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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의 몫이다

정당불신이다. 국민 10명 중 7명은 “양당이 제 역할을 못한다”고 한다. 양당 지지층조차 절반 넘는다. ‘대통령 당으로의 거듭나기와 주류세력 교체’로 바쁘지만 국민은 냉담하다. 윤 대통령 100일의 여론조사 92개에 나타난 정당 지지율 흐름은 상반된다. 국민의힘은 지방선거 때 최고치를 찍은 후 계속 하락하여 9주차부터 30% 중후반대를 유지한다. 민주당은 11주차 이후 국민의힘에 계속 앞선다. 최근 10개 조사로 좁혀보면 민주당이 7:3으로 앞서지만 내용은 복잡하다. 민주당 지지율은 최고 49.3% 최저 33% 국민의힘도 최고 38.4% 최저 32.5%를 기록하는데 민주당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유동성이 높다. ‘반사이익의 정치는 없다’는 뜻이다. 윤 대통령을 선택했지만 지지를 철회한 사람 중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사람은 12.4%다. 지지 이탈층의 29.5%는 지금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민주당이 대통령이나 여당의 낮은 지지율의 반사적 이익을 바란다면 바보 같은 일”이다. ‘누가 비전과 콘텐츠를 갖고 실력을 보여주느냐’가 관건이다. 여야 어느 쪽이든 열려있는 신당창당론이 주목되는 이유다. ‘이재명의 민주당’이 확실시되는 민주당은 비명(非明)계의 선택이 관심이다. 핵심은 ‘팬덤정당 vs. 대중정당’의 싸움이다. 소수의 열정적이며 적극적인 행동가인 강성 지지자들의 확대된 영향력으로 유권자들과 더욱 괴리된 정당으로 변화하는 부정적 결과의 우려다. ‘위명(明)설법’ 주장은 “왜 우리 스스로 방패를 내려놓고,우리를 지키는 성의 뒷문을 활짝 열어서 우리 동지들을 희생의 제물로 삼으려고 할 여지를 열어놓느냐”는 반론에 작아진다. “닥치고 투쟁” 기조의 민주당은 곧 어떻게 중도층을 끌어안을지 시험대에 오른다. ‘이준석 갈등’은 여권분화의 뇌관이다. “좌파세력 외에 정권교체를 갈망했거나 윤석열 정부탄생에 기여한 당외 인사 등을 포함한 국민통합형 재창당”주장이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 운영을 뒷받침할 정치세력을 구축을 위해 기존 여권에 일부 야권 인사까지 포함하는 시나리오”로 김한길 국민통합위원장의 역할에 주목한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집권여당의 ‘집안싸움’은 이중적이다. 겉으로는 ‘당내 주도권 쟁탈전’이다. 이면에는 변화가 요구되는 집권당의 기능과 역할을 넘어 우리 정당과 정당정치의 업그레이드의 계기가 될 싸움이기도 하다. 당내 주도권 쟁탈전의 시각에서 보면 ‘대통령의 당으로 거듭나기’라는 역사의 반복이다. 노태우의 민주자유당, 김영삼의 신한국당, 김대중의 새천년민주당,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박근혜의 새누리당처럼 대통령은 자신의 당을 만들었다. 윤 대통령은 일단 이명박과 문재인의 길을 택했다. “대통령 친위 비대위”라는 평가를 보면 권력의 결심은 확보해 보인다. 문제는 ‘신뢰위기의 대통령’이 되어가는 마당에 최악의 경우 “어쩌다 대통령”이라는 ‘무능 프레임’까지 우려되는 상황에서 이게 과연 좋은 선택인가 하는 의문이다. 집권여당 집안싸움의 핵심은 “체질적 충성여당이자 대통령 결사옹위의 집권여당” vs. “파시스트적, 조직중심적 그리고 일방주의적 정당”의 논란이다. 여론으로 보면 “권위주의적 권력구조에 기생하는 여의도 정치권” vs. “자유, 민주주의, 인권 등 가치에 충성하는 정치”의 대결로 바뀌는 모습이다. 여의도에는 “당 구성원의 핵심인 의원 중 현안이 터지면 올바른 논리로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이가 없다”는 탄식이 있다. “찬란했던 청년정치의 막을 내리는 것”이라거나 “흑역사가 될 것이다”라고 하기 보다는 당당하게 자신의 논리를 제시하며 싸워야 한다. 아니면 2선 후퇴다. “뱃지는 권력을 못 이긴다. 하지만 정작 그 권력은 민심을 못 이긴다.” 정당은 시민의 정치적 요구와 필요를 적절하게 제대로 수용하는지, 권위적이고 위계적이며 엘리트 중심의 정당이 새롭게 변화하는 유권자의 필요에 부응하는지, 기존의 정당체계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아닌지 계속 고민해야 한다. 국정의 공동책임자로서 견제와 협력의 당정관계와 정당의 민주적 개혁과 당내 민주주의 확대요구도 마찬가지다. 결국 윤 대통령의 몫이다. “정치인 발언에 입장표명한 적 없다”면 상식적이지 않다. “뚝심과 배짱,자기확신이 윤 대통령의 강점이니 위기상황에서 과감한 개혁과 포용력으로 국민에게 품이 넓은 대통령”으로서 행동해야 한다. /박명호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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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18 13:18

반(反)의 경고

기록적인 집중호우에 도시는 마비되고, 농촌은 큰 상처를 입었다. 침수된 차량이나 무너진 건물은 다시 고치고 지으면 되지만 안타까운 인명 피해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슬픔으로 남는다. 이번 폭우로 반지하에 거주하던 세 식구가 들어찬 물의 수압으로 문을 열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다는 소식은 그 어떤 폭우 피해 소식보다 마음을 찢어 놓는다. “하늘은 과연 있는가?” 역사가 사마천의 질문이 다시 떠오른다. 하늘이 있다면 평생 나쁜 짓만 하며 살았던 도척 같은 도둑의 괴수는 왜 천수를 누리며 잘살다 가게 하고, 백이와 숙제 같은 의로운 사람은 수양산에서 굶어 죽게 만드는가를 질문한 사마천의 심정에 동감하는 요즘이다. 재해는 미리 예방할 수 없는 것인가? 초윤장산(礎潤張傘), 밖에 나가기 전 주춧돌(礎)에 습기(潤)가 젖어 있으면 비가 내릴 징조이니 미리 우산(傘)을 준비(張)하라는 뜻이다. 어떤 일이 벌어지기 전에 반드시 작은 조짐들이 있기 마련이다. 1:29:300의 하인리히 법칙은 어떤 큰일이 1번 벌어지기 전에 29번의 중간급의 사건이 터지고, 그 전에 300번의 작은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세상에 갑자기 찾아오는 재앙은 없고, 졸지에 다가오는 행복도 없다. 일이 커지기 전에 미리 서둘러 해결했으면 큰일이 아니었는데 무시하고 방관하다가 결국 큰일로 번져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분들은 조그만 조짐과 징조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세상에 어떤 큰일이든 작은 일에서 시작되고, 풀기 어려운 문제도 결국 쉬운 문제를 방치하는 데서부터 발단이 된다. 노자는 이것을 반(反)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어떤 큰일이 일어나기 전에 작은 일들이 반복되다가, 어느 순간 거꾸로(反) 뒤집힌다는 것이다. 쉽다(易)고 생각하여 방치했던 일이 뒤집혀 풀기 힘든 어려운(難事) 일이 되고, 작다(細)고 무시했던 것이, 어느 순간 뒤집혀 해결할 수 없는 큰일(大事)로 번진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렵고 큰일이 닥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하면 한결 수월하다는 것이다. 노자의 반의 법칙은 권력의 몰락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권력이 무너지기 전에 작은 징조들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 크지 않았을 때, 아직 어려운 상황이 아닐 때 빨리 손을 써서 미리 해결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들의 위기경영 능력이라는 것이다. 천 길 높은 둑이 갑자기 무너지는 것은 개미나 땅강아지가 만든 구멍으로 인해 무너지게 된 것이고, 백 척 높이의 으리으리한 집이 한순간 잿더미로 변하는 것은 아궁이 틈에서 나온 조그만 불씨 때문이라는 한비자(韓非子)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말하고 있다. 아직 문제가 크지 않을 때, 쉽게 해결할 수 있을 때, 미리 예방하고 해결한다면 나중에 큰일을 당하지 않는다. 주역(周易)의 변화원리도 노자의 반(反)의 법칙과 유사하다. 겨울철 단단한 얼음(堅氷)은 가을날 서리가 뭉쳐(履霜) 만들어지는 것이니, 가을에 추운 겨울을 대비해야 한다. 가을 서리를 무시하고 넘어갔다간 결국 추운 겨울에 피할 수 없는 얼음의 재앙을 만날 것이다. 안타까운 세 식구가 살던 곳을 누추한 곳이라고 표현하는 사람, 그곳을 방문한 사진을 홍보용이라고 내놓은 관계자들, 폭우가 내릴 때 먹방 사진을 올린 사람, 한때 동지였던 사람이 등을 돌리고 밥그릇 싸움하는 상황은 모두 차가운 겨울이 오기 전에 벌어지는 작은 조짐들이다. 경계하고 또 경계하여 미리 예방하지 않으면 어느 날 거꾸로(反) 무너지는 상황이 다가올 것이다. “천하의 어려운 문제는 작은 문제를 방치해서 벌어지는 것이다(天下難事 必作於易, 천하난사 필작어이)!” 노자의 반(反)의 경고에 귀 기울이면 아직은 기회가 있다. /박재희 석천학당 원장 △박재희 원장은 민족문화콘텐츠연구원장, 포스코전략대학 석좌교수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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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11 14:08

훈계질이 싫다―어떤 약전(略傳)

