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장은 농촌사람들에겐 매우 친숙하고 정겨운 단어다. 5일마다 한번씩 시장을 열었던 재래 장터를 말한다. 원래는 조선시대에 열흘장이었던 것이 5일장으로 바뀌었으며 5일장은 군마다 보통 3개소에서 많으면 4-5개소로 서로 다른 날짜에 번갈아 열렸으므로 그 지방주민들이 마음만 먹으면 한 달에 상당한 횟수의 장을 볼 수 있는 셈이었다.
예전만 해도 나무를 파는 시골 사람들이 5일장에서 자주 눈에 띄었다. 나무를 한 짐 지고 장터로 나가 팔아 명태를 한 꾸러미 사가지고 해질녘에 돌아오곤 했다. 대장간에는 칼이나 쟁기를 만들려는 이들로 붐볐다. 소설에서 늘상 등장하던 장터이야기였다.
또 국밥집에선 구수한 김이 인정처럼 모락모락 피어 올랐고 서민들이 모여 세상과 이웃들의 얘기로 꽃을 피웠다. 정보망이 없던 그 시대의 5일장은 시골의 유일한 열린광장이었다.
장이 끝나면 객줏집에서는 술판과 투전판이 벌어지고 작부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시의 5일장은 꼬마들도 꼬까옷을 기대하며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었다.
요즘도 5일장이 열린다. 예전 같은 맛은 나지 않지만 이마저 갈수록 줄어들고 있어서 안타깝다. 도시화와 산업화는 농촌인구의 감소를 가져와 5일장의 급격한 쇠퇴를 가져왔으며, 농촌에도 할인점과 중소마트 등이 들어서면서 5일장이 하나둘씩 힘없이 사라져 가고 있다. 더군다나 도로상태가 좋아짐에 따라 자동차를 이용하여 도시지역으로 장을 보러나가는 일이 많아졌다.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5일장이 이제는 추억의 장터로 전락하였고 앞으로 상당수의 5일장이 기록만으로 남게 될 전망이다.
조선시대 전라도에선 전주 읍내장과 남원 읍내장이 가장 컸으며, 전국적으론 강경장이 원산, 마산과 함께 3대 시장을 형성하였으나 지금은 과거의 영화만을 생각하는 시장으로 변화하고 말았다. 정부는 재래시장 지원과 육성을 위한 특별법까지 수혈하고 있지만 기력을 회복하기엔 농촌인구가 너무 감소해 버렸다. 이제는 시설현대화보다는 특화 내지는 관광시장화 하는 전략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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