 다음날인 9월 23일 장이 열릴 예정인데 이미 장터가 열려 있었다. 이는 오일장이 매일 열리는 상설장으로 발전하는 조선 후기 현상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주막이 꽉 차 가축우리 같은 방 한곳에서 포크와 통역인 전양묵, 집사인 정수일 등 세 명이 모두 함께 자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부자동네 전라도가 부자가 아닌가? 전라도의 관문인 삼례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포크는 서울에서 전라도가 상당히 풍요롭다고 한 이야기들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다. “우리는 평야 지대에 머물렀다. 인구는 의심할 여지없이 무척 많았다. 그런데도 내 기대와는 달리, 비록 벼는 풍부한 소출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서울의 많은 조선인들이 이야기했던 이 지역의 풍요로운 상황이나 부유함에 대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사람들의 집과 옷차림은 서울에 비해 훨씬 열악했다. 목재가 매우 드물어서 집은 대부분 진흙으로 지어졌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장독과 그릇들은 품질이 더 좋았고 수량도 많았으며, 부엌 살림살이도 더 많아 보였다.” 이 같은 의문은 전주에 도착해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서울에서 듣던 것과는 달리 집들도 대부분 초가집이었고 기와집은 드믉며 경기도나 충청도에 비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그런데 정작 장독과 그릇, 살림살이는 더 좋아보였다는 역설적 상황이 기록되고 있다. 즉, 겉은 허술해 보이지만 실제 생활은 윤택한 상황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의문은 4일뒤 정읍에서 들은 이야기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좋은 집을 지으려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만약 그런다면 관아의 관리가 그들을 붙잡고 돈을 내어놓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조선의 관리들 중 ‘공명첩’(이름이 비어있는 관리 임명장)을 돈으로 사서 지방 관리가 되어 재임동안 각종 명목으로 백성의 재산을 약탈해가는 조선사회의 문제점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즉, 전라도가 부유한 곳인데 집이 누추했던 것은 탐관오리들의 수탈을 방지하기 위한 소극적 대응법의 결과였던 것이다. 또한 포크는 삼례 숙소에서 역관인 전양묵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된다. “묵(통역 관리)은 관리들이 부유한 백성을 불러 뇌물을 요구한다고 했다. 이를 거절하면 그들은 매질을 한다. 그런데 백성들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면 오히려 종종 나쁜 관리를 공격해 서울로 쫒겨나게 한다고 했다.” 즉, 포크는 삼례에서 백성들은 탐관오리들의 뇌물 요구가 한계에 달하면 마지막에는 백성들이 스스로 관리들을 공격해 쫒아냈다는 충격적 발언을 듣게된 것이다! 이같은 상황은 10년후 전라도 지역에서 벌어진 ‘동학농민혁명’의 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한 내용이었다. 이같이 풍요로운 전라도를 가난하게 만든 것은 부패한 관리를 양산한 당시 고종-민비정권이었다. 결국 1884년 11월 미국인 포크가 방문한 삼례에서 들은 조선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10년 후인 1894년 11월 삼례 그 자리에서 ‘제폭구민’, ‘척양척왜’를 외치는 동학농민혁명군의 구호와 행동으로 백성 스스로 해결을 모색하게 되었다. /조법종 우석대 교양대 학장

  • 기획
  • 기고
  • 2023.04.03 15:25

