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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후반전, 전북으로 향하다] 돌아오는 사람들…전북, 준비돼 있는가

전북은 오랫동안 사람을 떠나보낸 지역이었다. 산업화가 본격화된 1960~70년대 이후 전북의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과 수도권, 울산·창원 같은 산업도시로 향했다. 농촌의 젊은 인구가 도시로 빠져나가고, 남겨진 지역은 빠르게 늙어갔다. ‘이촌향도’는 전북 사람들에게 너무 익숙한 삶의 흐름이었다. 전주역과 익산역, 고속버스터미널은 늘 떠나는 사람들로 붐볐고, 지역에는 부모 세대만 남는 구조가 반복됐다. 대학 진학과 취업, 결혼과 주거까지 삶의 주요 선택지가 수도권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성공하려면 전북을 떠나야 한다”는 인식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실정이다. 실제 전북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전국에서 가장 가파른 인구 감소를 겪은 지역 가운데 하나다.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가 본격 도입된 2005년 이후 2024년까지 전국에는 약 203조 원 규모의 균형발전 재정이 투입됐지만, 전북 인구는 2005년 186만 명에서 지난 4월 기준 172만 203명까지 감소했다. 21년사이 13만 9797명이 줄어든 셈이다. 도내 14개 시·군 가운데 11곳은 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됐다. 전국 최고 수준이다. △청년은 떠나고…빠르게 흔들린 전북 인구 구조 청년 유출은 이제 전북 인구 문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국가데이터처의 최신 소득이동 분석에 따르면 2023년 비수도권에서 수도권으로 이동한 청년의 평균소득은 1년 사이 22.8% 증가했다. 반면 수도권에서 비수도권으로 이동한 청년의 소득 증가율은 7.6%에 그쳤다. 소득 격차가 청년 이동을 수도권으로 끌어당기는 구조가 통계로 확인된 셈이다. 전북 역시 예외가 아니다.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이동 통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전북 전입 인구는 2만6844명, 전출 인구는 3만5322명으로 8478명이 순유출됐다. 전북의 청년 순유출률은 –1.3%로 전국 평균(–0.5%)의 두 배를 웃돌았다. 순유출 규모는 약 5800명에 달했다. 지역 산업 기반과 양질의 일자리 부족, 광역 교통망 한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청년층 이탈이 장기간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지역 대학 졸업생 상당수가 취업과 동시에 수도권으로 이동하는 흐름도 반복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전북의 인구 감소를 단순한 저출산 현상으로 보지 않는다. 산업과 교통, 생활 인프라가 수도권 중심으로 재편된 결과라는 것이다. 국회미래연구원 관계자는 “청년 인구가 증가한 지역은 대규모 주택 공급과 광역 교통망, 제조·R&D 일자리가 동시에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며 “지역은 단순한 재정 지원만으로 청년 유출을 막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고 말했다.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근 전북에서는 다른 흐름도 나타난다. 산업화 시기 고향을 떠났던 50대 이상 중·장년층 일부가 다시 지역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정년퇴직과 조기퇴직, 부모 돌봄, 수도권의 높은 주거비 부담, 삶의 전환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린 결과다. 이들은 과거의 귀향 세대와는 다르다. 단순히 노후를 보내기 위해 내려오는 은퇴층이 아니다. 수도권 기업과 산업 현장, 공공기관 등에서 오랜 기간 일하며 경험과 기술, 네트워크를 축적한 세대다. 여전히 경제 활동 의지가 강하고, 지역에서 새로운 역할을 찾으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실제 이번 기획에서 만난 정정모 씨는 서울에서 30년 넘게 은행원으로 일하다 임실로 돌아와 조경수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소일거리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일정한 수입이 발생하는 주업이 됐다. 익산 금마에서 마트를 운영하는 김모 씨 역시 수도권 물류업 경력을 바탕으로 귀향 이후 새로운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공통점은 단순한 ‘귀향’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일정한 경력과 자산, 사회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에서 다시 일하고 있었다. 과거처럼 농촌으로 돌아와 은퇴 생활만 하는 흐름과는 성격이 달랐다. △이제 필요한 건 ‘귀향’이 아니라 ‘정착 구조’ 문제는 전북이 이들을 충분히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귀향 이후 지역에서 다시 일하고 싶어도 선택할 수 있는 산업과 일자리가 제한적이고, 재취업과 창업을 연결하는 체계 역시 부족하다. 교통·의료·문화 인프라도 수도권과 격차가 크다. 실제 귀향 이후 다시 수도권과 전북을 오가거나, 정착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례도 적지 않다. 지역 안에서 안정적인 소득과 생활 기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귀환 흐름 역시 일시적 이동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경제인협회 조사에서도 지역 중소기업의 51.4%가 인력 부족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조업은 60% 이상이 인력난을 호소했다. 반면 기업의 절반 이상은 50대 이상 인력 채용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숙련도와 책임감, 장기 근속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결국 지역은 한쪽에서는 인력 부족을 겪고, 다른 한쪽에서는 경험 있는 귀향 인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구조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돌아오느냐보다, 돌아온 사람들이 지역 안에서 다시 역할을 가질 수 있느냐가 꼽힌다. 단순히 고향에 집을 얻어 생활하는 수준을 넘어, 지역 안에서 다시 일하고 소득을 만들며 공동체와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전북의 인구 구조는 이미 변하고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 변화를 지역의 새로운 동력으로 연결할 수 있느냐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 관계자는 “중·장년층 귀환은 단순한 인구 증가 현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지역 산업과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인적 자산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재취업과 창업, 지역 산업 연계, 생활 인프라를 함께 묶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북연구원 관계자 역시 “지금까지 인구 정책이 청년 유입 중심이었다면 앞으로는 돌아온 인구가 실제로 지역에 정착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귀향 세대의 경력과 기술이 지역 안에서 다시 순환될 수 있는 플랫폼 구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기획
  • 이준서
  • 2026.05.14 16:23

[뉴스와 인물] 오양섭 (재)자동차융합기술원장 "전북, 미래 모빌리티 산업 거점으로 대도약”

(재)자동차융합기술원(JIAT)은 우리나라 상용차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가고 있는 국내 대표 기관으로, 미래 모빌리티산업 육성에 필요한 정책 수립과 사업 기획은 물론 글로벌 자동차산업 기술 변화에 대응하고 더 나아가 자동차 및 연관 산업의 발전에 선봉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자동차융합기술원 임직원 모두가 함께 움직이고, 노력한 결과물이라는 평가다. 그 중심에 지난해 5월 부임한 오양섭 원장이 있다. 취임 1주년을 맞은 그는 현대차 완주공장의 중소형 전동화 전략차종 양산, 현대차 그룹 새만금 9조 원 투자 등 전북 자동차산업의 대형 변화를 지역기업 성장의 기회로 연결하고, 미래차 산업을 선도하는 모빌리티 혁신기관으로의 도약을 다시 한번 다짐하고 있다. 오 원장을 만나 향후 자동차융합기술원 운영 방향 및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 - 취임 1주년을 맞았습니다. “취임한 지 어느덧 1년입니다. 지난 1년은 기술원의 방향성을 다시 세우고, 내부를 정비하며, 미래를 준비한 시간이었습니다. 먼저 기술원 운영의 투명성‧효율성‧공익성을 강화하기 위해 본부별 업무 성격에 맞게 팀과 분원을 재배치하고 사업관리와 감사 기능을 강화했습니다. 분리되어 있던 자동차‧특장‧뿌리산업의 기업 지원 창구 단일화(One-Stop 서비스)를 통해 행정 효율성을 극대화했습니다. 국가공모사업 대응과 중장기 재무계획 수립을 위한 2개 TF를 운영했고, 220억 원의 국가공모사업을 수주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재무 건전성 확보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2023년 이후 사업 규모와 예산은 줄어드는 데 운영비는 꾸준히 늘어나 경영 여건이 악화된 상황이었습니다. 취임 후 비상 경영을 선포하였고 전 직원들이 열심히 노력한 결과 세입은 22억 원 늘리고 운영비는 12억 원 절감하는 성과를 얻었습니다.” - 자동차융합기술원에 대한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자동차융합기술원은 전북특별자치도 출연연구기관으로서 자동차산업, 모빌리티산업 및 연관 전·후방 산업의 육성을 목적으로 2003년 1월에 설립되었습니다. 군산•완주•김제에 미래차 및 특장차 시험평가시설과 새만금주행시험장, 자율주행테스트베드 등을 갖추고 있으며 약 130명의 연구원들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기술원은 시험·평가 및 인증, 연구개발(R&D), 엔지니어링 서비스, 기업지원 및 사업화지원, 산업 인프라 구축 및 운영을 통하여 미래차 산업 전환 대응과 지역 전략산업 육성을 선도하는 기관입니다.” - 국내외 자동차 산업의 트렌드에 맞춰 지역사회의 자동차 산업 성장 전략이 있다면. “글로벌 자동차 산업은 전동화,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SDV), 자율주행·AI 융합, 공급망 지역화라는 전환기에 놓여 있습니다. 자동차는 단순한 제조 제품이 아니라 데이터와 서비스가 결합된 ‘움직이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산업의 경쟁력도 하드웨어 중심에서 소프트웨어와 서비스 생태계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습니다. 지역 자동차 산업은 기존의 완성차 제조를 기반으로 상용·특장차, 물류 모빌리티, 자율주행 실증 등 성장 가능성이 높은 분야로 구조 전환이 필요합니다. 특히 자율주행과 물류 모빌리티는 상용차 분야에서 먼저 상용화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관련 산업 생태계 조성이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역 경쟁력의 핵심은 ‘제조 클러스터’에서 ‘실증 중심 모빌리티 클러스터’로의 전환입니다. 자율주행 테스트베드, 물류 실증 노선, 규제 특례 환경 등을 갖춘 지역은 기업과 기술을 끌어들이는 핵심 거점이 될 수 있습니다. 전북 역시 이러한 흐름에 맞춰 실증과 제조가 결합된 미래 모빌리티 산업 거점으로 도약해야 할 시점입니다.” - 군산과 새만금을 중심으로 상용차 자율주행 실증사업이 추진 중인데 현재까지의 성과가 궁금합니다. “상용차 자율주행 실증사업은 국내에서 실증에서 사업화 전환 단계로 진입한 대표 사례이며 연구·실증, 실증 인프라 구축, 상용화 준비라는 세 축에서 의미 있는 진전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선 연구·실증 측면에서는 장거리 물류 환경을 활용한 자율운송 실증이 진행되며 실제 화물 운송 환경에서의 기술 검증이 이뤄졌습니다. 둘째, 차량·도로·관제 시스템을 연결하는 V2X 기반 협력 인프라 구축 등 실증 인프라 구축 성과도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셋째, 상용화 측면에서도 실증사업은 단순 기술 검증을 넘어 물류·항만·산업단지와 연계한 상용 서비스 모델을 준비하는 단계로 진입했습니다. 민간기업과 협업하여 유상 화물운송 서비스 실증을 추진 중이며, 항만·산단 간 자율운송, 스마트 물류, 수요응답형 교통(DRT) 등 자율주행 기반의 대중교통 서비스 도입도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 현대차그룹이 9조원을 새만금에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지역 자동차산업과의 협력 방안은. “현대차그룹 투자는 단순한 완성차 공장 유치가 아니라 AI 데이터센터, 로봇 제조 클러스터, 수소 생산 플랜트, 재생에너지, AI 수소 시티를 포함한 미래기술 산업 거점 구축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자동차 기업이 로봇·AI·에너지 기업으로 확장되는 흐름 속에서 지역 자동차 산업 역시 공급망 중심 전략을 넘어 미래 모빌리티 생태계 참여 전략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우선 AI 데이터센터와 스마트팩토리는 지역 부품기업의 제조 고도화와 생산성 혁신을 촉진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제조·물류·판매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AI 활용이 확대되면 지역 기업은 스마트공장 전환과 품질 경쟁력 확보를 통해 글로벌 공급망 참여 기회를 넓힐 수 있습니다. 수소 에너지 투자 역시 지역 자동차 산업과의 연계성이 매우 큽니다. 수소 모빌리티는 승용차보다 트럭·버스 등 상용차 중심으로 먼저 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상용·특장차 산업과의 협력 기반을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투자가 지역 산업의 기술 고도화와 산업 구조 전환을 이끄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전략적 연계와 상생 모델 마련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자동차융합기술원의 그 동안의 성과와 아쉬운 점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자동차융합기술원은 지난 20여 년간 전북 자동차 산업의 기술 거점으로서 기업 지원, 연구개발, 실증 기반 구축을 통해 지역 산업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특히 중소·중견 부품기업의 시험평가와 기술개발을 지원하며 기업의 품질 경쟁력 향상과 사업 다각화를 이끌었고, 자율주행·친환경차 등 미래차 분야 실증 인프라 구축을 통해 지역 산업의 전환 기반을 마련한 점은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됩니다. 아쉬운 점은 급변하는 자동차 산업 환경 속에서 연구성과의 사업화와 대형 기업 유치로 이어지는 산업 파급효과는 아직 충분하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지역 기업 다수가 영세한 구조를 벗어나지 못해 기술개발 성과가 시장 확대로 연결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앞으로는 실증·연구 중심 역할을 넘어 기업 성장과 투자 유치를 이끄는 산업 플랫폼으로 기능을 확대하고, 미래 모빌리티 생태계 구축을 통해 지역 산업의 질적 도약을 이끄는 것이 과제입니다.” - 도민과 자동차산업 관계자 분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자동차융합기술원은 이제 미래차 전환을 이끄는 핵심 기관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기술원은 전북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지역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든든한 동반자가 되겠습니다. 지역 기업이 성장하고 새로운 기업들이 지역 내에 들어와야 고용이 늘어나고 주민들의 삶이 좋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년의 미래를 위한 준비를 바탕으로 앞으로는 자동차 산업 경쟁력을 높여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겠습니다.” △오양섭 자동차융합기술원 원장은 서울대학교 기계설계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사우스햄튼대학교 기계공학 석사 및 아주대학교 MBA를 취득했다. 현대자동차에서 30년간 근무하며 상용차 R&D와 상용수출부문 임원을 역임한 상용차 전문가로, 자동차 부품사인 나이스엘엠에스 대표이사를 거쳐 제10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 기획
  • 이환규
  • 2026.05.10 13:33

[가족의 재발견] 혈연의 성벽 넘어, 연대와 돌봄의 ‘가족구성권’을 묻다

전통적인 4인 핵가족 모델의 해체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됐다. 통계청 자료가 증명하듯 이미 우리 사회의 가장 주된 가구형태는 1인 가구로 재편되었으며 전북 역시 인구 위기 속에서 가족의 정의가 빠르게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중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와 다르게 우리 사회의 규범과 제도는 여전히 혼인과 혈연이라는 협소한 ‘정상가족’의 성벽 안에 갇혀 현실과의 괴리와 가족형태에 따른 차별을 키우고 있다. 가족은 더 이상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이름표가 아니라,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는 실천으로서 새롭게 정의돼야 한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공동체를 이루고 어떤 형태의 관계라도 차별받지 않을 권리, 즉 ‘가족구성권’은 현대 시민이 누려야 할 가장 본질적인 사회권이자 존엄의 문제다. 지난 20여 년간 이 권리의 실체를 연구해온 성정숙(56) 가족구성권연구소 기획운영위원(사회복지연구소 물결 공동대표)과 최근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정상가족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시민권의 사각지대와 우리가 직시해야 할 가족의 실상을 들여다본다. △ 형태의 다양성인가, 권리의 평등인가 정부와 지자체가 최근 ‘가족다양성’이라는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부모가족, 다문화가족 등을 아우르며 포용적인 정책을 펴는 듯 보이지만 그 기저에는 여전히 견고한 위계가 작동한다. 성정숙 연구위원은 이에 대해 “현재의 가족다양성 담론은 이성애결혼과 혈연중심의 가부장적 가족질서를 유지하며 오히려 친밀성의 다양한 관계들을 ‘취약가족’으로 대상화하는 결과를 빚고 있다“고 꼬집는다. 실제로 정책현장에서 다양성가족은 흔히 말하는 정상가족에서 벗어난 ‘위기가족’으로 목록화 되어 시혜적 서비스의 대상으로만 열거될 뿐이다. 성 위원은 “가족구성권은 단순히 가족의 범위를 확장하는 인정 투쟁이 아니라 국가가 은폐하고 낙인화한 다양한 관계성에 주목하여 시민적 유대와 결속이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토대"라고 설명한다. 가족을 형태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누가 시민의 자격을 얻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다. △240개 법령이 가로막은 ‘돌봄의 권리’ 대한민국 법체계에서 가족을 언급하는 조항은 무려 240여개에 달한다. 민법 제779조와 건강가정기본법이 규정하는 ‘혼인, 혈연, 입양’의 틀은 이 모든 법령의 기준점이 된다. 성 위원은 “이 협소한 정의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은 ‘권리없음’의 비시민으로 격하된다”며 그 실질적인 고통을 증언했다. 법적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수십년을 함께 산 동반자가 응급상황에서 보호자로서 수술동의서에 서명할 수 없고, 상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시신을 인도받거나 장례를 치를 수 없는 현실은 일상적인 차별이다. 그는 “권리 없음은 단지 혜택을 못 받는 차원을 넘어 구체적으로 겪는 고통과 분노, 좌절이다”라며 “일상적으로 세세하게 체험하게 되는 불편함과 불안감이며 핵심적으로는 명백한 사회적 경제 불평등”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정상가족 프레임은 제도 밖의 사람들의 삶을 은폐할 뿐만 아니라, 국가가 책임져야 할 돌봄과 생존의 몫을 사적인 가족의 영역, 특히 여성의 희생으로 전가하는 억압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 가족책임주의라는 비극의 굴레 성 위원은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가족주의’가 빈곤층에게 더욱 잔혹한 굴레로 작용하고 있음을 경고했다.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부양의무자 기준이 대표적이다. 국가가 시민의 생존권을 직접 책임지기 보다 가족을 경유하여 집행하려다 보니, 연락이 끊긴 혈연조차 ‘간주부양비’라는 명목으로 수급자격을 박탈하는 근거가 된다. 과거 송파 세 모녀 사건부터 최근 수원 세 모녀 사건까지 이어진 비극들은 결코 개인의 불운이 아니다. 성 위원은 “가족에게 생존과 복지가 제도적으로 전가되고 가족이 운명공동체로서 강조될수록 가족이 함께 동반자살하거나 자신의 돌봄 몫이라고 생각하는 자녀나 부모를 살해하는 비극적 상황을 막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가족구성권 담론이 국가의 책무를 사적인 가족의 영역에서 공적인 사회의 영역으로 되찾아오는 과정이어야 하는 이유다. △‘생활동반자법’, 서로 돌보는 사회를 위한 안전망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대안으로 가족구성권연구소는 ‘생활동반자등록법’의 필요성을 역설해왔다. 이 법은 성적 지향이나 혈연 여부와 상관없이 실제로 함께 살며 돌봄을 수행하는 관계를 법적으로 승인하려는 시도다. 단순히 동성혼 법제화 논의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생활동반자법은 혼인과 혈연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유대를 맺고 서로 돌보는 시민들의 다채로운 관계를 인정함으로써 생애 과정에서 연결과 유대를 의미화하고 확장하는 제도적 완비”라고 정의했다. 비혼 동거와 노년의 상호 돌봄 관계, 친구 간의 주거 공동체 등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실질적인 돌봄 관계들을 인정하고 지원하는 제도적 조건들을 충분히 확보할 때 비로소 무연고 사회로의 진입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북지역, ‘가족’을 넘어 ‘환대’의 공동체로 성 위원은 전북지역 사회가 직면한 인구 위기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조언을 건넸다. 혼인률과 출산율을 높여 인구를 늘리겠다는 식의 과거 인구정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를 위기 현상으로만 명명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관계와 친밀성의 실천을 어떻게 인정하고 지원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바꿔가야 한다고 했다. 특히 지역사회의 문화적 전환을 강조했다. 그는 “전형적인 가족과 효(孝)만 예찬할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을 옥죄는 가족으로부터 멀어질 권리도 인정해야 한다”며 “가족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가족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이웃과 같이 돌봄을 나누는 ‘가족 너머의 관계’ 에 대한 의미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가부장적인 가족규범에 기대어 화목을 강요하는 분위기에서 벗어나 민주적이고 평화롭게 서로를 돌보자는 제안이다. 인구감소를 정상가족을 재호명하는 것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전북에 정착하는 이주민들이 어떤 형태의 가구로 살아가든 지역공동체의 주민으로서 환대하고 구성원으로서 권리를 공유하는 기반을 닦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전북이 다양한 방식의 상호의존과 돌봄을 실천할 수 있는 환대의 조건들을 만들 때 비로소 사람들은 그곳에 정주하며 새로운 삶을 일궈나갈 것“이라고 제언했다. 가족구성권은 결국 우리가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이다. 혈연의 성벽을 허물고 연대와 돌봄의 손을 잡는 사회. 성정숙 위원이 말하는 ‘가족의 재발견’은 바로 그 평등한 유대와 새로운 시민적 연합의 시작점에 있다.