훈계질이 싫다. 얕은 지식으로 깊이 아는 체를 하는 자를 경멸한다. 소음과 서커스, 거짓과 허언, 정치가의 웅변이 싫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이념들, 일체의 회의주의도 없는 종교, 영혼이 깃들 여지가 없는 과학, 자동차 경적을 마구 울려대는 자를 싫어한다. 무능력한 가장, 함량미달의 책들, 말없이 끊는 전화, 자기가 정의롭다고 외치는 자들, 낯색 변하지 않고 뻔뻔한 말을 늘어놓는 정치가들, 탐식하는 자를 싫어한다. 봄날 아침 숲속에서 들려오는 뻐꾹새 소리, 펄럭이는 깃발, 4월의 잎사귀들, 막 떠오른 햇살에 금빛으로 빛나는 떡갈나무를 좋아한다. 라벤더꽃이 핀 들판, 빨래가 마르는 가을 오후를 좋아한다. 죄없는 동물을 학대하는 자들에겐 살의마저 솟구친다. 끔찍한 인간들. 불친절을 증오한다. 혼자 캐치볼을 하는 소년, 11월의 마가목 열매, 여행 마지막 날의 쓸쓸함을 좋아한다. 그 여행지가 다시 올 수 없는 먼 곳일 때 그 애잔함은 더욱 짙어진다. 그늘에서 꽃을 피우는 현호색과 바위의 초록 이끼를 좋아한다. 작고 여린 생명들, 어린 고양이, 호수를 가로지르는 물뱀, 작약을 좋아한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가 끓여주신 호박죽과 수제비를 좋아한다. 목포의 삼합, 평양냉면, 통영에 가서 먹은 봄날의 도다리쑥국과 여름철 민어회를 좋아한다. 여름 아침에 수련 꽃핀 것, 진공관 앰프로 들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의 한 소절, 잘 마른 면 셔츠를 입고 외출하기, 공중으로 도약하는 무용수, 친구의 첫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 오후에 자는 듯이 죽은 개는 너무 슬퍼서 나를 화나게 한다. 부엌에서 끓고 있는 어머니의 배추된장국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고요하고 적막한 식욕. 나는 곧 맛있는 저녁을 먹겠구나, 하는 기대를 품는다. 당신의 미소는 나를 행복하게 한다. 당신의 하얀 이마와 쇄골을 사랑한다. 사랑할 수 없음, 그 불가능마저 사랑한다. 무지개가 뜨지 않은 다정한 저녁들, 여름 저녁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개밥바라기별, 종일 내리는 눈의 아름다움, 북유럽의 백야, 주인 없는 집을 지키는 심심한 개들, 주말에 하는 벗들과의 포커게임을 좋아한다. 포커게임을 할 때 벗들은 자비를 베푸는 법이 없다. 나는 세상에서 태어나서 무엇이 되려고 했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때문에 나는 조금 더 비열해졌다. 평생 내 안의 비열함을 괴로워했다. 스무 살 무렵 광화문 근처에 있던 고전음악 감상실 '르네상스'에서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들을 때마다 나는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그 무렵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만나고, 서정주의 시집을 읽었다. 청계천의 헌 책방에서 김승옥의 첫 창작집 '서울, 1964년 겨울' 초판본을 구하고, 이제하의 첫 소설집 '초식'을 책방에서 샀다. 나는 시인이 될 것이다. 신춘문예 공모에 시가 당선했다. 스물네 살이었다. 은행나무의 노란 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늦가을 무렵 시립도서관 참고열람실에서 쓴 시다. 가을이 끝나자 은퇴 한 늙은 직장인처럼 허전해졌다. 나는 강원 내륙으로 불쑥 여행을 떠났다. 집에 돌아왔을 때 신문사에 보낸 신춘문예 당선을 통지하는 전보가 몇 통 와 있었다.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읽으려고 프랑스어사전을 뒤적이던 나는 출판사 편집 인력시장 쪽으로 빨려 들어가 교정과 교열 일을 배웠다. 백수 시절은 급격하게 끝났다. 나는 인력시장에 편입되어 착실하게 월급을 수령하는 가장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네 절망을 말해 봐. 그러면 나의 절망도 말해주지."(메리 올리버, '기러기')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네 절망을 말해 봐'라고 하지 못했다. 그 시절 내 안의 여린 동물은 어리고 착했다. 나는 무릎으로 세상을 건널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무릎이 너덜너덜 해지는 걸 상상하는 게 끔찍했다. 태풍 직전의 고요를 사랑하고,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던 내 안의 여린 동물은 죽었다. 나의 신념은 무너졌다. 세상이 기만하고 속일 때마다 나 역시 세상을 속였다. 나는 손해보고 싶지 않았다. 백수 시절보다 내 정신은 물러졌다. 그래서 더 많이 타협하고 조금 더 비열했진 것이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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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8.04 14:11

담을 넘는 사람들

어린 시절 나를 생물학의 길로 이끌었던 영웅들이 있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곤충들의 생태에서 마법같은 이야기들을 뽑아내던 장 앙리 파브르와 캐나다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야생 늑대들의 삶과 죽음을 기록한 어니스트 시튼이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사춘기 이전까지 나의 숨겨진 자아 정체성은 늑대였다. 내가 네 발로 기어다니거나 방구석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습관이 있었던 것은 내가 늑대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둑한 화장실에서 낯선 침입자 늑대를 물리치고 마루 아래 숨겨진 덫을 찾아내고 장농에 숨겨둔 어린 늑대들을 보호하며 혼자만의 늑대 세계에 거주했다. 청소년기에 새로이 찾아낸 영웅이 템플 그랜딘이었다. 템플 그랜딘은 자폐인으로서 축산 현장의 관행과 구조를 낱낱이 파악하고 동물이 고통이나 두려움 없이 죽을 수 있는 동물친화적 도축 시스템을 개발했다. 그녀의 통찰에 의하면 죽음 자체는 동물에게 큰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미래를 예측하지 않는, 오로지 현재에 충실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도축장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큰 칼의 존재에도 두려움이나 비애를 느끼지 않는다. 가축이 패닉에 빠져 난동을 부리게 하는 것은 펄럭이는 깃발이 드리우는 그림자의 빠른 움직임, 발굽이 미끄러지는 젖은 철판, 직각으로 구부러지는 통로, 듬성듬성한 나무판자 사이로 돌연히 쏟아지는 눈부신 빛 같은 뜻밖의 사물들이다. 템플 그랜딘은 도축장에서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하여 동물들이 안정적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고요한 최후를 맞을 수 있는 동물친화적 도축장을 설계했다. 동물친화적 도축이라니 이율배반적으로 들리지만 패닉에 빠진 동물이 몸부림치다가 다치면 도축된 고기와 가죽의 품질이 저하되었기 때문에 이는 축산 농가의 비용을 절감하고 효율을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했고 템플이 설계한 새로운 시스템은 북미 축산 농가에 빠르게 적용되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 동물의 사고를 한눈에 꿰뚫고 기존 건축 문법과 전혀 다른 새로운 동선 구조를 설계할 수 있었던 템플 그랜딘의 위대한 업적은 바로 그가 자폐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책의 내용이나 경험한 장면을 사진을 찍듯이 기억에 저장해 곧바로 찾아보고 기억 속의 구조물을 자유자재로 줌인 줌아웃하며 360도 입체적으로 둘러볼 수 있는 사진기억법(photographic memory)은 흔히 천재의 한 표상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동물의 기억법’이라고 템플 그랜딘은 설명한다. 템플 그랜딘과 같은 자폐인은 동물과 비슷한 방식으로 영상형 사고를 하기에 남다른 기억력을 갖기도 하고,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능력을 최대치로 활용한 자폐인 변호사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 한 드라마가 화제다. 주인공 배우는 탁월한 연기력으로 애매한 시선과 뻣뻣한 동작, ARS처럼 다소 기계적으로 들리는 말투 등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게 표현해내며 이 드라마의 인기몰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냈다. 이 드라마와 함께 36년만에 후속편이 제작되었다고 화제를 모은 인기 영화가 함께 오래된 기억을 자극해 나는 <레인맨>도 다시 찾아보았는데, 주연을 맡은 두 명배우는 천재적 기억력을 가진 자폐인이라는 이색적인 존재를 중심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소외감과 고립감, 자폐장애라는 극도로 제한된 여건 속에서도 따뜻하게 연결되는 사랑의 감촉들을 아름답게 보여주었다. 자폐인이 보여주는 기계적이고 폐쇄적인 표현과 반응 양식들 때문에 그들은 흔히 세상에 높은 담을 쌓고 세상과 소통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하지만 자폐인들에게는 그들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와 의지가 있다. 높은 담은 자폐인들이 일방적으로 쌓은 것이 아니다. 익숙한 보통스러움과 다른 낯선 감촉을 쉽사리 적대적으로 해석하고 비하하거나 배척하려 하는 우리 비자폐인, 비장애인 쪽에서 먼저 더 높은 벽을 쌓았다. 어떤 천재성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지구 위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우리 모두에게 지워진 공존의 책임을 오늘도 잊지 않아야겠다. /소설가 심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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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28 10:55

윤석열 어젠다, 위기극복의 시작이다

권력의 결심은 확고하다. 지지율 하락은 감당할만하고 감수할 수 있으며 새로운 권력질서의 확립을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인식의 결과다. 권력은 두 가지 선택지를 갖는다. 하나는 단기대안으로 지지층 중심의 진영접근이자 보수적 요구의 부응이다. 대통령의 “국기문란”과 “국가범죄” 언급을 두고 일부에서는 ‘문재인 정권 털기의 사정정국 강경 드라이브 임박’으로 해석한다. 문제는 단기처방으로 지지층을 지킬 수 있느냐 인데 이게 쉽지 않아 보인다. 최근 여론동향을 보면 “데드크로스”를 넘어 “출범 한 달 20일 정도에 이런 사태는 심각한 상황”의 “총체적 난국”이다. 6월 중순이후의 조사를 보면 ARS방식에서는 부정평가가 절반을 넘었고,면접방식에서도 긍정평가가 빠르게 줄어드는 추세였다.‘ 이준석 징계효과’로 부정평가가 60%를 넘는 조사(긍정평가는 36%)가 나왔는데 정부출범 후 가장 큰 격차다. 정당 지지도에서조차 민주당 역전현상이 나타난다. 대통령과 국힘 지지율이 조정 없는 하락세로 저점을 계속 경신할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대통령 지지율이 여당 지지율 보다 낮게 나오는 경우는 핵심 지지층의 동요를 의미한다. 2030과 50대 그리고 중도층이 먼저 떠났고 영남과 60대 이상 그리고 보수층의 이탈로 이어지는 양상이다. 윤석열 지지의 ‘반사체적 성격’ 때문이다.콘크리트 지지층은 없다. 작년 12월 31일부터 여론조사 공표 금지기간이 시작되기 직전인 3월 2일까지 여론조사 260개의 정권교체 평균지지여론은 51.6%였다. 대선에서 그는 ‘반(反)문재인+비(非)이재명 결집’으로 48.6% vs. 47.8%,0.73% 포인트의 신승을 거두었다. 정권교체라는 대선의 정치적 어젠다에 올라탔고,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평범하고 상식적인 사람들”의 필요와 지지로 간신히 이겼다.‘ 정권교체의 도구’가 ‘윤석열 권력과 정치’의 출발점이어야 하는 이유다. 최근 대통령 지지율 하락은 ‘정권교체’ 이후의 ‘윤석열 어젠다’를 요구하는 민심이다. 국민통합과 민생경제’ 그리고 ‘법치 공정 상식’의 윤석열 어젠다 접근이다.‘ 시대정신의 윤석열 어젠다’는 2030과 50대 그리고 중도층의 지지를 견인할 수 있다. 영남과 60대 이상 그리고 보수층의 지지는 당연하다. 첫째, 특별감찰관의 신속한 임명이다. 그게 법치다. 특별감찰관은 주변관리의 엄정함을 상징한다. 스스로의 경계이기도 하다. 둘째, 인사 시스템의 점검과 복원이다. 대통령은 “법조인이 폭넓게 정관계에 진출하는 게 법치국가”라고 믿지만 국민 10명 중 6명은 “검찰공화국”주장에 공감한다. “측근과 인맥국정”논란에서 벗어나기 그게 공정이자 상식이다. 셋째, 여당과 한덕수 총리의 내각에 겸손과 여유의 자세다. “체질적 충성여당”은 물론 “여의도 출장소”의 오명을 벗어난 여당과 책임과 역할의 내각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대통령의 인식과 태도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게 공정이다. 윤 대통령의 지난 두 달은 조직과 시스템이 아니라 본인의 감으로 밀고 나가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대통령실 참모도 내각의 장관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 그게 상식이다. 그는 “준비된 대통령”이 아니다. 그는 작년 6월 29일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대선출마를 결심했더라도 검찰총장을 물러난 게 작년 3월 3일이다. 1년 만에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시대정신과 국정과제 그리고 정책적 수단 등에 대해 고민할 시간과 기회가 당연히 적었다. 여당이 부족한 부분을 메워야 한다. 과도기적 성격의 권성동 직무대행체제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당과 국회에 다른 목소리가 존재하게 하는 여유와 겸손은 정치의 복원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게 공정이자 상식이다. 넷째, 6%를 넘어 7% 넘어 까지 예상되는 물가상승률은 24년 만의 최고 사람들은 역대급 경제위기를 걱정한다. 공감하는 권력이자 함께 하는 긍정의 리더가 필요한 상황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여든 야든 보수든 진보든 상관없이 권력이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의 더 나은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게 상식이다. 국민의 권력심판 주기가 빨라졌다. 어떤 권력도 예외는 아니다. 민심이 우려에서 짜증 그리고 분노로 넘어가지 않게 해야 한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박명호 교수는 안민정책포럼 회장, 중앙선관위 선거자문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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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14 13:46

