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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대] 이회영(李會榮)과 신민회

정부는 올해 건국 60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해방후 초대 부통령이었던 이시영(李始榮)은 기억해도 그의 형이며 신민회 창설의 주역이요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장본인, 이회영(李會榮)은 역사 뒤안길에 묻혀있다. 우리 현대사의 연구 부족 때문이다.

 

을사 보호조약이 공포되자 ,이회영, 이상설,이동녕은 종로 네거리에 나가 머리를 땅에 대고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이회영은 사람을 시켜 을사 오적(五賊)을 암살할려고 했으나 실패하자 나라의 독립을 찾는데 전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회영 집안은 지금으로 말하면 기득권 세력이었다. 그의 부친은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이었고 어머니 역시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鄭順朝)의 딸이었다.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李恒福)과 영조때 영의정을 지낸 이종성(李宗城)이 그의 직계 선조들이다.

 

대한 제국 시절 이회영은 개화파의 맹장(猛將)이었는데 그는 과감하게도 그의 집에있는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었고 남의 집 종들에게도 경어를 썼다고 한다. 평등사상이 이미 그의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신민회 창설 멤버인 안창호, 양기탁,전덕기,이동휘, 유동열, 이갑등 일곱명이 1907년 창설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나 이정규의 "우당,이회영 약전"에서는 이회영을 주도자로 적고 있다. 신민회를 결성하기 전에도 이회영은 그 유명한 헤이그 밀사 사건을 기획했고 이상설을 헤이그 밀사로 추천했다. 헤이그 밀사사건이 실패로 돌아가자 고종은 할수없이 순종에게 양위를 했다.불안한 정국속에서 이회영이 주동이 되어 전가족을 이끌고 독립투쟁을 위해 만주로 집단 망명을 했다.

 

갖가지 고난끝에 1911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 깃발을 올렸으나 식량문제로 학교 운영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후 상해에서 독립활동을 하다가 결국은 중국 대련 유치장에서 일제의 모진 고문끝에 옥사하셨다.이회영 ,그는 분명, 우리 현대사속에 숨겨진 보석과도 같은 인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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