  • 기획
  • 박은
  • 2026.05.06 19:07

[기획] ‘도지사 관사’의 기억 위에 문화를 지은 ‘하얀양옥집’

전주한옥마을 골목을 걷다 보면, 검은 기와지붕이 이어지는 한옥들 사이로 하얀 집 한 채가 환하게 서 있는 모습이 시선을 붙든다. 그 낯섦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자연스레 멈추게 한다. 이곳은 오랜 세월 전북도지사 관사로 사용되다 이제는 도민들의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한 ‘하얀양옥집’이다. △권위의 담장을 넘어, 도민의 집이 되다 하얀양옥집은 약 50년 동안 전북의 행정을 품어온 공간이다. 1971년 완공된 뒤 첫 5년 동안은 전북은행장, 그 뒤 19년 동안은 전북도 부지사의 관사로 사용됐고, 이후 1995년부터 27년간 도지사 네 명의 살림집으로 쓰였다. 그리고 2022년 6월, 제36대 전북도지사에 취임한 김관영 도지사는 “권위주의를 상징하는 관사를 쓰지 않겠다”며 관사를 도민에게 환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오랜 세월 동안 문턱이 높았던 이 공간은 2024년 5월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대표이사 이경윤, 이하 재단)이 운영을 맡으며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새출발을 알렸다. 문턱을 낮춘 만큼, 보다 친근한 새 이름이 필요했다. 재단은 도민을 대상으로 아이디어를 모았고 그 결과 ‘하얀양옥집’이 25년간 불렸던 관사라는 타이틀을 대신하게 됐다. 당시 검은 지붕의 한옥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었던 탓인지 주민들은 이 집을 ‘하얀집’으로 불렀는데 예전의 그 이름을 다시 되찾은 셈이다. △방마다 새겨진 이름, 공간마다 머무는 이야기 하얀양옥집의 대문을 열고 현관 입구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공간은 전시공간 ‘문턱’이다. 방문객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문턱을 넘을 수 있기를 바라며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을 지나 2층으로 이어진 나무 계단을 오르면 도지사의 집무실을 재현해 놓은 공간 ‘이을’과 마주하게 된다. 과거 도지사들의 헌신과 수고를 기억하며 다음 세대에게 ‘이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방문객들에게 고민하게 만든다. 이곳에 마련된 편지지와 필기도구를 사용해 도지사에게 편지를 보낼 수도 있다. 2층에서 가장 넓은 공간은 응접실 ‘맞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예술을 ‘맞이’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았으며 실제로 예술가의 무대나 토론회 등으로 가장 북적이는 곳이다. 그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공간은 백인의 서재 ‘여럿이’다. 전북도민은 물론 역대 도지사와 예술가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명사 백 명이 추천해 준 도서를 한곳에 모아 놓았다. 독서 공간도 마련되어 누구든 원하는 만큼 머물다 갈 수 있다. 소규모 모임이나 강연도 열 수 있도록 꾸며져, 과거에 사적으로 사용되었던 공간이 오늘날 공적인 사유와 대화의 장이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이렇듯 과거의 기억을 간직한 방들이 오늘날에는 사람과 문화가 머무는 공공의 무대로 새롭게 쓰이고 있다.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기면 바깥으로 연결된 테라스 ‘무렵’으로 전주한옥마을의 돌담길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잠시 바람을 쐬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은 방문객에게 또 다른 여유를 선사한다. △한 가족의 집에서 온 도민의 문화거점으로 하얀양옥집은 개소 이후 현재(지난달 29일 기준)까지 14만 7188명이 방문하며 체류형 지역 문화거점으로서의 존재감을 넓히고 있다. 개소 기념으로 열린 기획전 ‘들턱’(집들이의 순우리말)에서는 하얀양옥집과 ‘동갑’인 1971년생 전북 작가들의 작품을 선정해 도민들에게 선보였고, 이외에도 전주국제영화제, 전주세계소리축제, 전북장애인복지관, 전북여성단체연합, 세이브더칠드런 등 다양한 지역 기관과 협력했다. 테라스 콘서트, 아트마켓, 팝업스토어, 마술쇼, 플리마켓 등 도민이 직접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문화행사도 꾸준히 운영 중이다. 이곳에서는 남녀노소 모두가 문화 향유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기획전시 ‘작은 손 큰 상상’에서는 전주한옥마을에 소재한 전주중앙초등학교 학생들이 직접 작품을 출품했을 뿐 아니라 도슨트까지 맡으며 ‘이웃’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시간을 마련했다. 또한 전북일보의 ‘지역소멸 위기 극복 프로젝트 <청년이장이 떴다> 프로젝트와 관련해 화정마을(완주군)·용평마을(김제시)·월봉마을(고창군)의 어르신 23인과 전북 예술인 6인이 협력한 예술 작품을 전시하며 관람객들의 열띤 호응을 얻기도 했다. 전통유산의 계승과 국제 문화교류의 장으로서도 기능하고 있다.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선자장(전통 부채 제작 기술 보유자)인 김동식·방화선 장인과 함께 복합 문화 콘텐츠(판소리, 합죽선 제작 시연, 관객 참여형 토크 등)를 진행하며 도민들에게 전통문화를 알렸다. 또한, 한지 공예 전문가인 김혜미자 장인과 함께 진행한 일본 가나자와시市 와의 교류 및 한국-몽골 국제 문화예술 교류 기획행사 등을 통해 전북 문화를 세계로 알리는 데 노력했다. 재단은 또한 지난 2년간 축적한 사업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올해에도 국내외 문화 교류 프로그램을 꾸준히 선보일 계획이다. 오는 하반기부터 국립공원공단 서부지역본부·전북여성단체연합·전북특별자치도 등과 협력하여 지역 문화거점으로서의 소임을 다한다. 이외에도 어린이·가족을 위한 참여형 전시 등을 기획하여 도민 누구나 일상 속에서 문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재단의 목표이다. 하얀양옥집은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 10시~18시까지 운영하며 월요일은 휴관한다.

  • 기획
  • 전현아
  • 2026.05.03 13:49

[뉴스와 인물]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금융인프라 서둘러야…전북, 지금이 마지막 기회”

국민연금공단 김성주 이사장이 전북금융도시 조성과 관련해 강한 위기의식을 드러냈다. 특히 김 이사장은 전북도 등 지자체를 향해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기회를 놓친다”며 책임있는 자세를 요구했다. 전북일보는 김 이사장을 만나 현 전북금융도시 구상과 당면한 문제에 대해 들어봤다. -전북일보와 이번 인터뷰를 진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최근 정치 상황 때문이다. 지방선거 이후 금융 중심지 추진 방향을 처음부터 설명하고 다시 맞춰야 하는 상황으로 보인다. 시간이 없다. 6월이면 용역이 끝나고 바로 금융 중심지 지정 논의가 시작될 수 있고, 2차 공공기관 이전도 같이 진행될 수 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전북금융중심지 관련 정책이 부각되지 않아 답답한 심정이다. 어찌 보면 지금이 전북도의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국민연금의 규모와 위상은 훨씬 커졌다. 기금운용 방향도 달라졌다. “8년 전 제가 처음 이사장을 맡았을 때 기금 규모는 약 600조 원 수준이었다. 지금은 1500조 원을 돌파해 2.5배 이상 성장했다. 이제 국민연금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글로벌 탑티어 연기금’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글로벌 투자 다변화이다. 기금 규모가 앞으로 3,600조 원 이상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투자 포트폴리오를 더욱 다양화해야 한다. 현재 선진국 중심의 투자에서 , 해외 사무소를 확대하고 운용 역량을 강화해 신흥시장까지 투자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 둘째는 유니버설 오너로서 책임투자를 강화하는 것이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 자산을 맡은 기관이다. 투자한 기업이 투명하게 경영되고 기업 가치가 올라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건 기업에 대한 간섭이 아니라, 안정적인 수익을 확보하기 위한 당연한 주주활동이다. 셋째는 기금운용 인프라 확충이다. 다섯 번째 해외 사무소를 포함해 투자 다변화를 위해 조직을 강화할 계획이다. 아울러 인공지능(AI)과 딥러닝 기술을 활용해 뉴스나 정치적 위험 같은 비정형 데이터를 분석하여 국가와 기업에 대한 조기경보 시스템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금융 중심지 추진의 어려운 점은. “금융 중심지 신청의 주체는 국민연금이 아니다. 전북도다. 서울과 부산도 지자체가 계획을 세우고 정책을 추진했다. 그런데 전북도는 국민연금만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우리는 이미 할 일을 하고 있다. 실제 여러 금융사들이 전북에 진출하고 있고 이것은 분명한 성과다. 반면 전북도와 전주시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지자체는 인프라를 만들고 기업과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그게 지자체 역할이다” -전북도가 제안한 ‘전북 패스포트’ 구상에 대해서도 견해를 듣고 싶다. “제안 소식을 듣고 의아했다. 그것은 전북도가 아니라 국민연금이 해야 하는 일이다. 지자체는 지금 해야하는 정책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위탁운용사 선정 및 관리는 기금운용에 있어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핵심 업무이다. 전문 기관인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가 안정적인 수익 제고를 위한 다양한 요소를 반영해 심도 있게 검토해서 결정해야 할 사안이다. 공단은 금융생태계 조성을 위하여 현재 TF를 구성하여 운영 중이다. 국가계약법 등 법률에 위배사항이 없도록 법률검토와 함께 자산운용사 대상 설문조사와 의견 수렴을 진행하고 있다. 이 TF를 통해 올해 상반기까지 구체안을 만들어낼 것이다” -국민연금과 거래를 하고 있음에도 금융기관이 전북에 오지 않는 이유는. “기업들이 만나면 똑같은 얘기를 한다. ‘사무실이 없다’, ‘주거 환경이 불안하다’, ‘비용이 비싸다’는 거다. ‘입주할 건물도 없는데 어떻게 오냐’, ‘비싼 돈 내고 전주 갈 바에는 차라리 서울에 있겠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금융사 입장에서는 직원들이 내려오기 싫어한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 기존 생활 기반을 바꾸기 싫기 때문이다. 사기업 직원에게 전주에 오는걸 강요한다면 결국 직원이 떠난다. 결국 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다. 지자체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의무가 있다” -전북금융도시 지정에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인가. “세 가지를 이야기 하고 싶다. 업무 공간, 주거, 교통이다. 전북 국제금융센터는 10년 넘게 추진됐는데 아직 설계 단계이다. 빨리 해야 한다. 주거 문제도 심각하다. 질 좋고 저렴한 공공주택 공급이 필요하다. 이건 지자체가 해야 할 일이다. 전북혁신도시의 주택 임대료가 서울 강남 다음으로 높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실정이다. 교통도 문제다. 혁신도시 내부 대중교통도 부족하고 전주역·익산역과의 연결도 불편하다. 지난 국민연금 이사장 때 전북혁신도시를 수소 시범도시로 지정해 수소 버스를 운행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정책 실현도 되지 않고 있다. 이 세 가지가 해결되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최근 국내외 금융사들이 전북, 특히 전북혁신도시를 찾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이사장 취임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 “대통령께서 강조하는 지방이 주도하는 성장 전략과 국민연금을 중심으로 하는 전북 금융생태계 조성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제가 이사장으로 다시 와서 1월에 전주에 사무소를 설치한 국내·외 자산운용사 대표들과 간담회를 개최했고,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직접 듣고, 논의했다. 전주 사무소 개소, 인력 배치 등은 전적으로 금융회사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고,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저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중요함을 강조한 일관된 메시지를 냈다. 최근에 KB, 신한, 우리, 하나금융이 차례로 응답해 전북 금융거점 조성을 발표했다. 이들은 전주에 상주하며 국민연금과 함께 글로벌 투자 기회를 발굴하고, 세계 최고의 금융 기법을 이곳 전주에서 공유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전주를 ‘자산운용 금융 도시‘로 변모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금융 생태계 조성의 핵심은 무엇인가. “사무실 몇 개냐, 몇 명이 왔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와서 무엇을 하느냐’이다. 구체적으로는 다양한 세미나, 컨퍼런스를 통해 투자 정보가 오가야 한다. 전주에 가면 글로벌 투자자들이 모이고 어디서든 투자 이야기가 나오는 환경이 돼야 한다. 개인 투자자와 기업들이 전주에 가면 금융정보를 얻을 수 있고 그것이 수익이 될 수 있게 해야 한다. 결국 금융도시는 단순히 기관이 오는 게 아니라 정보와 사람이 모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시장에 대한 정보이고 그 다음에 잘 운영하고 있는지에 대한 점검이다. 예를 들면 ‘이란 전쟁 때문에 지금 어떤 위기가 생기고 있고 우리는 이걸 어떻게 해야 될지’, ‘AI 관련된 투자에서 높은 수익률이 예상되는 새로운 투자 기회를 찾았다’이런 정보가 돌아야 한다” -전주 금융 생태계를 어떻게 활성화할 계획인가. “앞으로 운용사 선정 기준과 관련해 변화된 방향을 보여줄 것이다. 상당히 큰 변화가 될 것이다. 애널리스트들이 전주에 와서 국민연금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런 시장을 유망하게 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그걸 국민연금만 듣는 게 아니다. 이미 전주에 내려와 있는 금융사 직원들도 함께 듣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세미나와 컨퍼런스를 계속 열 것이다. 전주에 오면 자연스럽게 그런 정보를 듣고 교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은 여의도에서 듣던 고급 정보를 굳이 전주까지 와서 들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앞으로는 ‘그 정보를 들으려면 전주에 가야 한다’는 환경을 만들 것이다. 국민연금에 와야만 들을 수 있는 정보가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일반 국민과 지역 주민들도 참여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지금은 전 국민 투자자 시대다. 전주에 가면 유명 애널리스트나 전문가들이 와서 투자 전략을 이야기하는 공간이 언제나 넘치게 될 것이다. 결국 ‘전주로 가야 정보가 있다’는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금융도시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국민연금에게 지역 상생은 단순히 평가를 위한 항목이 아니라, 전북에 뿌리를 내린 기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전북도민들은 실패 경험이 많아서 쉽게 믿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국민연금 전북이전도 처음에는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이다. 시간이 걸릴 수는 있지만 방향을 정하고 가면 반드시 간다. 문제는 중간에 포기하는 거다. 이재명 대통령의 등장으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금융도시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의지를 갖고 있다. 이제는 이 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정책이 나와야 한다.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평가받는 전북도에서 금융으로 성과를 낼 수 있다면, 국가 균형발전의 모범 사례가 될 것이다. 전주라는 지방 도시에서 글로벌 기금 운용이 이뤄지고, 독립적인 금융 거점으로 자리 잡는 모델을 만들고 싶다. 전북도에서 시작된 금융이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하나의 모델이 되는 것이 목표이다” -2차 공공기관 지방이전이 추진되고 있다. 전북 금융도시 조성을 위해 추가적으로 필요한 기관 유치는 무엇인가. “지난번 임기 때도 필요 기관에 대해 조사해서 보고했다. 전북 혁신도시를 자산운용 중심 금융도시로 만들려면 자산운용 기관들이 모여야 한다. 구체적으로 연기금이 같이 와야 한다.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 같은 연기금들이 함께 모여야 한다. 공제회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주요 8대 공제회라고 얘기하는데, 이런 기관들이 함께 있어야 정보도 교류되고 인적 네트워크도 만들어진다. 같이 모여야 실제 운용에 도움이 된다. 전주에 가면 기금운용에 어려움이 생길 거라고 걱정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국민연금이 이미 보여줬다. 따로 떨어져 있으면 효과가 없다. 국민연금 혼자 있는 구조로는 금융 생태계가 만들어지기 어렵다” -정치권과 지자체에 하고 싶은 말은. “지금 준비해야 한다. 선거 이후가 아니라 지금 공약 단계에서부터 금융 인프라 조성 계획을 내놔야 한다. 누가 당선이 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당선되는 사람이 무엇을 할 것이냐가 중요하다. 지금 시기에 공약으로 답을 내놔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이 국민연금에게는 큰 힘이 되고 있다. 그러나 전북특별자치도를 비롯한 지자체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오라고 했으면 전북도가 책임져야 한다. 가라고 했으면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국민연금은 역할을 다할 것이다. 실제 많은 것들이 바뀌고 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 기획
  • 김경수
  • 2026.04.26 13:53