아버지 노릇하기의 어려움

어려서 외할머니 아래서 외삼촌들과 함께 자랐다. 오랫동안 부모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다. 기억에 없었기 때문이다. 젊은 부부는 고향을 떠나 낯선 고장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경기도 북부의 운천이라는 소도시에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운천이 어딘지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목수였는데 미군부대에서 용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자식을 떼어 놓고 낯선 고장에서 삶을 개척하는 젊은 가장의 수고와 고단함을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열 살이 될 때까지 부모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자랐다. 영유아기 때 아버지와의 접촉 기억은 없다. 너무 어린 시절이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엷은 슬픔과 고통을 느낀다. 어쨌든 아버지의 자애를 경험하지 못한 채 성장한 것은 내 불운이다. 아마도 아버지의 사랑과 따뜻한 훈육을 충분히 받고 자랐다면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아버지 노릇하기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에 사로잡혔던 데는 그런 곡절이 있었다. 아버지에게 자식은 자신에게서 쪼개져 나온 또 다른 자기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자신의 유전 형질을 물려주며 거기에 아들은 후천적으로 아버지를 닮고자 노력한다. 육아에서 배제된 아버지가 자식의 성장에 끼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알려져 왔지만 최근에는 아버지는 자식의 지능, 사회성, 언어능력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추세다. 인간 사회에서 아버지가 제 자식에게 애정을 쏟고 돌보는 현상은 그리 낯설지 않다. 하지만 포유류 전체에서 보면 포유류 수컷 중에서 제 자식을 돌보는 것은 불과 5% 정도라고 한다. 포유류에게 아버지의 돌봄 현상은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버지의 자식 돌봄은 자식의 사회경제적 성공을 위한 일종의 투자다. 아버지의 부재는 분명 자식의 신체나 인지 측면에서의 발달과 성장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아버지와 떨어져 산다는 것은 그만큼 아버지의 돌봄 투자가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진다. 모든 남성이 어른이 되어서 다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임신 가능한 이성 배우자와 결혼을 하고, 상대가 수태를 하고 출산을 하면서 아버지가 된다. 물론 사회적 입양을 통해 아버지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자식 돌봄의 의무를 기꺼이 지는 일이고, 자식의 사회성과 도덕성에 방향과 지침을 주는 존재로 살겠다는 약속이다. 아버지는 자식이 따라야 할 깃대, 이상적인 모델, 자기만의 영웅이다. 전통사회에서 아버지 노릇의 가장 큰 부분은 가족을 위한 '식량 조달'이다. 아버지는 무엇보다도 가족의 기초 생계를 해결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자식들을 굶기지 않고, 헐벗지 않게 하며, 지붕 아래에서 잠을 재우는 일이야말로 아버지 노릇의 고갱이다. 더 나아가 좋은 아버지라면 자식과 감정적 소통, 깊은 유대 관계를 쌓아야 하며, 궁극적으로 자식의 생존과 번식 활동에 기여를 하여야 한다. 아울러 자식에게 평생을 사랑하고, 마시고, 미소 짓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아버지는 40대라는 이른 나이에 일손을 놓고 물러나 허송세월했다. 대부분의 날을 직업 없이 빈둥거리며 지내는 동안 아버지는 스스로를 놓아버린 듯 무기력했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그다지 매끄럽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부정적 표상이었다. '난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거야!' 사춘기 너머 나는 늘 반항하는 아들이고, 아버지는 내심 그런 아들을 거두는 일을 버거워 했을 것 같다. 나와 아버지는 데면데면 했고, 나는 또 나대로 방황을 하고 혹독한 성장통을 겪었다. 세월이 지난 뒤에야 문득 깨닫는 게 있다. 아버지를 이해하는 일도 그 중의 하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스무 해가 지났다. 아, 아버지! 엷은 슬픔 속에서 탄식하듯이 아버지를 불러보고 싶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에게 아버지 노릇하기란 얼마나 고단한 일일까!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혈혈단신으로 제 생의 길을 뚫어야 했을 젊은 아버지의 대한 연민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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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7.07 14:04

영원한 것은 없다

우리집은 광화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광화문에도 사람이 사냐는 반문이 흔히 돌아오곤 한다. 광화문에 사람이 산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출장을 가면 헬리콥터가 우리집 위로 날아갔다. 헬리콥터 날아가는 소리가 상당히 커서, 대통령의 지방 일정을 모르고 넘어가기 어려웠다. 이제 청와대는 시민공원이 되었으므로 그 일도 모두 추억이 되었다. 광화문이라는 특별한 동네에 한평생 살다보니 이래저래 정치가 일상생활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일이 많았다. 내가 30대였을 때까지는 대통령이 한번 출타할 때마다 20~30분은 족히 걸리는 교통통제를 했다. 대통령의 일정만 중요하고 시민들의 스케줄이야 아랑곳없던 시절이었다. 하염없이 서있는 버스 속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울화통을 터뜨리는게 일상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VIP의 편의를 위한 광화문 일대의 차량통제는 차츰 사라졌다. 지난 10여년간은 대통령 출타 때문에 교통통제로 불편을 겪은 일이 없다. 민주주의적 사고와 교통통제 기술력이 함께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오묘하게 교통신호를 조작하고 어디선가 나타난 교통경찰이 잠깐씩 일반차량 통행을 지도하는 사이에 의전차량은 놀라운 속도로 복잡한 도심을 통과한다. 의전차량이 지나간 뒤 곧바로 일반차량들이 잠시 빨라진 도심통행속도를 즐기며 그 뒤를 따른다. 이 모든 일은 1~2분 안에, 눈깜짝할 사이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진다. 기억하건대 2008년 광우병 사태 이전까지 광화문 일대는 도심 시위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도심 시위는 서울역, 을지로, 명동, 대학로 하는 식으로 구도심 일대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다. 광장이 생긴 이후 광화문은 시위의 메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다. 이후 10여년간 광화문 거주자는 아침마다 일기예보를 확인하듯 오늘의 시위정보를 확인하며 지내게 되었다. 시위 시간은 몇시인지, 시위대의 규모는 얼마인지, 행진 구간은 어디인지, 버스 우회구간과 지하철 무정차 통과구간은 어디인지,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하지 않으면 곧바로 가족들의 등하교와 출퇴근에 막대한 지장이 생겼다. 코로나로 집회가 금지되어 광화문은 시위 없이 고요한 2년의 휴식기를 가졌다. 때맞춰 광화문광장은 2020년 11월부터 광장과 세종문화회관 쪽 보도를 연결하는 새단장 공사에 들어갔다. 아직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높직한 버스에서 현장을 넘어다 보면 광장의 모습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새로 단장되는 그곳에는 길쭉한 원형극장같이 아래로 우묵하게 내려가는 단차구조가 있어서 무언가 공연을 할 수도 있을 것같이 생겼고, 무엇보다도 중간중간에 나무를 많이 심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좋은 생각이다. 공간에 나무는 중요하다. 이전에도 광화문 광장에서는 아름다운 꽃을 심고 전시회나 장터 같은 행사들을 열곤 했지만 언제나 그곳은 뙤약볕이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콘크리트 바닥 광장의 한계는 명확했다. 그곳에서는 오랜 시간 즐거움을 유지할 수 없었다. 장마가 오기 직전 마지막으로 화창한 날을 틈타 부모님을 모시고 청와대 관람을 다녀왔다. 청와대는 요새 어르신들의 에버랜드라고 할만하다. 아침부터 경복궁역 일대에는 청와대 관람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줄이 길고 길다. 보행이 불편하지 않다면 굳이 셔틀버스를 기다리지 말고 운치 있는 경복궁 돌담을 따라 천천히 걸어 올라가시라고 권하고 싶다. 65세 이상이라면 경복궁 입장도 무료이니 경복궁을 통과해 아름다운 경회루와 근정전을 둘러보며 신무문으로 올라가셔도 좋다. 한바퀴 둘러보는데 대략 8000보에서 1만보를 걷게 된다. 젊은 시절을 이 동네에서 보내신 나의 부모님은 특별히 감개무량하게 청와대를 관람하셨다. 청와대 서쪽의 아름다운 인왕산자락에는 어린시절 내가 살았던 옛마을이 선명하게 보인다. 인파와 더위로 들끓는 청와대에서 나는 나의 부모님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우뚝한 청년이던 부모님은 흰 머리의 노인이 되셨고, 언제나 고요하던 청와대는 시민공원이 되어 관람객으로 가득 찼고, 광화문은 그 모습을 여러번째 바꾸고 있다. 세월의 흐름을 광화문과 청와대라는 공간으로 절감한 날이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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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30 14:00

아버지와 아들

“재벌 집안에 아들과 아버지가 있는 줄 알아?” 집안 문제를 아버지와 상의해보라는 내 권유에 재벌 회장 아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동안 그가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거침없이 쏟아낼 때면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에둘러 표현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부터 그를 만나고 나면 뭔가 허전했다. 한번은 임원들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인사를 했다. 그러자 “저렇게 굽실대기만 하는 놈들이 회사에 꽉 차 있다. 저놈들 보는 것도 지긋지긋하다”며 빨리 점심 먹으러 가자고 했다. 겉치레 겸손을 수없이 보며 자랐을 재벌 아들 자리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 영화를 보면 부잣집이 부러웠다. 널따란 정원에서 아빠가 사다 준 멋진 자전거를 타는 아들, 생일이면 선물을 한 아름 들고 나타나는 아빠… 내 아버지는 한 번도 그런 선물을 해주지 않으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내 곁에 있어 주었다. 나와 바둑, 장기를 두었고 어려운 산수문제도 같이 풀었다. 가끔은 돈을 걸고 화투도 쳤다. 한약방을 하는 아버지가 저울을 들고 한약을 지으면 나는 작두로 약재를 썰었고, 내가 늦은 밤까지 공부를 하면 아버지는 연필을 깎아주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부터 찾았고, 어떤 시험 문제를 어떻게 틀렸는지까지 다 말했다. 손님이 많아 한약방 서랍에 돈이 모이는 날이면 내 주머니가 든든한 듯 기뻤다. 그렇게 나와 아버지는 하나였다. 그런데 그 재벌 아들에게는 그토록 많은 것을 이룬 아버지가 그런 존재라니… 세월이 흘러 아들이 회장이 되었다. 불미스러운 일로 수사를 받거나 구설에 오르는 그를 본다.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중학생 때 섬마을에 2년이나 가뭄이 들었다. 나는 물 긷는 사람들이 드문 한밤중에 십여 리 떨어진 샘터에 가서 졸졸졸 나오는 물을 한참 동안 모아 길어 와야 했다. 물동이에 물을 가득 담아 물지게를 지고 걷다가 쉬고 걷다가 쉬곤 했다. 그래도 아버지와 함께 가는 날이면 그 고된 일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내가 힘들어하면 아버지가 물지게를 지고, 아버지가 힘들어하면 내가 물지게를 지고 걷던 그 길… 나는 수십 년 전 옛날로 돌아가 밀항을 해서라도 일자리가 많은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이라도 하며 공부하고 싶었다던 아버지의 꿈도 듣고, 아버지의 아픈 가슴도 느낄 수 있었다. 집에 와 항아리에 물을 부으면 우리는 부자가 된 듯했다. 한 그릇 물로 세수하고, 그 물을 아껴두었다가 발도 씻고 걸레도 빨고… 나는 그렇게 절약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도회지에 나와 돈이 떨어져도 걱정되지 않았다. 아껴 쓰면 되고 하나를 여러 용도로 쓰면 되기에! 요즘 결혼할 자녀들의 집 장만이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부모들이 많다. 그런데 아이들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부모들은 의외로 적다. 일본에 가면 가끔 아버지를 떠올린다. 돌아가시기 전 한번 모시고 왔더라면! 언젠가 동경대학을 구경갔다가 교정에서 밝은 달을 보았다. 등록금을 못 내 초등학교를 겨우 1년만 다니다 말았지만, 한학은 물론 일본말에도 능통했던 아버지가 이런 대학에서 공부를 했더라면 무언가 이루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갔다. 그러다 문득 아버지와 물지게 지고 오던 그 달 밝은 밤이 스쳐 갔다. 달빛으로 물든 고요한 바다를 보며 조각배를 저어 아버지와 조그마한 섬으로 물 길으러 갔던 뱃길도 다가왔다. 아버지는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은 못했지만 아들인 내게 너무나 많은 것을 남기고 떠났다. 내가 뭔가 못마땅해 화를 내면 입을 실룩거리며 한마디 하려다 그만두곤 했던 선량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 친구처럼 살았던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지 않을까? 서울대학을 나오고 변호사에 법학박사도 되었지만 나는 내 아이들에게 그렇게 다정했던가. 재판 준비를 한다, 책을 만든다, 칼럼을 쓰고 방송에 출연하고 건물을 짓는다며 그 재벌 회장처럼 수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정작 내 아이들과는 달빛으로 물든 바다를 함께 보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눈 시간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아들들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윤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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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23 15:18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에 비치는 문재인 전대통령 그림자

