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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18)왕의 흔적이 깃든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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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 속 완주군 구이면의 태봉/해동지도

조선 왕실은 왕손이 태어나면 태(胎, 태반과 탯줄)를 태항아리에 담아 태실(胎室)에 봉안했다. 생명을 키운 태는 소중하게 다뤄져 명산에 모셨고, 왕실의 뿌리가 길지에 안착하는 것을 해당 지역에선 큰 영광으로 여겼다. 

 그 흔적은 우리나라 곳곳에 태봉산을 비롯하여 태실과 태봉(胎峯) 그리고 태장 등의 지명으로 남아있는데, 완주 구이면에도 태봉과 태실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훼손되었다가 전주 경기전으로 옮겨지기 전, 예종의 태실이 모셔진 곳이었다. 

 태는 어머니와 태아를 연결하는 신성한 의미로 여겨 민간에서도 불에 태우거나, 물에 띄워 보내고 땅에 묻는 방식으로 처리하였다. 태를 땅에 묻는 관습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와 『세종실록지리지』에 김유신의 태를 묻고 제사를 지낸 태령산(胎靈山)에 관한 기록이 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태를 묻는 관습이 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사이에 시작되었으며, 중국에는 없는 우리 고유의 풍습이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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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태봉도/사진제공 문화재청

 왕실에서는 안태(安胎) 의식을 철저하게 시행하며 의궤로 제작했다. 의궤의 기록과 그림을 통해 규모와 모양 제를 지낸 상황을 접할 수 있다. 태를 백자항아리에 넣어 산실 안에 미리 보아둔 좋은 방향에 안치하고, 정결한 물로 씻는 세태(洗胎)의식을 행했다. 태를 묻을 석실을 먼저 만들고 큰 항아리에 태를 넣은 작은 항아리를 담아 석실에 묻었다. 이중으로 봉한 항아리를 돌함에 넣어 태의 주인과 묻은 날짜를 쓴 태지석을 석실에 함께 넣어 안장했다. 

 조선 시기에는 태실 조성에 좋은 땅을 미리 찾도록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를 지방에 파견하였다. 태실 후보지를 찾아 전국을 다닌 태실증고사는 그 길함의 정도에 따라 후보지를 세 등급으로 나누어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 왕위 계승 가능자인 원자와 원손은 1등 태봉에 왕비 소생인 대군과 공주는 2등 태봉, 후궁 소생인 왕자와 옹주는 3등 태봉에 태를 안치했다. 

  태실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하면 태실 주변에 난간석과 비석 등을 새로 조성하는 의식인 태실가봉(胎室加封)을 했다.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주변을 금지 구역으로 정하고 금표(禁標)를 세웠다. 왕의 태봉은 1등급으로 300보, 대군의 태봉은 2등급으로 200보, 왕자의 태봉은 3등급으로 100보로 정하였다. 

 금표 안에서는 나무를 벌목하거나 농사를 짓는 행위를 금하였으며, 금지 구역에 속한 집이나 밭은 보상해주고 철거하였다. 태봉은 명당으로 알려져 조상 묘를 쓰려는 시도가 많아 태실 관리를 위한 ‘태봉지기’를 선발하여 철저하게 보호했다. 이를 어길 시에는 엄하게 처벌했을 뿐 아니라, 태봉의 관리를 소홀히 한 태봉지기와 지방관도 함께 벌하였다.

 그러다, 금표로 인한 불편과 관리 비용을 지역에서 부담하는 등의 폐단이 생기자 영조는 “대궐 내 정결한 곳에 장태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로 인해 성종의 태실은 창경궁에 모셔져 있다. 왕실의 태실은 국운과 연결해 정성껏 관리했으나, 일제강점기에 들어 훼손되게 된다. 1928년부터 1930년에 걸쳐 조선총독부는 조선 왕조의 정기를 훼손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과 태실 유물 수탈을 위해 전국에 산재한 태실을 모았다. 전국의 왕과 왕실 가족의 태실 54기가 발굴되어 유린되었고, 이후 서삼릉으로 옮겨갔다. 일제에 의한 뼈아픈 조선 왕실의 훼손 흔적이 서삼릉에 모여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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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릉 태실/사진제공 문화재청

 구이면에 자리했던 예종의 태실과 태실비는 1578년(선조 11년)에 이어 1734년(영조 10년)에 거듭 고쳐 봉안되었다. 예종의 태실 조성이 늦어진 것은 예종이 왕자로 태어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수양대군의 둘째 아들로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해양대군(海陽大君)에 책봉되었다. 2년 뒤에 형인 의경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왕세자가 되었다. 

 1460년 그의 나이 11세에 16세의 한명회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는다. 다음 해, 예종은 인성대군을 얻어 조선 국왕 중 최연소 아버지로 기록된다. 하지만, 세자빈이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들마저 잃는 비운을 겪었다. 그리고는 왕위에 오른 지 1년 3개월만인 1469년 의혹을 남긴 채 2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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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대왕 태실과 비

 예종의 태실과 태실비는 전주 경기전으로 1970년에 옮겨 자리해 있고, 태실 유물인 태항아리는 국립고궁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나누어 소장되어 있다. 자손에게도 업보를 남겨주고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의 태실은 어디에 자리했을까. 세종의 왕자이니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죽은 금성대군 안평대군 등 형제 태실은 물론이고 단종의 태실이 있는 성주에 함께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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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의 태항아리와 태지 유리건판=국립중앙박물관

 흔적만 남은 구이면의 태실마을에는 태봉의 이름을 지닌 야산을 비롯하여, 태실교와 태봉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왕의 태실이 있던 명당으로 소문나서 인지 길가에는 “불법 묘지 조성을 절대 반대합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외지인의 소유가 되어버린 태실 자리 초입에는 “이곳은 조선 8대 예종의 태를 묻었던 곳으로 태실이라고도 한다”는 낡고 작은 안내판이 그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깊어가는 가을, 귀하게 모셔졌으나 무상한 세월에 그 주변은 쓸쓸함만이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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