[한국전쟁 정전 70년] 낙동강 방어선 전투<하>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북한군 9월 공세의 목표는 Y선(왜관-다부동-영천-기계-포항)이었다. 이를 위해 8월 31일 X선(왜관-남지-마산)의 마산 정면을 먼저 때렸다. 국군과 유엔군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자 북한군 제2군단은 9월 2일 왜관·다부동, 신령·영천, 안강·포항에서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다. 낙동강 방어선의 붕괴 위기가 또 다시 닥쳤다. 유엔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였고 격렬했다. 이때 북한군 작전방침은 “낙동강 일대에 압축된 국군과 유엔군을 두 개의 강력한 타격집단으로 대구 및 영천 일대에서 포위·소멸하여 최종목표인 부산을 점령한다”였다. 김일성도 8월 22일에 전선사령부를 방문해 ‘공세준비에 총력을 경주할 것’을 독전했다. 북한군은 9월 중순까지 공세를 계속했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끝내 방어선을 지켜내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루 동안 미군 1245명 손실 악몽의 날 왜관·다부동은 미 제1기병사단이 국군 제1사단으로부터 방어지역을 인수받아 대구방어를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북한군 제1·3·13사단 등 3개 사단 역시 대구 점령을 위해 총공세를 감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아 모두가 운명의 전투를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수암산 일대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8월 공세 때와 비슷했다. 8월에는 국군 제1사단이 17일 동안의 혈전으로 방어진지를 지켜냈지만, 화력과 기동장비에 의존하는 미군은 단 3일 만에 진지를 북한군에게 내어 주고 4㎞ 후방으로 철수했다. 이제 대구까지 거리는 불과 10㎞였다. 미 제8군에게 9월 5일은 악몽의 날이었다. 이날 하루 미군은 전사 및 행방불명 724명, 전상 521명 등 1245명의 인원 손실이 발생했다. 제8군사령부는 낙동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데이비드슨 선’으로 철수할 것을 검토했다. 그러나 낙동강 방어선 포기는 인천상륙작전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우려가 있었다. 제8군사령부는 어떠한 수단을 강구하더라도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야만 했다. 주 지휘소와 육군본부를 부산으로 이동시키고 대구에는 전방지휘소만 운용했다. 북한군 공격도 그때쯤 한계에 다다랐다. 유엔 공군의 폭격으로 보급 및 병력 부족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집요한 공격을 감행하던 북한군 공격이 12일 무렵 시들해지면서 대구는 지켜졌다. △영천 함락, 낙동강 전선 전체 위기 봉착 9월 들면서 북한군은 다부동을 통한 대구정면보다는 오히려 영천 돌파에 더 치중했다. 당시 영천에는 국군 제2군단의 제6사단과 제1군단의 제8사단이 북한군 제2군단의 2개 사단(제8·15사단)과 대치했다. 2일 밤 북한군 제8사단이 영천 서북쪽의 신령 일대에서 국군 제6사단을 공격하고 북한군 제15사단은 보현산 일대에서 국군 제8사단을 공격했다. 전세가 불리해진 국군 제8사단은 다음날 기룡산 일대로 철수했다. 이 무렵 국군 제8사단 방어선 오른쪽인 운주산 일대는 수도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을 받아 남쪽으로 철수하게 되자, 국군 제8사단의 오른쪽에 약 14㎞의 간격이 형성되었다. 이때 북한군 김무정 제2군단장은 “제12사단은 안강을 돌파했는데 제15사단은 왜 영천을 돌파하지 못하느냐”고 질책하면서 박성철 제15사단장을 해임하고 조광렬 소장으로 교체했다. 박성철 소장이 지휘한 북한군 제15사단은 개전 이래 동락리와 화령장에서 연거푸 국군에게 참패를 당한 부대다. 