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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재발견] “누가 나를 돌볼 것인가”…비비가 던진 ‘관계 안전망’이라는 화두

20년간 비혼과 자립과 상호 돌봄의 터전인 ‘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
돌봄 이중고 처한 중장년 여성, AI보다 절실한 ‘사람의 연결’ 필요 
김난이 이사장 “송천동 여성근로자아파트 중장년·노인 공동체주택으로 거듭나야

(좌측부터) 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와 비비사회적협동조합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 봄봄, 이사장 김난이, 이미정 씨 /사진=박은 기자

대한민국에서 중장년 비혼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돌봄의 이중고’를 견디는 일이다. 20~30대 시절 1인 가구의 삶이 자유와 독립의 만끽이었다면 40대 중반을 넘어선 이들에게 닥치는 현실은 기본값이 된 부모 돌봄이다. 비혼이라는 이유로 가족 돌봄의 최전선에 놓이지만 정작 “부모님이 떠난 뒤 나를 돌볼 이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사회와 국가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전주를 기반으로 20년간 비혼여성공동체를 일궈온 ‘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이하 비비)’와 비비사회적협동조합(김난이 이사장·이미정·활동가 봄봄)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주거모델을 제안한다. 단순히 잠만 자는 방이 아닌, 서로의 안부를 묻고 돌봄을 나누는 ‘공동체 주택’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공간은 물리적 건축물을 넘어 우리 사회의 빈약한 안전망을 보완할 ‘관계의 실험실’이다.

△‘주거권’의 재정의: 원룸과 고시원은 줄 수 없는 것

기존 1인 가구 정책은 주로 청년층의 진입 지원이나 고령층의 빈곤 해결에 치중해왔다. 하지만 중장년 여성 1인 가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저가임대주택이 아니다. 이들이 정의하는 진정한 주거권에는 세 가지 핵심 요소가 포함된다. ‘소통할 수 있는 친구’, ‘안전을 확인해 줄 이웃’,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적정 수준의 공간’이다. 김난이 이사장은 “원룸과 고시원은 개인의 고립을 전제로 한 공간”이라며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 주택은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에 대한 능동적인 선택”이라고 강조한다. 사생활이 보장되는 독립 공간을 갖추되, 필요할 때 언제든 연결될 수 있는 공유 공간과 관계를 핵심으로 삼는다. 이는 물리적 단절을 막는 동시에 정서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실질적인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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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사진=박은 기자

△AI 안부서비스는 왜 ‘행정편의주의'일까

최근 전북자치도를 비롯한 지자체들이 중장년 고독사를 막기 위해 AI 안부서비스를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하지만 김 이사장은 이를 두고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행정주의적 사고”라며 강하게 비판한다. 고독과 고립은 전화 한 통으로 해결될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사람 간의 정서적 연결이 끊어져 발생하는 ‘사회적 질병’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계 대신 커뮤니티 코디네이션과 같은 인적자원이 중심이 된 돌봄체계가 훨씬 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하다고 제언한다. 시혜적인 서비스에서 벗어나 당사자들이 직접 모여 고민을 나누는 지역 소모임 등 ‘사람 중심의 인프라’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전북 여성 노인 고립, 송천동에서 답을 찾다

비비사회적협동조합은 구체적인 실행방안으로 송천동의 ‘여성근로자아파트’ 부지를 여성 1인 가구 공동체 주택으로 전환하자고 제안한다. 통계에 따르면 전북의 65세 이상 노인 1인 가구 비율은 25.3%(2023년 기준)로 전국 4위에 달하며, 전국 평균(22.1%)을 크게 웃돈다. 특히 도내 1인 가구 중 여성 비중이 51.6%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노후화로 철거 위기에 놓인 공간을 리모델링해 여성 중장년‧노인 공동체 주택으로 거듭나게 하자는 것이다.  실제 이 모델이 실현된다면 전북의 여성 노인 1인 가구 비율과 고립 문제를 해결하는 상징적 거점이 될 수 있다. 매년 비비의 활동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10팀 이상의 견학팀이 전주를 찾는다. 인구 감소의 해답을 단순히 외지인 유입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거주하는 중장년층의 삶의 질을 높여 ‘생활인구’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공간 비빔 내부 모습 /사진=박은 기자
비비 내부 모습(왼쪽은 요가실, 오른쪽은 비비의 색깔이 담긴 포스터) / 사진=박은 기자

△ ‘공동체 근육’을 기르는 법, 응답과 책임

공동체 주택이 장밋빛 환상만은 아니다. 비비는 20년 넘는 시간 동안 관계의 실험을 이어오며 수많은 갈등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얻은 결론은 공동체를 지탱하는 힘은 공동체 근육이라는 점이다. 이 근육의 핵심은 ‘응답능력’과 ‘책임’이다. 김 이사장은 “느슨한 관계라고 말하지만, 그 이면에는 갈등을 견디고 소통하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며 “상대의 물음에 응답하고, 공동의 결정에 책임지는 훈련 없이 공동체는 유지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여성주의 공부와 독서모임을 통해 서로의 맥락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쳤다. 아는 사이가 되는 것, 그래서 서로에게 “도와달라” 말할 수 있는 신뢰를 쌓는 것이야말로 공동체 주택이 가져야 할 가장 큰 자산이다.

△ 다양한 친밀함이 허용되는 도시를 향해

비비가 제안하는 공동체주택은 단순한 ‘비혼 여성들만의 섬’이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고집해온 ‘혈연 중심의 정상가족’이라는 협소한 틀을 깨고, 다양한 형태의 가족과 친밀한 관계를 시민의 권리로 인정하자는 선언이다. 전주가 진정으로 ‘살고 싶은 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소수자에 대한 낙인을 거두고 다양한 삶의 형태가 공존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이미정 씨는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갈등을 조절하며 맞춰가겠다는 책임이 동반된다면 사회적 비극인 고독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AI 전화기를 보급하는 것보다 시민들이 서로의 곁이 되어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데 예산을 써야 한다. 송천동의 낡은 아파트 부지가 단순한 철거 대상을 넘어 새로운 시대의 돌봄 모델로 재탄생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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