윤석열 대통령 취임후 발표되는 국정 지지율이 심상치 않다. 취임초임에도 낮은 지지율 조사가 발표되고 있고, 지지율 성격도 갈등형 구조라는 점이다. 취임 이후 불과 한달이 지난 시점이라 아직 윤대통령 지지율 분석을 하는 것이 이른 감도 있다. 그러나 윤대통령은 문재인 정부 검찰총장으로 문정부와 대립하면서 사실상 2년 동안 유일한 야당 대통령 후보였고, 국민들은 인수위 시절 국정 인수 과정도 보아 왔기에 짧다고 보기도 어렵다. 먼저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역대 대통령 지지율과 비교해서 많이 낮다. 대통령 지지율을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방법은 긍․부정평가 외에 ‘보통이다’라는 중립적 평가항목 유무에 따라서 4점․5점 척도로 구분된다. 먼저 ‘보통이다’라는 항목이 들어가서 긍정지지율이 낮게 나올 수밖에 없었던 5점 척도로 조사를 했던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의 취임 초 지지율은 80% 전후였고, 5점 척도 보다 더 지지율이 높게 나오는 4점척도로 조사를 한 이후 대통령도 60% 전후, 또는 그 이상으로 출발했다. 반면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은 11-13일 한길리서치 조사에서 51.2%, 7-10일 리얼미터 조사에서는 48.0%다. 다른 조사기관의 조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새대통령과 국민간의 허니문 기간이 짧아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50% 전후의 지지율은 국민전체와의 허니문이라기보다는 고정지지층만의 허니문에 가깝다. 문제는 50% 내외의 낮은 정량적 지지율과 함께 갈등형 구조의 정성적 성격이다. 한길리서치 6월 대통령 국정수행평가 조사에서 긍정평가는 51.2%지만 아주 잘하고 있다는 33.9%, 다소 잘하고 있다는 17.3%다. 반면 부정평가는 42.1%인데 아주 잘못하고 있다는 32.7%, 다소 잘못하고 있다는 9.4%다. 이러한 대통령의 지지율 분포 모양은 바가지를 업어놓은 모양(정규분포)이 아니라 바가지를 뒤집어 놓은 모양의 분포다. 즉 분포가 중립적 합의형이 아니라 문재인 전대통령과 비슷한 대립적 갈등형 분포다. 또한 지지율의 전체 긍정평가(51.2%)•부정평가(42.1%) 배율이 1.22이지만, 매우긍정(33.9%)•매우부정(32.7%)배율은 1.04로 더 줄어 갈등적 성격이 더 커진다. 결국 윤대통령의 지지율은 고정지지층에 의존하면서 비토그룹이 커지는 구조다. 문제는 민심의 캐스팅보터 역할을 하는 중도층이다. 중도층에서 긍정평가가 44.2%(아주 잘한다 26.7%, 다소 잘한다 17.5%)인 반면 부정평가가 48.9%(다소 잘못하고 있다 10.5%, 아우 잘못하고 있다 38.3%)로 부정평가가 더 많으며, 평가 강도에서 있어서도 아주 잘한다는 26.7%에 비해 아주 잘못한다는 평가가 38.3%로 11.6%p 더 높아 중도층이 거리를 두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윤석열대통령의 지지율을 문재인전대통령과 비교해 보면 취임초 지지율은 오히려 문대통령 지지율보다 더 낮으면서도 대립적 갈등형 성격을 보인다는 점에서 문대통령의 그림자가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지지율의 갈등적 구조는 낮은 지지율보다 더 큰 문제가 될수 있는데 향후 지지율 상승의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윤대통령 지지율이 이런 특징을 갖게 된 첫 번째 이유는 문재인 정부와의 대립적 정치 관계일 것이다. 그러나 그 것만이 이유가 아니다. 국민들은 문정부의 정책실패에 대한 반작용으로 윤대통령을 당선시켰지만, 문재인 정부 정책실패 즉 주택정책과 새롭게 왜곡된 자산․부가가치 분배,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이후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를 해결할 윤대통령의 정책적 큰 그림을 듣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 지지율은 국정수행에 대한 결과적 평가이지만, 향후 국정운영의 동력이다. 그러기에 임기초 대통령 지지율을 50%이상은 유지해야 향후 5년간 국정을 원만히 운영할 수 있다. 그런데 뭔가 윤석열 대통령의 생각과 허니문 시간표가 국민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가는 모습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더 심화되고 문재인 정부에서는 새로운 양극화 구조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지배적 힘을 확보한 시장참가자의 선한 의지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시장조절기능과 같은 신자유주의자 밀턴 프리드먼의 이야기를 국민들은 수긍은 하지만 믿지는 않는다. 오히려 후보시절과 임기 초 개별 정책들을 보면서 신자유주의의 냉혹한 경쟁이 어렴풋이 그려지면서 국민들은 불안해지고, 인내심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미스매치가 지속되면 문재인 정부에서 그러했듯이 대통령 지지율은 끌어올리기에 점점 더 무거워진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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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16 14:20

‘섬머타임’이란 노래를 좋아하세요?

여름을 정말 좋아한다.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는 ‘섬머타임(Summer time)’이란 노래 때문이다. ‘여름이란다. 그리고 삶은 평온하지./물고기는 뛰어오르고 목화는 잘 자랐다네./오, 아빠는 부자고 엄마는 미인이란다./그러니 쉿, 아가야, 울지 마렴.//이런 아침이 계속 되면 넌 다 커서 노래하겠지./넌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 거야./하지만 그때까지 아무것도 널 해치지 못할 거야./엄마 아빠가 네 곁에 있으니’.(조지 거슈인, 1919) 여름이 올 무렵 이 노래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 노래에 담긴 아련하고 슬픈 노스탤지어 때문에 인생의 웬만한 고달픔도 참을 만하다. 내겐 부자 아빠도, 미인 엄마도 없는데, ‘섬머타임’이 흘러나오면 심장이 함부로 나댄다. 어린 시절 여름의 이른 아침, 하늘은 맑고 부지런한 외할머니가 비질한 마당은 깨끗하다. 수련 꽃대가 올라오고 참새들은 짹짹거린다. 막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켤 때 뒷산에 올라 참나무 진액에 달라붙운 딱정벌레나 풍뎅이를 잡을 생각에 소년의 기분은 붕 뜬다. 먼 데서 수꿩이 울고, 하늘엔 흰 구름이 떠간다. 소년은 수줍음이 많았지만 숲에서는 용맹스러웠다. 아무 시름이나 걱정 없이 여름 숲을 어린 짐승처럼 땀 흘리며 뛰어다닌 소년의 작은 머리통에서는 풀 냄새가 진동했다. 가난했지만 가난이 뭔지를 몰랐다. 자주 배가 고팠지만 가난에 주눅 들지 않았다. 왜 맨드라미는 피었다가 지고, 돼지는 왜 해마다 열 마리나 되는 새끼를 낳는지를, 계절이 바뀔 무렵 장롱에서 꺼낸 옷에는 왜 단추가 하나둘 씩 떨어졌는지를, 맹꽁이들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비올 때만 나타나서 우는지를, 소년은 몰랐다. 땅거죽을 밀고 올라오는 작약 움이나 느릅나무에 돋는 연초록 잎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아름다움이 뭔지도 모른 채 이 세상에는 온갖 아름다움이 흘러넘친다고 생각했다. 마을 언덕바지엔 교회당이 있었지만 소년은 교회를 가 본 적이 없다. 소년은 여름 숲을 누비는 놀이의 천재일 뿐, 누구에게 기도해야 할지를 몰랐다. 소년은 유황냄새를 맡거나 기차를 타본 적도 없었다. 소년은 제가 열여덟 살이 되고, 서른이 되고 쉰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물론 모르는 게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왜 죽음은 내 존재를 가득 채우며 고동치고 / 내 일생을 몇 초(秒)의 날갯짓에 묶어 두는가?”(아도니스) 그리고 눈(눈)과 태풍, 지구와 붉은 달, 살인과 단두대, 풋사랑의 서글픔이나 피맛 나는 그리움에 대해서도, 나는 아는 바가 없었다. 눈이 녹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꽃들이 피고, 어딘가에 탑이 올라가며,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새로 태어난다. 슬픈 일도 많지만 세상은 살 만하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지 부모와 떨어져 자란 탓인지 어린 게 눈치가 빤하고 조숙해. 소년은 머리맡에서 어른들이 수군대는 얘기를 들었다. 어른들의 얘기를 더 들으려고 했지만 소년은 어느덧 잠에 빠져들었다. 아름다움은 덧없는 슬픔 속에서 반짝이며 온다는 걸 눈치 챈 소년은 정말 조숙했을까? 그 소년은 오뉴월 보리처럼 자라나고, 성상(聖像) 같은 어린 시절은 참 빨리도 지나갔다. 여름이 온다. 여름의 신들이 태양을 데려다가 노동을 시킨다. 태양의 중노동 덕택에 들에서는 농작물이 자라고 익어간다. 세상을 뜬 사람과 새로 태어나는 사람 사이에서 복숭아나무 가지에 매달린 복숭아가 무르익고, 채마밭을 뒤덮은 녹색 줄기에 달린 둥근 수박에 단맛이 배어든다. 여름의 신들이 가만히 속삭인다. 이 여름은 단 한번 뿐이야. 여름의 행복도 두 번은 없어. 자, 이 여름의 향연을 맘껏 즐겨라! 나는 숱한 인연과 그리움을 겪으며 떠돌이별 같이 방황했다. 내 손목을 채웠던 시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사랑의 설레임과 환멸, 우연한 행운에 숨은 악의, 늙음과 병에 대해, 이제 나는 알 만큼 안다. 나이가 들며 얼굴도 취향도 달라지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영혼의 깊은 곳을 두드리는 ‘섬머타임’을 여전히 좋아하고, 덧없는 슬픔의 영역에 속한 아름다움에 속절없이 매혹 당하는 것이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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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09 13:42

알고리즘아 알고있니?

