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가 그렇게 좋은 소리인줄 몰랐어요. 듣다보니 그냥 푹 빠져서 끝까지 들었다니까요.”
며칠전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판소리로 마음을 온전히 빼앗겼다는 친구가 있었다. “누구 소리인가 궁금했는데 김소희 명창이더라고요. 어떻게 그런 소리를 낼 수 있을까 놀라웠어요.”
그 친구 덕분에 판소리 음반을 정리하다 박동진 명창(1916~2003)의 소리를 들었다. 선생은 작고하기 전까지 30여년동안 판소리 무대를 평정(?)해 가장 치열하게 판소리 대중화를 이끌었던 국악인이다. 문득 선생이 열망했던 판소리 대중화는 어디쯤 와있을까 궁금해졌다.
사실 문화의 국경이 허물어진지 오래, 모든 장르가 혼재된 문화충돌의 시대에서 우리 전통 문화를 자리 잡게 하려면 그만큼 치열한 과정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그 치열한 노정을 기꺼이 선택한 명창. 그가 박동진 명창이다.
선생은 전통판소리를 굳건히 지키면서도 이 시대의 언어로 창작판소리를 만들어내는 일에 앞장섰다. 공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열여섯 살에 집을 나와 전국의 이름난 소리꾼들을 찾아다니며 소리를 배웠다. 스승은 정정렬 유성준 조학진 박지홍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명창들. 그러나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이어지는 정형화된 소리계보를 따르지 않고 스스로 독창적인 소리로 구축한 창조적 판소리를 개척했다. 판소리연구자들은 선생의 소리를 동편제나 서편제로 분류할 수 없고, 그렇다고 중고제로도 분류될 수 없는 독특한 경지의 소리라고 평했다.
선생이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68년, 흥부가 완창발표회를 통해서였다. 당시는 판소리가 거의 사라져가던 시기. 여섯 시간에 걸친 긴 시간동안 관객들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어르고 웃기고 울리는 선생의 소리는 판소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년이나 2년 단위로 완창회를 이어가면서 다섯 바탕을 모두 완창해낸 선생은 한편으로는 종교와 역사, 인물을 소재로 한 우리 시대의 창작판소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소리의 재창조 작업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까닭이다.
특유의 재담과 타고난 목, 지칠 줄 모르는 소리 공력으로 시대의 언어를 담아 관중을 호통치고 울리고 웃음을 주었던 선생의 무대에는 늘 관중이 몰렸다. 전통과 창조가 따로 가지 않는 무대의 미덕은 자연스럽게 관중을 끌어들여 감동시켰다.
오늘의 무대에서도 판소리 대중화 작업이 이어지고 있지만 현장은 아직 공허하다. 선생의 무대를 되돌아보면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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