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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 대통령

이따금, 문득, 때로 내가 살고 있는지, 살아 있는지, 이게 사는 것인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인지. 지금 이게 꿈속은 아닌지, 내가 나의 삶을 의심하며 내게 묻기도 하고, 나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내게 묻기도 한다. 내 하루하루가 초라하고 괴롭고 슬퍼지지는 않는지, 그럭저럭 그래도, 잘못 디딘 곳이 많고 볼품없고 허술한 곳이 많기는 하지만, 사람 사는 것이, 그저 그런 거지 그저 이런 거지 이러면 되지 스스로 위안도 하며, 일어나 세수도 하고 이빨도 닦고, 물도 마시고 어질러 놓은 책도 챙기고, 거실도 정리하고, 밖에 나가 앞 산도 한번 보고, 뒷산도 돌아다 보고, 물도 보고, 숨도 몰아쉬며, 아침이구나, 또 하루를 시작하였다. 참새가 벌써 새끼를 기르나, 마당 가 감나무 잎 사이에 푸른 벌레를 물고 나를 경계한다. 까치가 앉아 있는 느티나무도 본다. 어? 오늘 아침에는 꾀꼬리가 날아와 나무 꼭대기에서 바람으로 가만 가만 노랗게 그네를 타는구나, 집 밖으로 걸어 나가 마늘 밭 가를 어슬렁거리고, 흘러가는 구름도 바라본다. 찔레 꽃은 벌써 지고 없구나. 나는 지금, 쓸쓸한가? 한가한가? 나의 시에 대한 나의 고민과 외로움과 괴로움은 정당한가. 세상에 대한 나의 말과 글은, 그 행색이 초라하지는 않은지, 내 걸음걸이는 가난하지 않고 내 얼굴 표현은 정당하고, 내 말은 저문 나무같이 아름다운가? 내가 이렇게 살자고 제법 그럴듯한 말로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간섭하고 불편하게 하고, 힘든 데다 더 힘든 말을 보태지는 않은지, 불안과 적개심은 조성하지는 않는지, 마을을 돌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 앞에 샘과 뒷산 감나무를 보고 새소리들을 들으며, 그렇게 생각하였다. 나의 시가 바람처럼, 기억나지 않은 어느 날 날씨처럼 새소리처럼 햇살처럼 없었던 것처럼 자국 없이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내 생이 풀잎이나 나뭇잎을 가만히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 한 점 같이 서서히 사라지면 그만이겠다. 나는 이렇게 살다가 죽고 앞산의 진초록은 해마다 지치지 않고 저리 진저리를 치며 푸르러질 것이다. 숨 막히던 진초록이 지나갔다, 여기까지 산은 얼마나 요동쳤는가. 그러면서 초록은 동색이 되어 성하(盛夏)의 입구에 의연하게 섰다. 올해 새로 길어 난 마당 가 감나무 가지를 뼘으로 재어보니, 30센티미터는 더 자랐다. 감꽃이 피었구나. 꽃진 다음으로 감이 커갈 것이다. 놀랍다. ‘자연은 건너뛰지 않는다’ 나는 평생을 어머님과 아버님이 사시던 집에 살게 되었다. 부모님이 사시고 내가 태어나 자라 사는 집이 아니었으면 이런저런 일 속에서 사는 내 마음이 더 편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할 때도 더러 있다. 살아 온 많은 것들을 잊고 잃어버리고 사니까. 나의 삶은 고향을 멀리 두고 이따금 그리워하며 사는 일상이 아니다. 회한이 더 짙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나는 내 삶을 내 주머니에 우겨서 넣고, 만지작거리며 날이면 날마다 강가로 걸어 나간다. 바람이 부는구나. 몇천 만개의 나뭇잎을 흔들고 몇천 만개도 넘는 바람이 앞산에 불어오는구나. 오늘은 강 건너 숲에서 새들이 많이도 우짖는다. 새들아 오늘 만은 우리를 위해 울어다오. 강가에 서 있다가 삶이 이래도 된다고, 어쩌겠냐고, 가보자고, 오늘도 강을 건너가 보자며, 그러자며 강을 건너간다. 그냥, 사는 게 이렇게 호젓하게, 삶은, 삶이 이렇게 구석구석 살아지는구나. 그래, 이렇게 사는 것이 사는 것일 수도 있겠다. 강을 건너면 산이다. 산을 올려다본다. 그 위에 구름이다. 구름은 흐른다. 때로 나를 고요하게 들여다보고, 후회하고 나를 괴로워하고 미워하고 싫어하며 세상에 나의 잘못을 인정하며, 때로는 못난 나를 스스로 위로하다, 다시 걷는다. 걷는 것이 나는 좋다. 지금을 버리고 다음을 딛고 그다음 새 땅을 디디면 또 새 땅이 온다. 나는 우리들의 일상에서 대통령이 있는 듯 없는 듯 잘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아니라 멋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정말 ‘멋진 사람’ 말이다. 나는 이 나라 백성이다. 때로는 나도 나라를 생각하며 잠 못 이룬 적은 있었지만, 대통령을 생각하며 ‘그런’ 적은 없었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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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04 16:12

[금요칼럼] AI+X 시대의 새로운 도전

얼마 전 영국의 세계적 대학평가기관인 타임스고등교육(Times Higher Education, THE)가 주최한 아시아대학 총장 컨퍼런스에서 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우송대의 국제화 전략에 대해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더불어 그 자리를 통해 아시아 유수의 대학 총장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고등교육의 미래를 논의할 수 있었다. 총장들은 공통적으로 대학의 경쟁력 확보를 위한 국제적인 대학평가의 중요성과 AI를 고등교육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마지막 날 발표된 아시아 10대 대학의 순위는 필자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우리나라의 주요 대학이 당연히 순위에 포함될 것이라 기대하며 자리를 지켰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발표된 10개 대학 중 무려 7개 대학이 중국 대학이었고, 특히 중국의 저장대학교(Zhejiang University)의 성장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저장대학교의 성공 배경에는 AI를 기반으로 한 융합교육 ‘AI+X’에 있었다. 교양대학에서 인문학적인 소양 교육을 받듯이 학생들의 AI 기초 소양 교육을 의무화하였고, 이를 각 전공 분야와 융합하여 고등교육 전반에 녹여냈다. 이러한 AI 기반 교육 혁신을 바탕으로 학업이 연구, 창업 등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저장대학이 중국의 혁신대학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특별한 교육과정을 통해 세계적인 AI 기업 딥시크(Deepseek)의 창업자인 량원펑을 배출하게 되었고, 딥시크 AI는 저비용 고효율 모델 개발을 통해 기술 접근성이 향상되고 중국-서구 간의 AI 기술 격차를 감소시키는 역할을 해냈다. 오늘날 세계는 ‘AI+X’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혁신의 방향을 바꾸고 있다. 산업계에서는 ‘AI+제조업’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교육과 연구 현장에서는 ‘AI와 전공을 결합한 융합형 인재 양성’이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AI를 도구로 보는 것을 넘어 AI와 데이터를 분석하고 활용하는 기술인 데이터 사이언스(Data Science)를 결합하여 ‘AI·DS’를 핵심역량으로 교육체계를 바꾸고 있다. 이에 따라 대학들도 ‘특성화 분야의 전공과 AI 역량을 갖춘 융합인재 양성’을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고 이러한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에 전념하고 있다. 취업시장에서도 과거 ‘인성’을 강조하던 시대에서 벗어나 AI 역량을 기본소양으로 갖추고 전공 및 협업 능력을 갖춘 인재를 선호하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AI+X’형 학습은 단순한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는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인생 2라운드를 준비하는 세대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퇴직 평균 연령이 49.4세인 현실에서 AI는 새로운 도전의 문을 여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빠르게 변하는 사회는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을 없앴고 대학에서 4년간 배운 전공으로 평생을 버틸 수 없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나이와 관계없이 새로운 공부를 해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기술 발전 속도가 워낙 빠르고 경험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시대이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배워가려는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음을 실감한다. AI에 대한 시대적 요구를 받아들여 대학도 청년들만을 위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모든 세대를 위한 평생학습의 장, 특히 AI와 연계한 재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누구나 언제든 다시 배우고 도전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미래 사회를 준비하는 대학의 중요한 역할이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AI와 함께하는 살아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AI가 이끌어가는 새로운 시대는 우리에게 기회를 앗아갈 수도 있고 다른 기회를 줄 수도 있다. 지금까지 쌓아온 실력과 경험을 AI와 연결시켜 ‘AI+X’ 시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방향성 있는 ‘새로운 도전’만이 그 기회의 문을 열 열쇠가 될 것이다. 대학은 이미 문턱을 낮추고 넓혀 놓았으니 보다 많은 이들이 기회의 열쇠를 쥐게 되기를 희망한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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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29 18:14

[금요칼럼] ‘이재명의 민주당’은 ‘윤석열의 여당’보다 나을까!

‘윤석열의 권력은 실패’다. 통합의 구심점은커녕 권력은 양극화된 진영대결의 한 축으로 전락한다. 대한민국 공동체 미래의 준비와 선도도 물론 불가능했다. 권력의 실패는 ‘정치의 실패’다. 견제와 균형의 붕괴는 입법부의 기능상실과 권력 집중으로 이어진다. 문제해결 능력과 타협 부재의 정치는 정치 리스크를 높이고 결국 국민 신뢰를 잃는다. ‘민폐가 된 정치 리더십’으로의 퇴행이다. ‘권력과 정치의 실패’는 제도적 결함의 결과로 ‘정당의 실패’에서 기인한다. 정당 실패는 정당역할의 상실로 ‘제왕적 대통령과 야당대표 권력’으로의 종속과 당내 민주주의 훼손 나아가 입법부 역할의 포기로 이어진다. 대의 민주주의의 기능 부전이자 위기 심화다. ‘윤석열 권력 종속의 국민의힘’은 대통령 취임 전부터 나타난다. 2022년 4월 ‘검수완박’법안은 대통령 당선인의 반대로 여야 합의 4일 만에 무효화된다. “국민의 뜻”이라는 게 합의 파기에 대한 여당 측의 공식 설명이다. 의원총회에서 추인까지 받았던 여야 협의안의 번복은 입법부의 자율성보다 대통령의 권력이 우선임을 상징한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대통령의 “특정 세력의 유도 가능성”과 “민주당의 여론조작” 그리고 “북한 지령에 따른 행동”등의 발언들은 여당 의원들에 의해 반복 된다. 대통령의 주장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권력 복종’의 전형적인 여당 사람들이다. ‘이준석 대표 축출’과 ‘김기현 대표 당선과 강제(?) 사퇴’ 그리고 ‘한동훈 비대위원장 선임’도 대통령의 뜻으로 해석된다. 집권 여당대표의 진퇴를 사실상 대통령 한 사람이 결정한 셈이다. 여당 국민의힘의 정당으로서의 자율성과 당내 민주주의의 심각한 훼손이다. 김상욱 의원이 “국민의힘은 정당으로서의 기능이 마비된 상태”라며 “야당이 된다 해도 야당으로서 견제기능조차 수행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하는 이유다. 집권 여당 민주당의 가능성이 높은 지금 ‘이재명 권력의 민주당’은 “삼권분립이 이제 막을 내려야 될 시대”를 구현하려 한다.2022년 대선 슬로선 ‘이재명은 합니다.’의 구체적인 실천이 진행 중이다. ‘이재명 재판 중지법’은 ‘피고인이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때에는 법원은 당선된 날부터 임기 종료 시까지 공판절차를 정지하여야 한다.’고 명시한다. “묻지마 이재명 당선법”은 공직선거법의 허위사실공표죄 구성 요건 가운데 '행위'를 삭제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그들의 뜻대로 개정안이 통과되면 이재명 후보의 해당 혐의는 자동 면소된다. 헌법 제84조의 ‘불소추 특권’을 둘러싼 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허위사실공표죄의 ‘행위’ 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2021년 합헌결정을 내린 상황이라 위헌소지가 있을 수 있다. “사법권 침해” 우려와 정치적 압박 비판은 무시 된다.민주당은 “사법 쿠데타”나 “사법살인”으로 본다. ‘재판 4심제’로 불리는 사법부의 판결에 대한 헌법소원 청구 확대안과 대법원장 청문회와 탄핵론으로 이어진다. 지난 3년에 걸쳐 완성된 ‘이재명의 민주당’이 가져온 당연한 결과다. 이재명의 민주당은 압도적 당 대표 재선과 “비명횡사”의 2024년 총선공천으로 마무리되었다. 윤석열의 여당과 이재명의 민주당 모두 (대통령이든 야당대표든 제왕적인) 개인권력 중심의 정당이다. 한국 정치에서 정당은 견제와 균형의 원칙보다는 권력의 맹종을 우선 한다. 집권당은 언제나 “청와대(용산) 출장소”였다. 귀결은 입법부로서의 독립적 역할과 견제 기능의 상실이다. 당내 민주주의의 붕괴도 마찬가지다.‘정당-정치-권력의 연쇄 실패’는 한국 민주주의의 중대한 위협이다. ‘이재명 개헌안’은 ‘대통령 권력의 분산과 국회 권한과 기능의 강화’로 요약되는데 입법부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전제 될 때 성공 한다. 대통령과 입법 권력의 민주적 견제와 협력의 동적 균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제도적 협치 시스템은 권력의 건강한 긴장관계에서 시작한다. 정당의 실패는 다양성과 역동성의 당내 민주주의의 파괴로 결말은 정당의 사회적 대표성 약화와 결여다. 유권자 10명 중 6명 이상은 “정당이 자신의 의견을 대변하지 못한다.”며 “현재의 정당체제로 민주주의 유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정당의 제자리 찾기(성공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없이 한국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은 담보되지 않는다. 당내 민주주의 강화를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통한 권력 견제의 제도화가 요구된다. “권력은 조심히 사용해야 하고 민주당 안에서 견제와 균형을 찾아야 한다.”며 “권력폭주가 있을 때 ‘이러면 안 됩니다.’라고 직언한다.”는 김상욱 의원의 다짐이 민주당에서 실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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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22 18:33