손 안의 작은 기계에 정신을 위탁하고 한가한 시간을 보낼 때 어떤 앱들은 나에게 예의바른 질문을 던지곤 한다. “당신이 나 말고 다른 앱에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제가 사용자의 활동을 추적하도록 허용하겠습니까?” 나는 이런 문제에 인심이 후하다. 온라인상의 내 개인 활동 이력이라고 해보았자 몇몇 친구들의 sns 안부와 뉴스 따라잡기, 조촐한 생필품 구매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철통같이 보호해야할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내가 다른 앱에서 검색한 내용을 참조하여 예상치 않은 순간에 슬그머니 들이미는 알고리즘의 센스야말로 어찌나 요긴한지. 내 정보력이나 안목을 상큼하게 뛰어넘는 알고리즘의 역량에 몇 번이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므로 나는 내 활동 이력을 마음껏 추적하라고 너그럽게 허락하는 편이다. 내 취향과 관심사를 알수록 더욱 더 나에게 적합한 정보를 제공할 알고리즘의 후의에 즐거운 쇼핑으로 답할 우리의 호혜적 관계를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알고리즘의 센스넘치는 추천을 마음껏 누리며 살고 있으리라고 별 의심없이 생각했는데, 세상은 내 생각과는 달랐던 모양이다. 활동 이력 추적을 허용할지 묻는 질문에 나처럼 동의하는 사람은 5% 근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따라다니지 말라고 거절한다고 한다. 95%의 높은 거절률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무난하고 안전하게 다수를 따르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꽤나 별난 5%에 속해버려서 놀랐고, 남들이 아니오를 선택한다는 사실을 알고나자 이전처럼 마음편하게 알고리즘의 추천을 즐길 마음이 들지 않았다. 흔들리던 알고리즘과 나의 밀월을 방해한 사건이 또 일어났다. 내 친구가 골프 레슨을 받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관심사는 온통 골프용품과 골프 연습장에 모이게 되었다. 친구는 나에게도 골프를 함께 배우자고, 무척이나 재미있다는 소감을 강력하게 피력했는데, 내 나이대에는 골프를 배우기 시작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았으므로 사실 나에게 이런 권유가 처음은 아니었다. 친구들이 아무리 골프가 재미있다고 해도 나는 그 운동에 입문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원래부터 운동과 친하지 않은데다 나는 무엇이든 근접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서 풍광 좋은 먼 곳으로 가야하는 그 운동이 나에게 잘 맞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친구의 제안을 웃음으로 받아넘기고 그 일을 잊었다. 그런데 얼마 후부터 친절한 알고리즘은 나에게 골프용품과 골프웨어들을 열정적으로 추천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흔히 보여주던 인테리어용품, 고양이용품, 맛있는 빵집, 식품 광고와는 전혀 맥락이 닿지 않는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이었다. 친구와 나는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었을 뿐 골프용품을 검색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으므로 알고리즘의 이런 추천은 대단히 수상스러웠다. 알고리즘에게 내가 방문한 페이지나 검색 입력어를 참조하라고 동의한 적은 있었지만 나의 개인적인 메시지를 활용하라고 허락한 적은 없었다. 이 일은 마치, 카페에서 친구와 실컷 수다를 떨고 났더니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판매원이 우리가 이야기했던 바로 그 물건을 들고 나타나 판촉에 나선 것만큼이나 난데없고 침해적이었다. 게다가 내 휴대폰에는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만을 24시간 기다리고 있는 음성인식 AI가 있지 않은가. 그는 항시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힘주어 강조하는 친구다. sns가 아니라 개인적인 대화마저도 참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전까지 침묵하던 나의 느슨한 경각심이 경보음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이것은 친절의 범주를 넘어선 일이라고, 무언가 뻔뻔한 일이 일어났다고. 나의 개인적인 메신저가 털린다한들, 그 내용은 내가 방문한 활동이력만큼이나 보잘것없고 무해하다. 기껏해야 유치한 농담이나 섣부른 정치적 견해나 들통나서 비웃음을 당하고 끝날 것이다. 하지만 내 손안의 친절한 알고리즘이 나의 개인적인 대화를 조용히 엿듣고 그 내용을 무언가에 활용하고 있다는 느낌은 섬뜩하다. 더 이상 알고리즘은 친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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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6.02 14:13

홀로 뿌린 데모 전단

1976년 12월, 진눈깨비 날리는 서울대 도서관 앞에서 한 학생이 경찰을 따돌리며 홀로 전단을 뿌리고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과 함께 구경만 하는 학생들. 박정희 정권이 유신독재의 추악상을 감추기 위해 미국을 상대로 막대한 로비를 벌인다는 것이었다. 이범영! 미국 의회 청문회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던 박동선 스캔들이 그 4학년 선배의 시위로 국내에도 알려져 박 정권의 가면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숨죽이던 사람들이 그때부터 기지개를 켰고, 시위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그것은 부마사태로 이어졌고 박 정권은 김재규의 총성으로 끝을 맺고 말았다. 이범영, 그가 겨울 교정에서 외롭게 외치다 잡혀간 지 3년 만이었다. 그리고 44년이 흘렀다. 견제와 균형이 사라진 대한민국, 입법·행정은 물론 지방 권력까지 장악해 독주만 하는 문재인 정권, 사법부까지 흔들어대는 권력의 오만에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힘없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때 그 선배가 떠올랐다. 학생일 뿐인 그가 세상을 바꾸는 물꼬를 트지 않았던가. 3년 전 조국 사태로 고군분투하던 윤석열 총장의 용기를 보며 그를 만났다. 다행히 그는 지혜로운 검사로 보였다. “윤 총장! 지금 이 어두움을 걷어내면 국민들이 대통령으로 불러낼 겁니다.” 말이 씨가 되었는지 1년 후 그는 유력한 대선 후보로 등장했다. 그런데 벌써 대통령이라도 다 된 듯 걸음걸이며 말투가 지나쳐 보였다. 국민들의 성원이 지속될까? 그의 부풀어 오른 자신감에서 바람을 빼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경력이든 학식이든 인품이든 윤석열에게 뒤지지 않을 인물을 찾기로 했다. 안철수가 떠올랐다. 일면식도 없는 그를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문을 두드리면 열린다더니 후배가 자리를 마련했다. 서울시장 경선에서 오세훈 후보에게 패배해 위축돼 있던 그를 만나자마자 나는 “윤석열을 위해서도 이번 대선에 꼭 나가야 합니다. 아무리 유력한 야당 후보라도 견제할 후보가 있으면 자세를 낮추게 되고 그래야만 국민들의 마음도 떠나지 않습니다.”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의 겸손한 태도에 나는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정권교체도 중요하지만 건강한 대한민국이 되려면 대통령 중심의 권력 남용이 사라져야 합니다. 단일화로 공동정부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대통령에 출마한 안철수는 경선을 제안했다. 윤석열은 단일화 무산의 책임을 안철수에게 돌리고 자강론으로 돌아섰다. 중도의 지지 없이 정권을 잡겠다는 그 무모한 계획에 나는 절망하고 말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권교체의 키는 윤석열이 아니라 안철수에게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3월 1일 아침, 안철수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전화 폭탄으로 통화 중 신호만 계속 들려왔다. 곧 사전투표가 시작되지 않는가. 애가 탔다. 아! 이것이 대한민국의 운명이란 말인가. 오후에 다시 전화를 들었다. 안 후보가 받는 게 아닌가. 그는 단일화에 대한 아픈 기억들을 풀어놓았다. 그동안 약속을 지킨 정치인들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국무총리니 경기지사니 들이대며 거래하는 듯한 협상 태도에도 몹시 자존심 상해 있었다. 그는 자리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은 사람인데… 국민들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아픔이 다가와 “나도 밤늦게 글을 쓰고 있으면 지나가던 친구들이 ‘야, 이 밤중까지 돈 벌고 있냐?’ 그럴 때 몹시 마음이 아프다.”고 했더니 그도 마음이 풀리는 듯했다. 30여 분이 지나서야 나는 단일화 문제를 꺼낼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또 철수했다고 비아냥댈 겁니다.” 나는 분명히 말했다. “국민을 위해서라면 몇 번이라도 철수하는 게 맞지요.” 그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그럼 내일 마지막 토론회 때 단일화 제안하지요.” 나는 뛸 듯이 기뻤다. 3월 3일 새벽 대망의 단일화가 이루어졌고, 윤석열은 0.73퍼센트 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역사는 위인만이 만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한 학생도, 한 시민도 역사의 물꼬는 틀 수 있다. 거대한 문도 두드리면 활짝 열린다는 사실을 나는 이범영을 통해, 내 경험을 통해 분명히 체험했다. 어쩌면 비밀로 해야 좋을지도 모를 일을 밝히는 것은 나를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앞으로 다가올 수천, 수만 년의 대한민국 역사에서 위기가 다가올 때 힘이 있건 없건 선한 뜻만 가지면 누구라도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진실을 남기고 싶기 때문이다. /윤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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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5.26 14:13

윤석열 대통령, 국민과의 허니문이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5년 단임 대통령제다. 따라서 4년 중임제 미국과는 국정운영이 다르다. 미국은 대부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는 관계로 첫 4년은 중장기 국정계획을 추진하고, 다음 4년 임기는 성공적 관리에 중심을 둔다. 반면 5년 단임의 우리나라는 임기초 1∙2년동안 주요 국정과제를 추진하고 3∙4∙5년차에 관리하여 성과를 내려 한다. 그리고 마지막 5년차는 레임덕을 방지하고 정권 재창출을 준비한다. 5월 10일 출범한 윤석열 대통령의 5년도 국정성과를 내기에는 매우 짧을 수도 있다. 특히나 윤석열 정부의 과제는 어느 대통령보다 난제다. 정책적으로 본다면 부동산안정과 미래세대를 위한 일자리 창출, 미래 성장동력을 만들어야 하고, Decoupling으로 나타나는 국제관계에서 외교안보도 큰 도전이다. 또한 3대세습 체제존속을 위한 핵개발로 인한 국제 제재와 코로나로 인한 셀프봉쇄는 북한 체제의 위기를 더 가속시켰다. 위기의 북한은 남북관계에서 난제이기도 하지만 한반도 평화의 기회가 될수도 있다. 즉 패러다임의 대전환시기다. 이러한 가운데 공약으로 내걸었던 정상국가와 상식이 통하는 사회도 만들려면 5년은 오히려 짧을 것이다. 그렇다고 5년 임기를 탓하면서 새 정부가 공약이나 국민의 기대를 이행하지 않거나 국정과제를 줄여 변경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유는 이번 대선이 87년 5년 단임제 이후 정당연임이 실패한 첫 대선이라 야당의 정치적 에너지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만약 임기 초부터 민심을 저버려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하락하면 임기내 국정동력은 조기에 약화 된다. 분명 5년 단임제 임기는 너무 짧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 정권 즉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대통령의 5년 임기를 되돌아보면 국제관계의 일대전환, 대한민국 정치 패러다임의 변화 등 역사적 전환점이 되는 성과도 많았고, 금융위기 등 국가 위기 상황과 극복도 있었다. 그렇게 보면 결코 5년이라는 기간은 짧은 기간이 아니다. 5년 임기는 자연의 시간 개념으로 본다면 모든 정부에 똑 같다. 그러나 그 5년은 임기를 어떻게 운용∙관리하느냐에 따라 정부마다 달라질 수 있다. 그럼 5년 임기를 길게 가져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 번째는 효율적∙체계적 국정운영계획이다. 그러려면 반드시 참고해야 할 것이 역대 대통령의 국정이다. 역대 정권에서는 정책의 우선순위와 시기별 운용 계획 및 성과를 분석하면 분명 5년 임기 기간 내 성공적 국정성과를 낼 뿐만 아니라 임기 중에 새롭게 발생하는 과제나 위기관리도 더 잘 해 나갈 것이다. 특히나 과거 정권과의 부정이나 단절보다는 발전적 계승이란 관점에서 보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다음 5년 임기를 길게 가져가는 두 번째 방법은 협치다. 협치는 다시 말해 야당∙국민과의 관계(레포)로 특히임기초에 중요하다. 과거에는 대선에 패배한 야당은 신정부에 대해 임기초 1∙2년 동안은 극한 대립보다는 비판적 관망으로 여∙야간 나름 암묵적 허니문 기간이 있었다. 이는 대선 패배 인정과 함께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에 대한 배려이며, 정권 발목잡기 역풍에 대한 우려였다. 그나마 여론의 눈치를 본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당선이후 여야간 허니문 기간이 사라지면서 정권 초부터 극한 대립을 했다. 갈수록 신정부가 야당과 협치 즉 허니문 기간이 어려워졌다. 그러다 보니 신정부는 국민과의 허니문기간이 더 중요해지는데 이는 임기초 대통령 국정평가로 나타난다. 만약 신정부가 민심에 기반 한 국정운영을 할 경우, 국민의 힘이 실릴 것이다. 이는 신정부와 국민간의 허니문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여소야대의 몸집만 믿고 야당이 국정 발목잡기를 한다면 그 결과는 다음 총선에서 국민이 판단한다. 바로 현명한 대통령은 국민을 지랫대로 5년을 8년같이 사용하는 대통령일 것이며, 현명하지 못한 대통령은 국민에 맞서며 5년을 4년 아니 1∙2년과 같이 사용할 것이다. 정권출범 직후 5월14-16일 쿠키뉴스-한길리서치의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은 50.3%였다. 다른 조사기관 국정수행 조사도 비슷하다. 인수위 초기보다는 소폭 상승했다고는 하지만 87년 이후 역대 단임 정부 출범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달리 말해 신정부와 국민의 허니문으로 보기에는 다소 낮다. 이로 인해 현 정부의 앞길이 험난할수도 있다. 이를 극복 하는 것은 민심뿐이며, 민심은 이기는 야당은 없다. 따라서 현정부는 야당과 협치가 잘 안될 경우 민심을 얻는 것이 야당을 이기고 국정을 성공하는 길이 될 것이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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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5.19 14:30

