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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메아리] 텅 빈 목욕탕이 우리에게 묻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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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정 부안군문화재단 사무국장

농촌 지역을 방문하면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이나 ‘정주여건 개선 사업’의 일환으로 지어진 공공시설을 쉽게 볼 수 있다. 막대한 예산이 들어간 면단위 커뮤니티센터, 다목적체육관 등 외관은 번듯한데 정작 수개월이 지나면 이용자가 적어 운영을 축소하거나 문을 닫는 경우도 있다.

특히 ‘작은 목욕탕’ 사업은 이러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 지역의 성공 사례가 알려지면, 그 고유한 배경이나 특수성은 고려되지 않은 채 유사한 하드웨어가 전국적으로 복제되는 경향이 있다. 이 과정에서 정작 그 시설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생략되기 쉽다.

‘작은 목욕탕’은 건축가 고(故)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면사무소 설계를 의뢰받았을 때, 관습적인 기능 배치를 따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주민, 특히 어르신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실질적인 필요를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평생 논밭일로 허리가 굽었는데, 죽기 전에 뜨신 물에 몸 한번 편히 담그는 게 소원”이라는 목소리가 나온 것은 그 과정에서였다.

이 지점이 바로 ‘공공건축’의 본질이다. 공공건축은 예산을 투입해 구조물을 완성하는 토목 사업과 구별된다. 그것은 그 공간을 사용할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과 필요에 응답하는 ‘사용자 중심의 디자인’인 것이다. 정기용 건축가는 행정의 요구나 건축가의 이상적인 욕심이 아니라, ‘그 땅’의 어르신들의 목소리와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래서 무주의 목욕탕은 단순한 위생 시설이 아니라, 서로의 건강을 확인하고 안부를 묻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면사무소에 목욕탕을 붙인다는 것은 당시로선 획기적인 것이었다. 허나 이 또한 25년 전의 일이다.

이후 많은 지역에서 이 사례를 벤치마킹할 때, 이 핵심적인 ‘과정’은 생략되고 ‘목욕탕’이라는 ‘결과물’만 넘어왔다. 주민들의 실제 필요를 진단하는 과정 없이 ‘옆 동네도 있으니 우리도’라는 논리가 작동했다. 그 결과 기존 사랑방 기능과 중복되거나, 운영 관리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없이 지어져 이용률이 저조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결국 ‘정신’은 증발하고 ‘껍데기’만 복제하다 보니 이런 상황에 이른 것은 아닐까.

‘유니버셜 디자인’ 개념도 마찬가지다. 이를 단순히 장애인 경사로나 손잡이 같은 법적 기준의 기술적 충족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유니버셜 디자인의 핵심은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획일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것은 그 공간을 사용할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용자, 그중에서도 가장 도움이 필요한 자의 구체적인 조건과 필요를 디자인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유니버셜 디자인은 획일적인 모듈이 아니라, 그 지역의 고유한 맥락 속에서 가장 세심하게 맞춤화된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꼭 필요한 시설인지 가려내야 하고, 짓기로 결정되었다면 지역의 내재적 필요와 삶의 원리와 조응하는 방향으로 디자인되어야 한다. 외부에서 주입된 표준화된 모델이 아니라, 그 지역의 고유한 맥락과 주민들의 실제 삶 속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공공건축은 짓기 전에, 먼저 ‘듣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수많은 예산이 투입되는 공공시설들이 왜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그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찾아야 할 때다.

 

전민정 부안군문화재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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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목욕탕 #공공건축 #유니버셜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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