[금요칼럼] 다들 잘 알지만 쉬쉬 하는 작가들의 사정

나는 집필노동자다. 보통은 시인이나 작가라고 불리지만 서른 두 해 동안 나를 버팅기도록 도와준 건 집필노동이다. 집필노동자의 수입원은 두 가지다. 매체에 기고하면 나오는 원고료와 출판사와 저작권계약을 맺고 낸 책에서 발생하는 인세 수입이다. 우리나라에 문학(시인, 소설가, 수필가) 종사자를 알려주는 국가통계 따위는 없다. 어림짐작으로 30만명쯤 되리라 생각한다. 이들 중에 저작 활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작가는 넉넉하게 잡아도 300명을 넘지 않을 테다. 오직 0.001 퍼센트에 드는 사람만이 글을 써서 먹고 산다. 오직 집필 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는 작가는 천운 덕분이다. 작가들은 생계를 꾸리려고 교사, 대학교수, 언론출판계, 의사, 건축가 같은 일을 하고 그 나머지는 비정규 노동자 처지와 다를 게 없는 학원강사, 판매직, 자영업, 공사장 잡부, 대리기사, 시간강사, 자서전 대필 같은 허드렛일을 한다. 글쓰기 외의 직종에서 일하는 작가들은 직장에서 퇴근하고, 혹은 주말에 몰아서 글을 쓴다. 드물게는 이종격투기나 장례지도사나 연예인 같은 직종의 일을 하면서 쓰는 이들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는 될 테다. 얼마 전 한 후배가 대리기사를 한 경험을 장편소설로 써서 책을 냈다. 신문사 두 곳 신춘문예 공모에서 시와 소설이 잇달아 당선되며 유망한 신인작가로 주목을 받은 작가다. 그가 유력 출판사들에서 출판 제의를 받은 게 16년 전 일이다. 그 뒤로 시집과 소설책 몇 권을 냈으나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가 받은 인세는 용돈으로 쓰기에도 부족했을 테다. 그는 무명작가로 살지만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가끔 저러다가 굶어죽지 않을까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업계의 사정을 흘리자면 원고료는 40년 전과 똑같고, 작가들이 몇 해에 걸쳐 쓴 작품이 출판사와 저작권 계약을 맺더라도(그건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책이 중쇄를 찍는 경우는 훨씬 더 드물다. 나는 종종 성인 열 명 중 여섯이 일 년 내내 책 한 권 읽지 않는 척박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나온 건 기적 그 이상의 일이다. 그보다 작가들이 굶어 죽지 않고 살아서 글을 쓰고 있다는 게 더 기적일지도 모른다. 여섯 해 전 한 시인이 굶어 죽은 일이 일어났다. 죽은 뒤 보름이 지나서야 비참한 상태로 발견되어 지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게 외부로 알려진 건 그가 ‘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 ‘육체쇼와 전집’ 같은 시집으로 주목을 받고 유명 문학상을 수상한 덕분이다. 이런 업계의 참담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신문사나 계간지의 신인작가 공모에는 수 백, 수 천의 작품들이 몰린다.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당선하는 건 단 한 사람이다. 그들이 머잖아 처하는 사정은 앞서 밝힌 것과 어금버금하다. 이 업계가 처한 현실을 잘 알지만 다들 쉬쉬 하며 말을 꺼내지 않는다. 나라 경제 규모는 40년 전보다 훨씬 더 커졌지만 작가들은 최저 생계수준에서 허덕인다.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창작기금을 주고, 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문학 우수도서를 뽑아 간접 지원을 하고는 있지만 그건 언 발에 오줌누기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출판 편집자 15년 경력을 뒤로 하고 불가피하게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 뒤 서른 두 해나 우직한 회사원처럼 글 쓰는 데 매달렸다. 나는 술담배를 하지 않는다. 술자리에서 흥청망청 한 기억도 없다. 한때는 방송 패널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했지만 들인 시간과 노고에 견줘 수입은 보잘 것이 없었다. 집필노동으로 생계를 꾸린 일에 한 줌의 자부심이 없지 않은데, 물론 이건 재능이나 성실함 때문이 아니라 행운 덕분이라는 걸 잘 안다. 어쨌든 빈사상태에 빠진 이 업계를 살리려면 정부가 지금처럼 뒷짐 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한시도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작가의 생계나 복지 실태를 살펴보고, 40년 째 그대로인 원고료를 올리며, 작가에게 노후 연금을 지급하는 지원책 등을 내놓아야 한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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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15 18:08

[금요칼럼] 나무와 어린이와 대통령

나는 우리나라가 나무를 ‘제일로’ 사랑하는 나라였으면 좋겠다. 오래된 나무들은 더 오래 살도록 보호해 주고 어린 나무들은 나라의 곳곳에서 자기가 사는 땅을 기름지게 할지니, 잘 자라도록 돌보고, 길을 내거나 집을 지을 때, 나무 한 그루에 대해 오래 생각하고 오래 토론하고 그 나무를 보고 사는 사람들의 의견들을 모아 나무의 운명을 결정하면 좋겠다. 오래된 나무들이 공사판에서 함부로 뽑히고 찢기고 잘린 체 하얀 속살을 보이며 나자빠져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하고 부아가 치밀 때가 많다. 내가 다니는 강변길에서 자란 기세가 좋거나 장래가 엿보이는 나무들을 나는 가꾼다. 칡넝쿨같이 강한 넝쿨들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걷어주고, 웃자란 가지들을 다듬어 준다. 인간에 대한 모독이 인간만을 상대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얽힌 사연들을 함부로 내팽개치는 인간들의 무심하고 무지한 행위가 어떤 범죄 행위보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다. 이런저런 공사로 마을 강변에 오래 버티고 있던 나무와 바위들이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다. 나무도, 오래된 돌들도 호적을 만들면 어떨까. 마을의 나무나 강변의 큰 바위들을 관리하는 나라의 ‘관리 부서’가 있어야 한다. 한 그루의 나무 때문에 하나의 커다란 바위를 보호하기 위해, 그 나무를 돌아가고 멀리 구부러진 길을 갖고 있는 나라는 아름다움을 지키는 나라다. 길이 조금 구부러지고 공사에 돈이 조금 더 든다고 나라가 망하는 것도 아니다. 나무 한 그루 때문에 길이 구부러져 있는 것을 본 어떤 어린이가 “아빠, 저 나무 때문에 이 길을 이렇게 멀리 돌아가는 거야?”하고 물을 때 아빠는 무슨 말을 할까, 생각만 해도 아름다운 질문과 대답이 그려진다. 우리나라가 어린이들을 ‘제일’로 생각하는 나라였으면 좋겠다. 나는 어렸을 때 마을 어른들에게 네 가지 말을 들으며 살았다. ‘사람이 그러면 못 쓴다. 사람이 그러면, 안되지. 공부만 잘하면, 뭐하냐, 사람이 되어야지’ 아이들이 싸우면 어른들은 이렇게 말했다. “냅둬라, 애들은 싸워야 큰다”. 싸우면서 아이들은 자잘못을 스스로 알고 뉘우치고 깨달아 자기를 고치고 바꾸어 마을 사람들과 생각을 맞추며 살아가도록 했다. ‘남의 일 같지 않다.’고 가르쳤다. 마을에서 일어나고 벌어지는 일들이 다 내 일 이었다. ‘사람이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고 가르쳤다. 마을에 한 아이가 태어나면 온 마을이 다 그 어린이의 선생이었다. 도둑질하면 안 되고, 거짓말하면 안 되고 막말하면 안 된다고 나는 마을에서 배웠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나라를 어떻게 가꾸겠다는 말은 안 하고, 입을 열었다, 하면, 험한 막말로 남이나 헐뜯고, 초등학교 앞에서 엄청 난 숫자의 어른들이 모여 고함을 지르며 막말하며 다툰다. 어린이들이 듣고 보고 배운다. 공부를 잘해서 좋은 학교 다니고, 나라의 일을 관리하는 공무(?)원이 되면, ‘좋은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한다. 좋은 사람은 ‘나랏일’과 ‘나랏돈’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나무도 돌도 어린이도 힘이 없다. 어른들의 생각대로 배워 세상으로 나간다. 나무와 어린이들이 저 5월의 푸르른 산처럼 바람을 타고, 강물처럼 출렁이며 흐르도록 해야 한다. 연두색에서 초록의 건너가는 앞산에 꾀꼬리가 날아와 운다. 저 산 아래에서 우리 사람이 해야 할 말을, 할 짓을 생각해 보자. 멋진 어른은 없는가. 아름다운 말을 하는 어른들은 없는가. 대통령이 되면, 의원이 되면, 도지사 군수 시장이 되면 뭐 하나?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좋은 대통령, 좋은 공무원이 되어야 하지. 우리에게 그런 사람이 있는가.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을 나와 높은 곳(?)을 차지한 사람들의 파렴치함 이 나라의 기강과 인간의 근본 정신을 망가뜨리고 있다. 대통령은 가장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나라의 선생님이다. 나라가 어떻게 되는 것은 다 대통령 탓이다. 저 산의 나무들과 저 하늘의 별들과 강가의 돌과 저 학교의 어린이들과 우리 국민에게 인간 교육을 담당할 ‘선생님’이 될 자신 없으면 지금 당장 그만두라.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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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08 14:43

