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천지’편에는 자공이 남쪽을 여행하다가 한 노인을 만나 나눈 이야기가 있다. 그 노인은 물동이를 안고 우물 속을 오르내리며 물을 길어 밭에 붓고 있었다. 힘만 들뿐 성과는 뻔했다. 자공은 도르래와 지렛대로 두레박을 쓰면 훨씬 수월할 것이라며 권유했다. 그러자 노인은 말한다. “기계가 있으면 기계로 할 일(機事)이 생기고, 그 일이 쌓이면 기계에 기대는 마음, 곧 기심(機心)이 생긴다. 그렇게 되면 마침내는 순백한 마음이 온전하지 못하고, 정신(神)의 생성이 안정되지 못한다.”
이 짧은 대화는 기술사용에 따른 사람의 마음과 태도를 잘 나타낸다. 이 대화에서 기심이란 단순히 도구를 사용하는 태도보다 더 넓게 해석한다. 계산, 효율, 통제, 성과를 우선으로 삼는 습관적 사고까지 포괄한다고 본다. 세상의 일과 방법을 관계의 장이 아니라 조작 가능한 효율 만능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하여 노인의 말을 빌려서 경계한다. 그런데 장자에서 경계한 것은 편리함이 아니라, 편리함이 가져오는 심성의 방향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AI라고 하는 사회기술 ‘두레박’을 쓰고 있다. 여기서 알고리즘은 판단을 보조하고, 데이터는 결정을 빠르게 하도록 돕는다. 의료, 금융, 교육, 예술에 이르기까지 AI는 인간생활에 깊숙이 들어 왔다. 편리해진 것은 분명히 진보다. 그러나 지나치게 의존하면 사고의 근육이 약해지고, 책임 감각도 흐려진다. AI가 추천한 것을 의심 없이 따르고, 자동화된 평가를 객관적이라 믿으면, 우리는 기심의 체계 안으로 서서히 끌려 들어가는 꼴이다. 효율은 커지지만 성찰은 줄어든다.
이에 맞서는 태도를 인심(人心)이라고 보자. 이는 인간의 숙고와 공감을 중심에 두는 마음이다. 인간 중심의 독선이 아니다. 이때도 기술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속도를 즐기되 방향을 점검한다. 숫자를 참고하되 그 의미를 질문한다. 인심은 자동화의 흐름 속에서 잠시 서서 묻는 힘이다. “이 결정이 우리를 과연 더 인간답게 만드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기심과 인심은 적대가 아니라 긴장 속에서 이뤄내는 균형이다. 기술을 요모조모로 쓰지만 마음의 주권은 꼭 움켜주고 있어야 한다. 기계를 다루되, 기계에 마음을 맡기지 않도록 훈련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AI는 인간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인간성을 확장하는 매개가 된다. 땀을 뻘뻘흘리며 우물을 드나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물을 길어 올릴 때 갖는 마음의 방향이다.
여기서 인심이 뜻하는 바는 AI윤리에 닿는다. AI 윤리는 따라서 기술 통제의 목록이 아니라 마음의 훈련이어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기사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는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알고리즘의 결정이라 할지라도 설명하고 수정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그 다음은, 데이터와 모델의 한계를 공개하는 투명성이 필요하다. 완벽한 예측이라는 환상을 걷어낼 때, 인심이 산다. 끝으로 관계적 관점이 중요하다. 기술은 인간을 고립된 사용자로 만드는 대신, 상호 신뢰를 증진하는 매개가 되어야 한다.
『장자집석』을 펴낸 곽경번은 책 서문에서 “오늘날 기계와 기교는 두레박보다 만 배나 더 많다. 만약 장자가 이를 보았다면 어떠했겠는가”라고 개탄을 한다. 노인은 두레박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이 도구에 예속되는 상태를 우려했다. AI 역시 거부의 대상이 아니라 성찰의 대상이다. 우리는 속도를 늦추지 못하더라도, 방향을 점검할 수는 있다. 무엇을 더 많이 생산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공동체를 형성할 것인가를 묻는 태도, 기심을 넘어서서 공진화하는 윤리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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