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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주보기] 초상화, 시간을 넘어선 공감의 순간

장진아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1713년, 조선 19대 임금 숙종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렸다. 임진왜란 이후, 살아 있는 왕의 얼굴을 직접 보고 초상화를 그리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그 진행 과정이 녹록하지는 않았겠지만 비교적 매끄럽게 이루어졌다. 25년 전인 1688년에 경기전의 태조어진을 모사하는 사업을 했었는데, 그 과정이 <태조어진모사도감의궤>(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상세히 기록된 덕분에 참고가 되었기 때문이다. 

1688년 경기전의 태조어진은 1410년에 그려진 것이었다. 경기전에서 한양으로 이안(移安)하여 모사한 뒤 완성본을 영희전에 모셨다. 세월이 흘러 영희전 어진이 퇴색하자 1872년에 다시 모사 사업을 벌였는데, 예전에 원본이 되었던 경기전의 어진 또한 오래되어 낡았으므로 한 본을 더 모사하여 경기전에 봉안하고 구 어진은 세초(洗草)하여 묻었다. 이 때 새로 봉안된 초상화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태조어진〉(어진박물관)이다. 전신상으로 온전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왕의 초상화, 건국 초기에 제작되어 두 번의 모사를 통해 전승된 역사의 산물이며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 초상화 덕분에 무려 600여 년 전의 인물인 태조의 실제 모습을 지금 우리가 마주한다. 

〈태조어진〉의 이성계는 조선의 창업군주로서 화려하고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당하게 정면을 직시하는 모습은 한 치의 고민도, 흔들림도 없는 군왕의 카리스마를 내보이며, 그의 왕조가 영원토록 굳건할 것임을 웅변한다. 소매가 좁은 청색 포(袍)에 금실로 직조한 용보(龍補)는 고려의 영향이 남아 있는 복제(服制)이다. 반복적인 무늬와 색채가 돋보이는 채전(彩氈), 금빛 용을 그려 넣은 어탑(御榻) 등은 정치하고 세련된 화가의 솜씨다. 원본을 거의 그대로 옮겨 그리는 초상화 모사의 전통을 생각해 볼 때 1688년, 숙종 시기 어진의 품격 또한 유추할 수 있다. 

어진 제작은 지금의 사업추진단이나 집행위원회 격인 한시적 조직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진행한 큰 사업이었다. 그런 만큼 사업을 벌인 연유가 단지 ‘초상화가 낡아서’만은 아니었을 터다. 어진을 모사하기 위해 원본을 한양으로, 완성본을 다시 봉안처로 이안하는 행렬은 예를 갖춘 위엄 있고 웅장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그림 그리는 일을 넘어서는 정치적 기획이었고, 행렬을 직접 보는 신하와 백성들의 반응을 의식했을 거라는 이야기다. 창업군주의 위엄을 빌어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후대 왕들의 기대를 짐작할 수 있다. 태조의 어진은 숙종과 고종이 기대했을 완벽한 왕의 초상화로 완성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는 고뇌를 가진 한 사람으로서 이성계(1335~1408)의 삶 또한 알고 있다. 그는 73년의 생애 중 왕으로 7년, 형제들의 골육상잔을 겪은 뒤 상왕과 태상왕으로 10년을 보내고 세상을 떠났다. 조선시대의 뛰어난 초상화는 사람의 외모뿐만 아니라 내면까지도 표출할 것을 요구받았다. 초상화를 통해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마주하고 성찰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적 아픔이 다 감추인 채 흠결 없는 군주의 모습으로 정좌한 〈태조어진〉은 어찌 보면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린 슬픈 초상화가 아닐까. 그 순간 정면을 직시하는 시선이 따뜻해 보인다. 눈이 마주친 듯, 과거의 유산이 말을 걸어오는 놀라운 순간이다. 세상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열일 중인 왕의 초상화 앞에서 왜인지 모를 뜻밖의 위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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