[금요칼럼] 따뜻한 5월에 기억되는 일들

'가정의 달'인 5월이 될 때면 머릿속에 기억나는 일들이 있다. 부모님의 은혜와 희생을 생각하며 어버이에 대한 감사한 마음, 제자의 성공을 보면서 기뻐하는 스승의 마음을 회고해보면 봄날씨처럼 마음이 따뜻해진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방영중인 '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제주 태생의 반항아 애순이와 팔불출 무쇠같은 관식이의 삶에서 우리 부모님 세대 삶의 모습과 자식을 위한 부모님의 희생과 헌신 등의 모습이 비춰지며 매회 드라마를 볼 때마다 마치 우리 부모님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눈시울 붉어지며 콧등이 시큰거린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부모님의 모습과 함께했던 일화가 떠오른다. 중학교 시절, 어머니가 정성껏 준비한 점심 도시락을 잊고 등교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내 이름을 외치며 도시락을 들고 뛰어오시는 어머니가 보였다. 아들이 굶을까 싶어 체면 가리지 않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선연히 남아있는 것은 당시 어머니의 애정을 모르고 부끄러운 마음에 짜증만 냈기 때문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종종 그때 그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걸 보면 못난 나의 행동에 대한 자책이자 반성이지 않을까 싶다. 아버지와도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필자의 아버지는 당시의 다른 아버지들처럼 희로애락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분이셨고 고생스러운 삶을 그저 담담하게 살던 분이었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던 날이 떠오른다. 고사장에서 시험을 보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12월 한겨울 날씨에 교문 앞에서 기도하며 종일 서 계셨다. 시험이 끝나고 나가니 아버지는 '고생했다. 밥 먹으러 가자.'라며 중국집으로 필자를 데리고 가셨고 별말 없이 짜장면을 나누어 먹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상하게 그 당시가 뇌리에 남아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사는 여동생과 통화를 하며 처음 듣게 된 이야기인데 필자가 박사학위 시험에 통과했다는 국제전화를 받으시곤 너무 기쁘신 나머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고 한다. 감정표현을 잘 안 하시던 아버지에게 그런 모습이 있었다니! 또, 그렇게 기뻐하셨다니! 돌아가신 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부모님은 필자를 포함한 네 자녀를 공부시키고 독립할 수 있도록 고생과 희생을 했지만 조용하고 덤덤하고 꾸준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불평 없이 불만 없이 필요한 순간에 꼭 필요한 것을 내어주셨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지도해주셨던 헨켈교수님도 부모님과 같은 분이다. 재직 중이던 대학을 휴직하고 유학을 떠났기에 정해진 기간 내에 학위 논문을 마무리해야 했던 사정을 고려하여 필자보다도 훨씬 더 신경을 쓰셨다. 좋은 논문을 쓰기 위한 필자의 노력을 존중하면서도 '박사논문은 그 분야에 학문을 시작하는 단계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좀 더 하고 싶은 내용은 박사 후에 심층적으로 연구를 펼쳐나가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책임지듯이 헨켈교수님은 한-독 국제 공동연구를 제안해서 연구과제 제안서를 손수 준비하고 본인의 뛰어난 연구실적을 바탕으로 본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몇 번이고 정부에 설명하였다. 막 박사학위를 취득한 초년병인 필자는 교수님 도움으로 수준 높은 국제연구의 공동기여자가 될 수 있었다. 2년간 열심히 했던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당신의 일처럼 기뻐하시던 기억이 난다. 무심하게 살아왔지만 돌아보면 온통 감사할 일로 가득하고 특별히 내 인생에 불을 밝혀 앞길을 편히 갈 수 있도록 말 없는 다정으로 나를 응원해주신 분들이 있다. 언제나 묵묵히 곁을 지켜주신 부모님,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등대가 되어주신 스승님. 5월의 푸르고 따뜻한 계절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또 그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부모님, 스승님을 떠올릴때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동화가 생각난다. 울창해진 나무가 숲을 보호하며 자연을 살리다가 나중에 장작이 되어 태워지는 것처럼 자녀, 제자를 위한 희생을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셨음을 새삼 느낀다. 올해 가정의 달에는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과 스승에 대해 회고하면서 감사를 기억하고 그분들에게 말로 다 전하지 못했던 감사의 마음을 모아서 자녀와 제자들에게 내리사랑의 마음으로 전해주고 싶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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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01 18:22

국민의힘 당원과 지지층의 선택은 무엇일까?

6·3 대선을 향한 양당 경선이 한창이다.민주당은 “어대명을 넘어 구대명”으로 당내경선에서 이재명 후보는 90% 득표 중으로 사실상 요식절차만 남았다. 그는 본선을 겨냥하며 ‘전략적 침묵 중’이다. 논쟁이나 논란 대신 ‘포용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게 초점이다.예전의 ‘사이다 맛이 사라졌다.’는 말이 나오더라도 ‘규제 완화 대신 규제 합리화’나 ‘의대 증원 대신 의대정원 합리화’ 라고 말한다. 갤럽기준으로 최근 이재명 후보 지지율은 연이어 최고치를 경신하며 30% 박스권을 탈출하는 모습이다. 전국지표조사(NBS)의 가상 3자 대결에서 그는 국민의힘 3강 후보 중 누구와 붙어도 45%를 득표한다. 이준석 후보와 국민의힘 후보 지지율을 산술적으로 모두 합해도 25%에서 31%에 불과하다. 가상 3자 대결에서 이재명 지지율이 50%선에 근접한다는 예측조사도 나왔다. 12월 계엄이후부터 최근까지 실시된 여론조사 67개를 종합한 지지율 예측조사로 이에 따른 그의 지지율은 49.8%다. 이재명 대권의 걸림돌은 대부분 사라지는 모습이다. 내부적으로는 호남 경선의 투표율과 득표율이 관심일 정도다. 본선 차원에서 보면 “이례적”이라는 대법원장의 직접 전원합의체 회부와 당일 바로 합의기일을 정한 것인데 대선 전에 대법원 결론이냐가 핵심이다. 지금 현재로는 ‘정확한 시점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대체적 분석이다. 이제 남은 변수는 ‘제3지대 반명(反明) 빅 텐트’다. 미래 지향형 단일 후보로 ‘1:1 양자대결’이어야 그나마 해볼 만한 선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출발점일 수 있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성공조건은 까다롭다. ‘이재명은 안 된다.’가 출발점이지만 유권자 58%가 “반대만 하는 연대는 지지하지 않겠다.”는 것이 부담이다. “빅 텐트”의 성공을 위한 ‘비명+반명 세력의 정치개혁의 연결고리’가 필요하고 단일 후보의 리더십과 다양한 참여세력 간의 정치적 신뢰도 전제되어야 한다. '빅 텐트'는 일단 한덕수 참여여부부터가 결정적이라고 한다. “90% 확률로 출마할 것”이라는 전망과 “한덕수가 나오는 순간 검증이 시작될 거고 버티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엇갈린다. 그의 참여는 디딤돌이자 걸림돌이라는 뜻이다. “범보수 대선후보 적합도 1위”이자 “54명 의원으로부터 출마요청”을 받지만 동시에 “탄핵받은 정권의 총리가 대통령에 나오겠냐!”라는 우려 때문이다. “단군 이래 최고의 몸값”이 될 이준석의 참여는 “빅 텐트”의 완성이기도 하다. 국민의힘은 1라운드를 마치고 4강전을 향한다.4강은 ‘찬탄과 반탄 반반’으로 평가된다. ‘나경원 탈락 이변’으로 “경선 외면했던 유권자들이 돌아보게 됐다.”는 말도 나온다. 1라운드는 ‘일반국민 여론조사 100%’로 지지자와 무당층만을 포함하는 역선택 방지조항에 따라 사실상 당심이 결정적일 것으로 봤다. 그래서 ‘나경원 탈락’은 의외다. “이념이 곧 밥”이고 “체제 전쟁의 선거”라며 반탄 집회의 주요연사였던 그녀의 ‘드럼통 무리수’ 결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안철수 4강’은 전략적 선택의 가능성으로 해석된다. 사람들이 이제는 ‘탄핵 찬반 여부는 안 따진다.’며 중도 확장성과 ‘그를 이길 수 있는 후보’가 누구냐는 본선 경쟁력의 기준으로 투표한다는 말이다. 안철수 후보는 “탄핵된 전직 대통령의 탈당은 책임정치의 최소한”이라며 “윤석열 탈당”을 주장한다. 그래서 그의 4강 진출은 국민의힘 경선이 ‘찬탄 vs. 반탄 구도’를 넘어선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윤석열 전 대통령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예상과 기대보다 빠른 ‘윤석열 아웃’의 모양새다. ‘윤 어게인 신당창당론’은 그에게 비판적인 중도층 여론을 자극했을 것이다. 그는 “이기고 돌아왔다.”며 “이번 선거에서 우리 당이 승리해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확증적 망상”으로 “병원 가야”한다는 반발과 “당에 부담만 될 뿐”이라며 “중도층과 합리적 보수를 떠나게 할 수 있다.”는 비판을 듣는다. 관심은 2강 압축이다. “1~3위 후보들은 사실상 의미 없는 수준의 차이”로 “반탄 vs. 찬탄 득표율은 6:4 정도”로 알려져 있다. “당원투표 50%로 더 보수적일 가능성”이라는 전망과 ‘탄핵의 강을 건너는 전략적 판단’일 것이라는 예상이 엇갈린다. 대선은 근본적으로 ‘국민의힘 책임선거’다. 그들의 ‘야당 할 준비’가 원칙적이다. 이번 경선은 단기적으로는 대선 이후 진영과 당의 성찰과 책임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미래를 향한 준비의 개혁 리더십을 결정하는 출발점이다. 국민의힘 당원과 지지층의 선택을 주목한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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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24 18:39

[금요칼럼] 무심과 평안

봄이 늦은 파주 교하에도 마침내 벚꽃이 피고 작약 움은 돋는다. 버드나무 가지마다 연두색이 짙어가는 화창한 봄날에도 나는 마냥 즐겁지는 않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맥이 풀리고 울적하다. 어쩐지 나는 “호두 껍데기 속에 갇혀서도 무한한 공간의 왕”(연극 ‘햄릿’의 대사)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파트는 높아졌지만 시야는 좁아졌다는 생각이 들 때, 배움의 이력이 늘어 쓸데없는 지식은 많아졌지만 정작 어떻게 살지를 모를 때 마음은 갈팡질팡 한다. 쩨쩨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소란스럽다. 그러면 ‘나는 비정하지만 조용합니다/무심하지만 평온합니다/나는 잘나지 못했지만 혼자 잘났습니다’.(김경미 ‘약속이라면’) 같은 시를 읽으며 마음의 소란을 다독이는 것이다. 살아가는 날마다 중대한 결심이 필요치는 않다. 어제에 이어지는 오늘의 완만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평정심을 갖는 게 더 중요한 덕목이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멍청해지기로 하고, 어제보다 오늘 더 빈둥거려도 좋겠다. 항상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이 세상을 끌고 내달리니까. 세상은 더 풍족해지는 듯하고 데이터의 양은 나날이 쌓인다. 그 양적 팽창이 만드는 지식은 삽시간에 전지구로 퍼진다. 과학, 산업, 기술은 혁신을 좇는 가운데 세상이 퇴보할 거라는 생각은 설 자리가 없다. 그 대신에 기술과 산업의 발달로 세상이 더 살기 좋아질 거라는 기대는 부푼다. 더 많은 이윤을 내는 게 최선이라고 선전하는 세상에서 최선이 아닌 것은 최악 취급을 당한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덜 영악하고 잇속을 덜 밝히고 어슬렁어슬렁 거닐며 바보로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이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는 합법칙적인 물질세계에 산다고 말한 이는 유명한 과학자다. 그는 인간 본성을 탐구한 연구자이자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다. 바로 하버드대학 교수를 지낸 에드워드 윌슨은 ‘통섭’이란 책에서 ‘별들의 탄생에서 사회제도의 운용에 이르기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중략) 물리적 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인간은 이전 세기보다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게 된 사실조차 부정할 수는 없다. 인간은 과거보다 분자, 원자, 생태계, 세포, 유전자, 염기서열, 별, 우주를 훨씬 더 많이 알게 되고, 과거와 견줘 생활의 편리는 늘고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하며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과연 인류는 얼마만큼 더 똑똑해지고, 우리 삶은 어디까지 향상될 것인가. 한편으로 플라스틱 폐기물이 바다를 떠돌고, 엄청난 양의 핵폐기물은 지구에 쌓인다. 과학만능주의가 퍼뜨린 미래에 대한 낙관은 더 난망해지고, 과학이 기후재난 같은 인류의 숙제를 해결할 거란 기대는 어그러진다. 삶을 기계적으로 계측하고 항상 예측가능한 것으로 바꾸려는 이성의 기획에서 제 몫을 찾는 과학자와는 대척적인 자리에 있는 게 시인들이다. 과학자들이 물질을 계량하고 수치화해서 합목적적 논리 속에서 모든 것을 법칙과 원리들로 환원시킨다면 시인들은 자연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영감과 상상으로 존재의 숨은 숭고성과 신비를 콕 집어낸다. 오직 시인만이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한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라고 쓸 수 있을 테다. 봄날의 하루가 아무 일이 없어도 저무는 동안 나는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을 펼쳐들고 겨우 한 줄의 시를 읽었다. 먼저 핀 목련꽃들이 하르르 떨어지는 봄날 오후는 고요로 들끓고 마음은 심심했다. 무심과 평안 속에서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오늘 하루에게 말없이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한다. 잘 가라, 오늘이여. 봄밤에는 모든 이들에게 더 다정해지기로 한다. 까칠했던 마음도 누군가를 용서하고 누군가에게 용서를 받고 싶다는 착한 생각을 하면서 누그러지는 것이다. 그 찰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데 그 미소는 오늘도 무사히 지났다고, 내일도 그렇게 지날 거라는 안도와 기대의 표현일 테다. 하루를 마감하고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은 만개한 벚꽃을 더 볼 수 있는 날이 이어질 수 있도록 좋은 날씨이기를, 바보 이반 같이 살고 싶어 하는 어리석은 누군가도 오늘보다 더 자주 웃으며 착해지기를 바란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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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17 13:19

