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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공불락' 철옹성

‘공격하기 어려워 쉽사리 함락되지 아니한’을 뜻하는 난공불락(難攻不落).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城)은 방어시설로부터 발전한 예가 대부분이니 전란에 놓인 시대에서야 ‘난공불락’ 성을 축조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을 것이다.

 

일본에는 성이 많다. 근세, 지방의 영주인 다이묘(大名)나 소묘(小名)들이 세를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영지에 성을 구축하는 일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구마모토성은 ‘난공불락’의 상징으로 꼽힌다. 이 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왜란 때 조선 침략에 앞장섰던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쌓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신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영주가 된 기요마사는 조선 침략 당시 잔인하고 악랄하게 조선인들을 죽이고 약탈해 악명이 높았다. 구마모토성 축조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정유재란 때 전라도 공격을 맡았던 기요마사는 북진을 위해 울산에 진을 치고 성을 쌓았다. 그러나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과 전투가 벌어지면서 연합군에게 포위되었다. 진퇴양난, 성에 고립된 기요마사는 연합군의 화포공격과 추위, 굶주림과 물 부족의 극한 상황을 어떻게든 이겨내야 했다. 오줌을 받아먹거나 군마를 죽여 말의 피를 마시고 성벽의 흙까지 긁어먹으며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전쟁이 끝나고 귀국한 기요마사는 자신의 영지인 구마모토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끌고 간 조선 백성들이 동원됐다. 그는 울산성 전투를 교훈으로 삼았다. 견고한 성벽을 경사지게 쌓고 성안에는 우물을 120개나 팠으며, 굶주림으로 오줌과 말의 피를 마셔야했던 악몽(?)을 떠올려 건물 벽이며 다다미까지 고구마줄기를 넣었고, 성 안 곳곳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모두 식량으로 쓸 수 있도록 한 전략이었다. 축성술에 능했던 기요마사가 구마모토성을 완성한 것은 1607년. 7년에 걸친 대공사 끝이었다.

 

1877년 일본의 마지막 내전인 세이난전쟁 때 구마모토성은 무장한 1만 4000여 명 반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중요한 건물이 소실되었지만 성루 대부분과 높은 석벽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았다. 덕분에 ‘무샤가에시(武者返し·어떤 병사들도 절대 넘을 수 없다)’는 ‘난공불락’ 철옹성 별칭을 얻게 됐다.

 

구마모토성 안의 국가지정문화재 13곳이 파손됐다. 지난 14일과 16일에 이어진 강진의 피해다. 돌담이 붕괴되고 벽에 금이 갔으며 천수각 지붕 장식물과 기와 대부분도 무너져 내렸다. 상심이 큰 만큼 자연의 위력이 전하는 교훈이 크다.

김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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