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학문이 후손이나 제자들에 의해 잘 계승·발전된 덕이 더 크다. 나아가 그들의 학문이 제자들에 의해 현실정치에 적용되면서 빛을 발한 점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호남(전북)의 유학은 인물의 빈곤이나 학문의 깊이를 탓하기 전에 계승·발전 노력이 미흡했다는 점에서 안타깝다. 물론 1589년 일어난 정여립 역모사건(?)이 이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인재 자체가 고갈된 측면도 없지 않다.
어쨌든 이러한 토양에서도 학문과 선비정신의 싹을 보인 인물들이 없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목산 이기경(李基敬·1713-1787)이 아닐까 싶다. 전주 오목대(梧木臺) 아래 산다하여 아호를 목산(木山)이라 붙인 그는 오늘날 각광받고 있는 한옥마을 선비정신의 원조격이다. 영조때 주로 활동한 목산은 전주 출신으로 몇 안되는 고위 관료이자 학자였다. 최근 전북대 민중생활사연구소에서 펴낸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김명엽 씀)'에 따르면 목산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목산은 27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이후 벼슬길에 올랐다. 하지만 별탈없이 관직생활을 한 기간은 20년에 지나지 않았다. 군수, 현감과 함께 사도세자를 가르친 서연관, 북경에 다녀온 서장관, 승지, 황해감사, 대사간 등을 지냈다. 사직하고 고향에 머문 것이 15년, 유배기간이 4회에 걸쳐 13년이었다.
그는 스승 이재의 가르침에 따라 난진이퇴(難進離退·벼슬길에 나아감을 어렵게 여기고 물러남을 쉽게 함)를 거듭했다. 그를 아끼던 영조가 좋은 자리에 중비(中批·오늘날의 특채)하려 할 때마다 규정된 절차를 지키지 않았다며 벼슬을 받지 않았다. 또 영조가 탕평책의 일환으로 펴낸 '유곤록'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당쟁이 심하던 당시 탕평책이 진정한 인재를 발탁하기 보다 노론과 소론인사들을 적당히 안배해 실효를 거둘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죄지론(罪地論)을 이유로 호남의 인재를 등용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내년이면 목산 탄생 300주년이다. 소신을 굽히지 않고 선비정신을 올곧게 실천한 목산의 학문과 생애가 지역에서부터 재정립되었으면 한다.
/조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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