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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신춘문예 작가들이 추천하는 이 책] 박복영 작가-박경원 ‘등잔’

가깝기 만한 시간들, 멀기 만한 그리움

책 ‘등잔’ 표지/사진=독자

짧은 인연 그리고 긴 이별. 이것이 내가 만난 박경원 시인과의 인연이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이 차령문학에 원고 청탁을 받고 발표한 시간이 전부였다. 박경원 시인이 199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2001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기까지 우리의 인연은 닿을 수 없는 거리가 있었다. 

 슬프다. 유고 시집을 받고 읽으면서 왜 시 편편마다 아픔이 서려 죽음을 예고하는지 가슴이 저렸다. 짧은 시간은 가까웠는데 그리움은 아직 멀었다

   세상

   모든 어둠들의 고향이

   그 곳엔 있다 했습니다

   등잔불 밑

   깊은 졸음의 누이와

   일찍 잠들면

   눈썹이 희어질 탈고 안 될 전설이

   그 곳엔 있다 했습니다

   더 깊이 어두워져야

   더 맑게 떠오를 태양과

   누군가 고운 새 신처럼 닦아놓은

   달력의 첫 이야기들이

   그 곳엔 있다 했습니다

   문은 잠그지 않아도 됩니다

   발소리를 지우며 다녀갈 검은 복면의 꿈들도

   새벽이 되면

   푸른 길몽으로 바뀔 그곳, 오늘은

   바로 그대가 그대의 낡은 이름으로 돌아와

   청노새 하나 갈아타고 떠날

   그리움의 맨 마지막 날이기 때문입니다

                                    ㅡ (「그믐 전문」)

   가고픈 꿈이 있다면 어디를 꿈꾸었을까요? 먼 추억의 집으로 시인은 발걸음을 옮깁니다.

 일찍 잠들면 안되는 전설이 있는 곳, 꿈속에서 만나고 싶어 했던 이야기들은 이미 달력의 

 첫 이야기들이 되었네요. 더 깊이 잠들어야 만날 고향의 아이들과 소문들이 아직은 바람으    로 떠도는 곳이지요. 누군가 꿈속에서든 찾아오라는 귀엣말로 문은 잠그지 않습니다. 다      녀갈 사람들과 이야기들의 꿈. 깨어나면 허전함보다는 푸른 길몽이 환한 햇살을 비출 것만    같은 곳이지요. 그대가 비로소 돌아온 후에야 청노새 타고 떠날 그리움처럼. 그 마지막 날    에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요?

   고향의 그리움이야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니 하나쯤 안고 살아가는 게 현대인의 고통    이라면 고통이겠지요. 시인은 수원에서 소설가의 꿈을 키우다 준기(현 수원시협 회장)형의     조언으로 시인의 길을 걷게 되었지요. 유난히 담배를 좋아했던 시인은 담뱃불 같은 열정을    시 속에 햇살 환한 추억의 집을 풀어 놓고 연기처럼 사라졌지요. 어느 날 받은 부고는 또     하나의 시인을 잃었다는 것 뿐.

   시인은 이미 죽음을 예고하고 있었지요. 단편적으로 시 속으로 들어가 보면 나비, 먼지,     흰빛, 햇빛 등 많은 시어들을 쓰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알지 못했지요. 얼마나 아픈 생각들    이 시인을 고뇌 속 갈림길에 서게 했을지 짐작이 가지요. (「먼지사랑」)을 보면 추억은 시인    의 자폐적 감성마저 순수한 먼지에 의해 “사랑해”라는 말로 흐려지지요. 하고픈 말을 다 하    지 못하고 그리움과 함께 청노새를 타고 떠나간 시인이어서 아팠지요.

    

   휴식에 든 산은 무겁다

   잎새 몇 개로 구름의 행방을 짐작하던

   골짜기도 긴 잠의 거름을 삭인다

   서로의 관계를 내줘야 더 푸르게 다가온 계절들

   곧고 단단한 힘으로 성장의 마지막 부피를

   늘이던 것들이 뜨거운 숨을 몰아쉬고

   오늘은 문득 마음의 한 끝이

   이월, 혹은 베티쯤의 나무들을 헤아리게 됩니다

   그 곳을 넘어올 거대한 봄을 생각하면

   마음은 벌써 제비꽃이라도 환생하고 싶어집니다

   그게 산이겠지요 오늘은 문득

                                 ㅡ (「칩거 전문」) 

  산, 그리고 정처 없는 구름과 휴식, 환생하고 싶은 마음과 산이라는 말은 산에 들고 싶어하는 시인의 심리적 작용이 시어에 숨어 있다고 생각했지요.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자신을 비우는 일일 것이니 천천히 비워놓고 간 짧은 시인   의 생이 쓰네요. 외로이 홀로 걸었을 길에 동행이 되지 못한 아픔이 있어 이 시집으로 세상   의 끈을 놓고 청노새타고 타박타박 떠나가길 바라네요. 영원한 칩거에 들기를 기원하면서요.   박경원시인의 시어들이 아직 가슴을 찌르네요. 아마 오랫동안 우리 생의 추억을 깨우쳐 줄까요?

박복영 시인은

1997년 월간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201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 2015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는 ‘작가의 눈’ 시 작품상과 여순10·19평화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시집 <아무도 없는 바깥> 등 6권과 시조집 <그늘의 혼잣말을 들었다> 등 2권이 있으며, 현재 전북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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