사단장이 교체된 북한군 제15사단은 국군 제8사단 오른쪽에 형성된 14㎞의 간격을 이용해 아무런 저항 없이 전선 후방으로 침투했다. 이어서 제15사단은 5일 새벽 1시쯤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국군 제8사단을 기습했고, 다음날 새벽 영천을 점령했다. 전광석화였다. 영천은 중앙선과 동해남부선 철도, 대구(34㎞), 포항(40㎞), 경주(28㎞) 등으로 통하는 전략적 교통의 요충지였다. 북한군의 영천 장악은 아군의 중·동부전선 양단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낙동강 전선 전체가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영천을 점령한 북한군 제15사단의 예상 진출로는 대구로 진출하여 제8군사령부 후방을 차단하거나 경주로 진출하여 부산으로 직행하는 것이었다. 북한군이 어느 방향으로 진출하든 유엔군 입장에서는 위기였으나 제15사단이 경주-부산 방향으로 진출할 경우에 유엔군은 다소의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군이 하양-대구 방향으로 진출한다면 대구가 포위되어 제8군의 방어선이 연쇄적으로 붕괴될 위험이 있었다. △북한군의 패착에서 이끌어낸 승리 국군 제1군단과 제2군단의 경계지점인 영천이 돌파되자, 육군본부는 제1군단 소속의 제8사단을 제2군단으로 전환하여 영천 일대의 지휘체제를 정비했다. 위기에 직면한 유재흥 제2군단장 은 예하의 백선엽 제1사단장과 김종오 제6사단장을 소집해 각 사단이 1개 연대씩 차출하여 영천으로 증원하도록 했다. 당시 제1사단과 제6사단도 방어에 급급한 상황이었으나 대안이 없었다. 결국 제1사단 제11연대, 제6사단 제19연대가 영천 지역으로 급파되어 북한군의 대구 진출에 대비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북한군 제15사단은 대구가 아닌 경주 방향으로 진출했다. 때마침 국군 제8사단 제21연대는 적 후방에 고립된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영천 북방의 견부진지(전방 및 측후방을 통제할 수 있고 적의 진출에 있어서 반드시 확보되어야 하는 요충지)를 고수하면서 돌파구 확대를 막고 있었다. 제6사단도 북한군 제8사단의 공격을 계속 격퇴시키고 있었다. 그러자 김무정 북한군 제2군단장은 이번에는 북한군 제8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제8사단이 신령을 돌파하지 못해 영천을 점령한 제15사단의 우측면이 노출되고 있다”고 질책했다. 그러나 국군 제6사단은 끝내 북한군 제8사단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에 따라 상황은 오히려 후방 깊숙이 침투한 북한군 제15사단이 국군에 의해 포위된 상황으로 바뀌었다. 반격태세를 가다듬은 국군 제2군단은 제8사단과 신편된 제7사단을 투입하여 9월 8일 오후 영천을 탈환했다. 9월 공세 당시 영천지역 전투는 8월 공세의 칠곡 다부동 전투와 함께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낙동강 방어전의 분수령이었다. 8월 초에 낙동강 선까지 진격한 북한군은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한다는 목표 아래 총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은 견고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1일~9월 15일까지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집요한 공격을 물리치고 인천상륙적전과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매일신문=이영욱 기자 △도용복 ㈜사라토가 회장이 말하는 다부동 전투 전 세계 190여개국을 다닌 오지여행가로 유명한 도용복(81·사진) ㈜사라토가 회장은 건강하고 활기찼다. 대구 대백프라자 카페서 만난 그는 지인 전시회를 관람하고, 그랜드호텔에서 특강을 하기 위해 대구에 왔다고 했다. 도용복 회장은 음악을 사랑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성공한 사업가로 알려져 있지만, 어린 시절 다부동 전투 현장에서 생사를 오가는 줄타기를 했다. 