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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쌍릉’발굴 조사


삼국시대 백제(百濟) 30대 임금인 무왕(武王:600∼641년 재위)은 뛰어난 정략가였다. 그는 쇠락해 가는 국운을 되살리기 위해 왕실의 권위를 확고히 다지는 한편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신라 서쪽 변방을 빈번히 침공했다. 고구려의 남진(南進)을 막기 위해서는 수(隋)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수나라가 망하고 새로 당나라가 서자 무왕은 재빨리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함으로써 두 나라간의 유대를 돈독히 이어갔다. 그리고 당(唐)의 힘을 빌어 신라 정벌계획까지 세웠다.

 

결과적으로 이 계획은 무산됐지만 그는 지금으로 말하면 주변 강국과의 균형 유지를 위해 힘쓴 등거리 줄타기 외교의 명수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의자왕(義慈王)대에 이르러 끝내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명망하고 말았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만 하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편(紀異篇)에 실려 널리 알려진 ‘서동왕자와 선화공주 이야기’는 바로 무왕의 즉위에 얽힌 설화이다. 가난하고 비천한 백제 청년 서동(薯童)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를 탐내 ‘서동요(書童謠)’를 지어 퍼뜨렸고 왕실에서 쫓겨난 공주를 백제로 데려와 혼인한 후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대부분 설화가 그렇듯이 훗날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한 것과 관련해 사찰연기설화(寺刹緣起說話)와도 맥이 닿는다.

 

지금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쌍릉(사적 87호)은 일찌기 고려사(高麗史) 세종지리지등 각종 문헌에 무왕 부부의 무덤이라고 기록돼 있다. 쌍릉의 높이나 크기가 부여(扶餘)능산리 오아릉과 같은 형식이어서 이를 무왕 부부의 능으로 보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고고학적으로 이를 증명할만한 근거는 찾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동안 굴꾼들이 하도 헤집고 다녀 변변한 유물 하나도 없이 현재는 사발형 토기등 일부 유물만 남아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익산시가 드디어 이 쌍릉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할 계획이라 한다. 늦었지만 이 능이 무왕 부부능으로 확인된다면 우리 백제문화의 진수(眞髓)하나를 더 얻게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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