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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먼지(김혜원)

1. 무게

 

체중계를 꺼내려다

 

나보다 먼저 올라앉은 먼지를 본다

 

저것도 무게라고 저울 위에 앉았을까

 

털어내는 순간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저 가뿐한 내공

 

내가 눈금처럼 꼼꼼히

 

몇 장의 졸업장과 얼마간의 통장으로

 

몸집 불리는 동안 너희는 세상을

 

깎고 갈고 부서지며 삭으며 살아왔구나

 

저울 위에 앉아 제 발자국 헤아리다가

 

세상 변두리 어디쯤 다시 찾아 날아올랐겠지

 

버려야만 이루어지는 저 가뿐한 무게

 

달 수조차 없는 그 삶에

 

문득 마음 무겁다

 

2. 높이

 

먼지도 세월을 견디면 높이를 갖는구나

 

어둠 속에서 말을 잊다보면 눈이 밝아지는 법, 나는

 

저 허름한 생의 목록을 다 적을 수 있을 것 같다

 

양말이 벗어놓은 하품 바스러진 각질의 한숨 비틀대던 머리카락과 맥없이 흘러내리던 낡은 옷의 넋두리 나뒹굴던 보풀의 푸념 몇 낱 희미해진 거울의 깨진 비명도 몇 개, 그런 것들이

 

그런 것들이 뒷걸음쳐 이 구석 찾았을 게다

 

내일이 꼭 오리라 믿었을 그들

 

나는 오지 않은 날의 달력을 찢어

 

숨죽여 쌓인 어제의 높이를 가만히 들어 올린다

 

3. 길

 

차 안에 쌓이던 먼지

 

어느 날 흔적이 없어졌다

 

닦은 적도 없는데 저희끼리 뭉쳤다가

 

알갱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나 보다

 

어디든 다시 떠돌고만 싶은 것 같아

 

조심조심 발판을 걷어 밖에 뿌려준다

 

순간 바람의 어깨를 딛고 올라서서

 

일제히 질주하는 저 하얀 맨발들

 

길이란 열망이란 얼마나 서늘한가

 

천 길 절벽은 허공에도 있어

 

지상으로 추락하여 얼룩지는 생이여

 

흙물이 제 지나온 길 가라앉히듯

 

빗물에 씻겨 다시 먼 길 떠나는구나

 

밤하늘에 담겨 반짝반짝 눈을 뜨는 별들도

 

떠나온 별을 찾아 몇억 광년 속으로

 

저렇게 먼지처럼 뛰어든다던데

 

나 이제 몇십 킬로의 동력을 켜고

 

내게 남은 시간의 벌판으로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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