실뜨기 하던 소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가 어렸을 때 시골 누이들은 실뜨기 놀이를 즐겨 했다. 실이나 노끈의 양쪽 끝을 연결한 실테를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번갈아가면서 손가락으로 걸어 떠서 여러 모양으로 변형시키는 이 놀이는 심심함을 잊기에 좋았다. 누가 실뜨기 놀이를 고안해냈는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누이들은 그 즐거움에 빠져 보냈다. 간혹 어른들의 꾸지람도 없지 않았지만 누이들은 한나절을 찐 고구마를 먹고 까르륵거리며 실뜨기 놀이에 열중했다. 실뜨기 놀이는 나바호족, 에스키모, 오스트레일리아나 뉴기니 원주민이 만든 놀이 중 하나라고 한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인류학 교수인 A.C. 해던(1855~1940)은 뉴기니 섬이나 보르네오 섬 등지에서 줄을 갖고 갖가지 동물모양을 만드는 놀이를 한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의 딸 캐슬린 해던 리시베스(1888~1961)도 이 인류학적 놀이를 연구하면서 태평양 섬의 원주민들을 만난다. 원주민들과 말은 달라도 서로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을 알았을 때 흥분과 기쁨을 나눌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놀이는 동아시아 국가인 한국, 중국, 일본을 포함해 필리핀, 보르네오 등지에도 성행했다. 실뜨기 놀이는 유럽에도 전해졌지만 문명국가에서는 그 맥이 이어지지 못한 채 끊겼다. 1960년대 한국 농민들은 가난으로 허덕였다. 어른들이 오늘의 버거운 삶과 암담한 내일에 진절머리를 칠 때도 누이들은 실뜨기 놀이를 즐겼다. 어느 사이에 동백이나 모란보다 더 화사한 누이들이 제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의 형과 삼촌들이 '청룡부대'나 '백호부대'에 뽑혀 베트남에 파병되고, 누이들은 구로공단에서 가발이나 인형을 만들거나 '금성사 라디오'나 '대한전선 텔레비전' 부품 조립 라인에서 일했다. 구로공단과 달동네가 있던 시절, 우리는 채변 봉투를 갖고 등교하고, 교실에서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웠다.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나훈아의 '고향역', 남진의 '님과 함께' 같은 대중가요가 대유행을 했다. 공단 쪽방에 살던 누이들은 낮엔 '산업 역군'으로 일하고, 밤엔 산업체 부설 고등학교를 다녔다. 산업화 시대와 계엄과 위수령의 시대를 지나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어느덧 구로공단이 디지털 산업단지로 바뀌고, 나라 살림 규모는 예전과 견줘 몇 백배나 더 커졌다.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 체제로 들어서며 생산 강제와 성과 강제에 포박된 채로 각자는 고립 속에서 자기 생산에 몰두한다. 재벌들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 전통시장은 거대 쇼핑몰로 탈바꿈하며, 나라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하지만 계층 간 소득불균형의 골은 깊어졌다. 가난은 고착되고, 현실의 불확실성은 더 커졌다. 공장형 양계장에서 닭들이 24시간 알을 낳는 동안 젊은이들은 계층 간 이동사다리가 사라진 사회에 절망하며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을 외친다. 돌이켜보면 누이들과 실뜨기를 하던 시절은 좋은 시절이었다. 그 한가롭고 즐거웠던 시절은 너무 빨리 지나갔다. 공장에서 가발이나 만들던 누이들은 이젠 할머니가 되었다. 시골에는 실뜨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은 없다. 그저 빈집을 지키며 허공을 향해 짖는 개와 경로당을 찾는 노인 몇몇만 남았을 뿐이다.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그치고, 마을 공동체가 소멸하는 동안 삶의 질은 얼마나 더 높아졌고, 우리는 얼마나 더 행복해졌을까? 누이들이 그 특유의 화사함과 명랑함을 잊은 채 노동 현장에서 '여공'으로 산 세월은 '유효한 역사'일 텐데, 우리는 그 '유효한 역사'를 기억에서 밀어내느라 분주하다. 그 망각은 더 높은 윤리 지표 위에 삶을 세우는 일의 태만에서 나타나는 삶의 실패이자 유죄의 증거일 테다. 우리가 놀이 능력을 잃고, 삶의 방향성도 잃은 채 갈팡질팡 하며 나아가는 사이 실뜨기 하던 소녀들은 다 사라졌다. 그 소녀들 중 하나라도 어렵게 생계를 잇다가 고독사를 맞는다면, 이 불행의 책임은 마땅히 우리의 몫이라야 한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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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5.12 14:18

맨얼굴로 웃다

“주말마다 관악산에 올라갔는데, 사람이 드문 산길에서는 슬그머니 마스크를 벗었어. 지난 2년동안 산속에서 ‘마스크 씁시다’ 하는 소리를 두 번 들었어. 예, 하고 지나쳤지.” 우리는 산속에서 마스크를 쓰는 것이 감염 예방에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나는 그런 일을 한 번 겪었는데, 횟수가 적다고 해서 내가 더 운이 좋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내가 만난 사람은 “마스크 씁시다”라고 점잖게 말하는게 아니라 “마스크 똑바로 쓰지 못해?” 라고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그날 나는 마스크를 잘 쓰고 있었으므로 그 고함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사나운 검열관의 앞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기분을 망치기엔 충분했고 아름다운 산길은 불쾌감으로 가득했다. “당신이 더 문제야! 누가 공공장소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라고 면허를 줬나? 어디다 대고 욕을 하는 거야!” 어느 용감한 시민이 그에게 맞서 소리를 질렀을 때 나는 마음 속으로 그에게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냈다. 함께 소리를 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나는 그와 같은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서, 상한 기분을 수습해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을 뿐이었다. 지난 2년 동안 이런 일들을 겪은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조지 오웰은 소설 <1984>에서 시민의 일거수 일투족을 빠짐없이 감시하고 관리하는 거대 권력의 존재를 예언하고 빅브라더라고 명명했는데, 알고보니 빅브라더보다 더 무서운건 스몰브라더 들이었다. 서로를 적극적으로 감시하고 규칙의 위반을 건건이 지적질하는 이웃들의 목소리는 거대권력의 익숙한 협박보다 더 가깝고 피할길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실외공간에서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된 5월 첫 한주일은 감격스러웠다. 소소한 볼일을 보러 나갈 때마다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를 만끽했다. 해마다 봄이면 꽃과 맑은 날씨를 즐겼지만 이번 5월의 도시에서 나를 가장 즐겁게 한 것은 향기였다. 숨쉬는 공기에 이토록 향기가 가득한 줄을 처음 느꼈다. 도시의 매연조차 무뎌진 감각을 일깨우는 듯했다. 보아하니 나처럼 마스크를 적극적으로 벗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얼추 보아도 90%의 시민들은 이전처럼 실외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가시적으로 소수자가 된 나는 또다시 어느새 익숙해진 불안감을 느꼈다. 마스크를 똑바로 쓰라는 거친 목소리가 당장이라도 뒷덜미를 후려칠 것 같았다. 강제하지 않아도 시민들은 스스로의 건강을 위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실천한다. 나를 두렵게하는 것의 실체가 질병이 아니라 이웃들의 비난인 것은 다시 한번 나를 슬프게 한다. 지난 2년간 성실하게 마스크를 착용했지만 얻은 것은 자부심이 아니라 불안감이라니, 이 얼마나 허탈한 일인가. 우리나라 국민들의 교육수준은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편에 속하고 사회적 이슈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참여 열의도 높다. 지난 2년간 코비드 팬데믹을 겪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이 공공의 이익에 얼마나 충실한지 모두 확인했다. 이제는 사회가 개인에게 신뢰를 돌려주면 좋겠다. 내가 해야할, 혹은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너무 꼼꼼하게 일일이 정해주는 사회는 숨이 막힌다. 마스크를 벗고 웃으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할 줄 알았는데, 맨살갗에 닿는 봄 햇살이 유쾌하여 자동으로 웃음이 나왔다. 향기, 필터를 거치지 않고 코 끝에 직접 와닿는 향기가 무엇보다 감격스러웠다. 내 상부호흡기가 필터 없는 바깥공기와 만난 오늘, 정신에 뽀얗게 앉아버린 두려움의 곰팡이들도 봄바람에 말끔하게 날아갈 것 같았다. 거리에서 마주친 낯선 이웃을 향해 나는 환하게 웃었다. 마주 오던 그는 마스크를 잘 쓰고 있었으므로 입이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는 모두 마스크 윗부분의 모습만으로 사람의 표정을 파악하는데 이미 익숙해졌으므로 그가 나의 인사에 역시나 웃음으로 화답했음을 알 수 있었다.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된 날, 나는 마스크를 벗었고 그는 마스크를 썼다. 우리는 생각이 달랐지만 나도 옳고 그도 옳다.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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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5.05 14:05

그 많던 기원은 어디로 갔을까?

