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경제지’는 그가 철저하게 지향했던 실용학의 결정체다. 현실에 적용되지 않는 지식은 ‘토갱지병(土羹紙餠 흙으로 끓인 죽과 종이로 만든 떡)’이라 하여 철저히 외면했던 그는 19세기 초 조선의 생활문화를 촘촘히 엮어 113권이나 되는 ‘임원경제지’에 기록해놓았다. 그의 나이 쉰 살이 되던 해에 시작해 30년 만에 일궈낸 역작이었다. 전라감사로 있을 때는 흉년이 들어 고통 받는 농민들을 위해 고구마 재배법을 보급하기도 했는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조선과 중국·일본의 관계 농서를 참고해 저술한 ‘종저보(種藷譜)’를 펴냈다.
서유구는 우리 지역에도 귀한 선물을 남겼다. 1833년 4월부터 1834년 12월까지 전라관찰사로 재직하면서 하루 동안 공무일정을 기록한 ‘완영일록’이다. ‘완영일록’은 관청의 풍속을 그대로 옮겨놓은 이른바 행정일기다. 당시 지방의 행정 책임자는 공문서를 직접 써야 했지만 관청 아전들에게 떠맡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다산 정약용도 이를 경계하여 ‘목민심서’에 “상하 관청에 보내는 공문서는 꼼꼼히 생각해서 수령이 써야 할 것이요, 서리의 손에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서유구는 관찰사로서의 하루 일과를 거의 빼놓지 않고 기록하면서 그날 주고받은 공문서 내용까지도 그대로 옮겼으며 자신이 지방에서 펼친 농촌과 농민을 위한 정책을 ‘완영일록’에 소상히 담아놓았다. 덕분에 ‘완영일록’은 ‘지방행정에 대한 사실적 기록이자 사회사·풍속사적으로 가치를 지니는 문헌’이란 평가를 받는다. 그만큼 역사콘텐츠로서의 의미도 크다.
‘완영일록’은 여러 해 전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이 3권으로 묶어 영인본으로 펴냈다. 그러나 아쉽게도 김순석의 조선대 박사학위 논문을 위해 번역된 1권을 제외하고는 완역되지 못한 채로 있다. 전라감영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완영일록’ 완역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물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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