[뉴스와 인물] 정지영 감독 “이름 없는 ‘제주 4‧3’에 제 이름 찾아줘야죠“

1988년 서울의 한 극장가에 느닷없이 뱀이 풀렸다. 미국영화 직접배급에 반대하며 한국영화의 생존권을 지키려던 영화인들의 처절한 저항, 이른바 ‘뱀 투척사건’이다. 투쟁의 선봉에는 서슬 퍼런 기개의 젊은 감독 정지영이 있었다. 당시 투쟁위원회를 이끌던 감독은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옥고를 치러냈다. 이후 사람들은 그를 ‘투사’라고 불렀고 그의 카메라는 권력의 치부를 들춰내는 날카로운 창이 됐다. 그로부터 40여년이 흐른 2026년. 여든의 세월을 관통한 그가 다시 우리 앞에 섰다. 78여년 전 제주에서 소리 없이 잊혀진 ‘이름들’을 보듬고서 말이다. 김근태 의원의 고통을 통해 시대의 야만을 고발했던 영화 <남영동 1985>가 폐쇄된 공간 속 고문의 밀도에 집중했다면 신작 <내 이름은>은 폭력이 할퀴고 간 역사의 광범위한 ‘상흔’을 응시한다. 궁금했다. 평생 권력의 치부와 사회의 부조리에 날선 카메라를 들이대 온 그가, 왜 지금 가장 아픈 역사의 상처를 헤집을까. 그리고 최고령 현역 감독을 지탱하는 뜨거운 동력의 실체는 무엇일까. 지난 21일 전북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정지영(80) 감독은 물리적인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팽팽한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정제된 문장을 헤집고 들어가 마주한 것은 청년의 심장을 가진 ‘현역 감독 정지영’이었다. -78년 전의 비극인 제주 4‧3을 지금 감독님의 시선으로 다시 꺼내든 이유는 무엇인가요? “너무 늦었지요. 많은 감독이 다큐멘터리로, 예술영화로 4‧3사건을 다뤘지만 대중영화로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만큼 일반 대중들과 이 문제를 공유하기가 내용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는 의미겠지요. 이제는 그 문턱을 넘어 많은 이들과 아픔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4‧3의 비극은 그간 ‘집단의 고통’으로 그려질 때가 많았습니다. 이번 영화에서 ‘개인의 이름’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관점에 집중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반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려면 개인사적인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집단적인 국가폭력의 문제를 끌어낼 때, 관객들은 비로소 그 비극을 ‘나의 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영화 제목이 <내 이름은>입니다. 뒤에 생략된 문장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제목을 통해 누구의 이름을 되찾아주고 싶으셨나요? “뒤에 생략된 것은 이름 석자입니다. ‘내 이름은... 정지영!’ 같은 식이죠. 하지만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역사적 사건은 다 이름이 있지요. 3‧1독립운동,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그러나 4‧3은 여전히 이름을 정하지 못한 채 ‘4‧3사건’이라 부릅니다. 누구는 폭동이라 하고, 누구는 봉기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이름을 찾아줄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려면 우리 모두가 4‧3을 깊이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 출발을 영화 <내 이름은>을 보는 것으로 시작하면 어떨까요?” -수많은 증언과 사료 중에서 영화적 허구를 더해서라도 반드시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단 하나의 진실된 장면이 있을 것 같습니다. “4‧3이라는 국가폭력으로 3만여 명이 희생당했지만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를 명확하게 가려내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피해자이면서 누군가에게는 가해자가 된 이들, 반대로 가해자인데 깊게 들여다보면 피해자인 이들이 엉켜있는 것이 진실입니다. 그런 생각을 안고 영화를 보시면 제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된 장면’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역사의 비극을 다루며 ‘관객의 몰입’과 ‘희생자에 대한 예의’ 사이에서 가장 고민했던 지점은 무엇인가요? “과거를 찾아가는 미스터리적인 기법을 활용했습니다. 이를 통해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고자 했지요. 일단 영화에 몰입하고 나면 관객은 스스로 희생자의 편에 서서 그 아픔을 공유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것이 희생자에 대한 가장 깊은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작비가 시민들의 펀딩으로 모였습니다. 수만 명의 ‘제작자’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감독님께는 남다른 책임감으로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책임감이 정말 무거웠지요. 하지만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작비를 모아준 시민들에게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온 스태프와 연기자가 어느 때보다 열과 성을 다해 임했습니다.” -제76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영화 <내 이름은>을 관람한 외국 관객들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국적을 불문하고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관객이 함께 상처를 공유하는 것을 보고 저 역시 감동했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많은 이들이 전쟁과 폭력에 직면해 있습니다. 4·3이 드러내고 있는 폭력은 모든 나라가 겪었거나 겪고 있는 보편적인 비극임을 깨달았습니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영화를 관람하셨습니다. 이 영화가 우리 사회에 어떤 숙제를 던진다고 생각하시나요? “대통령께서는 국가폭력에 관한 한 징벌에 대한 시효가 있어서는 안 될 범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3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토대로 우리 사회는 비극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의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이 영화가 던지는 숙제일 것입니다.” -감독님 이름 앞에는 이른바 ‘사회파 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40여 년간 싸우는 영화를 만들어오셨는데, 조금 편안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담고 싶다는 유혹은 없으셨나요? “그렇게 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러기엔 여전히 12·3 내란과 같은 비극이 반복되고 있네요. 제발 역사가 뒷걸음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정지영 감독님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에너지가 뭔지 궁금합니다. ‘부조리에 대한 분노’일까요? 아니면 ‘인간에 대한 애정’인가요? “분노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분노가 없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무관심 또는 외면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제 분노의 뿌리는 항상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나옵니다." -최고령 현역 영화감독이십니다. 촬영 현장에서 젊은 스태프들과 의견이 충돌할 때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갈등은 어떻게 해결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의견이 다르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건 작품을 풍성하게 하는 영양소입니다. 저는 제 의견을 열어놓고 많은 이들과 토론하기를 좋아합니다.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작품을 만드는 스타일입니다.” - '투사' 혹은 ‘거장’이라는 수식어 뒤에 숨겨진 인간 정지영만의 부드러운 면모가 있다면요? “나를 가까이서 접한 연기자와 스태프들은 제가 겉으로는 냉정해 보여도 더없이 약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걸 잘 알 겁니다. 투사나 거장이라는 수식어는 사실 정지영의 외피일 뿐이죠." -훗날 사람들이 정지영을 어떻게 기억하길 원하십니까? “치열하지 않게, 그러나 진솔하게 자신의 화두를 많은 이와 나누고 싶어 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독보적이고 천재적인 예술가가 아니라, 그저 많은 이들과 함께 호흡하고 싶어 했던 대중을 사랑한 영화감독으로 남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전북일보 독자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정지영은 언제나 여러분과 나란히, 혹은 한 발자국 정도 앞서 걷고 싶어 하는 영화감독입니다. 영화 <내 이름은>을 꼭 보시고 영화가 던진 화두에 대해 마구 비판하거나 동조하며 치열하게 왈가왈부해 주세요.” 정지영 감독과의 서면 인터뷰를 정리하며 인상 깊었던 것은 분노와 애정을 동일시하는 그의 세계관이었다. 80세의 현역 감독은 세상을 향해 뜨겁게 화를 내고 있었고, 그 화의 본질은 ‘사람을 향한 사랑’이었다. 그는 이번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잊고 지낸 이름은 무엇이며 당신의 애정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고 말이다. △정지영 감독은 1946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졸업 후 1982년 영화계에 데뷔했다. 영화 <남부군> <하얀 전쟁> 등으로 한국 사회파 영화의 지평을 열며 거장으로 우뚝 섰다. 1988년 UIP 직배(직접배급) 저지 투쟁 당시 ‘뱀 투척 사건’의 총책임자로 옥고를 치르는 등 스크린 쿼터 사수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이후 영화 <부러진 화살>과 <남영동 1985>를 통해 날 선 사회적 통찰을 증명하며 시대와 호흡하는 저력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현재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가장 나이 많은 현역 연출가라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 기획
  • 박은
  • 2026.04.23 16:43

[동학농민혁명 세계기록유산 미등재 기록물] 노정약기(路程畧記)

△백범 김구와의 만남과 만주 동행 <노정약기(路程畧記)>는 전라도 남원 출신 김형진(金亨鎭, 이명 봉회[鳳會]‧형모[炯模], 자 원명[元明], 1861~1898)의 동학농민군 활동과 이후 행적에 관한 자서전 기록이다. 김형진은 1894년 남원성 전투에서 패하자 피신해 여러 곳을 떠돌다가 1895년 5월 황해도 신천의 청계동 진사 안태훈(안중근의 아버지)을 찾아갔다. 그는 안태훈의 집에서 며칠 동안 기거하게 되었는데, 그 집 사랑채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안동 김씨 종씨인 김구(김창수)를 만났다. 동학농민군 출신인 김형진은 황해도 동학농민군 토벌의 중심에 있던 안태훈을 만나는 상황을 ‘우연히’ 신천에 가게 되었다고만 간단히 기술하고만 있을 뿐 특별한 언급은 없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참빗장수로 변장한 김형진이 자신은 남원군 이동에 살고 있는데, 삼남에서도 신천 청계동 안 진사는 당세 대문장‧대영웅의 풍문이 있어 만나보고자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 김형진은 김구와 의기투합하여 그의 집으로 가서 ‘고통과 기쁨을 같이하며 서양과 왜를 물리칠 계획을 의논’하였다. 논의 결과 함께 중국행을 결정하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 백두산을 유람한 후에 동북 삼성을 지나 중국 수도 베이징까지 가기로 계획하고 출발하였다. 두 사람은 참빗과 필묵 등을 한 짐씩 지고 장사꾼 행색으로 변장하여 재령-중화-평양을 거쳐 함경도 고원-영흥-정평-함흥-북청-단천-갑산-혜산진-후창-자성(중강)을 지나 드디어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길림성 통화현 모아산에 도착하였다. <노정약기>에 의하면 통화현을 지나 북쪽으로 1천여 리를 걸어 심양의 서쪽 금주(錦州)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곳에서 김형진과 김구는 행적을 의심한 현지 군인들에게 포박되어 ‘마통령(馬統領)’으로 불린 마대인을 만나게 된다. 이때 김형진은 의병을 모아 강포한 왜적을 좇아 싸우다가 패하여 ‘부모의 나라’인 상국(중국)으로 망명하러 왔다고 설명하였다. 이들의 기개를 지켜본 마대인은 결박을 풀어주었고 며칠간 그곳에서 머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현지 지방관으로부터 망명 허락을 받지 못하고 귀국길에 올라 7월 다시 청계동으로 되돌아왔고 김형진은 이후 김구의 집에서 한 달 넘게 머물렀다. 청계로 되돌아온 후 김형진은 김구를 통해 이항로 계열의 화서학파로 안태훈의 초청으로 신천에 와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던 고능선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김구도 ‘고산림(高山林)’으로 불리던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면서 학문과 인품에 큰 감화를 받았다. 김형진은 ‘평생 마음으로 왜와 서양을 배척하여 서양 옷을 입지 않았고 집에는 서양 물건을 들이지 않았다’고 그에 대한 첫인상을 기록하면서 그에게 중국에 다녀온 이야기를 전했고, 이후 늘 교유하면서 서로 간에 뜻이 통하였다고 한다. 김형진은 그를 ‘정말로 바르게 배운 군자’로 기억하였다. 이때의 만남과 스승과 제자로서의 교감은 이후 김형진의 의병 활동을 전적으로 지배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중 연합의진 구상의 현실화 이 무렵 김형진은 ‘왜놈의 화가 날로 달라지고 달로 극성스럽게 되었다’고 한탄하면서 김구와 의병을 일으킬 계책을 의논하였으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가 8월 민왕후 살해사건, 즉 을미사변 직후였다. 그는 김구에게 여비를 마련하여 중국에 다시 들어갈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김구는 할아버지의 사촌 형제인 김재희에게 이 말을 전하였고 안악 사람인 최창조로부터 여비 100여 냥을 마련하여 그해 9월 12일에 제2차 중국행에 오르게 되었다. 함경도로 우회했던 제1차와는 달리 이번에는 단거리 직행 길을 채택하였다. 즉, 문화-안악-용강-강서-평양을 거쳐 안주와 삭주를 지나 압록강에 이르렀다. 도강 이후 두 사람은 심양에 도착한 후 그곳에 유람하고 있던 강서 출신 최연순과 해주 출신 김성찬 등과 함께 연명으로 관동 연왕 이크탕가(依克唐阿)에게 편지를 썼다. 이크탕가는 청일전쟁 후반 평양으로 출동하다가 청국군의 패전 소식을 듣고 구련성을 방어하면서 남만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대적하였고 이후 ‘성경장군(盛京將軍)’에 임명된 만주 지역 최고 사령관이었다. 특이한 점은 김형진은 자신들을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생들’이라 표현하여 동학농민군을 ‘의병’으로 규정하고 있다. “지난겨울부터 올봄까지 왜와 수십 차례 싸움을 해서 수천 명의 왜놈을 죽이고 식량 길을 끊었으나”라는 표현도 1894년 말부터 1895년 초까지 반일을 기치로 한 제2차 동학농민혁명에 적극 참여하였음을 언급한 것이다. 편지에서는 청일전쟁 직후 조선과 청국이 처한 공통의 현실과 일본이 주도한 갑오개혁의 전면 부정과 그들에 의한 농민군의 탄압에 대한 비판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나아가 경복궁 점령 이후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격퇴를 위해 1895년 가을 추수기 이후를 기점으로 한 조선과 청국의 반일 연합군 편성에 관한 구체적 내용을 제의하였다. 이에 이크탕가는 매우 기뻐하여 술과 고기로 융숭히 대접하고 그곳에 머물도록 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남아서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는 좌우의 만류를 무릅쓰고 귀국을 결심하였다. 연왕은 진동영(鎭東營)의 쉬칭장(徐慶璋)에게 공문을 보내 의논한 후 청국군이 후일 조선에 들어갈 때 서로 통할 신표를 삼고자 ‘보군도통령(步軍都統領)’과 ‘금자영기(金字令旗)’ 한 쌍을 내어주었다. 김구는 ‘의병 좌통령’의 직함을 받았다. <노정약기>에는 김형진과 김구가 쉬칭장과 결의하고 그의 배려로 진동영에서 설을 쇠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백범일지>에는 김이언 의병 실패 직후에 돌아온 것으로 기록하여 양자 간 차이가 있으나 이후 상황으로 보면 적어도 11월 무렵에는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김형진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가 피신 과정에서 김구를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여 의병으로 전환하였다. 을미의병으로의 변신이었다. 척사위정론을 견지하던 고능선의 교화를 받은 그 역시 초기 의병의 일반적 모습과 같이 ‘소중화’ 의식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이는 제2차 중국행 시 이크탕가에게 전한 편지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이전 동학농민군에 적극 참여하였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한중 연합 의병이라는 국제적 연대의 모색 노력이 엿보인다. 김구와 김형진의 선행작업은 을미의병 종결 이후 의병장 유인석의 서간도 망명을 유도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기 운동의 역사에서 김형진은 상호 대척점에 있던 두 계열에 대한 큰 거리낌 없이 서로 넘나들면서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독특한 차별성이 나타난다. <노정약기>는 백범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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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4.20 17:09

[전북특별자치도선거관리위원회 ‧ 전북일보 공동기획] “연고주의 대신 정책과 공약으로 투표해야”

전북특별자치도선거관리위원회 ‧ 전북일보 공동기획=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40여 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본격적인 선거 국면에 접어들었다.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혈연·학연·지연·친소관계 등 연고주의는 유권자의 합리적인 선택을 방해하는 주요 요인이다. 유권자가 연고주의에서 벗어나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후보자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파악하고, 제시된 정책과 공약을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후보자의 정책과 공약을 면밀히 살펴 가장 적합한 인물을 선택을 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정책선거다. 이에 전북일보는 전북특별자치도선거관리위원회와 유권자들의 선택을 돕기위해 정책선거란 무엇인지, 그리고 좋은 정책을 내놓은 후보를 어떻게 뽑아야하는 지 등에 대해 살펴봤다. ◇ 정책선거의 의의와 가치-공약 제시에서 사후 평가까지 정책선거란(policy election) 정당이나 후보자가 구체적인 정책과 공약을 제시하고, 유권자는 이를 기준으로 투표하는 것을 말한다. 유권자들이 각 후보자가 제시하는 정책을 바탕으로 이들을 평가하고 자신의 이익과 사회의 미래에 가장 적합한 대안을 선택하는 정책선거의 실현은 선거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 민주주의의 이상이자 그 질(質)을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선거에 참여하는 정당과 후보자는 유권자에게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공약을 제시해야 하며, 유권자는 제시된 공약들을 상호 비교하여 투표권을 행사해야 한다. 나아가 유권자는 투표에만 그치지 않고 당선인의 공약 이행 여부를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평가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다음 선거의 객관적인 판단 기준으로 작용할 때, 정책 중심의 선거 문화는 비로소 정착될 수 있다. ◇ 정책선거의 조건-유권자가 살펴봐야 할 ‘좋은 공약’ 정당·후보자가 실현 가능성이 낮은 공약을 제시한다면 정책선거는 올바르게 정착될 수 없다. ‘좋은 공약’은 내용이 명료하고 구체적이어야 하며, 차별성이 분명하고 실현 가능한 계획을 담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요건을 갖춘 정책과 공약은 유권자의 합리적인 선택을 돕는다. 그러면 유권자가 확인해야 할 ‘좋은 공약’을 찾기 위한 체크리스트는 무엇일까. 지난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발간한 ‘제21대 대통령 선거 분석을 통한 정책선거 발전 연구’ 자료에 따르면, 먼저 ‘명료성과 구체성’을 따져봐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정확히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무엇을 새로 만들겠다는 것인지 공약의 내용이 이해하기 쉽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차별성과 선명성’ 즉 다른 후보와 무엇이 다른 지도 살펴봐야한다. 정책과 공약의 차별성이 뚜렷하고, 지향하는 가치가 선명한 공약이 좋은 공약이다. 아무리 좋은 공약이더라도 ‘실현가능성’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사업에 필요한 재원 조달 계획, 법적·제도적 뒷받침 등 구체적 실현 계획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사후 평가도 중요하다. ‘평가 가능성’을 통해 유권자와의 약속을 지켰는지 확인할수 있느냐는 것도 좋은 공약이 완성되는 기틀이 된다. 정책의 내용과 효과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정책 공약집, 전문가 검증, 시민단체 평가 등을 통해 확인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유권자를 위한 정책·공약 확인 방법 그러면 똑똑한 유권자를 위한 정책과 공약이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가장 쉬운 방법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정책공약마당 사이트’를 활용하는 것이 있다. 중앙선관위는 정당과 후보자의 정책 정보를 한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책·공약마당(https://policy.nec.go.kr)’ 운영하며 유권자의 알 권리를 보장한다. 정책·공약마당은 크게 △정당 정책 확인하기 △당선인 공약 확인하기 △공약 이슈트리 확인하기 △ 정책선거 바로알기로 구성된다. 특히, ‘공약 이슈트리’는 언론 기사 빅데이터를 분석하여 지역별 주요 관심 분야와 핵심 키워드를 시각화하여 제공한다. 이는 유권자가 지역 현안을 쉽고 빠르게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는 정당·후보자·유권자가 관심 지역의 공약 이슈를 키워드를 통해 쉽고 빠르게 파악할 수 있게 하여 정당·후보자의 정책·공약 개발을 지원하고, 유권자가 정책선거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또, ‘희망공약 제안’은 국민 누구나 국가와 지역사회에 필요한 정책 아이디어를 구체적인 공약 형태로 제안하는 창구다. 유권자가 제안한 내용은 후보자가 실제 선거 공약으로 채택하거나, 당선인이 의정 활동을 통해 정책 의제로 구체화할 수 있다. 아울러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중앙선관위에서는 유권자의 참여를 통한 정책선거 분위기 조성을 위해 ‘유권자 희망공약 제안’이벤트를 개최 중이다. 이벤트 기간은 3월 27일부터 5월 15일까지이며, 참여를 원하는 유권자는 정책·공약마당 홈페이지(https://policy.nec.go.kr) 내 ‘희망공약 제안하기’ 코너에서 희망공약을 작성하면 된다. 후보자 토론회를 면밀하게 시청하는 것도 ‘좋은 공약’ 찾기에 도움이 된다. 후보자 토론회는 참석한 후보자의 공약을 한자리에서 비교·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특히 상호 토론을 통해 공약의 허점과 실현 가능성을 점검함으로써, 후보자 간 차별성을 판단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내리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후보자 토론회는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https://www.debates.go.kr)와 유튜브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생중계되며, 다시보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를 통해 유권자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후보자의 공약과 정책을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전북특별자치도지사 및 도교육감선거를 비롯해 각 시장·군수 등의 후보자를 대상으로 한 대담·토론회가 순차적으로 개최될 예정이다. 매세대로 배달되는 선거공보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후보자의 인적 사항뿐만 아니라 정책과 공약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료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선거공보는 5월 24일까지 각 가정으로 발송될 예정이다. 유권자는 선거공보에 제시된 공약의 구체성과 재원 조달 방안 등을 살펴봄으로써 정책의 실현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정책선거-유권자의 선택으로 만드는 ‘내가 살고 싶은 우리 지역’ 정책 중심의 선거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후보자는 실현 가능한 정책을 제시하고, 언론과 시민단체는 이를 철저히 확인해 유권자의 올바른 선택을 도와야 한다. 선거관리위원회 역시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고 정책 중심의 선거 문화 정착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사전투표는 5월 29일과 30일 이틀간이며, 본 투표는 6월 3일 실시된다. 유권자가 공약을 면밀히 살펴 행사한 소중한 한 표는 ‘내가 살고 싶은 우리 지역’의 미래를 결정한다. 선관위 관계자는 “이번 선거가 연고주의를 넘어 실현 가능한 정책과 공약으로 후보자를 선택하는 건전한 정책선거 문화 확립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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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세종
  • 2026.04.19 15:05