[금요칼럼] 새봄이 왔어요

아침에 늦잠을 잤다. 이불 속에서 평소보다 오래 누워 있었다. 내가 이렇게 아침 이불 속에 누워 늑장을 부린 적이 없었는데, 일어나야겠다. 일곱 시가 다 되었다. 거실로 나가 누워서 하는 스트레칭(내가 스스로 개발한 열 서너 가지)을 하였다. 몸 컨디션이 괜찮다. 스트레칭을 하고 창을 가린 블라인드를 올렸다. 햇살이 밝고 맑다. 물을 마시고 서재로 가기 위해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 옆에 샘물이 맑다. 며칠 전 봄비가 왔었다. 비가 오면 샘물이 맑아진다. 샘에는 샘 물길을 내주는 가재가 살고 찬물에서만 서식하는 옴 개구리(이 개구리가 옴 개구리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다)가 산다. 비가 오면 바위 틈에서 나와 노는 가제와 개구리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때가 아닌 모양이다. 샘을 둘러싸고 있는 돌들과 샘 위에 바위에는 이끼가 푸르다. 이끼를 자세히 보았는데, 이끼 꽃이 벌써 맺혀 있다. 우리 집 샘 가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고, 그 바위에는 사시사철 이끼가 산다. 이끼는 겨울철에도 물기만 있으면 눈 속에서도 푸르다. 바위 바로 위에 아주 작은 조팝나무 한 그루를 가꾸고 있는데, 그 조팝나무 작은 실 가지를 뚫고 돋아나 있던 잎 눈이 푸른 잎 눈을 틔웠다. 금방 잎이 피고 그곳에서 바로 작은 꽃대들이 오복 하게 솟아 금방 금방 흰 꽃이 하나둘 셋 넷, 일일이 툭툭 터질 때, 아니 튀밥처럼 툭툭 튈 때, 나는 봄에 감격하고 감동한다. 이 조팝나무 온몸에 지는 햇살이라고 떨어지면, 오! 이런, 세상에 이런 일이, 이렇게 새롭고, 이렇게 신비롭고, 이렇게 생생한 감동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마당을 내려 섰다. 작년 잔디는 노랗게 아주 눕고, 그 사이 사이에 작은 못 끝같이 생긴 푸른 새싹이 돋는다. 봄을 맞이하기 위해 새로 단장해 놓은 화단에는 며칠 전부터 수선화가 피어났다. 수선화는 노란색이다. 앵초 꽃이 피고 있다. 할미꽃, 돌 단풍 꽃은 진즉 피었다. 오늘 아침에는 드디어 봄맞이 꽃이 피어난다. 이 희고 작은 꽃잎이 다섯 장인, 이 똑똑한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시려서, 내 눈이 실눈이 된다. 무릎을 꿇어야 잘 보이는 흰 냉이 꽃도 곳곳에 피어났다. 물 까치들이 아침을 먹기 위해 소리를 지르며 날아다닌다. 뒤 안에 작은 살구나무 꽃이 핀다. 빈집 샘 가 앵두 꽃이 피어난다. 집 뒷산에 심어 놓은 작은 벚나무 꽃이 피어나고, 마을 뒷산 4백 년이 넘었다는 느티나무와 마을 앞 2백 년에 되었다는 느티나무와 50년이 넘은 느티나무들은 연두색 불꽃이 터진다. 느티나무 세 그루는 해마다 마을의 새 역사를 쓰고 내게 새 시를 쓰게 하고, 새 정부를 세운다. 봄 비로 몸 단장을 한 까치는 흰 날개를 펼치고 난다. 딱새는 아직 짝을 찾지 못했는지, 전깃줄에 앉아 애타는 연정의 노래를 작곡하여 노래 부른다. 지금 쯤 우리 마을을 향해 꾀꼬리와 파랑새와 호반 새는 날아오고 있을 것이다. 나는 시를 써야지, 새와 바람과 논과 밭과 작은 벌레들과 오래된 농부들의 농사와 떠다니는 아침 구름과 저문 노을에 대해서, 달을 따라다니는 길을 따라 걸으며 시를 쓸 것이다. 나는 이유 없이 도도해지고 싶다. 명랑해지고 싶다. 그 어떤 바람이 불어와도 아첨하지 않고, 앞 산 푸른 소나무에 기죽지 않은 아름다운 시를 쓰겠다. 그날 그때, 문형배 헌법 재판관이‘대통령 윤석열 탄핵 판결 문’을 읽어가다가 ‘민주 공화국의 주권 자인 대한 국민의 신임을 중대하게 배반하였습니다.’는 판결문에서 ‘대한 국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울컥 먹먹했던 것은 나만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판결문은 이 땅에 사는 우리 개개인의 삶과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국가 공동 운명 체에 답하는 역사적 기록 문이었고 훼손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켜 내야 한다는 명문이었다. 꽃피고 새우는 우리나라 우리 봄이 우리를 다시 찾아왔다. 우리 집 작은 한옥 처마 밑 기와 틈에 참새 한 쌍이 짝을 짓고 새로 집을 짓느라 바쁘다. 나는 기쁘고, 나는 이 봄이 좋다. 저 참새 부부가 집 짓는 공사장으로 새참이라도 챙겨가서 이런저런 우리나라 봄을 이야기하며 같이 먹고 싶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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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10 18:53

봄볕처럼 따뜻한 사랑, 서서평(徐舒平)

늦은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개나리와 목련은 한껏 꽃을 피웠고 옷이 조금씩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니 이제는 완연한 봄이다. 그러나 최악의 피해가 예상되는 영남의 산불, 정치적 불안감, 얼어붙은 취업시장, 물가 상승과 경제적 침체,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자국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미, 중, 러 리더들의 행보 등으로 마음은 겨울보다 더 무겁다. 이런 상황에 영향을 받으며 자신도 모르게 우울해지고 현실에 비관적으로 되기 쉽다. 이럴 때일수록 잠시 멈춰 서서 깊이 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면 좋겠다. 난관을 이겨내고 멋진 삶의 궤적을 이룬 사람의 봄볕 같은 희망이 우리에게 서서히 스며들기를 바라며 독일 출신 미국 간호사 서서평(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을 소개한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이타적인 삶’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1880년 독일에서 태어난 그녀는 3살에 자신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난 어머니 대신 할머니 품에서 자랐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기대를 품고 방문한 생모에게 다시 거부당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불행함에 함몰되기보다는 오히려 도약대로 삼아 단단함과 아량을 갖춘 사람이 되었다.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동료에게 조선에서 환자가 치료받지 못하고 길에 버려진다는 말을 듣고 1912년 운명처럼 조선으로 와서 선교사의 삶을 시작한다. 광주에서 가난하고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도왔는데 주로 버려진 과부와 고아들에게 남다른 사랑을 실천했다. 특히, 사회에서 외면당한 윤락여성들의 아픔을 공감했으며 과부들을 보살피고 14명의 고아를 수양딸로 삼아 죽을 때까지 함께 생활하면서 고국에서 지원받은 얼마 안 되는 생활비와 후원금까지 함께 나누어 썼다. 키가 매우 컸던 서서평이 5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난 원인이 영양실조였다는 사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길거리에서 추위에 시달리는 거지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담요의 절반을 나누어 준 일화는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었던 그녀의 성정을 보여준다. 봄볕이 만물을 따뜻하게 품듯 어려운 모든 이를, 어떤 상황에서도 기댈 수 있는 어머니 리더십으로 많은 이들에게, 특히 조선의 여성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혈혈단신으로 조선에 와서 여성들에게 자립의 삶, 간호사로 일하며 나와 남을 도울 수 있는 삶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35살이 되던 해에는 병원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는데 화염 속으로 뛰어 들어가 앉은뱅이 환자를 업어서 구출했던 일도 있었다. 광주에서 미국에 기금을 요청해 양잠업을 지도하고 제주에서는 고사리 채취를 도우며 여성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자 애썼다. 여성들이 스스로의 힘을 믿고 자립하고 또 그 힘을 주변에 나눌 수 있는 역량을 키우도록 힘썼다. 32세인 1912년부터 1934년 5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2년 동안 일제강점기에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광주 궁핍한 지역, 제주, 추자도 등지에서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인들을 돌봤다. 그녀의 장례식은 광주 최초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는데 그녀의 운구 뒤로 소복을 입은 수백 명의 여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애처롭게 ‘어머니, 어머니’라고 부르던 모습은 지금까지 회자된다. 서서평은 검소했지만, 먼 이국 조선의 어려운 이를 위해서는 아낌없이 내어준 ‘이타적인 낭비’를 하며 살았다. 자신의 시신은 의학용으로 기증할 정도로 삶은 물론 육체까지 조선에 모든것을 주고 떠났다. 어머니에게 거부당하고 기댈 곳 없이 외로웠던 그녀는 바람, 햇살, 숲과 함께 자랐다고 고백했다. 그것으로부터 받은 에너지를 물설고 낯선 이국의 사람들에게 온통 베풀고 떠났으며 그녀를 아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아름다울 수 있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절이 수상해서…, 경제가 불안정해서…, 희망이 없는 시대야….’라는 불평은 서서평의 삶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가진 것 없어 보였던 그녀가 희망이 없어 보였던 조선 땅에서 펼친 것은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수많은 사람에게 기적이 되었다. 어려운 시절이다. 올봄에는 그녀가 남긴 봄볕 같은 따뜻한 사랑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 모두가 행복해지는 사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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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03 18:17