장석주 시인 바둑을 사랑한 사람으로 동네 기원이 사라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짜장면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며 승부에 몰입하던 시절이 있었다. 주말마다 바둑 두는 즐거움은 그 무엇과 견줄 수 없었다. 바둑에는 패배의 쓰라림이 있고, 승리의 달콤한 쾌감과 명예로움이 있다. 동네 기원이 사라지는 것은 바둑 인구가 줄고, 기원 운영이 어려워졌기 때문일 테다. 승부의 짜릿함에 취해 기원에서 낮밤을 흘려보낸 기억은 이제 아련한 추억이다. 바둑은 흑백으로 나뉜 상대가 가로 세로 19개의 줄이 교차하는 361군데 중 한 곳에 돌을 착점하며 누가 더 많은 집을 차지하느냐로 승부를 가른다. 바둑판 네 군데 귀에 화점이 있고, 중앙엔 천원이 있다. 바둑판은 하나의 우주를 표상한다. 여기에는 동양의 우주관과 철학이 집약되어 있다. 바둑 규칙은 단순한데, 그 수의 깊이는 헤아릴 길이 없다. 돌 하나는 무한이고 그 변화의 깊이는 심연에 가깝다. 바둑과 장기는 그 규칙이 딴판이다. 장기는 차, 포, 마, 상, 졸로 나뉘고 그 이동 경로가 다르다. 차는 전후좌우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졸은 뒤로 물러설 수 없고 오직 한 칸씩만 전진한다. 바둑의 돌은 그 자체로 동등하다. 다만 돌과 돌은 상호연관 속에서 그 가치의 경중이 달라진다. 어느 지점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어느 돌은 폐석이 되고, 어느 돌은 요석이 된다. 돌이 한 점 한 점이 놓일 때마다 판세가 요동치며 천변만화가 일어난다. 승부는 한쪽으로 기울다가 뜻밖의 변수로 뒤엎어지며, 국면이 극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바둑은 영토를 두고 이익이 상호 충돌하는 까닭에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진다. 돌을 놓을 때마다 효율을 따진다. 수의 계산에 밝고, 직관과 논리에 뛰어나며, 판세를 읽는 힘과 자기 제어 능력이 좋아야 바둑이 세질 수 있다. 바둑은 경우의 수가 무한이다. 수없는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한 점 한 점을 놓아야 한다. 초보자는 정석(定石)을 외우고, 행마법과 기리(棋理)를 익혀야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기력에 이르면 이마저도 다 버리고 자유로운 발상을 기반으로 자기 바둑을 두어야 한다. 바둑은 무언가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동이 아니다. 고대 사회에서 바둑은 교양이자 예도, 인격을 갈고 닦는 수행법이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오늘날 시나 무용, 기악 합주, 공놀이, 수수께끼 풀기 따위가 그렇듯이 바둑엔 딱히 큰 쓸모가 없다. 프로기사가 아닌 다음에야 바둑이 소득 수단이 될 수는 없고, 그게 생물학적 번영에 보탬이 되는 경우도 없을 테다. 바둑은 쓸모없음으로 빛나는 것들 중 하나인데, 그럼에도 바둑에 푹 빠진 것은 내 안의 놀이 본능 때문일 것이다. 왜 바둑이 좋았을까? 바둑을 둔다는 상상만으로도 흥분한 것은 우리가 호모 루덴스, 즉 놀이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갖가지 놀이에 미치거나 열광한다. 어린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사회화 훈련을 받는다. 바둑은 놀이이되 지적이고, 도덕적이며, 정신적인 면을 고양시키는 측면이 있다. 문화사가인 호이징하에 따르면, 놀이는 '어떤 표출이며, 형상화이며, 대리적 현실화'이다. 한 동네에 살며 기원에서 만나던 H교수도, 작가인 S선생도 세상을 떠났다. 두 분 다 바둑을 놀이를 넘어선 마음의 수련이고, 지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한 방편으로 즐겼다. 그 분들 떠나고 바둑 둘 상대가 없었다. 그 분들과 일합을 겨루던 날은 한가로운 추억이 되었다. 바둑에서 배울 것은 많다. 바둑에서 욕심이 지나치면 필경 패배에 이르고, 평온함과 무심함으로 대국을 조망하면 승리에 이른다. 물러나 상대와 화평을 도모해야 할 때가 있고, 나아가서 힘을 겨룰 때가 있으며, 그것을 헤아리는 지혜가 깊을수록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바둑은 기술, 용기, 힘뿐만 아니라 집중력, 응용력, 창의력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것은 사람에게 두루 필요한 덕목들이다. 어린 아들이 있다면 바둑을 가르치겠다. 바둑이 청정한 도락이고, 균형 잡힌 인격과 교양을 갖추는데 보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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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4.14 14:20

나는 어떤 빗방울이 될까

어린 시절에 어른들이 나에게 깜짝 놀라 여러번 확인했던 질문이 있었다. “너 김신조 몰라? 정말로 김신조가 누군지 몰라?” 나는 정말로 그가 누군지 몰랐다. 그를 모른다고 고개를 저으면 어른들은 긴 탄식을 내뿜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식으로 나는 김신조를 알게 되었다. 김신조는 1968년에 북한에서 내려와 청와대를 습격하려던 31인 무장공작원 그룹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내가 태어나기 4년 전의 일이었으니 나는 그를 모르는게 당연했는데도 어른들은 내가 그를 모른다고 할 때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냐고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장탄식을 내뿜었다. 그때 탄식하던 어른들의 심정을 이제 나도 안다. 내 딸을 포함한 젊은 세대가 이웅평, 황영조, 하다못해 아기공룡 둘리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도 옛 어른들처럼 놀라며 긴 한숨을 내뿜었다. 그 한숨은 세월의 빠름에 놀라고 세상사의 무상함에 굴복하는 의미였다. 요즘 인기를 끄는 소년범에 대한 법정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그렇게 잊혀진 인물들 중 하나인 신창원을 오랜만에 떠올렸다. 신창원을 안다면 당신은 옛날사람이다. 1997년 신출귀몰한 탈주범으로 세간에 이름을 떠들썩하게 알렸을 때 신창원은 물론 소년범이 아니었다. 2년 넘게 도피생활을 계속한 끝에 눈에 띄게 알록달록한 쫄쫄이 티셔츠를 입고 체포되어 사나운 표정으로 끌려갔던 그는 이십대 후반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그를 인터뷰한 어느 기사에서 그는 소년 시절의 어린 마음을 외쳤다. “내가 어릴 때 단 한번이라도 ‘너 착한 놈인거 안다’고 말해준 사람이 있었으면 내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어린 목소리는 가시처럼 내 마음에 콕 박혀 오늘까지 잊혀지지 않았다. 심한 범죄를 저지르는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더라도,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말썽꾼’이라는 평판을 얻은 아이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나쁜 소문이 자자한 어느 아이를 만났을 때 나는 그 아이가 조심스럽고 참하게 행동하는 것에 내심 놀랐다. 그가 착해 보이더라고 말하자 내 아이는 엄마의 순진함에 넌더리를 쳤다. “어른들 있을때는 착한척 하는거지. 우리끼리 있을 때는 다르다고. 엄마는 참.” 그럴 것이다. 나는 그 아이가 지어보인 말간 얼굴에 속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 신창원을 떠올렸다. 초중학교 시절의 신창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돌봄 받지 않은 외모에 이미 여러번의 사고를 친 전력,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불신으로 이미 구제불능이라는 평판이 자자했을 것이다. 눈빛은 사나울대로 사나워, 어른들조차 그와 시선을 마주치기 꺼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의 마음속에서 가장 간절하게 듣고 싶었던 말은 ‘너 착한 놈인거 안다’는 한마디였다. 인간은 때로 믿을 수 없이 부조리하다. 신창원처럼 온갖 나쁜 짓을 다 하면서 너는 착한 놈이라는 소리를 듣고싶어한다. 신뢰를 저버리는 모든 행동을 다 하면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너를 믿는다는 한마디를 기다리기도 한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고뭉치에게 “네 마음 속 깊은 곳에 선함이 있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는 나의 덕담을 가볍게 비웃고 그날밤 또다른 사고를 저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신창원의 소망은 아직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보통 사람의 내면에는 선함과 악함의 씨앗이 모두 숨어 있다. 씨앗이 깨어나기 위해서는 여러번의 두드림이 필요하다. 겨우 한번 스친 빗방울은 씨앗을 틔우기에 역부족일 것이다. 나와 한번 스친 일은 누군가의 삶을 근원적으로 바꾸기엔 너무 하찮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보낸 시선, 내가 건넨 말 한마디가 빗방울이 되어 그의 인생의 밭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빗방울들이 쌓이고 쌓여 어느날 처음 보는 식물의 새 잎이 세상에 드러날 것이다. 어느 쪽 씨앗에 더 충분한 양분이 공급되어 싹이 트느냐에 따라 그 밭은 달라질 것이다. 나는 어느 씨앗을 깨우는 빗방울이 될까? /심윤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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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4.07 13:26

돈이 뭔 줄 아시오?

“돈이 뭔 줄 아시오?” 며칠 전 도쿄에서 처음 만난 그의 물음에 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뉘앙스로 보아 이 사람이야말로 돈을 정말로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나는 사이타마에 사는 그를 만나러, 아니 그의 돈을 만나러 간다. 어쩌면 그의 삐뚤빼뚤 못난 이를 보러 가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 가난한 농부가 주는 용돈을 한사코 거절하느라 쌀가마를 서둘러 지다가 꼬꾸라져 앞니 몇 개가 부러졌는데 돈이 없어 꾹꾹 손으로 박아 넣었다고 했다. 하정웅! 일본 아키타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도쿄에 올라왔지만 잘 곳도 먹을 것도 없었던 그는 전기부품상에 겨우 취직해 야간 미술대학에 들어갔다. 학비를 제하고 2천 엔으로 한 달을 살아야 했던 그에게 찾아온 것은 영양실조였다. 그런 그가 1만여 점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미술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천경자, 박서보, 쿠사마 야요이, 샤갈, 호안 미로 등 세계적인 걸작을 태어나지도 않은 대한민국 미술관에 기증했다. 그는 어떻게 돈을 벌어 천문학적 가치의 그림을 샀으며 왜 기증한 것일까? 시력 손상으로 직장에서도 잘려난 그는 민단을 찾아갔고 박봉의 총무 일을 맡게 되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교포들은 이름도 쓸 줄 몰랐다. 그는 교포들의 손과 발이 되어 뛰어다녔다. 그는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다. 똑똑한 사람이란 ‘공부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존중하는 사람’ 아닌가! 결혼축의금으로 가전제품을 사러 간 그에게 가게 주인이 사정했다. “오늘 받은 물건값을 가게 부도 막는 데 쓰도록 해 달라. 대신 내가 월부로 갚아 나가겠다” 딱한 사정에 승낙하고 말았는데 월부금 청구서가 계속 그에게 날아왔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런데 그 사기 덕분에 그는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다. 가게 주인에게 항의하자 가게를 넘겨줄 테니 빚을 갚아달라고 했다. 그가 빚더미의 가게를 물려받았다는 소문이 나자 자녀들 혼수를 장만하려던 교포들이 몰려들었다. 민단에서의 그의 희생적인 친절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쓰러져가던 가게가 대리점으로 승격했고 나중에는 엘리베이터까지 납품하는 큰 회사로 성장했다. 그러다 그에게 불치병이 찾아왔다. 절에 갔더니 스님이 벌떡 일어나 “두 손 가득 보물을 꽉 쥐고 있군요. 한쪽 손을 쥐면 한쪽 손은 펴세요.” 한 손을 펴고 있어야 넘어져도 편 손으로 땅을 짚을 수 있고, 더 좋은 것이 다가오면 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돈이 들어오면 한 손만 쥐고 한 손은 쫙 펴서 사람을 돕는 데 아낌없이 돈을 썼다. 병도 사라지고, 편 손에는 늘 더 큰 뭔가가 쥐어지더란다. 남 위해 사주었던 버려진 땅까지도 수십 배로 올라 거부가 되었다. 당시 무명의 이우환 씨가 유럽에 가려고 500만 엔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그는 선뜻 700만 엔을 건넸다, 성공리에 유럽 전시를 마친 이우환이 그림 13점을 보내왔다. 지금 한 점당 수십억의 그림이란다. 그렇게 화가들이 자신처럼 가난 때문에 미술을 포기하지 않도록 돕다 보니 1만 점의 그림이 쌓이더란다. 그는 그 값비싼 그림들을 그의 장롱에 가두지 않았다. 그림을 움켜쥐었던 손을 활짝 펴고 아끼고 아끼던 고가의 미술품을 아버지 고국 대한민국 미술관에 모두 다 기증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고가의 작품은 집에 감춰두었을 거라고 수군대더란다. 사람이란 원래 그런 거라며 해탈한 듯 웃어 보이면서도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좋은 것을 보고 또 보면 언젠가는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이 생기지 않겠느냐며. 사람들이 더 아름답게 살기를 바라는 그의 진심이 보일 듯 다가왔다. 수천억의 재산을 내놓을 만큼 부를 쌓았음에도 30대 때 살던 집에서 아직까지 살고 있다는 그의 집을 나는 방문한다. 부러진 이를 가지런히 만들 수도 있건만 그 삐뚤빼뚤한 이야말로 삶의 자부심이라던 그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만큼 돈을 잘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대통령이 되어도 막강한 권력을 두 손 가득 움켜만 쥐려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한심한 사람들이 한둘이던가. 두 손에 움켜쥔 돈도 권력도 한 손만은 활짝 펼 수 있다면! 좀처럼 털어놓지 않았던 이야기를 장시간 들어주어 고맙다며 환하게 웃던 83세의 그가 벌써 그리워진다. 사이타마! 30대의 그와 80대의 그가 함께 사는 그곳에서 나는 또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고 싶은 것일까? /윤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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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3.31 14:00