[천년의 종이, 전북의 내일을 쓰다] 기록을 수호하는 한지의 과학과 현장

본보는 앞선 연재를 통해 유네스코 등재를 향한 흐름(1편)과 전북의 자연이 빚어낸 탄생 과정(2편)을 짚었다. 이제 시선은 완성된 한지가 세상에서 어떤 ‘증명’을 해내고 있는지로 향한다. 한지는 만들어지는 찰나의 미학보다, 수백 년의 고독을 묵묵히 견뎌내는 순간에 그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을 보관하는 서고는 적막하다. 빛은 철저히 차단되고, 온도와 습도는 일정하게 유지된다. 이곳에서 한지는 단순히 쌓여 있는 데이터가 아니라, 세심하게 ‘관리’되는 유물이다. 시간은 기록을 훼손하는 적이 아니라, 어떤 재료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보존의 역사가 될 수도, 소멸의 흔적이 될 수도 있다. 이곳에서 전북의 한지는 단순한 전통 종이를 넘어, 전 세계 문화재 복원의 새로운 표준이자 기록 수호의 최후 보루로 서 있다. △ 닥섬유가 직조한 ‘보존 과학’의 정점 한지가 서구의 양지(洋紙)를 압도하는 생명력을 지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존 과학의 관점에서 한지는 인류가 발명한 가장 완벽에 가까운 중성지(中性紙)로 꼽힌다. 첫 번째 비밀은 ‘산도(pH)의 안정성’에 있다. 일반적인 복사지나 신문지는 제조 과정에서 표백제와 화학 약품이 대량 투입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산성화된다. 이 과정에서 종이 스스로가 타 들어가는 ‘황변 현상’이 발생하며, 수명은 길어야 50~100년에 그친다. 반면, 전북의 전통 방식으로 제작된 한지는 천연 알칼리성 제액을 사용하는 덕분에 산성화를 늦춘다. 이는 곧 천년이 지나도 바스러지지 않는 생명력의 근거가 된다. 두 번째는 ‘섬유 구조의 결합력’이다. 닥나무의 긴 섬유(장섬유)를 ‘외발뜨기’ 방식으로 얽히게 만드는 한지의 구조는 일반 종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짧은 섬유를 압축해 만드는 양지가 외부 충격에 취약한 반면, 사방으로 그물망처럼 얽힌 한지는 반복적인 접힘과 인장 강도에서 압도적인 내구성을 보여준다. △ 전북의 한지, 국가유산의 결을 잇는 행정의 힘 이러한 과학적 우수성은 행정의 체계적인 뒷받침을 통해 실전 현장으로 확장되고 있다. 최근 전주한지가 창덕궁 연경당의 대규모 복원 공사(약 815㎡)에 투입된 것은 지역 행정력이 일궈낸 값진 성과다. 약 1만 장의 전통 한지가 국가유산의 원형을 복원하는 데 사용됐는데, 이는 지역이 꾸준히 추진해온 ‘전통한지 생산시설 구축’과 ‘품질 표준화’ 작업이 결실을 맺은 사례다. 글로벌 무대에서의 활약도 눈부시다. 전주시는 이미 루브르 박물관과 이탈리아 베네치아 국립 마르차나 도서관 등과 협력하며 전북의 한지를 세계적 고문서 복원지의 표준으로 각인시키고 있다. 완주 소양의 대승한지마을 역시 원형 한지 제조 공법을 고수하며, 기록 보존을 위한 원형 공급지로서 전북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 역설: 박물관을 넘어 일상으로 흐르는 ‘손 한지’의 온기 하지만 이러한 ‘탁월한 보존성’은 역설적으로 한지를 일상에서 멀어지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 값싸고 대량 생산이 가능한 종이가 시장을 장악하면서, 한지는 ‘복원’과 ‘문화재’라는 특수한 영역 속에 박제되었다. 1990년대 전국 100여 곳에 달했던 전통 한지 공방은 현재 20여 곳 남짓으로 급감했다. 도내에서도 장인들의 고령화와 원료 자급률 저하로 생산 기반이 흔들리는 냉정한 현실이 지표로 증명된다. 이에 전주문화재단 한지산업팀은 이 지점에서 ‘제조 산업으로서의 한지’에 주목한다. 재단 관계자는 “한지 산업은 결국 제조가 기반이 돼야 한다"며 "최근 서예나 민화 인구가 늘어나며 한지의 수요도 함께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전주한지’라는 브랜드가 가진 가치가 높아 시장의 수요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접근성이었다. 개별 제조업 공장에서 일반 소비자가 소량의 종이를 구매하기란 구조적으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재단은 전주 한지 전문 숍인 ‘손 한지 판매장’을 운영 중이다. 이곳은 전주 한지를 종류별로 한눈에 비교 분석하고 구매할 수 있는 플랫폼 역할을 하며,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높은 문턱을 낮추고 있다. 이와 더불어 재단은 한지를 박물관 유리창 너머로 감상하는 대상이 아닌, 직접 만지고 즐기는 대상으로 되돌려놓기 위해 행정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매년 열리는 ‘전주한지축제’를 통해 다양한 체험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최근에는 ‘한지 운동회’라는 콘텐츠를 선보였다. 한지를 단순히 쓰는 종이가 아니라 ‘놀이기구’로 활용하는 이 시도는 어린 세대들에게 한지를 친밀한 생활 소재로 인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재단 관계자는 “한지를 통해 뛰고 놀며 몸으로 익힌 기억은 다음 세대가 한지를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기반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지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디지털 데이터조차 수십 년의 저장 수명을 장담할 수 없는 시대에, 스스로 무너지지 않고 천년의 기록을 온전히 품어내는 재료는 한지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한지는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지금도 전북의 공방과 행정 현장에서 숨 쉬며 작동하는 고도의 기술이다. 기획은 이 지점에서 다시 묻는다. 세계가 인정하고 과학이 증명한 이 완벽한 재료가, 왜 우리의 삶 속에서는 사라져가고 있는가. 본보는 앞으로 이 종이를 직접 만드는 현장, 즉 장인들의 거친 손마디와 뜨거운 삶의 궤적을 쫓는다. 한지의 명맥을 이어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계보가 어떻게 이어지고 혹은 위태롭게 끊어지고 있는지를 생생히 기록할 예정이다.

  • 기획
  • 전현아
  • 2026.04.15 19:06

[핫플레이스] 고창의 매력, 머무름으로 완성되다…사계절 ‘핫 플레이스 6선’ 주목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이 ‘머무는 관광지’로의 전환을 본격화하며 사계절 체류형 관광지로 빠르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유구한 역사, 여기에 체험과 휴양이 결합된 관광 콘텐츠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단순히 ‘보고 가는 관광’을 넘어 ‘머물며 경험하는 여행지’로 변모하고 있다. 과거 ‘당일 코스’에 머물렀던 관광 패턴은 점차 ‘1박 2일 이상 체류형’으로 바뀌고 있으며, 이는 관광의 질적 변화는 물론 지역경제의 구조까지 바꾸는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고창은 세계적 가치의 자연유산과 전통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으로, 생태와 문화, 휴식이 결합된 복합 관광지로 주목받는다. 고창갯벌과 농경지, 산림이 어우러진 생태환경은 지속가능한 관광의 기반이 되고 있으며, 여기에 전통문화와 지역 특색이 더해져 ‘고창만의 관광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다. 관광객들은 단순한 소비를 넘어 지역의 삶과 문화를 체험하는 데 높은 가치를 두기 시작했고, 이는 체류시간 증가와 재방문율 상승으로 이어지는 긍정적 순환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같은 변화의 중심에는 고창을 대표하는 ‘핫 플레이스 6선’이 있다. 자연·역사·체험·휴양이라는 네 축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들 명소는 계절과 세대를 아우르며 관광객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각각의 공간은 독립적인 매력을 지니면서도 동선상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 관광객들이 자연스럽게 하루 이상의 일정을 계획하도록 유도하는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선운사 먼저 고창 관광의 출발점으로 손꼽히는 선운사는 천년의 시간을 품은 고찰로, 사계절마다 전혀 다른 풍경을 선사하며 방문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봄이면 붉게 피어나는 동백꽃이 사찰 경내를 물들이며 장관을 이루고, 여름에는 울창한 숲과 계곡이 어우러져 짙은 녹음 속 시원한 쉼터가 된다. 가을에는 형형색색의 단풍이 산사를 감싸며 전국적인 명소로 절정을 이루고, 겨울에는 고요한 설경 속에서 한층 깊은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특히 최근에는 도솔암과 참당암 일대를 중심으로 명상과 산행을 결합한 힐링 관광이 주목받고 있다.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차분해지고,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된다. 이처럼 선운사는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자연과 역사, 그리고 정신적 치유가 어우러진 공간으로 자리 잡으며, ‘쉼과 사색의 여행지’로서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고창읍성 역사 체험의 중심에는 고창읍성이 자리한다. 조선 단종 원년에 축성된 이 성곽은 원형 보존 상태가 뛰어나 국내 대표 읍성으로 평가받는다. 성을 따라 걷는 ‘답성놀이’는 소원을 빌며 한 바퀴를 도는 전통 체험으로,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고창 시가지 풍경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독특한 장면을 연출하며, 단순 관람을 넘어 참여형 역사 콘텐츠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가족 단위 방문객과 체험형 여행객들에게 특히 높은 만족도를 제공하고 있다. 동호해수욕장 서해의 바람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지던 시절, 동호해수욕장의 백사장은 단순한 휴식처를 넘어 가족의 추억이 쌓이던 삶의 공간이었다. 4~50년 전 여름이면 부모의 손을 잡고 찾았던 모래밭에서는 모래찜질이 자연스러운 놀이였고, 따뜻하게 데워진 모래 속에 몸을 묻으며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른들은 그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아이들은 갯벌과 백사장을 오가며 하루를 온전히 바다에 맡겼다. 서해안의 낭만을 품은 동호해수욕장은 자연 속 휴양을 대표하는 공간이다. 완만한 수심과 넓은 백사장, 갯벌 체험이 가능한 환경은 아이를 동반한 가족 관광객에게 최적의 조건을 제공한다. 특히 해 질 녘 펼쳐지는 낙조는 고창 여행의 상징적 장면으로 꼽히며, 사진 촬영 명소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에는 캠핑과 차박 문화가 확산되면서 젊은 층의 방문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으며, 세대 간 관광 수요를 연결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청보리밭 봄철 고창 관광의 정점은 단연 고창 청보리밭 축제가 열리는 청보리밭이다. 드넓게 펼쳐진 보리밭은 푸른 빛의 융단처럼 이어지며, 바람이 스칠 때마다 물결처럼 일렁이는 장관을 연출한다. 특히 이국적인 풍경과 탁 트인 시야는 사진작가와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어들이며 전국적인 촬영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축제 기간에는 보리밭 걷기, 농촌체험, 지역 특산물 판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돼 방문객들에게 풍성한 즐길거리를 제공한다. 매년 수십만 명이 찾는 이 축제는 지역 상권에 활력을 불어넣고, 숙박·음식업 등 연관 산업에도 긍정적인 파급효과를 미치고 있다. 자연경관과 지역문화, 체험 콘텐츠가 어우러진 고창 청보리밭은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고창의 정체성과 브랜드 가치를 전국에 알리는 대표적인 계절형 관광자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상하농원 체험형 관광의 중심에는 상하농원이 있다. 농업과 식품, 관광이 결합된 6차 산업 모델을 구현한 이곳은 단순한 체험 공간을 넘어 ‘머무는 농촌’을 실현하고 있다. 유제품 생산 과정 체험, 전통 식품 만들기, 농촌 생활 프로그램 등 다양한 콘텐츠는 방문객들에게 농업의 가치와 즐거움을 동시에 전달한다. 숙박시설과 식음시설이 함께 운영되면서 가족 단위 관광객의 체류 시간을 자연스럽게 늘리고 있으며, 지역 농업과 관광을 연결하는 성공 사례로 평가받는다. 웰파크호텔·석정온천 고창 체류형 관광의 완성은 결국 ‘휴식’에 있다. 여행의 만족도를 좌우하는 마지막 퍼즐은 편안한 쉼이며, 이를 가장 잘 구현한 공간이 바로 웰파크호텔과 석정온천이다. 이곳은 천연 게르마늄 온천수를 활용한 스파 시설과 쾌적한 현대식 숙박환경을 결합해 단순한 숙박을 넘어 치유와 재충전의 시간을 제공한다. 온천욕을 통해 쌓인 피로를 풀고, 자연 속에서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점은 고창만의 강점으로 꼽힌다. 특히 건강과 웰빙을 중시하는 최근 관광 트렌드와 맞물리며 중장년층은 물론, 힐링과 감성을 추구하는 젊은 층에게도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 머무는 여행, 쉬어가는 관광이라는 흐름 속에서 이곳은 고창 체류형 관광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처럼 고창은 자연·역사·체험·휴양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관광 구조를 통해 체류형 관광지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 각각의 명소는 개별적인 경쟁력을 갖추면서도 상호 연계를 통해 관광 동선을 확장시키고 있으며, 이는 관광객의 체류시간 증가와 소비 확대라는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관광이 지역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인근 내장산과 축령산 편백숲 등과의 접근성도 뛰어나 광역 관광 코스 개발 가능성 역시 높게 평가된다. 고창을 중심으로 한 체류형 관광 벨트가 점차 구체화되면서, 전북 서남권 관광의 중심축으로서 역할도 강화되고 있다. 고창군은 앞으로 계절별 축제 확대와 관광 인프라 확충, 체험 프로그램 다양화를 통해 체류형 관광 전략을 더욱 고도화할 계획이다. 자연과 문화, 사람이 어우러진 고창의 관광 경쟁력은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으며, 그 변화의 중심에는 ‘머무름’이라는 새로운 관광 패러다임이 자리하고 있다.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여행지가 아닌, 머물며 기억을 쌓는 공간으로서 고창의 가치는 앞으로 더욱 빛을 발할 것으로 기대된다.