윤석열 대통령만 남았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이재명 2심 무죄’로 ‘사법 슈퍼 위크’의 4가지 시나리오 중 두 개가 사라졌다.‘이 대표 피선거권 박탈+윤석열 대통령 복귀’와 ‘피선거권 박탈+파면’은 없다. 이재명 대표의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 항소심에서 서울고법은 무죄를 선고했다. 1심의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피선거권 박탈형’이 뒤집힌 것이다. 이 대표와 관련하여 이제 남은 변수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 시점과 윤석열 탄핵심판의 헌재 선고일이다.예상과 기대(?)보다 늦어지는 헌재 선고는 빠르면 4월 2일 4일 또는 11일이란다. 그 다음은 4월 18일이다. 이 대표는 현재 총 5개 사건의 재판을 받고 있다.조기 대선이면 대선 전에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있는 사건은 이번 선거법 사건이 유일하다. 대법원 상고심 판결 시한은 6월 26일이지만 빠르면 5월 초도 가능하다는 건 이론적 전망이다. 설령 대법원이 항소심 판결을 유죄 취지로 파기하더라도 고등법원에서 다시 재판을 거쳐 대법원이 최종 확정해야 한다.조기 대선 전에 결론이 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말이다. 2심 선고도 1심 선고 후 4개월 11일만이었다. 사법 리스크를 털어낸 이 대표와 민주당은 ‘후보 추대론’과 함께 헌재 앞으로 향한다. 그들은 ‘윤석열의 신속 탄핵’을 촉구하며 광화문 철야농성의 강공에 집중한다. ‘이재명 2심 무죄’ 이후 시나리오 #1은 ‘이재명 무죄 + 윤석열 파면’이다.이 대표는 유력주자로 조기 대선의 독주체제를 강화하고 민주당은 입법부에 이어 행정부 권력까지 장악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대선의 첫 쟁점은 ‘이재명이냐? 아니냐?’다. 윤 대통령 파면 결정에 대한 여론의 반향과 평가가 결정적이다. 윤 대통령의 내란관련 사법처리가 가속화되면서 특히 여권 강성 지지층의 탄핵불복 여부가 주목된다. 46%의 보수 유권자가 “탄핵이 인용되면 시위에 참여하겠다.”고 한다니 정치적 양극화는 악화되고 국민적 불안감은 높아진다. 국민의힘은 적절한 대선후보를 빨리 찾아야 하는 부담을 갖는다. 탄핵 불복의 강성 지지층 이탈을 막으면서 동시에 중도보수의 소구력을 갖춰야 하는 상반된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여당의 대선 후보선출 룰이 중요한 이유로 ‘범보수 원샷(또는 투샷) 경선’론이 나오는데 여당 지도부의 정치력이 결정한다. 이때 핵심은 윤석열 전(前) 대통령이다. 여당 대선 후보경선은 ‘반탄의 윤 계열 vs. 찬탄의 개혁파’ 경쟁으로 출발한다. 헌재와 민주당 기득권에 저항하다 부당하게 탄핵 당한 ‘피해자 윤석열 서사’의 영향력이 중요하다. 탄핵 심판 직후 윤 대통령의 첫 메시지에 주목하는 까닭이다. ‘이재명 2심 무죄’ 이후 시나리오 #2은 ‘이재명 무죄 + 윤석열 복귀’다.‘ 윤석열 vs 이재명의 연장전이자 최후의 대회전’이다. 여소야대는 이어지며 ‘강 vs 강’ 대치는 이전보다 더 악화된다. “윤 기각 땐 나라 망한다.” vs “이 대통령 되면 진짜 망국”의 대결은 ‘광장 정치’의 “민주주의 후퇴” vs. “법치주의 수호”로 연장된다. “49 vs 51 ‘피 흘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우려가 퍼진다. ‘국민적 불안감이 가장 큰 최악의 상황’은 이미 진행 중이다. “국민 73%는 계엄과 탄핵 의견 다르면 같이 밥 먹기도 꺼리는 상황”이고 “의견이 다른 사람이 증거를 제시해도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사람이 79%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석회화된 진영 갈등’의 상징이다. 양 진영 지지층의 상호 불신도는 89%로 2020년 대비 34%p 증가한 수치다. 특히 20대 남성의 68%가 이재명,60대 이상 여성의 72%가 윤석열을 지지하는 세대·성별 격차는 극단화되었다. 결과는 정치적 소외의 확산이다.2030 세대의 68%가 “탄핵 심판 결과와 무관하게 정치 체제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다.”고 한다. 이미 “양당 구도에 회의감을 느낀다.”는 젊은 세대의 투표와 정치참여 하락은 불가피하다. 역시 윤 대통령이 결정적이다. 직무에 복귀한 대통령은 내란 혐의의 사법 리스크와 함께 한다.정치적 혼란은 경제와 안보 상황의 어려움을 더 가중시킨다. 상처받은 윤 대통령의 권위와 신뢰를 계엄 전으로 회복하기는 불가능하다. 계엄과 탄핵의 혼란과 위기에 대한 책임이 윤 대통령의 인식과 행동 변화의 출발점이다. 복귀 직후 대통령의 첫 메시지가 중요한 이유다. 어떤 시나리오든 한국정치는 상당 기간 동안 불확실성의 도전 앞에 선다. 경험한 적 없는 ‘소용돌이의 정치’다.대통령 파면이든 복귀든 대한민국 운명의 갈림길은 윤 대통령에서부터 시작한다. 대통령만 남았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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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27 16:37

들어라, 봄의 속삭임들

3월 다 가는데 날은 여전히 스산하다. 영등할매가 오는 봄에 심술 내듯 한파를 몰아온 탓이다. 영등할매 늦추위에 장독이 깨지고 중늙은이는 얼어서 죽는다고 했다. 영등할매는 음력 이월 초하루에서 보름까지 땅에 머물며 비와 바람을 쥐락펴락 다스리는 가신(家神)이다. 이월 초하루를 영등날이라고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지냈다. 고향 선배인 박용래 시인도 영등할매에 관한 시를 남겼다. ‘김칫독 터진다는 말씀/2월이 떠올리라/묵은 미나리깡 푸르름 돋아/어딘서가 종다리 우질듯 하더니만/영등할매 늦추위/옹배기물 포개 얼리니/번지르르 춘신 올동말동’.(박용래 ‘영등할매’) 며칠 전엔 절기를 잊은 폭설로 내가 사는 파주는 온통 흰눈으로 뒤덮인 설국으로 변했다. 저 멀리 보이는 심학산 봉우리도 눈 쌓여 희끗희끗 했다. 작년 이맘때 출판단지 안 매화나무 검은 가지마다 밥풀떼기처럼 자잘한 흰꽃이 피었었다. 올해는 한파 영향인지 매화꽃 필 기미가 안 보였다. 올 꽃소식은 유난히 늦은 셈이다. 옛 어른들은 아침이 오기 직전 새벽이 가장 어둡고, 봄 오기 전 추위가 매섭다고 했으니, 옛 어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이맘땐 묵은 김치에 질린 탓에 봄동 같이 상큼한 푸성귀 햇것이 먹고 싶어진다. 요즘 먹을 반찬이 마땅치 않다고 툴툴대던 아내가 오늘 아침엔 달래를 넣어 끓인 된장찌개, 갓김치, 구운 고등어를 상에 올렸다. 공기밥 한 그릇을 거뜬하게 비우고 나와서 교하도서관 열람실에 앉아서 반나절을 읽고 싶던 책을 찾아 읽었다. 책을 덮고 도서관을 나와 쾌청한 하늘 아래 오솔길을 걸었다. 찬 바람을 맞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중앙공원 분수대의 물은 얼어있는데, 얇은 얼음장 아래에선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었다. 오솔길을 걸으며 자꾸 ‘복사꽃 피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 뜨고, 초록 제비 묻혀 오는 하늬바람 우에 혼령 있는 하눌이여. 피가 잘 돌아… 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라는 싯구를 혼자 중얼거렸다. 미당 서정주의 ‘봄’이란 시다. 아무 병도 없으면, 슬픈 일 좀 슬픈 일 좀, 있어야겠다라니! 시인이란 무탈하게 지나는 봄날의 심심함도 그냥은 견디기 힘든 족속인 모양이다. 저녁밥 먹고 일찍 잠든 날엔 꼭 새벽에 한번쯤 깨어나곤 한다. 식구들 다 잠든 방에서 혼자 깨어나 앉아 있으면 적적하다. 고요한 한밤중 누군가 육체라는 조그만 막사(幕舍) 안에 갇힌 채 ‘도와 달라!’고 외친다. 그는 몸부림친다.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나는 깜짝 놀라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그 외침에 집중한다. 물론 내가 들은 외침은 환청에 지나지 않는다. 내 안에서 몸부림치고 웃으며 부르짖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내 안의 또 다른 나, 숨어 있는 가 아닐까? 곧 매화 꽃망울 터지고 제비꽃 싹 트고 울 아래 작약은 움이 돋을 테다. 봄날은 그렇게 만개한다. 젊은이들의 심장 속에선 춘정이 돌아 새로운 사랑도 시작되리라. 그건 다 생명의 약동에 따른 일들이다. 큰 야망을 품고 살라고 하고 싶지는 않지만, 오, 지금은 봄이 아닌가? 살아있다는 건 꿈틀대는 것, 갈망으로 타오르는 피의 명령에 무언가를 하는 것, 죽을 만큼 힘을 다해 무언가를 이루는 것! 이렇게 밥이나 축내고 군고구마 몇 개나 입속에 우겨넣으며 군살이나 찌우고 멍청하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하다못해 방바닥에서 머리카락 몇 올이라도 정성들여 줍고, 양지 바른 데서 겨우내 긴 손톱 발톱이라도 깎자. 지아비는 지어미에게 제주 귤 하나라도 까서 건네자. 눈꼽챙이문 밖 하늘에 떠가는 구름 몇 조각이라도 바라보자. 월동 마치고 북녘 고향으로 떠나는 쇠기러기의 무사귀환이라도 빌어주자. 불타 올라라. 희망하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몰두하라. 삶도 죽음도 두려워마라. 이건 삶의 숭고함에서 나온 명령이다! 살아서 비명이라도 지르라. 살아 있다고 큰소리로 외쳐라. 오늘이 마치 생의 마지막 날인 듯 살아보자.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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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20 18:50

