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바람결이 싸늘하다. 근래 가장 무더웠던 여름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 겨울이 문턱까지 도래했다. 뒤엉킨 화단을 보며 내 마음도 그처럼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동안 미루어둔 정리를 시작했다.
화단의 꽃과 나무들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멋대로 번지고 뒤엉켰다. 이번엔 모두 걷어내고 대신 그 자리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기로 했다. 우리 집 화단은 비록 소나무들이 좋아하는 넓은 공간과 햇빛, 바람길을 갖추지 못했지만, 나는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듯 공간을 넓히고 흙을 채웠다. 땅이 조금 넓어졌을 뿐인데 마음도 함께 넓어진 것 같았다.
며칠 후 소나무가 도착했다. 세월이 비틀어 놓은 흔적을 고스란히 품은 적송이었다. 천연기념물 제290호 자목(子木)이다. 가지는 곧지 않았지만, 용트림하듯 굽은 선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그 굽음은 모진 역경을 버틴 세월의 증거처럼 보였고, 내 삶과도 많이 닮았다.
우리 삶도 이렇게 비틀리며 방향을 잡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날 이후 화단 기운이 달라졌다. 좁았던 공간이 넓은 정원처럼 느껴지고, 흙냄새가 은근히 코끝을 유혹했다. 햇살은 소나무를 중심으로 반짝였고, 그늘이 단정하게 드리워졌다. 바람이 굽은 가지 사이를 스쳐 지나며 솔 향을 흩뿌렸다. 화려한 꽃 대신 푸른 침엽이 자리를 지키자, 공간 전체가 차분하고 묵직해졌다.
나무 한 그루가 이렇게 집안의 표정까지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어릴 적엔 소나무가 흔한 나무라 여겼다. 사계절 내내 푸르고, 어느 산에서나 볼 수 있고, 특별할 것도 없이 그저 흔해빠진 존재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세월을 지나며 사철 모진 비바람과 뜨거운 해볕, 그리고 차가운 눈보라를 온전히 견디며 빛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자체가 말 없는 삶의 언어라는 것을 알았다. 소나무는 햇빛을 향해 자신을 비틀고, 바람을 피하듯 가지를 눕힌다. 그 굽음은 억지가 아니라 순응이다. 굽어서 하늘을 품고, 비틀려 땅에 닿는 모습은 세상살이의 태도와 닮았다. 누구나 곧게 살고 싶어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우리를 어느 방향으로든 휘게 만든다. 그 굽음 속에서 우리는 견디며 법을 배우고, 다시 일어서는 힘을 얻었다.
소나무의 껍질은 거칠고 따뜻하다. 세월의 켜가 쌓여 갈라진 틈마다 송진이 맺혀 호박빛으로 반짝인다. 상처가 많다는 것은 오래 견뎠다는 증거다. 굽은 가지와 갈라진 껍질이야말로 나무가 지나온 세월을 말해주는 언어다. 비 오는 날이면 잎사귀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묘한 위안을 준다. 삶은 완벽한 직선이 아니다. 굽은 선이기에 품을 수 있는 하늘이 있다. 굽은 가지가 들려주는 미학은 언제나 내 삶을 돌아보게 한다. 나는 오늘도 소나무 가지 아래서 삶의 길을 다시 배운다.
Δ윤철 수필가는 김제에서 태어나 공무원으로 정년퇴직을 했다. 전북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종합문예지 <표현> 편집위원, 전북협 이사, 에세이스트작가회 이사, 행촌수필문학 이사직을 맡았으며 저서로 수필집 <칸트에게 보내는 편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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