  • 기획
  • 박현표
  • 2026.04.09 19:14

[전북에서 시작한 선택, 새로운 기업이 되다] 키펫 설동준 대표 “수의사가 추천하면 믿고 선택하는 브랜드”

전북대 수의학과를 나온 수의사 출신 청년창업가인 키펫의 설동준(33) 대표는 기능성과 흡수율을 함께 고려한 해양 기반 펫푸드로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단순한 원료 경쟁을 넘어 실제 체내 활용성과 지속 가능한 유통 구조까지 함께 설계한 점이 특징이다. 키펫은 단순히 ‘좋은 사료’를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 반려동물의 건강 변화로 이어질 수 있는 제품을 목표로 시장에 접근하고 있다. 설 대표는 “좋은 원료를 썼다는 표현과 실제 건강 개선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문제였다”며 “단순히 성분만으로 제품을 판단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느꼈고, 제품을 만들게 됐다”고 강조했다. “좋은 사료”의 기준을 다시 묻다…성분이 아닌 ‘흡수’ 기존 펫푸드 시장은 ‘좋은 원료’ 경쟁에 집중돼 있었다. 설 대표는 이러한 기준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다. 반려동물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성분 자체보다 체내에서 얼마나 활용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이에 키펫은 생체 이용률을 높이는 방향에 집중했고, 기능성이 실제 효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를 제품 개발의 핵심으로 삼았다. 설 대표는 “단순히 좋은 성분을 사용하는 것을 넘어, 실제 체내에서 얼마나 흡수되고 작용하는지를 중요하게 보고 있다”며 “기능성이 실제 효과로 이어지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해양 원료·할랄 인증…처음부터 글로벌 기준으로 설계 키펫의 주력 제품인 ‘할짝(halzzack)’은 육류 중심 사료에서 벗어나 해양 단백질과 오메가 지방산을 기반으로 구성됐다. 이는 알러지 부담을 낮추고 기능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할랄 인증 기준을 반영해 해외 시장까지 고려한 설계다. 이 같은 원료 전략은 단순 수출을 위한 접근이 아니라, 초기 단계부터 글로벌 시장을 전제로 제품을 설계한 결과다. 또한 또다른 주력상품인 덴탈츄 제품은 농심과 함께 개발됐다. 덴탈츄는 구취나 플라그 예방이 주 목적이다. 설 대표는 “원료 선정과 생산 과정 전반에 걸쳐 할랄 인증 기준을 반영했다”며 “해외 시장까지 고려한 제품 설계를 진행했다. 제품 설계 단계에서부터 유통기한과 안전성을 충분히 확보해 보호자와 병원 모두가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큰 차별점이다”며 “단순히 성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임상 환경에서의 피드백과 테스트를 기반으로 제품을 개선해왔다. 기호성 테스트와 반복적인 사용 데이터를 통해 피부나 소화기 관련 개선 사례 등 보호자가 체감할 수 있는 결과를 축적했다”고 설명했다. 창업으로 확인한 현실…‘좋은 취지’만으로는 부족했다 설 대표는 학생 시절 구독 서비스를 운영하며 사업의 현실을 직접 경험했다. 당시 그는 제품 품질과 별개로 유통과 폐기, 운영 구조가 맞지 않으면 지속이 어렵다는 점을 체감했다. 이 같은 경험은 단순히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을 넘어, ‘지속 가능한 구조’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설 대표는 “좋은 취지와는 별개로, 지속 가능하게 운영하기 어려운 모델이라는 점이 분명했었다”며 “유통과 운영 구조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새로운 사업에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결국 선택은 신뢰”…수의사 경험 통한 소비자 겨냥 키펫은 광고 중심이 아닌, 수의사와 병원을 기반으로 한 소비 구조에 주목했다. 반려동물 식품은 전문가 의견이 구매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판단에서다. 이에 따라 설 대표는 ‘설명 가능한 제품’과 ‘실제 효과’를 중심으로 신뢰를 구축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는 수의사로서의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접근이다. 설 대표는 “단순 광고보다는 동물병원 상담과 전문가 의견을 기반으로 구매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며 “전문가의 신뢰를 기반으로 한 소비가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수의사로 일하면서 단순히 질환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 보호자들이 어떤 기준으로 제품을 선택하고, 어떤 부분에서 신뢰를 느끼는지를 가까이에서 지속적으로 관찰해왔다. 특히 같은 질환을 가진 환자라도 식이 관리에 따라 경과가 크게 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제품 하나가 임상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결국 남는 건 반복 구매”…검증으로 승부 키펫의 제품들은 유통 안정성과 기능성을 동시에 확보해 병원과 보호자가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임상 기반 피드백과 반복 테스트를 통해 제품을 개선하며 재구매 구조를 구축하고 있다. 이는 단순 마케팅이 아닌 ‘사용 경험’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설 대표는 “사용해보면 차이를 느끼는 제품이라는 점에서 가장 큰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반복 사용을 통해 소비자의 신뢰를 쌓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전북청년창업사관학교’에서 배운 사업의 기초 설 대표는 창업 초기 시행착오를 겪은 이후,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전북지역본부의 전북청년창업사관학교를 통해 사업을 구조적으로 바라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시장 분석과 단위 경제성, 확장 전략 등을 데이터 기반으로 정리하면서 사업 방향이 명확해졌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설 대표는 “초기에는 임상 경험을 기반으로 제품을 기획하고 운영했지만, 사업을 체계적으로 설계하고 운영해본 경험은 부족했다”며 “전북청년창업사관학교에서는 이러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고, 시장 규모 산정, 단위 경제성 분석, 확장 전략 설계 등 그동안 감각적으로 접근했던 영역을 데이터 기반으로 구조화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교수님들과 매니저님들께서 매우 성심성의껏 참여 기업을 지원해주시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며 “단순한 교육을 넘어 실제 사업에 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피드백과 방향성을 제시해주셨다. 결과적으로 운영 경험이 부족했던 초기 단계에서 사업을 빠르게 정리하고 성장 방향을 명확히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업 “잘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계속하는 것” 설 대표는 향후 제품 라인 확대와 해외 시장 진출, 헬스케어 플랫폼 구축 등 단계별 성장을 계획하고 있다. 그는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지속’을 꼽았다. 설 대표는 “저희는 처음부터 국내에 국한된 사업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을 전제로 사업을 설계하고 있다”며 “결국 사업은 ‘잘하는 것’보다 ‘계속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너무 완벽하려고 하기보다는 일단 시작하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해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고 웃음 지었다.

  • 기획
  • 김경수
  • 2026.04.08 17:12

[동학농민혁명 세계기록유산 미등재 기록물] 충남 태안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문장준역사’와 ‘창산후인 조석헌역사’

충남 태안은 충청도에서 가장 격렬히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었고 단일지역에서 매우 많은 동학농민군이 사망한 곳이다. 태안지역 동학농민군은 9월 기포 이후 10월 28일 홍주성전투에 이르는 전과정에 참여하였는데, 그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 <문장준역사(文章峻歷史)>와 <창산후인 조석헌역사(昌山后人 曺錫憲歷史)>에 담겨 있다. 특히 이들 기록물이 중요한 것은 동학농민혁명 이후 생존한 동학농민군들의 삶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장준·조석헌 두 사람 모두 1894년 11월 일본군이 태안지역에 들이닥쳐 동학농민군을 체포·처형하는 피바람이 부는 과정에서도 어렵게 살아 남아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이어갔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문장준역사>는 충남 서산군 원북면 방갈리에서 출생한 문장준이 1894년 9월부터 1923년까지 직접 체험한 주요 사실들을 국한문체로 양면괘지 15면에 담아 냈다. 세월의 무게에 비해 많은 기록분량은 아니다. 이 기록은 충남 내포지역에서 자신이 체험한 동학 활동을 간추린 것으로, 태안 동학군 지도자들의 기포상황과 태안관아 공격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홍주성 패전 후의 도피생활과 1897년 이후의 동학 지방조직 재건과정, 1906년 이후의 천도교 지방조직 등을 요약 기술하여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이 기록물에 따르면, 문장준(?-1923)은 태안의 동학농민혁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한 인물이다. 그는 1894년 2월에 예포 대접주 상암 박희인의 지도로 동학에 입도하였다. 갑오년 기포 당시 동학 육임의 직임 중에 도집(都執)을 맡고 있었다. 방갈리 접주인 문장로(8촌 간)의 접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월 1일에 태안에서 기포한 뒤 내포지역 동학농민군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10월 24일 승전곡전투, 홍주관아에서 파견한 관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 10월 26일 예산 신례원 관작리전투, 충남 내포지역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최대 전투였던 10월 28일 홍주성전투 등에 참전하였다. 다행히 이들 전투에서 살아남아 해미를 거쳐 무사히 집에 돌아왔으나, 일본군이 태안에 온 11월 15일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서산을 거쳐 보령 수영 감옥에 갇혀 있다가 11월 23일경 석방되어 다시 집에 올 수 있었다. 그러나 갈수록 민보군의 만행이 거세지자, 김선여를 비롯한 동지 5명과 가족을 데리고 태안에서 배를 타고 구사일생으로 피신하여 이리저리 떠돌다가 광덕산 만복골 등지에서 피난 생활을 하였다. 이때 문장준과 같이 광덕산 만복골로 피신한 동학농민군은 이영규(1863-1915), 김봉호(1872-1954), 이선종(1875-1958), 함한석(1870-1938) 등이 있었다. 광덕산 만복골은 산이 높지 않으면서도 깊은 계곡으로 이루어진 곳인데, 태안에서 피신한 동학농민군들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집단 생활을 하다 다시 태안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또는 아산・예산 등지로 옮겨 살았다. 그러다 예산 간양리에 최종 정착한 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1923년에 노환으로 작고하였다. 다행히 이와 같은 사실은 문장준이 1923년 사망하기 직전에 자신이 직접 체험한 태안 동학농민혁명의 기억을 <문장준 역사>라는 기록으로 남겨놓아 오늘에 전하고 있다. <창산후인 조석헌역사> 역시 1862년 11월에 서산군 원북면 신두리에서 태어난 조석헌이 1894년부터 1918년까지 경험한 공사관계를 양면괘지 142면 분량으로 정리한 회고담이다. 이 기록물은 1908년 11월에 처음 정리한 초고본을 1931년에 재정리하였다. 개정본에서는 초고본을 보완하면서 국문 표기들을 한자표기로 고쳐 성명과 지명을 알아보기 쉽게 했다. 주로 1894년 10월에 태안·서산에서 기포한 과정과 여러 전투 상황은 물론, 1895년 이후의 해월 최시형의 도피과정, 그리고 동학 지도부의 동학 재건활동, 1906년 후의 천도교 충남 서부지역 활동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1895년 이후 해월의 피신경로는 어느 기록보다 자세하여 동학 후기사 연구에 좋은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이 기록물에 따르면, 조석헌(1862-1931)은 서산군 원북면 신두리에서 오위장(五衛將)까지 지낸 조응진(曺應振)의 네째로 태어나 자작농으로 넉넉한 생활을 하여 왔다. 1894년 3월에 동학에 입도하여 5월에 접주가 됐으며, 1894년 10월 기포부터 참전해 승전곡전투→신례원전투→홍주성전투 등에 참가한 뒤 혼자 떠돌다 우연히 대접주 박희인을 만나 같이 동행하면서 지극정성으로 박인호를 모시면서 동학의 맥을 이어갔다. 데 그러나 그의 도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한 때는 천안 목천 남면 초정리와 경북 상주 화북면 장암리 등등 여러 곳에 숨어살며 모진 고생을 겪었다. 그런 와중에도 대접주 상암 박희인의 뜻을 받들어 해월 최시형의 은신처를 찾아다니며 서해지방의 여러 산물들을 공급하는가 하면 연락 임무도 담당했었다. 해월 최시형이 순도한 후인 1898년부터는 동학 재건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는 이곳저곳을 옮겨 살면서 끝내 태안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1915년에 예산 간양리에 정착하여 천도교에 헌신하였다. 1923년경에는 천도교 예산군 종리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31년에 동학과 함께 한 생애를 마감하였다. 다행히 힘겹고 불안한 삶 속에서도, 그는 1908년부터 세 차례 수정 보완하여 태안 동학농민혁명과정과 그 이후 행적을 정리한 <조석헌 역사> 전기를 남겨놓았다. 이 기록물은 태안 동학농민혁명의 진실을 말해주는 기억의 창고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이처럼 <문장준 역사>와 <창산후인 조석헌역사>는 태안 동학농민혁명사를 구체적으로 증언해주는 기록물로서 매우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이에 기초하여 태안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과 성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태안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더 생생히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의 회고담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태안 동학도들이 목숨 바쳐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은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는 인내천의 나라, 모든 사람이 주인이 되는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이들 기록물은 동학농민혁명 태안기념사업회(회장 문영식)에서 2006년에 <북접일기-태안접주 조석헌과 문장준의 동학농민혁명 일기>로 번역 출판하였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아카이브에도 탑재되어 있어 누구나 손쉽게 활용할 수 있다. 특히 이들 기록물은 동학농민혁명에서 생존한 동학농민군의 생애 회고담이라는 점에서 활용도가 높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전후 역사를 통사적으로 볼 수 있다는 점, 생존한 동학농민혁명의 삶이 어떠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다는 점, 동학이 천도교로 발전한 밑바탕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 동학농민혁명 이후 파란만장한 근현대 역사 파도 위에서 민초들의 피나는 역경과 눈물겨운 삶을 반추해 볼 수 있다는 점 등은 이 기록물이 가지고 있는 큰 사료적 가치가 아닐 수 없다. 다만, 회고담이라는 점, 그래서 주관적인 측면이 있고 생략되거나 망실된 부분들이 있고 상암 박희인의 활동에 국한되어 있는 점 등은 기록물이 가지고 있는 한계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들 기록물의 가치는 여전하다. 이들 기록물을 기반으로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두 사람의 삶을 재조명한 다큐멘터리나, 근현대 역사를 헤쳐나가는 두 사람의 투쟁적인 삶과 역경을 보여주는 영화가 제작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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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4.07 08:42

[뉴스와인물] 이승필 대표 “전북도민의 문화적 자부심 일궈내겠다"

생의 매 순간을 뜨거운 신명으로 채우는 사람. 맑은 표정과 눈빛에서 나오는 에너지는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 동력의 실체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 “내가 원하는 삶이야?” 시간은 누구에게나 한정돼 있다는 무서운 진리를 깨친 덕분이다. 이승필(62)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 이름 앞에 붙는 ‘예술경영인’ 같은 정체성이 이를 증명한다. 청년 시절, 농과대학 진학을 후회하며 ‘가지 않은 길’을 선망했기에 이후의 삶은 그렇게 만들지 않으리라 몸부림친 결과일지도 모른다. 현재 그를 설명하는 주된 수식어는 여수 예울마루를 예술의 섬으로 일궈낸 주역, 전략가이자 시 쓰는 인문학자인데 이것도 범상치 않다. 대기업 입사 이후 사회공헌팀장과 GS칼텍스 재단 사무국장을 거친 그는 지방 발령을 자청했다. 그렇게 2012년부터 12년 동안 여수 GS칼텍스 예울마루 신규 조성 책임자와 초대관장으로 지내며 남해안권 거점 문화공간으로 안착시켰다. 지난 1일 전당에서 만난 이승필 대표는 자신을 “공간 경영 전문가”라고 소개했다. “어느 도시공학자가 말했어요. 도시가 어떻게 시민을 환대하는가에 따라 시민과 도시가 변화한다고요. 저 역시 공간이 어떻게 관객을 환대하는가를 고민해요. 사람과 공간은 상호작용을 하는 관계거든요.” 공간에 입힐 애티튜드를 만들어내는 것 역시 그의 몫. 그러니 공간마다 그의 철학이 담길 수밖에 없다. 조직 운영과 경영 방식에서도 그만의 서사가 있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존중의 가치를 제1의 원칙으로 삼는다. 관객과 조직 구성원을 대할 때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겠다는 의지이다. 이제는 전당에 오는 관객들이 행복함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 대표. 앞으로 그가 일궈낼 전당의 미래를 물었다.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제5대 대표로 취임하신 지 한 달입니다. 지난 시간을 어떻게 보내셨나요? “통과의례 같기도 하지만 전임자 송별식부터 주요 부서 업무파악‧구성원 면담, 기관장 방문인사 등으로 분주했습니다. 취임식과 언론 접촉 등을 통해 전당의 새로운 비전을 공유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실감나는 한 달이었습니다.” -대기업에서의 조직관리 경험과 예울마루에서의 현장 경륜이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어떤 시너지를 낼까요? “국내 예술계에서 설계와 시공부터 초기 세팅, 그리고 12년의 경영까지 한 호흡으로 책임져본 케이스는 드물 겁니다. 대기업 시절 기술과 마케팅, 노사관계 등 조직 관리의 근육을 키웠던 세월이 밑거름이 됐습니다. 제게 현장은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전문성을 증명할 가장 확실한 무대라고 생각합니다.” -풍부한 현장 경험 때문일까요. 취임하자마자 하드웨어 업그레이드를 핵심 소명 중 하나로 꼽으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공간 혁신을 꿈꾸시나요? “어느 건축전문가가 준공 25년이 지난 건물을 사람 몸에 비유하니 ‘일흔 살’에 해당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예울마루를 직접 짓고 관리해본 경험에 비춰봐도 그렇습니다. 공연장의 첨단 전자부품들은 5년만 지나도 부품수급이 어려워지고, 10년이면 내장재를 교체해야 하는 주기가 돌아옵니다. 그런데 전당은 지난 25년 동안 부분적인 유지보수만 있었을 뿐, 전면적인 리모델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그 시기가 목전에 와 있습니다. 다행히 전북도와 전북도의회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공감해주셔서 올해 리모델링을 위한 기초 용역 예산을 확보했습니다.” -리모델링을 하려면 예산 확보가 관건일 텐데, 구체적인 계획이 있으십니까? “최소 500억 원 이상의 대규모 예산이 투입될 것으로 보입니다. 한꺼번에 진행하기에는 운영 여건상 제약이 크기 때문에, 마스터플랜을 세워 단계적으로 수술을 집도하려 합니다. 방향은 명확합니다. 21세기 기술 변화를 온전히 수용하되 철저하게 ‘고객 중심’과 ‘효율 우위’의 공간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여수 예울마루 시공 경험이 전당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가장 확실한 설계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 수준의 공연 유치를 언급하셨습니다. 예산 확보 등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도 왜 이러한 콘텐츠가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전당은 연간 70건 이상의 기획사업을 치러낸 저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양적 성장을 넘어 전북의 열망과 보조를 맞춰야 합니다. 특히 2036년 전주올림픽을 ‘K-컬쳐 올림픽’으로 유치하려는 도민들의 염원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전북을 주목하게 할 강력한 한방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를 ‘들여오는 기획’과 ‘나가는 기획’이라는 투트랙 전략으로 풀어나갈 생각입니다." -들여오는 기획과 나가는 기획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신다면 “‘들여오는 기획’은 도민의 문화적 자부심을 단숨에 끌어올리는 작업입니다. 지난 25년간 전당 무대에서 접하지 못한 세계 3대 오케스트라(베를린·빈·뉴욕 필하모닉) 유치를 꿈꿉니다. 조성진이나 임윤찬 같은 아티스트의 음악이 전주에서 울려 퍼질 때 그 감동은 ‘지역의 품격’으로 치환될 것입니다. 반대로 ‘나가는 기획’은 우리 원형 콘텐츠의 세계화입니다. 태권도와 동학을 결합한 <태권유랑단 녹두>가 선봉입니다. K-문화의 흐름을 타고 ‘녹두’를 넘어 ‘춘향’, ‘흥부’ 시리즈로 확장해 세계 시장에서 상업적 경쟁력을 확보하겠습니다. 우리의 소리를 세계 수준으로 보여주는 문화 강국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태권도와 판소리를 결합한 소리킥 시리즈도 관심이 가는데요. 해외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게 하려면 무엇이 중요하다고 보시나요? “공연장이 단순히 대관만 해주는 곳이 아니라, 직접 작품을 만드는 제작극장이 돼야 합니다. ‘전북의 소리’라는 원형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버무려 낼 것인가, 그 고민의 결과가 바로 태권소리극 ‘소리킥’ 시리즈입니다. 국기(國技)인 태권도라는 언어에 우리만의 깊은 맛인 판소리를 입히는 전략입니다. 최근 제작된 <태권유랑단, 녹두>는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를 다루지만 인간의 보편적 화두인 ‘꿈’을 판타지적으로 풀었습니다.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상업적 명품이 되는 과정,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전북 14개 시군을 아우르는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은 어떻게 구상하시나요? “매해 예술과 대중을 아우르는 70여 건의 사업을 펼칩니다. 특히 20년간 이어온 ‘찾아가는 예술극장’은 이제 단순한 방문을 넘어 세 가지 전략을 꾀하려고 합니다. 첫째, 현지 예술인의 자생적 생태계를 돕는 플랫폼이 되겠습니다. 둘째,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온택트’ 중계로 오지까지 문화소외를 없애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도내외 기관과 아티스트 풀(Pool)을 공유하는 광역 네트워크를 구축하겠습니다." -프로는 성과로 증명한다”라며 강력한 휴먼웨이 업그레이드를 주문하셨습니다. 대표님만의 리더십은 무엇인가요? “구성원의 수준이 전당의 수준이고 리더의 안목이 곧 전당의 안목입니다. 제가 성과를 강조하는 이유는 각자가 자기 분야의 프로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하려는 것입니다. 공정성에 민감한 MZ세대의 특성과 협력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정서적 특성을 조화롭게 엮어내는 것이 제 숙제입니다. 개인의 성과는 투명하게 인정하고, 조직 전체의 신명을 끌어올려 성과를 만들겠습니다. 사람이 바뀌면 공간이 바뀌고, 도민의 삶이 바뀐다는 것을 성과로 증명하겠습니다.” -임기 내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취임사에서도 밝혔듯이 하드웨어 업그레이드, 콘텐츠 업그레이드, 휴먼웨어 업그레이드, 고객서비스‧안전‧ESG 업그레이드 등 4대 업그레이드를 통해 도민 문화예술 향유권 증진에 일조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오고 싶은 전당, 공연이든 전시든 다녀가면 힐링이 일어나는 3H(Hope‧Happy‧Healing)의 전당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Δ 이승필 대표는 이 대표는 1964년 담양에서 태어나 광주 송원고와 서울대학교 농화학과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문화전문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9년 GS칼텍스에 입사해 2007년부터 GS칼텍스재단 사회공헌팀장과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2012년부터 2024년까지 GS칼텍스 예울마루 초대 관장을 맡아 공연장 운영 체계를 구축하고 지역 문화예술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2011년 한국창조문학회에서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여수시 문화예술위원회 위원, 한국문예회관연합회 이사 및 호남제주지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한국공연예술포럼과 공연예술경영인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 기획
  • 박은
  • 2026.04.02 16:58