이슬처럼 작은 것을 가져 오세요

이른 새벽 홀로 일어나 시를 읽다가 잠이 오지 않아 산책 나왔다고 말하며, 내 고민 좀 들어 주며 조금만 같이 걸어주지 않겠냐는 대통령을 만나보고 싶다. 텔레비전에 나와 이번에 이런 책을 읽었다고 좋아하는 총리와 장관들과 국회의원을 보고 싶다. 중고등학교에 강연을 가서 나는 이번 휴가 때 이런 영화를 보았다고 뽐내는 재벌 총수를 보고 싶다. 때로는 우리들의 영혼을 살찌우는 한 장의 그림을 보았노라고, 어느 전시 때 본 그림을 찍은 핸드폰 사진을 보여주는 정당 대표들을 지하철에서 만나보고 싶다. 거리를 걸으며 아이들과 만나 키를 낮추고 공부에 지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고 손에 들고 있는 책에 대해 말해 주는 교육감을, 그리고 이 책 갖고 싶으면 주겠다고 말하는 교장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 나에게 이 책 읽어보았냐고 읽던 책을 내밀어 보이는 선생님, 공무원을 만나보고 싶다. 아파트 공원 의자에 앉아 신간을 읽는 젊은 어머니 곁에서 동화책을 읽고 있는 아이를 보고 싶고, 승용차 안에 읽다 만 이마누엘 칸트의 책이 있는 단체장을 만나보고 싶다. 도시의 변두리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돋보기를 코에 걸고 앉아 독서 중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곁에 누워 책을 읽다가 코 골며 잠든 기초의원들을 보고 싶고, 어느 소도시 작은 미술관에서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젊은 연인의 잔잔한 사랑을 보고 싶다. 남의 시집을 사 들고 걸어가는 시인을 어느 거리에서 만나, 요새 읽었던 시집 이야기를 하는 시인들을 만나고 싶고, 지난번 시집 잘 사 보았다며, 나는 이 시가 좋다고 젊은 시인의 시구절을 읽어주는 노시인의 보고 싶다. 남의 소설책을 사는 소설가들을 책방에서 우연히 만나보고 싶다. 파도치고 갈매기 날아다니는 해수욕장에서, 깊은 계곡 물소리, 바람 부는 들 길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서, 나비가 앉은 풀꽃, 느닷없는 들길의 소낙비, 봄비 속에 개구리 울음소리, 이른 아침의 새소리, 푸른 산 위로 솟는 뭉게구름,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흐르는 강물 곁에서, 그런 것들과는 무심하게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곁에 가만히 앉아 눈송이로 녹고 싶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어디를 멀리 갈 때는 올라브 하우게의 시집 ‘어린나무 눈을 털어 주다’라는 작고 가벼운 시집을 들고 간다. 올라브 하우게는 노르웨이 시인이다. 몇 년 전 노르웨이로 강연을 갔었다. 서점이 있는 문화 공간에서 강연 후 작가와의 대담 자리가 있었다. 대담하는 도중 나는 시집 한 권 때문에 올라브 하우게가 살았던 노르웨이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번역된 이 시인의 시집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하우게라는 시인의 시집이 한국에서 독자들이 좋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사람들이 놀랬다. 하우게는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 과수원에서 정원사로 일하며 평생을 살았다. 나는 작은 이 시 집의 시중에서 이 시가 좋다. ‘진리를 가져오지 마세요/ 대양이 아니라 물을 원해요/천국이 아니라 빛을 원해요/이슬처럼 작은 것을 가져오세요/새가 호수에서 물방울을 가져오듯/바람이 소금 한 톨을 가져오듯’ 올라브 하우게의 ㅡ진리를 가져오지 마세요ㅡ 전문‘ 나는 그의 시집 뒤에 실린 글도 좋아한다. ’하우게는 줄 것이 많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는 작은 스푼으로 마치 간호사가 약을 주듯 먹여준다. 그는 옛날 방식으로 죽었다. 어떤 병증도 없었다. 단지 열흘 동안 먹지 않았다. 슬픔과 감사로 가득했던 장례식은 어린 하우게가 세례받은 계곡 아래 성당에서 있었다. 말이 끄는 수레가 그의 몸을 싣고 산으로 올라갔다. 작은 망아지가 어미 말과 관을 따라 내내 행복하게 뛰어갔다.” ―로버트 블라이(시인)‘ 나는 평생 이만한 시 한 편 쓰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좋다. 이 시집을 읽게 되어서. 이 시집을 머리맡에 두고 나는 무엇이 부럽지 않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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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13 18:58

지혜로운 삶을 준비하는 원리, 3C(Curriculum, Community, Characteristic)

겨울의 끝자락, 봄의 기운이 슬며시 느껴질 때면 캠퍼스는 가벼운 설렘, 미래에 대한 가벼운 불안으로 가득하다. 졸업생들을 보내는 따뜻하게 배웅과 앳된 신입생들을 맞는 반가운 마중이 교차하는, 대학 일정 중 가장 중요한 시기에 총장으로서, 삶을 앞서 살아온 선배로서 그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삶에 작은 울림을 줄 수 있는 말은 뭘까 깊이 고심하게 된다. 4차를 넘어 5차 산업혁명(Industry 5.0)시대에 접어들면서 기업과 사회의 변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발표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AI와 로봇을 활용한 기술은 2023년 기준, 적게는 38.8%, 많게는 70% 이상의 업무를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했으며, 2030년까지 우리나라 일자리의 90%가 AI로 대체될 수 있다고 전망하였다. 이 예측대로면 대학에서 배운 전공이 직업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간은 채 10년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은 진부한 말이 되어버렸고 입학과 졸업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청년들에게 ‘3C’를 갖추면 당당한 사회인이 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축사했다. 3C란 커리큘럼(Curriculum), 공동체(Community), 품성(Characteristic)의 앞 자를 딴 것이다. 남이 대체할 수 없는 자신만의 커리큘럼(Curriculum)이 있다면 다양하고 복잡해진 직업 세계라 해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AI 등 첨단기술 활용 능력, 다른 학문 분야 응용 전공지식 습득 등 새로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자신만의 커리큘럼을 준비하여 변화하는 미래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다음, 같은 목표를 가지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수 있는 협업공동체(Community)가 중요하다. 새롭고 혁신적인 프로젝트일수록 혼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함께 상의하고 최적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서로 돕고 협력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나 스스로 열린 마음과 좋은 품성(Characteristic)을 갖추고 사람들이 함께 있고 싶은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사람 주변엔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동료들이 자연스레 모이게 되고 서로 존중하며 협력해 나가면 시너지가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 입학생들에게는 열린 마음과 긍정적 태도를 강조하였다. 같이 생활하고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이 접근할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는 것이 성공적인 대학 생활의 기본이자 행복의 기본 조건이 될 것이다. 축사를 천천히 되뇌어보니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적용해보면 좋을 듯 싶다. 다만 나이가 든 우리 세대는 우선순위를 바꿔 열린 마음과 좋은 품성(Characteristic)을 앞에 두고 협업공동체(Community), 인생의 커리큘럼(Curriculum)순으로 가치 기준을 달리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주변에 친한 벗들과 접점이 점점 줄어들고, 건강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낄 때 왠지 작아지는 자신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젊은 시절과 다른 색의 행복이 필요하고 사람과의 관계가 더 중요해지는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과 긍정적 태도를 지닌 좋은 품성(Characteristic)은 인생 후반을 잘 살기 위해 무척 중요하다. 좋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협력 공동체를 형성하고 새로운 삶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자신만의 개성 있는 커리큘럼을 구성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나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간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은 언젠가부터 나를 이끄는 문구가 되었고 3C 즉, 좋은 품성, 협업공동체, 나만의 커리큘럼을 갖춘다면 누구나, 충분히 가능한 인생의 길이 될 것이다. 처음에는 나의 학생들에게 꼭 전하고 싶었던 축사의 말이었지만 우리들에게도 필요하며 그 목표를 따른다면 편안하고 행복한 인생이 펼쳐질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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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6 19:15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혁과 ‘이재명의 민주당’

개헌론이 시민사회는 물론 여야를 넘나든다.“지방분권형 개헌과 국가운영 시스템 대개조,”“대통령 권한 축소와 결선투표제의 4년 중임,” 그리고 “내각제 또는 이원집정제”등이다. 개헌 시기는 “2026년 지방선거와 동시 개헌 국민투표” 제안과 함께 조기대선 전 개헌 주장도 나온다.개헌 의지와 정치적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권력구조 중심의 개헌논의가 지난 40년 가까이 공전한 이유다. 제헌헌법은 45일,제2공화국 헌법은 공포까지 50일 걸렸다.1987년 헌법도 여야 8인 정치회담부터 헌법공포까지 2개월 26일이었다.주호영 국회부의장이 “개헌은 의지문제로 야당이 협조하면 한 달 내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유다. 조기대선 전이든 내년이든 이재명 대표의 동의나 묵인 없는 개헌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개헌을 포함한 정치개혁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는 김부겸 전 총리에게 이 대표는 “지금은 탄핵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이 대표에게 개헌을 촉구하려고 전화를 하면 요즘은 피한다.”는 정대철 헌정회장의 언급도 같은 맥락이다. 조기대선에서 개헌론은 당 밖의 반명과 당내 비명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국민적 공감과 정치적 파괴력에 따라서 이재명의 선택도 변한다.그가 ‘치유와 회복 그리고 공화국의 전진을 향한 전환기적 리더십의 시대정신’을 이해하느냐 나아가 대의에 충실 하느냐가 갈림길이다. 개헌론의 방향은 분명하다.“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줄이면서 권력의 균형과 협치를 강화하는 것이다. 대통령 권력의 제한과 분산은 ‘국회의 권한과 기능의 확대’다.예산법률주의를 통한 국회의 예산심의와 통제권 강화 그리고 대통령 인사권 축소와 함께 헌법재판소장과 감사위원의 국회 선출 등 이다.감사원의 국회이관도 그 중 하나로 그 끝은 ‘의회중심의 국정운영’이다. 그렇다면 ‘대통령 권력의 분산과 국회의 권한과 기능 확대’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대립과 교착의 정치와 국가 리더십의 기능 부전을 해결할까? 계엄과 탄핵 후의 정치는 민폐가 되었다.거대 야당의 입법 강행과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와 재표결의 악순환 그리고 윤 대통령이 계엄 사유로 지목한 ‘줄탄핵과 예산삭감’ 등은 정치와 리더십 실패의 결과다. “제왕적 대통령”과 여소야대 “제왕적 야당대표”의 극단적 충돌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대통령과 입법 권력의 투쟁과 대치의 위기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개헌이든 정치개혁이든 우리의 최종 목표는 분명하다.‘유능한 민주적 정치 리더십’이 선도하는 ‘문제해결의 정치’다.국민 삶과 생활에 도움 되는 정치다. 우리나라 제헌헌법은 대통령과 국회의 협력과 협치 나아가 공치(共治)를 지향했다.대통령 지명과 국회 인준의 국무총리제와 의원의 장관 겸직 등의 제도적 장치다.“내각제적 대통령제”라고 불리고 기존 제도와 관행의 계승과 심화로 책임총리제를 고민한다. 따라서 국회와 대통령의 협조와 협력의 협치가 제도적으로 불가피하게 만들어야 한다.“제왕적 야당대표의 국회”가 등장하지 않도록 제도적 강제 장치의 마련이다. 5년 임기의 대통령과 4년 주기의 총선은 여소야대의 가능성을 높인다.차기 대선을 향한 “1극 체제”의 “여의도 대툥령”행보는 결국 “제왕적 야당 대표와 제왕적 국회”의 출현이다.국회가 특정 정당과 정치인의 정치적 도구로 전락한다. “제왕적 국회”는 소선거구 단순다수제의 승자독식 구조에 따른 거대 정당의 의석 과점에서 출발한다.현행 제도는 “지역주의와 양당체제 고착화의 주범”이다.대량 사표 발생과 비례성과 대표성의 악화가 불가피 하다.작년 총선에서 지역구 투표의 41.5% 1213만 6757표가 사표였다. 개헌으로 국회의 권한과 기능이 더 강화된다면 그 전제는 국민 대표의 국회 구성이어야 하는데 선거제도 개혁이 핵심이다.양극화 정치의 악화를 막아 민주공화국의 위기를 피할 수 있다. “선거제도 개혁 없이는 개헌의 실효성이 없다.”면서 “대표성 강화 없이 대통령 권한만 이양하면 뒤틀린 권력구조가 발생한다.”는 게 노회찬의 지적이다.그는 “국회의 정당 득표율-의석수 일치를 달성해야 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가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선거제도 개혁은 개헌보다 어렵다.더 많은 정치인의 이해관계를 변동 시킨다.노무현 대통령이 “권력을 잡는 것보다 선거제도 개혁이 더 큰 정치발전을 가져온다.”며 “정권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선거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믿었던 이유다. “제왕적 국회”의 등장 가능성을 줄이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두 가지다.임기조정을 통한 동시선거로 여대야소이거나 도농복합선거구제를 통한 다당제 국회다. 특히 후자는 양당의 주류세력인 민주당 수도권과 국민의힘 영남 의원들에게 불리하다.거대야당 이재명 대표와 수도권 민주당 의원들의 선택이 출발점이다.절대 다수당이기 때문이다.그들의 선의와 공적 마인드를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일까?!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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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27 18:03

