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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예찬] 동학농민혁명이 남긴 개벽의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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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형 만화평론가

전주동학농민혁명 녹두관의 전시장 입구에는 박홍규 화가의 <후천개벽도>를 조형으로 옮긴 작품이 볕을 쬐고 있다. 그 시대의 장삼이사들이다. 늠름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소년에, 돼지를 지게로 지고 있는 어르신도 있고, 아이를 업은 아낙도 있다. <후천개벽도>의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 혹은 그런 희망을 마음에 품은 듯 웃고 있다. 그 앞에서 나는 <향아설위>를 떠올렸다.

지난 2023년, 동학농민운동 13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웹툰 공모전에서 이지현 작가의 <향아설위>가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향아설위>는 사람이 곧 하늘이며 그러므로 내 삶의 주인은 ‘나’임을 깨닫는, 인내천(人乃天)·양천주(養天主)의 과정을 만화로 풀어냈다. 동학의 교리인 ‘향아설위’는 벽(조상)을 향해 제사를 지내지 말고 조상의 후손인 나를 위해 제사 지낼 것을 이르는 말이다. 사람을 향해 밥그릇과 위패를 놓고 빙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는 향아설위의 뿌리에는 동학의 민본주의 정신이 있다.

<향아설위>는 1889년 군산에서 시작하여 정읍으로 이야기의 터를 옮기고 고부 봉기, 황토현 전투, 우금치 전투를 겪으며 역사의 흐름을 쫓아간다. 부패한 조정의 압정에 시달렸던 백성들은 동학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으나 총을 앞세운 일본군과 관군 앞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하고 말았다. 등장인물 정시심은 동학농민혁명의 발원지인 전라도를, 일제가 “지레 겁먹은 개처럼 대대손손 반역의 땅이라 능멸하며 짖어대”리라고 예견한다. 대사의 글씨 크기를 키우고 굵게 처리하여 강조한 것은 이것이 예언을 넘어 장래 확언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남은 동학교도들은 목숨을 부지하기도 급급한 처지가 되어 후천개벽은 후일을 기약해야 할 신세로 전락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개벽은 동학의 사상이 사람의 마음에 당긴 불씨였다. 동학은 사람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며, 사람은 모두 평등하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가르쳤다. 이는 존재를 대하는 관점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가져온다. 그럼으로써 개벽은 공명정대한 새로운 세상을 뜻할 뿐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으로 그 의미를 확장한다. 그렇다면 향아의 마지막 대사 “희망을 품은 자가 희망의 씨앗”이라는 말대로, 후천개벽은 어디엔가 있는 것도, 약속된 미래도 아닌, 마음이 개벽한 자가 열어갈 수 있는 것이 된다.

동학농민혁명과 독립운동에 이어 군부독재 시기의 민주화운동, 2017년 이후의 광장에서의 촛불집회까지 민중으로부터 위로 일어난 운동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인간의 존엄과 민주적 삶, 그리고 부조리의 변혁에 대한 열망에 닿아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는 불평등과 부조리에 맞서 연대를 이룩하고 사회적 실천을 통해 현실을 바꾸어왔다.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이 힘이 동학농민혁명이 남긴 불꽃에 적든 많든 영향을 받아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오늘의 우리는 그 불꽃을 소중히 지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류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동학의 사상은 좁게는 평등에 기반한 민주주의에서 넓게는 경물(敬物)에 입각한 생태주의를 일러주고 있다. 그러니 오늘 <향아설위>와 함께 동학의 가르침에 잠시나마 귀 기울여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나와 네가 모두 하늘의 씨앗을 품었으니, “꽃에도 천지가 들어 무겁습니다.”라는 경인의 말에는 응당 거짓이 없다.

 

박근형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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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향아설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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