국민학교 1학년 여덟 살 때였다. "인민군 내려온다는 소식에 피난길에 올랐고, 전쟁통에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저와 어머니, 동생 등 네식구는 우여곡절 끝에 칠곡 다부동 고개를 넘었는데, 그때가 다부동 전투가 벌어지기 불과 며칠 전이었을 겁니다." 어린 나이에 안동서 걸어 다부동까지 온 도용복 소년과 동생들은 배가 너무 고팠다. 어머니도 피난 온 타지서 자식을 챙겨 먹일 마땅한 방도가 없었다. 그때 귀가 번쩍하는 희소식 들렸다. 국군의 총알 나르는 일을 하면 흰쌀밥을 고봉으로 준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소년은 자기보다 큰 지게로 전투가 벌어지는 다부동 고지로 총알을 날랐다. 소년은 고지를 오가면서 군인과 민간인이 죽는 모습을 수없이 봤다. 어느 날 같이 일하던 또래 두 명이 보이지 않았다. 어른에게 물어보니 인민군 총에 맞아 죽었다고 했다. 무서웠다. 그만하겠다고 했다. 도 회장은 "살면서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아세요? 죽음? (고개를 가로저으며) 배고픈 겁니다. (총알 나르는 일을) 안 한다고 작심하고도 아침이 되면 쌀밥 유혹에 또 가는 겁니다"라고 회상했다. 당시 소년에겐 죽음의 두려움보다 배고픔의 고통이 더 컸다. 아침 식전 탄약통 2상자를 왕복 3~4시간 거리의 고지에 나르고 오면 정말 혼자서는 다 못 먹을 양의 쌀밥이 나왔다. 집에서 굶고 있을 어머니와 동생 생각에 호박잎을 따 주먹밥 두덩이를 먼저 만들어 챙겼다. 그렇게 소년은 15일 정도 죽음을 무릅쓰고 다부동 고지에 총알과 전쟁물자를 날랐다. 도 회장은 "(살면서) 무섭고 겁나는 게 없다"고 했다. 어린 시절 사선을 넘나들었던 경험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했다. 특히 그는 참전국에 각별한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참전국 용사들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뜻을 담아 UN참전국송을 만들었고, 꿈의 공연장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서 한국전쟁 전사자를 위한 레퀴엠(진혼곡)을 한미 합창단과 함께 불렀다. "우리 위정자들은 不經一事 不長一智(불경일사 불장일지: 한 가지 일을 거치지 않으면 한 가지 지혜가 자라지 않는다) 구절을 꼭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6·25전쟁을 겪었지만 교훈을 얻지 못하면 같은 불행은 반드시 다시 오기 때문입니다." 매일신문=이영욱 기자

  • 기획
  • 기타
  • 2023.03.27 16:10

[지난 주 '핫클릭' : 19~24일] 전주 천마지구 개발 밑그림 시선집중

△3월 19일~24일 3월 넷째 주, 전북일보 홈페이지는 '전주시 천마지구 개발' 이슈로 뜨거웠다. 방문자들은 전주 천마지구 60%에 달하는 면적을 전북개발공사가 개발하는 내용이 담긴 협약안의 전주시의회 상임위원회 통과를 다룬 백세종 기자의 '전주시·전북개발공사, 천마지구 개발 밑그림'을 가장 많이 읽었다. 관련 속보인 '전주시의회서 제동 걸린 천마지구 개발'도 주목을 받았다. 두 번째는 이종호 기자의 '새만금 국제공항 건설공사 참여 전북업체는?'으로, 이 기사는 5609억원 규모의 새만금 국제공항 건설공사가 지역업체 20% 이상 의무공동도급으로 발주되면서 어떤 업체가 대형건설사와 컨소시엄을 구성할지 증폭되는 관심을 전했다. 세 번째는 한·중 합작법인의 새만금 1조 2000억 투자 계획을 담은 문민주 기자의 'SK온·에코프로, 새만금에 1조 2000억 투자⋯이차전지 전구체 공장 짓는다'가 관심을 끌었다. 이번 새만금 투자 규모는 외국계 기업으로는 역대 최대. 이밖에 이강모 기자의 '새만금에 아시아 최대 영화 촬영장·엔터테인먼트 시설 들어선다', 김윤정 기자의 '부산 가덕도·TK 공항 진수성찬⋯새만금 국제공항은 찬밥', 엄승현 기자의 '2년 5개월 만에 대중교통 마스크 착용 의무 해제 “아직은 어색”' 등이 많이 읽혔다.

  • 기획
  • 이용수
  • 2023.03.25 14:00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