대통령 국민중임제의 종언

1987년 민주화 이후 헌법상으로는 대통령 임기5년 단임제다. 그럼에도 국민은 같은 정당 또는 집권세력의 2 대통령을 연이어 뽑아주었다. 그 결과 노태우∙김영삼, 김대중∙노무현, 이명박∙박근혜 전대통령으로 이어지면서 보수∙진보가 10년을 주기로 집권 했다. 즉 우리나라는 대통령제는 헌법상으로는 5년 단임제이지만, 국민은 같은 정당이나 진영의 대통령 중임제를 자리잡게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대 대선에서 윤석열후보의 당선은 민주당의 입장에서 보면 국민중임제에서 연임에 실패한 것이다. 실패 원인은 명확하다. 선거 후 승자에게서 승리요인을, 패자에게서 패인을 찾고 있지만, 이번 대선의 결과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실패다. 한길리서치의 대선 직후 3월 12∼14일 조사에서 이번 대선 총평을 물은 결과, 국민은 ‘윤석열 후보의 정책이나 선거전략이 앞서서 이겼다’는 6.7%, 상대인 ‘이재명 후보의 정책이나 선거전략 실패로 이겼다’는 14.6%에 불과했다. 반면 ‘국민의 정권교체 열망으로 윤석열 후보가 이겼다’는 평가가 48.7%로 두 후보 승패 요인을 합한 수치의 두배보다 많았다. 즉 국민들은 윤석열∙이재명 두 후보 보다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심판으로 투표한 측면이 크다. 이는 대선패배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의 책임을 묻는 질문에서도 더 명확히 들어 난다. 대선 패배에 문재인대통과 청와대의 책임에 대한 질문에서 ‘책임이 있다’가 72.8%로 ‘책임이 없다’는 평가 24.6%보다 3배 정도가 더 많았다. 대체로 대선과 총선의 성격을 규정할 때 총선은 대통령 임기중후반에 치러질 경우 정권심판론이었으며, 대선은 미래에 대한 선거였다. 그러나 이번 대선은 달랐다. 미래 국정에 대한 비전이나 공약 보다는 과거 회귀 성격의 정권 심판이 선거기간 내 일관되었으며, 그에 따라 정권심판에 찬성하는 진영을 중심으로 한 후보 단일화와 세대연대로 지금까지 볼수 없었던 치열한 양자 대결 구도를 보였다. 문제는 그러는 가운데 이번 대선에도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공약에 대한 논의는 부족했다. 오히려 이번 대선 내내 정권교체 논쟁과 후보연대 등 정략만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상대후보에 대한 자질이나 도덕적 공격에 집중했다. 그러다 보니 각 후보들의 국정 비전에 대한 검증이 제대로 안되었고, 공약중에서 옥석이 가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책적 완성도와 국민적 공감대도 확보하지 못했다. 역대 대선도 마찬가지다. 일단 선거에서 승리하면 공약중에서도 폐기하거나 수정,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할 공약도 국민이 추인한 것으로 간주하여 새정부의 정책으로 바뀌며, 국민과의 약속이라는 명분으로 밀어 붙였다. 물론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에 앞서 인수위원회가 있지만 인수위원회도 대선 승리의 낙관적인 분위기일 수밖에 없으니 당선인의중이나 집권세력의 정체성 차원에서 결정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국민공감도가 낮고 정권의 정체성에 맞춰진 공약을 신정부의 대표 정책으로 밀고 나가다 보니 각 정부의 발목을 잡았다. 과거 청산과제가 많았던 YS나, IMF 직후 DJ정부와는 달리 그후 정부는 과거 청산과제나 부채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럼에도 이후 정권들은 과거 심판에 몰두한 대표정책에 집착하였다. 노무현 정부의 기득권 청산 행정수도 이전과 주한미군 철수, 이명박 4대강 사업과 냉혹한 신자유주의 경쟁 정책 강행, 박근혜 정부의 노인복지 공약고수로 인한 미래세대 소외,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등이 그렇다. 윤석열당선인측은 대통령집무실 이전과 이명박 전대통령 사면등으로 출범도 하기 전에 신∙구 정부간 대결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러자 윤석열당선인 신정부 국정수행에 대한 기대가 40%대라는 사상 초유의 여론조사도 발표되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국민의 후보 지지를 공약에 대한 추인으로 봐서는 안된다. 그러기에 당선인의 공약이라 해도 정책적 검토와 국민의 여론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정권 심판으로 물러나는 전대통령과 정권심판에 힘입어 들어서는 새대통령의 지지율이 같아질수 있다. 국민이 왜 30년 동안 허용해오던 국민중임제 관행을 거두어 들였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국익 중심 정책과 국민의 민심에 기반하지 않은 정책을 밀고 나가면 정권 초 국민과 신정부와의 허니문을 기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정권말 국민중임제도로 보여준 국민의 관용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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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3.24 13:55

나는 이상한 미래에서 온 사람이었다

젊은이들이 떠나고 시골에 남은 건 노인들, 공허하게 짖는 개들, 여기저기 펄럭이는 폐비닐, 함부로 나뒹구는 농약병뿐이다. 시골은 조개무지, 고인돌, 옛사람의 주거지만 남은 유적이나 다름없었다. 촌락공동체가 깨지고, 마을엔 스산한 적막감이 감도는 시골에서 나는 10년 넘도록 혼자 살았다. 나는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시골에서 집을 짓고 생활을 꾸리며 혼자 사는 자의 슬픔과 기쁨을 겪었다. 봄에는 영산홍이 피었다 지고, 봄비가 다녀갔다. 봄비 내린 뒤엔 원추리 싹이 지표를 창끝처럼 밀어올리고, 새로 돋는 작약 움은 착한 소년 같았다. 영양분을 듬뿍 머금은 노오란 햇빛 아래 작약꽃이 피고 나비는 작약꽃에 앉아 우표만한 날개를 접었다 폈다. 버드나무 가지가 초록빛으로 물들고, 직박구리가 감나무 가지에 와 울던 날엔 나무시장에 가서 묘목 몇 그루를 사다 심었다. 귀한 꽃을 보려고 사오 년 생 모란과 배롱나무를 심었지만 뿌리가 냉해를 입어 말라 죽었다. 이른 봄날의 냉기 속에서 시린 무릎에 담요를 덮고 장자와 노자를 읽고, 강희안의 '양화소록(養花小錄)'이나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들춰보거나 그 어렵다는 들뢰즈의 책을 꾸역꾸역 읽었다. 그 외로운 날에 독서가 무슨 쓸모가 있었을까. 목전의 필요와는 상관이 없는 무용한 독서였다. 그것은 영원에 가 닿으려는 불가능한 시도와 닮았다. 독서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다. 어쩌면 그것은 침묵의 신에게 드리는 기도였는지도 모른다. 서재에서 책을 읽는 동안 산에서 내려온 산개구리는 하천에서 시끄럽게 울었다. 호오이, 호오이. 첨엔 낯선 새가 우는 소리인줄 알았다. 한두 해 지난 뒤 누군가 그게 짝짓기 할 짝을 찾는 산개구리 소리라고 알려주었다. 봄날 오후 동네 구멍가게에서 사온 좁쌀막걸리 몇 잔을 들이킨 뒤 불콰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혼자 누워 있자니, 또 외로움이 밀려 들었다. 혼자인 날에도 끼니때가 되면 어김없이 배가 고팠다. 배가 고프면 김치전을 부치고, 냉이된장국을 끓였다. 갓 지은 밥은 따뜻하고, 냉이된장국에서는 냉이에서 나온 향이 코끝으로 확 달려들었다. 런닝셔츠를 입고 웃자란 풀을 벤 여름날엔 물을 만 밥을 짭짤한 오이지와 함께 먹었다. 밥을 떠서 목구멍으로 넘길 때 혼자 밥 먹는 슬픔도 목울대를 타고 넘어갔다. 가을엔 고등어 한 토막을 굽고 청국장을 끓였다. 혼자 먹는 밥은 늘 소찬이었다. 식사와 취침 시간은 늘 일정했다. 여름 오후, 낯선 한 비구니 스님이 내 거처를 찾아왔다. 내 거처와 멀지 않은 암자에 산다는 비구니 스님의 방문은 이상했다. 그이가 나를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이는 내게 썼다는 편지를 읽어주고 떠났다. 내게 썼다는 편지인데, 내게 건네주지는 않았다. 그게 전부다. 그 편지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이가 그 뒤로는 찾아온 적이 없었다. 아마도 내가 혼자 살기 때문에 겪은 해프닝이었을 것이다. 시골에 혼자 사는 자에게 외로움은 일종의 진공상태다. 외로울 때면 머리를 벽에 찧었다. 내 안은 텅 빈 채고, 어느 날은 누군가를 갈망했다. 겨울밤에 겪은 그 갈망은 타인과 살을 맞대고 숨결을 나누고 싶은 타는 듯한 욕구였는데, 그게 누군가가 명명한 '피부 갈망'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겪은 외로움은 사회연결망에서 떨어져 나와 겪는 관계와 친밀함의 부재에서 비롯된 감정의 홍역이었는지도 모른다. 콕 찍어 선택하지 않아도 외로움은 찾아온다. 내가 혼잣말로 외롭다, 외롭다고 하면, 하늘에선 선물처럼 눈이 내렸다. 외로움이 독수리 같이 덮쳤을 때 내게 날갯죽지가 있다면 하나쯤은 부러뜨리고 싶었다. 내 외로움은 4만5천년이나 되는 고색창연한 것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낭만적 은둔의 날에 겪은 외로움은 감정의 사치였다. 나는 혼자로써 충만했으니, 외로움은 고통이 아니라 나만의 자유를 누린 시간이었다. 입안에 사탕을 녹여먹듯이 나는 외로움을 삼켰다.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내가 가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과거가 되어버린 그 시절에 나는 혼자 이상한 미래에서 온 사람이었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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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2.03.17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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