[인생 후반전, 전북으로 향하다] 전북떠났던 베이비붐 세대, 이도향촌의 시작

전북의 인구 감소는 더 이상 출생률의 문제가 아니다. 청년은 일자리와 소득을 따라 수도권으로 이동했고, 지역은 빠르게 고령화됐다. 반면 최근에는 수도권에서 경력을 쌓은 중·장년층이 다시 지역으로 돌아오는 흐름도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2023년 비수도권에서 수도권으로 이동한 청년은 13만 명으로 전체 이동 인구의 69.6%를 차지했다. 이들의 평균소득은 1년 사이 22.8% 증가한 반면,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이동한 청년의 소득 증가율은 7.6%에 그쳤다. 일자리와 임금 격차가 청년 이동을 사실상 ‘단방향 구조’로 고착시키고 있는 셈이다. 전북 역시 예외가 아니다. 청년 순유출률은 –1.3%로 전국 평균의 두 배를 넘고, 2023년 한 해에만 약 5800명이 순유출됐다. 이처럼 청년 유출이 구조화된 상황에서 기존의 ‘청년 유입 중심’ 정책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신 주목되는 흐름은 중·장년층의 귀환이다. 수도권에서 직장 생활을 마친 이들은 일정한 자산과 경험을 바탕으로 전북으로 돌아오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인구 보완을 넘어 지역 경제의 새로운 인적 자산으로 평가된다. 문제는 이들을 붙잡을 정착 기반이다. 전직 지원, 창업 인프라, 지역 일자리, 생활 커뮤니티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면서 귀환이 장기 정착으로 이어지지 못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전북 인구 정책은 ‘유입을 기다리는 구조’에서 ‘들어온 인구를 정착시키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같은 흐름은 지역 산업 현장의 인력난과도 맞닿아 있다. 한국경제인협회 조사에 따르면 지역 중소기업의 51.4%가 인력 부족을 겪고 있으며, 제조업은 60% 이상이 인력난을 호소했다. 특히 기업의 52.2%는 50대 이상 인력 채용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며, 숙련도와 책임감, 장기 근속 가능성을 강점으로 평가했다. 한경협 관계자는 “중·장년층의 지방 이동 수요는 분명 존재하지만, 정착을 뒷받침할 일자리와 생활 인프라가 함께 구축되지 않으면 지속적인 유입으로 이어지기 어렵다”고 말했다. △'서울 은행원에서 나무 농부로'…임실서 시작된 ‘전환의 삶’ 임실 청웅면의 한 밭. 정정모(70) 씨는 요즘 하루 대부분을 나무 사이에서 보낸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은행원으로 30여 년을 근무한 그는 정년퇴직을 계기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모가 남긴 땅이 있었고, 무엇보다 ‘이제는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정 씨는 30년 넘게 서울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다 정년퇴직을 계기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모가 남긴 밭이 있었지만, 귀향의 결정적 이유는 생계보다 삶의 방식에 가까웠다. “이제는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다. 조경수 몇 그루를 심고 가꾸며 시간을 보내던 일이 점차 규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나무가 자라면서 판매 문의가 이어졌고, 입소문을 타며 거래처도 늘었다. 지금은 일정한 수입이 발생하는 ‘주업’이 됐다. 정 씨는 “처음엔 소일거리였는데, 지금은 하루가 모자랄 정도로 바쁘다”며 “나무를 키우는 재미도 있고, 용돈벌이도 되니 자연스럽게 계속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선택은 전형적인 귀농·귀촌 정책 흐름과는 결이 다르다. 정부나 지자체 지원을 통해 농업에 진입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산과 경험, 그리고 삶의 전환 욕구가 맞물리며 형성된 사례다. 실제 그는 “특별히 지자체에 기대하는 지원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다만 이러한 개인 중심의 귀향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지역 기반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점도 분명하다. 농자재 수급, 유통 경로, 의료와 교통 등 생활 인프라가 부족할 경우 정착의 안정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정 씨처럼 수도권에서 경력을 쌓고 돌아오는 세대는 일정한 자산과 사회 경험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지역에서 지속 가능한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단순한 정착 지원을 넘어, 생산과 소비가 연결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퇴직 후 다시 시작”…익산 금마에서 마트를 연 김 씨 익산시 금마면의 한 골목. 해가 채 뜨기 전, 작은 마트 앞에 물류 차량이 멈춰 서고 상자들이 하나둘 내려진다. 가게 문을 연 김모 씨(56)의 하루는 상품 진열로 시작된다. 김 씨는 수도권에서 30년 가까이 식품 유통·물류업에 종사했다.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이어왔지만 정년이 가까워지면서 새로운 선택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고향인 익산 금마로 돌아와 자신만의 마트를 열었다. 단순한 귀향은 아니었다. 오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스스로 일군 장사를 해보고 싶다는 의지가 컸다. 조직의 일원이 아닌, 스스로 책임지는 생계를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지역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금마는 유동 인구가 적고 소비 규모 자체가 제한적이다. 개업 초기에는 매출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단골 확보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구매력이 높고 방문이 잦은 젊은 소비층이 부족한 점은 가장 큰 제약으로 작용했다. 전환점은 외부에서 찾아왔다. 지역에 외국인 계절 노동자들이 유입되면서 소비 구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김 씨는 이들을 주요 고객층으로 설정하고 베트남·태국·중국 식료품을 들여왔다. 결과적으로 상품 구성이 다양해지며 매출도 점차 안정세를 보였다. 현재 이 마트는 지역 주민과 외국인 노동자가 함께 찾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단순한 판매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활권이 만나는 접점 역할도 하고 있다. 김 씨는 “농촌은 인구가 적은 것보다 소비가 약한 게 더 큰 문제”라며 “주민 상당수가 장보기나 여가를 위해 대전 등 외부 도시로 나가면서 지역 내 돈이 돌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처럼 전북에서 점차 늘고 있는 ‘전직형 귀환’의 사례는 점차 늘고 있다. 일정한 경력과 기술을 가진 중장년층이 돌아와 새로운 생계를 구축하는 흐름이다. 다만 이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개인 역량에만 의존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지역 내 소비 기반과 산업 생태계를 함께 강화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 있다.

  • 기획
  • 이준서
  • 2026.04.01 17:33

[가족의 재발견] “누가 나를 돌볼 것인가”…비비가 던진 ‘관계 안전망’이라는 화두

대한민국에서 중장년 비혼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돌봄의 이중고’를 견디는 일이다. 20~30대 시절 1인 가구의 삶이 자유와 독립의 만끽이었다면 40대 중반을 넘어선 이들에게 닥치는 현실은 기본값이 된 부모 돌봄이다. 비혼이라는 이유로 가족 돌봄의 최전선에 놓이지만 정작 “부모님이 떠난 뒤 나를 돌볼 이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사회와 국가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전주를 기반으로 20년간 비혼여성공동체를 일궈온 ‘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이하 비비)’와 비비사회적협동조합(김난이 이사장·이미정·활동가 봄봄)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주거모델을 제안한다. 단순히 잠만 자는 방이 아닌, 서로의 안부를 묻고 돌봄을 나누는 ‘공동체 주택’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공간은 물리적 건축물을 넘어 우리 사회의 빈약한 안전망을 보완할 ‘관계의 실험실’이다. △‘주거권’의 재정의: 원룸과 고시원은 줄 수 없는 것 기존 1인 가구 정책은 주로 청년층의 진입 지원이나 고령층의 빈곤 해결에 치중해왔다. 하지만 중장년 여성 1인 가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저가임대주택이 아니다. 이들이 정의하는 진정한 주거권에는 세 가지 핵심 요소가 포함된다. ‘소통할 수 있는 친구’, ‘안전을 확인해 줄 이웃’,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적정 수준의 공간’이다. 김난이 이사장은 “원룸과 고시원은 개인의 고립을 전제로 한 공간”이라며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 주택은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에 대한 능동적인 선택”이라고 강조한다. 사생활이 보장되는 독립 공간을 갖추되, 필요할 때 언제든 연결될 수 있는 공유 공간과 관계를 핵심으로 삼는다. 이는 물리적 단절을 막는 동시에 정서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실질적인 대안이다. △AI 안부서비스는 왜 ‘행정편의주의'일까 최근 전북자치도를 비롯한 지자체들이 중장년 고독사를 막기 위해 AI 안부서비스를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하지만 김 이사장은 이를 두고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행정주의적 사고”라며 강하게 비판한다. 고독과 고립은 전화 한 통으로 해결될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사람 간의 정서적 연결이 끊어져 발생하는 ‘사회적 질병’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계 대신 커뮤니티 코디네이션과 같은 인적자원이 중심이 된 돌봄체계가 훨씬 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하다고 제언한다. 시혜적인 서비스에서 벗어나 당사자들이 직접 모여 고민을 나누는 지역 소모임 등 ‘사람 중심의 인프라’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전북 여성 노인 고립, 송천동에서 답을 찾다 비비사회적협동조합은 구체적인 실행방안으로 송천동의 ‘여성근로자아파트’ 부지를 여성 1인 가구 공동체 주택으로 전환하자고 제안한다. 통계에 따르면 전북의 65세 이상 노인 1인 가구 비율은 25.3%(2023년 기준)로 전국 4위에 달하며, 전국 평균(22.1%)을 크게 웃돈다. 특히 도내 1인 가구 중 여성 비중이 51.6%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노후화로 철거 위기에 놓인 공간을 리모델링해 여성 중장년‧노인 공동체 주택으로 거듭나게 하자는 것이다. 실제 이 모델이 실현된다면 전북의 여성 노인 1인 가구 비율과 고립 문제를 해결하는 상징적 거점이 될 수 있다. 매년 비비의 활동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10팀 이상의 견학팀이 전주를 찾는다. 인구 감소의 해답을 단순히 외지인 유입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거주하는 중장년층의 삶의 질을 높여 ‘생활인구’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 ‘공동체 근육’을 기르는 법, 응답과 책임 공동체 주택이 장밋빛 환상만은 아니다. 비비는 20년 넘는 시간 동안 관계의 실험을 이어오며 수많은 갈등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얻은 결론은 공동체를 지탱하는 힘은 공동체 근육이라는 점이다. 이 근육의 핵심은 ‘응답능력’과 ‘책임’이다. 김 이사장은 “느슨한 관계라고 말하지만, 그 이면에는 갈등을 견디고 소통하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며 “상대의 물음에 응답하고, 공동의 결정에 책임지는 훈련 없이 공동체는 유지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여성주의 공부와 독서모임을 통해 서로의 맥락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쳤다. 아는 사이가 되는 것, 그래서 서로에게 “도와달라” 말할 수 있는 신뢰를 쌓는 것이야말로 공동체 주택이 가져야 할 가장 큰 자산이다. △ 다양한 친밀함이 허용되는 도시를 향해 비비가 제안하는 공동체주택은 단순한 ‘비혼 여성들만의 섬’이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고집해온 ‘혈연 중심의 정상가족’이라는 협소한 틀을 깨고, 다양한 형태의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시민의 권리로 인정하자는 선언이다. 전주가 진정으로 ‘살고 싶은 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소수자에 대한 낙인을 거두고 다양한 삶의 형태가 공존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이미정 씨는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갈등을 조절하며 맞춰가겠다는 책임이 동반된다면 사회적 비극인 고독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AI 전화기를 보급하는 것보다 시민들이 서로의 곁이 되어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데 예산을 써야 한다. 송천동의 낡은 아파트 부지가 단순한 철거 대상을 넘어 새로운 시대의 돌봄 모델로 재탄생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 기획
  • 박은
  • 2026.03.25 17:10

[동학농민혁명 세계기록유산 미등재 기록물] 1894년의 진실을 복원하는 제3의 증언, ‘동학문서(東學文書)’

△130여 년 전 진실 품은 뮈텔 주교의 유산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근대사의 물줄기를 바꾼 거대한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13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당시의 현장을 가장 입체적으로 증언하는 한 이방인의 기록과 마주한다. 바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이자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을 지낸 구스타프 뮈텔(Gustave Mutel, 한국명 민덕효(閔德孝)) 주교가 남긴 ‘뮈텔 문서(Mutel 文書)’이다. 1854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1880년 조선에 잠입한 이래 1933년 사망하기까지 그는 한국 천주교사의 산증인으로 살았다. 특히 1890년 교구장 취임 이후 그가 갈무리한 13,451건의 방대한 문서는 당대의 정치, 사회, 종교상을 투영하는 거대한 기록의 보고이다. 작고하신 이이화 선생님(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가 동학농민혁명 관련 사료를 총망라하여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30권을 1996년에 발간하였는데, 이때 뮈텔 문서 중에서 동학농민혁명 관련 내용을 추출하여 이를 ‘동학문서(東學文書)’라고 명명하였다. 이 문서는 관찰자의 시각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전개를 묘사한 1차 사료로서 독보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전국 사제들이 구축한 ‘거미줄 정보망’ 『동학문서』가 갖는 가장 큰 특징은 정보의 ‘현장성’과 ‘광범위함’에 있다. 뮈텔 주교는 서울에 머물면서도 전라도 무장, 영광, 정읍 등 혁명의 발원지에 파견된 사제들과 긴밀한 서신을 주고받았다. 당시 천주교는 포교의 안전과 교도 보호를 위해 동학농민군의 동태를 파악하는 데 사활을 걸었으며, 이 과정에서 수집된 정보들은 단순한 소문을 넘어선 실시간 현장 보고서였다. 전주 전동성당의 보두네 신부나 전라 서남부의 베르모렐 신부 등은 동학농민군의 진격과 후퇴를 바로 곁에서 목격하며 주교에게 서신을 보냈다. 뮈텔 주교는 이 생생한 리포트를 날짜별로 정리하고 자신의 분석을 덧붙였다. 특히 프랑스 공사관과의 외교적 채널을 통해 입수한 대원군 관련 밀서나 조정의 대응책 등은 이 기록물이 사적인 일기를 넘어 당대 최고위급 정보가 집결된 ‘기록의 허브’였음을 보여준다. △1893년의 예언과 저항의 불씨 수록된 『동학문서』는 동학농민혁명이 폭발하기 일 년 전인 1893년부터 이미 심상치 않은 조짐을 포착하고 있다. <동학도 개국 음모 건(東學徒開國陰謀件)>(1893-51)은 무장, 영광, 정읍의 오태원 등 지도부가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고 새 나라를 꿈꿨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동학이 단순한 민란을 넘어 정권 교체라는 정치적 목표를 가졌음을 시사하며, 특히 선운사 석불 비결 탈취 사건과의 연관성은 농민군의 종교적·정치적 배경을 이해하는 결정적 단초가 된다. 또한 <동학 벽보(東學 壁報)>(1893-54)와 <동학도 기독교 배격 벽보(東學徒基督敎排擊壁報)>(1893-57)는 당시 동학농민군이 가졌던 강렬한 ‘척양척왜’ 의식을 보여준다. 선교사 존스(Jones)의 집 등에 게시된 벽보에서 엿보이는 서양인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은 동학의 민족주의적 성격이 서구 문명과 어떻게 충돌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용담대아 통고(龍潭大衙 通告)>(1893-58) 역시 척양척왜를 주장하며 전라감사에게 보낸 통고문으로, 혁명 전야의 긴장감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정치적 역학 관계와 권력의 내면 동학농민혁명이 본격화된 1894년의 기록은 더욱 정교해진다. 문서의 백미인 <흥선대원군 효유 동학도문(興宣大院君 曉諭東學徒文)>(1894-304)은 프랑스 공사 르페브르의 권고로 대원군이 동학도에게 보낸 효유문과 이에 화답한 호서 지역 18개 구역 접주들의 답서를 담고 있다. 이는 대원군과 동학농민군 사이의 은밀한 협력과 긴장 관계를 증명하는 핵심 사료로, 조정 내 권력 투쟁이 동학이라는 거대한 파도와 어떻게 얽혀 있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의병 의금 소모 밀유(義兵義金召募密諭)>(1894-303, 305)는 일본군의 범궐 이후 이건영을 소모사로 임명하여 일본군을 축출하려 했던 조정의 비밀스러운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동학농민혁명이 단순한 아래로부터의 봉기일 뿐만 아니라, 당시 중앙 정치권력의 변동과 밀접하게 반응하던 복합적인 사건이었음을 증명한다. △‘집강소’ 체제의 실상과 새로운 질서의 모색 문서 중 <순영문 효유문(巡營門曉諭文)>(1894-314)과 <윤 신부 서간 초(尹神父書柬草)>(1894-327)는 동학농민혁명 이후의 지방 행정 변화를 생생히 전하고 있다. 전라감사 김학진이 농민군에게 ‘집강(執綱)’ 설치를 약속하며 민폐 교정을 다짐하는 장면은 민관 협치의 초기 모델로서 집강소가 가졌던 행정적 위상을 뒷받침한다. 특히 천주교 사제와 관찰사 사이의 문답에서 “동학군이 집강 설치 후 오히려 작폐를 금하고 있다”는 기록은 매우 흥미롭다. 이는 당시 동학농민군이 단순한 파괴자가 아닌, 지역 질서의 유지자이자 행정의 파트너로서 기능했음을 제3자의 기록을 통해 재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또한 <무장현 동학 포고문(茂長縣東學布告文)>(1894-321)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의지를 천명하며 탐관오리를 규탄하는 농민군의 목소리를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외세의 개입과 국제 정세의 파고 『동학문서』는 한반도 내부의 갈등에 그치지 않고, 이를 둘러싼 국제 정세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기록했다. <외병 진주 상황 건(外兵進駐狀況件)>(1894-312)과 <일본군 진주 상황 보고(日本軍進駐狀况報告)>(1894-320)는 청국군과 일본군, 심지어 영국군과 러시아 함대의 동향까지 세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특히 <남중 소란 후 각국 병선 출입록(南중騷亂後 各國兵船出入錄)>(1894-326)은 제물포를 출입한 각국 군함의 이름과 목적지를 도표화하여 기록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이 동북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뒤흔든 국제적 사건이었음을 입증한다. 이러한 외부자의 기록은 당시 조선 정부가 처했던 외교적 고립과 위기 상황을 입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게 해준다. △제3자의 시선이 완성하는 역사의 모자이크 『동학문서』의 진정한 가치는 ‘객관적 거리두기’에 있다. 관(官)의 기록은 농민군을 ‘비도(匪徒)’로 매도하기 일쑤였고, 농민군의 기록은 스스로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주관성을 띠기 마련이다. 반면 프랑스 신부들의 시각은 그들만의 종교적 관점이 개입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과 민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인으로서 목격한 사실을 가감 없이 전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또한 이 자료들은 날씨와 물가, 유언비어의 유포 과정까지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어 미시사(Micro-history) 연구의 보물창고이기도 하다. 뮈텔 문서에서 선별된 이 26종의 사료는 1894년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모자이크를 완성하는 가장 세밀하고 날카로운 조각이다. △기록이 지켜낸 역사의 무게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며, 진실은 다양한 관점이 모일 때 비로소 선명해진다. 뮈텔 주교가 수집 정리하고 연구자들이 선별한 『동학문서』는 이제 우리 민족의 자부심인 동학농민혁명의 진실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기록물들과 상호 보완하며, 이 문서들은 130여 년 전 이 땅에서 자유와 평등을 외쳤던 함성을 더욱 생생하게 되살려내고 있다. 박제된 유물이 아닌, 오늘의 우리를 비추는 거울로서 『동학문서』를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 기록이 지켜낸 역사의 무게만큼, 우리는 1894년의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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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03.23 18:14