[금요칼럼] 그건 교양이 아니에요

예전 어른들이 종종 “그 사람은 교양머리가 없어!”라는 말을 하던 게 떠오른다. 염치가 없고 무례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을 힐난하는 말이었다. 그건 행동거지가 제멋대로인 막돼먹은 사람, 인품이 조악하고 몹쓸 사람이라는 낙인이다. 그런 이들과는 인연을 끊는 게 마땅하다는 선언이자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자격 미달의 인간이라는 암묵적 합의일 테다. 그러니까 ‘교양머리가 없다’는 말은 사람의 품성과 인격에 대한 무섭고 신랄한 평가였던 셈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 됨됨이를 자는 척도로서의 교양이란 말을 더는 쓰지 않게 되었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 그건 교양이 현실에서 더는 유용하지 못한 상태로 죽어버린 탓이다. 교양은 원시 채집시대 인류가 아니라 현대를 사는 인간들이 창안해낸 산물이다. 교양은 말과 태도의 우아함이고, 태도의 실행 속에서 드러나는 기품이자 기억과 지식의 축적 속에서 일어난 놀라운 혁신의 결과물이다. 그건 질서와 내면 도덕의 발현이며 고차원의 사회생활의 기술이자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드는 덕목이다. 교양이란 고등 생명체로 진화에 성공한 인간 무리가 합의한 우아한 행동양식이다. 항상 현재 안에서 작동하는 우아함이란 점에서 교양은 정태(靜態)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교양의 반대는 무교양이다. 따라서 교양머리가 없다는 것은 인격의 막돼먹음이고 파렴치한 행실을 일삼는 것을 뜻한다. 무교양 사회는 미개하고 탈법과 무법이 판을 치는 후진 사회이다. 혼돈과 무질서가 지배하는 사회, 더 나아질 가망이 없는 사회, 도덕과 상식이 퇴행하는 사회가 무교양 사회다. 교양은 지식의 유무나 학력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이고, 예의와 교양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사회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교양이란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지식이고 배우고 몸에 익힌 태도이다. 또한 도덕적 일탈을 막는 내면 기율이고, 제 행동을 통제하는 권력이다. 교양은 처세의 기술도 아니요, 도덕적 의무도 아니지만 그것은 언어능력이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수단이다. 교양이 양심에 잇댄 의식, 도덕과 품성, 타인을 포용하는 능력, 기분 좋은 매너를 아우를 때 비록 그것이 현실에서 써먹을 데가 마땅치는 않더라도 우리 사회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동력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교양사회에서는 국가의 통제 권력이 마비된 무정부 상태도, 군중이 폭도로 변해 난동을 일으키는 사태도 없을 테다. 교양은 무례하지 않고, 사회 규범을 존중하며, 성실한 이들의 가치관을 존중한다. 교양은 한쪽 이념으로 치우치거나 확증 편향에 빠지지 않으며 폭력을 수단으로 무언가를 도모하지 않는다. 교양은 사회의 혼돈과 무질서에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파괴하는 불법 사태를 용납하거나 동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큰소리치며 활개를 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무법과 혼돈이 뒤섞인 사회, 탈법적 폭력으로 무언가를 도모하는 사회가 교양사회일 수는 없다. 막말, 난동, 폭력, 탈법, 갑질, 거짓, 허언… 그런 것들은 교양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막장 현실의 징후들이고 막돼먹은 사회가 최후에 드러내는 아노미 현상이다. 그 반대가 예의바른 태도, 겸손, 타자에 대한 관용, 갈등을 풀어가는 방식의 의젓함을 갖춘 이들이 협업하며 만드는 교양사회다. 교양이 문화, 웰빙, 덕성을 집약한 것이라면 그것은 삶을 경이로 바꾸는 기품이고 기쁨일 테다. 그것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가장 좋은 것으로서의 삶 그 자체다. 교양을 가진 어른들과 함께 살던 시절이 그립다. 어른들은 점잖고 웃음과 유머가 있었으며 태도에는 기품이 있었다. 존경을 받을 만한 어른들 앞에 서면 절로 고개가 숙여졌던 것이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품격 있는 말과 행동으로 움직이며,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이성과 상식이 통하는 교양사회로 나아가기를 기대하고 갈망한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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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20 18:42

[금요칼럼] 어쩌다 마주친 새들의 눈

작년 전 겨울이었던가, 서울 중랑천에 원앙 200여 마리가 떼로 나타났다고 많은 매체들이 화려한 원앙 떼 사진을 앞다투어 연일 보도한 적이 있었다. 원앙이 떼로, 그것도 200마리가 넘게 떼를 지어 나타난 일은 세계 최초의 일이라고 전문가들의 입을 빌렸다. 모두 ‘세계 최초’를 앞세웠다. 그런데 그 세계 최초에 세인들은 그리 관심을 보이지 않은 듯했다. 강연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그 ‘최초’를 보았느냐고 물어보아도 그 보도를 보았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래전 강길 십리 길을 걸어 출퇴근할 때였다. 강물을 지척에 둔 길이었다, 길은 차가 다닐 정도로 넓게 나 있었지만, 풀과 나무가 너무 오래 자라 있고, 또 그 길을 이용해야 할 경제성이 없어서 그런지 2년 동안 차도 걷는 사람도 거의 보지 못했다. 이슬 때문에 나는 반바지를 입고 출근해서 긴바지로 바꿔 입어야 했다. 어느 날 강물이 쉬어 가는 소(沼)에 물결이 요동치고 있었다. 물결을 일으키는 그 물체(?)는 등과 머리를 드러내놓고 헤엄을 치고 있었다. 오싹 겁이 나고, 혼자 놀래 주위를 둘러보았다. 용이 못된 구렁이가 우리 마을 근처 큰 호수(그 용소가 지금은 없다.)에 살았다는 말을 듣고 살았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수달 두 마리였다. 수달을 너무 오랫만에 본 것이다. 출근해서 신문을 뒤적이는데, 우리나라에 수달이 멸종되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신문사로 전화했다. 기자님은 수달이 멸종되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었다고 못 박았다. 나는 아침에 분명히 수달을 보았다고 한 번 더 말했다. 원앙 떼가 서울 중랑천에 세계 최초로 200여 마리가 나타났다는 그 기사의 화제 성에 내가 놀랐던 것은, 지난 3. 4년 동안, 수달이 나타났던 그 강에 원앙이 208마리 정도까지 날아와 한겨울을 지내다가 갔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208마리 정도라고 그 숫자를 거의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느냐고요? 사진을 찍어 세어 보았으니까요. 어떤 해는 청둥오리 떼와 원앙 떼가 마을 앞 강을 가득 메우고 ‘찬란’하게 먹이를 찾아 먹기도 했다. 3년 전부터는 홍 머리 오리들이 외진 강물에 와서 살다 간다. 작년과 올해부터는 댕기흰죽지 오리리가 여러 마리가 강물에서 놀고 있다. 청둥오리, 비오리, 호사비오리는 철새다. 호사비오리는 멸종 위기 새다. (이 오리에게 총 쏘면 크게 벌 받는다.) 논병아리와 쇠오리, 쥐오리는, 토종 오리다. 토종 원앙도 몇 마리 산다. 어떤 해에는 물닭, 깃털이 우아한 호방 오리도 왔다 갔다. 참, 내, 원, 몇 년 전부터 가마우지도 온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나는 가마우지가 우리 마을 산천하고 어울리지 않게 너무 검고 커서 정서적인 불쾌감과 거부감이 있다. 우리 마을 앞 강에 와서 한겨울을 나던 원앙 떼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나는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새 연구가 한 분이 남원에 사신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원앙들은 기온이 자기들에게 맞고 먹이가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한다. 어느 날 나는 길을 걷다가 길가 숲에서 붉은 머리 오목눈이와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새가 그 작고 까맣게 환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작고 선량한 눈을 보고 하마터면 울 뻔했다. 그렇게 겁 없고 작고 선량한, 아름다운 눈을 처음 마주친 것이다. 며칠 전 흰 댕기 죽지 오리 사진을 확대해 보다가 또 놀랐다. 또, 정말, 진짜로, 참말로 그렇게 아름다운 테두리 속에 눈을 두고 있다니, 검은 바탕에 그 작고 똥그랗고 또렷한 눈가 테두리는 놀랍게도 노란색이다. 나는 숨이 막힐 정도로 그 눈이 서늘하여서 하마터면 사랑한다고, 말을 해 버릴 뻔했다. 나는 나만 외롭게 알고 있어야만 하는, 새들의 경이로운 생태와 태도들을 간직하고 있다. 누구에게 말해 보았자 사람들은 새들의 선량한 눈 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나는 익히 알고 있다. 어쩌다 새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어디서 읽었던 임마누엘 칸트에 대한 이 글이 생각나곤 한다. ‘칸트는 참으로 선량한 사람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오늘날에도 세상에서 의미를 잃지 않은 이유다.’ 선량은 눈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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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13 18:25

‘보통 사람’의 아름다운 작별, 카터의 뒷모습

지난해 말,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작별의 인사를 하고 10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결식에는 미국 역대 대통령 부부가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했다. 고인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밝은 얼굴로 고인을 보내는 이 자리는 슬픔이 가득한 조문의 자리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 유쾌한 자리였다. 그의 최대 정적이라 일컬어지던 포드 전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에 미리 작성하였던 추도사는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추도사에는 ‘평화와 연민이라는 카터의 유산은 시대를 초월해 독보적인 존재로 남을 것’이라며 카터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었다. 땅콩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여러 실패를 경험한 대통령이었지만 ‘가장 뛰어난 미국의 전임 대통령 카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을 시종일관 이끌었던 성실한 자세였다. 카터 대통령의 일생을 회고해 보면 ‘보통 사람’으로 살기 위해 평생토록 애썼던 ‘특별한 사람’의 노력이 우리에게 신선한 감동을 준다. 우선 그는 ‘인생의 성공은 대통령이라는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노력을 통해 마무리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얼핏 ‘미국 대통령보다 명예스러운 자리가 있을까?’ 싶지만 성대한 취임식 후, 재임기간동안 냉정한 평가가 있었고 실제로 임기를 마치면서 ‘성공적인 대통령’이란 칭찬을 듣는 미국 대통령은 그리 많지 않았다. 카터는 1977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후, 사회 정의, 평등을 실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시대의 정황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경제문제, 대사관 인질 문제 등으로 1980년 대통령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 후보에게 패배하며 단임으로 임기를 마치고 고향집으로 돌아갔을 땐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명칭 외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정책 실패에 따른 국민의 불만이 커졌고 재임에도 실패하며 ‘도덕적으로는 훌륭하지만, 실질적인 정책 집행에는 부족했던 대통령’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대통령 퇴임 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위해 카터 센터를 설립하고 인권, 민주주의 등에 대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세계 각국의 위험한 분쟁지역을 찾아다니며 평화와 타협을 이끌어 갔던 세계 평화대사로서의 역할은 그의 명성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생 2막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지금, 카터 대통령이 겪고 이겨낸 실패와 새로운 노력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두 번째, 카터의 일생을 뒷받침하고 있는 가치 기준으로 ‘겸손, 겸허, 검소’와 같은 단어가 있다.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침실 2개가 있는 평범한 주택과 상당한 채무였다. 신탁에 맡겨놓았던 땅콩농장은 심각한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다른 전임 대통령들처럼 임기 이후 강연, 기업의 자문 등을 통해 큰돈을 벌 수 있는 수많은 제의가 있었지만 그는 그러한 제의들을 철저히 거절했다. 자신의 연금을 절약하고 33권의 책을 쓰는 등 오로지 본인의 노력으로 빚을 갚아 나갔다. 또한 본인을 선택된 특별한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 여겼고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을 거절했다. 자신의 생활을 절제하며 전직 대통령에 대한 연금, 경호, 예우 등을 위한 관리 비용을 다른 전임 대통령들보다 절반 가까운 금액을 절약하는 모습을 보였다.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교회 주일학교의 성실한 교사로서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고, 일등석이 아닌 이코노미석의 비행기를 타고다니며 전 세계 가난한 마을의 궁핍한 이들을 위해서 집을 지어주었다. 그는 지난 1월 9일, 조지아주 고향마을의 교회에서 치러진 장례식 후 연못이 있는 버드나무 옆, 인생의 동반자였던 아내 로잘린 여사 곁에 묻혔다. 부부가 일생동안 함께 살았던 집은 본인이 죽은 이후 국립공원 관리청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사전에 기부했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겸허한 모습이다. 타인에게 감동을 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그렇게 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카터 대통령의 아름다운 뒷모습은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그의 삶을 살펴보면서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 부르는 ‘행복’이라는 노래의 가사가 떠오른다.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행복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렇게 살았던 카터 대통령은 행복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아름다운 작별의 인사를 하였다. 100세 시대에 카터 대통령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필자도 그가 걸어갔던 행복한 삶의 태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이를 본받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필자도 ‘보통 사람’으로서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자 한다. 오덕성 우송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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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06 15:45

‘부정선거론’이 가른다!