[뉴스와 인물] 이병관 고려대의료원 교류협력 대자인병원장 “지역의료 완성에 최선”

개원 14주년을 맞이한 대자인병원이 지난달 고려대학교의료원과 교류협력을 체결하고 ‘고려대학교의료원 교류협력 대자인병원’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대자인병원은 이번 협력이 단순한 명칭 및 로고 변경을 넘어서 수도권 상급종합병원의 선진 진료 시스템과 의료 기술을 지역에 이식해 ‘원정 진료’ 없는 지역 완결형 의료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병관 병원장을 만나 이번 교류협력 체결의 배경과 지역의료 위기 극복을 위한 향후 청사진을 들어봤다. 최근 대자인병원이 고려대의료원 교류협력 대자인병원으로 명칭과 로고를 변경하고 새로운 출발을 선언했습니다. “대자인병원이 개원한 지 올해로 14년째가 됐습니다. 처음에는 미래형 통합 의학을 지향하는 재활 전문 병원으로 시작했지만, 이후 종합병원으로 바뀌는 큰 전환이 있었습니다. 최근 의료 수요가 고급화되고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의 중증도가 높아지면서 다시 한번 최고의 선진 의료 기술을 받아들여 리브랜딩을 진행하자고 결심했습니다. 이를 위해 최고 수준의 서울 상급종합병원과 긴밀한 교류협력을 진행하게 됐는데, 큰 변화와 변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려대의료원과 교류협력은 어떻게 추진됐나요. “교류협력 병원을 도입한 사례가 전국적으로 더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과 연구 결과를 분석해 고려대학교와 접촉했습니다. 이후 1년 동안의 꾸준한 설득을 통해 교류협력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이러한 상급종합병원과의 교류협력 체결은 전북특별자치도에도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교류협력을 통해 대자인병원에서 가장 크게 변화하는 것은 어떤 부분인가요. “먼저 이름을 고려대학교의료원 교류협력 대자인병원으로 변경했고, 로고와 유니폼도 바꾸는 외적인 변화 부분이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실질적인 교류협력 부분인데, 고려대의료원에서 사용하는 내부 행정 시스템과 진료 시스템을 받아 진료의 기준을 올려서 표준화할 예정입니다. 우리 병원에서 치료하기 어려운 환자는 고려대의료원과 연결해 치료한 뒤 병원으로 회송해 치료를 이어가는 등 긴밀한 협력을 이어갈 방침입니다. 또한 고려대의료원이 보유한 우수한 의료자원, 특히 최고 수준의 로봇 수술 기술을 배우고 의료진 교류와 연수 등도 진행할 계획입니다.” 교류협력을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고려대의료원이 가지고 있는 우수한 의료 기술력 등 장점을 빠르게 받아들여 우리 병원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이를 통해 앞으로 이 지역 환자들이 굳이 서울에 가지 않아도 비슷한 수준의 모든 진료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게 목표입니다. 최종적인 목표는 우리 병원이 가지고 있던 통합 의학적인 마인드와 우수한 기술력을 합쳐 환자에게 최선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신관 완공이 예정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작게 시작했던 병원이 계속 확장되면서 현재 여러 건물을 이용하고 있어 동선의 어려움과 환자들의 불편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신관 건물은 떨어져 있던 병원의 모든 건물을 하나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환자에게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기존에 흩어져 있던 영상 진단과 중환자 수술 등 기능을 중앙에 위치하도록 해 모든 기능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아울러 신관 건물에 암 방사선 치료기를 배치해 암 환자 진료를 더 적극적으로 진행할 생각입니다.” 이번 교류협력 체결로 인해 오히려 지역 환자가 수도권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수도권에 모여있는 현재 상황 속에서 환자들이 지역을 떠나는 상황을 갈수록 막기 어려워지는 형편입니다. 어떻게든 지역 내 의료 수준을 끌어올리고 수도권에 못지않은 의료 편리성과 기술력을 확보해 자체적으로 경쟁력을 가져야 원정 의료를 막을 수 있습니다. 수도권에 갈 필요 없이 비슷한 진료와 서비스를 경험할 수 있다는 신뢰가 생겨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를 위해 진행한 교류협력이고, 이름만 바꾸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수도권의 모든 진료 서비스를 이곳에서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하면 치료를 위해 수도권에 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인식이 생길 것입니다.” 그간 지역의료의 위기와 붕괴에 대한 지적이 많았습니다. “현재 많은 병원들이 지역에서 의사를 구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특히 생명과 직접 관련되는 필수 의료는 더욱 기피되는 과목이기 때문에 우리 병원뿐만 아니라 모든 병원이 힘든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류협력을 진행한 측면도 있습니다. 향후 고려대의료원 교수들을 초빙하거나 교환해 어떻게든 지역 내에서 의료 체계를 완결할 수 있도록 힘을 쓸 계획입니다.” 의료 위기가 단기간에 해결될 것 같지 않다는 전망이 많은데 대자인병원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 병원은 몇 년 전부터 방향을 확실하게 정했습니다. 골든타임 안에 응급환자에게 수술과 처치를 진행해 생명을 살리는 중증·응급 필수의료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응급실 강화에 중점을 두고 관련 분야 의사들을 확보해 원활하게 응급실이 운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그렇게 노력한 결과 많은 응급의학 전문의와 뇌혈관 의사를 확보해 거점 응급의료센터로 지정받게 됐습니다. 앞으로도 더 확실하게 중증·응급 필수의료를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 지역의료가 완성될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도민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항상 지역이 살아나야 나라가 산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특성으로 인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나라가 돼야 모든 국민이 행복해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가 디디고 있고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 지역에 최선을 다하자는 게 목표입니다. 도민들께서도 병원의 이러한 목표와 모습에 관심을 가지고 신뢰를 보내주신다면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병관 병원장은 충남 논산 출신으로 전주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동대학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이후 우석대학교 한의학과와 중국 남경 중의학대학 박사과정을 졸업했으며, 인산의료재단 이사장과 정신병원협의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 병원장은 “앞으로도 지역의료체계의 신뢰성과 완결성을 높이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김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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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문경
  • 2026.03.15 14:47

[기획]정근식 서울시교육감 “2026년은 교육 패러다임 전환 체감의 해…‘경쟁’ 넘어 ‘협력’으로”

취임(2024년 10월) 1년 5개월을 맞은 정근식 서울특별시교육감의 행보가 거침없다. 역사사회학자 출신다운 통찰로 교육을 사회 전체의 맥락에서 짚어내는 그는 2026년을 ‘교육 패러다임 전환 체감의 해’로 선언했다. 또 AI(인공지능)이 일상이 된 시대, 단순한 지식 암기를 넘어선 ‘인간다움’과 ‘협력’의 가치를 역설한다. 더불어 전북을 비롯한 전국 자치단체와의 농촌유학 협력을 통해 도농 상생의 모델을 제시해 온 그는 이제 ‘2040년 수능 폐지’라는 파격적인 미래 설계를 통해 대한민국 교육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예고하고 있다. 이달 10일, 서울특별시교육청 교육감실에서 그가 그리고 있는 AI 시대에 걸맞는 서울시 교육의 청사진을 들어봤다. ◇ 대담= 김준호 전북일보 서울본부장 - 취임하신 지 1년 반 정도가 됐는데, 취임 초 제시하신 ‘창의·공감·자치·협력’의 가치가 학교 현장에 얼마나 안착되었다고 평가하십니까. “지난 기간동안 정책을 안착시켰고, 만족도도 높은 편입니다. 서울교육청 정책에 참여한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 ‘상당히 잘 가고 있다’는 응답이 68%, ‘앞으로 3년 이내에 희망적으로 보인다’는 응답이 83% 정도 나왔습니다.” - 최근 AI가 사회 전체의 큰 변화를 몰고 오면서 교육 현장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AI 시대에 맞는 교육,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AI 시대 교육의 핵심은 두 축입니다. 한편으로는 독서·토론·인문교육을 강화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AI 활용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학생들의 창의력과 질문하는 능력, 토론하는 능력을 기르려면 오히려 고전적인 독서·토론 교육이 더 중요해집니다. 동시에 AI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역량도 길러야 합니다. 이 두 바퀴가 맞물려 돌아가야 AI 시대 교육이 제대로 갈 수 있습니다.” - AI를 교육 현장에 접목시키는게 쉽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현재 추진하고 있는 구체적인 계획은 무엇인지. “AI 시대 교육은 활용 교육과 윤리 교육, 개발 역량 교육이라는 세 축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AI교육센터를 만들고 대학과 연계하고 있습니다. 서울대·연세대는 교사 역량을, 서울시립대는 학생 AI역량 프로그램을 맡습니다. 올해 2월에는 이미 시범사업을 시작하고 있고, 서울과학기술대와는 피지컬 AI 관련 협력도 하고 있습니다.” - 교실에서의 수업 방식도 달라져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평가 체계도 마찬가지이고요. “옛날처럼 칠판 중심, 필기 중심 수업이 아니라 질문하고 토론하는 수업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지식을 많이 외우는 것보다 정확하고 창의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합니다. 이에 맞춰 평가도 서술형, 논술형으로 확대합니다.“ - 평가와 관련해 일각에선 AI채점의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정성입니다. AI를 활용하면 평가자의 주관성을 줄일 수 있어 오히려 더 공정할 수 있습니다. 서울형 모델은 교육과정을 먼저 충분히 학습시킨 뒤 기준이 분명한 AI가 채점하도록 합니다. AI가 1차 채점을 돕고, 최종 판단은 교사가 합니다. 현재 교사 채점과 AI 채점의 일치율이 0.8 정도인데, 데이터를 축적해 0.9 이상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입니다.(일치율은 1에 가까울수록 완벽한 일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0.8은 통계적으로 신뢰도가 높은 수준.)” - AI 교육에 대한 이에 대한 학부모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학부모들도 ‘AI 인재가 돼야 하니 우리도 AI를 좀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학부모 교육센터, 학부모 학습센터를 더 만들어달라는 요구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지금 학부모 지원체계 안에서 그런 계획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 한편으론 지나친 AI 의존이 우려됩니다. 교육감께서는 이를 ‘생각의 외주화’라고 표현하시기도 했는데요. “가장 걱정되는 지점이 아이들이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AI에게 묻게 되는 상황입니다. 저는 이를 ‘생각의 외주화’라고 부릅니다. 예전에는 길을 외워서 찾아갔지만 지금은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만 갑니다. 그러다 보니 지리 감각이 떨어지죠. 글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컴퓨터가 들어오고 나서 손글씨 능력이 떨어졌습니다. AI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잘못하면 생각 자체를 AI에 맡기는 인간이 됩니다. 인간이 기계의 주인이어야지, 기계가 주인이고 인간이 종속되는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출발합니다. AI를 제대로 다루려면 무엇보다 질문을 잘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제는 지식을 많이 외우는 것보다 정확하고 창의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합니다. 교육의 핵심은 바로 그 질문 역량을 키우는 데 있습니다. 잘못 가면 인간이 주체적 사고를 잃고 기계가 시키는 대로만 사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주체성, 근원적인 사고 능력이 기계에 종속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결국 지식 기반 교육에서 역량 기반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합니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다운 문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다움’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AI 시대의 교육은 ‘기술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지키는 일’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배움의 주체는 학생이어야 합니다. 질문하는 힘, 생각하는 힘, 타인과 협력하는 힘, 그리고 책임 있게 선택하는 힘이 교육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생각하는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다움’입니다. - 이를 위해 시행하고 있는 정책이 있습니까.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다움’을 기르기 위해서는 첫째, 가치 지향적인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비판적 사고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독서·토론·인문학 교육 2030 계획’을 수립·시행하고 있습니다. 둘째, 타인과 협력하는 역지사지의 힘이 필요합니다. 학생들이 갈등을 슬기롭게 해결하며 공존할 수 있도록 ‘역지사지 토론 모형’을 개발해 추진하고 있습니다. 셋째, 강력한 도구일수록 이를 안전하고 올바르게 사용하는 ‘책임감’이 필수적입니다. 최근 ‘AI 활용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는데, AI를 교육적으로 꼭 필요한 경우에만 안전하게 활용하도록 하는 ‘인간 중심의 AI 교육‘의 원칙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결국 AI 시대의 교육은 더 많은 지식을 주입하는 경쟁이 아니라, 아이들 내면에 잠들어 있는 인간다움을 깨워주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 질문 역량을 키우기 위해 시행하고 있는 정책은 무엇인지. “독서·토론·인문학 교육은 바로 이런 점에서 중요합니다. 작품을 읽고 자기 나름의 문제를 설정하고, 질문을 만들고, 서로 토론하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단지 문장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책 속 핵심 개념을 이해하는 교육으로 가야 합니다. 자유·평등 같은 개념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 현재의 대입 현실을 감안하면, 이같은 교육은 한계에 부딪히지 않을까요. "이런 교육이 고등학생과 입시를 앞둔 학생에게는 느슨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대학 입시도 바꿔야 합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대학 서열 구조도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서울대, 연고대 식의 수직적 대학 구조를 완화해야 누구나 원하는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구조가 됩니다.” - 입시 제도 개편은 국가 차원의 일인데, 서울시교육청의 의지만으로는 버거울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이 문제는 서울시교육청만의 일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거점국립대 교수협의회와 함께 대학 입시 제도 개선 논의를 제안해 왔습니다. 2028학년도 대입부터 진로·융합선택과목에 절대평가를 도입하고, 2033학년도 대입에는 수능과 내신의 절대평가로의 전환을 제안했습니다. 2040학년도에는 학생 수가 크게 줄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수능 제도는 폐지하는 게 좋겠다는 제안도 했습니다. 교육부는 수능 폐지는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워서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나머지 방향들은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다고 봅니다. 교육정책이 바뀔 때마다 사교육 시장을 자극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근본 방향은 바뀌어야 합니다. 다만 변화 과정에서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단계적 접근이 중요합니다.” - 다른 한편에서는 디지털 격차에 대한 우려되고 있습니다. “AI 시대의 또 다른 중요한 과제는 혹시라도 AI 리터러시, 디지털 리터러시 격차가 생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AI 디지털 리터러시 진단검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2025년에는 초등 5학년과 고등 1학년 1만 명을 대상으로 했는데, 올해는 중학교 2학년까지 포함해서 약 3만 명을 대상으로 검사할 계획입니다. 또 AI 디지털 리터러시 기초소양교육을 전 학교에 실시하고, AI 디지털 자료를 이용해 학생의 자기주도학습과 교사의 수업을 지원하는 체계를 갖출 계획입니다.” - 다소 결이 다른 질문인데, 학생인권과 교권이 충돌한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학생인권과 교권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인권이 잘 보장될수록 교권 존중도 더 강화됩니다. 인권은 상호 존중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처럼 체벌하고 학생을 억누르는 방식으로는 존중이 생기지 않습니다. 학생들을 존중해줄수록 선생님에 대한 존경도 커집니다. 한국 교실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매우 질서 있는 편입니다. 그런 점도 객관적으로 봐야 합니다.” - 전국 시·도 교육청과 진행하고 있는 협력 사업이 있습니까. “대표적으로 전북·전남·강원도·제주도·인천광역시와 함께 운영하고 있는 ‘농촌유학’이 있습니다. 전북은 매우 중요한 협력지입니다. 2022년 시작 이후 누적 589명의 서울 학생이 참여했습니다. 특히 진안·임실·순창 등은 만족도가 매우 높습니다. 도시 학생에게는 생태 감수성을, 농촌 학교에는 활력을 불어넣는 도농 상생 모델을 계속 확대할 계획입니다. 농촌 학생은 서울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서울 학생은 농촌 지역의 삶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서울교육청과 전북교육청과 같은 협력은 단순한 행정 협력이 아니라 미래교육을 위해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교육감협의회뿐 아니라 교육청 실무 차원의 협력도 더 강화돼야 합니다." - 앞으로 전북교육청과 특별히 협력할 사업이 있으신지. ”지방선거 이후 서울시교육청과 전북교육청이 AI 시대 교육의 기본 방향, 농촌유학, 여러 교육협력 프로그램을 둘러싸고 협력을 더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해력·수리력 진단검사, 진로·진학 상담 프로그램, 농촌유학 프로그램 같은 다층적 협력을 할 수 있습니다. 협력은 일방향이면 안 됩니다. 전북교육청이 서울 것을 따라오기만 하는 구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전북교육청이 개발한 의미 있는 프로그램을 서울에서도 받아들이고, 서울이 개발한 진단 도구나 교육 프로그램도 전북과 교류해야 합니다." - 취임 후 일선 교육 현장을 누비고 다니고 있습니다. 교수 출신이라 교육 현장을 잘 모른다는 일부의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전공은 역사사회학입니다. 교육을 단순히 학교 행정 차원이 아니라 사회 전체와 연결해서 봅니다. 오히려 보통 선생님들보다 더 폭넓게 본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년 5개월 동안 200곳이 넘는 현장을 다니며 매번 1~2시간씩 깊게 대화했습니다. ‘미래를 여는 협력교육’의 핵심은 협력입니다. 선생님·학부모, 지역사회가 함께할 때 제대로 된 학교를 만들 수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앞으로 서울 시민들에게 어떤 교육감으로 기억되고 싶으십니까. “‘미래를 여는 협력교육’ 서울시교육감 정근식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임기가 끝난 뒤 ‘정근식은 우리 아이들에게 경쟁이 아닌 협력을, 갈등이 아닌 공존의 가치를 가르치려 애썼던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서울 교육이 시민의 자부심이 되도록 끝까지 책임 있게 추진하겠습니다.” *정근식은…‘사회학자’에서 ‘서울 교육 수장’으로 1957년 전북 익산 황등 출생. 남성중-전주고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전형적인 ‘학자형 리더’이다. 전남대를 거쳐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사회사학회장, 문재인 정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우리 사회의 아픈 과거사를 치유하고 역사 인식을 바로 세우는 데 평생을 바쳐왔다. 2024년 10월 보궐선거를 통해 제23대 서울특별시교육감으로 취임했다. 정 교육감의 행보 중 가장 파격적인 것은 ‘2040학년도 수능 폐지’를 골자로 한 대입 제도 개편안이다. 이는 AI 시대에 필요한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력을 기르기 위한 결단으로 풀이된다. 더불어 교육 격차 해소를 위해 기초학력 보장에 사활을 걸고 있으며, 대학과의 벽을 허무는 ‘통합적 교육 체계’ 구축에도 힘을 쏟고 있다. 또 교권 보호 실시간 모니터링과 신속대응팀 운영은 교사의 긍지를 회복시키겠다는 그의 의지가 담긴 핵심 정책이기도 하다. 오는 6월 3일 지방선거를 앞두고 그의 재선 도전 여부는 교육계 최대의 화두로, 최근 진보 진영 단일화 기구인 ‘2026 서울 민주진보교육감후보 단일화 추진위에 경선 후보 등록을 하면서 재선 도전 의지를 분명히 했다. 정리=이준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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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호
  • 2026.03.12 16:44

[기획] ‘한국의 샤모니’ 꿈꾸는 장수군

장수군이 풍부한 산림자원을 기반으로 국제산악관광도시 도전에 나서고 있다. 해발 1,000m 이상의 장안산과 팔공산을 품은 장수군은 전체 면적의 약 75%가 산지로 이루어진 전북특별자치도 동부 대표 산악지역이다.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이 지나며 깊은 숲과 능선, 계곡이 어우러진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군은 이러한 자연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해 산악관광 활성화에 힘을 쏟고 있다. 해발 400~500m 고원이 이어지는 산줄기와 숲길은 트레일 러닝과 캠핑, MTB 등 다양한 아웃도어 활동에 적합한 자연 무대로 평가된다. 장수라는 지명은 ‘물은 길고 산은 높다’는 뜻의 수장산고(水長山高)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명에서 풍기듯 장수의 산골 오지는 개발 흐름에서 비켜나 잘 보존된 청정 자연은 오늘날 오히려 새로운 경쟁력으로 부각되고 있다. 군은 이를 기반으로 산악레저와 관광을 결합한 체류형 관광 전략을 통해 지역 활력 회복을 모색하고 있다. △ 국내 최초 100마일 코스…장수트레일레이스 장수 산악관광의 대표 콘텐츠는 장수트레일레이스다. 장수트레일레이스는 불과 몇 년 사이 국내 대표 산악러닝 대회로 성장하며 장수군의 산악관광 이미지를 전국에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국내 최장 거리인 100마일(170.8km) 코스가 정식 운영되면서 국내 트레일러닝 분야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트레일러닝에서 100마일 코스는 마라톤 풀코스와 같은 상징적인 거리로 꼽힌다. 코스 운영과 안전 관리 부담이 매우 커 국내에서는 쉽게 도전하기 어려운 거리로 알려져 있다. 실제 장수트레일레이스 100마일 코스에는 112명이 참가해 43명만 완주할 정도로 난이도가 높은 코스다. 그만큼 참가자들에게는 도전의 상징적인 무대가 되고 있다. 대회 기간이면 장수의 마을마다 응원과 환대가 이어진다. 주민들은 선수들에게 간식을 나누고 응원을 보내며 대회 분위기를 함께 만든다. 보급소(CP)에서는 스태프가 선수들의 물병을 채워주며 완주를 돕는다.` 지역 학생들도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면서 장수트레일레이스는 스포츠 대회를 넘어 지역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가는 축제로 자리 잡았다. 대회 규모 역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2022년 약 150명으로 시작된 대회는 2023년 800여 명, 2024년 3000여 명, 2025년에는 5000여 명이 참가하는 국내 대표 산악러닝 대회로 발전했다. △ ‘K-샤모니 챌린지’…산악자원 브랜드화 장수군은 산악자원을 하나의 관광 플랫폼으로 묶는 전략도 추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아웃도어 브랜드 블랙야크와 함께 운영하는 ‘장수 K-샤모니 마운틴 챌린지’다. 이 챌린지는 장수군 전역의 14개 명산을 하나의 브랜드로 연결해 산악지형 전체를 하나의 아웃도어 무대로 재해석한 프로그램이다. 참가자들은 블랙야크알파인클럽(BAC) 앱을 통해 덕유산 서봉과 장안산, 팔공산, 봉화산, 사두봉 등 주요 봉우리를 등반하며 인증을 진행한다.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이 이어지는 장수의 산줄기는 산악지형 전체를 하나의 생활권처럼 체험할 수 있는 특징을 지닌다. 하루에 한 봉우리만 오르는 일반적인 등산 방식과 달리 장수에서는 긴 산줄기를 따라 다양한 코스를 경험할 수 있다. 챌린지를 완주하면 블랙야크는 BAC코인을 제공하고 장수군은 기념품을 지급해 참가자들의 재방문을 유도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단순한 이벤트를 넘어 산악 브랜드와 지방자치단체가 협력해 관광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동시에 추진하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 캠핑·트래킹 결합…체류형 관광 확대 장수방화동자연휴양림에서 열린 산악레저 캠핑페스티벌은 장수 산악관광이 체류형 관광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3일 동안 진행된 행사에는 가족 단위 방문객 400여 명이 참여했다. 참가자들은 캠핑과 트래킹, 숲 체험, 공연 프로그램 등을 통해 장수의 자연을 체험했다. 특히 방화폭포와 데크로드를 잇는 가족형 트래킹 코스는 난이도가 낮아 아이들과 함께 참여하기 좋은 코스로 인기를 끌었다. 행사에서는 지역 관광지와 연계한 ‘장수 도장깨기 투어’도 운영됐다. 누리파크와 논개사당, 장수 5일장을 연결한 관광 프로그램은 방문객들이 자연스럽게 지역 상권을 방문하도록 유도했다. 장수군은 캠핑과 트래킹, 관광을 결합한 체류형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관광객 체류 시간을 늘리고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할 계획이다. △ 60km MTB 코스…산악자전거 특화지구 추진 장수의 산악지형은 MTB 라이딩에도 적합하다. 승마로드의 메타세쿼이아길과 장안산 임도를 연결한 약 60km 코스는 자연형 산악자전거 코스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해 열린 ‘장수 한우랑 사과랑 전국 MTB대회’에는 약 600명의 라이더가 참가하며 높은 관심을 보였다. 장수군은 민관협력 지역상생협약 사업의 일환으로 2026년까지 약 24억 원을 투입해 MTB 전용 인프라를 구축할 계획이다. 난이도별 라이딩 코스와 웰컴광장, 안전시설 등이 조성되면 장수는 산악자전거 특화 관광지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인터뷰] 최훈식 장수군수 “장수군의 산악관광은 단순히 행사를 많이 여는 것이 아닙니다. 장수의 산과 숲, 계곡이 지닌 자연의 흐름을 사람들의 다양한 활동과 연결하는 과정입니다.” 최훈식 군수는 장수군이 추진하고 있는 국제산악관광도시 전략의 핵심을 이렇게 설명했다. 장수의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관광과 산업, 생활이 함께 성장하는 새로운 지역 모델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최 군수는 장수의 산악레저 콘텐츠가 서로 다른 종목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흐름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트레일러너는 능선을 따라 숲을 달리고, MTB 라이더는 같은 산줄기를 또 다른 방식으로 체험합니다. 캠퍼들은 숲속에서 머물며 자연을 더 느리게 경험하죠. 이렇게 다양한 활동이 서로 이어지면서 장수의 산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거대한 아웃도어 무대가 됩니다” 그는 산악관광을 단발성 행사나 이벤트가 아닌 미래 발전 전략으로 바라보고 있다. 트레일빌리지 조성과 민관 협력, 장수형 산악레저 상품 개발, 지역경제와 연계한 관광 프로그램 등을 통해 관광과 정주, 산업이 연결되는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최 군수는 “장수가 지향하는 국제산악관광도시는 대규모 개발이 중심이 아니다”라며 “자연과 주민의 환대, 청년의 참여, 민간 브랜드와 지역 문화가 어우러지는 장수형 산악 생활권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이어 “산악관광의 궁극적인 방향은 장수를 찾는 사람들이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라 자연을 함께 즐기고 머무는 생활 인구가 되는 것”이라며 “장수의 산과 숲을 기반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국의 샤모니’ 국제산악관광도시로 성장시키겠다”고 밝혔다. 최 군수는 “장수의 자연은 이미 준비돼 있다”며 “이제 그 자연을 통해 미래를 설계하는 일만 남았다”고 장수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현재 장수군은 산악레저와 관광, 지역경제를 연결하는 새로운 관광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자연과 사람, 지역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가는 산악관광 전략이 ‘한국의 샤모니’라는 목표에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장수=이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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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진
  • 2026.03.12 10:15

[동학농민혁명 세계기록유산 미등재 기록물] 김낙철 역사(金洛喆歷史)·김낙봉 이력(金洛鳳履歷)

△김낙철 역사(金洛喆歷史) 전라도 부안의 접주 김낙철(1858∼1917)이 1890년 6월 7일(이하 음력) 동생 김낙봉과 함께 동학에 입도한 이래 1917년 12월 14일까지 일기 형식으로 남긴 자전적 기록이다. 국한문 혼용체로 쓰여있으며, 일기 형식이기는 하지만, 매일의 일을 기록한 것은 아니다. 동학이나 천도교와 관련하여 중요한 상황이 있을 경우에만 기록하고 있다. 분량은 모두 38면이다. 김낙철·김낙봉 형제의 본관은 부안이다. <김낙봉 이력>의 1890년 기록에 따르면 김낙철의 집안은 1,000년이 넘게 부안에서 대대로 살아온 명문고족[盛門高族]이었다. 이전 시기의 집안 내력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5대 동안 독자로 내려오다가 그의 부친 대에서 형제가 출생하였으며, 이 형제가 맨손으로 집안을 이루어 몸소 수만 환(圜)의 재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김낙철역사>에도 역시 자신이 부자였음을 밝히고 있다. <김낙철 역사>에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다른 자료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중 눈에 띄는 몇 가지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낙철은 1890년 6월 7일 동생 낙봉과 함께 동학에 입도하였다. 열흘 뒤인 6월 17일에는 동생 낙주(洛柱)가 종제(從弟)인 낙정(洛貞)·낙용(洛庸)과 함께 입도하였다. 김낙철 등은 1890년 7월부터 포덕(布德)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891년 3월에는 포교한 신도가 몇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 숫자의 신빙성 여부를 떠나 김낙철 형제 휘하 동학교도들의 규모가 적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정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김낙철 형제가 부안 일대에서 전봉준과 손화중이 이끌던 동학농민군 주력부대와 부안 군수 사이에서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낙철과 낙봉 형제는 입도 초기부터 제2세 교조 최시형을 자주 찾아보고 직접 모시기도 하는 등 교단 내에서도 만만찮은 위상을 확보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1893년 2월 광화문 복합상소 때는 동생 낙봉만 참여하였으며, 이때 김낙철은 전라도 도도집(都都執=도집강)을 맡고 있었다. 이 무렵부터 각 지역에서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본격적으로 일어났지만, 김낙철은 큰 문제 없이 포교를 이어갔다고 한다. <김낙철 역사>에는 1894년 3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교단 측의 대응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김낙철은 동학농민혁명의 발발 당시 전봉준에 대해 “고부 전봉준이 민요(民擾)의 장두(將頭)로서 고부 경내의 인민을 선동한다는 말이 들리므로, 은밀히 그 속을 탐문해 보았더니 외면은 민요의 장두이나 내면은 스스로 동학의 두목이라 부르며 다른 사상을 품고 있었다.”고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생 낙봉을 최시형에게 보내는데, 최시형은 “저 봉준은 교인으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니, 절대 상관하지 말고, 몰래 각 접(接)에 기별해서 모두 지휘에 따라 봄을 기다리라.”고 비밀리에 분부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김낙철은 이러한 분부 내용을 은밀히 각 접에 알리고 수도(修道)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봉준이 고부성을 무너뜨린 뒤 각 처의 “무뢰배”가 전봉준과 김개남의 포(包)에 몰려들었고, 부안까지도 위태롭게 되었다. 이때 부안 군수 이철화(李哲和)가 김낙철에게 “부안성을 지켜 외적(外敵)을 막아 달라”고 요청하자 4월 1일에 교인 수백 명과 함께 서도(西道) 송정리(松亭里) 신씨(辛氏)네 재각(齋閣)에 도소(都所)를 설치하였다. 동생 낙봉도 신소능(申少能)과 함께 부안 줄포(茁蒲)에 도소를 설치하여 타 지역 농민군을 방어하였으며, 이에 대해 온 고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2월 12일 김낙철과 낙봉 형제 모두 나주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의 지시를 받은 부안군수에 의해 체포되었다. 12월 23일 경군(京軍)과 일본군 30여명에 의해 압송되어 1895년 1월 3일에 나주 초토영(招討營)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김낙철 형제는 함께 구금된 농민군 32명과 함께 엄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1월 6일 다른 농민군 대신 잡혀 온 3명은 석방되었고, 나머지 29명 가운데 김낙철 형제를 제외한 27명은 모두 포살되었다. 이 무렵 나주 초토영에는 보성군수 유원규(柳遠奎)과 장흥의 이방언(李方彦)이 갇혀 있었으며, 전봉준과 손화중은 그 전날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사실 등을 기록해두고 있다. 김낙철 형제도 그로부터 6∼7일 뒤 서울로 압송되어 진고개[泥峴] 일본인 순사청(巡査廳)에 갇혀 조사를 받은 뒤 다음 날 감옥소에 들어갔다. 이때 서울 감옥소에는 성두한(成斗漢)이 수 백명의 농민군과 함께 옥에 갇힌 지 여러 날이 되었다고 했고, 손화중·전봉준·최경선(崔景善) 등이 갇혀 있었으며, 전봉준은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김낙철 형제는 김방서(金芳瑞)·이방언 등과 함께 3월 21일에 풀려나 3월 29일 한밤중에 몰래 부안(扶安) 인근의 갈촌(葛村)에 도착, 4월 4일 한밤중에 동생 낙봉(洛鳳)과 함께 낙봉 집으로 가서 곁방에 숨었다. 전봉준·손화중·최경원·김덕명 등이 체포된 뒤 나주에 구금되고 서울로 압송된 사정과 전봉준이 다리를 다쳤다는 사실, 성두한이 구금되어 있던 사실, 장흥 동학농민군 지도자 이방언이 체포되어 나주 초토영에 구금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된 뒤 이듬해 3월 21일 석방되기까지의 경과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후에도 부안 동도면 신월리의 친족 집에 토굴을 파고 고초를 겪으며 10개월 간 은신하여 생활한 내용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뒤 각지로 피신한 농민군들의 참상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김낙철 역사>의 원본은 익산에 거주하던 김낙철의 외손녀가 보관해 왔으며 천도교 중앙총부 자료실에는 그 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김낙봉 이력(金洛鳳履歷) <김낙봉 이력>은 1890년 부안에서 형 낙철과 함께 동학에 입도하여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직접 체험한 김낙봉(1860~1937)이 1937년까지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회고 형식으로 남긴 자전적 기록이다. 표지는 없으며, 본문 첫 장에 “金洛鳳履歷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는 이 자료는 한지에 국한문 혼용으로 쓰여 있고, 모두 127면이다. <김낙봉 이력>의 내용은 대부분이 앞에 소개한 <김낙철 역사>와 중복되지만,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우선 김낙봉은 1893년 2월 교조 최제우에 대한 포교의 자유를 요구한 광화문 복합상소 때는 소수인 박광호(朴光浩), 제소(製疏) 손천민(孫天民) 등과 함께 참여하였고,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다가 해산하라는 명령을 듣고 집에 돌아왔음을 기록해두고 있다.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데 대해서는 형 김낙철과 마찬가지로 부정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곧 “전봉준이 자신의 아버지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손에 죽은 일을 보복하기 위하여 민란을 일으켰다가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무장군(茂長郡)에 사는 손화중을 움직여서 큰 난리를 일으키려는 기미를 보고 마음과 정신이 두려웠다.”고 하였다. 또 형 김낙철의 편지를 들고 청산(靑山)의 문암리(文岩里)에 있던 대신사 최시형을 찾아 그로부터 “이것도 시운(時運)이어서 금지할 수가 없다. 그러나 너는 형과 상의하여 접의 내부를 정중히 단속하고 숨어지내는 것을 위주로 하라‘”는 답신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때 최시형으로부터 동학 교단의 간부인 6임의 첩지(牒紙) 4,000여 장을 받았다고도 하였다. 한편 김낙봉은 돌아가려는 최시형이 “서장옥(徐章玉)이 진산군(珍山郡)의 방축점(坊築店)에 회소(會所)를 마련하고 전봉준과 호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날이 저물기 전에 해산을 안 하면 큰 재앙이 대두할 것이다. 건장한 심부름꾼을 시켜 빨리 전하라”고 한 지시를 받고 진산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김낙봉은 진산 농민군의 기세에 눌려 최시형으로부터 받은 지시를 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최시형이 “시운이라 어찌 할 수가 없으니 너도 빨리 내려가서 뒤에서 호응하라 했다"고 거짓말을 전달한 후 도망하듯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음을 기록해 두고 있다. 진산의 농민군이 김낙봉이 떠난 다음날 금산군의 포군(砲軍)에게[이때 방축점의 농민군은 행상 김치홍(金致洪), 임한석(任漢錫) 등이 이끄는 행상과 읍민 1,000명에 의해 114명이 죽고 나머지는 해산하였다-필자]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도 기록해두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초기 동학교단의 대응과 진산 농민군의 활동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또한 4월 3일 전봉준과 손화중 등이 포병 4,000여 명을 인솔하여 부안으로 들이닥쳐 군수 이철화를 잡아 꿇어앉히고 칼을 빼어 목을 쳐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 이때 김낙철이 손화중과 협의하여 이철화가 참혹한 화를 면하게 된 점 등을 기록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사료총서>에는 전체 내용 가운데 김낙봉이 동학에 입도하는 1890년부터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체포되는 1898년까지의 내용이 실려 있다. <김낙봉 이력>의 원본은 전주에 거주하는 증손자 김문철(金文哲)씨가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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