계엄과 탄핵 후 여론은 요동친다. ‘정당 지지율과 대선후보 선호도 또는 가상대결 그리고 정권 교체론 vs. 연장론’의 3대 지표 모두 그렇다. ‘초반 압도-격차 축소-접전 양상 또는 역전’의 패턴이다. 첫째, 12월 초중순에는 민주당 지지율이 53%까지 오르며 24%의 국민의힘을 압도한다. 12월말부터 1월 초 민주당 지지율은 하락세로 국민의힘 지지율은 상승세로 1월 중순이후 양당 격차는 더욱 축소된다. 오차범위 내 접전양상이 대부분으로 여당이 야당을 앞서는 조사도 나온다. 둘째, 대선후보 여론은 ‘초기 이재명 독주’다. 다자구도는 물론 양자대결에서도 여권 후보를 상대로 10%~20% 포인트 앞선다. 이후 여권 후보들 지지율이 상승한다. 그래도 이재명 우위지만 양자 간 격차는 좁혀진다. 설 연휴 직전 ‘김문수 약진’이 핵심으로 그는 보수결집의 계기다. ‘46% vs. 42%’로 이재명을 누르기도 한다. 다른 여권후보들도 이재명을 오차범위 내에서 거세게 추격한다. 셋째, 정권 교체론 역시 초반에는 압도적이다. ‘정권 교체가 60% vs. 연장 32%’로 두 배 가까운 차이다. 1월 초 이후 정권 교체론은 줄어들고 연장론이 늘어 ‘교체론 53% vs. 연장론 42%’를 보인다. 중순 이후 설 연휴 즈음에 정권 교체와 연장론이 오차범위 내에서 뒤집히는 조사가 처음 등장하지만 정권 교체론의 우위 속에서 팽팽한 접전양상이다. 당장 이재명 민주당 ‘닥공’의 우려와 불안감이 중도층으로까지 확산된 결과다. 이 대표는 “독재와 반민주 세력의 반동은 계속 될 것”이라며 “마지막 고비 넘어가자”고 한다. “6개월 안에 끝낸다”와 “2심 전 대선”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모습이다. 최근 조사를 보면 중도 무당층에서 ‘민주당 신뢰와 불신’은 거의 동률이다. 중도층 유권자의 1/4은 ‘현재 지지정당이 없다. ’고 한다. ‘문재인 학습효과’는 구조적 배경이다. ‘1987년 체제의 해체와 새로운 공화국의 기초 만들기’라는 시대정신과 역사적 임무를 인식하지 못한 탓이다. 지금 우리가 겪는 ‘극단적 대립과 교착의 정치’는 ‘문재인 권력의 실패’를 상징한다. 3대 여론 지표에 반영된 보수의 위기감과 결집효과는 다양한 측면에서 설명된다. 보수층의 적극적 응답은 ‘윤석열을 향한 동정심’과 그의 “끝까지 싸우겠다. ”는 메시지 정치에 따른 동원효과이기도 하다. ‘30대에서 탄핵반대가 앞서는 조사까지 등장하는데서 보듯 2030세대가 결정적이다. 이들은 수도권의 탄핵반대 여론이 전국평균보다 높게 나오는데도 일조한다. 여론동향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3대 지표 여론의 변화를 추동한 ‘계엄과 탄핵에 대한 의견의 변화’다. 이는 당장 헌재의 탄핵심판과 내란재판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길게는 향후 우리 정치의 향방을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정당 지지율과 대통령 후보 선호도 그리고 양자대결에서 접전 또는 여당 우위의 여론변화의 출발점은 탄핵 찬반의 변화다. 12월 초에는 탄핵찬성 여론이 압도적이다. ‘유권자 10명 중 7명 이상이 찬성했고 반대는 20% 초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계엄을 “위헌적 중대범죄 또는 내란”으로 간주했다. 12월말부터 1월 중순사이에 변화가 나타난다. 탄핵 찬성여론은 줄고 반대가 늘어난다. 예를 들면 ‘찬성은 75%에서 64%로 줄고 반대는 32%로 증가’한다. 그후 탄핵 찬반격차는 더 축소되는데 ‘탄핵찬성이 57%~64% 반대가 36%~43%의 분포’를 보인다. 탄핵 찬반의 의견변화는 계엄평가와 연동된다. 초기에는 계엄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 대부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완화되는 경향이다. 특히 보수층과 고령층을 중심으로 계엄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소폭이지만 상승한다. ‘여당 지지율과 대선 후보 선호도 그리고 양자대결의 접전양상 흐름’은 계엄과 탄핵찬반의 의견변화로부터 시작한 셈이다. 나아가 계엄과 탄핵찬반의 근저에는 ‘부정 선거론과 거야 입법독재의 행패론’이 있다. 모두 이념적 갈등과 진영 간 대립의 계기라는 게 걱정이다. 특히 부정 선거론은 ‘30% 중반의 찬성 vs. 60% 전후의 반대’를 보이지만,‘보수 유권자 10명 중 6명 이상이 동의한다. 는 게 주목된다. 젊은층과 고령층에서 부정선거 공감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기도 하다. ‘부정선거의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48% vs. 불필요 47%’라는 조사도 있다. 결국 부정 선거론은 첫째, 진영 대립을 더 격화시키고 악화시킨다. 중도의 선택과 판단이 결정적인데 길게 끌수록 보수의 부담은 늘어난다. 둘째, 보수의 분화 또는 분열 개연성이다. 극우적 성향의 그룹이 보수의 주류가 되면 대선은 다자구도로 바뀔 수 있는데 이때는 이준석의 향배가 중요하다. 보수의 재편이다. 셋째, 여당 대선후보의 선출방식이 어떻게 바뀌느냐가 출발점이다. 이는 여당 사람들의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부정 선거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결정할 것이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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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30 16:44

혹시 ‘경알이’ 말을 아세요?

말은 시간의 응집이고, 사람의 경험과 기억, 생각을 전달하는 매체다. 말은 시간이라는 맥락 안에서 생성과 소멸을 겪는다. 어떤 말은 살아남고, 어떤 말은 도태되어 사라진다. 지금 내 말은 거의 완전한 서울말인데, 나는 본디 서울말 사용자가 아니었다. 나는 전라도 북부와 충청도 남단의 경계에 있는 농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다. 시골에서 들을 망아지처럼 천방지축으로 뛰어 놀던 촌뜨기가 서울의 부모와 합가하면서 서울내기가 되었다. 충청도 입말에 익숙하던 내 고막에 서울말은 낯섦 그 자체였다. 어린 고막을 울리던 서울말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나는 금세 서울말에 반한다. 고향의 입말과 서울말이 사뭇 다른데 놀라고, 나는 그 차이를 문화적 충격으로 흡수한 것이다. 한 세기 전 경성(서울의 옛 이름)에 사는 중류층 말을 ‘경알이’말이라 했다. 경알이 말은 표준어의 지위를 얻으며 위상이 더욱 공고해진다. 사대문 안에서 태어나고 살았던 토박이 박태원의 ‘천변풍경’이나 염상섭의 소설들은 지금은 듣기 힘든 경알이 말의 보고다. 한국영화사의 걸작으로 꼽는 주요섭 소설이 원작인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감독, 1961)에서도 서울말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극 중 어머니와 어린 옥희가 주고받는 말이 서울말이다. 반세기 전 서울말과 지금의 서울말은 또 다르다. 세월이 흐르면서 서울의 주인들이 바뀌고 그런 가운데 서울말도 달라진 것이다. 서울말은 서울 토박이의 오랜 습속과 정서가 밴 입말이다. 서울말은 경기 말과 다르고 인천, 강화 말과도 차이가 난다. 그렇건만 서울말과 충청도말, 전라도말, 경상도말 사이에는 우열 관계가 성립되지는 않는다. 서울말이 소중하면 지방의 말도 언어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서 귀한 말이다. 서울말이 문화적 가치가 있다면 지역말도 보존해야 할 중요한 문화 자산이다. 일부에서는 서울말을 서울깍쟁이말이라고, 혹은 서울말이 간사하다고 흉을 보았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한동안 나는 억세고 투박한 지방말에 견줘 서울말이 더 세련되었다고 생각했다. 서울말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 해방 뒤엔 미군 상주와 함께 영어의 영향을 받는다. 서울말은 해방과 한국전쟁, 산업화라는 격랑 속에서 살아남은 말이다. 산업화 시대로 넘어오며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상경 인구가 빠르게 늘었다. 그 결과 서울말은 지방말과 섞이고 동화되면서 그 특색이 옅어졌다. 어른들은 계단을 ‘가이당(階段)’이라 하고, 도시락을 ‘벤또’라고, 손톱깎이를 ‘스메끼리’라고, 등에 매는 가방을 ‘니꾸사꾸(rucksack)’라고, 바지를 ‘쓰봉’이라고, 겉에 걸치는 옷을 ‘우와기’라고 했다. 우리말에 뒤섞여 쓰던 일본말의 잔재는 그 존재감이 뚜렷했다. 본디 서울말에는 된소리 발음이 거의 없었다. 자음 ㄱ, ㄷ, ㅂ, ㅅ, ㅈ 같은 예사소리를 ㄲ, ㄸ, ㅃ, ㅆ, ㅉ 같이 된소리로 쓰지 않았다. 어느 시기부터 서울말에 예사소리를 밀어내고 된소리 발음들이 부쩍 늘어난다. 예전에는 ‘소주’라고 발음하던 것을 지금은 다들 ‘쏘주’, ‘쐬주’라고 발음하는데, 이것은 서울말이 거칠어진 세태로 말미암아 거칠어진 거라고 추정한다. 그리고 ‘오라범땍(올캐), 그러께(재작년), 긍검스럽다(근검스럽다), 후뜨루마뜨루(휘뚜루마뚜루)’ 같은 말은 새 말의 위세에 눌려 자취를 감춘 서울말이다. 나는 서울 서촌 일대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서울의 수돗물을 마시고 서울에서 생업을 일구며 자식을 낳고 마흔 해 넘게 살았다. 살면서 서울 사람의 어휘와 말본새를 듣고 배우며 서울 사람처럼 서울말을 썼다. 서울 시민 노릇을 하며 사는 마흔 해 동안 서울 시내를 가로지르던 전차가 사라지고 새로 지하철이 개통한다. 도심에 고층 빌딩과 고층아파트 대단지들이 들어서고, 한강 이남의 대규모 개발로 강남이 노른 자리 땅이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내 귀와 혀에 인이 박힌 서울말도 그 변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서울말의 부침을 더듬자니, 세월의 무상함 한 줄기가 따라온다. 가끔 어린 시절 ‘~했걸랑’ 같은 어미를 쓰던 서울 동무들과 그들의 서울말이 그리워진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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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2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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